성경강해

<聖經> 데살로니가후서3:1-18

<題目> 기도 부탁과 마지막 권면

 

<序言>

  본 장은 실제적인 교훈이 언급된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현실 생활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근면하게 살아서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기도 부탁(1-2절), 교인들을 향한 확신과 간구(3-5절), 종말에 가져야 할 생활실천(6-15절), 평강 기원(16-1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기도 부탁 (1-5절)

 

  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일행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종종 교인들에게 자기를 위한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1-2절, 롬15:30-31, 엡1:19-20, 골4:3, 살전5:25).  바울은 소명감이 투철하고 지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기도 후원이 없으면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중보기도를 요청한 것입니다.


  첫째는 주의 말씀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절). 바울과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널리 퍼져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현재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고린도에도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져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절).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모두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신하고 반대하고 대적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 사역에는 언제나 사탄이 악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에서 지켜 달라고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실로 복음 전도 사역에는 많은 사람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목회 현장에서도 사역자는 많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방해와 공격을 받습니다. 교인들은 거기에 이용당해 함께 비난하거나 대적하면 안되고 사역의 열매를 위해 대적자들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교인들을 향한 확신과 간구 (3-5절)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주는 미쁘사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3절). '미쁘사'(πιστοs)는 '믿을 만한' '신실한'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한 속성을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언약관계에서 성도를 대함에 있어 신실한 분입니다.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교훈에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하게 해주시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하는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과 일행이 명한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4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종말론에 대한 오해로 문제점을 노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바른 교훈을 대체로 지키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지킬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확신한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곧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 구원 사역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온전함이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온전함에 근거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확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5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교훈을 따라 살려는 의지를 가져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안될 줄 알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인도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마음'(καρδια)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와 의지를 결정짓는 기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예수님께서 구원사적 목적일 이루기 위해 모든 박해와 고난을 견디신 것을 말합니다.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적 목적을 위해 끝까지 견디는 인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덕목입니다.  

 


         3. 종말에 가져야 할 생활실천 (6-15절)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고 했습니다. 게으르게 행하고 바울 자신과 일행에게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6절). '전통'(παραδοσιs)은 바울이 가르쳐 준 교훈을 말합니다. 종말론의 오해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떠나고 바울이 가르친 바른 교훈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그런 가운데 있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본을 보였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과 일행을 어떻게 본받아야 할지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7절). 바울과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7절下). '우리가~무질서하게 행하지'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타크테오'(ατακτεω)는 '무질서하게 행하다' '불규칙적으로 행하다'는 뜻으로서 바울과 일행이 불규칙적으로 행하지 않고 일관되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일행이 일관되게 행한 것은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8절).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다'는 말은 한끼 식사를 값없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계를 대가없이 유지하지 않았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주야로 일을 하는 수고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2:9에서도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고 했었습니다. 바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고린도에서는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8:3에 보면 고린도에서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스스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본을 보여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 자신과 일행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9절). 바울과 일행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복음 전도의 대상자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사례를 받아서 생계를 유지할 특권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일해서 생계를 유지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갔을 때에도 직접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고린도전서9:7-14에 보면 바울이 자신도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일반적인 예로 근거를 들었습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군대에서 복무하는 사람은 군대에서 숙식과 수당을 제공받습니다. 당시 군대는 징집제가 아니라 모병제의 상황이었습니다. 모병제 상황에서 자기 돈을 들여서 군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숙식과 급여를 받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자나 목장에서 일하는 자가 자기 돈을 들여서 봉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20:6). 둘째, 모세의 율법을 예로 근거를 들었습니다.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25:4).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소를 위함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곧 사역자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자나 곡식을 떠는 자나 모두 먹을 것을 얻을 소망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자는 마땅히 일을 시키는 자들로부터 먹을 것을 제공받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5:18에도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고, 디모데후서2:6에도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을 뿌렸으니 마땅히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고 영혼이 자라게 되었으니 그들로부터 육적인 생활비를 받는다고 해서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15:27에도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고, 갈라디아서6:6에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전 봉사자들의 예로 근거를 들었습니다. 성전 봉사자들은 성전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제단에 드려진 고기나 떡을 먹었으며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관리와 제사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일을 할 수 없었고 그러기에 백성들이 드린 것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민18:8-9, 신18:1-4, 레7:6,14, 10:12-15). 넷째, 예수님의 교훈을 예로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10에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고, 누가복음10:5-7에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복음전도자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 먹을 것을 제공받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 어떤 의미로 보든지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포기하고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9:12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선교사역의 초기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위에서 제시한 원리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령한 일을 하는 자는 육신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이 잘 받아 들여지고 가르친 진리의 말씀이 잘 세워지게 하기 위해 그 권리들을 포기한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 포기한 것이고 복음의 효과를 위해 포기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의 열매를 위해 포기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권리를 포기한 이유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고전9:12) 본서에서는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살후3:9).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10절).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이 먹을 것은 자신이 일해서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은즉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1절).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로 여행을 온 사람들로부터 들으니 아직도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주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오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업에 전념하지 말고 주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생업을 위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업에 전념하지 말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설득하여 다른 사람들까지도 생업에 전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게을러 일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됩니다. 12절에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했습니다. '조용히'의 기본형 '헤쉬키아'(ησυχια)는 '침묵' '정숙'으로서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 다른 사람까지 일하지 못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8절에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고 했습니다 (살전2:9).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다'는 말은 한끼 식사를 값없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계를 대가없이 유지하지 않았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주야로 일을 하는 수고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계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생계에 필요한 돈을 빌려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됩니다. 또한 가장이 일하지 않는 것은 가정 공동체의 다른 일원들이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니 가정 공동체 일원에게도 부담을 주는 것이 됩니다. 자녀 입장에 있는 일원도 성인이 되었는데도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가장에게 그만큼 부담을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받으려 하지 말고 자기 생계는 자기가 책임 져야 합니다. 편하고 고급스러운 일만 하려 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퇴직을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서 해야 합니다. 청년들도 부모에게 부담 주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갔을 때 보디발 집에서 종 노릇을 성실히 하여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았고 보디발 아내에게 무고를 당해 감옥에 가기는 했지만 그것이 바로 왕에게 나아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계기가 되고 흉년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룻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왔을 때 먹을 것이 없자 다른 사람의 밭에 나가 이삭을 주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에게 인정을 받아 결혼을 하게 되고 언약적 계대를 잇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생계를 유지할 때 그것이 더 나은 위치에 올라가는 계기가 생기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일하는 않는 자에게는 그런 기회 자체가 제공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15:19에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고 했습니다.


  생업에 게으른 것은 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9:12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고전9:15). 바울이 복음전도 사역을 하면서 사례를 받아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른바 소피스트들은 강연을 하고 그에 따른 돈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전도 사역에서 말씀을 가르치면서 돈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과 말씀의 가치에 대해서도 소피스트들이 가르치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과 말씀의 가치가 떨어져 복음전도 사역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랑하는 복음 전도의 효과가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곧 자기 유익을 위해 복음전도 사역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것입니다.


  더욱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일을 하지 않고 무위 도식한 것은 예수님이 재림이 임박했다는 교훈을 받고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생업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오히려 주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생계를 위한 생업에 성실하여 주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명목 하에 생업에 게을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교리를 안일과 태만과 방종의 생활을 일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방종을 신앙적인 교훈으로 합리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업이나 직장생활에서 그런 면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직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게으름입니다. 잠언10:26에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인정받지 못하므로 사업에서 일거리가 없거나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신앙인으로서 정직하게 행하기 때문에 사업이 안되고 계명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핑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게으름의 원천은 안일과 태만과 방종 하려는 부패한 죄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 자체도 악에 속한 것이지만 그 게으름을 신앙을 핑계하여 정당화하는 것도 더 큰 악행입니다. 요셉과 다니엘과 모르드개 같은 사람은 불신 사회에서도 성실히 일하여 불신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수입이 적은 것은 악이 아닙니다. 하지만 게으른 것은 악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이 개인에게 주려는 행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일해서 자기 먹을 것을 얻고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복음전도 사역에 쓰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포함되는 신앙 정신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바울은 편지를 마감하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3절). '선'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모든 일을 말하는 바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 되는 일들을 말합니다 (롬7:21, 고후13:7, 갈6:9).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종말론에 관한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선한 일을 선택하여 살기를 원하고 도중에 실족하여 약해지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옳게 살아가다가도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득세하거나 옳게 사는 자들이 지속적으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실족하기 쉬운데 그런 상황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옳게 살아가기를 원한 것입니다.


  누가 바울이 편지를 통해 한 말을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했습니다 (14절). 바울은 주님의 뜻을 따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교훈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훈을 따르지 않고 부정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의 행동을 주목하고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하지 말고 그들로 스스로 부끄럽게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원수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15절). 비록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들과 교제는 하지 말되 그들을 원수처럼 여겨 공동체에서 쫓아내지 말고 한 공동체에 속한 지체로 생각하여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8:17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고, 고린도전서5:13에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권면을 듣지 않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는 출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출교를 목적하지 말고 골동체의 일원임을 생각하여 사랑으로 근실히 권면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 평강 기원 (16-18절)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데살로니가 모든 교인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 (16절). '평강'(ειρηνηs)은 히브리어의 '샬롬(שלום)입니다. 에이레네는 평안과 화목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평안의 의미로 사용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안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서 자유케 하시므로 주시는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터득하는 자에게 근심과 염려와 불안을 없게 해 주시는 평안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삶에서 환난과 시련과 고통에서 안전을 보장해 주는 평안을 말한 것일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모든 때에 있어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했습니다. 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므로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보증입니다. 마태복음28:20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히브리서13:5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끝으로 친필로 문안한다고 했는데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쓴다고 했습니다 (17절). 바울은 편지를 쓸 때 빌레몬서와 같이 짧은 내용의 편지는 전문을 바울 자신이 직접 썼지만 대부분의 편지는 대필자를 통해 쓰게 하고 끝 부분만 자신의 필체로 썼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이 직접 쓴 편지라는 것을 표시하므로 위조된 편지와 구별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위조된 편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2:2). 거짓 교사들이 사도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위조한 편지를 발송하는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교회들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이 바울의 편지임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도록 표시하기 위해 끝 부분에 친필로 문안을 한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있을지라고 했습니다 (18절). 바울 서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마지막 축도로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 중 한 사람도 주의 은혜에서 제외되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자의 바른 심정인 것인 것입니다.

 

<結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종말론에 대한 오해로 방종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쳤던 바른 교훈을 상기시키면서 핍박 가운데서도 주님의 위로가 있을 때까지 인내하여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했고 주님 오실 때까지 생업에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했습니다. 종말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하루 하루를 인내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