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가복음1:1-45

<題目> 세례 요한과 예수님

 

<序言>  

   본서는 베드로의 제자 마가(Mark)A.D.67-70년 사이에 기록한 책입니다. A.D.64년에 로마의 대화재 사건 이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집중적으로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까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로마에서 바울의 사역을 대신하면서 베드로에게 들은 내용을 근거로 로마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인내의 신앙으로 굳게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본서는 유대인들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관습이나 용어 등을 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되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기록했습니다. 그런 특성 때문에 우리는 마태복음을 왕 복음으로 마가복음을 송아지 복음으로 누가복음을 사람 복음으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으로 말하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마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종 이미지가 부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마침내 부활 승천하셔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므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의 신앙을 가지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1장은 마가의 기록 목적에 맞도록 타 복음서들에서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탄생 등을 기록하지 않고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기록한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기록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 세례 요한의 등장과 메세지를 언급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세례 요한의 사역(1-8), 예수의 수세(9-11), 예수의 광야 시험(12-13) 예수의 초기 갈릴리 사역(14-45)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세례 요한의 사역 (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아들'(υιοs του θεου)은 예수님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이 보낸 자임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히브리적 관념에서 볼 때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분임을 나타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얼굴이 같고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는 자이며 아버지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을 가진 분이며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권세와 능력을 위임받은 분이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Ιησου)는 구약 히브리어 여호수아(יהושוע) 예수아(ישוע)의 헬라어 음역으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1:21에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Ⅹριστοs)'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의미상 구약성경에서 오시리라 예언된 구원자(משיח)라는 뜻입니다. '복음'(ευαγγελιον)'좋은 소식' '기쁜 소식'으로서 구원자가 오셨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2-3). 이는 출애굽기23:20 모세의 글과 말라기3:1 말라기의 글과 이사야40:3 이사야의 글을 같이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 선지자를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구원자가 오기 전에 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사역을 할 선지자가 오기로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군주가 행차할 때 길을 닦아 정비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교육하고 군주의 숙식을 준비하는 풍습을 연상시킵니다. 세례 요한이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죄를 회개시키는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3~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오지 않다가 세례 요한이 나왔습니다. 구약 선지자적 과제가 이미 다 성취되어 끝나서 구원자가 올 때까지는 선지자가 나올 필요가 없었고 이제 구원자가 와서 사역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므로 그 준비를 해야 할 선지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 장소는 광야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광야'(ερημοs)는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으로서 황량하고 고독하고 무서운 땅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했던 곳은 유대 광야로서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는 사해, 북쪽으로는 얍복강과 요단강의 합류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이 광야는 석회질 암벽과 바위와 자갈로 되어 있는 황폐한 불모지로서 뱀들이 많고 야수들이 출몰하는 지역입니다

 

   세례 요한의 의식은 청빈생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로서 부요한 계층에 속한 자였으나 스스로 사역을 위해 광야에서 청빈생활을 한 것입니다. 6절에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했습니다 (3:4).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지내면서 입은 복장은 낙타털 옷이었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낙타털 옷'은 낙타털로 짠 옷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볼품없는 옷이었습니다. 그 옷은 바람이 불거나 달려갈 때는 펄럭거렸기 때문에 가죽 띠로 허리를 동였습니다. '메뚜기'는 작은 곤충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재해로 소출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대용식품으로 먹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은 이 메뚜기의 다리와 날개를 잘라버린 후 굽거나 튀기거나 소금에 절였다가 식품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석청'은 야생 벌꿀을 말합니다. 바위틈에 벌들이 집을 짓고 꿀을 저장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메뚜기와 석청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었습니다. '메뚜기'를 곤충 메뚜기로 보지 않고 쥐엄나무 열매로 보는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은 메뚜기를 아르브(ארבה)라고 하는데 쥐엄나무도 아르브라고 한다고 합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콩깍지처럼 생겼는데 탕자 이야기에서도 나오듯이 극빈자들이 먹거나 극심한 흉년 때에 먹는 대용식품입니다. 요한이 먹은 야생 꿀이라는 것은 그 쥐엄나무 열매라는 것입니다. 또한 '석청'이라는 야생 꿀도 벌꿀로 보지 않고 종려나무 열매로 봅니다. 세례요한이 있었던 광야에는 꽃들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벌도 없고 벌이 없으니 벌꿀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3종류의 꿀, 곧 벌꿀과 쥐엄나무꿀과 종려나무꿀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꿀이 종려나무꿀(시럽)이라고 합니다. 종려나무 열매는 매우 달고 영양이 있습니다. 광야에 간혹 나 있는 종려나무에서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바윗 틈에 끼어 있게 되는데 요한이 바로 그것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세례 요한이 극빈자가 먹는 최소한의 음식을 먹으면서 사역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회개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세례'(βαπτιζω)는 물로 씻는 의식인데 이는 죄 씻음에 대한 상징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 죄를 회개한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회개'(μετανοια)는 마음의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구약에서 약속한 구원자를 맞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을 떠났던 생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설교했고 죄를 회개하여 자복하는 자에게 세례를 준 것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5).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당시 유대교의 주류에 속했던 의식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자유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 그리고 약탈을 일삼는 군인들과 세금을 늑징하는 세리들도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3:1-12, 3:7-14). 그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듣고 충격과 감동을 받아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가 진정한 결단이었다는 것은 요단강에까지 가서 세례를 받은 사실로 증명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요단강까지의 거리는 적어도 32km 이상되는 곳이고 예루살렘은 요단강에 비해 지대 높이가 1200m나 됩니다. 그들은 그 먼 곳에서 거친 언덕을 넘어 요단강까지 나아온 것입니다. 더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는 오르막길이라 더욱 힘든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메세지는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7절에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자기 뒤에 자기보다 능력이 많은 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데 자기는 자기를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는 것입니다.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은 구속주로 심판주로 오실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3:1, 4:1). 그에 대해 자기를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한 것은 자신은 그 분의 종이 되기도 부족한 자라는 표현입니다. 당시에는 주인이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종은 그의 신발끈을 풀어 신발을 벗기고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청빈생활과 설교능력 때문에 광야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는 요한이 능력이 많은 사람이란 소문이 만연해 있었고 혹시 그가 구약에서 말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1:19-20, 3:25-36). 요한은 그런 오해와 관련하여 자기는 뒤에 오실 구원자의 종이 될 수도 없는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했습니다. 요한 자신은 죄를 회개하게 하여 정결케 된 표호로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근본적으로 대속하고 그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어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내주와 역사로 인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을 가지고 광야에서 청빈생활을 하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해야 합니다. 빌립보서4:11-12"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고 우리는 없어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1:23). 요한복음3:30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2. 예수의 수세 (9-11)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9).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잠깐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북방으로 120km 지점에 해발 약 488m의 구릉지의 분지입니다. 그리고 대략 30세 때(A.D.29년 경, 3:23)에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본 단락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입니다 (1,8). 그런데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3:14-15"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모든 의'는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오기 직전에 모세나 엘리야 같은 한 선지자가 나와 구원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18:15, 7:37, 40:3).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 주시기 전에 회개 사역으로 준비하게 할 선지자를 보내 주실 것으로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사역이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임을 인정해 주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둘째는 죄인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구속주로서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분으로서 죄가 없는 분이지만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로서 죄인과 같은 연약한 인성을 가진 분임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고후5:21). 뿐만 아니라 그 인성을 체휼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4:15).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에서 '물에서 올라오실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표현은 예수님이 요단강에 들어가 물을 껴 얹는 세례(滴水洗禮) 의식을 모두 마치고 육지로 올라온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침례(侵水洗禮)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물 속에 잠기게 했다가 몸이 물 속에서 올라온 때를 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침례만을 절대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과 방법을 절대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洗禮)의 헬라어 '밥티조'(βαπτιζω)'뿌리다' '씻다' '정결케 하다' '담그다' 등의 여러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영적 정화와 갱신을 말할 때 물을 '뿌리다'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29:16, 8:7, 19:3, 18-20, 51:7, 36:25, 9:10,13). 그리고 누가복음11:38처럼 '씻다'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나 베드로가 오순절에 회심한 3,000명에게 세례를 주는 사건이나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는 사건이나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나 바울이 간수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생각해 보면 방식이 침례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3:16-17, 2:41, 8:37-39, 9:17-19). 사실 당시 방식이 어떤 형태였든지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방식에 있어서는 어느 한가지만 고집하면서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의식은 모두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했습니다 (- 예배, 절기, 악기, 임재, 은사). 오늘날에도 시대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 성찬). 요한이 주는 세례는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 새롭게 되는 표호로 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세례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에게 거듭남의 표호로 주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 세례의 의미는 변할 수 없지만 그것을 상징하는 의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들은 대부분 신앙고백을 하므로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영적인 의미에서 가치관이 변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헙니다. 고린도전서10: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 했고, 누가복음12: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자기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심을 보셨고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10-11).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그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했으나 누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그 같은 현상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3:21). 그 때 일어난 현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늘의 갈라짐이 있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렸다고 했으나 마가는 하늘이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자연계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을 말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임은 분명합니다 (64:1).


   둘째,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했다고 했습니다 (3:22). 성령 임재의 표상을 비둘기 형상으로 보이신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서 온순하고도 친근한 조류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령이 임하신 것을 보여 주신 것은 예수님께 능력으로 함께 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효과있게 해 주실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리라 약속하신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61:1, 4:18).


   셋째,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 음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구원자임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을 가진 자이고 아버지의 귄세를 가진 자이고 아버지의 사역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계획한 구속 사역을 실현할 자로 인정하고 선언하고 증명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이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땅 위에 계시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성부 하나님은 음성을 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분이지만 세 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말합니다. 삼위(三位)'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불립니다. 각 인격적 특성에 의해 성부 하나님을 1위라 하고, 성자 예수님을 2위라고 하고, 성령 하나님을 3위라고 합니다. 그 순서는 권위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질서에 의한 순서입니다. 세 위()는 개별적으로 완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위는 서로를 떠나서는 존재지 않습니다. 세 위는 전체인 하나를 이룹니다. 삼위일체의 증거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암시되었고 예수님의 탄생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더욱 확실히 나타났습니다 (1:26, 11:7, 8:3, 1-2, 2). 그리고 본 단락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세 장면에 잘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별강화와 예수님의 대명령과 사도의 축복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3:21-22, 14-16, 28:19, 고후13:13).


   삼위일체 교리에서 벗어난 이론은 삼신론과 일신론이 있습니다. 삼신론(三神論)은 삼위(三位)를 세 신적 존재로 보고 세 신(三神)으로 만든 경우입니다. 일신론(一神論)은 성부를 하나님으로, 성자를 인간으로, 성령을 신적 능력으로 보아, 성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경우입니다. 성자에 대해서는 그가 선재한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성령에 대해서는 그가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m)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양자'(養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원래 아들이 아닌 사람을 아들로 받아들인 입양자를 말합니다. 양자론은 원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이 아들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한 사람으로 거룩하게 독실한 삶을 살았는데 하나님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아들로 삼아 특별히 그에게 거하고 그에게 능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선재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이른 바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 있습니다. 삼위(三位)를 세 가지 형태의 현현(顯現)으로 보는 경우입니다. '양태'라는 말은 한 형태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양태론은 한 하나님이 시대마다 달리 나타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곧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으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으로, 교회시대에는 성령님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이 다른 세 개의 얼굴(형상, persona)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태양이 하나이지만 본체와 빛과 열이 있다는 설명이나 물이 액체와 고체와 기체로 변한다는 설명이나 한 사람이 아버지와 목사와 교수로 불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도 일신론에 속한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예를 인간 세계에서 찾으려 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구원하시고 성령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도록 예수님이 중보하시고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요일2:1, 8:26).

 

 

        3. 예수의 광야 시험 (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12). 이 광야가 어디인지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세례 받은 곳과 멀지 않은 유대 광야 여리고 근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가의 성령께서 몰아내셨다는 말은 마태와 누가는 성령께 이끌렸다고 했습니다 (4:1, 4:1).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역동적으로 감동시키심에 호응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있었고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 (13).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했다고 했습니다 (4:2, 4:2). '40'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거기에 거한 기간이며 (34:28),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광야에 거한 기간입니다 (왕상19:8). 그들도 그랬듯이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는 기간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준비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언급을 한 것은 들짐승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들짐승들이 있는 광야에 계셨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하이에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전혀 없는 고독한 곳일 뿐 아니라 들짐승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는 동안에 사탄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13). '시험을 받으시며'에 해당하는 기본형 'πειραζω'(페이라조)'시험하다' '유혹하다' '훈련하다' '증명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모든 영어성경들에서 'tempted'(템티드)로 번역한 것처럼 '유혹하다'의 의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할 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넘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은 인간의 대표적인 욕망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4:3,6,9). 예수님은 구원자로서의 공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금식기도로 준비하려 하자 사탄은 그 상황을 유혹하여 그의 결단을 실패하게 하려는 기회로 사용한 것입니다 (tempt).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4:4,7,10). 하나님은 주권 하에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 연단시키고 증명하는 계기로 활용하신 것입니다 (test, trial, prove). 사탄은 예수님을 공생애 전부터 넘어뜨리려 했지만 성령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자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습니다 (13). '천사들이 수종 든' 것은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물리친 직후였습니다 (4:11). 예수님이 욕망을 제어하여 시험을 물리치셨을 때 천사들이 음식을 제공하고 건강을 돌봐 주고 찬양과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왕상19:5-7). 

  

   우리가 마음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어떤 신앙적인 결단을 할 때 반드시 사탄의 유혹이 옵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을 자극하여 포기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유혹을 이기고 시련 가운데 연단되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 증명되기를 원합니다. 그 과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갈등과 고통이지만 승리하게 되면 더 좋은 것들로 채워지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 바로 하려 하면 당연히 사탄의 유혹이 뒤 따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사탄(마귀)가 예수님을 시험(유혹)한 방법에 대해서는 사탄이 가시적으로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유혹을 했을 수도 있지만, 사탄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 유혹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탄의 유혹은 마태복음4:11에 보면 3가지였습니다.


   첫째,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마태복음4:3에 보면 사탄이 40일 동안 금식하여 주린 예수님께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식욕을 자극하는 유혹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이 가장 잘 넘어갈 수 밖에 없는 내용으로 유혹했습니다. 40일 동안 굶주렸으니 먹고 싶은 욕망을 이기기가 가장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4:4에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8:3)고 하면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므로 시험을 이겼습니다. 사람의 육체적 생명이 떡으로 사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인생의 가치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데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도 물질욕을 자극합니다. 육체적 생명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구와 욕망을 자극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자극하여 시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렸고, 우리 인생의 추구점이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있고, 우리의 가치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다는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6:31-33"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6:24, 10:42). 마귀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당연한 욕구와 욕망을 빌미로 우리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흐려지게 하는데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 바른 목적과 가치를 흐려지게 하는 것들이면 그 어떤 것이라 해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필요한 것일지라도, 죄가 되지 않은 것일지라도, 오히려 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이 증거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마태복음4:6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입니다 (4:9). 물론 환상 가운데 세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편91:11-12을 인용하여 시험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모든 길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해발 750m 고지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기드론 골짜기로 뛰어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하면 표적을 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여 영광받으려 하는 허영과 명예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4:7에서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6:17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17:1,7, 고전10:1-10 참조). '또 기록되었으되'는 사탄이 이용했던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고 그 말씀의 오용을 지적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계시의존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도 명예심을 자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사용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얻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지 혹은 얼마나 능력있는 자인지를 나타내어 명예 영광심을 채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신뢰해야 할 대상이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할 대상입니다

        

   셋째,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마태복음4:8-9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이 산이 어느 산을 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헐몬산이라고 하기도 하고 느보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느 산이었든지 그것은 환상 가운데 데려간 곳이었을 것이고 그 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모든 영역의 것들을 다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4:6).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와 쾌락과 권세를 가질 수 있는 유혹으로서 소유욕을 자극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탄 자기를 섬기면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천하 모든 것들을 다 누리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4:10에 보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6:13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할 것은 1~3계명에 명시된 내용입니다 (20:1-7). '경배''경외' '섬김'의 의미를 포함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도 소유욕을 자극하여 넘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을 섬기면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부귀와 영화와 쾌락과 권세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것들을 모두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권한 하에 있는 것들 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들을 줄 수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유혹하여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며 나가야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한 시험의 내용은 3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두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세번째는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 였습니다. 첫번째는 물질욕으로 두번째는 명예욕으로 세번째는 소유욕으로 시험했습니다. 첫번째는 육체적인 영역에 해당하고, 두번째는 정신적인 영역에 해당하고, 세번째는 영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욕구와 욕망을 자극했으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때 점점 높은 수준으로 시험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속에 있는 죄적 욕구와 욕망을 자극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물욕과 정욕과 사욕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3:6, 요일2:16, 1:14, 3:5). 그 목적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굳게 믿고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6:17, 딤후2:9).   

 

 

          4. 예수의 초기 갈릴리 사역 (14-45)

 

   ①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이 그를 시기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계략으로 헤롯 정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4). 당시 팔레스틴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유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유대 지방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마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으킨 표적 등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을 기록하지 않고 곧바로 갈릴리 사역을 기록했습니다 (1:35~4:4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14-15).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기쁜 소식을 말하는 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을 통해 택한 백성을 죄와 그 결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소식을 말합니다. '때가 찼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아 하나님이 역사하실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드디어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되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에 대한 개념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어 거듭나고 성령와 말씀의 지배를 받는 영역, 곧 마음과 행동과 생활을 말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성도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성령과 말씀의 통치를 받는 영역, 곧 교회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를 말합니다. 셋째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첫번째 의미를 가진 말이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도 암시적으로 포함시킨 의미로 여겨집니다. '회개하고'는 복음을 받아들인 준비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메세지도 회개하라고 했고 (4, 3:2), 사도들의 메세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38). 회개(μετανοεω)는 죄를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지성적으로 죄행의 잘못됨을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죄행을 뉘우치고 의지적으로 죄행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가 있고 하나님이 시작할 구원 역사인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도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이 가까워지고 영이 생명력을 얻고 성령과 말씀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소아시아 교회들이 잘못했을 때도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5,16, 3:3,19).

 

   ②제자들을 불렀습니다.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입니다.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른 장면입니다. 그들은 모두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던 자들입니다 (1:35-39). 예수님이 그들을 부른 '갈릴리 해변'은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라고 하기도 하고 게네사렛 호수라고 하기도 합니다 (6:1,23, 21:1, 5:1). 갈릴리 바다(the sea of Galilee)는 원래 담수호이기 때문에 호수이지만 바다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길이는 약 20km, 너비는 약 12km, 면적은 약 144m, 가장 깊은 곳은 약 50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어업이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시다가 어부인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랐습니다 (16-18). '그물'(αμφιβληστρον)은 손 그물로서 원형 투망을 말합니다. '시몬'(Simon 베드로)'안드레'(Andrew)는 형제인데 예수님이 그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주역이 되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하려는 부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그물을 버려 둔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생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훌륭한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도 아버지와 품꾼들을 배에 버려 둔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9-20). 야고보(James)와 요한(John)은 아버지의 이름이 세베대였고 어머니 이름은 살로매였습니다 (10:2). 살로매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 간이었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 사촌간인 셈입니다 (19:25).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이었던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붙들러 오고 (3:21) 예수님이 고향에서 사역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이 배척한 일을 볼 때 (6:3-4) 예수님의 친척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좇은 것은 훌륭한 면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버지와 일꾼들과 배를 버려 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에서 주는 교훈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주권적으로 제자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들을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5: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다는 제자는 예수님이 택해 주셔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한 자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기까지 예수님이 책임지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선택할 때는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시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가르치고 양육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선택을 받은 자는 그 선택인 구원을 위한 소명이든 사역을 위한 소명이든 예수님의 주권적 인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낮은 계급을 제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그렇게 높이 인정받거나 존중받는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제자를 부르실 때 학자나 종교지도자나 정치인이나 관리자 등을 부르지 않고 그들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6-29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능력있는 자를 부르면 하나님 나라 사역이 잘되었을 때 자기들도 자기들 실력으로 된 줄 알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으로 된 줄 압니다. 하지만 무능한 자들을 부르면 일이 이루어질 때 순전히 하나님이 해 주신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 바울처럼 조건이 좋은 사람을 불러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건이 좋지 않은 것이 오히려 쓰임 받을 수 있는 조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소명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생애를 맡겼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와 일꾼 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삶의 근거지와 생업의 도구를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니 예수님이 소명을 주실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생명과 생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 즉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언약적 지시를 따라갔습니다 (12;1-4). 모세도 애굽의 모든 보화와 학술과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11:24-26).

 

   ③말씀을 가르쳤습니다.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쳤습니다 (21). '가버나움'(Capernaum)'나훔의 동네'라는 뜻으로 갈릴리 바다(게네사렛 호수) 서북쪽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오늘날 '텔 훔'(Tell Hum)과 동일한 곳입니다. 당시에는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며 로마 군대가 주둔했고 세관이 있어 경제 군사 행정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앞에서 부른 네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기도 하고 세리 마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을 복음전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회당'(συναγωγη)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건물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에 성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 필요에 의해 모이기 시작한 것이 회당의 기원입니다. 이 회당은 유대교를 오랫동안 존속시켜준 제도가 되었습니다. 당시 의식은 오늘날 예배 의식과 비슷하게 기도와 찬양과 성경봉독과 설교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 때 설교는 랍비(Rabbi)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주 그 회당을 복음전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예배를 위해 그 곳에 모였고 그 곳에서 설교를 할 경우 율법 강론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회당을 찾았고 그 곳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22). '서기관'(γραμματευs)은 율법사로도 번역되며 전통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적용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당대의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J. Jeremias).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용이나 논리나 능력이 신적 권위가 나타나므로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전2:4, 살전1:5).

 

   ④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23). '귀신'은 사탄과 마귀의 수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원래는 선한 천사로 창조된 자들이나 교만해진 사탄을 따라 타락하여 사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지상으로 쫓겨난 영들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영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국을 알고 자기들의 때가 얼마 안 남은 줄 알고 지상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12:12). 그들에 대해 '더러운 귀신'이라고 한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선한 의지가 전혀 없어지고 부정해졌기 때문이며 그들이 역사하는 방법과 현상이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귀신 들린 자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24). 귀신이 귀신 들린 자의 입을 통해 한 말입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하나님의 아들'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3:11, 5:7, 8:29). 귀신은 예수님이 어디서 온 분인지 누구인지 알고 자기와 무슨 직접적인 상관이 있어서 멸하러 왔느냐고 따졌습니다. 벌써 예수님이 자기들을 괴롭게 할 것을 알기 때문에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25). 더 이상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26).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은 충격과 발악을 하며 나왔습니다. 그 상황에서 귀신 들린 자가 발작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나오게 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고 했습니다 (27). 예수님의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라기도 했고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귀신이 쫓겨 가는 것 권세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 소문에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28). 그 소문이 가버나움을 뛰어 넘어 갈릴리 온 지방에 퍼졌습니다. 그것은 사역에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탄과 마귀와 귀신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것이 분하여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는 구속 사역을 어떻게든지 방해하려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대적자들을 물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그들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도 통합니다. 요한일서3:8"~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며 그가 명령하면 떠날 수밖에 없는 분인 것을 잘 알고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이 주신 권세로 악령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태복음10:1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고, 마가복음6:7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고 했습니다. ‘권능으로 번역된 엨수시아’(εζουσια)권세’ ‘특권으로서 능력을 의미하는 뒤나미스’(δυναμις)와 구분되는 단어입니다. ‘능력은 자체에 주어진 힘이지만 권세는 외부의 능력을 사용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능력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이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귀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이길 수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도 알고 떱니다 (2:19). 예수님의 이름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⑤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쳤습니다.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29).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베드로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게 장모가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30). 바울의 증거에 의하면 베드로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었고 전도여행에도 함께 다녔습니다. 고린도전서9: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에 의하면 베드로는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고 그의 아내는 전도 여행에 대동했고 그의 아내도 베드로와 함께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앞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향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라고 권면했다고 합니다 (Clement of Alex, Storm.3:6).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사제들의 독신주의(celibacy)를 주장하는 것은 베드로가 독신이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주장인데 이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갔을 때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열병은 떠나고 그녀는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30-31). 누가복음4:38-39에는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고 했습니다. '열병'은 열이 불같이 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질병에 대한 증세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풍토병과 관련된 질병으로 인하여 열이 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그 열나는 자체를 질병으로 본 것 같습니다. '누워 있는지라'(κατακειμαι)가 미완료형인 것을 보면 열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병이 떠나고 그녀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래된 질병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고 베드로의 장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쳐 줄 마음을 가졌습니다. 고침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는 사역에 헌신을 하는 은혜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반응을 한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해가 질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와서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문 앞에 모였습니다 (32-33).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 날 토요일 해질 때까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노동이나 상거래나 여행이나 오락이나 병 고치는 일 등 개인적인 일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베드로의 장모 집에 들어왔을 때는 안식일 낮(토요일 낮)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병자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가 해가 저물어 안식일이 지나자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모여 들어 장사진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고 많은 귀신 들린 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자기를 아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34). 누가복음4:41에는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오시리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24, 2:19). 그러기 때문에 귀신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귀신 들린 자에게서 떠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그 말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해서 그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직 자신의 존재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더러운 귀신들을 통해 자신이 증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귀신과 질병도 복종시킬 수 있는 분이며 우리를 귀신과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1:1-3, 4:18).

 

   ⑥기도와 전도를 했습니다.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몰려드는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주무셨는데 고단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밝기도 전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35). 하나님께 전날 사역을 점검하고, 38절에 나온 예수님의 대답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전날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것에 좋아하지 않고 자신이 그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사역을 점검하기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신 시간은 새벽이고 장소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기도하기 좋은 조용한 시간 때와 조용한 장소를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도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를 택하여 자신과 사역을 돌아보고 앞으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몬(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36-37). '뒤를 따라가'(κατεδιωξαν)라는 표현은 수색하듯이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아침에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고 열망을 가지고 찾아서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는 표현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서 그들 가운데 있어야 마땅한 예수님이 왜 홀로 한적한 곳에 나와 계시냐는 책망조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베드로의 집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다시 가지 말고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서 전도하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38). '마을'에 해당하는 '코모폴리스'(κωμοπολιs)는 마을을 뜻하는 '코메'(κωμη)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πολιs)의 합성어로서 도시같은 마을을 말합니다. 곧 성격상 농경마을의 형태를 가졌으면서도 수가 도시의 형태를 가진 도읍을 말합니다. 당시 갈릴리 상류 지역에는 땅이 비옥해서 약 200여 개의 도읍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도읍마다 사람들이 넘쳐 났다고 합니다. 가장 작은 곳이라 할지라도 인구가 15,000이 넘었다고 합니다 (Josephus).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가버나움에 그치지 않고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많은 마을로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4:43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보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 대속으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전도 사역에서 각종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 전도에 대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적을 베풀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갈릴리 지역의 도읍으로 다니면서 회당에서 전도하고 귀신도 내쫓기도 했습니다 (39). '회당'(συναγωγη)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건물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에 성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필요했습니다. 이방 지역이든 팔레스틴 지역이든 그런 필요에 의해 도읍마다 생긴 것이 회당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A.D.70년에 팔레스틴에는 회당이 480여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The Jerusalem Talmud). 그 회당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지어졌습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회당은 남쪽을, 남쪽에 있는 회당은 북쪽을, 서쪽에 있는 회당은 동쪽을 향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진 다음에도 성전에 자주 갈 수 없기 때문에 안식일 마다 성전을 생각하며 회당에 모여 예배를 한 것입니다. 당시 의식은 오늘날 예배 의식과 비슷하게 기도와 찬양과 성경봉독과 설교 등의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때 설교는 랍비(Rabbi)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복음 전도에 활용했습니다. 안식실이 되면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였고 그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시간을 통해 율법서나 예언서를 설교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후에 복음 전도에 있어서 사도들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설교를 하는 방법을 많이 활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복음 전도입니다.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주신 목적은 전도와 선교를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삶의 목적과 이유가 이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가장 좋은 수단과 방법과 환경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빛이 나게 됩니다 (12:3).

 

   ⑦나병환자를 고쳤습니다.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고 있을 때 한 나병환자가 와서 엎드려 낫기를 간구했습니다 (40). '나병'은 문둥병(lepra, Hansen's disease)이라고도 하는 악성 피부병으로서 생명에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질병입니다. 당시 문둥병은 당시 의약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문둥병자는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진 밖에서 거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하면 '부정하다'고 소리쳐 접근을 막아야 하고 종교의식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13:45-46).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종교적으로도 소외된 상태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 간구하되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는 표현은 낫게 하실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가 낫게 하실 수 있다고 하지 않고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한 것은 당시 문둥병이 의식상 부정한 질병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3:1-3). 그의 행동과 말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 문둥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다만 그의 관심은 예수님이 자기를 고쳐 주실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고치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것보다 예수님께 긍휼을 얻는 것이 더 관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간구에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대시며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니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졌습니다 (41-42).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긍휼을 구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말씀만 하셔서 고침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모든 고난과 고통에서 건져 주시는 것도 주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2:4-5). 주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온전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어루만져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보내면서 가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했습니다 (43-44). 레위기13-14장에 보면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문둥병에서 나음을 얻은 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판정을 받아야 하고 (13:16-17) 정결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14:4,10). 그 정결의식은 산 새 2마리를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드리고 8일 후 재차 흠 없는 이린 숫양 2마리와 암양 1마리와 가루 10분의3 에바와 기름 1록을 드려야 했습니다. '10분의3 에바'(ephah)는 약 7정도 되고 '1'(log)0.3정도 됩니다 (14:1-20). 그렇게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나았다는 판결을 받고 정결의식을 행하면 법적으로 효력을 발생하여 사회적 단절과 종교적 부정에서 사면됩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 수도 있고 성전예배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완전히 나았지만 당시 제도 하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정한 정결의식을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얼마나 자상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쳐 준 다음에 보내면서 말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 것이었습니다 (43-44).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아무 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것에만 집중하여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식민지 하에 있던 유대 나라를 구할 유대인의 왕을 기다렸던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왕으로 추대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정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그 때가 이르기 전에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고침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좁게는 기적에 대해 듣고 병 고침 받기 위해서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고, 넓게는 아직 고난 받을 때가 되지 않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은닉사상).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기를 원해서이고, 고난의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고침받은 나병환자는 나가서 그 일에 관해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몰려 들었습니다 (45). 고침받은 나병환자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자랑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로 인해 그 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흥분하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마을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고 정작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더 이상 마을에 들어가 사역을 하지 못하고 마을 밖 한적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신앙적인 체험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확신있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신비 체험을 한 사람은 열정을 가지고 간증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일에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열정적으로 드러내거나 하나님 일을 열정적으로 하다가 오히려 하나님 일에 방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론 열정보다 안연히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습니다.


<結言>

   예수님이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기적 자체를 보고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오히려 그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오해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신비적 체험은 우리 자신에게도 기쁨을 얻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