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가복음2:1-28

<題目> 종에 대한 핍박 시작

 

<序言>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1:14~3:6) 중에 일어난 적대자들과의 5개의 논쟁 기사(2:1-12, 13-17, 18-22, 23-28, 3:1-6) 가운데 4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적 기사들이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마가가 한꺼번에 배열한 데에는 마가의 신학적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중풍병자를 고치심(1-12), 레위를 부르심(13-17), 금식에 대한 논쟁(18-22), 안식일에 대한 논쟁(23-28)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중풍병자를 고치심 (1-12)

 

   마가는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과 그 과정에서 파생된 서기관들과의 논쟁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치유 사건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능력있는 자로서 한 사람의 질병을 고쳤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자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9:1-17, 5:17-27).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갈릴리 선교를 위해 대표 성읍인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면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시몬)와 안드레의 집으로 가셔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낮에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자들이 베드로의 집으로 모여들어 장사진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기적만을 구하기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서 사역에 대해 점검하고 갈릴리 다른 마을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수일이 지나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1-2). 예수님이 계신 ''은 예수님이 가버나움 사역에서 근거지로 삼았던 베드로(시몬)와 안드레의 집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 λογοs)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4사람이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오려다가 모인 무리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3-4). '중풍병자'(中風病者)는 뇌혈 문제로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질병인데 그 마비는 신체의 절반인 경우도 있고 신체의 전부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전신 마비가 와서 말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은 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로 보는 이도 있고, 환자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명령을 받은 종들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4사람은 중풍병자를 누운 상에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 ''(κραββατοs)은 짚으로 만든 자리나 침대를 말합니다. 누가에 의하면 침상에 메워 왔다고 했습니다 (5:18). 누가가 말한 '침상'(κλινο)도 침대를 말합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인파 때문에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렸습니다. 당시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 형태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이 하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 바깥에는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지붕은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위에 흙이나 석회를 발랐습니다. 가끔은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이나 석회로 덮기도 했습니다. 4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 했으나 인파로 인해 들어가지 못하자 집 뒤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들 보 사이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5). 중풍병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예수님은 고쳐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 헌신을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집 주인의 항의와 수리비를 물어 주어야 할 것을 생각지 않고 난관을 돌파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롯이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19:29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18:20-32). 모든 공동체가 본받아야 할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만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중풍병자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10-12절에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침상를 들고 집으로 가라 할 때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나은 줄 알고 일어나 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고 그 순종이 기적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4사람이 중풍병자를 앞으로 달아 내렸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고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5).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라고 한 것은 흔히 랍비들이 제자들에게 쓰는 호칭이기도 하고 윗사람이 친근한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호칭으로서 매우 따사로운 호칭입니다 (9:2).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이 나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중풍병을 낫게 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영혼까지 구원해 준 것을 알게 해 주는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을 한 것은 예수님 편에서는 영혼 구원이 육체 구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죄 사함을 선언해 준 것은 당연히 병도 나았다는 선언이 포함된 것입니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병이 나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5). 중풍병자의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진 죄를 용서한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 선언은 의외의 선포였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중풍병을 낫게 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영혼까지 구원해 준 것을 알게 해 주는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을 한 것은 예수님 편에서는 영혼 구원이 육체 구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 전하는 것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죄와 그 결과로 온 질병과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왔고, 예수님 자신이 그 구원을 주는 자임을 나타내려고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언은 죄 사함을 이 죄의 결과로 오는 질병과 죽음과 지옥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므로 질병에서 놓였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물론 죄 사함을 선언해 준 것은 당연히 병도 나았다는 선언이 포함된 것입니다.


   현장에 앉아 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6-7). '서기관들'은 갈릴리 각 성읍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모여든 서기관들로서(5:17), 기록된 율법을 정식으로 교육받고 율법의 구전적 해석에 정통한 율법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군중 속에 있다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언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죄를 사할 권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죄를 사할 권세는 하나님 밖에 없고 심지어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예언된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자(聖子)로서 성부(聖父) 하나님과 연합된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한 자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말이 쉽겠느냐고 했습니다 (9). 사람들이 보기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확인이 안 되고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은 확인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람들 앞에 죄 사람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11). 그들은 모든 질병이 죄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질병을 낫게 하면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에 병을 낫게 하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들은 중풍병자는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을 나갔습니다 (12).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완전히 치료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자임이 증명되고 중풍병자를 구원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 주는 예였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12).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자로서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는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알기 시작했다는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치유한 사건을 예수님이 단순히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겨서 병을 고쳐 준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마가의 의도대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하나님 나라는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한 표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방편으로 치유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예수님이 사역에서 치유사역을 많이 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이고 그 대상자를 구원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병이 들면 병 낫기를 구해야 하지만 (5:13-16),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병을 낫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의 문제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2. 레위를 부르심 (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갈릴리 해변으로 나가니 큰 무리가 나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행보를 옮겨 가버나움의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했고 그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3-14). '알패오의 아들 레위'(Levi)는 마태와 동일인데 (9:9),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사도명인 것 같습니다. 가버나움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로마 군대가 주둔했고 세관이 있었습니다. 세관에는 세무관리인 세리들이 근무를 했습니다. 세리는 수입세와 인두세를 거두는 관리가 있었고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거두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레위(마태)는 후자에 속한 관리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들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세리는 당시 사회에서 기득권에 속해 있는 직업으로서 많은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유망 직종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어부는 다시 쉽게 고기잡이로 돌아올 수가 있지만 세리는 한 번 그만두면 다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한 것은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시고 제자들과 함께 그의 집에 갔습니다. 세리의 동류들도 많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15). 레위 집에서 가진 식사 모임은 레위의 동료들이 레위가 떠나게 된 데 대한 송별기념으로 마련한 것인지, 레위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한 것인지, 레위가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만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레위의 집에 들어가 그 곳에 온 레위의 동류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세리'는 세관의 관리로서 인두세와 같은 조세(tax)를 담당하는 관리와 통행세 같은 관세(customs)를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조세 수입은 로마 황제의 국고로 들어가고 관세 수입은 지방 군주인 분봉 왕(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들어갔습니다. 헌데 세금액이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세리장은 세리들에게 많은 세액을 거두어 들이게 하여 남은 금액은 착복을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로서 자국민의 고혈을 짜내는 매국노로 보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욱 신앙과 관련하여 죄인으로 정죄를 했습니다. '죄인'은 율법 해석과 준수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전통적 가르침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통칭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죄인이란 세리들을 포함하여 자기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함께 앉았으니'(συνανεκειντο)는 함께 식사 자세를 취했다는 말로서 전통적으로 옆으로 기대어 누운 자세를 취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했습니다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οι γραμματειs των Φαρισαιων)은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바리새'(Φαρισαιοs)'분리하다'의 뜻을 가진 '파라쉬'(פרש)에서 온 말로서 '분리주의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율법을 해석과 준수를 강조하는 종파입니다. 그들은 율법 해석과 준수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서기관은 율법 해석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모두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 죄인들과 교제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로 사귀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비아냥 거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17). 의원이 돌보는 대상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고 병든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행하던 격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격언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사는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4:2). '건강한 자''의인''병든 자''죄인'을 말하려는 표현입니다. '의인'은 스스로 종교적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교만한 바리새인의 서기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죄인'은 종교적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리 같은 사람들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 해석과 준수에 가장 완벽하여 자기들의 삶을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죄하는 세리 같은 자들은 절대적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서기관들이 죄인으로 정죄하는 세리들에게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르치며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18:9-14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비유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인이라 생각하고 세리는 죄인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자신의 깨달음과 삶을 절대적 표준으로 여기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따르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정죄하는 자, 곧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3. 금식에 대한 논쟁 (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18).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속죄일에만 금식을 했습니다 (16:29,31, 23:27-32, 29:7). 그러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난 뒤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날,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 등 매년 4번 금식을 했습니다 (7:5, 8:19). 그러다 신약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일주일에 2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18:12). 그 외에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자주 금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경건과 헌신의 의미로 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과 의식이 되어버렸고 자신을 과하려는 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6:16, 9:14).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유대교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금식에 관한 관습을 폐기하려 하지 않고 고수하도록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일주일에 2번 금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9:14).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9-20). 당시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습니다. 그 혼인 축하연은 매우 화려하고 요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축하연에 참여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하객들은 신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기쁨을 마음껏 나타냈습니다. 그 기간에는 금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금식은 재난을 당했을 때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거나 하나님께 절실한 필요를 구할 때나 경건을 위해 육욕을 절제해야 할 때 했는데 여기에서는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잔치 기간에 금식을 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다만. 금식을 해야 한다면 잔치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사역을 하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금식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상황에서 슬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는 슬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여 신약시대에는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19). 누가복음5:36에는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새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이면 낡은 못이 해어져 둘 다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 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도 버리고 낡은 옷도 세탁을 하면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이 줄어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낡은 옷이 해어지므로 낡은 옷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새 옷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교훈을 가리키고 낡은 옷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진리를 율법주의 시각을 가진 바리새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22). 유대 지방에서는 염소 같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부대를 물이나 포도주 같은 액체를 넣는 용기로 사용했습니다.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가 가죽을 벗겨낸 다음 기름기를 제거하고 털이 있는 부분이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고 목 부분을 제외한 다리 부분을 꿰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넣어 둘 경우 사람들은 포도주가 오래 된 것일수록 좋아하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오랫동안 넣어두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새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어 두게 되는데 낡은 부대에 넣어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포도주가 발효를 하여 팽창하므로 낡은 부대가 터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넣을 때는 새 부대에 넣어두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교훈을 가리키고 낡은 부대는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전통과 의식과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생명력이 없는 비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의 시각으로 예수님의 교훈을 보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오해하여 정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바리새인들의 교훈의 시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진리와 가치와 생활방식은 인간의 전통으로 만들어진 의식주의 시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진리와 가치와 생활방식을 유효하게 하려면 낡은 인간적인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하려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잃게 됩니다 (6:24-33, 19:21-24). 

 

 

        4. 안식일에 대한 논쟁 (23-28)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라고 힐문했습니다 (23).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길의 장애들을 정리하면서 갔습니다. 그러다가 밀밭의 밀 이삭을 자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은 것입니다 (12:1, 6:1).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한 것입니다.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 비벼 먹은 것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그 일을 했다는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23:25). 출애굽기20:10에 보면 안식일에는 그 누구라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출애굽기34:21에는 안식일에는 밭을 갈 때나 곡식을 거둘 때라 해도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준수를 위해 구체적인 사항들을 만들어 놓은 구전율법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금지해야 할 사항을 39개나 제시하고 있는데 그 세번째는 곡식 수확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M.Sabbath7:2)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보았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것과 비벼서 먹은 것을 안식일에 추수와 타작을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죄행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힐문에 대해 역사적인 변증을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했느냐고 하면서 다윗이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25-26). 이는 사무엘상21:1-6에 나온 사건을 말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밤에 군사들을 보내어 집이 포위되었을 때 창문으로 줄을 달아 도망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라마나욧으로 도망했는데 사울왕이 그 곳에도 군사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다윗이 그 곳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을 만나 사울왕의 의도를 알고자 했습니다. 요나단으로부터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성막과 제사장들이 사는 놉으로 도망했습니다. 다윗은 함께 한 자들을 다른 곳으로 오게 하고 혼자서 성막에 있는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자기에서 떡이 없어서 성막에서 물려 나온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아히멜렉'은 당시 대제사장이었으나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어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울 왕의 지시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어서 그의 아들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삼상 23:6, 30:7).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을 줄 때에 아들 아비아달도 그 곳에 살고 있었고 아비멜렉이 처형당한 후 아비아들이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비아달 대제사장 시대'의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3:2, 11:28). 영어성경NIV'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시대에'(In the days of Abiathar the high priest) 의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진설병'(陳設餠)은 성막의 성소에 차려 놓은 떡을 말합니다. 성막의 성소에는 진설병상에 진설병이 2줄로 6개씩 모두 12개를 진설해 놓았습니다. 그 진설병은 제사장이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고 물려 나온 것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5:30, 35:13, 39:36, 40:23, 24:8-9). 그런데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먹도록 내어 주었고 다윗은 그것을 먹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일에 대해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정죄받지 않았습니다.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례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규례를 어기면서 다윗에게 진설병을 내어 준 것이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의 규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살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 방편이 율법의 규례가 사람의 사는 문제를 제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던 진설병()을 먹은 역사적 사례를 들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27).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해 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28). '인자'(人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ο υιοs του ανθρωπου, the Son of man-KJV)로서 구약성경(삼상7:12-14, 1:26-28, 7:13-14)에서 오시리라 예언된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를 말하는 바,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구원자)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가 마태복음12:8과 누가복음6:5에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안식일 규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진정한 안식을 주실 것과 그 안식을 바라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는데 그 진정한 안식은 신약시대에 보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죽음과 지옥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안식에 대한 암시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리라 한 안식에 대한 예언의 실제가 바로 자신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 규례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외부적인 의식에만 집착하여 안식일의 실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암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안식일 규례를 지키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규례를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정죄하는 것은 오히려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안식에 참여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한 것입니다.

 

<結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주일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규례가 나름대로 있더라도 그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례에 집착하여 그 목적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그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일을 주신 목적이 방법에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되고 방법이 목적에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는 참여하지 못하면서 외부적 규례를 지키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교만하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