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가복음5:1-43

<題目> 하나님의 종의 권능


<序言>  

   본 장은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 중 갈릴리 바다(호수) 동편과 서편에서 행한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능력을 행하신 모습이 여러 번에 걸쳐 소개 되었었지만, 본 장에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귀신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꾸고 영적인 세계를 지배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거라사인 광인을 치유하심(1-13), 거라사인들의 예수님 거부(14-20),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22-24), 혈루증 앓은 여인을 고치심(25-34),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35-43)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거라사인 광인을 치유하심 (1-13)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내용은 마태복음8:28-34, 마가복음5:1-20, 누가복음8:26-39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서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동남쪽 육지에 위치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1). 예수님이 도착한 지방이 마태는 가다라라고 했으나, 마가와 누가는 거라사이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들리아 사본을 비롯한 몇 사본들은 가다라’(Γαδαρηνων), 바티칸 사본을 비롯한 몇 사본들은 거라사’(Γαδασηνων), 시내 사본을 비롯한 몇 사본은 게르게사’(Γεργεσηνων)로 되어 있습니다. 스테반본은 가다라로 나와 있고 (την χωραν των Γαδαρηνων -GTS), 킹제임스역에는 가다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he country of the Gadarenes -KJV). 갈릴리 호수 동남쪽 지방을 데가볼리 지방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다라거라사가 있습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에서 9km 떨어진 곳이고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에서 4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다라가 맞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다라라고 확신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곳은 예수님이 호수에서 나온 직후이고 사람에게서 나온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 돼지 떼가 호수로 들어가 몰사했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은 만난 곳은 갈릴리 호수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난 곳은 호수에서 가까운 게르게사’(Grgesa)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제자들이 그 지명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 아는 부근의 지명을 사용했다고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난 곳은 호수 근처인데 그곳이 가다라 지방이나 거라사 지방의 지배권에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지방들을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2).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자 무덤 사이에 있던 더러운 귀신 들인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달려 나온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귀신 들린 자 둘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8:28). 아마도 귀신 들린 사람이 2사람이었는데 마태는 그가 목격한 대로 2사람을 다 기록하고 마가는 2사람 중 심각한 증세를 보인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더러운 귀신'(πνευματι ακαθαρτω)'더러운 영'입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닙니다. 원래 선한 천사로 창조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찬양을 맡았으나 교만하여 타락하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지상으로 내려온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그들을 더러운 영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도 그렇지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부정하고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들어와 사람의 정신과 생각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더럽고 추악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는 자에 한 합니다 (요일5:18).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었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쳤습니다 (3-4). 팔레스틴에서는 무덤을 자연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 공동 무덤이 있는 곳은 마을에서 살 수 없는 범죄자나 걸인이나 광인들이 거처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귀신 들린 자도 마을에서 쫓겨나 공동무덤이 있는 곳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손과 발을 쇠사슬과 고랑(족쇄)로 묶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끊어 버려서 그를 누구도 무엇으로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소리로 부르짖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6-7). 귀신은 영적 감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일고 했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능을 알았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괴롭히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잘 지내고 있고 이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하고 그 곳을 떠나게 하려 하느냐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8:29에는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고 했고, 누가복음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고 했습니다. 귀신들도 자기 때와 결국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주께서 재림하여 심판 하실 때에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 영벌을 받을 자들입니다 (20:10). 그래서 판 때까지는 가만히 두어도 되는 데 왜 나타나서 괴롭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19:15, 2:19). 그들은 예수님이 심판 때까지 있을 악령들의 임시 처소인 무저갱에 보낼 것을 두려워 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서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19:15).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8).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려고 귀신 들린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쫓아내려고 귀신에게 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고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9). '군대'(λεγιων)는 로마 군대의 용어로서 보병 6,000명과 기병 120명으로 이루어진 1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귀신의 수가 심히 많은 집단으로서 제어할 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기를 간구했습니다 (10).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귀신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간구한 것입니다. 귀신은 재배하고 있는 그 사람과 그 장소를 떠나기를 싫어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와 다른 지방으로 가라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귀신은 지배하던 사람과 장소를 떠나기 싫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극적으로는 무저갱에 보내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고 했습니다. 무저갱은 사탄과 마귀와 귀신을 최후심판을 거쳐 유황 불 못에 들어가기 전에 임시로 갇혀 있을 곳입니다 (1:6, 20:1-3). 최후심판이 있기 전까지 그 곳에서 지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귀신은 마침 거기 산 곁에서 돼지 떼가 먹고 있었는데 그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12). 갈릴리 호수 동쪽 해안 데가볼리 지역에는 이방인이 살고 있어서 돼지를 길렀고 대화 장소에는 산과 무덤과 비탈진 곳이 있어서 그 곳에 방목하는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자신들이 활동하던 지역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돼지 떼에게라도 들어가면 그 지방을 떠나지 않고 계속 활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자 귀신들이 사람에게서 나와 2,000마리 가량이나 되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고 그로 인하여 돼지 떼는 바다를 향해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몰사했습니다 (13).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들을 축출한 사건이 주는 본질적인 의미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악령들이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지배하여 고통을 당하게 하는 데서 악령들을 물리치므로 사람의 인격과 생활에 평안과 행복이 있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악령들을 물리치는 권능을 행사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인격과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2,000마리의 군대 귀신이 들어갔기 때문에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공동묘지에서 소리를 지르며 몸을 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귀신을 물리쳐 주므로 그 사람의 인격과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생활에 반영되고 그것들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2. 거라사인들의 예수님 거부 (14-20)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돼지 떼가 바다로 들어가 몰사했었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도망하여 여러 읍내와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그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14). 그들이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했다고 했습니다 (15). '지폈던'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코'(εχω)'붙잡다' 소유하다'는 뜻으로서 '군대 귀신 집혔던 자'란 군대 귀신에게 붙들렸던 자라는 의미입니다. 귀신 들렸던 자는 산과 묘지 등에서 옷을 벗은 채로 괴성을 지르고 자기 몸을 해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현장에 왔을 때 귀신 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인 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에 대한 놀라움으로 예수님을 두려워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습니다 (16).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했습니다 (17).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어 돼지 떼가 몰사한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보다 더 심각한 두려운 일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가 고침받은 사실에 주목하지 않고 돼지 2,000마리가 몰사하여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된 사실에 주목하고 자기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힐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떠나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귀신의 압제에서 회복시켜 준 예수님, 하나님 나라의 복을 경험하게 해 준 예수님을 자기들의 물질적 손해를 염려하여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생각지 못하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자진 세속적인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그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이 그 곳을 떠나기 위해 배에 오르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18). 예수님과 함께 가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구해준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배우고 하나님 나라 사역에 헌신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예수님이 어떻게 큰 일을 행하여 불쌍히 여겼는지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19). 예수님이 귀신 들렸던 자가 따라오는 것을 거절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귀신 들렸던 자가 가족 공동체로 돌아가 적응하는 것이 표적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좇아 내어 귀신 들렸던 자를 고통에서 구해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으로서 그것이 귀신 들렸던 자에게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그가 가족 공동체로 돌아가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귀신 들렸던 사람이 경험한 것을 가족에게 알려 예수님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에 가버나움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곳에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하는 유대인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받아야 할 때가 안되었는데 기적을 베푼 사실을 알리면 그들의 공격이 빨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라사인 지방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유대인들이 없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알리는 것이 더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귀신 들렸던 자에게 가족에게 알리라고 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행한 일을 경험하여 새롭게 된 자는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인 것입니다. 귀신 들렸던 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자기 가족에게 돌아가 예수님이 행한 일을 알릴 뿐 아니라 데가볼리에 전파했고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20). '데가볼리'(Decapolis)는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에 인접한 10개의 도시를 말합니다. 그 도시들은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헬라와 로마의 문화를 이식하여 세운 도시들입니다. 거라사와 가다라도 그 도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귀신 들렸던 자의 예수님에 대한 전파로 거라사 뿐 아니라 데가볼리 전체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경험하여 구원을 받은 자는 제자들처럼 특수 사역을 위해 속해 있던 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의 헌신된 사역으로 한 지역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3.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 (21-24)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거라사에서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관련하여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 줄 것을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맞은 편 가버나움 가까운 해변으로 갔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전처럼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21). 그런데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해 달라고 간곡히 간구했습니다 (22-23).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그의 딸을 고쳐 주기 위해 그의 집을 향해 갔습니다 (24).

 

  야이로라는 사람은 가버나움의 회당장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Rabbi),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회당장(會堂長)은 회당의 대표자로서 회당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 작성과 질서 유지와 사무 등을 관장하던 장로출신 지도자였습니다 (8:41, 18:8,17). 당시 제사장들이 정권과 결탁하고 헤롯이 제사장을 임명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제사장을 전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민 계급 가운데 회당장을 세워 그로 하여금 회당과 예배와 사무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회당장은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고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회당장이었던 야이로(Jairus)의 행동은 그의 휼륭한 면모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겸손했습니다. 회당장(회당 대표)은 유대교 대표적 지도자로서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새로운 랍비(선생) 정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회당장이 그런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다는 것은 딸을 고치려는 열정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겸손함을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딸을 사랑했습니다. 당시 야이로의 딸은 12살 된 외동딸이었습니다 (42, 8:42). 야이로는 딸을 지극히 사랑했고 딸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하는 딸이 병이 들어 죽게 된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지 그를 살리려는 열정을 가지고 자기의 위신도 생각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바닷가에까지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전에 가버나움 회당과 베드로의 집과 해변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낸 일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3). 그러기에 예수님은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 간절히 구한 것입니다. '구원 얻어'(σωθη)라는 표현은 영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서 건짐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얹고 말씀하시면 딸이 질병에서 고침받아 살게 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태를 보면 교만하여 자기를 높이려 하며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행동은 우리가 귀히 여겨야 할 부분입니다.

 

 

          4. 혈루증 앓은 여인을 고치심 (25-34)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해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엎드려 딸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향해 가자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에워싸 밀면서 따라왔습니다 (24).

 

  그런데 12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25). '혈루증'(血漏症)은 당시 여성의 만성 하혈증으로서 자궁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증세를 말한 것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12년 동안을 혈루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활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신앙생활에 제약을 받았을 것입니다. 혈루증은 유출병으로서 의식(儀式)상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가 접촉하는 것들도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그 물건들을 접촉한 자도 부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유출병에 접촉된 그릇은 깨트리고 옷은 빨고 몸은 씻어야 했습니다 (15:1-15). 그런 질병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접촉해서도 안되고 공개된 장소에 나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종교적인 집회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총체적으로 고통과 수치심과 고립감과 절망감과 두려움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수치와 영적인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 질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았지만 효험이 없었고 가진 돈만 다 없애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다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26). 그는 물질과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모든 부분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의원을 찾아갈 비용도 없고 더 이상 호전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과 비통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귀신이 들린 자의 모습과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과 함께 인간들이 겪는 고난과 고통을 보여 주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27). 예수님의 질병 치료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녀는 직접 본 것이 아니지만 소문을 듣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는 자들이 병 고침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도 예수님께서 손을 대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질병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사회가 유출병자를 부정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질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유출병자는 그가 접촉한 자도 부정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을 대는 예수님도 부정한 자라는 공격을 받을 것이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5:19-27).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손 대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마태는 겉옷만 만져도 나을 줄로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9:21). 유대인들은 옷깃 끝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15:38-39). 그것은 매일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살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능력이 그 옷 술에까지 전달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도 그런 통념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불결한 사람으로 알아 공개적으로 치유를 요구할 수 없어서 그의 옷 술만 만져도 낳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중 속을 뚫고 들어서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진 것입니다. 그것만 만져도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이 전달되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몰래 예수님 뒤에서 겉옷 가를 만진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혈루증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았습니다 (29).

 

  이 여인이 고침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의지와 예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가진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능력을 가진 자로서 손만 대면 나을 줄로 믿고 겉옷만 만져도 나을 주로 믿었습니다. 믿음있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반드시 예수님의 겉옷을 만져서 나아야겠다는 절박성과 간절함을 가졌습니다.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에서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은 질병을 치료받아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의미이고, '함일러라'에 해당하는 '에레겐'(ελεγεν)'말하다'라는 뜻인 '레고'(λεγω)3인칭 단수 미완료 능동태로서 '그녀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있는 열정입니다. 셋째는 무리가 가로막는 난관에도 무리를 뚫고 들어가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믿음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서에 나오는 병자들이 고침받은 경우는 모두 특별한 믿음을 보인 자들입니다. 남다른 은혜를 입고 싶다면 남다른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물질적 고통이든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영적인 고통이든 주께 매달려야 합니다. 특히 유출병(流出病)이 영적으로 상징하는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울 때 주께 나아가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벧전2:11, 5:19, 7:20-23, 15:19-20, 17:9, 7:15-25, 8:2,13).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교제)을 통해 제어될 수 있다는 생각과 열정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13:8).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혈루 근원이 말라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30). 사실 여인은 무리들은 물론 예수님마저도 알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옷을 만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옷을 만진 것을 아시고 누가 만졌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수동적으로 안 것이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자기 옷을 만졌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지성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간절한 소망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여인이 옷을 만진 것도 알았을 것이고 그 여인이 낫게 된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내밀한 이적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자기를 계시할 목적도 있었을 것이나 여인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고통은 질병뿐 아니라 그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었고 종교적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앞 단원에서 언급했듯이 육체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여인의 치유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려 한 것입니다.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여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도 자유를 얻게 하려 한 것입니다 (15:19-27).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면서도 '누가 손을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다 (31).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게 밀리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댔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급 상황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급하게 가는 마당에 누가 옷을 만졌는지 관심을 가질 시간이 있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에 손을 댄 여인을 보려고 둘러 보셨습니다 (32). '둘러보시니'(περιεβλεπετο)'둘러보다'의 미완료 시제로서 여인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둘러 보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그 여인을 찾은 것은 더욱 온전한 구원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 하여 떨며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33). 여인이 두려워 한 이유는 자신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고,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가 무리들의 틈에 끼어 들어 무리들을 접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가 예수님가지 접촉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능력을 몰래 훔쳤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의 권위 앞에 자신에게 되어진 일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질병을 얻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은혜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 고백하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34).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손만 대어도 나을 줄로 믿었고 난관이 있었으나 자기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여인이 옷을 만졌기 때문에 나았다고 하기 보다는 여인 믿음 때문에 나은 것이 강조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구원하였으니'는 기본적으로 육체의 질병이 나은 것을 말하고 그로 인하여 온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들에서 자유하게 된 것을 말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영적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인은 의원들에게도 고침받지 못했던 12년 된 혈루증을 고침받았습니다. 또한 공개적으로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님을 보여 주므로 당당하게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거듭나고 예수님에 대한 경험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전인적인 변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모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표현을 한 것은 여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경험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해결되었으니 두려워 하지 말고 평안히 가라는 것입니다.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는 표현은 병에 놓여 건강하라는 명령도 아니고 병에서 놓여 건강하라는 축복도 아니고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건강할지어다'에서 '...할지어다' 해당하는 '이스디'(ισθι)'에이미'(ειμι)의 현재 능동태이기 때문에 현재 건강하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질병에서 놓여 완전히 고침받았음을 시사하는 선언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하혈이 멈추는 것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완전히 나았다고 선언하는 것이고 질병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삶의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고통 가운데 있던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해변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다 죽게 된 자기 딸을 살려 달라는 간청을 들어주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의 반응대로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가야 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시고 드러내어 완전한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딸로 고통받는 야이로에 대해 외면하지 않으셨고 고통받는 여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고통받는 사람에 대해 큰 관심과 연민을 가지고 있는지 암시해 주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마가가 로마에서 고난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일 것입니다.

 

 

        5.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35-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갈릴리 바다 해변에서 말씀을 가르칠 때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엎드려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행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옷을 만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인도하던 야이로는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보면서 조바심이 나고 애가 탓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고 전해주면서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35). 야이로에게 딸이 이미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예수님에게 부담을 지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에게 에수님을 집에까지 모시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곁에서 심부름꾼이 하는 말을 듣고는 야이로에게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36). 예수님께서 야이로가 절망하는 것을 아시고 두려워 하지 말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었던 그 믿음을 계속 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갔습니다 (37). 제자만 데리고 간 이유는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무리들이 사역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사역에 진지함을 더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떠들고 울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38). 12살 된 아이가 죽었으므로 (42) 가족들이 슬퍼 울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신분이 회당장으로서 유력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고용한 통곡꾼들도 있었을 것이고 조문객도 많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활규범서인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고 하면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습니다 (39). 당시 초상집에서 당연한 떠듦과 통곡함을 그치게 하고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습니다. 잠을 자는 자는 다시 일어나는 것을 비유하여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릴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고전15:51, 살전5:10).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에 비웃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분명히 죽은 것을 목격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비웃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 내보낸 후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를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40). 사역에 진지함을 위해 방해되는 사람들을 내 보낸 후에 들어간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니 아이가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41-42). '달리다굼'(ταλιθα κουμ)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요되는 아람어로서 본문에서도 번역되었듯이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살아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ανεστη)를 단순히 과거로 처리하고 '걸으니'(περιεπατει)를 미완료로 사용한 것을 보면 즉시 살아나 계속해서 방안을 걸어 다닌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2).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죽은 아이가 살아난 사실에 놀랐을 것이고 예수님이 메시야적 행위를 하신 것에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많이 경계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습니다 (43).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린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첫째는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몰려 들어 사역에 방해를 가져 올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고 (1:43-45), 둘째는 잡아 죽이려는 기회를 엿보는 대적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아직 십자가 고난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41).

 

  이 사건은 예수님이 생명과 부활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사건입니다 (11:25-26). 이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임을 증명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대속 사역으로 우리의 죽은 영을 살게 하여 생명을 주셨고 재림 때에 육체도 살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서 복음 진리에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무리들 때문에 갈릴리 바다 남쪽으로 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거기에서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좇아 내어 주었습니다. 그 일로 거라사 지방 사람들이 떠나 달라고 해서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왔습니다. 거기 해변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중에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갈게 해 달라고 간청해서 그의 딸을 고쳐 주기 위해 가는 길에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쳐 주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서 그의 12살 된 죽은 딸을 살려 줍니다. 이는 분명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의 수신자들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가장 큰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관심 없이 이적에만 몰두라고 몰려드는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피하고 때문 지방도 옮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장에 나온 자들에게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 중에 있는 자에 연민을 가지고 도와 주시는 분인지 잘 들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