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가복음8:1-38

<題目> 대적들의 핍박과 종의 자기 계시


<序言>  

   예수님은 대적들의 핍박이 가속화되자 자기를 공개적으로 계시하기 시작합니다. 수난받는 종으로서 완수해야 할 순간이 임박해 오는 시점에서 제자들을 준시켜야만 했습니다. 내용구조는 칠병이어의 이적(1-10), 바리새인들의 표적 구함(11-13),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14-21), 벳새다의 소경 치유(22-26), 베드로의 신앙고백(27-30), 첫번째 수난 예고(31-33), 제자됨의 조건(34-38)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칠병이어의 이적 (1-10)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무리들과 갈릴리 호수에 가까운 데가볼리 근처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면서 그들이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3)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을 굶겨 보내면 그들이 기진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3). 이 상황의 때는 데가볼리 근처에서 사흘 동안 집회를 하고 해산할 무렵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이 사흘 내내 굶었는지 사흘째 되는 때에 음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었는지 정확히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 사흘 째 되는 때에 음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 이전부터 사흘 내내 굶었다면 예수님이 그 기간 안에 기적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 굶은 무리들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동정심으로 그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 것입니다. 벳새다 들판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먹을 것이 없음을 언급했는데 (6:35-36) 여기 데가볼리 광야의 칠병이어(七餠二魚) 기적에서는 예수님이 무리를 동정하여 먼저 언급했습니다. 이제 그들을 돌려 보내려는 마당에 그들 가운데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을 그냥 굶겨 보내면 지쳐서 쓰러지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무리 가운데는 가까운 데가볼리에서 온 사람들도 있지만 두로나 시돈이나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서 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책임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4). 예수님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겠다는 말씀에 제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집회 장소가 인가와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광야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오병이어 이적에서는 금전 문제를 언급했는데 (6:36-37) 여기에서는 장소문제를 언급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이적을 경험했음에도 환경과 상황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함께 계시므로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7개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고 떡 7개를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5-6). 오병이어 기적에서는 50명이나 100명씩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했으나 (6:39-40) 여기에서는 숫자 언급없이 그냥 땅에 앉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떡 7개를 나누시고 생선 두어 마리도 축복하시고 명하여 나누어 주게 했습니다 (7). 여기에서 언급된 작은 생선은 식사 때 떡과 함께 곁들여 먹는 건조한 작은 생선으로 추정됩니다. 오병이어 이적에서는 '물고기 두 마리'로 언급했는데 (6:38) 여기에서는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언급했습니다. 또한 오병이어 이적에서는 떡과 물고기를 같이 언급했는데 (6:38, 15:36) 여기에서는 떡과 물고기를 분리해서 언급했습니다. 한편 '축사하시고'에 대해 떡을 축사할 때는 '율로게오'(ευλογεω)를 사용했는데 생선을 축사할 때는 '유카리스테오'(ευχαριστεω)를 사용했습니다 (오병이어에서는 둘다 함께 '율로게오'를 사용했음). '율리게오''찬양하다' '축복하다'이고 '유카리스테오''감사하다'의 의미인데 두 단어는 서로 혼용하여 사용되는 단어로서 지나치게 구별하여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칠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사람이 약 4,000명이었고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7광주리나 되었습니다 (7-8). 여기에서 약 4,000명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하면 두 세배는 될 것입니다. 마태는 오병이어 이적과 칠병이어 이적에서 '여자와 어린 아이 외에'라는 수식어를 넣었으나 (14:21, 15:38) 마가는 두 곳에서 모두 그런 수식어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의 수신자가 유대인들이었고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인들이었다는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마가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배려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 이적에서는 남은 적이 12바구니였는데 (6:43) 여기에서는 7광주리였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에서 '바구니' '코피노스'(κοφινοs)는 유대인들이 차고 다니는 휴대용바구니이고, 여기 칠병이어 이적에서 '광주리''스퓌리다스'(σπυριδαs)는 가정에서 많은 물건들을 담아 두는 광주리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성벽을 탈출할 때 타고 내려왔던 광주리는 스퓌리다스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병이어의 이적 때보다도 칠병이어 때에 더 많이 남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그들을 흩어 보내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습니다 (9-10). 예수님이 칠병이어 이적을 행하시고 달마누나로 가셨다고 했는데 마태는 마가단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달마누다'(Dalmanutha)'마가단'(Magdala)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가까운 데기볼리 근처 광야에서 칠병이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방에서 많은 사람에게 3일 동안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돌려 보낼 때 멀리서 온 자들이 돌아가다가 지쳐 쓰러질까 봐서 그들에게 동정심과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 칠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 준 '만나'는 각자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 먹게 했습니다 (16: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실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암시해 줍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국한 되었던 언약적 복이 이방인에게 주어지되 그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받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자임을 계시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고, 요한복음6:47-48에도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므로 만족하게 하시고 성령과 말씀으로 심령을 만족케 하시는 분입니다. 목자가 양 떼를 푸른 초장에서 풍성히 먹게 하심과 같이 풍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10:10, 고후9:8, 3:20, 4:19).

 

 

          2. 바리새인들의 표적 구함 (11-13)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1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논쟁의 장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비난조의 힐난을 했습니다. '시험하여'(πειραζοντεs) 영어성경에서는 tempting-KJV, test-NASB,NIV로 번역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증명할 만한 표적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보여 온 이적들은 사술자들에 의해서도 능히 행해질 수 있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능력을 보여 보라는 의미로 한 말일 것입니다.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기 위해 구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넘어뜨릴 결정적인 증거를 얻기 위해서 구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고, 그들을 떠나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12-13).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극한 슬픔과 실망과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유대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들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신앙적인 마음으로 악의적인 공격을 해 오는 것을 보면서 실망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는 표현은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당시 유대 민족 전체가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전제하고 탄식적인 반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대해 표적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설교와 행위를 통해 충분한 증거를 나타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앙은 어떤 증거가 있어야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도가 믿기 위함이 아니라 책잡으려는 의도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12:39-40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11:29). 마태복음16:4에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한 것이 한 번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병행구가 마태복음의 두 곳 중 어느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실제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한 동기에서 나온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자리를 떠났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은 요나가 나타내 보여 준 어떤 표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요나 자체가 표적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만에 나와 니느웨 사람들에게 나타나 회개의 메세지를 전하므로 그들을 멸망에서 구원받게 했습니다. 요나서1~2장에 나오는 바다 속에서의 경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3일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표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이 모든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할 것이 메시야인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이적들이 예수님이 메시야인 표적성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 모든 표적의 목표는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메시야인 표적의 핵심은 그 모든 이적이 아니라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외부적인 기적 체험만 중시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인 증거는 십자가 대속과 부활입니다. 다른 체험이 없어도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핵심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고전2:2, 3:10).

 

 

        3.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14-21)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어 배에 떡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14). 1-10절의 내용과 연결된 내용이라면 칠병이어(七餠二魚)4,000명을 먹이고 남은 떡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떡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활동하는 기간에 필요한 식사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식으로 필요한 그 떡을 어디엔가 빠뜨리고 온 것입니다. 아마도 11-13절에 나온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인하여 온통을 신경을 빼앗겨 다른 생각을 미처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배에서 식사를 위해 그 떡을 찾았는데 그 떡이 없자 비로소 자기들이 빠뜨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먹을 것이라고 떡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 떡이 어느 제자가 호주머니에 넣어 둔 떡이었는지 아니면 진작부터 배에 놓았던 떡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여 일렀습니다. 예수님은 떡이 없는 상황에서 떡과 관련하여 중요한 교훈을 했습니다.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15). '누룩'(ζυμη, 쥐메)는 떡()을 부풀게 하는 데 필요한 효소로서 생활에서 꼭 필요한 필수품입니다. 누룩은 긍정으로 비유할 때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 비유될 때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죄와 부패와 타락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누룩은 적은 양으로도 전체에 퍼지게 하여 부풀게 합니다. 그처럼 죄의 성향은 속도나 범위에서 그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종교적 위선으로서, 백성들에게 종교적 형식주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헤롯의 누룩'은 정치적 권력으로서, 백성들에게 세속주의를 심어 놓았습니다. 병행구인 마태복음16:6에는 '헤롯의 누룩' 대신에 '사두개인의 누룩'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헤롯당이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제자들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 그룹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악한 궤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악의를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고 했습니다 (16). 예수님은 떡이 없는 상황에서 떡에 대한 교훈을 주시고 제자들에게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의 교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수군거리기를'에 해당하는 기본형 '디알로기조마이'(διαλογιζομαι)'생각하다' '걱정하다' '근심하다' '의논하다' 등의 뜻인데 시제를 미완료형으로 사용했습니다. 제자들이 떡이 왜 없어졌는지, 어디서 없어졌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이제 식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계속 걱정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런 상황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에 집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상태를 아시고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17-18). 예수님께 의탁하기 보다는 자기들끼리 걱정하고 있는 것을 질책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하고 떡만 걱정하고 있는 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둔하여 깨닫지 못한 것을 한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 5개로 5,000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느냐고 물었고 제자들은 12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떡 7개를 4,000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고 물었고 제자들은 7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19-21).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고 남은 것 12바구니를 거두었고 칠병이어로 4,000명을 먹이고 남은 것 7광주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자들이 예수님이 게시는데 떡 1개 밖에 없는 것으로 적정하고 그것 때문에 말씀에 몰입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형식주의(formalism)와 세속주의(secularism)로 기울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과 세상 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집중하느라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 말씀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 것은 제자답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4. 벳새다의 소경 치유 (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다른 마을에서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했습니다 (22). '벳새다'(Bethsaida)는 갈릴리 호수 동북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소경을 데려와 안수해 주시리기를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라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23). 예수님이 맹인의 손을 붙잡으신 것은 맹인이 겪고 있을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마음 아파하는 심정이 나타난 것입니다. 맹인을 사람들이 없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은 군중들의 방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위함일 것입니다. 26절의 경고를 보면 사람들에게 치유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한 목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눈에 침을 뱉으며 안수를 한 것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는 치병 행위를 이용하여 맹인이 관심과 노력과 권능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 것은 치병 행위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맹인이 스스로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보이느냐는 물음에 맹인은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인다고 했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24). 맹인이 마을 안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나무와 구별이 안갈 정도로 희미하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안수했고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았습니다 (24). 다시 안수한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치유에 대한 간절함을 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완전히 치유될 때까지 안타까움을 가지고 열정을 다하는 보습을 보이려는 것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맹인이 사물을 밝히 볼 정도로 완전히 나았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26). 자기 집이 있는 마을로 갈 때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마을을 거쳐서 가지 말고 그 마을을 돌아서 가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친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병 고치는 사역으로만 전파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아직 고난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벳새다에서 한 맹인을 고친 사건은 예수님이 지금까지의 방법과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눈에 침을 뱉으며 안수를 했습니다. 안수도 한 번 해서 희미하게 보인다고 하니까 두 번을 해서 완전히 보이게 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말씀만 했고 어떤 때는 접촉만 했고 어떤 때는 한 번만 안수를 했는데 이 사건에서는 두 번이나 안수를 한 것입니다. 환자가 즉시 나음을 얻을 때도 있었는데 이 사건에서는 점진적으로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하는 방법이나 치유하는 방법이나 회복시키는 방법이 다릅니다. 시대와 문화와 장소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갑자기 쏟아 붓듯이 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점진적으로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인물이나 다른 사람의 간증과 똑같은 방법이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벳새다에서 한 맹인을 고친 사건은 마가복음 전체의 목적에 맞는 점들이 강조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이 고침받은 맹인에게 치병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치유 사역을 나타내면 안 되는 혹은 나타내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도 맹인을 사람들이 보지 않는 장소로 데려 나와서라도 고친 것입니다. 맹인의 고통을 느끼며 그의 손을 잡고 나왔습니다. 눈에 침을 뱉으며 안수를 했습니다. 그를 고통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반드시 병을 고쳐 주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가지고 맹인에게 그 심정이 전달되도록 한 것입니다. 안수를 두 번했습니다. 간절함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치유의 과정 함께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예수님이 맹인에 대해 가진 연민과 동정과 긍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의 특성입니다. 수신자가 로마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드러낸 강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그런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5. 베드로의 신앙고백 (27-30)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면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27). '빌립보 가이사랴'(Philippi Caesarea)는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약 40km 정도 거리에 있는 지역이며 해발 약 345m의 높이이며 헬라 문화의 지배 아래 있는 철저한 이방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의 주변 마을들로 더니셨는데 벳새다에서 그 곳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누구라고 하는지.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는 사람도 있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라는 사람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6:14-16에서 헤롯과 여론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제자들도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6:14에서는 예레미야를 추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적은 떡과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모습을 보거나 소문을 듣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는데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1:24, 3:11, 5:7).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들은 후 제자들은 자기에 대해 누구라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29).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의 인식보다 제자들의 인식이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식을 물은 것은 제자들의 인식을 묻기 위해 들어가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29). '그리스도'(χριστοs)는 구약에서의 '메시야'( )를 가리키는데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새울 때 감람유(올리브유)를 부었는데 그 상징 의미는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하고 직임에 합당한 은사가 내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이 특별 사명을 위해 세운 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할 자이며 하나님이 은사를 부여한 자이며 하나님이 권세를 부여한 자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에는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보내 주실 '구원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16:16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의미도 있고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과 구원자인 것을 믿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30). 이는 베드로의 고백이 옳다는 것을 암시하는 진행입니다. 마태는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이 대답하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16:17-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그런 반응을 생략한 채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병을 치료받은 사람들에게도 침묵하게 했고 귀신들에게도 침묵하게 했고 제자들에게도 침묵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받아야 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사건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식보다 제자들의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윤리적으로 훌륭한 성자(聖者)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어떤 고백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가 하나님인 것과 구원자인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6. 첫번째 수난 예고 (31-33)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기록되었습니다. 첫번째 수난 예고는 본절 8:31이고 두번째 수난 예고는 9:31에 나오고 세번째 수난 예고는 10:33-34에 나옵니다. 세 차례의 수난 예고는 장차 예루살렘에서 발생할 수난 사건들이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십자가 길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염두에 두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갔음을 보여 줍니다.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31).

'인자'(人子)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르쳐 사용한 용어입니다. '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휘온 투 안드로푸'(του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오실 구원자에 대해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구원자가 창세기28:10-14의 야곱의 사닥다리 꿈에서는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로 나타나고, 사무엘하7:12-14의 나단 선지자의 다윗에 관한 신탁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고, 에스겔1:26-28의 에스겔이 본 전차(메르카바) 환상에서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으로 나타나고, 다니엘7:13-14의 다니엘이 본 네 짐승 환상에서 '인자같은 이'로 나타납니다. '인자같은 이'에 해당하는 '케바르 에나쉬'( )'사람의 아들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아들'을 오실 구원자에 대한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그 사람의 아들'로서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9:35의 경우,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에서 '인자'가 헬라어 성경 스테판본(GTS)에는 'τον υιον του θεου'로 되어 있고 스테판본을 번역한 영어성경 KJV에서도 'the Son of God'으로 번역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라는 구분 앞에 한글 개역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데이'(δει)라는 동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 뜻은 '반드시...해야 한다'(must)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반드시 3일만에 부활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자로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6:23, 17:11, 52:13~53:12). 또한 반드시 부활해야 하는 것은 택한 백성들의 죄값을 치르므로 완전히 대속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는 유대교 최고의 법정의결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의 계획과 조사와 판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사형 선고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결국 모든 것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모의하고 계략을 꾸민 것입니다. '장로들'은 일반 평민출신으로서 회원이 된 사람들을 말하고, '대제사장들'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말하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teachers of the law)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반드시 고난받아야 할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했습니다 (32). '하시니'에 해당하는 '엘랄레이'(ελαλει)는 미완료형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수난 당해야 할 것에 대해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원자)로 고백한 제자이지만 (29, 16:16)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항변하매'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비난하다' '책망하다' '훈계하다' '꾸짖다' '따지다' '금하다' 등의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 다가가 붙들고 옆으로 가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험악하게 몰아 붙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6: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해서 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둘째, 메시야관에 대한 오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구원자)인 것을 믿고 정확하게 고백했지만 (16:16). 그가 생각하는 구원자는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메세야관처럼 정치적인 메시야였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9:34, 10:35-37, 20:21-24).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번영시킬 메시야로 생각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다가 죽는 약한 메시야는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런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붙잡혀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이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33).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베드로에게만 꾸짖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향해 꾸짖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해서 항변했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해서 항변했든지 베드로의 생각과 항변은 사탄이 좋아하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생각과 행동은 사탄에게 이용된 도구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메시야관을 정확히 바로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방해하려 합니다. 베드로가 거기에 이용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의 도구로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꾸짖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부여한 대속 사역을 의미하고, '사람의 일'은 사람의 안위와 성공에 관한 일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당해야 할 것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52:13~53:12).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구원사적 뜻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6: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7. 제자됨의 조건 (34-3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34). 예수님을 따르려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신 길을 가려는 것 곧 예수님이 사신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정하고 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에 대한 뜻을 이루는 것을 인생의 목적과 목표와 가치와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22:22, 4:34).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고난과 죽음이 왔으나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26:39,42, 벧전2:22-2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적, 목표, 소원, 주장, 고집,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사형집행 방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오는 고난과 죽음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도 하나님이 뜻을 이루려 할 때 오는 각종 고난을 말합니다. 단지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근심이나 고난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고난도 감수한다는 것이며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사탄이 대적하고 세상의 구조와 원리가 대항하고 부패한 죄성이 방해하기 때문에 고난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딤후3:12). 그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감수하면서라도 그 길을 선택하여 가는 삶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1: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4: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빌립보서3: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고 했습니다.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5).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예수님과 복음을 저버리면 영원한 가치를 잃게 되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육체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 영원한 가치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가치는 38절에 보면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상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8).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세대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옳게 여기고 그런 가치관으로 살지 않는 자를 그르게 여깁니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0:32-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12:8-9).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복음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3:5). 예수님이 부인하면 하나님의 질책과 책망이 얼마나 클 것이며 예수님이 시인하면 하나님의 위로와 칭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영원히 예수님께 부인당해 하나님께 수치를 당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잃은 것이고, 영원히 예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께 상을 얻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목적하는 것이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사는 삶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으며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했습니다 (36-37). '온 천하'는 재물이나 권력 등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 등을 다 얻는다 해도 목숨을 잃으며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 등을 잃는다 해도 목숨을 얻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을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목숨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하고도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은 예수님 오실 때에 인정받아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는 길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結言>

   우리 그리스도인이 참된 제자가 되려면 절대적이지 않는 가치와 절대적인 가치, 영원하지 않은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이 영광스러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1:20-21"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