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마가복음10:1-52
<題目> 종의 유대 사역
<序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떠나 유대지역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예루살렘 입성 전까지의 유대 사역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앞 두고 제자들에게 인자가 섬기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수난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고 동시에 제자의 길이 섬기는 종의 길임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혼에 대한 교훈(1-12절), 어린 아이에 대한 교훈(13-16절), 부자에 대한 교훈(17-31절), 세 번째 수난 예고(32-34절), 야고보와 요한의 욕망(35-45절), 소경 바디매오를 치유(46-5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이혼에 대한 교훈 (1-12절)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을 떠나 사마리아 지방을 우회하여 유대 지방의 경계인 베레아(Perea)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에도 무리가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절). 그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2절). 이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대해 책잡기 위해 파견된 자들일 것입니다 (7:1-5, 8:11, 9:1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말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마5:31-32). 그래서 예수님이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대답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입니다. 만일 이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대답하면 모세의 율법에 이혼을 허락한 내용과 상충되어 율법을 부정하는 자로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24:1).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는 호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할 경우 당시 분봉 왕 헤롯 안디바스의 심경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는 아내와 이혼하고 이복 동생 헤롯 빌립(Herod Philp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했는데 세례 요한이 그 일의 옳지 못함을 비판을 하자 세례 요한을 처형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6:14-18, 마14:1-12).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는 그에 대해 어떻게 명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대답했습니다 (3-4절). 그들의 대답은 신명기24:1-4을 근거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사람이 아내를 맏이하여 데려온 후에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여 아내를 기뻐하지 않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어 보내고 그가 재혼할 수 있게 해 주라는 내용입니다. '수치되는 일'을 샴마이(Shammai) 학파에서는 음행으로 보았고 힐렐(Hillel) 학파는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나 행위들로 보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유로운 힐렐 학파의 해석을 따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했습니다 (5절). 모세가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었을 때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 한 것은 모세가 이혼을 합당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편들이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잘못하면서도 아내의 잘못을 핑계하여 아내를 쉽게 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여자는 버림을 받으면 생계가 막막하기 때문에 재혼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인하여 버림받은 여자는 확실하게 이혼되었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할 수가 없었고 재혼하려는 대상자도 받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은 원천적으로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악하여 자기 맘대로 함부로 이혼을 하니까 차선책으로 아내들을 남편들의 학대로부터 보호하고 아내들의 인권과 삶을 보장해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예수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6-9절).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창1:27, 2:24).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통해 결혼과 이혼 문제에 관련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 이혼을 원하셔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완악함 때문에 더 큰 죄를 방지하는 동시에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일 뿐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옳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일부일처제를 원하실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로서 동등한 인격적 권리를 보장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이루어졌다면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사람이 임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원하시고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친 후 집에 들어왔을 때 제자들이 그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10절). 예수님께 보충 설명을 듣기 위해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고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11-12절).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경우는 유대법에서는 불가능했으나 이방에는 어느 정도 가능했습니다. 마태는 여자가 아내를 버리는 예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가는 기록을 했는데 그것은 아마 독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 같습니다. 결국 본 절의 요지는 이혼과 관련하여 재혼도 간음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5:31-32에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이혼은 재혼 자체가 간음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 보내라고 해지만 이혼 증서를 써 준다 하더라도 하나님 관점에서는 두 사람의 이혼이 옳지 못한 것으로서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재혼이 간음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전7:10-11). 배우자가 간음을 했을 경우엔 이혼할 수 있지만 그것도 용서할 수 있으면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용서되지 않는다면 학대하지 말고 합법적으로 이혼을 해 주어서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혼을 자기의 죄를 감추거나 죄를 짓는 기회로 여겨서 안 됩니다. 성경에 이혼이 허락된 경우가 세 가지입니다.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 (마19:7-9),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앙문제로 이혼을 요구할 경우 (고전7:12-16),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합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렘29:4-7). 그 외에도 그에 준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혼생활이 불가능할 상황이라면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그것 자체가 이혼을 근본적 허락하기보다는 더 큰 죄를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그런 경우에라도 긍휼을 베푸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한 심성을 감안하여 주신 말씀들을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허락하신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한 그 말씀들을 오히려 우리의 죄성과 잘못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 어린 아이에 대한 교훈 (13-16절)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니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13절). '만져 주심'에 대해 마태복음19:13에서는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랍비에게 어린 아이를 축복받게 하려는 관념이 있었던 것처럼 (창48:13-20) 예수님께 축복을 해 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어린 아이들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를 데려온 자들을 막는 것을 보고 오히려 노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하고 했습니다 (14절). 마가만이 노하신 것을 언급했는데 수신자들과 관련하여 어린 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고 반면에 마태와 누가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온전함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수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단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염려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19:13, 눅18:15). 예수님이 화를 낸 까닭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나아오는 것을 거부하지 말고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했고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4-15절).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현재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유기적 공동체의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가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아린 아이들을 소재로 어린 아이의 특성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이 여러 가지 있지만 여기에서는 받드는 특성의 의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구절들을 해석할 때 어린 아이들에게 있는 특성들을 빗대어 적용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정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18:3-4은 어린 아이가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낮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한 내용이고, 마태복음19:4, 마가복음10:14-15, 누가복음18:16-17은 어린 아이의 성품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특성이 있음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우선 마태복음18:3-4에는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 아이의 신분과 지위에 관련된 낮은 위치를 강조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바로 앞 내용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왜 성전세를 내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왕들이 누구에게 세금을 걷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자들에게인지 국민들에게인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연히 국민들에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면 왕자들은 세금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마17:24-26).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정치적인 왕 위에 오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마땅히 자기들을 왕자와 같은 높은 위치에 오르게 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왕자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필요 없고 이런 아이 같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는 여자와 함께 사람 수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도 어린 아이와 여자는 가장의 재산 목록으로 여겼습니다. 곧 어린 아이는 평민 축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가장에게 예속되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연약하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은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왕자 같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 평민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아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처럼 높은 자리 곧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 곧 섬기는 위치에 있는 자가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9:14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어떤 점이 강조되었는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행구절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어린 아이의 성격과 관련된 특성을 강조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10:14-15에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받드는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받들지’로 번역된 기본형 ‘‘데코마이’(δεχομαι)는 ‘받다’ ‘취하다’ ‘영접하다’ 등의 뜻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 중 받아들이는 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누가복음18:16-17에도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기본형도 ‘데코마이’(δεχομαι)로서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받아들이는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는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인하고 대적하고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현장에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가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내주와 하나님 말씀의 내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거듭나고 성령님과 말씀이 지배하여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적 공동체에 확대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온 세계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말씀을 받았으니 더욱 성령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에 붙잡히려 해야 합니다. 성령과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여 우리의 인격과 행동과 삶을 통제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유기적 공동체도 성령과 말씀이 다스리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도를 통해 사회에까지 확대되고 선교를 통해 세계에까지 확대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자신이 성령과 말씀의 지배를 받는 만큼, 성령과 말이 지배하는 영역에 수고하는 영향을 미친 만큼 그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었습니다 (16절). 예수님께서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안수를 하면서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린 아이는 구약시대 때부터 전쟁을 할 수 없는 대상으로 보고 수에도 넣지 않았기 때문에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민수기1:3, 20:2에 보면 인구조사를 할 때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대상으로 수를 세게 한 것을 보면 남자 20세 이상 60세 이하만 계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 관념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여자와 어린 아이는 오히려 도와 주어야 하는 존재로서 무시되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또한 율법을 알지 못하여 어떤 선행이나 공적을 세우기 힘든 존재로 여겨 더욱 무시했습니다. 4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기사를 보면 수를 보고할 때 마태복음은 '여자와 어린 아이 외에 오천 명'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마14:21),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남자가 오천 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막6:44, 눅9:14), 요한복음은 아무 수식없이 그냥 '오천 쯤'이라 표현했습니다 (요6:10). 수신자가 마태복음은 유대인, 마가복음은 로마 그리스도인, 누가복음은 로마 관료 데오빌로, 요한복음은 헬라인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여자와 어린 아이 외에 오천 명'이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표현 중 하나로서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이 어린 아이를 수에도 치지 않는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제자들에게도 아직 그런 관념이 남아 있어서 어린 아이들을 막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해 꾸짖었습니다. 특히 마가는 예수님이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14절). 이 표현은 공관복음 가운데 마가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노하다'에 해당하는 '아가나크테오'(αγανακτεω)는 '몹시 괴로와 하다' '분개하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16절). 이 표현도 공관복음에서 마가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안다'에 해당하는 '에나그칼리조마이'(εναγκαλιζομαι)는 '팔로 안다' '껴안다'라는 뜻입니다. 팔로 껴안아서 안수로 축복을 해 준 것입니다.
마가는 수신자들인 로마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공동체도 분명 하나님 나라이며 그들도 하나님의 주인공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하찮은 자도 하나님 나라의 일원임을 알고 그들을 섬겨야 할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하찮은 존재이지만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으로 축복해 주는 내용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을 것이고, 용기를 가지고 약한 존재를 섬겼을 것입니다.
3. 부자에 대한 교훈 (17-31절)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혼에 대한 논쟁과 어린 아이들에 대해 축복하는 일로 인해 중단되었던 여행길을 다시 올랐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17절). 그 '한 사람'은 22절에 보면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고, 마태는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라고 했고 (마19:22)고, 누가는 어떤 관리라고 했습니다 (눅18:18). 그는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젊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인 자였으나 영생에 대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선(善)이라 생각했고 예수님은 선한 분으로서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지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대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8절). 예수님은 그가 사용한 '선한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여 높이기 위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한 데 대해 거부하고 선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예수님을 선하다 하는 것을 아시고 선의 의미를 절대적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뿐이며 영생을 얻으려면 절대적인 선인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영생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19절).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의무와 관련된 6가지 계명을 순서와 상관없이 열거한 것입니다. 이는 십계명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4계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관한 1-4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의무에 관한 5-10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조건으로 율법준수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리는 율법(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율법준수에 자신만만하여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그의 허영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계명)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20절). 마태복음19:20에는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계명)을 다 지키는 일에 자신 만만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 율법을 준수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는 실제로 어려서부터 율법에 대해 배웠을 것이고 비록 외부적으로 습관적으로나마 지켰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피상적으로 지킨 것 때문에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21절).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9:21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율법(계명) 준수에 온전하고자 한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하나의 지켜야 할 계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켰다고 자신 만만해 하는 것이 습관적 혹은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5~10계명의 중심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9:18-19에서는 5~10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끝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말씀을 추가했습니다. 그가 율법(계명)을 바로 준수하려 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로 나타나는 행위는 무엇이라 규정하기 힘들지만 이 사람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자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큰 부자이면서도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율법(계명)을 다 지킨다고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보다 가치 있는 상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은 영생의 조건으로 한 말씀이 아니라 율법(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앞서 율법(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제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12제자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맨 먼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지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갔다고 했습니다 (22절). 예수님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자 이 관리는 재물이 많은 큰 부자였으므로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가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물질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율법(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보다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른 것보다 사랑했고 영생을 얻는 것보다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에 대한 포기는 그가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데에 가장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다음에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4:19-20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고 했습니다 (막1:18).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증거이며 구원과 영생을 확신한 증거이며 예수님께 인생을 맡긴 증거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목적에 합당한 결실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8:14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있으면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mammonism, 골3:5, 약1:15, 요일2:16).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오는 관리에게 있어서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3:10-14에는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한 부자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계명을 행하라고 했고 부자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자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17-22절). 부자가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했습니다 (23절). 재물이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한 부자가 보여 주었듯이 재물에 대한 소유욕이 장애물이 되어 영생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4절). 유대인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알고 있는데 (욥1:10, 42:10, 시128:1-2 등) 예수님은 오히려 그 재물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24-25절).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격언구를 사용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도무지 들어갈 수 없다는 비유입니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 서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26절).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을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면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7절).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엡2:8).
‘낙타’와 ‘바늘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낙타’와 ‘바늘귀’로 보는 견해입니다 (Lange). 이 경우 짐승인 낙타가 바느질하는 바늘귀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과장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낙타’ ‘좁은 문’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Barclay). 성곽이 있는 도시는 한 성문에 2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큰 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 수레 등이 다니는 곳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하는 문으로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문이었고 그 문은 흔히 '바늘귀 문'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낙타처럼 큰 짐승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밧줄’과 ‘바늘귀’로 보는 견해입니다 (Calvin). ‘밧줄’에 해당하는 ‘카밀로스’(καμιλοs)를 ‘낙타’를 의미하는 ‘카멜로스’(καμηλοs)오 혼동하여 오기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경우 선박용처럼 굵은 밧줄이 바늘귀에 꿰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가지 이론 중 어느 것을 채택하든지 본문의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능성이 힘든 것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처럼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그토록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것은 그 재물이 자기의 우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mammonism). 부자는 재물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예수님을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을 거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자는 재물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보다도 중요하게 여겨 그것을 거절하기 쉽습니다. 앞서 나온 부자 관리처럼 그 같은 부자는 재물에 대한 욕심 곧 소유욕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두고 그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재물을 삶의 가장 우선 순위에 두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할 수도 있고 성령님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도 거절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세의 천국에도 가기 힘들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富)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부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복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시112:3). 부자 가운데는 그 재물로 인해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받아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눅19:9, 마27:57, 요19:39). 부나 재물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다. 디모데전서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욕망이 너무 클 경우 예수님을 믿거나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실제 부자라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가난하더라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강하면 은혜를 받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제자된 자는 항상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빌4:11). 빌립보서4:11-12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과 부자의 대화 그리고 부자의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부자가 돌아간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 베드로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고 했습니다 (28절). 실제로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18,20, 2:14).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와는 달리 예수님의 요구대로 행한 자들로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29-30절). 첫째, 가족과 재산을 버린 다는 현세에 100배나 받는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가족 관계에 아내도 언급했습니다 (눅18:29). 부모와 아내와 형제자매와 자식 등은 가족과 인간관계를, 집과 전토(田土) 등은 재산과 재물관계를 말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그것들을 더 소중히 여겨 앞서 돌아가 버렸던 부자처럼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일부러 모든 혈연관계를 끊고 가진 재산을 다 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할 때 그런 것들이 필연적으로 장해가 될 경우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하느라고 그것들을 상실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100배나 더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는데 (마19:29, 눅18:30), 마가는 100배나 받는다고 했습니다. '100 배나 받되'라는 표현은 풍족하게 받는다는 말로서 그것 자체가 풍요로워진다는 의미도 있고 그것들 이상의 위로와 가치를 얻는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박해를 겸하여 받고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가족관계와 재산관계를 상실할 뿐 아니라 거기에다가 핍박을 받을 경우도 많습니다 (딤후3:12). 박해는 예수님을 따를 때 오는 적극적인 핍박으로 고난을 받는 사람은 내세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의 기쁨을 더욱 많이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느라 포기하고 고난을 당한 것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내세의 하나님 나라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영위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31절). 예수님은 앞에서 가족관계와 재산관계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 그리고 박해를 겸하여 받는 자에게 보상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당연히 자기들은 그 보상을 받은 자들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가족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의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하느라 많은 수고와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담 형식을 빌어 그들의 생각에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보는 평가와는 달리 하나님의 평가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16:7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4. 세 번째 수난 예고 (32-34절)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사마리아 지방을 돌아 유대 지방으로 왔습니다. 유대 지방의 뵈뢰아에서 예루살렘을 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길에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제자들이 놀라고 따르는 무리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32절).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곳에 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선두에 나서서 걸었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단호한 의지를 볼 수 있었고 위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따로 따로 불러 세우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들이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33-34절).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이 수난 예고는 8:31, 9:12-13에 이어 세 번째 하는 예고였습니다. 세 번째 예고는 더욱 상세하고 정확하고 생동감 있게 기록되었습니다. '인자'(人子)의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s του ανθρωπου)는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14의 다니엘이 본 네 짐승 환상에서 나온 '인자같은 이'( )를 말하는 관용적 용어입니다. 곧 '인자'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창28:10-14, 삼하7:12-14, 겔1:26-28, 단7:13-14). 예수님은 자신이 그 구원자로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고난받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52:13-53:12). 첫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둘째는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주고, 그들이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0:19에는 십자가에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15:1)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사형집행권이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로마 군병들은 온갖 육체적 고통과 인격적 모욕을 주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한 '인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곧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죄값을 완전히 치러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 부활과 영광은 떼 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향해 마주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삶과 사역이 그 길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향해서만 가는 분이었습니다 (눅22:22, 요4:34). 우리도 제자로서 사명이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5. 야고보와 요한의 욕망 (35-45절)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있었으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전혀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8:32, 9:32). 제자들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끝난 직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구하는 바를 주기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35절). 여기에서 예수님께 구한 자들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마태복음20:20에는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라고 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구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했을 때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고 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관점에서 볼 때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만 와서 구한 것이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도 데리고 와서 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와 구한 것인데 마태는 화제의 중심이 그들의 어머니에게 있다고 본 것이고 마가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특별한 것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친 자매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5:40, 마27:56, 요19:25).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 어머니와 친 자매이면 그들에게는 예수님 어머니가 이모이고 예수님은 사촌간이 되는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36절). 그랬더니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37절). '주의 영광 중에서'를 마태는 '주의 나라에서'라고 했습니다 (마20:2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의 왕이 되면 자기들을 2인자와 3인자 위치에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이른바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했습니다. 자기는 구약에서 예언된 '인자'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3일만에 부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3-34절). 하지만 그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자로 믿기는 했지만 (8:29, 마16:16), 현실의 정치적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왕이 되어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들을 구하고 다윗 때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나 (마20:20) 야고보와 요한 뿐 아니라 함께 있던 제자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나머지 10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화를 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1절). 마태는 제자들이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마20:24). 예수님과의 혈연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청탁한 것을 보고 똑같이 따라 다니면서 말씀 배우고 사역하고 훈련받았는데 왜 자기 들만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냐고 분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자기들도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예수님의 왕권과 자기들이 얻을 영광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에 예수님은 그들이 그들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38절). 예수님은 그들이 주의 영광 중에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요청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광에 이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얻는 영광에 참여하려면 예수님의 당한 고난과 죽음을 함께 당해야 합니다. '잔'과 '세례'는 고난과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14:36, 마26:39, 눅12:50).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구했는데 그러면 예수님처럼 고난과 죽음을 당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39절). 영광에 대한 욕망 때문에 잔과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깊이 생각지도 못하고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했습니다 (39절).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려면 잔과 세례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의 진의를 모른 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들이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잔과 세례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A.D.44년에 헤롯(Herot Agrippa)에 의해 사도 중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고 요한은 순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밧모섬에 유배되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행12:2, 요1:9). 예수님은 연이어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0절). 이 구문에서는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권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영광을 얻는 데에는 자신이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둘 사이에 조화가 쉽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이 영광을 얻으려는 데에만 집중해 있는 것을 꼬집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세속적 사역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과 사역을 통해 자신이 세상적으로 잘될 것을 열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바로 안다 하더라도 영광을 얻을 것만 기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 중에 자기들을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했습니다. 나머지 10제자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41절). 그것은 그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왕이 될 것으로 오해하여 자기들도 예수님을 등에 업고 정치적 권력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그들을 불러다가 일렀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했습니다 (42-43절上). 이방의 왕권을 가진 통치자와 그 밑에 권력을 가진 관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백성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ουχ ουτωs δε εσται εν υμιν)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방 통치자들이나 관료들처럼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갖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43下-44절).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아지고 다스리는 자가 되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διακονοs)는 시종 드는 일꾼을 말하는 바 집사나 목사 등의 사역자들에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고전3:5, 엡3:7, 빌1:1).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당연히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종'(δουλοs)은 주인을 섬기는 자입니다. 공동체에서 섬기는 자가 되려면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낮아짐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진정한 섬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이 되어 주셨습니다 (빌2:6-11).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45절). 예수님은 세상 왕이 되어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0:28에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자'(人子)에 해당하는 헬라어 'ο υιοs του ανθρωπου'는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에 예언된 '인자 같은 이'( , 케바르 에나쉬) 곧 '사람의 아들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를 말하는 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그리스도)라는 의미로 사용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대속물'(代贖物)에 해당하는 '뤼트론'(λυτρον)은 '속전'을 말하는 바 노예를 풀어 주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죽음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어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곧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우리도 마땅히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20:26(막10:43)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섬기는 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s)는 종처럼 '시중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첫째, 섬김에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섬기는 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죄로 인해 죽어야할 자리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이 강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섬김에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에서 섬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긴다 하면서도 우리의 관점에서 섬깁니다. 섬김을 받는 대상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가 말한 '섬기는 리더쉽'(servent leadership)이고, 헨리 나우웬 (Henri. J.M. Nouwen)가 말한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동성애자라는 말이 있지만 그가 주장한 의미 자체는 좋은 것임). 셋째, 섬김에는 낮아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를 버리고 우리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졌습니다. 빌립보서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희생과 배려를 하려면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안됩니다. 마태복음20:27(막10:44)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자기 계획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6. 소경 바디매오를 치유 (46-52절)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 지방을 둘러 요단강 동쪽 뵈레아에서 방향을 돌려 요단강 서쪽 유대 지방 여리고에 이르러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로 들어가셨습니다 (46절).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8km 정도에 유치해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예루살렘은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구여리고와 신여리고로 분리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구여리고가 거의 황폐화되어 있었고 신여리고가 발전해 가고 있었습니다. 신여리고는 헤롯왕이 건설했고 헤롯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종려나무가 많은 오아시스 땅이어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 구여리고에서 신여리고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길 가에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46下-47절). 마태는 소경 둘이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마20:30) 마가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요점이 될 만한 인물 바디메오만 언급했습니다. '바디매오'(Bartimaeus)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바디매오의 아버지와 바디매오는 여리고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정상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거지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마침 그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유대인 바디매오가 나사렛에서 온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칭한 것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 예언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천명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삼상7:12-13). 그는 예수님을 오실 구원자로 믿고 오실 구원자가 가져올 축복과 관련하여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치병을 위해 부르짖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고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고서"라고 소릴 질렀습니다 (48절). 사람들은 거지 소경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며 치병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하지 못해'하는 식으로 매정하게 질타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도 보잘 것 없는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았는데 (13절)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거지 소경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예수님을 부르짖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구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가 소리질러 이르되'에 해당하는 '엨크라젠'(εκραζεν)이 미완료인 것을 보아 계속 크게 소리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리는 예수님께 들렸고 예수님께서는 머물러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49절上).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결연하게 나아가던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바디메오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디매오를 부르며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49下-50절). 바디매오는 밤낮의 기온차 때문에 외투를 밤에는 침구로 쓰다가 낮에는 걸치고 있었을 텐데 너무 기뻐서 외투를 걷어치우고 뛰쳐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러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51절).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눈을 고쳐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다시 한 번 물은 것입니다. 바디매오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시인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앞을 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고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52절).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보고 치병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바디매오는 눈을 떴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누가복음18:43에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가 육신적인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인생의 가치에 대한 눈까지 뜨게 된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믿음을 보이므로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고침받았고 삶의 고통 문제를 해결받았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믿었습니다. 둘째, 예수님 만나는 것을 주변환경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물을 때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시며 무엇을 구하면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바른 소원을 가지고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고 했고, 요한일서5:14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結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일관되게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대속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일념에도 불구하고 가는 과정에서 소외받는 어린 아이들과 거지 맹인을 제자들과 무리들과는 달리 거절하지 않고 친히 길을 멈추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는 로마에서 박해도 고통받으며 주의 위로를 의심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을 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