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마가복음11:1-33
<題目> 종의 왕적 권위
<序言>
본 장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주간의 첫 날을 시작하는 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그리고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해서 자신이 참 구원자임을 확실히 증거하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예루살렘 입성(1-11절), 무화과나무 저주(12-14절), 성전 정화 사건(15-19절), 마른 무화과나무 교훈(20-26절), 권위에 대한 논쟁(27-3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루살렘 입성 (1-11절)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1절上).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사역을 바치고 유월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했습니다. 여리고를 지나 감람원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람산’(Mount of Olives)은 그곳에 감람나무(올리브나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은 여리고에서 24km 떨어진 곳이고 예루살렘까지는 3km 남은 곳입니다. 감람산은 해발 800m 정도의 산으로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산입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쪽으로는 기드론 시내가 있어서 감람산에서 보면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기드론 시내가 있고 건너편에 감람산이 있음). 그런데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그 감람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벳바게에 이르렀다고 했고 (마21:1), 마가와 누가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막11:1, 눅19:28). '벳바게'(Bethphage)와 '베다니'(Bethany)는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를 동일한 마을로 보는 사람도 있고 (Barcley), 벳바게와 베다니를 서로 인접해 있는 다른 마을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Lightfoot, Godet). 아마도 베다니는 여리고에서 들어오는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벳바게는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감람산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무시고 다음날 벳바게로 오신 것입니다 (요12:1,12).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오라는 말씀을 한 장소를 마태는 벳바게로 기록했는데 마가와 누가는 벳바게와 베다니를 동시에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마가와 누가는 넓게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 중 둘을 보내며 맞은 편 마을에 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니 그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보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1下-3절). 예수님이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냈다고 했는데 이 두 제자는 어느 제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으로 보나 여기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눅22:8).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에 있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까 매여 있을 것이니 그 나위를 풀어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1:2에는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했고, 마가복음11:2과 누가복음19:30에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신 것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귀 새끼는 어미와 같이 있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끌고 오기 위해서는 어미 나귀도 함께 끌고 와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나귀 가운데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마가와 누가는 핵심적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타고 가기 위해 그 나귀를 끌어 오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스가랴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말 대신 나귀를 필요로 하신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겸손하게 입성하실 것에 대한 상징에 알맞고 (사9:6, 슥9:9, 마21:6),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필요로 하신 것은 세속적인 일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하고 거룩하게 입성하실 것에 대한 상징에 알맞습니다 (민19:2, 신21:3, 삼상6:7). 예수님은 그 명을 내리면서 제자들이 그 일을 그대로 실행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을 것이기 때문에 누가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보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여기에서 사용한 것은 예루살렘 입성이 '주' 곧 구원자로서 입성하실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을 생각하고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섭리로 보내 주게 될 것을 예견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시한 곳에 가서 보니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을 하려는지 물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대로 말하니 그들이 허락을 했습니다 (4-6절). 제자들이 예수님이 지시하는 곳에 갔을 때 집 주인이 거리로 연결된 집 바깥에 매어 놓은 나귀 새끼가 있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귀 새끼를 풀어 오려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지시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예지력으로 알고 지시했다는 암시가 느껴집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풀었습니다. 그 때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는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라고 했는데, 누가복음19:33에는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했습니다. 아마 임자와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의 표현은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는 의미로 느껴지고 누가의 표현은 왜 가져가려 하는지 묻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질문에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1:6에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나귀의 주인이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 주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명성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예수님이 쓰시려 한다는 말에 막지 않고 허락한 것입니다.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내놓은 것은 결과를 볼 때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메시야 사역을 이루는 데에 바른 이해를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얹어 놓자 예수님이 그 위에 올라탔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7-8절).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은 것은 안장 대용으로 올려 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에 대하 존경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으로 치켜세우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하9:13). 그리고 예수님이 그 위에 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스스로 그 위에 타신 것으로 기록했으나 (마21:7, 막11:7) 누가는 제자들이 태운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눅19:35). 제자들이 그 위에 태우시니 예수님이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타신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벤’에 해당하는 ‘에코프톤’(εκοπτον)과 ‘펴며’에 해당하는 ‘훼페스트론뉘온’(υπεστρωννυον)은 시제가 미완료형으로서 계속해서 베어다 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고 나뭇가지를 베어다 깐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존경과 환영에 대한 표시입니다. 마태복음21:8에는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라고 했고, 마가복음11:8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2:12-13에는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라고 했습니다 (요12:18). 종합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는 앞길에 겉옷을 펴 깔았고, 갈릴리 지방에서부터 따라온 순례자들도 이에 합세하여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앞길에 깔며 들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 앞길에 깔았고, 예수님의 행차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마중 나와 합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심중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제자들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왕의 행차나 개선 장군의 입성에 존경하는 표시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하신다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앞서 가고 사람들은 그 위를 따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9-10절). 아마도 이 사람들은 평소 예수님의 따르는 자들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행하던 무리들일 것입니다. '호산나'(Ωσαννα)는 '호쉬아 나'(הושיע נא)의 음역으로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으로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바로 그 왕인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삼하7:12-13, 사9:6-7, 암9:11).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왕으로 오시리라 예언된 구원자로 알고 높였지만 다윗 왕국의 번영을 재현할 정치적 왕으로 생각하고 높인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천사들의 찬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제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소서'라는 의미로 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고 베다니로 돌아오셨습니다 (11절). 마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온 도시가 들끓었다고 했으나 (마21:10-11). 마가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정치적 차원에서 B.C.20년 경에 착공하기 시작하여 80여 년간 기간을 거쳐 A.D.64년 경에 완공했습니다. 하지만 6년 뒤 A.D.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전은 아직 준공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건축 기간을 생각하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유대교의 실상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을 둘러 보시고 베다니로 가서 휴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헤롯 성전)을 둘러 보신 것은 다음 날 성전을 정화한 사건에 대한 암시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사건에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구원자로서 평화와 평강과 평안을 주는 구원자로 입성하셨습니다 (삼하7:12-13, 사9:6-7, 슥9:9, 암9:11, 마21:6). 예수님은 그 일에 나귀를 원하셨고 나귀 주인은 나귀를 기꺼이 드렸습니다 (4-6절, 눅19:33-35). 우리도 주님의 구원 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무화과나무 저주 (12-14절)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서 나와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기 위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했습니다 (12절). 마태복음21:18에는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Πρωι)은 새벽3~6시 사이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숙소에서 이른 아침에 나왔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안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예루살렘성에 이르는 도중에 시장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무화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3절). 지나가는 행인이 배가 고파서 과실을 따 먹는 것은 율법에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신23:24-25). 따라서 예수님은 시장한 터에 무화과나무가 눈에 들어와서 무화과 나무에 접근했는데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때가 결실기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화과 결실기는 1년에 두 번인데 첫 수확기가 6~7월입니다. 본문 상황 당시는 유월절이 가까운 4월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열매가 없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다 그 말을 들었습니다 (14절). 예수님이 시장하여 열매를 얻기 위해 무화과나무에 갔으나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무화과나무에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한 것입니다. 결실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을 때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에서 자기가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었던 점들을 열거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죄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일입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어서 열매가 없었는데 그런 나무를 저주한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어서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저주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것을 보시고 당시 유대교의 실상에 대해 표적하기 좋은 예로 여기고 그 표적을 위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형식과 의식과 외식과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찼습니다. 진정한 영적 필요를 제공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심판하실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교는 성전 제사는 드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성막, 실로 성전, 다윗 성전,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은 구약시대 때부터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였고 인간과 교제하는 장소였고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장소였습니다. 그 성전은 모두 오실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 상징이었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요2:19-21, 마12:6, 27:51). 또한 유대교는 제사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구약의 제사에 사용된 모든 희생 제물도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히9:12-15). 결국 성전에서 제사함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과 대망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그림자인 성전 제사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의식과 탐욕과 교권에 가리워져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는 부정했습니다. 성전 숙정 사건에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찬양을 받게 되자 성전 지도자들이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분을 냈습니다 (15절).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죽일 계책을 세우고 십자가에 내어 주어 죽게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종교적 생활은 열심히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여 헛된 열심을 내거나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자인 것, 세상과 인간사를 다스리는 자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일2:22, 4:3). 그를 본질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해도 생활 가운데 부인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권위를 지키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를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해설자가 크리스챤을 정원으로 안내하여 한 나무를 보여 주는데 그 나무는 속이 모두 썩어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상징입니다 (딤후3:5).
둘째는 유대교는 율법은 행하나 근본정신인 사랑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민족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생활은 엄격했습니다. 금식, 기도, 십일조, 말씀 묵상, 안식일 지킴 등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멸시하고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버린 것입니다 (마23:23).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22:37-40). 야고보서2:8-9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근본정신은 지키지 않고 외부적인 율법만 철저히 지키는 것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요한일서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고, 4:7-8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했고, 4:20-21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긍휼없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약2:13).
셋째는 유대교는 장로 유전과 전승은 따르나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왕상4:25, 왕하18:31). 무화과나무는 나무 자체가 우람하고 보기 아름답습니다. 밑 둘레가 약1m, 높이가 5~6m, 가지가 8~9m의 너비까지 뻗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명상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요1:48). 이 나무는 언약의 땅을 가리켜 '무화과 나무의 땅'이라고 표현했고 (신8:8), 산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민13:23). 그래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는 것은 평화와 안정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상4:23, 미4:4, 슥3:10). 유대교가 백성들로 하여금 이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잎이 무성했습니다. 흠없는 제사와 거룩하게 구별된 세겔을 연보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의식과 권위와 탐욕이 있어 상업주의와 위선으로 가득차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해를 입혔습니다. 유대인의 장년은 엄청난 성전 운영비를 위해 매년 한 번씩 반 세겔을 바쳐야 했습니다. 유월절 한 달 전에 전국적으로 설치된 납세소에서 거두어 들였으며 (17:24), 그 때 납부하지 못한 자는 유월절 직전 성전에 찾아가 남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시 성전세는 특정한 은 돈으로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소위 돈 바꾸는 자들은 엄청난 환전료를 요구했습니다 (2.1~4.2%). 그리고 그 때 드릴 희생제사에 쓰일 짐승은 성전 안에서 검인이 찍힌 흠없고 안전한 것으로 여겨 무려 10배 이상 비싼 값에 매매되었고 그 부당 이익금은 대부분 제사장 몫이었습니다. 이것이 잎만 무성한 성전 제도요 장로 유전이요 전승입니다. 잎이 무성한 것을 보면 진정한 풍요와 만족과 은혜와 생명과 축복을 받는 것 같으나 오히려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 있는 병인들을 고쳐 주고 '호산나' 찬양을 받았으나 유대 성전에서는 정말로 생명이 필요한 자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베데스다(자비의 집이라는 뜻)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가 소외 당한 것과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자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버림받은 것은 그 증거입니다. 교회는 외부적으로 열심을 내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가 있어서 생명을 살리고 영적 만족과 풍요를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형식에만 치우친 종교 매너리즘을 조심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소위 썬데이 크리스챤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15:8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보면서 열매없는 나무에게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열매 맺지 않은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는 말씀 (마3:10), 장사하지 않은 자에게 '나는 너를 알지 못하니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한 말씀 (마25:30), 맛 잃은 소금에게 '사람에게 밟히우리라'는 말씀 (마5:13),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자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2:5).
3. 성전 정화 사건 (15-19절)
성전청결 숙정(肅正)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습니다 (마21:12-17, 막11:15-17, 눅19:45-48, 요2:13-22). 성전 숙정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두 번 있었는데 요한복음 2장에 나와 있는 사건은 성역 초기의 사건이고 공관복음(마,막,눅)의 사건은 성역 후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성역 후기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한 주간 안에 있었던 사건인데, 마태복음에서는 입성하신 날에 일으킨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고 마가복음 본문에서는 입성하신 다음날일 월요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예수님이 주일에 입성해서 성전을 둘러 보시고 예루살렘 밖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아침 일씩 나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고 돈 바꾸는 자들의 살을 둘러 엎었습니다 (15절). 뿐만 아니라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6절). 당시 절기가 가까워지면 바깥 마당인 이방인의 뜰에서 제물용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이 장사를 했고, 성전세용 화폐를 교환해 주는 장사꾼들이 장사를 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짐승을 제물로 드릴 때 흠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했고 돈을 성전제로 속전을 드릴 때 반 세겔을 드리도록 했습니다 (출12:5, 레1:3, 출30:13, 레27:3).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려는 순례객들이 제물용 생축을 어렸을 때부터 기르기도 힘들거니와 먼 길을 끌고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제물용으로 기른 생축을 팔았고, 생활 가운데 로마 화폐나 헬라 화폐를 사용했기에 유대 화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당시는 고대 히브리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히브리 화폐와 비슷한 두로의 은전이 사용되었다고 함- Lane, Wessel). 그런데 제물용 생축은 일반 생축보다 훨씬 비쌌고, 환전에도 2~4%의 웃돈을 받았습니다 (Billerbeck). 이 시장이 원래는 예루살렘 건너편 감람산에 4곳이 있었고 그 시장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대부분 산헤드린에서 관할했으나 가야바 대제사장이 이를 탐하여 성전 뜰 안에 새롭게 개설을 한 것입니다 (Eppstein). 사람들은 당연히 성전 안에서 파는 생축을 이용하고 환전을 하는 것이 감람산 시장들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용이했기 때문에 성전 안에 이루어진 시장을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성전 권력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제사가 율법대로 시행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연합하여 성전과 율법의 기득권을 유지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했습니다 (17절). 이사야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와 예레미야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의 인용입니다. '기도하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프로슈케'(προσευχη)는 '기도' '예배'를 뜻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자기 백성들을 통해 예배를 받기 위해 특별히 거룩하게 선정해 놓은 곳입니다. 종교 기득권자들인 대제사장들(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은 그 성전을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고 예수님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했습니다 (18절). 예수님의 행동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행위에 놀랐고 가르침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궁구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대표자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갈릴리에서 헤롯당과 공모하여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기 시작했었습니다 (3:6).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은 분명 사두개인들인 대제사장들에게 권위에 대한 도전과 금전적인 손해를 주는 것이었고 바리새인들인 서기관들에게도 교훈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리적으로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집단들이었지만 (12:18, 마22:23), 예수님은 두 집단 모두에게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의 적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연합하여 가증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행23:9).
그리고 예수님은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9절). 저녁이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성을 나갔습니다. 아마 어제 저녁에 머물렀던 숙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곳은 베다니 마을인데 (마21:17) 아마도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성전을 정화시킨 것입니다. 17절에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곳인데 그 곳에서 자기들의 이익을 남기려는 장사행위로 가득한 가증함을 보고 정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2:17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둘째, 유대교에 심판을 경고한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성전과 제사와 율법은 유대교를 대표합니다. 사두개인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인 서기관들도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유대교를 정죄하고 심판을 경고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자임을 계시한 것입니다. 요한복음2:13-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역초기에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2:19-21). 유대교 성전은 제물와 속전을 통해 하나님께 죄 사함을 얻는다는 표방을 했지만 진정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 대속으로 제물이 되어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로서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자라는 것입니다 (요4:14, 6:51, 8:12, 14:6). 요한복음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4. 마른 무화과나무 교훈 (20-26절)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시키기 위해 베다니 마을에서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시장하여 무화과나무를 보고 가까이 갔으나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저주했었습니다 (12-14절).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짐승파는 자들을 내어 쫓고 돈 바꾸어 주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었었습니다 (15-19절). 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나와 베다니 마을에서 유숙했는데 아침에 마을을 나왔을 때 자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했습니다 (20-21절). 마태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순간에 말라 버린 것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마21:18-20).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다음날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물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고 하든지 다음날 봤을 때 말라 있었다고 하든지 마른 시간대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22-23절). 예수님이 전에 어떻게 귀신이 나갔는지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고 뽕나무 뿌리도 뽑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마17:20, 막9:29, 눅17:6).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산을 바다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의도를 가지고 행하시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의도를 가지고 하시려는 일에 순종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사건은 의미가 같은 사건입니다.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것은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탐욕과 의식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그것들을 전혀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자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요2:19-21, 14:6). 그 의미와 연관되어 무화과나무도 유대교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어 시장기를 해소하기 위해 찾는 자에게 필요를 줄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는 의식만 거창할 뿐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교를 심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파괴될 것을 선언한 것이고 무화과나무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이에 대해 14절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찾거나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도를 아시고 성전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셨고 무화과나무에 이해할 수 없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당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화과 결실기는 1년에 두 번인데 첫 수확기가 6~7월입니다. 당시는 유월절이 가까운 4월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열매가 없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하나님이 유대교를 심판하실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한 경고로 유대교 실상과 흡사한 모습을 가진 잎만 무성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에 그런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인데 그의 의도에 맞는 순종을 하면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이루시므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24절).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말했는데 기도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인 것을 믿고 하나님의 의도를 바로 깨달아 그 의도에 맞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6:33, 요14:14, 요일5:14).
그리고 예수님은 또 이어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5절). 산상수훈에서 제단에 제물을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시고 (마5:23-24),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하나님께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마6:12,15). 기도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해 줄 때 하나님도 우릴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 줄 때 하나님도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말과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삶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26절은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없음)'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사본은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베자 사본이 있는데 어떤 곳에는 있고 어떤 곳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1,545년에 인쇄된 스테판(Stephen)본에는 26절에 "그러나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저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리라"는 내용을 넣었으나 1,975년에 인쇄한 네슬(Nestle-Aland)판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영역본들(KJV, NASB, NIV)에서는 스테반본을 따라 넣었으나,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네슬판을 따라 넣지 않았습니다. 26절은 스테판 본처럼 넣으면 의미가 더 강조되고 네슬 판처럼 넣지 않아도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5. 권위에 대한 논쟁 (27-33절)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거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왔습니다 (27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세번째입니다. 수난주간의 첫번째날(주)에 나귀를 타도 입성했고, 둘째날(월)에 성전에 들어가 성전정화 표적을 행했고, 셋째날(화)에도 성전에 들어가 다니셨습니다. 아마도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 같습니다 (마21:24, 눅20:1). 그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의 산헤드린(Sanhedrin) 공회(公會)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 συνεδριον)은 '함께'와 '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기원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없지만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구성한 70인 장로회에 기원을 두고 있고 (민11:16-24)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재조직했다고 알려져 있고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활동을 했습니다. 공회원은 의장1명과 의원70명(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는데, 율법에 의한 사법권과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 때나 에스라 때에는 좋은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 때에는 심히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며 누가 이런 일을 할 권위를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28절). 전 날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짐승을 파는 자들을 내어 쫓고 돈을 바꾸어 주는 상을 둘러 엎고 파는 기구들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표적을 일으킨 것은 성전을 정화하고, 유대교의 심판을 선언하고, 자신이 진정한 구원을 주는 자임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2:19-21). 하지만 그 행위는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적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항을 이용하여 순례자들이 흠없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고 깨끗한 돈으로 속전을 드려야 한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이 인정하는 짐승을 사게 했고 (제사용으로 길렀다는 짐승으로) 자신들이 인정하는 환전을 하게 했습니다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이나 헬라 화폐인 드라크마를 성전용인 세겔로). 그로 인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이 율법과 성전을 이용해 자신들의 탐욕만 채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이 만든 제도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으면 자신들의 기득권에 막대한 위협이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올가미에 걸릴 만한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행한다고 대답하면 신성모독죄로 체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만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대상(자기를 포함하여)이 준 권위로 행한다고 대답하면 성전 운영과 치안에 관한 책임을 가진 산헤드린 공회가 부여하지 않은 행위를 한 죄로 체포할 수가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된 질문을 간파하시고 그들의 질문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29절). 이어서"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30절). 세례 요한이 누구에게 받는 권위로 가르치며 사역을 하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예상치 않은 질문에 그들은 당황하며 의논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들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31-32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죄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받게 하고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구원자로 전했습니다 (눅3:3-8).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그의 말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찬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들을 돌로 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눅20:6).
예수님은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대답을 하자 예수님 자신도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는지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3절). 예수님의 지혜를 엿볼 있는 부분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여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교 특히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율법과 성전과 제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자들임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죄성이 지배하여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도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불의를 드러내려 하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철저히 공격을 합니다. 세례 요한도 그런 자들에 의해 순교당했고 예수님이 그런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자들이 아닌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