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마가복음12:1-44

<題目> 종의 선지자적 권위


<序言>

   앞 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 표적을 행하고 예루살렘을 나갔다가 다음날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도전적인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대답을 했습니다 (11:27-33). 본 장은 그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의 연속입니다. 내용구조는 악한 농부의 비유(1-12), 납세에 대한 논쟁(13-17), 부활에 관한 논쟁(18-27), 첫째되는 계명에 대한 언급(28-34), 다윗의 자손에 대한 설명(35-37),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38-40), 과부의 헌금에 대한 평가(41-44)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악한 농부의 비유 (1-12)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행한 권위에 대해 질문을 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한 출처를 반문하므로 그들의 도전적인 질문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그 후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함을 드러냈습니다. '비유'(παραβολη)는 화자가 본래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낯익은 상황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에서 '비유'(παραβολαιs)는 복수로서 여러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본 비유 앞에 두 아들 비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21:28-32).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했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 주인은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습니다 (1). '산울타리'는 야생동물 등의 침입자로부터 포도원을 보호하기 위해 포도원 둘레로 돌을 쌓게나 가시나무 등을 세우는 담장이나 울타리를 말합니다. '즙 짜는 틀'은 포도즙을 짜는 시설과 도구를 말합니다. 그 시설은 석회암에 구덩이 둘을 연이어 파거나 흙 땅에 구덩이 둘을 파서 석회를 바른 다음 두 구덩이 위로 연결된 도랑을 파고 그 도랑 끝에 항아리를 놓습니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하면 그 구덩이에 넣고 밟아서 도랑을 통해 흘러 항아리에 채워진 즙을 가죽 부대에 담아 보관을 하는 것입니다. '망대'는 외부의 침입자를 발견하기 위해 세운 원두막입니다. 망대는 주로 너비 4규빗 높이 10규빗 정도로 지어서(1규빗은 45.6cm) 포도원을 지키는 농부들이 거하기도 하고 포도원 도구들을 보관하기도 하고 포도 소출을 보관하기도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필요한 모든 여건을 갖춘 다음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1).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타국으로 가면서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으려 한 것입니다. 당시 소작 관례는 소작농은 농사를 해서 얻은 수확의 40%정도의 현물이나 그에 해당하는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포도나무는 심은 지 4년만에 첫 수확을 하게 되고 수확시기는 대개 9월쯤이었습니다. 포두원 주인은 포도원 수확 때가 되자 소작농들에게 약속된 소작료를 받기 위해 한 종을 보냈습니다 (2). 그런데 소작농들은 그 종을 잡아 심히 때려서 거저 보냈습니다 (3). 포도원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여 보냈습니다 (4). 주인은 또 다시 종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종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여러 종을 한꺼번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5).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 존대하지 않겠는가 생각하여 최후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6). 소작농들은 그를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면 그의 유산이 자기들 것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7). 당시에는 소유주가 없는 재산으로 판명된 재산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누구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는데 그럴 경우 제일 먼저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에게 소유권이 돌아갔습니다. 그런 소유 관계 법률에 비추어 보면 상속받은 아들을 없애 버리면 포도원 주인이 죽은 후에는 그 포도원이 당연히 자기들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작농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8). 마태와 누가는 아들을 먼저 포도원 밖으로 끌어낸 다음에 죽인 것으로 서술했습니다 (21:39, 20:15).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청중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9). 주인이 소작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능욕한 악한 소작농들을 심판하여 사형시키고 포도원을 성실한 소작농에게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하나님 나라),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소작을 맡은 '농부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주인의 '종들'은 선지자들을,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택하여 제사장적 나라를 이루려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주셨습니다. 보호해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과 성전과 제사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35:15"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씌우는 고랑을 채웠습니다. 스가랴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20:1-2, 대하24:20-21, 11:37).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이제 유대 지도자들 특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인 대제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와 막대한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기도 결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3:12-13).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구원 사역을 그들을 통해 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하고 이방 사역자들을 통해서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9:28, 22:28-30, 9:19-33, 11:16-32).

 

  우리는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책망하고 있는 대상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같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영이 거듭나고 천국을 가는 보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선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가 위로받고 우리가 만족을 얻고 우리의 잘남을 과시하고 모두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수단들을 우상의 모양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로마서1: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병행비유인 마태복음21: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한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예수님은 악한 농부들 비유를 말씀하시고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고 했습니다 (10-11).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건축자들이 부적격 판정을 내려 버린 돌이 건축에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κεφαλην γωνιαs)'모서리의 머리'로서 '모퉁잇돌'(cornerstone)을 말합니다. 이 돌은 건물을 지을 때 두 개의 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모퉁이에 놓는 돌로서 그 돌을 기준으로 하여 두 벽이 쌓아지기 때문에 '머릿돌'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돌을 기초로 위로 쌓아지기 때문에 '기촛돌' 혹은 '주춧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돌은 건물의 각을 잡고 건물의 하중을 받혀야 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사용하는 아주 요긴한 돌입니다.

 

  예수님은 시편118:22-23"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는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8:14-15, 2:34-35).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수많은 폭풍과 같은 시련을 거치고 나서 전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한 시기에 저술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하2:4, Talmud, Targum, Calvin, Matthew Henry). 다윗이 사울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오랫동안 시련을 당했지만 마침내 사울 왕가가 몰락하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아 쫓겨 다녔으나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다윗은 그 일에 대해 눈으로 보기에 참으로 기이한 일었다고 했습니다.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고백을 인용하여 자신에 대한 위치를 선언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 συνεδριον)'함께''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공회원은 의장1명과 의원70(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는데, 율법에 의한 사법권과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는 곳마다 사람을 파견하여 방해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 정권을 이용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시므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할 것입니다 (4:11, 2:20, 벧전2:7). 그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그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한 말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했으나 무리를 두려워 하여 예수님을 두고 갔습니다 (12).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비참하게 패퇴한 것입니다.

 

 

        2. 납세에 대한 논쟁 (13-17)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의 악한 농부들 비유를 듣고 화가 나서 물러갔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다음날() 또 예수님 말씀을 책잡기 위해 성전 마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께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13).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3:6에 이어 두번째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 야합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는 유대교의 바리새파로서 율법을 철저히 강조하는 동시에 삼마이(Shammai)학파 같은 경우는 반로마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헤롯당'은 헤롯을 따르는 파당으로서 친 로마적인 정치집단인데 메시야 운동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종교당파와 정치당파로서 또한 반로마적 성향과 친로마적 성향으로 전혀 다른 집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야 운동을 반대한다는 공동의 입장을 가지고 연합하여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14). 예수님을 사람에 의해 치우치지 않고 참되게 진리만 가르친다고 수사학적 미사여구로 치켜 세운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지 말 것인지 물었습니다 (14-15). '가이사'(Caesar)는 로마 황제에 대한 칭호입니다. '세금'은 로마황제가 부과한 세금을 말합니다. 인두세와 지세와 소득세가 있었습니다. 인두세(人頭稅)1인당(남자 14~65, 여자 12~65) 1데나리온씩 바치는 세금이고, 토지세(土地稅)는 수확량 중 곡식의 10분의1이나 술이나 과일은 5분의1을 현물이나 현금으로 바치는 세금이고, 소득세(所得稅)는 소득의 1%를 바치는 세금입니다. 그 중에 본문에서 말한 세금은 인두세를 말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동시에(십일조, 속전, 성전세 등) 지배국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특히 젤롯파). 그렇게 때문에 만일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바치라 대답하면 매국노라는 여론이 형성될 것입니다. 반대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지 말라 대답하면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고소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대답을 해도 걸려 들 수 밖에 없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시험하느냐고 하면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보이라고 했습니다 (15). 그들의 위선적인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그들의 악함을 하셨다고 했고 (22:18), 누가는 예수님이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고 했습니다 (20:23). 그들은 1데나리온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16). '데나리온'은 로마 화폐로서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 있는 동전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20:2). 당시 디베료(Tiberius)가 황제였으므로 디베료 황제의 얼굴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그에 대해 찬사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동전을 가지고 온 것은 그들이 그 동전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그들이 이미 가이사의 권세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납세 의무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 동전의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인지 물었고 무리들은 가이사의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16). 그러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17).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에게 바쳐야 할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나 속전이나 성전세 등을 드려야 하지만 가이사 황제가 요구하는 인두세도 납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초월적 지혜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공동체를 통해 제공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되고 공동체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되고 공동체의 일원을 돕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정식으로 위배되지 않는 한 국가에 대한 의무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국가와 위정자들을 통해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보답하는 것이 되고, 국가 일원을 균등케 하는 일에 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잘될 때 우리도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과 사역에 매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13:1-2"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2:13-14에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2:1-2에는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29:7에는"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에 대해 가져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3. 부활에 관한 논쟁 (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을 물리치신 후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18). 당시 유대교의 분파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와 젤롯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Sadducees)는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Σαδδουκ)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사제 계층과 일반 귀족에 속한 자들로서 정치와 종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주도권을 가진 자들로서 합리적 사고를 가진 이성적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인정했으며 내세와 부활과 천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모세의 글에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해 상속자를 세우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7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했다가 상속자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했다가 상속자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7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했는데 부활 때 그들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19-23). 이는 고엘(לאג)제도 중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을 두고 한 말입니다 (25:5-10). 이는 첫째 아들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죽으면 둘째 아들이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런 법을 주신 것은 가문의 계대를 잇게 하려는 의도도 있고 가문의 기업을 보존해 주려는 의도도 있고 과부된 자를 보호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내세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세5경에 나온 계대혼인법의 논리를 근거로 내세와 부활이 있다는 가르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곧 자신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은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논리는 이미 내세와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와의 논쟁에서 사용했던 논리였을 것입니다 (Wessel).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24-27).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 관점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시나무 떨기에 나타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3:6). 이는 하나님이 언약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신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함께 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함께 하여 그들에게 주었던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현재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Εγω ειμι, 나는...이다, 22:32). 그것은 족장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족장들이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세에 살아 있으며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을 시사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어 있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으로서 족장들이 여전히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세나 부활 때에는 장가가거나 시집가지 않고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생로병사의 결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가 아니라 그런 결핍성과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완전히 극복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20:36).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으로서 그같은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생활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 이상의 것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세와 부활과 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논리로 사두개인들을 물리쳤습니다. 무리가 듣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22:33). 심지어 어떤 서기관(율법학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말씀을 잘하셨다고 했습니다 (20:39). 우리는 성경을 이성적 현세적 논리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보아야 하고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내세와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고 소망 가운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첫째되는 계명에 대한 언급 (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앞서 성전과 관련하여 대제사장들과 서시관들과 장로들의 도전이 있었고 납세와 관련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도전이 있었고 부활과 관련하여 사두개인들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율법에 대한 해박함은 물론이거니와 영적 분별력에 대해 심히 놀라게 했습니다. 그 변론을 지켜보던 어떤 한 서기관도 감동하여 예수님의 참됨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했습니다 (28). '서기관'(γραμματευs)'기록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레위지파에서 많이 배출되어 제사장 직무를 기록하거나 성전 수리비로 모금된 공공기금을 계산하여 기록했습니다 (대상24:6, 왕하12:10-11, 대하24:11). 특이하게 정부의 고문 역할을 하거나 군대 소집에 대한 책임을 맡은 이도 있었습니다 (대상27:32, 왕하25:19).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율법학자들에게 사용하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은 것은 율법에서 가장 주요한 핵심이 무엇인지 물은 것입니다. 율법은 613가지 조항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명령이 248, 소극적인 명령이 365개가 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에게는 그 많은 율법 조항들 중에 가장 우선되고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인지에 대한 관심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인 힐렐(Hillel)은 이방인으로부터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는 도전을 받고서 "내가 싫은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온 율법이요 나머지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가서 이것을 배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B.T.b Shabbath 31a). 그런 분위기에서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보고 가장 관심이 있었던 문제를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29-31). 첫 번째 부분은 신명기6:4-5의 인용이며 두 번째 부분은 레위기19:18의 축어적 인용입니다. 첫 번째 부분은 1-4계명에 해당하는 대신(對神)적 내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로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καρδιαs)'목숨'(ψυχηs)과 뜻(διανοιαs)''(ισχυοs)은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하라는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5-10계명에 해당하는 대인(對人)적 내용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용입니다.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동포와 함께 사는 타국인에 한정되었지만 (19:34), 예수님은 원수를 포함한 이방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대했습니다 (5:43-44, 10:29-37).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율법의 대강령인 것입니다 (22:40).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고 호응했습니다 (32-33). 서기관은 예수님의 확실한 답변에 흥분하여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의 답변을 자기의 언어로 다시 반복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특이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이고 제사와 제물은 그 근본정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상15:22, 1:11, 6:6). 서기관의 이 증언은 당시 의식과 형식에 빠져 있었던 유대교에서 특이할만한 시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이 지혜있게 말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고 했습니다 (34). 하나님 나라는 믿음과 중생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서기관이 아직 믿음으로 거듭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율법을 바로 깨닫는 분별력을 가진 것을 볼 때 율법이 지시하는 복음도 깨달아 믿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웃도 사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5:43-44"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0:29-37). 둘째, 계명의 근본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목적을 간과하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원하지는 것이지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29:13"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했고, 이사야 66:3에는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6:6에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9:13, 12:7).

 

 

        5. 다윗의 자손에 대한 설명 (35-37)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35).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22:41, 20:41). '대답하여'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대답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묘사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서기관(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가르쳤고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Χριστος)는 신약의 헬라어로서 문자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지만 의미상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는 메시야(משיח)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보내주실 구원자를 다윗의 자손(후손) 가운데서 보내주실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삼하7:12-16, 9:2-7, 11:1, 23:5-6, 33:15,17,22, 34:23-24, 37:24, 3:5, 9:11). 대표적으로 사무엘하7: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고 했고, 이사야11:1"이새(다윗의 아버지)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고 했고, 예레미야23:5"~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육신의 혈통적으로 볼 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1:1, 1:3).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36). ‘주께서 내 주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토 퀴리오 무'(ο κυριος τω κυριω μου)는 인용된 구약성경 시편110:1을 보면 '예호와 라아도니'(יהוה לאדני)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로서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에게'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를 B.C.3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학자 70여명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아는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70인 역에서는 '호 퀴리오스 토 퀴리오 무'(ο κυριος τω κυριω μου)로 번역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여호와'(יהוה)라는 이름을 직접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을 회피하였기 때문에 대신 ''()라는 뜻인 '아도나이'(אדני)로 대치했는데 70인 역에도 그런 관념이 반영되어 히브리어 '아도나이'와 같은 의미인 헬라어 '퀴리오스'(κυριος)로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70인 역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그리스도)께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원수인 사탄을 발아래 둘 때까지 한시적으로 자기 우편에 앉아 있으라는 말입니다. 고대에는 정복자는 피정복 집권자의 목을 발로 밟아 승리를 상징화했습니다 (10:24).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하신 후 부활 승천하게 하시어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심판할 재림 때까지 자기 우편에 앉아 있게 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라 부른 것을 보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상이 자손에게 극존칭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유대인들의 편협한 그리스도관을 지적하여 바로잡으려는 의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혈통적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과거 다윗 왕국을 재현할 자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이 되어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는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며 (5:2, 1:1, 2:6, 1:15), 정치적인 왕이 아닌 영적인 왕이며, 유대인에 국한하지 않은 온 세상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16"~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고, 골로새서1:15"~하나님의 형상이시요~"라고 했고, 요한계시록19:16"~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6.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 (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39). '서기관'은 바리새인들의 대표자들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을 말합니다. '삼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페테(βληπετε)'보라'는 뜻으로서 그들의 거짓된 실상을 바로 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8-40).


   ①명예욕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8). 당시 서기관들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두루마기 형태의 흰색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옷 끝에는 술을 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마나 팔에 성구를 넣은 갑을 만들어 매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일반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차림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복 차림으로 일반인들과 구별하여 일반인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나타나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둘째,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8). 당시 일반인들은 서기관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면 일어서서 랍비(선생)이라 칭하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일반인들로부터 높임받는 것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많은 시장터로 다니면서 공개적인 곳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임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셋째,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9).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율법을 듣고 배우는 곳입니다. 당시 회당에는 맨 앞 상단에 명망있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고 당시 분위기는 그 자리에 서기관을 앉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입구에서 가장 안쪽 중앙에는 잔치의 주인공이 앉고 그 오른쪽에는 잔치의 주인공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앉도록 배려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그 자리에 서기관을 앉게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높임받기만 원하는 타락한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②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40). 당시 과부는 고와와 함께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자로서 구제해주어야 할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들을 보호해줄 자가 없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의 것을 착취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보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을 후원자의 기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과부들은 사취의 좋은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사역 등을 빙자하여 과부들의 재물을 착취했습니다. 경건의 탈을 쓰고 약탈을 일삼는 타락한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③과시욕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40). 당시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영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길게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신앙심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외식이었습니다. '외식'(προφασιs)'외부로 보이기'를 말합니다. 진실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외식하는 타락한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했습니다 (40).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율법의 정신에 대한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율법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가르치는 직분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율법과 직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만 채우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중한 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눅12:48, 3:1). '판결'에 해당하는 '크리마'(κριμα)는 결정, 심판, 형벌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높임을 받으려 하고 섬김을 받으려 하고 자랑을 하려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의복(까운)과 자리(좌석)으로 평신도와 구분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대접하게 하고, 자신이 가장 경건한 사람인 것처럼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말씀과 사역을 빙자하여 우리의 죄적 욕망을 채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일반 성도들도 모든 사람에게 명예욕과 탐심과 과시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말씀과 사역을 빙자하여 그것들을 나타내려 하는 점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7. 과부의 헌금에 대한 평가 (41-44)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헌금함에 대해 앉아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41). 당시 성전에 헌금함이 놓여 있는 곳은 여인들의 뜰이었습니다. 여인들의 뜰은 유대인 남자들과 여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왕하12:9, 8:20). 그 곳에는 여인들의 뜰을 구분하는 벽들을 따라 일렬로 놋쇠로 된 나팔처럼 생긴 헌금함 13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중 10개는 성전 운영을 위해 사용하는 헌금함이었고 3개는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헌금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헌금함이 보이는 곳에 앉아 무리들이 돈을 놓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실새'에 해당하는 '에데오레이'(εθεωρει)'보다' '구경하다'의 뜻인 '데오레오'(θεωρεω)의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보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실 때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고 했습니다 (41-42). 예수님이 헌금자의 헌금을 얼마나 넣었는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는 없습니다. 당시 헌금 액수를 기록하는 사제가 있었는데 헌금자가 헌금을 헌금함에 넣은 다음에 그 사제에게 액수를 알려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말을 들어서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당시 헌금함은 나팔 입구가 나팔 모양이었고 재질이 놋쇠였기 때문에 돈을 던져 넣는 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부자 행색을 한 자들은 헌금함 앞에서 계속 던지고 가난한 과부는 동전 2개를 던진 것을 보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에서 '넣는데'에 해당하는 '에발론'(εβαλλον)'발로'(βαλλω)의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던져 넣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2렙돈 곧 1고드란트를 바쳤다고 했습니다. '가난한'에 해당하는 기본형 '프토코스'(πτωχοs)'거지' '빈민'의 뜻으로서 극빈자를 의미합니다. '렙돈'(λεπτον)은 유대 동전의 명칭이고 '고드란트'(κοδραντηs)는 로마 동전의 명칭입니다. 1렙돈은 1데나리온(노동자의 하루 품삯)128분의1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단위의 동전입니다. 유대 동전 2렙돈은 로마 동전 1고드란트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독자가 로마인인 것을 고려하여 유대 동전을 로마 동전으로 환산해 준 것일 것입니다. 당시 성전규정상 헌금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액수는 2렙돈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성전규정에서는 1렙돈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카리스종합주석).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했습니다 (43-44).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헌금에 대한 중대한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서 헌금하는 광경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넣은 2렙돈은 부자들이 넣은 것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부자들은 다 풍족한 가운데서 넣었지만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으로 본 것이 아니라 비율의 많고 적음으로 본 것입니다. 비율적으로 볼 때 극빈자(πτωχοs) 과부는 생활비 곧 생계 수단 전체를 드린 것을 본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본 것입니다. 의무적이거나 외식적이거나 위선적이지 않고 진실된 마음의 헌신임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헌금을 내는 사람의 방법이나 그 동기로 그것이 진정한 헌금인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동기나 그런 의도를 만족시켜주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칭찬하신 것은 많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 것을 보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앞 단락에서 예수님이 서기관들에 대해 경계시킨 부분에서 과부와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40절에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일생을 성전에서 보내는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했고 그것은 과부들의 물질과 봉사를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부유한 종교 지도자들이 소외받는 극빈자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는 데 대해,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헌금하는 헌신자들처럼 나타나려 하는 위선과 외식을 하는 데 대해 강렬한 분노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을 판결(심판, 형벌)이 무거울 것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장에서 제자들이 성전 건물에 대해 물어 보았을 때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했습니다. 13: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많은 부자들의 헌금과 대조하여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은 지도자들인 서기관들의 위선과 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전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성전이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염두에 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結言>

   오늘날 일부교회들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대우하는 경우를 봅니다. 권사, 안수집사, 장로를 세우는데 헌금을 얼마씩 요구하는 곳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교회의 변은 교회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 중직을 맡을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 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헌금의 가치를 액수의 크기로만 보고 직분을 돈으로 산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일천번제 헌금을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의 의미를 오해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한 절기 동안 1,000마리에 가까운 많은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열왕기상3:4, 역대하1:6, 一千燔祭, אלף עלותׄ 엘레프 올로트 -BHS, a thousand burnt offerings KJV, NASB). 그것은 성경이 헌신을 강조한 것이지 정성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일천번제 헌금은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기록해주고 예배시간에 명단을 발표하면서 축복기도를 해 주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들의 변을 들어보면 헌금의 투명성과 헌금자가 복 받기를 원해서 시행한다고 합니다. 그 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 또한 헌금을 많이 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그런 것들을 과감히 철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양심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보시면 뭐라 하실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