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5:1-39
<題目> 인자의 제자들 부름
<序言>
본 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사회에서 낮은 계급이나 멸시받는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내용구조는 첫 제자들을 부르심(1-11절), 나병환자를 치유하심(12-16절), 중풍병자를 고치심(17-26절), 세리를 제자로 부르심(27-32절), 금식에 관한 논쟁(33-39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첫 제자들을 부르심 (1-11절)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4:18-22과 마가복음1:16-20에도 나온 말씀인데 본문 누가복음이 가장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몰려든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배 두 척 가운데 한 척인 시몬의 배에 올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고 배에 앉아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3절).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바다)의 별칭으로서 깃네렛 바다, 디베랴 바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민34:11, 수13:27, 요21:1).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약 20km, 동서의 폭이 약 12km, 면적이 144km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50m 정도로서 많은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바다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시몬’(Simon)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후에 지어준 이름입니다 (마16:18, 요1:42). 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몰려든 군중에게 말씀을 가르치는데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어부들이 배 두 척을 바닷가에 대고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고기를 잡지 못한채 돌아와 배를 해변에 대고 다음 고기잡이를 위해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배에 올라 가르치면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이라 불리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 베드로에게 배를 해변에서 조금 떼게 한 다음 그 배에 앉아 배를 설교 연단으로 삼아 해변에 있는 군중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다 가르친 다음에 배를 빌려준 시몬이라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4-5절).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기를 잡는데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제 이번에는 고기잡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그물까지 씻어 정리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에 실어 더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자기 배에서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비범한 분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의 지시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시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고기가 심히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도와 달라고 했고 그들이 와서 자기들의 배에 고기를 채워 그 배도 잠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6-7절). ‘동무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킵니다 (10절).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자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고 다른 배의 동무들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잡힌 경험을 하자 놀랐습니다. 베드로를 도운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경험 속에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8-10절上).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구원자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5절에서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호칭했는데 여기 8절에서는 ‘주’로 호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으니 떠나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서워 말라고 하면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하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10上-11절).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경험하고 두려움과 경외심이 섞여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떠나 달라고 한 일련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두려움에 싸여 있다는 것을 아시고 무서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가 이제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행2:41). 그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을 따를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한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마태복음4:22에는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20에는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고 했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와 일꾼들을 보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되기 위해 그 동안 생업의 도구였던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은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에서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주권적으로 제자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들을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택해 주셔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한 자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기까지 예수님이 책임지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선택할 때는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시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가르치고 양육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선택을 받은 자는 그 선택인 구원을 위한 소명이든 사역을 위한 소명이든 예수님의 주권적 인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낮은 계급을 제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어부는 그렇게 높이 인정받거나 존중받는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제자를 부르실 때 학자나 종교지도자나 정치인이나 관리자 등을 부르지 않고 그들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6-29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능력있는 자를 부르면 하나님 나라 사역이 잘되었을 때 자기들도 자기들 실력으로 된 줄 알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능력으로 된 줄 압니다. 하지만 무능한 자들을 부르면 일이 이루어질 때 순전히 하나님이 해 주신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 바울처럼 조건이 좋은 사람을 불러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건이 좋지 않은 것이 오히려 쓰임 받을 수 있는 조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을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어부로서 고기잡이에는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밤새 고기를 잡아보았으나 잡지 못했음에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과 나면서 소경된 자 등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왕상17:10-14, 왕하5:10-14, 요9:6-7).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언약적 복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11: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창12:1-4). 하지만 사울왕은 자기 생각대로 하므로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삼상15:22).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사람은 자기 지식과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경험하기를 추구하지만 말고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에게 해당하는 말씀부터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눅3:10-14).
넷째, 예수님을 발견한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 혹은 구원자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달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할 수 없는 분임을 인식하고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혹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된 자들은 자신의 부정함과 무능함과 무력함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고백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이라 말할 주 모른다고 고백했고, 베드로는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고, 요한은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습니다 (출4:10, 사6:5, 렘1:6, 눅5:8, 딤전1;15, 계1:17).
다섯째, 소명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생애를 맡겼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와 일꾼 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삶의 근거지와 생업의 도구를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니 예수님이 소명을 주실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생명과 생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 즉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언약적 지시를 따라갔습니다 (창12;1-4). 모세도 애굽의 모든 보화와 학술과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히11:24-26).
2. 나병환자를 치유하심 (12-16절)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본 단락에는 예수님이 한 나병환자를 고치신 내용입니다. ‘나병’(癩病)은 학명으로 레프라(Lepra), 한센씨 병(Hansen's Disease)인데 우리에게는 문둥병으로 많이 알려진 질병입니다. 이는 피부 점막 말초신경 내장 등 다양한 곳에 병증이 발생하는 만성전염병입니다. 병균이 활동으로 신경조직이 국부적으로 마비되어 감각이 없어지고, 피부에 탈색된 반점이 나타나고, 눈썹 같은 털이 탈색되어 빠지고, 코 귀 손가락 발가락 등의 관절이 떨어지고 마침내 죽음을 맞게 하는 질병입니다. 이는 기후환경의 조건이나 위생학적인 여건이 좋지 않으므로 인하여 발생하며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병입니다. 그러기에 나병에 걸리게 되면 공동체와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나병환자로 판명된 자는 첫째,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합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재치는 행동은 극도의 슬픔과 애통과 원통의 표현으로서 죽은 자를 애도할 때 많이 나타납니다. 나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기에 스스로 죽은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접근해 올 때마다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타메 타메, טמא טמא)를 외쳐야 합니다. 위생학적 측면에서 병원균의 감염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으나, 종교 의식법상으로는 접촉을 통한 부정함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문둥병자는 의식상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므로 그와 접촉한 자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곧 나병환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정한 자로 규정되었으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들어 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를 극도로 비하(卑下)하는 행동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셋째, 병이 있는 동안은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보건상의 이유도 있지만 의식상의 의미도 큽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이 임재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도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부정한 것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둥병이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곧 사회적 혜택으로부터의 단절뿐 아니라 종교적인 은혜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진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에게 베푸는 모든 축복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그들에게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단절 이상으로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언약적 축복으로부터 제외된다는 관념이었을 것입니다 (레13:45-46). 그러므로 나병환자는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뿐만 아니라 종교적 고통도 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 때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12절).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의 접촉을 피하여 격리된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병환자는 낫고자 하는 열망과 예수님은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선생’(랍비)으로 부르지 않고 ‘주’로 부른 것과 주께서 원하시면 자기 나병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그에게 나병도 낫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예수님이 낫게 해 주실 의지와 의사만 있다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시면 낫게 하실 수 있다는 표현으로 낫기를 구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자 나병이 곧 떠났습니다 (13절). 말씀만 하셔서 고침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고쳐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몰골이 징그러웠을 것이고 종교 의식적으로도 접촉을 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시면서 즉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긍휼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고침 받은 나병환자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했습니다 (14절下). 레위기13-14장에 보면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나병병에서 나음을 얻은 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판정을 받아야 하고 (레13:16-17) 정결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레14:4,10). 그 정결의식은 산 새 2마리를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드리고 8일 후 재차 흠 없는 이린 숫양 2마리와 암양 1마리와 가루 10분의3 에바와 기름 1록을 드려야 했습니다. '10분의3 에바'(ephah)는 약 7ℓ정도 되고 '1록'(log)은 0.3ℓ정도 됩니다 (레14:1-20). 그렇게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나았다는 판결을 받고 정결의식을 행하면 법적으로 효력을 발생하여 사회적 단절과 종교적 부정에서 사면됩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 수도 있고 성전예배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완전히 나았지만 당시 제도 하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정한 정결의식을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얼마나 자상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14절上). 마가복음1:43-44에는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아무 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것에만 집중하여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식민지 하에 있던 유대 나라를 구할 유대인의 왕을 기다렸던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왕으로 추대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정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그 때가 이르기 전에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고침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좁게는 사람들이 기적에 대해 듣고 병 고침 받기 위해서 모여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고, 넓게는 자신이 아직 고난 받을 때가 되지 않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은닉사상).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기를 원해서이고, 고난의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고침받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더욱 퍼져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15절). 고침받은 나병환자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았던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해 사람들에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예수님께 몰려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물러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16절). 예수님은 사역을 쉴 새 없이 하는 것보다는 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사역을 점검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휴식 기간을 가지면서 기도하는 것일 것입니다.
한편 구약시대에 문둥병은 부정하게 규정지어졌습니다. 물론 보건상 이유있지만 의식상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 질병의 성격이 죄의 부패성을 상징하기에 좋았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에서도 부정한 것으로 규정지은 것입니다. 문둥병이 가지는 특성은 전염된다는 것과 한 번 걸리면 치명적이라는 것과 자기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죄'와 '범죄케 하는 그릇된 교훈'이 가지고 있는 전염성 침투성 분리성 파괴성 등의 속성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계3:17. 벧후1:9). 로마서7:11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2:17-18에는 "그들의 말은 독한 악성 종양이 퍼져 나감과 같은 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고, 갈라디아2:4에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라고 했습니다 (벧후2:1, 유1:4).
영적으로 나병 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다양합니다. 구약시대에 나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입니다. 유다왕 아사랴는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나병에 걸렸습니다 (왕하15:1-5). 아사랴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지만 산당을 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산당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치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상숭배로 인하여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고전10:5-7). 둘째, 교만입니다. 유다왕 웃시야는 교만하다가 나병에 걸렸습니다 (대하26:14-21). 웃시야는 나라가 강성해지자 마음이 교만해져서 율법을 어기고 자신이 직접 성전에 들어가 분향단에 분향을 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80명의 제사장을 데리고 가서 분향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막으려 하자, 웃시야가 분향단을 잡으려 하면서 노를 발했습니다. 그 순간 이마에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바벨론이 강성해지자 마음이 교만하여져 바벨론에 대해 '네가 했다. 나의 것이다.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망령된 말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단4:28-33). 셋째, 욕심입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탐욕 때문에 나병에 걸렸습니다 (왕하5:20-27). 아람 장군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나병을 고침받았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사례를 했으나 엘리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만이 돌아갈 때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뒤따라가서 거짓으로 엘리야가 생도 둘을 보내어 사례를 받아 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나아만으로부터 은 1달란트와 옷 2벌을 받아 와 집에 감추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고 저주하자,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올 때 나병이 눈같이 발하였습니다. 아간도 욕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 정복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 산 외투 한벌과 은 200세겔과 금 50세겔을 훔쳐서 장막 아래 감추었다가 하나님의 색출에 의해 돌로 처형 당했습니다 (수7:19-26).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탐심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한 밭 값 절반을 감추었다가 베드로의 저주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행5:1-11).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개인적인 육욕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넷째, 비방입니다. 모세의 여동생 미리암은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민12:1-10).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일로 인해 미리암이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만이 아니라 자신과 아론에게도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는 일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망하시고 진노하시니 미리암의 이마에 곧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광야시대에 고라당도 모세를 대적하여 거스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250명의 고라당은 땅이 입을 벌려 삼켰고 회중들에게는 염병이 돌았습니다 (민16:1-50).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성결을 유지해야 하며, 의심되면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레13:1-46). 첫째, 평상시에 다른 현상이 보이면 일단 의심해야 합니다. 색점(色點)이 생긴다든지 털이 희어진다든지 우묵해진다든지 난육(爛肉)이 드러난다든지 하면 진찰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마음 상태가 정상이 아닐 때나 생활 형태가 정상이 아닐 때는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문둥병은 어떤 계기를 통해 나타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기나 옴이나 화상이 있을 때 진찰해야 했던 것처럼, 사건 사고가 있은 직후에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 점검은 목회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안전합니다. 오늘날 스스로 할 수도 있지만 제사장에게 진단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목회자에게 점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게 되면 왜곡된 진단이 나오기 쉽습니다. 그리고 성경적 관점에서 진단을 받게 되면 그대로 인정하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쉽게 회복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을 때는 무서운 마음을 가지고 정결케 해야 합니다. 옷을 찢는 심정, 머리를 푸는 심정,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외치는 심정, 진(공동체) 밖에서 홀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심정을 가지고 바로 서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이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 믿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3. 중풍병자를 고치심 (17-26절)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하루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17절). '바리새인'(Φαρισαιοs)는 '분리하다'의 뜻을 가진 '파라쉬'(פרש)에서 온 말로서 '분리주의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율법을 해석과 준수를 강조하는 종파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율법의 세부적인 규례를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 전문 학자들입니다. 그들을 서기관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했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자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중풍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18-19절). '중풍병자'(中風病者)는 뇌혈 문제로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질병인데 그 마비는 신체의 절반인 경우도 있고 신체의 전부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전신 마비가 와서 말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중풍병자가 누워 있던 ‘침상’(κλινη)은 침대를 말합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4사람이었습니다 (막2:3). 이들에 대해 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로 보는 이도 있고, 환자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명령을 받은 종들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기와’(κεραμος)는 진흙으로 만든 기와를 말합니다. 당시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 형태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이 하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 바깥에는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지붕은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위에 흙이나 석회를 발랐습니다. 가끔은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이나 석회로 덮기도 했습니다. 4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 했으나 인파로 인해 들어가지 못하자 집 뒤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들 보 사이로 달아 내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20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예수님은 고쳐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 헌신을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집 주인의 항의와 수리비를 물어 주어야 할 것을 생각지 않고 난관을 돌파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롯이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19:29에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창18:20-32). 모든 공동체가 본받아야 할 믿음입니다.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한편 예수님이 4사람이 중풍병자를 앞으로 달아 내렸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20절). 중풍병자의 개인적으로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진 죄를 용서한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 하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이 나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의외의 선포였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중풍병을 낫게 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영혼까지 구원해 준 것을 알게 해 주는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을 한 것은 예수님 편에서는 영혼 구원이 육체 구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 전하는 것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죄와 그 결과로 온 질병과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왔고, 예수님 자신이 그 구원을 주는 자임을 나타내려고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언은 죄 사함을 이 죄의 결과로 오는 질병과 죽음과 지옥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므로 질병에서 놓였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물론 죄 사함을 선언해 준 것은 당연히 병도 나았다는 선언이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21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를 사할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유대신학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풍병자에 대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시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한 죄를 범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했습니다 (22-23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일어나 걸으라'는 말보다 어려운 말이라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일은 선지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나 죄를 사해 주는 일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보다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더 어렵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결과를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된 자는 누구든지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24절上). ‘인자’(人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που)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에 나타난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를 가리킵니다 (창28:10-14, 삼하7:12-14, 겔1:26-28). 곧 ‘인자’는 구약성경에 오시리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자를 일컫는 관용적 표현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그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이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 생각에 더 어렵게 생각하는 것을 행하므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자임을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24절下). 그러자 중풍병자가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25절).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병이 낫자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고 그 순종이 기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그것을 행하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26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것은 그가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인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믿지 못한 것을 믿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약에서 예언한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계시하는 역할 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9:1-7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계시할 목적을 가지고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게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서 씻어서 눈을 떴습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문제도 해결되었지만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자임을 계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주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역사가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은 우리로 주님이 누구인지 계시하고 선포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삶으로 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4. 세리를 제자로 부르심 (27-32절)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갈릴리 해변으로 나가니 큰 무리가 나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행보를 옮겨 가버나움의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했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7-28절). ‘레위’(Λευις)는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라고 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레위는 본명이고 마태는 예수님을 따른 이후에 개명한 사도명으로 생각됩니다. ‘마태’(Ματθαος)는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으로서 그가 예수님을 따른 이후에 그런 이름으로 개명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게바가 베드로로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있는 레위를 눈 여겨 보시다가 그를 제자로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명령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 직업과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세리는 당시 사회에서 기득권에 속해 있는 직업으로서 많은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유망 직종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어부는 다시 쉽게 고기잡이로 돌아올 수가 있지만 세리는 한 번 그만두면 다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한 것은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졌지만 만족이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것에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시자 힘들었던 과거생활을 청산하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했는데 거기에는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다고 했습니다 (29절). 유대인들의 식사 관습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한 가운데에 있고 세리와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식사 자리에 기대어 않아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벌인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돈과 지위는 있었지만 만족이 없었고 심령이 곤고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새로운 가치를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고 새로운 사역을 할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쁨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일에 자기가 가진 돈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첫째, 레위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위는 27절에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고 한 것을 보면 레위는 세관에서 근무하는 세리였습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이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과 갈릴리 지방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 정부는 지배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각 지방에 감찰관을 파견했습니다. 감찰관은 지역의 고위 인사들에게 돈을 받고 조세징수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조세징수권을 넘겨받은 지역 고위 인사는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둬들이기 위해 조세징수원을 고용했습니다. 그 조세징수원들이 세리입니다. 지금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은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된 곳이고 북쪽 수리아 지방으로 남쪽 유대 지방과 애굽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도시였습니다.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는 가버나움에 군대도 상주시키고 세관도 설치했습니다. 그 세관의 세리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두세와 토지세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도 있었고, 세관에서 통행세 같은 간접세를 징수하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레위는 세관에 앉아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통행세를 징수하는 세리였습니다. 당시는 세금 수입은 로마황제의 국고와 로마에서 세운 분봉왕의 금고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세금액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리장은 세리들에게 많은 세액을 거둬들이게 하여 남은 금액을 착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행세 같은 경우엔 그곳을 통과하는 상인들과 상품들에 세금을 부과한 것인데 불법 상품을 확인하기 위해 예리한 막대기로 곡식자루를 찔러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세리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지방 사람들은 세리를 아주 나쁘게 인식했습니다. 지배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자국민의 고혈을 짜서 착복을 하는 매국노로 보았습니다. 그런데다가 당시 유대교의 기득권 세력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자신들이 세운 전통적 규례를 따르지 않는 세리들을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로 규정한 나병환자를 공동체에서 격리시켰듯이, 세리들도 부정한 자로 규정하여 모든 종교적 혜택을 박탈시켰습니다. 세리들이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시켰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시켰고 성전에서 헌금을 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그들이 드린 헌금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돈이라 하여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으로 여겨 “세리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오며”라고 기도했고 (Shmoneh Esreh), “나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눅18:11). 그러고 보면 세리인 레위는 유대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레위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본문 27-28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 도시 앞에 있는 세관을 지나다가 그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세리 레위를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했습니다. 대화 중에 돈은 많이 벌지만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영적 곤고함을 느낀 것을 드러냈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시했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우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올 것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레위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의 일을 그만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축적했던 돈으로 자기 집에서 잔치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가치 있는 일에 동참하게 된 기쁨을 나타내고 가족과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배우고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에 14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A.D.70년 경에는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구전에 의하면 시리아와 터키와 그리스와 마게도냐와 에디오피아 등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집트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레위는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그룹에 속해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 구원을 얻었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 소명을 위해 인생을 산 것입니다. 중세에 이탈리아 조각가이며 건축가이며 화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각가 지오반니는 소년 미켈란젤로를 보았을 때 그에게 조각가로서의 천재적인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실력으로만은 안 된다. 그 실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장학습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술집으로 데려가 술집에 있는 조각품을 보여 주고, 한 번은 교회에 있는 조각품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같은 조각품이 어디에 있느냐 따라 가치가 얼마나 다른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평생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지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기능적 잠재력을 소명을 위해 계발했고 소명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셋째, 레위는 자기 특성을 사용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세금을 거두고 계산하고 관리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분석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리가 되기 전에도 그런 기능적 특성이 잠재되어 있었고 세리 일을 하면서 그 특성이 계발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 직업을 떠났지만 그 특성을 사역에 잘 활용했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4복음서가 기록된 순서를 보면 누가복음(A.D.60-70년), 마가복음(A.D.65-70년), 마태복음(A.D.70년경), 요한복음(A.D.85-90년)입니다. 그런데 종교회의에서 4복음을 정경으로 확정하고 합본할 때 세 번째로 기록된 마태복음을 가장 앞에 배치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만이 수신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마태복음이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흐름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수신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들 관념에 맞게 증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자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장에서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혈통적인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 족보를 기록하는데 있어서도 뺄 사람은 빼서 시대적으로 14대씩 구분하여 기록했습니다. 산상수훈도 가장 체계적이고 풍성하게 정리했습니다. 예수님이 베푼 비유와 행한 기적도 가장 잘 정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고유한 잠재된 기능적 특성을 잘 계발하여 잘 사용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효과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기능적 특질을 잘 계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략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투자 하지 않아야 할 데에 투자하고 투자해야 할 데 투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부여된 잠재적 기능적 적성을 발견하여 계발하는데 투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전폭적으로 투자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물건 하나를 사도 그런 관점에서 사야 합니다.
우리가 레위처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붙들리면 됩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부여하신 특성을 발견하여 계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가치 있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11:29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1:11-12에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레위(마태)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하고 예수님과 제자들과 동료들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모인 자들과 식사를 할 때 바리새인과 그들에게 속한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정죄했습니다 (30절). '바리새인'(Φαρισαιοs)는 '분리하다'의 뜻을 가진 '파라쉬'(פרש)에서 온 말로서 '분리주의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율법을 해석과 준수를 강조하는 종파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율법의 세부적인 규례를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γραμματευς)은 문자적으로 ‘기록자’라는 뜻이지만 당시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했지만 사실 진짜 의도는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앞잡이이며 동족의 고혈을 짜는 자들로서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의 해석과 전통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행하지 않는 자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 자들과는 식사도 금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비아냥거리듯이 정죄를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무지한 죄인들이면서도 자신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채 세리들을 죄인들로 정죄하고 그들과 교제를 하는 제자들도 죄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은근히 예수님을 죄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으니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했습니다 (31-32절). 예수님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격언을 이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 같이 죄인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인'은 스스로 종교적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교만한 바리새인의 서기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죄인'은 종교적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리 같은 사람들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 해석과 준수에 가장 완벽하여 자기들의 삶을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죄하는 세리 같은 자들은 절대적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르치며 교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18:9-14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비유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간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인이라 생각하고 세리는 죄인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자신의 깨달음과 삶을 절대적 표준으로 여기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따르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정죄하는 자, 곧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5. 금식에 관한 논쟁 (33-39절)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죄인들과 식사교제를 하는 것을 힐난하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자로서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교제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3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식사하는 일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과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느냐고 했습니다 (33절).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속죄일에만 금식을 했습니다 (레16:29,31, 23:27-32, 민29:7). 그러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난 뒤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날,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 등 매년 4번 금식을 했습니다 (슥7:5, 8:19). 그러다 신약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일주일에 2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눅18:12). 그 외에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자주 금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경건과 헌신의 의미로 한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과 의식이 되어버렸고 자신을 과하려는 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마6:16, 9:14).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유대교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금식에 관한 관습을 폐기하려 하지 않고 고수하도록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일주일에 2번 금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마9:14).
예수님은 그들에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것인데 그 날에는 금식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4-35절). 당시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습니다. 그 혼인 축하연은 매우 화려하고 요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축하연에 참여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하객들은 신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기쁨을 마음껏 나타냈습니다. 그 기간에는 금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금식은 재난을 당했을 때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거나 하나님께 절실한 필요를 구할 때나 경건을 위해 육욕을 절제해야 할 때 했는데 여기에서는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잔치 기간에 금식을 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다만 금식을 해야 한다면 잔치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사역을 하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금식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상황에서 슬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는 슬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여 신약시대에는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금식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고 당시에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은 이유를 밝힌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고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36절). 마태복음9:16에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라고 했습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 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도 버리고 낡은 옷도 세탁을 하면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이 줄어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낡은 옷이 해어지므로 낡은 옷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새 옷’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교훈을 가리키고 ‘낡은 옷’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진리를 율법주의 시각을 가진 바리새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가 없으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으니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37-39절). 유대 지방에서는 염소 같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부대를 물이나 포도주 같은 액체를 넣는 용기로 사용했습니다.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가죽을 벗겨낸 다음 기름기를 제거하고 털이 있는 부분이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고 목 부분을 제외한 다리 부분을 꿰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넣어 둘 경우 사람들은 포도주가 오래 된 것일수록 좋아하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오랫동안 넣어두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새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어 두게 되는데 낡은 부대에 넣어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포도주가 발효를 하여 팽창하므로 낡은 부대가 터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넣을 때는 새 부대에 넣어두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교훈을 가리키고 ‘낡은 부대’는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전통과 의식과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생명력이 없는 비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의 시각으로 예수님의 교훈을 보면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오해하여 정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바리새인들의 교훈의 시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진리와 가치와 생활방식은 인간의 전통으로 만들어진 의식주의 시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진리와 가치와 생활방식을 유효하게 하려면 낡은 인간적인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하려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잃게 됩니다 (마6:24-33, 19:21-24).
<結言>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신뢰하고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죄성과 형식과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주신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예수님이 맡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