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7:1-50
<題目> 인자의 사역에 임한 하나님 나라
<序言>
이제 제자와 제자도라는 주제에서 예수님의 사역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화되고 가시화됩니다. 그러한 묘사는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직접적인 진술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현존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내용구조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1-10절),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11-17절), 세례 요한의 실족과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18-23절), 세례 요한에 대한 칭찬(24-28절),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변명(29-35절), 한 죄 많은 여인의 향유 부음(36-50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1-10절)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예수님이 평지수훈을 마친 후 갈릴리 사역의 근거지인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백부장이 자기의 사랑하는 종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백부장은 장로들을 통해 자기 종을 구해주기를 청했습니다 (1-3절).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 군대는 외국 국적을 가진 용병들로 이루어진 군대였습니다. ‘백부장’(εκατονταρχης)은 바로 그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100여명의 병사를 휘하에 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랑하는 종(δουλος)이 있었는데 그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하인(παις)이 중풍병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마8:6). ‘중풍병’(παραλυτικος)은 신체가 마비되는 질병입니다. 주로 뇌의 피가 혼탁하여 뇌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봅니다. 누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중풍병을 앓다가 죽게 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침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종을 고쳐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마태는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다고 했으나 (마8:5), 누가는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청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요약하여 주체만 강조한 것이고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한 차이 때문입니다.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은 백부장이 친하게 지내던 자들일 것입니다.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을 보낸 것은 아마도 자신은 로마 군대 장교이자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인 예수님께 호의를 얻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유대인 장로들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부장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기를 구하면서 그 일을 해 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유대 민족을 회당을 지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4-5절).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께 백부장의 종이 죽게 되어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아뢰고 예수님이 가셔서 고쳐 주시길 간절히 구했습니다. ‘구하여’(παρεκαλουν)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애원하듯이 계속적으로 간청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호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백부장의 선행을 언급했습니다. 백부장은 평소에 유대인을 사랑하고 유대인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회당’(συναγωγη)은 유대인들의 예배처소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 때부터 유대 지역에 세워진 예배처소였습니다. 백부장은 평소 유대인들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이 보낸 유대 장로들의 말을 듣고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가까워졌을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6-8절). 백부장이 예수님께 친구들을 보내어 집에까지 오실 것 없이 말씀으로 낫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해도 나을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낫게 하소서'에 해당하는 원어 기본형은 '이아오마이'(ιαομαι)로서 '치유하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낫게 하소서’에 해당하는 단어가 네슬-알렌드본(GNT)에는 '이아데토'(ιαθητω)로 나와 있고 스테판본(GTS)에는 '이아데세타이'(ιαθησεται)로 나와 있습니다. ιαθητω는 수동태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낫게 해주십시오'로 해석되지만 ιαθησεται는 수동태 미래 직설법으로서 '나을 것입니다'로 해석됩니다. 우리 성경은 GNT의 의미를 따른 것입니다. GNT의 의미로 해석하면 낫게 해 달라는 간구의 의미가 강조되지만 GTS의 의미로 해석하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조됩니다. 8절에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는데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병사에게 명령을 하면 순종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질병에 대해 명령하면 질병이 순종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임을 믿은 것입니다 (마28:18, 요17:2).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집에까지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이 보낸 친구들을 통해 백부장의 말을 듣고 백부장을 놀랍게 여겨 따르는 무리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9절). 예수님은 백부장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적 권위를 알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은 사실에 놀랐습니다. 구약성경을 능히 알고 있는 유대인들도 구약성경에서 지시하고 있는 예수님신분과 권위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고 믿었고 그 믿음이 실제 생활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을 향해 그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칭찬했습니다. 그것은 마땅히 그와 같은 믿음을 가졌어야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마태복음8:11-12에 보면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눅13:29, 사45:6, 49:1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언약민(言約民)인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적 대표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의 절정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25:6-9, 65:13-14). 그러나 주님은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영광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앉으려니와'에서 앉는다는 헬라어 아나클리데손타이(ανακλιθησονται)는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 식사 때에 식사를 하기 위해 기대듯이 앉는 유대인의 습관을 말합니다 (마26:29, 눅14:15-24).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표현은 당시 잔치에서 배제된 죄인들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나라 축복에서 제외된 자들의 고독과 절망과 고통을 표현한 말입니다. 반면에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백부장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 이방인 가운데 그와 같은 이들이 많을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한편 백부장이 예수님께 보낸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이 백부장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들이 보니 백부장의 종이 이미 나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10절). 마태복음8:13에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으로 갈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말씀만 해 달라고 하게 했는데 그 때 예수님이 ‘믿은 대로 될지어다’고 했고 그 즉시 백부장의 종이 나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을 때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하게 했는데 그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보니 백부장의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로마군인으로서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고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어떤 병도 고치실 줄 아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직접 행동을 취하지 않고 말씀만 해도 병이 나을 줄 믿은 것입니다. 로마황제가 백부장에게 명령하면 백부장은 그 말을 순종하고 백부장인 자신이 병사들에게 명령하면 즉시 순종하는데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명령하면 당연히 질병도 복종할 줄 알았습니다. 셋째는 종의 아픔을 위해 간구할 때 거절하지 않을 것을 믿은 것입니다. 당시 하인은 천민으로서 주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이처럼 아픔을 같이 느끼고 고침받기를 애타게 구하는 것은 귀한 심정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자들의 아픔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모든 표적을 행하실 때도 그렇지만 백부장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 계시하기 위해 표적을 향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대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확대되어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화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계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을 위해 표적을 나타낼 때 백부장을 선택한 것은 백부장에게 그것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백부장을 만나 믿음을 확인했을 때 자기 계시와 하나님 나라 예언을 위한 표적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하게 여기고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이 자기를 계시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진리를 나타내기에 합당한 자로 발견된다면 예수님이 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열정의 행위를 보여야 합니다 (요5:39, 요1:2-3, 마28:18, 요14:16-18, 벧전5:7).
2.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11-17절)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친 후에 나인이란 성으로 제자들과 함께 갔고 많은 무리도 따랐습니다 (11절). ‘나인(Nain) 성’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40km쯤 떨어진 지점이며 나사렛에서 동남쪽으로 9km쯤 떨어진 성읍입니다. 오늘날 ‘네인’(Nein)으로 불리는 마을입니다. 고대에는 성읍이었지만 현재에는 작은 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나인은 고대 수넴(Shunem)과 인접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인 성의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고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나왔습니다. 그 죽은 자는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12-13절).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체는 세마포로 둘러싸고 뚜껑이 없는 관에 넣어서 얼굴은 손수건으로 덮었습니다 (Josephus). 그리고 최소한 2명 이상의 피리 부는 사람과 1명 이상의 곡하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한 가정이라 해도 운구하는 사람들과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뒤를 그를 아는 사람들이 함께 따랐습니다. 이 죽은 자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당시 과부는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극히 힘들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마지막 소망을 두었던 외아들이 죽었으니 엄청난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성 사람들은 그 참담한 상황에 있는 자에게 동정을 표하기 위해 장례를 도왔을 것이고 장례 행렬을 따랐을 것입니다. 묘지는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장례 행렬은 성문을 나와 성 밖에 있는 묘지를 향해 나오고 있었고, 예수님은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성문 가까이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니 멘 자들이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13-15절). 예수님이 비통하게 울며 나오는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기사’에 해당하는 기본형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는 ‘동정을 느끼다’는 뜻인데 원래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있어서 장기들은 감정의 좌소입니다. 예수님이 비통하게 우는 과부의 모습을 보고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비통한 연민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는 비통하게 흐느껴 울고 있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로의 의미도 있었겠으나 슬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의미로 한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관에 손을 대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하여 3번 보고되었는데 야이로의 딸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린 기사입니다 (막5:41, 눅7:14, 요11:43). 예수님은 그 때마다 이렇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명령하시자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요1:2-3, 마28:18).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을 그 어머니에게 돌려 드렸습니다. 그 어머니는 비통한 슬픔과 고통 대신 죽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예수님을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16-17절). ‘영광을 돌려’에 해당하는 ‘에독사존’(εδοξαζον)은 ‘영광을 돌리다’ ‘찬양하다’의 뜻을 가진 ‘독사조’(δοξαζω)의 3인칭 복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그들이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린 줄 알고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당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한 것은 구약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행한 일과 같은 일을 행했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입니다 (왕상17:21, 왕하4:35). 그들은 특히 과거에 엘리사 선지자가 인접한 수넴에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준 일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하4:32-37). 뿐만 아니라 말라기4:5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한 말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압제와 삶에서 경험하는 고난들로 인하여 그런 선지자가 오기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불쌍한 과부의 아들의 죽음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대변해 주는 상황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비통함과 절망감에 한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자 ‘큰 선지자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찬양을 한 것입니다. 물론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예언한 ‘엘리야’는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선지자를 보내 주겠다는 예언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온 분이라는 표적을 보인 것이지만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구원자로 생각지는 못하고 선지자로만 인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말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 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예수님이 베푸신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당시 로마 압제 가운데 있던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지 않고 다시 관심을 가지셨다고 확신을 가질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격한 바와 찬양의 내용은 팔레스틴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예수님이 일으킨 표적의 동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자기를 계시할 목적을 가졌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내어 선언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표적을 일으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쳐야겠다는 필요를 느낄 때, 곧 대상자의 상황이나 현상이나 믿음 등을 통해 따르는 자들을 교훈하려 할 때 표적을 일으킵니다. 셋째는 표적의 대상자가 믿음을 보일 때입니다. 대상자가 믿음을 보였을 때 그 믿음을 소재로 교훈하는 경우 외에도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을 위해 표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를 한꺼번에 설명한다면 예수님은 자기를 계시하거나 하나님 나라 진리를 교훈할 목적을 가지면 그에 합당한 믿음을 보인 자를 찾아 표적을 일으킵니다. 혹은 믿음을 보인 자를 보면 자기를 게시하거나 하나님 나라 진리를 교훈할 기회로 여기고 표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표적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 대부분 표적을 행한 다음에 자기가 누군지에 대해 선언하거나 진리를 교훈하거나 대상자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에서는 예수님의 자기를 계시하는 선언도 없고 어떤 진리에 대한 교훈도 없고 대상자에 대한 믿음에 대한 칭찬도 없습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 자기를 계시하고 진리를 교훈하려는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부에게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킬만한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 사건을 기록할 때 그런 점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표적을 행해준 것만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비참한 일을 겪는 과부를 모른 체 하지 않고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고 동정하고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심정과 행동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도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해야합니다 (요14:16-18, 벧전5:7).
3. 세례 요한의 실족과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 (18-23절)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본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신 대로 메시야 되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오신 선지자입니다 (사40:3). 그는 생애 동안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고 오로지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마3:3-4). 그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러 나아올 때부터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가 구원자임을 깨달았습니다 (마3:13-17). 그는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세상 죄를 담당하실 자라고 증거했고 (요1:29),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라고 증거했고 (마3:11), 손에 키를 들고 심판하실 자라고 증거했습니다 (마3:12). 그래서 자신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마3:11). 그는 흥하고 자기는 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요3:30). 예수님께서 그에 대해 과연 여자가 나은 자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할만했습니다 (28절, 마11:1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라는 사실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도 있었습니다. 3:19-20에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분봉 왕이었던 헤롯(Herod Antipas) 왕은 그의 조카이자 그의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불륜을 맺었습니다. 그러다 자기 아내(아라비아왕 아레타스의 딸)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악행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그에 대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은 통치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사방이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지인 사해 동쪽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곳에서 1년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마14:1-12).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예수님이 행한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둘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여쭙게 했습니다 (18-19절). 세례 요한은 당시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구원자)인 것을 확실히 알고 증거했었습니다. 그런데 투옥되어 있는 동안 예수님에 대해 의심과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11:4-5에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날 메시야는 공의로 심판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오실 메시야(구원자)는 공의로 심판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행하는 일들에 대해 보고를 듣고 보니 예수님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생각에 예수님이 공의로 심판하는 자라면 압제하는 로마 황제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그 가운데서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혹은 악한 헤롯왕을 심판하고 그 가운데서 요한 자신 같은 사람을 구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헤롯왕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다가 투옥되었는데, 예수님이 헤롯 왕을 처단하고 세례 요한 자신을 구해 주어야 하는데 면회조차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의심하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가 맞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 가서 세례 요한의 지시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마침 그 때 예수님이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악귀에 들려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20-22절).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접적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라 대답하지 않고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의 사역을 언급하므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회의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잘못 오해한 데서 왔다고 생각하시고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행위와 말씀으로 증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35:5-6에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고 했고, 이사야61:1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사야가 예언한 이 말씀을 일고 자신이 바로 그인 것을 천명했습니다 (막4:16-18).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치유 사역을 하고 있다고 전하게 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로서 메시야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23절). ‘실족하다’(σκανδαλιζω)는 걸려 넘어지거나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므로 실족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실족한 것은 메시야 사역에 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의를 세우려다가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예수님이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지 않으면 실족하게 됩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우상숭배로 타락한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백성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들을 숙청했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비 오기를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무릎 사이로 얼굴을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 모습을 아합왕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자신감에 넘쳐 아합왕의 병거 앞에서 이스르엘 성읍 앞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성읍 앞에서 멈추고 아합왕만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이 그 모든 소식을 듣고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왕상18:1-46). 엘리야는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고 자기 생명을 위해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광야로 하룻길을 가다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고 했습니다 (왕상19:4). 엘리야는 하나님 일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은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하고 백성들은 침묵하고 아합왕은 돌이키지 않고 이세벨은 자기를 죽이려 하니 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일을 하고도 오히려 어려움에 빠지자 실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한 일을 해 놓고도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실족합니다 (살후3:13).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정하고 그대로 되지 않을 때 실족하곤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져야만 하나님의 뜻과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그대로 안 되면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려움 일이 생기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현상적인 위로가 나타나지 않을 때도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4. 세례 요한에 대한 칭찬 (24-28절)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실족하여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면서 구약성경에서 보내 주시리라 한 메시아(구원자)가 맞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 사역을 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간접적으로 답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냈던 제자들이 떠난 후에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 칭찬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질문을 전달하고 예수님이 답변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는 자들에게 3가지 질문을 통해 세례 요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였습니다. 둘째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더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였습니다. 셋째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였습니다 (24-26절). 과거에 세례 요한이 유다 광야를 중심으로 사역을 했는데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가 요한의 메세지를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3:2-14). 그 때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든 것은 갈대를 보기 위함도 아니었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보기 위함도 아니었고 오직 선지자를 보려 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갈대를 보려고 했다면 강가로 가야 했고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보려면 왕궁으로 가야 했을 텐데 광야로 간 것은 충실한 참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본대로 세례 요한은 사람에 의해 쉽게 실족하는 사람도 아니고 부귀영화에 쉽게 미혹되는 사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는 메세지를 전하는 가장 훌륭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27절에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역을 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킬 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사야40:3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했고, 말라기3:1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라고 했고, 말라기4:5에도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보내 주시리라 말씀하신 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3:7-14, 마3:2).
28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일시적으로 실족한 상황을 두고 세례 요한의 인격과 사역 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실수한 것을 두고 그 동안 잘했던 부분까지 부정하고 심지어는 그 인격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가지던 사람도 한 번 실수했을 때 단절하고 사역에서 한 번 실수했을 때 그 사람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신 모든 일을 부정하거나 그 사람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는 잘못한 것을 지적하여 일어서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에 대해 바른 평가를 가지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에게는 달콤한 말로 위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평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가 본인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해 주더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한 일에 대해 말하고 인정해 주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관점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2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이는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도 훌륭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에 도래에 대해서도 예언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와 같은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언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언을 했고, 세례 요한은 그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가 임한 현장에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곧 예수님을 보고 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왔던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보다 먼저 있던 자라고 했고 세상 죄를 담당하실 자라고 했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라고 했고, 손에 키를 들고 심판하실 자라고 했고, 자신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했고, 자기는 쇠하고 그만 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3:11-12, 요1:29, 3:30). 그런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모든 사람 중 가장 큰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앞서 있었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나은 것은 계시의 점진성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가장 확실히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극히 작은 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신약의 성도들 가운데 신앙의 열정이 없는 자나 사역의 열매가 없는 자들 암시합니다. 세례 요한이 구약의 모든 사람보다 큰 자이지만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제자들과 성도들이 더 큰 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구약 선지자들보다 더 확실하게 증거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들을 경험적으로 알고 이미 이루어진 예언들을 가지고 전했습니다.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 복음진리에 대한 지식과 확신이 더 많고 그 진리로 사역을 하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결과도 더 나은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계시는 창세시대에도 주어졌고 족장시대도 주어졌고 율법시대에도 주어졌고 선지시대에도 주어졌고 사도시대에도 주어졌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계시는 희미하게 나타났습니다 (창3:13,21).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적 축복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창12:1, 22:15-18).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제사에는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에게 주신 예언에는 더욱 더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 때에는 예수님이 직접 오시므로 더욱 확실하게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을 경험하므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인한 교회 확장을 경험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더욱 분명하고도 확장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은 그보다 더 폭넓은 진리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와 목회자와 성도들은 그들보다 더더욱 폭넓은 진리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죤 칼빈(John Calvin)은 주석을 쓰면서 요한계시록을 3장 이후는 강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은 요한계시록 3장 이후의 내용도 쉽게 강해를 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행복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모든 진리가 확연하게 드러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만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많이 준 자들에게는 많이 원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성령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을 많이 깨달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더욱 헌신적으로 충성해야합니다.
5.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변명 (29-35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했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자들로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고 했습니다 (29-30절). 일반 백성들과 세리들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금을 거둬들이는데 있어서 로마 제국에서 요구하는 금액만 입고하고 나머지는 착복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서 동족을 피를 빠는 자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무지하다 생각하는 일반 백성들과 죄인이라 정죄하는 세리들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서기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율법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스스로 가장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까지 알아 실천했고 특히 율법교사들은 그에 대해 더욱 주도적인 열심을 보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세부적인 조항까지 철저히 알아 지키므로 인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를 무시하여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무관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곧 당시 사회에서 보잘 것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반응했으나 존중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악한 세대의 사람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다고 했습니다 (32절). ‘이 세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거절하여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절하여 믿음을 가지지도 않는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이 비유는 장터에서 아무런 상거래 행위가 없는 평일에 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빙자한 놀이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양편으로 나누고 한 편에 선 아이들이 어떤 흉내를 내면 다른 편에 선 아이들이 그 흉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행동으로 맞추는 놀이입니다. 한 편에 선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에 선 아이들은 그 흉내가 결혼식 흉내인 줄 알고 그 피리 부는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다. 또 한 편에 선 아이들이 곡을 하면 장례식 흉내인 줄 알고 그 곡소리에 맞추어 슬피 울면서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렇게 상대편의 흉내에 맞는 행동을 하면 놀이는 더욱 재미있어지고 흥이 납니다. 하지만 상대편의 흉내에 반응을 하지 않거나 흉내에 맞지 않는 다른 행동을 한다면 재미가 없어지고 흥이 다 깨어지고 맙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 메시지에도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구원 메시지에도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 메시지의 요구와 전혀 다른 반응을 했습니다. 그 메시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고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와서 떡을 먹지 않으며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이 들렸다고 했고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33-34절).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할 때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냈습니다 (마3:4, 막1:6, 눅1:15, 7:33). 떡을 먹은 것이 아니라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낸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께 바침이 된 사람으로서 나실인 규례를 지키기 위해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민6:2-4).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도시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청빈 생활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더욱이 세례 요한이 자기들의 죄를 책망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례 요한에 대해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는 달리 일반인들처럼 식사를 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과 교제하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들처럼 금식하지도 않고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먹기를 탐하며 죄인들과 함께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더욱이 자기들의 죄를 책망했기 때문에 더욱 비난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먹지 않은 것을 두고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예수님이 자유롭게 먹자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는 자이며 죄인의 친구라 비난한 것입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35절). '지혜'는 사전적으로 보면 지식을 사용하여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예수님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이라면 이 지혜는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이 구원을 얻고 변화되는 것이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1:19에는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한 일의 결과가 증명한다는 말로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구원을 얻고 변화된 것이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실한 복음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대적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적용을 가장 정통을 생각하여 자기들의 해석과 전통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두 죄인 취급을 한 자들입니다. 바리새파 중에서도 율법교사는 서기관이라고 했는데 율법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율법 해석과 적용을 절대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의로운 자들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자신들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이 하나님의 주신 메시지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적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기를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주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요인입니다. 자기가 가장 옳고 자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인 에고이즘(egoism)이 하나님의 은혜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의 생각, 지식, 논리, 경험, 욕망, 계획을 최우선으로 고집하는 교만과 완고와 고집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신 말씀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에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요한계시록3:15-16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했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것은 요한계시록3:19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한 것을 보면 회개하는 것과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대해 회개하지도 않고 신앙에 대해 열심을 내지도 않고 미지근하면 주께서 역겹게 생각하여 내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3:10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눅3:9). 주께 버림 당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반응해야합니다.
6. 한 죄 많은 여인의 향유 부음 (36-50절)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본 단락은 죄 많은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에 대한 기사입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26:7-13과 마가복음14:3-9과 요한복음12:1-8에 나오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과 다른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마을에서 죄인 취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36절).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40절). 당시 바리새인은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율법을 범하는 자이며 죄인들과 함께 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런데도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정하여 대접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를 찾기 위함일 수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예수님과 함께 자신도 추앙을 받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앉았을 때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37-38절). 이 여자는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창녀(娼女)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녀는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으나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과 함께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초청을 받지도 않았지만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적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을 얻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여자도 그런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당시 고급 향유는 옥합에 담겨 있었는데 ‘옥합’(αλαβαστον)은 향료용기서 손잡이 없는 항아리처럼 생긴 질그릇입니다. 속에 든 향유를 사용할 때는 목 부분을 깨뜨려서 향유를 붓습니다. 그녀가 울며 눈물을 흘리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행동은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과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 헌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죄 지은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 시몬이 그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중얼거렸습니다 (39절). 시몬은 죄인인 여자가 식탁에 접근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을 보고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마땅히 그 여자를 죄인인 줄 알아보고 그를 내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예수님이 과연 선지자가 맞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그 여자가 죄인인 것을 알았을 것이고 마땅히 그 죄인인 여자를 내쳤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여자를 1.8m 이내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고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자의 접촉을 허용했고 죄인과 함께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한 것입니다. 여전히 바리새적인 시각에서만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시몬에게 이를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몬은 말씀하시라고 했습니다 (40절).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Simon)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두 번째 기름부은 사건이 있었던 집의 주인인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습니다 (마26:6). 하지만 엄연하게 다른 인물입니다. 본문의 시몬은 겉으로는 말하지 않고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예수님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그에 대한 어리석음을 논박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전지하심이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졌고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은 준 사람이 빚진 두 사람에게 다 탕감해주었다고 했습니다 (41절). ‘빚 주는 사람’은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를 가리킵니다. ‘빚진 자’는 돈을 빌린 채무자를 가리킵니다. ‘빚진 자’에 해당하는 ‘그레오페일레테스’(χρεωφειλετης)는 접두어 ‘크레’(χρε)와 동사 ‘오페일로’(οφειλω)의 합성어인데 ‘크레’는 ‘마땅하다’ ‘어쩔 수 없다’는 뜻이고 ‘오페일로’는 ‘돈을 빚지다’의 뜻입니다. 이로 보아 여기에서 빚진 자는 식량이 없어서 빚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빚을 진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은 당시 로마의 화폐인 은화로서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마20:2,10). 500데나리온은 500일 동안 일하여 얻을 수 있는 금액으로 오늘날 우리 돈으로 환산 하면 하루 일당 100,000원(10만 원)으로 쳤을 경우 50,000,000원(5천만 원)에 해당합니다. 50데나리온은 5,000,000원(5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18:21-35에 언급된 10,000달란트에 비하면 적은 액수이지만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큰 금액인 것입니다. 500데나리온과 50데나리온의 차이는 10:1입니다.
그런데 빚진 자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 주는 자가 둘 다 탕감해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했습니다 (42절). 빚진 자들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자들로서 그 빚의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준 자가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로인해 두 사람은 빚의 의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탕감’(蕩減)은 빚을 모두 면제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탕감해주었으니’에 해당하는 기본형 ‘카리조마이’(χαριζομαι)는 ‘하락하다’ ‘용서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그 단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αρις)에서 온 말입니다. 그런 점을 보면 빚을 준 자는 빚진 자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은혜(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겠느냐’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가파오’(αγαπαω)는 ‘사랑하다’인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신 질문에 시몬은 자기 생각에는 많은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판단이 옳다고 했습니다 (43절). 시몬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예수님의 질문에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한다고 대답했고 예수님도 그 대답이 옳은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빚 주는 자’는 하나님을, ‘빚을 진 자’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자’는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향유 부은 여자 같은 자를 염두에 둔 표현이고, ‘50데나리온을 빚진 자’는 죄인 취급을 받았던 향유 부은 여자 같은 자에 비해 훨씬 죄가 적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든 의도는 향유 부은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만큼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그를 영광스럽게 하고자 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를 은혜로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께 많은(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 적은(작은) 죄를 용서받은 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느끼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더 헌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더 헌신했습니다. 시편51:3에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고 했고 시편51:5에서는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자신을 죄인 가운데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더 헌신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9에 “”고 했고. 디모데전서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5:20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인해 죄를 깨달아 죄인임을 인식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이 깨달아질수록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풍성이 누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문제에 있어서만 아니라 일반생활에서 지은 죄에 대해서도 많은 죄를 깨달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 일에 더욱 헌신하게 됩니다.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여자를 돌아보면서 시몬에게 일렀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올 때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예수님 발에 입 맞추지도 않고 예수님 머리에 감람유를 붓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고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해졌다고 하면서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44-47절). 당시 귀한 손님을 청했을 때 주인이 대하는 통례는 입맞춤으로 인사하고 상석에 앉게 하고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해 드리고 기름을 부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예수님을 청해놓고도 그 같은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입을 맞추는 인사도 하지 않았고 손발을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흔한 감람유조차도 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고 눈물로 발을 적셔 머리털로 닦았고 귀한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많은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 용서받은 경험을 하고 그 감격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께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앉아 있던 자들은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48-50절). 예수님은 이미 47절에서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여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을 한 것은 여인으로 하여금 죄 사함 받았음에 대한 더욱 확신을 갖게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 여인에 대해 죄 많은 여인으로 정죄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함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은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참람되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이 선언으로 보아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음을 느꼈고 그에 대한 감격으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행동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 받은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 줍니다.
<結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는 죄를 용서받은 것을 느끼는 것과 거의 비례합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 죄를 많이 깨닫는 사람, 죄를 많이 용서받은 사람, 죄를 많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클 것입니다. 로마서5:20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 생각하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