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8:1-56

<題目> 인자의 교훈과 기적

 

<序言>

  본장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순회 선교사역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의 선교를 위해 12제자를 동반하며 자신들의 재산으로 순회 선교 경비를 충당하면서 사역을 하게 되는데 선교에 공헌을 하는 일단의 여인들을 동반하게 됩니다. 본 장은 씨 뿌리는 비유의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내용구조는 순회 여정(1-3), 씨 뿌리는 비유(4-15), 등불 비유(16-18), 참된 가족에 대한 가르침(19-21), 폭풍을 잔잔케 함(22-25),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 치유(26-39),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 치유(40-56)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순회 여정 (1-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전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았을 때 한 죄 많은 여인이 향유를 부었고 예수님은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 이후에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1). 아마 이 지역들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고을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고을들로 다니시면서 회당이나 집이나 노천 등 어디서든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증명할 만한 기적들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실 때 12제자를 동행시켰습니다. 6:12-16에서 12제자를 세웠는데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시키는 의미도 있고 사역의 계승자로 훈련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한 자들 가운데는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2-3). 유대사회의 관념에서 보면 여자들과 병든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온전케 했고 그들을 사역에 동참시켰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소외된 자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자격이 외적인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 여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가 있었습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는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 막달라 출신입니다.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 출신지인 막달라를 붙인 것입니다. 과거에 일곱 귀신이 들려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 가운데 있다가 예수님의 축귀 사역으로 온전케 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 (27:55-56, 15:40, 19:15), 예수님의 시신이 장사되는 현장에도 있었으며 (23:55, 27:61, 15:47), 안식후 첫 날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발라주기 위해 무덤을 찾기도 했으며 (24:10, 28:1, 16:1),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였습니다 (16:9, 20:11-18).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헤롯(Herod Antipas)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정 담당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사라는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구사는 예수님이 아들을 낫게 해준 관리로 추정됩니다 (4:46).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두 천사로부터 통고받은 인물입니다 (24:10). 요안나는 마리아와 달리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요했던 가정의 부인으로서 하나님 나라 은혜는 높은 지위와 부요한 자에게도 차별이 없이 주어짐을 알게 해 줍니다. ‘수산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습니다. 이런 여자들이 예수님 사역에 동참한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유대사회에서 주도적인 남자나 소외된 여자, 신분과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 건강한 자나 병든 자 모두가 믿음으로 들어가게 되고 사역에 참여하게 됨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에 동행한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외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러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사역을 섬겼습니다 (3). 여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전파 사역을 위해 자신들이 가진 소유를 투자하여 사역을 도운 것입니다. ‘섬기더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동사는 디아코네오’(διακονεω)로서 섬기다’ ‘봉사하다’ ‘헌신하다입니다. 명사는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ς)로서 ’ ‘목사’ ‘집사’(deacon) 등으로 번역됩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렇게 쓰임 받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왕정시대에 북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하던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17:8-16에 보면 북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야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갔습니다. 성문에 이를 때 한 여인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들 하나 있는 과부였습니다. 그에게 물을 구했고 물을 가지러갈 때 떡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가진 떡은 없고 통에 가루 한줌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뭇가지 주워서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먼저 작은 딱 하나를 만들어 자기에게 가져다주고 그 후에 남은 것으로 둘이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야의 선지자 말대로 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도운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에 사역을 하던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 엘리사 선지자가 사역을 할 때의 일입니다. 열왕기하4:8-17에 보면 수넴이라는 곳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존중받았고 부요한 가정이었습니다. 엘리사가 갈멜산에서 길갈로 가는 도중에 수넴에 이르렀을 때 그 여인이 음식을 먹고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엘리사가 순회 사역을 위해 수넴을 지날 때 마다 그 집에서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엘리사에 대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임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해 담 위에 작은 방을 만들고 책상과 침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수넴을 지날 때에 사용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순회 사역을 위해 여행을 하면서 수넴을 지날 때마다 그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았습니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환경을 이용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의 필요를 제공한 것입니다.

 

  출애굽시대에 회막문에서 수종들던 여인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38:8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회막'(會幕)은 성막이 만들어지기 전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천막입니다. 아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네 진을 쳤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천막을 구별하여 치게 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과 구별한 곳에 천막을 치자 그곳에 하나님이 구름 기둥으로 임했고 모세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후에 성전 개념의 '성막'(聖幕)을 지으라 명했습니다. 그런데 성막 뜰에 설치하는 물두멍이라는 성구을 만들게 했습니다.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손발을 씻는 물을 담아둔 것으로서 놋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거기에 들어간 놋은 회막문에서 수종들던 여인들이 바친 놋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지파에 속한 여인들로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회막에서 청소하는 일이나 모세가 시키는 잡일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성막의 물두멍을 만드는데 많은 놋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가지고 다니던 놋 거울을 드려서 물두멍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 놋 거울은 출애굽 때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일 텐데 여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한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회막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더 크고 좋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다 성막을 짓는데 놋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드린 것입니다.

 

 

       2. 씨 뿌리는 비유 (4-15)

 

  이 씨 뿌리는 비유는 마태복음13:3-8과 마가복음4:3-8에도 나옵니다. 이 비유는 팔레스틴 시골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씨를 뿌리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틴 시골의 농사짓는 풍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그 곳에서는 농사를 하기 위해 밭을 일구게 되는데 밭을 일굴 때는 밭 모양을 대부분 옆으로 기다란 모양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사람이나 짐승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듭니다. 그런데 밭 주변에 지반이 석회석으로 되어 있어서 부분적으로 흙이 암반 위에 얇게 덮인 부분이 있게 됩니다. 또한 밭 주변에 거친 가시덤불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다시 일어나 가시덤불이 자라나는 곳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우기가 시작되는 10-11월에 비가 온 뒤에 밭을 갑니다. 그런 후 나귀 등에 씨를 담은 큰 자루를 싣고 밭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주머니나 바구니에 씨를 담아서 기경해 놓은 밭이랑을 돌면서 손으로 씨를 움켜 흩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쟁기를 사용하여 흙을 덮습니다.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4). 이곳은 아마도 갈릴리 바닷가일 것입니다 (13:1-2, 4:1). 예수님이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갈릴리 바닷가로 나왔고 무리들이 그 곳으로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들 때문에 작은 배에 올라 해변에 모인 무리를 행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 첫 번째가 본문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그 같은 배경을 비유로 농부가 씨 뿌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5-8).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습니다. 그 씨가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먹어버렸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졌는데 그 씨는 싹이 낫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가 함께 자라 기운을 막았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는데 100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그런데 씨 뿌리는 농부가 밭에 나가 씨를 뿌릴 때 씨가 여러 곳에 떨어졌습니다. 첫째, ‘길 가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그 씨가 밭 가로 나 있는 길 가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사람이나 짐승이 밟아 부수기도 하지만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버리기도 합니다. 둘째, ‘바위 위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흙이 얇은 돌밭이라고 했으나 누가는 바위 위라고 했습니다. ‘돌밭'에 해당하는 기본형 '페트로데스'(πετρωδης)'바위 같은' '바위가 많은'의 뜻입니다. 그래서 '돌밭'은 돌이 섞여 있는 땅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석회석 바위(암반) 위에 얕은 흙이 덮여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 곳에 떨어진 씨는 싹을 내기는 하지만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하므로 태양의 뜨거움에 말라 버리고 맙니다. 셋째, ‘가시떨기 속입니다. 마태는 가시떨기 위라고 했고, 마가는 가시떨기라고 했습니다. 가시떨기는 가시덤불을 말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가시 기운이 막았다고만 언급했으나 마가는 가시 기운이 막아 결실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밭 주변에 가시떨기들이 흔히 있는데 거기에 떨어진 씨는 가시 함께 자라서 그 기운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떨기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 자라기는 하지만 여러 가시들이 함께 눌러서 줄기나 잎이 뻗어 나갈 수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 기운에 막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곡식의 열매가 맺힐지라도 알맹이는 없는 푸른 껍데기만 있게 됩니다. 넷째,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은 땅의 양분과 비와 햇빛 등으로 곡식 씨앗이 잘 자랄 수 있고 곡식 열매를 맺는 데 방해되는 요소가 없는 순수한 땅을 말합니다. 이 땅에 떨어진 씨는 장애 요인들이 없으므로 싹이 나고 잘 자라되 열매까지 맺게 됩니다. 100배나 결실을 하게 됩니다. 마태는 1006030배의 결실을 한다고 했고, 마가는 3060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외쳤습니다 (8). 깨달을 수 있는 자가 깨달을 수 없는 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깨달을 수 있는 자는 주의를 집중하여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9-1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비유의 강조점이 땅()에 있지 않고 씨 뿌리는 자에게 있고 씨에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이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자의 씨를 뿌리는 행동에 있고 씨의 생명력과 성장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 곧 하나님 말씀이 전해질 때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가 여러 장애 요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깨달아 수용하는 자들에 의해 100배로 성장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성장성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9). 마태와 누가는 제자들이 물었다고 했고, 마가는 한 사람이 제자들과 더불어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니 그것을 그들로 하여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0). ‘비밀'은 전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향해 전하지만 하나님께서 깨닫기를 원하는 자들만 그것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깨닫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나 예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병 낫고 귀신 쫓아내기 위해 쫓아다니던 무리, 예수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우선 쉽게 가르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유'(παραβολη)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나 관념을 가르치기 위해 비슷한 사물과 현상과 관념을 끌어 대어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곧 말하려는 요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낯익은 상황들을 예로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심은 기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평범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달을 자는 깨닫고 깨닫지 못할 자는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분리). 마가복음4:12과 본문 누가복음8:10에서 '~하려 함이라'에 해당하는 '히나'(ινα)'...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비유로 하신 목적을 말하는 바 깨닫지 못하여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13:15에서는 '~두려워함이라'고 했지만 그에 해당하는 '메포테'(μηποτε)'...하지 않도록'로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13:11). 어떤 자에게는 허락되었고 어떤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허락된 자는 깨닫게 하고 허락되지 않은 자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깨달아야 할 자에게는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고 깨달아서는 안 될 자에게는 감추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깨달아서는 안 될 자들이 깨달을까 두려워서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포). 본문은 이사야6:9-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인용입니다 (13:14-15).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에게 전쟁을 통해 물질과 육체에 환난을 당하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흑암 가운데 있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깨닫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깨달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을 아주 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하시고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한 완악한 자들에 대한 비극적 운명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권면).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므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인용한 이사야의 메세지도 그런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13:16-17에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외인들과 비교해도 그렇고 구약 사람들과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고 고대했지만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허락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앎으로 더욱 많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13:11-12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있는 자'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이고 '없는 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입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공통적인 것은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자는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없는 자는 보고 들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자에게는 더욱 많은 은혜가 주어지나 없는 자에게는 더욱 없어지는 것입니다.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제자들이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묻자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4: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11절에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고 했습니다. ‘는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첫째, 길 가에 떨어진 씨에 관한 의미입니다. 5절에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라고 했었는데, 그에 대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3:19에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라고 했고, 마가복음4:15에는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길 가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는 사탄이나 마귀 같은 악령을 가리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과 능력과 경험을 절대시하는 교만한 자들,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에 악한 영들이 그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므로 그 말씀을 거절하게 됩니다. 자기의 지식만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나 새로운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말씀을 인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이 그런 자들에게 전해지면 악령이 그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여 말씀이 그 마음에 존재하지 못하게 됩니다.

 

  둘째, 바위 위에 떨어진 씨에 관한 의미입니다. 6절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했었는데 그에 대한 의미입니다.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3:20-21에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고 했고, 마가복음4:16-17에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고 했습니다. '바위 위'말씀을 받기는 하나 환난과 박해가 오면 넘어지는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말씀을 깨달아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견디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겉은 부드러워 말씀을 수용하지만 속은 아직 완악하여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확신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는 환난이나 박해나 시련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대로 살려 할 때에 환난이나 박해나 시련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평안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수용할지라도 어려움이 찾아오면 곧 갈등하게 되고 시험이 들게 되고 포기하게 됩니다.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어려움을 당하면 곧 넘어지고 맙니다. 듣기만 좋아하고 마음의 확신과 연단이 없는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곧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말씀이 그런 자들에게 전해지면 말씀이 신념으로 자리하지 못하게 됩니다.

 

  셋째,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에 대한 의미입니다. 7절에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고 했었는데 그에 대한 의미입니다. 14절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3:22에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했고, 마가복음4:18-19에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고 했습니다. '가시떨기'말씀을 받아 말씀대로 살려하나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이 올 때 약해지는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말씀을 깨달아 말씀대로 살지만 세속적인 욕망에 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가시'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향락 욕심을 상징합니다. '세상 염려'는 현재 삶에 국한된 근심이나 염려나 불안을 말합니다. '재물의 유혹'은 재물이 평안과 행복을 줄 것처럼 여기게 하는 유혹을 말합니다. '향락의 욕심'은 원하는 것을 갈망하고 얻고자 하고 누리고자 하고 즐기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물욕과 정욕과 사욕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을 뿐 아니라 그대로 살려는 노력을 하는 자라도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향락의 욕심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입과 잘 살까 하는 염려만 있고 필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 두려는 욕심만 있고 정욕과 명예욕을 채우려는 욕망이 있는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욕심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깨달아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인격과 삶의 변화로 승화되지 못합니다. 말씀이 그런 자에게 주어지면 말씀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넷째, 좋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한 의미입니다.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했었는데 그에 대한 의미입니다.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3:23에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했고, 마가복음4:20에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말씀을 깨달아 말씀의 요구에 합당하게 살아가므로 말씀이 인격과 삶에 변화를 가져온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말씀을 깨달아 순종하므로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온전히 수납하여 순종하되 어떤 시련이나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격과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15). 인내는 영적 열매를 얻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신앙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서 100배의 결실을 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들은 후 악령의 방해하는 역사를 이겨야 하고 환난과 핍박과 시련을 견뎌야 하고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육체의 향락을 이겨야 합니다. 살다 보면 돈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몸이 심하게 지속적으로 아픔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비난과 공격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변명하고 싶기도 하고 복수하고 싶은 욕망도 일어납니다. 그럴 때 잘 참아야 합니다. 욥처럼 극한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생각하며 견뎌야 합니다. 욥은 재산을 다 잃고 집을 잃었습니다. 온 몸에는 병이 들어 종기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발했습니다. 쓰레기더미에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살에서 고름이 나고 흙먼지가 달라붙어 말라서 딱지가 되었습니다. 그 갈라진 딱지 사이로 벌레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친구들은 와서 욥이 하나님 앞에 은밀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물질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만 느낀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붙잡고 견뎌 냈습니다. 욥기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극한 고난과 고통과 침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목적을 상기하며 견뎌 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신 후에 하나님이 배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자녀도 낳고 재산과 명예도 회복해주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복을 받았습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낙심이 될 때도 참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많은 꿈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언젠가 생활을 개선해 주고 비전을 이루어 주시리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시일이 오래 지나도 그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낙심하며 좌절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고 구원했는데 그 목적도 반드시 이루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적 축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자손을 하늘에 별같이 많게 해 주고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선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은 후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무려 10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고 20년이 지나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5년이 지나서야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어떤 일이 오랫동안 안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미국에 빌 포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태어나 직장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활용품 화사 '왓킨스' 영업 사원으로 들어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므로 결국 성공자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공된 생애가 되려면 인내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바른 신앙생활을 해갈 때 유혹도 있고 고난도 있고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혹을 이기고, 모든 핍박과 고난과 고통을 참고, 모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한 목적을 두고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떻게 성공하게 해주실지 모릅니다. 히브리서10:36"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100배의 결실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8). 그런 사람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3060100배의 결실을 합니다. 이 결실은 내적으로 본다면 복음과 말씀을 받아들인 성도 개개인의 영적 진보를 가리킨다고 할 수도 있지만, 외적으로 본다면 복음 전도 역사의 전개에 따라 하나님 나라 시민의 숫자적 증가를 가리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진보와 증가는 '길가''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지므로 잃은 씨앗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결과입니다.

 

  그 성장에 대해 확대한 비유는 다른 여러 비유들이 있습니다. ‘자라는 씨 비유’(4:26-29)겨자씨 비유’(13:31-32, 4:30-34)누룩 비유’(13:33)가 있는데 그것은 성장의 방법(원인)과 현상(결과)에 대한 비유입니다. ‘자라는 씨 비유처럼 사람이 씨를 뿌리면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서 열매를 맺혀 추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처럼 한 알의 조그마한 씨가 후에 모든 풀보다 크게 자라 공중의 새가 깃들 정도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누룩 비유처럼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yeast, baking powder)이 전부 부풀게 한다는 것입니다. '3'(54)10명의 대가족이 하루 3끼를 먹을 수 있는 양에 해당하는 가루입니다. 조금의 누룩이 그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부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교훈이 전해질 때 아예 거절하여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고 들을 때는 깨달은 것 같으나 핍박이 오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유혹이 오면 이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교훈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들만 보면 마치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교훈을 잘 깨달아 인격과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사람을 통해 성장하고 건설됩니다. 전체적인 성장과 부흥이 일어납니다. 길 가처럼 사탄의 주장받은 사람들이 있고 돌밭처럼 환난과 핍박이 오면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시떨기처럼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욕심 때문에 배반하는 자들이 있지만, 좋은 땅처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결실하는 자들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에 이용당해 대적하는 자들이 있고 이적만 좋아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처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통해 성장하고 건설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방해가 있음에도 반드시 성장하고 놀라운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3종류의 사람들을 통해 실패한 것 같으나 1종류의 사람들을 통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3종류를 합친 것보다 1종류를 통해 수십 배 더 놀라운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완악한 마음도 있고 환난과 핍박을 싫어하는 마음도 있고 세상과 육체와 물질의 욕망을 좇는 마음도 있지만,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부분이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3종류의 사람이나 3종류의 마음의 배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1종류의 사람이나 1종류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아예 거부하여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고, 말씀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확신이 부족하여 고난과 역경이 오면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고, 말씀대로 살려 하지만 세상과 육체와 물질에 대한 욕망에 짓눌려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기독교에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조명하에 말씀을 바로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므로 인격과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말씀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므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을 바로 깨달아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장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사람을 통해 필연적으로 절대적으로 성장을 합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80:20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생산의 80%20%의 사람을 통해서 생산되고 우리가 소비하는 80%의 소비는 20%의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법칙입니다. 일본의 어느 학자가 근면과 성실의 상징인 개미를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자가 개미를 자세히 연구해보니 실제로는 개미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20%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80%의 대부분의 개미를 열심히 일하는 20%의 개미만이 먹여 살린다는 얘기입니다. 5분의1이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5분의1만 있으면 우리나라 사회, 문화, 경제, 역사 모두가 새롭게 변화됩니다. 목회학에서도 비슷한 이론이 이 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5~10%라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성도 개인에게 있어서도 같은 원리로 성장합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 속에는 말씀을 거부하는 성향도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포기하는 성향도 있고, 유혹이 있을 때 시험에 드는 성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여 인격과 삶이 변화되기를 추구하는 성향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성향을 생각하면 실패인 것 같지만 긍정적인 성향 그것 하나 만 있으면 성공합니다. 부정적인 성향이 많아서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성향이 없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3. 등불 비유 (16-18)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16). ‘’(λυχνος)은 방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진 등잔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둥그런 모양의 납작한 적갈색의 토기입니다. 한 쪽 끝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고 다른 한 쪽 끝에는 심지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나 있는 대롱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습니다. 등 윗부분에는 두 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하나는 기름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고 하나는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입니다. 그 등잔에 감람유(olive)를 채우고 그곳에 심지를 넣어 불을 켭니다. 그 등잔은 등경 위에 올려놓습니다. ‘등경’(λυχνια)은 등대라고도 하는데 등잔을 올려놓는 받침대입니다. 그 등대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대()인 경우도 있고 벽에서 돌출한 선반인 경우도 있습니다. 등을 등경 위에 두는 것은 온 실내를 비추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등을 켜고 그 등불을 그릇으로 덮지 않습니다. 그릇’(σκευος)은 물건이나 도구를 말합니다. 마태복음5:15과 마가복음4:21에는 말() 아래 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μοδιος)은 곡식 같은 것을 되는 기명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되로서 18인데 이스라엘에서는 8.25의 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등불은 평상 아래 두지도 않습니다. '평상'(κλινη)은 잠을 잘 때 사용하는 침상이나 침대를 말합니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아래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등불이 실내를 비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방 안에 등불을 켤 때는 등잔을 등경 위에 올려서 켜 놓습니다. 그러다 등불을 켜지 않을 때는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내려놓는다고 합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실내를 환히 비추어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아래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17).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표현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첫째, 죄나 악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전하는 진리는 반드시 전파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셋째, 제자는 반드시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면서 빛은 산 위의 동네를 비추고 등불은 집 안 모든 사람을 비춘다고 하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고 한 것을 보면, 세 번째 의미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두 번째 의미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이 바로 앞에 씨 뿌리는 비유에 이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4-15). ‘씨 뿌리는 비유3종류의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1종류의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결실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곧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진리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고,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소수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건설되고 확장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본문은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반드시 전파되어 효과를 가져 온다는 필연성을 강조한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등불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교훈을 상징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릇'()'평상'(침상)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와 확장에 방해되는 모든 세속적인 환경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방해 요인들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전파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등불입니다. 요한계시록1:20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해서 주님께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2: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했습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를 없애버린다는 말로서, 주님이 교회를 떠난다는 의미이며 다른 교회를 통해 사역을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진리를 전해야 할 사명이 있는 교회와 성도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환경과 관습과 통념과 욕망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진리가 온 영역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진리 자체만 드러내야 하고 그것이 인생과 사역의 가치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했고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라고 했습니다 (18). 마가복음4:24-25에는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깨달을 수 있는 자는 무엇을(What) 어떻게(How) 들을지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어떤 관점을 말하려 하는지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라는 표현은 마태복음7:2과 누가복음6:38에도 나오는 표현인데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마가복음4:25에서는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교훈에 관한 것을 수용하는 자세를 표현한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과 교훈을 통찰력 있게 받아들인다면 그 만큼 값진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계속해서 더욱 풍성한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그것을 듣는 방식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닫는 자는 더욱 많이 깨달아지는 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땅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알려 애쓰는 자는 더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관심을 갖지 않아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점점 더 깨닫지 못하게 되어 깨달았던 것마저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달은 자는 주님 오실 때에 많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입니다 (6:7, 고후9:6).

 

 

       4. 참된 가족에 대한 가르침 (19-21)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12:46-50과 마가복음3:31-35에도 나온 내용입니다.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 가버나움까지 왔습니다 (3: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예수님이 계시는 베드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고 문 앞까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사정을 듣고 예수님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9-20). 마가복음3:32에는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동생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였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여동생들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13:55-56"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거룩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낳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성모무후회태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요셉의 전처(前妻)가 낳은 아들들로서 이복 형제들이거나 마리아와 같은 이름을 가진 마리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기록에 위배되고 또한 요셉의 전처가 낳은 아들들이라면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잇는 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되고, 또한 마리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들이라면 두 자매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말이 되는데 상식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사실 이상의 거룩성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성령에 의해 낳았고 다른 자녀들은 요셉과의 관계를 통해 낳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유대인의 사고로 보면 예수님은 당장에 어머니의 부름에 응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21).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부모를 거부하거나 가족관계를 등한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리새인들이 고르반 사상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7:9-13, 20:12,1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오열하는 어머니를 가장 신뢰했던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19:26-27). 예수님의 의도는 인륜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현장의 기회를 통해 영적인 교훈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9). 곧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의 자격과 일체성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5:5).

 

  예수님은 가족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 말하는 자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고 했고 누가는 이를 생략했습니다 (12:48, 3:33). 그리고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했고,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이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12:49, 3:34). 이로 보건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이 중심이 된 무리들을 가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는 12제자도 있었고 자신들의 소유로 사역을 섬기는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혈통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이룹니다 (2:28-29). 그러므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한 권속인 것입니다 (2:19, 6:10).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생과 혈통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신분과 행위가 어떠할지라도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주님은 연약하여 넘어질 때에라도 여전히 우리를 형제로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했고, 마가에 의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했고, 누가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12:50, 3:35, 8:21).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7:21, 6:29,39-40).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치는 말씀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명령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과 같은 목적과 같은 가치와 같은 정신과 같은 헌신하는 자입니다 (5:17, 4:24, 17:4).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자들을 통해 세워지고 견고해지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5. 폭풍을 잔잔케 함 (22-25)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잔잔케 하신 사건은 마태복음8:23-27과 마가복음4:35-41에도 나와 있습니다.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22). 갈릴리 바다를 누가는 호수라고 했습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갈릴리 바다 해변에서 물이 얕은 곳에 배를 대어 그 배에 올라타서 해변에 모인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쳤고 날이 저물어가자 배에 탄 채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고,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이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바다 건너편을 향해 떠났고, 다른 배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4:35-36). ‘저편은 가버나움이 있는 갈릴리 바다 북쪽에서 거라사(가다라) 지방이 있는 갈릴리 바다 동남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가 행선할 때 예수님은 잠이 들었는데 마침 광풍이 호수를 내리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23).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배의 뒤편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4:38). 예수님이 잠이 든 것은 낮에 치유사역과 말씀사역으로 피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불었습니다. ‘광풍은 돌풍을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주변이 높은 협곡으로 둘러 싸여 있고 물은 지중해 해수면보다 200m나 낮았습니다. 그래서 북쪽 헤르몬 산에서부터 발원한 찬 공기가 요단 협곡을 따라 빠른 속도로 호수로 내려와 낮에 내리쬐는 태양으로 따뜻해진 해수면의 공기와 충돌하여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와 위태하게 된 것입니다. 마태는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다고 했고 마가는 광풍으로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8:24, 4:37). 배가 광풍으로 인하여 물결이 쳐서 물이 배에 가득 들어왔기 때문에 배는 조종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금방 전복되거나 침몰할 위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해가 질 때 광풍이 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체해야 하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들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했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마침내 죽음의 위협까지 느껴 공포에 질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워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고 했습니다 (24). 마태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다고 했고, 마가는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8:25, 4:38). 죽음의 위험을 느낀 제자들은 다급하게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주여는 그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예수님을 불렀는지 연상할 수 있게 합니다. 저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호칭을 선생으로 번역했는데 헬라어 성경은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마태는 퀴리오스’(κυριος)라고 했고, 마가는 디다스칼로스’(διδασκαλος)라고 했고, 누가는 에피스타테스’(επιστατης)라고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퀴리오스는 다스리는 , ‘디다스칼로스는 가르치는 선생, ‘에피스타테스는 보호하는 대장’(감독)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자기들을 보호해주는 분으로 혹은 자기들을 마땅히 보호해 주셔야 하는 분으로 인식했음을 강조하려 한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불러 깨운 것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믿은 믿음의 표현일 수도 있고, 자기들을 마땅히 보호해주셔야 할 분이 주무시고만 있는 것에 대한 불평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태는 전자를 강조한 듯하고 마가는 후자를 강조한 듯합니다.

 

  제자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장소였습니다. 고대에는 자연신을 믿었습니다. 자연의 특정한 곳마다 그 자연을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신은 모습이 사람과 관계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삶에 개입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면으로 개입하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면으로 개입하면 질병이나 불행 등을 초래한다고 믿었습니다. 바다에도 그와 같은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신을 메소포타미아인(바벨론)들은 '티아맛'(Tiamat)이라 했고, 그리스인(헬라)들은 '포세이돈'(Poseidon)이라 했고, 로마인들은 '넵튠'(Neptune)이라 했고, 유대인(히브리)들은 ''(Yam)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을 용, 악어, 리워야단, 라합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29:3, 26:12, 74:13, 148:7, 27:1, 30:7, 51:9). ''은 바다 속에 살면서 바다를 주관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나오면 고기들을 몰아 잡히게 하고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이 나오면 광풍을 일으켜 배를 뒤집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사건 이후에 제자들끼리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또 광풍을 만나 배가 침몰할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그 때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유령이다'하면서 무서워 소리 질렀습니다 (14:26, 6:49).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것은 바다에 ''이 있다는 관념이 있는 차에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물 위로 걸러 오는 형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어둠과 혼돈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에 대한 예언에서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짐승'(적그리스도)이 바다에서 올라온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13:1). 그런 관점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미래에 하나님이 그런 바다를 정복할 것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11:9, 2:14, 3:15).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말하면서 바다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21:1). 하나님의 보좌 앞에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했고 (4:6), 적그리스도의 박해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선 곳도 유리 바다라고 했습니다 (15:2). '유리 바다'는 맑고 깨끗한 것에 대한 의미도 있지만, 요동하지 않고 평안한 상태에 대한 상징입니다. 혼돈과 공포가 없어지고 평안(shalom)만이 있을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혼돈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포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던 신을 제압하고 두려움을 없애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한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시고 곧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8:26). 마가는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고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했다고 했습니다 (4:39-40). 누가는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고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8:24-25). 마태복음8:26과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바다를 잔잔하게 했는데, 마가복음4:39-40과 누가복음8:24-25에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난 다음에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믿지 못하여 두려워한 것 대한 책망한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이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한 다음에도 아직까지도 두려움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병행구절 마가복음4:40에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 네슬판(GNT)에는 '아직 아니'의 뜻을 가진 '우포'(ουπω)가 첨가되어 '우포 ž세테 피스틴‘(ουπω εχετε πιστιν)으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너희가 아직도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로서 의미상으로는 앞에 있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는 말과 연관되어 '너희가 아직도 두렵느냐'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거나 두려워 한 것을 책망하려는 의도보다는 두려움의 상황을 없애주고 '이제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는 안심을 주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1차 수신자는 로마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로마에서 박해로 두려워 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을 주는 메세지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놀랍게 여기며 서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고 했습니다 (25). 마태는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했다고 했고 (8:27), 마가는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4:41). 바람과 물(바다)이 예수님께 복종하는 혹은 바다를 지배하는 신()이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이 반응을 보면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세계를 지으신 분으로서 (1:1-3, 1:2, 1:15-17, 11:36), 자연만물을 주관하는 분으로서 (38:8-11, 65:5-6, 89:8-9, 107:23-32), 구약성경에 약속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계시하는 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9:5). 이 사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당했으나 해결할 능력이 없어 공포에 질린 제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해 주고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인지 알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린 것을 목격했는데 (6:8,18, 7:11-17),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당한 위기를 초자연적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6.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 치유 (26-39)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내용은 마태복음8:28-34, 마가복음5:1-20, 누가복음8:26-39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서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동남쪽 육지에 위치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26). 예수님이 도착한 지방이 마태는 가다라라고 했으나 마가와 누가는 거라사이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들리아 사본을 비롯한 몇 사본들은 가다라’(Γαδαρηνων), 바티칸 사본을 비롯한 몇 사본들은 거라사’(Γαδασηνων), 시내 사본을 비롯한 몇 사본은 게르게사’(Γεργεσηνων)로 되어 있습니다. 스테반본은 가다라로 나와 있고 (την χωραν των Γαδαρηνων -GTS), 킹제임스역에는 가다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he country of the Gadarenes -KJV). 갈릴리 호수 동남쪽 지방을 데가볼리 지방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다라거라사가 있습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에서 9km 떨어진 곳이고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에서 4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다라가 맞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다라라고 확신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 곳은 예수님이 호수에서 나온 직후이고 사람에게서 나온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 돼지 떼가 호수로 들어가 몰사했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은 만난 곳은 갈릴리 호수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난 곳은 호수에서 가까운 게르게사’(Grgesa)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제자들이 그 지명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 아는 부근의 지명을 사용했다고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난 곳은 호수 근처인데 그곳이 가다라 지방이나 거라사 지방의 지배권에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지방들을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지에 내리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δαιμονια)들린 자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오래 옷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않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27). 뿐만 아니라 그는 가끔 귀신에게 붙잡히므로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가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9). 마태는 귀신 들린 자 둘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8:28). 아마도 귀신 들린 사람이 2사람이었는데 마태는 그가 목격한 대로 2사람을 다 기록하고 마가와 누가는 2사람 중 심각한 증세를 보인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마가는 그가 여러 번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려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 맬 수 없게 되어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다고 했으며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치고 있던 자라고 했습니다 (5:3-5). 팔레스틴에서는 무덤을 자연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 공동 무덤이 있는 곳은 마을에서 살 수 없는 범죄자나 걸인이나 광인들이 거처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귀신 들린 자도 마을에서 쫓겨나 공동무덤이 있는 곳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해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손과 발을 쇠사슬과 고랑(족쇄)로 묶어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끊어 버려서 그를 누구도 무엇으로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강한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게 하는 내용들입니다. 귀신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까지 지배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며 한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28). 마가는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을 하면서 그 같은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5:6-7). 귀신들린 사람을 주관하는 귀신은 영적 감지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을 알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았고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야고보서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19:15).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한 것은 내용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가 신앙을 고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재로 예수님을 높여서 예수님의 마음을 약하게 하여 예수님으로부터 타협점을 얻어 내려한 술책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나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에나 신경 쓰라는 의미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는 자기는 잘 지내고 있는데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자기를 쫓아내려 하느냐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오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8:29). 귀신들도 자기 때와 결국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사탄과 마귀와 귀신을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었다가 잠시 놓은 후 최후에 유황 불 못에 보내어 세세토록 괴로움을 당하게 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1-3,10). 그래서 귀신은 예수님께 왜 그 마지막 때도 되지 않았는데 와서 괴롭게 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심판 때까지는 가만히 두어도 되는 데 왜 나타나서 괴롭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19:15, 2:19).

 

  귀신이 예수님께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이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9). '더러운 귀신'(τω πνευματι τω ακαθαρτω)'더러운 영'입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닙니다. 원래 선한 천사로 창조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찬양을 맡았으나 교만하여 타락하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 지상으로 내려온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28:13, 14:12-14, 1:6, 12:7-9). 그래서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적극적으로 하나님 일을 방해합니다 (12:12). 그들을 더러운 영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도 그렇지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부정하고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들어와 사람의 정신과 생각과 행동을 지배합니다. 귀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파괴적이어지게 되고 공격적이어지게 되고 이기적이어지게 되고 부정적이어지게 되고 추해지게 됩니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더럽고 추악하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는 자에 한 합니다 (요일5:18).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물으니 그가 군대라하니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고 했습니다 (30).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 묻고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주장하고 있는 귀신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름은 존재의 실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물은 것은 그 정체를 물은 것이며 정체를 물은 것은 귀신 들린 사람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려고 귀신 들린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쫓아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군대’(λεγιων)군단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 군대의 1개 군단은 보병 6,000명과 기병 12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귀신의 수가 심히 많은 집단으로서 제어할 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귀신이 군대임을 밝힌 것은 자신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제시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 대답을 한 귀신은 수많은 귀신 가운데 대표성을 가진 귀신이었을 것입니다. 한 귀신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귀신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7귀신이 들렸던 자였습니다 (2). 11:24-26에 보면 한 사람이 한 귀신이 들렸을 때보다 7귀신이 들렸을 때 그 상태가 더욱 심하게 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로 보건데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의 상태가 얼마나 악했을 것이며 그 사람이 얼마나 극한 고통을 받았겠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31).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귀신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간구한 것입니다. ‘무저갱’(αβυσσος)바닥이 없는 장소’ ‘밑이 없는 구렁텅이로서 끝없이 깊은 흑암의 구덩이를 의미합니다 (벧후2:4, 1:6). 이 용어가 처음에는 물을 가두어 놓은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6-7), 후에는 종말에 사탄과 마귀와 귀신 등의 악령들을 최후심판 때가지 임시로 가두어 놓은 처소로 사용되었습니다 (20:1-3,10). 마가는 귀신이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5:10). 귀신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사람과 장소를 떠나기 싫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와 다른 지방으로 가라 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최후심판 때 유황 불 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10). 그 때가 되기 전까지 다른 지방으로 보내지도 말고 무저갱으로 보내지도 말아달라는 간구를 한 것입니다. 그 때가 되기 전까지 거라사 지방에서 지내게 해 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32). 갈릴리 호수 동남쪽 해안 데가볼리 지역에는 이방인이 살고 있어서 돼지를 길렀습니다. 대화 장소는 호수 가까운 곳으로서 산과 무덤과 평지와 비탈이 있었습니다. 그 평지에는 방목하는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그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나올지라도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생명체인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길 원했겠지만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차선책으로 영이 없는 생명체이지만 주변에 많았던 동물인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곳에 거하는 생명체에 들어가므로 다른 지방이나 무저갱으로 가지 않고 그 동안 활동해왔던 장소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신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신은 생명체에 거하기를 좋아하고 한 장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좋고 심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귀신들에게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는 간구를 허락하자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니 그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했습니다 (33). 마가는 그 돼지 떼의 수가 거의 2,000마리나 되는 떼였다고 했습니다 (5:13). 수많은 돼지 떼가 놀라 견디지 못하고 호수(바다)를 향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한 것입니다. 돼지 떼가 호수로 들어가 몰사한 것이 돼지 떼로 들어간 귀신들이 돼지 떼로 하여금 호수로 들어가도록 주장한 것인지 돼지 떼가 귀신들이 들어옴에 놀라 스스로 호수로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귀신들이 돼지 떼를 끌고 들어간 것이라면 자신들이 거할 처소를 스스로 잃게 했겠는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돼지 떼가 호수에 들어가 죽은 다음에 귀신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의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들을 축출한 사건이 주는 의미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귀신들의 말을 통해 증명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귀신들의 복종을 통해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지배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내므로 사람의 인격과 생활에 평안과 행복이 있게 하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셋째, 귀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귀신들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을 괴롭게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동물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악하고 더러운 영()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요일3:8). 넷째,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돼지 떼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2,000마리의 되지 떼보다 귀한 존재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들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악령들의 지배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보려주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고, 요한일서5: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 (34-35). ‘치던 자들은 돼지 떼를 치던 자들입니다. 그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해서 기르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습니다 (11:7). 탈무드에도 돼지를 기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동남쪽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돼지를 치던 자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 돼지 떼들이 호수로 내리달아 몰사하는 것을 보고는 신기함을 뛰어넘어 놀람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도망하여 읍내와 마을로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마태는 시내로 들어가서 알렸다고 했고 (8:33), 마가는 읍내와 여러 마을로 들어가서 알렸다고 했고 (5:14), 누가는 성내와 마을로 들어가 알렸다고 했습니다 (8:34).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려고 현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당도하니 귀신들렸던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여 옷도 입은 채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에는 귀신에 들려 정신이 이상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괴성을 지르고 괴력으로 위협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정신으로 옷을 단정히 입고 점잖은 모습으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상황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읍내와 마을에서 몰려든 자들이 도착했을 때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일렀습니다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은 돼지 떼를 치던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와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고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들이 나가는 것을 보았고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 돼지 떼가 몰사당한 상황을 다 보았던 자들입니다 (5:16). 몰려든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오기는 했지만 자세한 전모를 모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돼지 치던 자들이 다시 자세히 설명을 해준 것입니다. 그러자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떠나가기를 구했습니다 (37).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현장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에 대해 사실임을 확인하고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은 미신적 관념이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기적을 미신적 능력으로 보고 돼지 떼 2,000마리가 몰사한 것을 미신적 재앙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들 마을에 유할 경우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 떼 2,000마리가 죽은 것에 대해 항의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 주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귀신들렸던 한 사람이 온전케 된 것과 그로 인해 자신들이 평화롭게 된 것을 생각지 못하고 돼지 떼 2,000마리 죽은 것으로 미루어 자기들의 돼지들도 죽게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물질적 손해를 염려하여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생각지 못하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진 세속적인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구하자 예수님은 배에 올라 돌아갔습니다 (37).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그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지방을 떠나기 위해 배에 올라타려 할 때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했습니다 (38). ‘구하였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에토’(εδεετο)의 시상이 미완료형인 점으로 보아 계속해서 간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간청은 예수님과 함께 가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고통에서 구해준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배우고 하나님 나라 사역에 헌신하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보내시며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39). 마가는 예수님이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어떻게 큰 일을 행하여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5:19). 예수님이 귀신 들렸던 자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일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돌려 보낸 것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귀신들렸던 자를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귀신들렸던 자가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았으나 가족에게 돌아가 공동체 생활을 하므로 더욱 온전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어 귀신 들렸던 자를 고통에서 구해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으로서 그것이 귀신 들렸던 자에게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그가 가족 공동체로 돌아가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둘째, 귀신들렸던 자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전에 가버나움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곳에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하는 유대인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아야 할 때가 안 되었는데 기적을 베푼 사실을 알리면 그들의 공격이 빨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데가볼리 지방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유대인들이 없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알리는 것이 더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귀신 들렸던 자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일을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행한 일을 경험하여 새롭게 된 자는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지를 온 성내에 전파했습니다 (39). 마가는 그가 가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5:20).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자기에게 행한 일을 간증하고 온 성읍에 전파하고 온 데가볼리에 전파했습니다. '데가볼리'(Decapolis)는 갈릴리 호수 동남편과 요단강에 인접한 10개의 도시를 말합니다. 그 도시들은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헬라와 로마의 문화를 이식하여 세운 도시들입니다. 가다라와 거라사도 그 도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귀신 들렸던 자의 예수님에 대한 전파로 가다라와 거라사 뿐 아니라 데가볼리 전체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경험하여 구원을 받은 자는 제자들처럼 특수 사역을 위해 속해 있던 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 가운데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의 헌신된 사역으로 한 지역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정체성과 사역 정체성이 뚜렷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4:34, 20:24, 1:20).

 


       7.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 치유 (40-56)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과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치신 사건은 같은 시점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에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고 그 사이에 야이로의 딸은 죽었고 예수님은 가서 야이로의 딸을 살렸습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9:18-26과 마가복음5:22-43과 누가복음8:40-56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22-24).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바다) 북쪽 해변에서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후 호수 건너편 동남쪽 가다라(거라사)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쳤습니다. 그 와중에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 돼지 떼 2,000마리가 호수로 내리달아 몰사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주실 것을 요청했고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으로 갔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이 돌아오심을 기다리다가 예수님이 돌아오자 다시 모여 들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40, 5:21).

 

  예수님이 그 곳에서 가르치시는 중에 회당장 야이로(Jairus)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12살 된 외딸이 죽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41-42). 마태는 한 관리라고 했으나 마가와 누가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했습니다 (9:23, 5:35, 8:41). 야이로라는 사람은 가버나움의 회당장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Rabbi),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회당장(會堂長)은 회당의 대표자로서 회당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 작성과 질서 유지와 사무 등을 관장하던 장로출신 지도자였습니다 (8:41, 18:8,17). 당시 제사장들이 정권과 결탁하고 헤롯이 제사장을 임명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제사장을 전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민 계급 가운데 회당장을 세워 그로 하여금 회당과 예배와 사무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회당장은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고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9:18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라고 했고, 마가복음5:23에는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라고 했고 누가복음8:41-42에는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딸이 방금 죽었으니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고 했다고 했고, 마가복음은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고 했다고 했고, 누가복음은 외딸이 죽어가기 때문에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딸이 이미 죽은 것으로, 마가와 누가는 딸이 죽지 않고 죽게 되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에 죽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5:35, 8:49).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행동은 그의 휼륭한 면모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겸손했습니다. 회당장(회당 대표)은 유대교 대표적 지도자로서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새로운 랍비(선생) 정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회당장이 그런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다는 것은 딸을 고치려는 열정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겸손함을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딸을 사랑했습니다. 당시 야이로의 딸은 12살 된 하나밖에 없는 외동 딸이었습니다 (42). 야이로는 딸을 지극히 사랑했고 딸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하는 딸이 병이 들어 죽게 된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지 그를 살리려는 열정을 가지고 자기의 위신도 생각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바닷가에까지 찾아왔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전에 가버나움 회당과 베드로의 집과 해변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낸 일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 간절히 구한 것입니다. '구원 얻어'(σωθη)라는 표현은 영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서 건짐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얹고 말씀하시면 딸이 질병에서 고침 받아 살게 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태를 보면 교만하여 자기를 높이려 하며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행동은 우리가 귀히 여겨야 할 부분입니다.

 

   ② 예수님이 혈루증 앓은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42-48)

 

  42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해변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다가 회장장 야이로가 나아와 12살 된 외동 딸이 죽게 생겼으니 살게 해 달라는 간구를 하자 그 간구를 들어주기 위해 일어나 갔습니다. 제자들도 따랐고 많은 무리들도 따랐습니다 (9:19, 5:24). 그 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면서 따라갔습니다 (42, 5:24).

 

  그런데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다고 했습니다 (43-44). '혈루증'(血漏症)은 당시 여성의 만성 하혈증으로서 자궁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증세를 말한 것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12년 동안을 혈루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활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신앙생활에 제약을 받았을 것입니다. 혈루증은 유출병으로서 의식(儀式)상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가 접촉하는 것들도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그 물건들을 접촉한 자도 부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유출병에 접촉된 그릇은 깨트리고 옷은 빨고 몸은 씻어야 했습니다 (15:1-15). 그런 질병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접촉해서도 안 되고 공개된 장소에 나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종교적인 집회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총체적으로 고통과 수치심과 고립감과 절망감과 두려움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수치와 영적인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 질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았지만 효험이 없었고 가진 돈만 다 없애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다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마가복음5: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했습니다. 그는 물질과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모든 부분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의원을 찾아갈 비용도 없고 더 이상 호전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과 비통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귀신이 들린 자의 모습과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과 함께 인간들이 겪는 고난과 고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리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가복음5: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병 치료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녀는 직접 본 것이 아니지만 소문을 듣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는 자들이 병 고침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도 예수님께서 손을 대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질병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사회가 유출병자를 부정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질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유출병자는 그가 접촉한 자도 부정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을 대는 예수님도 부정한 자라는 공격을 받을 것이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5:1-12, 19-27).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손대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마태는 겉옷만 만져도 나을 줄로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9: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했고, 마가복음5:28에도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옷깃 끝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15:38-39). 그것은 매일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살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능력이 그 옷 술에까지 전달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도 그런 통념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불결한 사람으로 알아 공개적으로 치유를 요구할 수 없어서 그의 옷 술만 만져도 낳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중 속을 뚫고 들어서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진 것입니다. 그것만 만져도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이 전달되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몰래 예수님 뒤에서 겉옷 가를 만진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혈루증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았습니다 (44). 마태는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했고 (9:22), 마가는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고 했고 (5:29), 누가는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8:44).

 

  이 여인이 고침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의지와 예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4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했고, 마가복음5:34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가진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능력을 가진 자로서 손만 대면 나을 줄로 믿고 겉옷만 만져도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믿음있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반드시 예수님의 겉옷을 만져서 나아야겠다는 절박성과 간절함을 가졌습니다. 마가복음5: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고 했는데,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은 질병을 치료받아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의미이고, '함일러라'에 해당하는 '에레겐'(ελεγεν)'말하다'라는 뜻인 '레고'(λεγω)3인칭 단수 미완료 능동태로서 '그녀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있는 열정입니다. 셋째는 무리가 가로막는 난관에도 무리를 뚫고 들어가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믿음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서에 나오는 병자들이 고침받은 경우는 모두 특별한 믿음을 보인 자들입니다. 남다른 은혜를 입고 싶다면 남다른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물질적 고통이든 육체적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영적인 고통이든 주께 매달려야 합니다. 특히 유출병(流出病)이 영적으로 상징하는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울 때 주께 나아가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벧전2:11, 5:19, 7:20-23, 15:19-20, 17:9, 7:15-25, 8:2,13).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접촉(교제)을 통해 제어될 수 있다는 생각과 열정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13:8).

 

  한편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45). 마가복음5:30-31에는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고 했습니다. 사실 여인은 무리들은 물론 예수님마저도 알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옷을 만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옷을 만진 것을 아시고 누가 만졌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수동적으로 안 것이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자기 옷을 만졌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지성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간절한 소망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여인이 옷을 만진 것도 알았을 것이고 그 여인이 낫게 된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내밀한 이적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자기를 계시할 목적도 있었을 것이나 여인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고통은 질병뿐 아니라 그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었고 종교적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앞 단원에서 언급했듯이 육체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여인의 치유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려 한 것입니다.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여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도 자유를 얻게 하려 한 것입니다 (15:19-27).

 

  예수님이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실 때 다 아니라고 했고 베드로는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고 했습니다 (45). 마가복음5:31에는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라고 했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면서도 '누가 손을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게 밀리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댔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급 상황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급하게 가는 마당에 누가 옷을 만졌는지 관심을 가질 시간이 있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에 손을 댄 여인을 보려고 둘러 보셨습니다. 마가복음5: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둘러보시니라'(περιεβλεπετο)'둘러보다'(περιβληπω)의 미완료 시제로서 여인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둘러 보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그 여인을 찾은 것은 더욱 온전한 구원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결국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 (47). 마가복음5:33에도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두려워 한 이유는 자신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고,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가 무리들의 틈에 끼어들어 무리들을 접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가 예수님까지 접촉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능력을 몰래 훔쳤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의 권위 앞에 자신에게 되어진 일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질병을 얻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은혜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48). 마가복음5:34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손만 대어도 나을 줄로 믿었고 난관이 있었으나 자기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여인이 옷을 만졌기 때문에 나았다고 하기 보다는 여인 믿음 때문에 나은 것이 강조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구원하였으니'는 기본적으로 육체의 질병이 나은 것을 말하고 그로 인하여 온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들에서 자유하게 된 것을 말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영적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인은 의원들에게도 고침받지 못했던 12년 된 혈루증을 고침받았습니다. 또한 공개적으로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님을 보여 주므로 당당하게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거듭나고 예수님에 대한 경험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전인적인 변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모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표현을 한 것은 여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경험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해결되었으니 두려워 하지 말고 평안히 가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υπαγε εις ειρηνην, και ισθι υγιης απο της μαστιγος)에서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는 표현은 병에 놓여 건강하라는 명령도 아니고 병에서 놓여 건강하라는 축복도 아니고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건강할지어다'(ισθι υγιης)에서 '...할지어다' 해당하는 '이스디'(ισθι)'에이미'(ειμι)의 현재 능동태이기 때문에 현재 건강하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질병에서 놓여 완전히 고침받았음을 시사하는 선언입니다. 또한 평안히 가라’(υπαγε εις ειρηνην)는 평안하게 가라는 말이 아니라 평안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전치사 에이스’(εις)‘...으로서 평안을 향해 가라는 뜻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하혈이 멈추는 것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완전히 나았다고 선언하는 것이고 질병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삶의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만 나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이미 건강해졌다는 선언을 했으니 이제 평안을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대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여인에 대해 얼마나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배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의 혈루병을 고쳐주신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기 위해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40-42(5:21-23)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북쪽 해변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자기 딸이 당장 죽게 생겼으니 자기 집으로 가서 딸을 고쳐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고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함께 갔습니다. 그 도중에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옷을 만져 낫게 된 것입니다. 당시 회당장(會堂長)은 회당의 대표자로서 회당의 예배와 사무와 관리를 책임진 지도자로서 사람들에 상당히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의 딸이 당장 죽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곧 죽을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이 자기 옷 술을 만져 혈루증이 나은 것을 알지라도 그냥 지나갔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인을 찾았습니다.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혈루증이 나았다는 사실을 선언하므로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가 아님을 무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그녀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병만 낫게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까지 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이미 건강해졌다는 선언을 했으니 이제 가서 평안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③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49-56)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12살 딸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기 위해 가는 동안에 12해를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직 말씀을 하고 있을 대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49). 예수님이 야이로와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이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께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집에까지 모시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50, 5:26). 야이로는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칠 때만 해도 자기 딸도 고침받을 수 있으라는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서 온 사람들이 딸이 이미 죽었다고 하자 절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야이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찾아왔을 때의 믿음을 계속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딸이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딸이 살 수 있는 조건으로서 믿음을 가지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딸을 살리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느니 걱정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22:4, 26:3-4, 43:2, 42:3).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51). 당사자인 딸의 아버지 회당장 야이로 외엔 3제자만 데리고 들어간 것입니다. 3제자만 데리고 간 이유는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무리들이 사역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사역에 진지함을 더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3제자는 앞으로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므로 목격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9;28, 14:33). 하지만 그들 외에 따라온 무리들이 함께 하면 사역에 집중하는 데 방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56(5:43)에 보면 예수님이 아이를 살린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점을 감안하면 그 소문이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문이 퍼지기를 원치 않는 것은 그 지역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붙잡을 근거를 살피려 했기에 그렇게 되면 아직 때가 되기 전에 고난이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집으로 들어가자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었습니다 (52-53). 현장에는 가족들이 슬퍼 울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신분이 회당장으로서 유력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고용한 통곡꾼들도 있었을 것이고 조문객도 많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활규범서인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9:17, 9:23). 예수님은 그들의 통곡을 그치게 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다시 살릴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잠을 자는 자는 다시 일어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11:11, 고전15:51, 살전5:10). 호곡꾼들을 비웃었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 내보낸 후 아이의 부모와 3제자를 데리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5:40). 사역에 진지함을 위해 방해되는 사람들을 내 보낸 후에 들어간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54). 율법에서는 시체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해지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나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하여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마가복음5:41에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달리다굼'(ταλιθα κουμ)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는 아람어로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살아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고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55). (πνευμα)이 돌아왔다는 것은 생명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은 아이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완전히 회생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행위였습니다. 마가복음5: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라고 했습니다. '일어나서'(ανεστη)를 단순히 과거로 처리하고 '걸으니'(περιεπατει)를 미완료로 사용한 것을 보면 즉시 살아나 계속해서 방 안을 걸어 다닌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계속 방 안을 걸어 다닌 것은 완전한 회복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 상황을 목도한 부모들은 놀랐습니다 (56). 마가복음5:42에는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죽은 아이가 살아난 사실에 놀랐을 것이고 예수님이 메시야적 행위를 하신 것에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린 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56).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린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첫째는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몰려들어 사역에 방해를 가져 올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고 (1:43-45), 둘째는 잡아 죽이려는 기회를 엿보는 대적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아직 십자가 고난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41).

 

  우리의 육체가 죽어 생명이 없어질지라도 믿는 자는 마지막 때에 주께서 다시 살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고전6:14). 상징적으로 볼 때 전혀 소생 불가능한 상황도 주께서 원하시면 소생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주께 의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에베소서5: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본 장에는 예수님이 호수의 폭풍과 물결을 잔잔하게 한 사건과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들 쫓아낸 사건과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친 사건과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을 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이 증명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모든 고통에서 구원하시며 참 생명과 평안과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들입니다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