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9:1-62

<題目> 인자의 사역과 자기 계시

 

<序言>

  본 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마지막 시기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의 시작 시기를 기록한 장입니다. 이시기는 사역지의 전환이기도 하지만 사역 대상의 전환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는 대중을 중심으로 했지만 이제부터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내용구조는 열두 제자 파송(1-6), 헤롯의 반응(7-9), 오병이어의 기적(10-17), 베드로의 신앙고백(18-21), 첫 번째 수난 예고(21-27), 예수님의 변모(28-36), 귀신들린 아이 치유(37-45), 두 번째 수난 예고(44-45), 제자들 간의 서열 논쟁(46-48), 제자들의 경쟁자에 대한 태도(49-50), 제자들의 배척자들에 대한 태도(51-56),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57-62)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열두 제자 파송 (1-6)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셨다고 했습니다 (1-2). 12제자는 예수님이 5:3-11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요한을 처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기 위해 내어 보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의 수단으로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어 내보냈습니다. ‘능력’(δυναμις)은 힘이나 재능이라 권능 자체를 의미하고, ‘권위’(εξουσια)는 예수님이 가진 능력을 사용할 권세나 특권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10:1에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εξουσια)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권능(εξουσια)에 관해서는 마태복음16:19에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한 말씀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3). 마태복음10:10에도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8-9에는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으나, 마가는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으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기본적으로 이미 신고 있는 신발이나 입고 있는 옷이나 가지고 있는 지팡이 외에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여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생략한 채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여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말만 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전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파송받은 목적인 복음 전파 사역에만 전력을 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복음 전도 사역에 전무하지 않고 마음을 자기 신변과 생활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도 사역에 충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이 되어지도록 그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습니다 (10:10).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실 것이니 하나님만 의지하고 복음전도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을 생활에 빼앗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역에 전무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지침은 기본적으로 복음 전도자에게 주신 지침이지만 복음을 받은 자에 대한 의무도 생각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는 방법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통해 공급해 주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 10:11). 그런 점은 복음을 받은 피전도자에 대한 의무도 생각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고전9:14, 6:6, 딤전5:18). 바울은 복음전도자가 복음을 받은 자들로부터 필요를 채워야 하는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모세의 율법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전제도에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헌물들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주님이 복음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9:7-14).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떠나라고 했습니다 (4).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머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복음전도자가 복음전도를 빌미로 아무 집에나 들어가 폐를 끼쳐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10:11-12에는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사역자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집에서 유숙하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 집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쉽게 그 집을 떠나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사역을 위해 그 집을 떠나야 할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한 것은 그 집이 평안해야 전도사역에 어려움을 겪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그 집에 평안을 주기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복음전도자를 영접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복음전도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10:40-42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영접하지 않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5).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는 것은 그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심판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10: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전도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죄악이 관영한 도시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가 받은 심판은 그들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복음 사역을 하는 중에 유대인들이 쫓아내자 그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13:50-51). 복음전도자는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배척을 받을 때에 그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모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전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배척하는 자들을 과감하게 떠나 복음전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6).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각 마을로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그 방편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헤롯의 반응 (7-9)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헤롯왕의 반응에 대해서는 마태복음14:1-2, 마가복음6:14-29, 누가복음9:7-9에 나옵니다.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예수님이 12제자를 갈릴리 전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보내므로 12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표적들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일들은 갈릴리 지방 전역에 전해졌고 그 소문은 분봉 왕 헤롯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7). 헤롯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를 말합니다. 헤롯 안디바스는 B.C.4~A.D.39년경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유대 지방을 통치하던 왕은 헤롯 대왕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이 애굽에 피신해 있는 동안 죽었습니다. 그런 후 그의 아들들이 유대 지방을 분할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중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은 헤롯 안디바스가 통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교활하여 여우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일들을 듣고 심히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7-8).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 헤롯이 죽였는데 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도 있었고,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엘리야를 보내주시겠다고 한 그 엘리야라는 사람도 있었고 (4:5), 그 외에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훌륭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선지자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그런 소문 중에서도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라 단정했습니다. 9절에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4:2에는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고 했고, 마가복음6:16에도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사상의 배경에 자기 야심의 가책이 더해져 나타난 확신입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에게 죄가 없지만 죽인 것에 대한 가책이 있던 차에 설교와 표적의 능력을 행하는 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당연히 세례 요한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28:1).

 

  헤롯이 세례 요한은 죽인 내용은 마태복음14:3-12과 마가복음6:17-29에 나옵니다. 전에 헤롯은 베레아 동쪽에 인접한 왕국 사바티안(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결혼했었는데, 그 아내를 버리고 이복 동생 빌립(Herod Philp)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에 대해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잘못을 계속 직언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습니다. 헤롯은 헤로디아를 위해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귀인들을 청해 잔치를 했습니다. 그 잔치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헤로디아가 전 남편에게서 낳은 '살로메'라는 딸입니다 (Josephus). 헤롯은 기뻐서 딸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줄 것이고 심지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의 딸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가서 무엇을 구해야 하겠는지 물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가져다주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딸은 헤로디아의 지시를 따라 요한을 죽여 그의 머리를 쟁반에 올려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심히 근심했으나 자기가 맹세한 것도 있고 그 앉은 자들에게 자기 위신도 있고 해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헤롯이 시위병 한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가 감옥에서 요한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헤로디아의 딸에게 주었고 그 딸은 그것을 헤로디아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헤로디아가 뾰쪽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했습니다. 헤롯은 그 사건으로 인해 전처의 본국 아레타스 왕과 전투를 하게 되고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게 됩니다.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되어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또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찔려 죽게 됩니다 (Josephus).

 

  헤롯은 세례 요한을 자신이 목을 베었는데 그런 일이 들리니 그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했습니다 (9).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옛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라 확신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헤롯은 의로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가책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14:3-11, 16:17-28), 뒤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13:31). 예수님은 헤롯에 대해 비판하거나 대적하는 행위를 보이지 않았지만 헤롯은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사역을 정치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서도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꾀하는 무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죽였던 것처럼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사람마다 관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바른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3. 오병이어의 기적 (10-17)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은 사복음서 모두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4:13-21, 마가복음6:30-44, 누가복음9:10-17, 요한복음6:5-13에 나옵니다.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예수님이 12제자를 사도로 세워 전도를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보고했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다고 했습니다 (10).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마을로서 베드로와 빌립과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1:44). 마가복음6:30-32에는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먼 전도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들이 익숙해 하는 조용한 마을 벳새다로 데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서 너무 분주하여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휴식을 하게 한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가진 애틋함이기도 하지만 사역상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에도 쉼이 필요하고 인간에도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을 할 때 몸도 회복이 되고 정신도 재충전이 됩니다. 사역자들도 휴식을 해야 영적인 재충전을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휴식이 필요했고 요나에게 휴식이 필요했던 것과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287212)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세서 유학을 한 후 고향 시타쿠스로 돌아온 후 당시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에게 인정을 받았고 그 곳에서 연구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어느 날 히에론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 문제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금 세공업자에게 금을 주어 왕관을 만들어 오게 했는데 왕관에 손을 대지 않고 금을 온전히 사용했는지를 알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목욕탕 물속에 들어가 있다가 갑자기 문제의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레카'를 외치며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과학시간에 배우는 부력의 법칙입니다. 부력의 법칙은 물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데에 유용한 방법입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아르키메데스 원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안식을 취할 때 아이디어를 얻게 되고 현재의 문제의 답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로 갔을 때 무리가 알고 따라와서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 일을 이야기하며 병 고칠 자들을 고쳐 주었다고 했습니다 (11). 마가복음6:32-33에는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라고 했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지역에서 호수 북동쪽 벳새다 지역으로 이동을 한 것입니다. 그 거리는 약 30km정도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거리를 해안으로 배를 타고 이동했는데 호수 주변 마을 사람들이 배에 탄 예수님의 일행을 알아보고 자기 마을들에서 도보로 달려 뱃새다까지 먼저 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 지역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니 많은 무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고조에 달했는지 알 수 있는 행동입니다. 마가복음6:34에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리고 있던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해 불쌍히 여겨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마태와 누가의 표현대로 병을 고쳐주시기도 했습니다 (14:14, 9:11). 예수님은 휴식의 장을 빼앗겼으나 감동과 연민을 느끼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진리를 가르치면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므로 당시 사람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굶주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휴식처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보자 거부하지 못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참 목자의 모습을 지닌 분입니다 (10:14). 신앙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정신입니다.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날이 저물어 가매 12사도가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라고 여쭈었습니다 (12). 마가복음6:35에는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사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가 저문 시간까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에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역적 관점에서인지 무리의 배고픔을 해아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께 날이 저물어가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촌과 마을도 들어가 무엇을 사먹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αγρουs)은 들판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촌락을 말하고, '마을'(κωμαs)은 촌락보다 조금 발달한 소읍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현장이 마을에서 떨어진 들이었기 때문에 무리로 하여금 가까운 마을들로 내려가 식사를 해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13). 마태복음14:16-17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37-38에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4-9에는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를 마을로 내려가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때가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기 때문에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서 유월절 어린 양처럼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과 영생을 제공해줄 자임을 표적하기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 행함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전도여행에서 능력 나타냄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의탁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첫째, 가진 것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뿐이라는 것입니다 (五餠二魚). 모인 무리는 5,000명 이상입니다 (14:21, 6:44, 9:14, 6:10). 마태는 여자와 어린 아이 외에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마태가 그처럼 표현한 것은 수신자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의 표현대로 하면 그 수가 5,000명의 두 세배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수를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한 아이가 가져온 음식으로서 장정 1사람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양입니다. ‘’(αρτος)물고기’(ιχθυς)를 요한복음6:9에는 보리 떡’(αρτος κριθινος)물고기’(οψαρια)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밀보다 못한 보리로 만든 작은 떡과 조미료를 넣어 말린 작은 물고기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 설령 자기들이 마을들로 다니면서 먹을 것을 사오려 한다 해도 200데나리온 이상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200데나리온은 장정이 200일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품삯입니다 (20:1-2). 식사 비용으로는 굉장히 큰 금액인데 그것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에게 그 많은 돈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자기들 보고 주라고 했지만 예수님이 전혀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떼를 지어 한 50명씩 앉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하자 예수님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했습니다 (14-16).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잔디 위에 앉았다는 것을 언급했고 (14:19, 6:39, 6:10), 마가는 떼로 100명씩 또는 50명씩 앉았다고 했습니다 (6:40). 무리를 잔디 위에 50~100 정도의 떼로 앉힌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는 주빈이 기도하고 식탁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떼어(조각 조각 찢어)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오병이어를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그것들을 무리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무리가 먹고 다 배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17). 마태복음14:20-21에는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43-44에는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12-13에는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5,000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12바구니나 거둘 정도로 충분히 먹인 것입니다. 오병이어가 언제 어떻게 5,0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실 때인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줄 때인지,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때인지, 그리고 한꺼번에 많아졌는지, 나누어 줌에 따라 계속적으로 많아졌는지...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000명 이상 되는 무리들을 원하는 대로 충분히 만족스럽게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보고대로 예수님이 무리를 먹이신 후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6:12).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음식봉사자들을 위해 남겨두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해서일 수도 있고, 음식은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일 수도 있고, 예수님만 기대하여 항상 먹을 것을 주는 기적을 베풀어줄 줄로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기적의 역사를 다른 사람들도 목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성찬의 의미를 두어 성찬을 거룩하게 다루어야 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이적을 일으켰을까요? 예수님은 이 이적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까요? 이 이적은 정확히 말하면 표적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적'은 자연원리와 일반상식을 초월한 어떤 현상을 말하지만 '표적'은 그 이적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이적은 일차적으로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계속 말씀을 듣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사건은 본질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자기계시와 자기증거를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6:4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한 것은 유월절과 관련하여 자신을 계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양을 잡아 고기를 구워먹고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양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므로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사건은 유월절 어린 양이 드려지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을 이루시므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을 제공해 주실 자라는 것을 선언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6:32-3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직후에 제자들과 오병이어의 의미에 대해 대화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광야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하여 살게 했는데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가 예표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6:48-51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자기 몸을 내어 주심으로 구원과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벧전2:24).

 

  그런 점이 있는 가운데 마가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분으로 드러내려는 의도를 엿보입니다. 마가복음6:34에 보면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39에 보면 사람들이 '푸른 잔디 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목자와 양의 그림으로서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푸른 초장 가운데로 인도하여 흡족하게 먹게 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의 목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목자가 없다는 것에 연민을 가지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르치고 질병을 치유해 주고 먹을 것을 풍성하게 먹게 해 주었습니다. 마가는 수신자들인 로마에서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러한 주님이심을 암시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 목자가 되어 우리로 하나님 나라 안에서 평안과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3).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기적을 일으킬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가 날이 저물어 배고픔을 당하자 제자들은 무리를 마을로 내려가게 하여 음식을 사 먹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된다고 했고 안드레는 오병이어로 다 먹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책임과 사명을 일깨우는 동시에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4:15-17, 6:35-36, 9:12-17). 주님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께 병 고침 받은 사람들처럼 주님께서 영육간에 모든 고난과 결핍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4: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둘째,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드려야 합니다. 한 아이가 자기 혼자 먹을 오병이어를 드릴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4:17-18). 어린이는 자기가 먹으려 싸온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갖다 드리므로 예수님은 그것으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보리 떡(αρτοs)과 물고기(ιχθυs)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거리입니다 (6:9). 그것은 사렙다 과부의 빵 한 조각 과부가 드린 엽전 두 푼과 같은 것입니다 (왕상17:13-15, 21:1-4). 비록 작은 것이지만 전체를 드릴 때 이적이 일어납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영혼과 마음과 몸과 은사와 재능과 물질 등 모든 환경을 하나님의 권 역사에 이용할 때 만족과 풍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보리 떡 같은 자였으나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7:13).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도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으나 자신들의 생애를 드려 구원 사역에 헌신할 때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1-6). 제자들도 어부들이었으나 사도가 되어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4:18-22). 조건이 좋다고 해서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9:11). 하나님의 방법은 약한 자들을 사용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고전1:27-28). 자기에게 있는 적은 능력이라도 다 사용하는 자가 은혜를 입게 됩니다 (3:8). 우리의 가진 것이 적어도 전부를 드릴 때, 영혼과 마음과 몸과 은사와 재능과 물질과 모든 환경을 주를 위해 드릴 때 풍요와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가져오게 했고 다른 사람들을 50명씩 잔디에 앉게 했고 축사한 다음에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명령했습니다 (14:18-19). 신령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언제나 순종을 요구합니다 (왕하5:5-14, 2:7-8, 9:1-7).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일으킬 때도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했고 그것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라고 했습니다 (2:7-8). 그대로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10-14, 19:16-22). 예수님은 무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을 때 옷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입을 것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고 군병들에게는 강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10-14).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물을 때에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19:16-22). 그리고 자기에게 감동시키는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1:29에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모든 신앙의 선진들이 순종함으로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질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되고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나 남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넉넉하고 모자람이 없이 잔이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16:1-12, 6:38, 15:17, 6:30-33). 그러므로 기적을 경험할만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도 그런 풍족함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54:2). 우리는 영육간에 진정한 풍요를 원한다면 오병이어로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5,000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나 남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그 이적이 우리에게도 임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사야54:2"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기적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 귀한 표적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작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병이어를 내놓은 어린이었습니다. 이 어린이가 자기 도시락을 내어 놓은 것은 희생과 헌신의 행동이었습니다. 이 어린이의 희생과 헌신으로 시작하여 5,000명 이상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이적이 일어났고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계시하는 표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갑자기 뒤집히는 점' '갑자기 균형이 깨지는 지점'으로서 어떤 작은 현상에서 시작된 진행이 어느 순간 폭발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이 섭씨 에서 시작하여 100°가 되면 물이 끓어 기체가 되는데 임계점인 100°가 티핑 포인트인 것입니다. 또한 어떤 전염병이 특정 지역에서의 통제 범위를 넘어 퍼지게 될 수 있는데 그 통제 범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에 들어가는 지점도 티핑 포인트입니다. 또한 어떤 물건이 놀라운 판매량을 가져올 때가 있는데 그 판매량이 극적으로 올라가는 지점도 티핑 포인트입니다. 또한 어떤 이슈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때가 있는데 그 이수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는 지점을 티핑 포인트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 이적에서 오병이어를 드린 한 아이의 행동으로 시작하여 남자 장정 5,000명 되는 많은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은 일이 있었는데 오병이어가 5,000 이상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갑자가 많아진 상황이 티핑 포인트인 것입니다. '티핑 포인트'라는 책을 낸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그의 책에서 티핑 포인트의 3가지 특징에 대해 말했는데 첫째는 전염성이 있고, 둘째는 작은 것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셋째는 극적인 순간에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세 번째를 보면 극적인 순간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티핑 포인트가 일어나기 좋은 배경은 극한 상황입니다. 마태복음14:13에 보면 배경이 '빈 들'이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에레몬 토폰'(ερημον τοπον)'광야'(a desert place)를 말합니다. 광야에는 집도 먹을 것도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저녁 때가 된 것입니다. 혹 마을에 내려가서 떡을 사 먹는다 하더라도 200데나리온(20,000,000)의 돈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뿐이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만난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예수님이 표적을 나타내기 가장 좋은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두 번째는 작은 것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5,000명 이상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많은 양이 되고 5,000명 이상이 굶주림에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 기적의 시작점은 어린아이이며 어린아이가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놓은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 동부 펜실베니아주 필라델비아에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라고 하는 공립종합대학교가 있습니다. 17개의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5개의 전문대학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300개 분야에서 학위가 수여되고 있고, 재학생 수만 해도 35,000명이 넘는 어마 어마하게 큰 학교입니다. 그 대학교는 러셀 콘웰(Russell H. Conwell) 목사가 1,884년에 세운 템플대학(Temple College)에서 출발한 학교입니다. 한 소녀가 목사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2년 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더 큰 교회를 지으라고 57센트(Cent)를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러셀 콘웰 목사는 그 소녀의 유서를 읽어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아 모금운동에 참여하여 25만 달러(Dollar)가 모금되었습니다 (25천만 원). 그래서 교회와 병원과 템플대학이 세워졌습니다. 1달러도 안 되는 57센트가 큰 교회와 템플 대학을 짓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에 티핑 포인트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부흥, 우리 가정의 행복, 우리 개인의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받으실 만한 표적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티핑 포인트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적을 나타낼 만한 시작점이 있는데 그 시작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티핑 포인트는 나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수()에도 치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나의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티핑 포인트는 변화를 위한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나쁜 습관 하나를 끊는 데서, 불평하는 것을 버리는 데서, 화내는 것을 참는 데서, 다른 사람 입장을 배려하기 시작하는 데서,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 시작하는 데서, 긍정과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말을 시작하는 데서, 양심에 가책되는 죄를 떠나기 시작하는 데서, 한 계명인 주일을 지키는 데서, 어느 예배를 참여하기 시작하는 데서,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 가장 열악하고 자신의 능력과 신앙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조건이 주님이 일하실 가장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지금 실행해야겠다고 감동되는 것을 실행에 옮기기 바랍니다. 나의 작은 생각, 작은 행동이 언젠가 크고 놀랍고 가치 있는 변화와 반전과 성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베드로의 신앙고백 (18-21)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했습니다 (18).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로 사역을 하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기도를 하러 가시고 그 후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서 여러 지방으로 다니셨습니다 (16:13, 8:27). 아마도 벳새다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의 마을들로 다니는 기간 중 어느 때에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마태복음16:13에는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라고 한 것입니다.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신분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인자'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ου; the Son of man)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은 구약성경에 오시리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28:10-14, 삼하7:12-14, 1:26-28, 7:13-14). 구원자가 창세기28:10-14의 야곱의 사닥다리 꿈에서는 '사람의 형상을 가진 이'로 나타나고, 사무엘하7:12-14의 나단 선지자의 다윗에 관한 신탁에서는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고, 에스겔1:26-28의 에스겔이 본 전차(메르카바) 환상에서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으로 나타나고, 다니엘7:13-14의 다니엘이 본 네 짐승 환상에서 '인자 같은 이'로 나타납니다. '인자 같은 이'에 해당하는 '케바르 에나쉬'(אנש כבר)'사람의 아들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아들'을 오실 구원자에 대한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로 요한복음9:35의 경우,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에서 '인자'가 헬라어 성경 스테판본(GTS)에는 'τον υιον του θεου'로 되어 있고 스테판본을 번역한 영어성경 KJV에서도 'the Son of God'으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나타냈습니다. 뒤에 베드로의 대답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물으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누구라 생각하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을 묻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라 하기도 하고 엘리야라 하기도 하고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19). 제자들의 대답은 7-8절에서 헤롯이 들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6:14-16). 마태복음16:14에서는 예레미야를 추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으나 특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호수를 잔잔하게 하고 오병이어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신 기적을 행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을 보고 들으면서도 그 기적들을 통해 나타낸 표적성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20).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의 인식보다 제자들의 인식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20).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마태복음16:16에서는 "(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한 표식으로 사용하는 물고기 모양 안에 씌여진 'Ÿ楊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