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10:1-42
<題目> 인자의 사역과 교훈
<序言>
10-19장은 예수님의 예수살렘 여행기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입성하기 전까지의 행적과 교훈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본 장은 그 중의 일부분으로서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한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내용구조는 70인의 제자 파송(1-16절)과 70인 제자의 보고(17-24절)와 율법교사의 질문(25-29절)과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30-37절)와 마르다와 마리아 집 방문(38-42절)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70인의 제자 파송 (1-16절)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중에 70인을 따로 세워 가고자 하는 각 마을로 둘씩 앞서 보냈습니다 (1절). 예수님이 세운 12제자가 있었지만 70인을 더 세워 전도를 보낸 것입니다. 70인의 제자를 파송한 내용은 누가만 보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70인을 제자로 임명하여 전도를 보낸 것은 세계에는 70개의 민족과 70개의 언어가 있다는 점을 착안한 것 같습니다 (창10장).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70인으로 나오고 어떤 사본에는 72인으로 나옵니다. 창세기 10장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70민족으로 되어 있고 히브리어를 헬라어도 번역한 70인역(LXX)에는 72민족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본마다 다르게 나와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을 택하느냐 70인역(LXX)을 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파송할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냈는데 (막6:7), 70제자를 파송할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냈습니다. 유대인들의 습관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17:6, 막11:1, 14:13, 행13:2,4, 16:40). 아마 예수님께서 1명씩 보내면 낙심하기 쉽고 3명씩 보내면 진중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일 것입니다. 2명씩 전도를 하면 서로 도우며 격려하므로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민35:30, 신19:15, 전4:9, 마18:16, 딤전5:19).
①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했습니다 (2절).
예수님은 70인을 보내면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낼 때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9:37-38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전도사역을 위해 보내면서 복음전도사역과 관련한 교훈을 한 것입니다. ‘추수’는 복음전도를 사역을 비유한 말이고,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한 말이고, ‘일꾼’은 복음전도자(제자)를 비유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복음전도사역의 필요성과 복음전도자의 부족을 절감하는 데서 하신 말씀인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주지시켜 주기 위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교훈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추구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6:8에 하나님께서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3:9-10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②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했습니다 (3절).
예수님은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3절). ‘어린 양’은 약하고 선한 대상에 대한 비유이고 ‘이리’는 강하고 악한 대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 보내지면 어린 양은 잡혀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제자들이 스스로 상황 대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며 사역을 할 때 많은 거절과 대적과 핍박과 고난을 당할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일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온순한 성품을 가진 제자들이 복음사역을 대항하여 잔인하게 핍박할 대적자들이 있는 곳으로 보낸 것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을 염려하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결연한 각오를 해야 할 것을 주지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10:16에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사역을 하는 현장은 양이 이리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데 그 때 양 같은 제자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알게 해 주는 교훈입니다.
복음전도자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뱀'은 간교한 동물입니다 (창3:1). '간교'를 긍정적인 단어로 바꾼다면'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있어서 신중하고 방법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을 선택하고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예리한 면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한마디로 분별력입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한 말들을 보면 그 지혜에 놀랄만합니다. 아담에게 가지 않고 하와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나 하와에게 묻는 첫마디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하시더냐"인 것과 두 번째 마디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인 것과 세 번째 마디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3:1-5). 더욱이 뱀은 원래 자기가 가진 지혜로는 인간을 당할 수 없으나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사탄의 지혜를 이용하여 인간을 넘어뜨렸습니다. 복음전도자는 신중함과 분별력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불신자들은 세상에 관한한 신자들보다 지혜롭습니다. 누가복음16:8에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대적자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면 우리의 지혜로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순결하고 순전하고 순수한 동물의 상징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대적자들의 간교함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순결함도 겸해야 합니다. 항상 솔직하고 진실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일관해야 대적자들에게 속지 않게 되고 핍박에 굴하지 않게 됩니다. 에베소서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전도자가 사역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많은 대적과 핍박을 당하겠지만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10:17-20에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대적자들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도록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 그 심문을 통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이 증거되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성령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③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4절上).
예수님은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대’는 금이나 은이나 돈을 넣어 다니는 도구이고, ‘배낭’은 식량 등의 일용품이나 여유분을 넣어 다니는 도구이고, ‘신발’은 발에 신는 도구입니다. 9:3에서도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10에도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8-9에는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으나, 마가는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으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기본적으로 이미 신고 있는 신발이나 입고 있는 옷이나 가지고 있는 지팡이 외에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여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생략한 채 앞으로의 일을 염려하여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말만 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전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파송받은 목적인 복음 전파 사역에만 전력을 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복음 전도 사역에 전무하지 않고 마음을 자기 신변과 생활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도 사역에 충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이 되어지도록 그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7절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마10:10).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실 것이니 하나님만 의지하고 복음전도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을 생활에 빼앗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역에 전무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지침은 기본적으로 복음 전도자에게 주신 지침이지만 복음을 받은 자에 대한 의무도 생각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는 방법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통해 공급해 주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절, 마10:11). 그런 점은 복음을 받은 피전도자에 대한 의무도 생각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고전9:14, 갈6:6, 딤전5:18). 바울은 복음전도자가 복음을 받은 자들로부터 필요를 채워야 하는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모세의 율법에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전제도에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헌물들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주님이 복음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전9:7-14).
④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4절下).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는 그렇다 해도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문안하지 말라는 말은 다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는 친절하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대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장황한 인사와 잡다한 주재로 꽤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에게 전도를 보내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들의 복음전도 사명의 중대성과 긴박성을 알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왕정시대에 북이스라엘 갈멜산에 있으면서 수넴이라는 곳에 갔을 때는 수넴여인이 숙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에게 말하여 담 위에 방을 만들어 숙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수넴 여인의 아들이 아버지와 사환들과 함께 밭에 나갔다가 머리가 아프다며 사환과 함께 집으로 왔습니다. 아들이 수넴 여인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 침상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수넴 여인은 남편을 불러 나귀 한 마리와 사환 한 명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수넴 여인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사환에게 일렀습니다.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고 하고는 엘리사가 있는 갈멜산으로 갔습니다 (왕하4:24). 갈멜산에서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말을 듣고 자신이 가기 전에 미리 사환 게하시를 앞서 보내면서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고 했습니다 (왕하4:29). 수넴 여인이 사환에게 한 말이나 엘리사가 사환에게 한 말의 표현은 상황의 급박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에게 한 말은 사환이 수넴 여인의 아들에게 가서 엘리사의 지팡이를 얼굴에 놓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긴급한 일인지 알게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보내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길에서 아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마음에 복음전도에 대한 결의가 해이해질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전도를 하는 일이 늦어지거나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도를 보내면서 복음전도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복음전도를 지체 없이 할 것을 주지시켜 준 것입니다.
⑤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5-9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고 했습니다 (5절). ‘평안’에 해당하는 ‘에이레네’(ειρηνη)는 구약의 ‘샬롬’(שלום)에 해당하는 말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말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이 있기를 빌라는 것입니다. 그 집이 평안해야 전도사역에 어려움을 겪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복음전도자를 영접하는 자의 집에는 평안을 주기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복음전도자를 영접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복음전도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마10:40-42).
만일 그 집에 평안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빈 자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6절). ‘평안을 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막5:9).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어주면 하나님이 평안의 복을 주기를 원하는 사람 곧 하나님으로부터 평안의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 빈 평안의 복이 빈 사람에게도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했습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7절).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고 했는데 그 축복을 받아들이며 영접하는 집이 생기면 그 집에서 유숙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 그 집에 유숙하면서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갈6:6, 고전9:3-18, 딤전5:18). 평안을 빌어서 받아들이는 집이 있으면 그 집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쉽게 그 집을 떠나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사역을 위해 그 집을 떠나야 할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말고 그 집의 도움을 받아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영접하거든 앞에 차려놓은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했습니다 (8-9절). 앞에서 영접하는 집에서 유숙하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본문은 그에 대한 반복이라 하기 보다는 차린 음식을 종교적 습관 때문에 거절하지 말라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종교적 습관에 젖어 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유숙하는 집이 유대인 집이라면 갈등할 필요가 없겠지만 만일 이방인의 집이라면 그들이 내놓는 음식을 먹을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음식을 거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 집에서 내놓은 음식이 유대인의 종교적 음식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막7:15-16, 행10:9-16). 고린도전서10:27에도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곧 전통적 습관에 얽매여 복음전도 사역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니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치유사역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⑥영접하지 않으면 거리로 나와서 발에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10-16절).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영접하지 않거든 거리로 나와서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 하라 했습니다 (10-11절). 복음 전도를 위해 어떤 동네에 들어갔을 때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동네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인 행동으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린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며 그 심판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선언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 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징조들을 볼 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이 심판받을 때에 핑계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중에 유대인들이 쫓아내자 그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떨쳐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행13:50-51). 복음전도자는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배척을 받을 때에 그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모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전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배척하는 자들을 과감하게 떠나 복음전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12절). ‘그 날’은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21:34, 마7:22, 살후1:10, 딤후1:12,18). 마태복음10:15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ha)는 아브라함 시대에 염해 동편에 있던 죄악이 관영한 도시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창19:1-28).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의 강약을 말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심판의 확실성과 준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13-14절). ‘고라신’(Chorazin)과 ‘벳새다’(Bethsaida)는 갈릴리 지방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근처에 위치한 성읍들입니다. 그곳들은 예수님이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곳으로서 (마11:20), 특히 벳새다는 오병이어를 기적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 (9:10-17). ‘두로’(Tyre)와 ‘시돈’(Sidon)은 갈릴리 지방 북방 지중해변의 오래된 베니게(페니키아) 항구도시입니다. 이교도의 번영과 향락과 우상숭배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사23장, 겔26-28장). 베옷을 입고 재에 않는 행동은 극한 슬픔이나 애도의 행동으로서 여기에서는 절실한 회개의 행동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것은 고라신과 벳새다가 당할 심판의 중함을 경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했습니다 (15절). ‘가버나움’(Capernaum)은 갈릴리 지방 갈릴리 호수 바로 위에 있는 성읍입니다. 그 곳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이 선택된 곳입니다 (5:10). 예수님의 ‘본 동네’라 불려질 정도로 (마9:1)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고 교훈을 베푼 곳입니다 (4:23, 31-37, 7:1-10). ‘음부’(αδης)는 무덤, 지하,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가버나움은 어떤 도시들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목격하고 영예를 누린 도시였습니다. 그로인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적 조건들 때문에 하늘(천국)까지 높아지려 하지만 실상은 지하(지옥)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1:23-24에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소돔’(Sodom)은 고모라(Gomorrha)와 함께 아브라함 시대에 염해 동편에 있던 죄악이 관영한 도시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입니다 (창19:1-28). 가버나움은 어떤 도시보다도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보고 교훈을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받을 심판이 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도 사역을 대부분 갈릴리 지방에서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부터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방인의 도시에서부터 사역을 하지 않고 유대인의 도시들에서부터 사역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서도 유대인에게서부터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마10:6).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거역하므로 심판 받아 멸망한 이방도시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서 그런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 곳 사람들은 벌써 회개했으리라는 안타까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도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받은 심판이 그들보다 중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로서 예수님이 친히 권능과 교훈을 보이신 대상들이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이방인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이 더욱 클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실제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후에 로마와 유대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되고 맙니다.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많은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원하십니다 (12:47-48).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하고 행하지 않은 자보다 책망을 많이 받습니다. 12:47에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라고 했고, 야고보서4:17에는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실 때는 그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은 특별한 은혜를 받고도 그 받은 대로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긴 자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실 일까지 막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⑦제자들을 저버리는 자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예수님은 또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6절). 제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그들을 보낸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은 그를 보낸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저버리는 자는 그들을 보낸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고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는 그를 보낸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 것은 제자들을 보낸 이가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보낸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곧 제자들의 신분과 사역의 권위는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담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권위가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담대해야 합니다. 성도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성도를 대적하는 자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와 영광을 위해 성도의 복음전도 사역에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끄럼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사역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28:18-20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8: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2. 70인 제자의 보고 (17-24절)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70인의 제자들이 전도 사역을 마치고 기뻐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17절). 제자들이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자기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심히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18절).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므로 하나님의 권세가 세력을 얻게 되고 사탄의 권세가 추락하게 된 것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악령(惡靈)은 사탄(σατανας)과 마귀(διαβολος)와 귀신(δαιμονιον)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두머리이고 마귀는 중간계급이고 귀신은 부하입니다. 사탄은 본래 선한 천사로 창조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맡은 천사장이었습니다 (겔28:17-18). 그런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과 동등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르는 수하의 천사들 곧 마귀와 귀신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사14:12-15, 겔28:17-18, 벧후2:4, 유1:6). 그러다 결국 하나님이 보낸 미가엘 천사장과 그의 군대에 의해 제압을 당하여 패배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내어쫓김을 당했습니다 (계12:8-9). 사탄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마귀와 귀신들과 함께 이 세상으로 내려와 세상 공중의 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계12:12, 엡2:2). 그런데 예수님이 보낸 제자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 예수님은 사탄이 번개같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진 것을 본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 전도 사역을 할 때 예수님의 이름 앞에 귀신들이 쫓겨 갔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권세와 통치는 세력을 얻고 사탄의 권세는 세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보았노라’는 θεωρεω(데오레오)의 미완료형으로서 예수님이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복음전도 효과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세가 세력을 얻고 사탄의 권세가 세력을 잃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점에 대해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19절). 뱀과 전갈은 사탄이나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창3:1-15, 고후11:3, 계9:3,5,10). 시편91:13에도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 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탄의 세력의 모든 능력을 물리칠 권능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자들을 해치지 못할 것을 말씀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수의 모든 능력’에서 ‘능력’은 ‘뒤나미스’(δυναμις)로서 그들이 가진 능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으니‘에서 ‘권능’은 ‘엑수시아’(εξουσια)로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었다는 것보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할 권세와 특권을 주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행사하면 예수님이 능력을 행사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이는 장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능력을 깨뜨릴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의 능력을 깨뜨릴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사탄의 세력의 능력을 깨뜨리는 사역에 제자들을 동참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20절). 제자들이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귀신들이 쫓겨 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하는 것은 귀신들이 쫓겨 가는 현상을 기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더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할 자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했습니다 (출32:32, 시69:28, 단12:1, 빌4:3, 계13:8, 20:12, 21:27). 사역을 할 때 능력이 나타나 효과를 거두는 일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원한 일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닙니다. 사역을 할 때 예수님이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을 기뻐할만한 일이지만 그보다 기뻐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처럼 큰일은 없습니다. 사역자들이 능력이 나타나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 자기가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나타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 사역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이 복음전도 사역에서 복음전도의 방편으로 행사해 주신 것으로 알고 복음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역의 성공을 치하하실 때에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21절). ‘이것’은 예수님이 계시하시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인 구원자(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이 복음전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의도를 깨닫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복음전도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전도 사역을 하면서 귀신이 쫓겨 가는 것을 경험했고 사역이 성공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들에게 그 진리를 나타낸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권력과 부와 지식이 있는 자들을 말하고 ‘어린 아이들’은 그것들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왕이나 부자나 율법사 등에게 나타내 않고 제자들처럼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 나타낸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있는 자들을 사용하지 않고 없는 자들을 사용한 것에 감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고린도전서1:26-29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22절).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 자신을 ‘아들’로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관점에서 아들은 아버지 얼굴과 닮은 자이고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는 자이고 아버지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권위와 권세가 아버지와 같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고 하나님이 가진 모든 권한을 가진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하시려는 모든 권한과 그에 필요한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계시를 깨닫기를 원하는 자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에 헌신적으로 동참하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안 자들로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간주하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아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 절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어린 아이들 같은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다고 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고 일렀습니다. 많은 선지자과 왕은 그들이 보는 바를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고 그들이 듣고자 하는 바를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23-24절). 제자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전도 사역에 동참했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자신과 자신이 가르치신 말씀과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계시하려는 의도를 깨달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처럼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거나 왕들처럼 정치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기를 원할지라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비하면 아주 낮은 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것을 깨달아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1절의 표현대로하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어린 아이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21절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복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13:13-17에도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가장 복되게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 율법교사의 질문 (25-29절)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25절). ‘율법교사’(νομικος)는 서기관이라고 하기도 하고 (막12:28) 율법사라고도 하는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로서 당시 종교적으로 가장 존중받는 신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앉아있는 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계실 때 (막11:27 참조) 듣고 있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일어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유대교 지도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않은 예수님이 옳은 대답을 줄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영생’(ζωην αιωνιον)은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고, 율법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26-28절). 율법사의 대답은 율법의 요긴한 부분인 십계명을 요약한 대답이었습니다. 십계명의 요약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였습니다 (신6:5, 레19:18). 율법교사가 율법에 요점에 대해서는 잘 대답했습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율법의 요점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이 그에게 옳게 대답했다고 하자 자신의 똑똑함을 더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29절). 계명의 요점이 이웃사랑이 맞을진대 그러면 그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바리새파 특히 율법사는 ‘이웃’을 집단적 의미로 보았고 그 집단은 동족으로 보았습니다. 곧 이웃을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으로 한정하여 이해했습니다. 혈통적으로 혼혈된 사마리아인이나 전혀 외인인 이방인들은 제외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과는 교제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같이 먹지 않았고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이 율법의 요점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당연히 예수님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대답할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이웃’을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유대인이라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님이 ‘유대인’이라 대답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한 대답 곧 ‘이웃’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4.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30-37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웃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려고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겨 빼앗고 그를 때려 거의 죽게 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그대로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한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튿날 주막에서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했습니다 (30-35절).
예루살렘(Jerusalem)은 고지대였고 여리고(Jericho)는 저지대로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36km 정도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며 길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자주 강도들이 출몰하곤 했습니다. 그곳에는 4세기 말까지도 강도떼들이 횡행했습니다 (Jerome). 그런데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청중은 당연히 유대인 가운데 어떤 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나 강도들에 의해 둘러싸였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심지어는 옷까지 벗겨 빼앗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심하게 폭행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버렸습니다. 강도들이 가의 죽은 상태에 있는 자를 버려두고 간 다음에 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이 차례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우연히 그를 보았습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주 업무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에 관한 의무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강도를 만나 거반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피하여 지나가고’(αντιπαρηθεν)는 ‘반대편으로 가다’(αντιπαρερχομαι)의 과거형으로서 그가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는 자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강도만나 쓰러져있는 자를 피해간 것은 자기도 강도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여러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부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죽으로 것으로 생각하여 시체를 만져 자신을 부정하게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준수 정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레21:1-3). 만약에 강도만난 자가 신음을 했다면 전자가 맞을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강도만난 자가 전혀 기식을 하지 않았다면 후자가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라 해도 백성들을 위해 제사사역을 하고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직무를 맡은 종교지도자로서 자기가 살기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못했습니다 (민18:1-32). 후자에 해당한다 할지라도 그는 쓰러져있는 자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과오를 범했고, 자기를 종교의식상 더럽히지 않는 것보다 율법과 계명의 핵심인 이웃사랑보다 중요하게 여긴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던 사람에게 심한 충격과 상처를 주는 행동이었습니다.
둘째는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간 다음에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들은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레위인도 성전에서 제사 사역을 돕고 성전과 예물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였습니다 (민18:1-32). 지위에 있어서 제사장보다 낮기는 하지만 그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모범을 보여야할 위치에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앞의 제사장처럼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는 자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자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셋째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지나간 다음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에 속한 자들로서 정치적 이유에 의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지 않고 그리심산에서 예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은 B.C.722년에 앗수르(Assyria)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된 이후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이주해온 이방인들과 혼혈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남유다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율법대로 예루살렘 중앙성전에서 예배하고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여겨 이방인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하여 교제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같이 먹지 않았고 심지어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유대인을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 자신이 식물로 가졌을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싸매주었습니다. 당시 ‘기름’(olive oil)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Robertson).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 옷을 찢어 싸매 두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유대인을 응급처치를 해준 다음에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짐승’(κτηνος)은 여행자가 타고 짐을 싣고 다니는 가축을 포괄하는 말인데 아마도 나귀였을 것입니다 (Lenski). ‘주막’(πανδχειον)은 많은 사람의 숙박을 유치할 수 있는 숙박업소인 여관(Inn)을 의미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를 주막에서 돌보아주고는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강도만난 자를 돌봐달라고 했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이튿날’(αυριον)은 문자적으로 ‘산들바람’으로서 아침 공기를 말합니다. 시리아어 시내역본(Syraic Sinaitic)에는 ‘그날 새벽에’(at dawn of the day)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로 비추어 볼 때 사마리아인은 주막에서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이 할 일이 없어서 강도만난 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할 일이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 떠나야 할 정도로 바쁜 상황에서 강도만나 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중인 것을 보아 사역의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강도만난 자를 돌봐줄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간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나리온’(δηναιον)은 로마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바 ‘데나리온 둘’은 2일 품삯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역사학자에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면 당시 이탈리아의 하루 숙박비가 1/32데나리온에 해당했기 때문에 2데나리온은 약 2개월 치의 숙박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강도만난 자를 돌봐주는 비용으로 상당한 충분히 지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돌봐주는 비용이 더 들어가면 돌아올 때 갚아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막 주인이 강도만난 자를 돌봐주는 데 있어서 혹시라도 손해가 날까봐 소홀히 대하지 않도록 충분한 보상을 약속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완전한 사랑의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36절). 29절에서 율법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었습니다. 율법사는 유대인으로서 당연히 ‘유대인’이라 대답해 줄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웃’의 개념에 유대인이 사랑의 대상에서 배제한 ‘사마리아인’도 포함시켜야한다는 점, 혹은 유대인으로서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대상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마친 후 이야기의 흐름대로 하면 “네 생각에는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누가되겠느냐”고 질문해야되고 당연히 율법사는 “강도만난 자입니다”라고 대답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9절의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생각을 아시고 유대인이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대상은 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36절). 실은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해야하지만 율법사는 이웃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애둘러 대답을 한 것입니다 (37절上).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37절下). 이야기에 나온 사마리안이 강도만난 자를 사랑한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점에서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27절)고 한 것은 바로 사마리아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며 그를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하고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 것입니다.
※ 예수님이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신 이유
첫째, 이웃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한 것은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한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25절).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습니다 (26절).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27절). 예수님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28절). 그러자 율법교사는 29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 비유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난 자는 유대인으로 추측되고 강도만난 자를 치료해준 자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에 속한 자들로서 정치적 이유에 의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지 않고 그리심산에서 예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은 B.C.722년에 앗수르(Assyria)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된 이후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이주해온 이방인들과 혼혈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남유다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율법대로 예루살렘 중앙성전에서 예배하고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여겨 이방인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하여 교제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같이 먹지 않았고 심지어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의 대강령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이웃’을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에만 국한하여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한 율법교사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신은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는 이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짜 사랑해야할 이웃은 그들이 증오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지적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36절에 보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이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이야기 흐름의 자체에만 몰두한다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에게 이웃은 누구이겠느냐’고 물었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묻지 않고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은 누구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한 목적이 ‘유대인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사랑해야할 이웃은 유대인이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또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37절에 보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애둘러 대답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혐오하는 사마리아인을 사랑해야할 이웃으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을 보면 사마리아인 비유는 유대인이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이웃은 그들이 적대시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교훈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계명)의 대강령인 ‘이웃사랑’에서 ‘이웃’은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임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은 우리가 용서할 수 없고 긍휼을 베풀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자인 것입니다 (마5:43-44).
둘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고 나서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고 (36절),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37절). 강도만난 자에게 선을 베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37절에 보면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선을 베푼 사마리아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신 것이 일차적으로 ‘이웃’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지만 이차적으로 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해야한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보면 강도만난 자는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해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인도 다른 곳으로 피해갔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제사를 주관하는 지도자입니다. 레위인들도 성전과 예물을 관리를 맡은 자입니다 (민18:1-32). 그들은 하나님께 봉사하고 백성들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도 자신들이 그와 같은 강도를 만나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멀리 피하여 돌아갔습니다. 혹 그와 같이 강도를 만나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이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 싫어서 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 자신이 식물로 가졌을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싸매주었습니다. 주막으로 데려다 밤새 돌봐주고 아침 일찍 자기 일을 보기 위해 떠나면서도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돌봐달라고 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과 수고 다해 치료해준 것이며 끝까지 돌봐준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처럼 돌본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가 자기를 이웃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이웃의 대상은 자기를 원수처럼 대하는 자들도 포함할 뿐 아니라 그들이 위험과 곤란에 처해있을 때 자기 몸처럼 끝까지 도와주어야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마리아인같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이웃으로 느낄 만큼 자기 몸처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야합니다 (요일3:17, 4:7-8).
셋째,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분인지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비유 통해 자신을 계시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행하신 일과 하신 말씀과 베푸신 비유가 가장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시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보면 이 사마리아인 비유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자인지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구원자로서 영생을 주는 자임을 천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5절에 보면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고 (26절),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27절). 이는 율법의 대강령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28절). 율법을 온전히 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내용은 율법이 지시하는 대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곧 이웃은 원수까지 포함하며 그를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도움을 주되 자기의 재물이 희생되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회복될 때까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전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도 그 일을 하지 못했고 성전봉자자들인 레위인들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잘 준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아무리 율법을 잘 준수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이 지시하는 바를 온전히 행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지도자들과 성전봉사자들도 준수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누구도 준수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인 곧 선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3:10-12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곧 율법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16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롬3:28).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며 죄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과 지옥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정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롬6:23).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 죄를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롬8:3-4, 벧전2:24). 그래서 그가 하나님으로서 자기 죄를 대속해주신 사실을 믿는 자는 그 죄가 사해지고 죽음과 지옥형벌이 면해져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요3:16, 10:9). 곧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그 결과로 오는 죽음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죄로 원수관계에 있던 우리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우리를 죄와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지 그치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시는 분입니다 (요일2:1). 또한 성령님을 보내주어 위로와 치유와 회복을 시켜주시는 분입니다 (요14:16-18, 롬8:26).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으로서 자신이 희생적인 죽음으로 구원한 자를 삶의 과정에도 친히 도우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강도만난 자처럼 악령들의 공격과 죄성의 지배로 인하여 고통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과 가난과 실패의 경험들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열심있는 목회자나 성도들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정작 자기들의 목숨이 위험하고 자기들에게 희생과 수고와 손해가 요구될 때는 피하게 됩니다. 모두들 자기들이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자기들로 손해를 볼까봐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외면할 것입니다. 그로인해 심한 상처와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예 진정으로 도움을 주려는 의도 자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우리를 거절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더욱 상처를 받기도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누구도 우리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회복시켜줄 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성령으로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해야합니다.
5. 마르다와 마리아 집 방문 (38-42절)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길을 갈 때에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38절). ‘한 마을’은 베다니 마을을 가리킵니다 (요11:1, 12:1). ‘베다니’(Bathany)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영접을 했습니다. ‘마르다’(Martha)는 ‘나사로’(Nazarus)의 동생이며 ‘마리아’(Mary)의 언니입니다 (39절, 요11:19-20, 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난 자이며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자입니다 (요11-12장). 그들은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로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요11:5). 마르다는 본문에서 남편이 있다는 암시는 없지만 그의 남편은 문둥이 시몬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마26:6-7).
마르다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39절).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요12:2),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듣더니’에 해당하는 ‘에쿠엔’(ηκουεν)이 미완료 시상인 것으로 보아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40절). ‘분주한지라’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περιεσπαπατο)가 미완료 시상인 것으로 보아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만드느라 계속 바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다도 동생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집에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혼자 음식을 장만한고로 너무 바빴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있던 동생 마리아에게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너무 열중하여 그녀의 요청에 전혀 반응하지도 않았고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 나서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도와주라고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마르다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은 그렇게 바쁘게 음식을 장만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도와주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고,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위해 바쁘게 일하고 있는 가를 은연중에 나타내려는 과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요청에 본문 41절에 보면 마르다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르다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했습니다. ‘근심하나’(τυρβαζω)는 ‘혼란하게 만들다’의 뜻입니다. 음식 대접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혼자 많은 일을 하려 하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42절에 보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말은 ‘음식을 여러 가지 하려 하기 때문에 분주한 것이니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니 음식 수를 줄이거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합본에 보면 ‘ενος δε εστιν χρεια’입니다 (GTS, GNT). ‘몇 가지만 하든지’라는 말이 없고, ‘한 가지만 족하니라’는 말만 있습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보면 ‘그러나 하나의 일만 필요하다’입니다 (But one thing is needful -KJV, but only one thing is needed-NIV). 여러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일만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일은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마르다도 말씀 듣는 한 가지만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마르다가 음식을 잘 장만하여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에 말씀을 듣지 않고 음식 장만에 몰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말씀을 들은 다음에 음식을 장만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음식이 초라해도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 음식을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42절에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좋은 편’은 말씀 듣는 일을 말합니다. 동생 마리아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일보다 말 더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했으니 그 말씀 듣는 것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은 듣지 않고 말씀을 들어야할 시간에 음식을 만드느라 문제를 야기한 마리아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직 말씀 듣는 그 한 가지만 붙들고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칭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지 음식을 대접받으러 온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면 만족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할 때 가르치지 못하면 만족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4:3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자들에 대해서도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좋지만 말씀을 듣지 못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다도 음식을 뒤에 만들더라도 혹 초라하게 차리더라도 말씀 듣는 것을 우선했어야 한 것입니다.
인간은 영이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육적인 심적인 부분이 채워지든 채워지지 않든 영이 살아야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이 살 수 있는 말씀이 절대적으로 가장 필요합니다.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중생, 거듭남)도 말씀으로 되어 집니다. 베드로전서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살아난 영이 성장하는 것도 말씀으로 되어 집니다. 베드로전서2:2에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13:23).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시119:50에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지혜롭게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시편119:98에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시119:99-100). 또한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시편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할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다 하려다가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제일 중요한 일을 해야 그것도 성공하고 전체적으로 좋은 결과를 하져올 수 있습니다. 영국의 '리처드 코치'(Richard Korch)가 쓴 '80/20법칙'이란 책이 있습니다 (공병호 옮김, 21세기북스). '80/20의 법칙'이란 집중하는 20%에서 80%가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20%에 집중하면 나머지 80%가 해결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주력상품이 회사 전체를 살립니다. 오리온 제과는 '초코파이'가, 동아제약에서는 '박카스F'가 전체 매출의 80%를 넘는다고 합니다.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는 아니며 아무나 실천할 수 있는 사고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려고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책을 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잃으려 할 때마다 먼저 해야할 일이 생각나 못 읽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마요네즈병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기에 골프공을 병 위 부분까지 채워넣었습니다. 병이 꽉 찼습니까? 이제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을까요? 여기에 모래를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그 많은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을까요? 여기에 물을 가득 부었습니다. 그 많은 물이 또 들어갔습니다. 골프공부터 차례로 작은 것을 넣으니까 이렇게 많이 들어간 것입니다. 만약 물부터 부었다면 모래나 골프공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래부터 부었다면 물은 들어가겠지만 골프공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골프공부터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골프공은 가장 중요한 것이고 모래는 덜 중요한 것이고 물은 더 덜 중요한 것입니다. 가장 큰 것부터 넣어야 하듯이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야합니다.
<結言>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에 관한 일, 직장과 사업에 관한 일, 학업에 관한 일, 취미에 관한 일, 사회봉사에 관한 일들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하는 봉사에 관한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신명기8:3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마4:4).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도, 어려운 가운데서 섭리 가운데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말씀 붙들고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의 필요를 느끼고, 말씀 듣는 편을 선택하고,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시간을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119:131에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고 했고, 시편119:97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고 했고, 시편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