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11:1-54
<題目> 기도에 대한 교훈과 경고
<序言>
본장은 예수님이 제자도를 가르치시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바리새인과 논쟁을 시작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도의 특징으로서 기도에 대해 교훈하신 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논점들을 폭로하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을 자극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 혈안이 되게 한 계기가 됩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기도에 관한 모범(1-4절), 밤중의 친구 비유(5-8절), 기도에 대한 교훈(9-13절), 축사사역과 관련한 논쟁(14-28절), 악한 세대에 대한 책망(29-32절), 등불 비유를 통한 교훈(33-36절), 식사 관습에 관한 지적(37-41절), 여섯 가지 화(42-5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기도에 대한 모범 (1-4절)
이른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主祈禱)는 마태복음6:9-13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그 일부분만 제시했습니다. 이 기도는 제자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간구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으로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는 기도의 구조나 형식을 가르쳐 주는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에 구해야 하는 내용을 가르쳐 준 기도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정신을 가르쳐 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를 ‘주기도문’(主祈禱文)이라 하여 주술적으로 사용하거나 예배를 마치는 순서로 사용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매 제자 중 하나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1절). ‘한 곳’은 마태복음에서 ‘주의 기도’가 산상수훈의 한 부분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어느 산으로 추측됩니다 (마6:9-13).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열의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기도를 가르쳐 준 것이 생각나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2절).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 모든 성도의 아버지 됨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과 영적 생명을 부여해 주신 창조관계에서, 죄 사운데서 구원하여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언약관계에서, 범죄하여 타락한 자라도 멸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징계하여 바로 세우는 사랑관계에서 아버지 되신 분입니다 (사64:8, 63:16, 신12:1-2 ,렘31:20, 눅6:38).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는 아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려야 합니다 (갈4:4-6, 롬8:15, 마5:1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의 방편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적 특성을 나타내 준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신격이 모욕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신격은 그의 아들들인 성도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고 높이고 순종할 때는 영화롭게 되지만, 그를 믿지 않으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각종 죄를 지을 때는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만 신적 경배와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드려야 하며 삶의 언행심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한 내세의 천국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현세에 복음으로 성령과 말씀의 통치를 받는 영역을 말합니다 (막1:15, 마12:28, 13:24, 고전4:20). 이 세상은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불경건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탄과 죄악과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세력을 가진 나라가 파멸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영원히 왕 노릇해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현재에 복음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의미인 동시에 그 영역이 확장되게 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신부터 성령과 말씀에 지배를 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하라고 했습니다 (3절). 이는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원래 한 병사에게 매일의 몫으로 주어지는 배급량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먹고 사는 데에 필요한 음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햇빛과 공기와 물과 집과 옷과 돈과 건강 등 육신의 생명이 살아가는 데에 모든 생활필수품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도는 단순히 불신앙인들처럼 육신의 것 그 자체를 얻으려는 간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수단과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신앙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을 배경으로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필요(need)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일하며 그것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창28:20-21, 전9:11, 약4:3, 마21:22, 살후3:10, 마6:32, 살전5:18, 딤전6:8). 그리고 이 기도는 육신의 양식뿐 아니라 영적 양식에 대한 필요도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양식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양식이 아무리 풍족해도 영적 양식이 부족하면 영이 주리므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에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 말씀입니다 (마4:4).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 줄 알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말세에는 참선지자들이 줄어들고 거짓선지자들이 득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혼탁해져 영이 살만한 양식을 얻기 힘듭니다 (암8:11-13, 계6:6).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목회사역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10:2, 마13:52). 또한 말씀을 듣고 배울 때 바로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13:13-17, 딤후3:16, 벧후1:20-21). 그리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도 포함 됩니다 (요4:34). 영이 힘을 얻는 데에는 하나님이 명령한 사명을 따라 봉사를 하는 것으로도 더해집니다. 봉사를 할 수 있는 열의와 은사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12:7,11). 그러므로 그것도 하나님께 주권이 있는 줄 알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고 했습니다 (4절上).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들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근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기원의 참 뜻은 과거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지 못했으나 이후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우리도 하나님의 죄 용서하는 은혜를 힘입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우리 죄를 사해주신 그 사랑에 근거할 때만 가능합니다 (엡1:7, 4:32, 마18:23-35).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허물과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한하신 구속의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며 그 사랑의 힘을 공급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노력을 하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은 매일 삶에서 짓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이미 법적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생활가운데서 마땅히 지켜야 할 생활규범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여전히 속에 내재한 육체의 부패한 죄성으로 인하여 죄의 소욕 가운데 살고 있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죄 용서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요일1:9).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4절下). 이는 우리의 승시(勝試)를 위한 기도입니다. ‘시험’(πειρασμος)은 평가(test), 유혹(temptation), 시련(trial), 증명(prove) 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본문의 ‘시험’은 모든 영서성경에서 temptation으로 번역했듯이 ‘유혹’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역사하고 있고 우리 속에 있는 전적으로 부패한 죄의 소욕인 죄성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세상이 우리 죄성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약1:14). 그런데 이러한 시험이 올 때 지게 되면 죄를 지어 죄값에 대한 응당한 보응이 따르게 되고 믿음으로 이기게 되면 신령상 많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약1:2-4). 시험은 하나님 안에서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시험’도 영어성경들에서는 모두 temptation(유혹)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하여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하며 죄성을 제어하기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해야합니다 (약4:7, 마26:41, 벧전2:11, 갈5:16). 그것이 성화(聖化)를 이루는 한 방법입니다.
2. 밤중의 친구 비유 (5-8절)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예수님은 기도에 관련된 교훈을 하기 위해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이른바 ‘밤중의 친구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3명입니다. 3명이 모두 ‘벗’으로 번역된 ‘친구’입니다. 첫 번째 친구는 여행을 하다가 밤중에 찾아온 친구이고, 두 번째 친구는 그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 밤중에 떡을 빌리러 간 친구이고, 세 번째 친구는 그의 간절한 요청에 떡을 내어준 친구입니다. 그중에 두 번째 친구에게 초점을 맞출 경우 본 비유를 ‘간청한 친구 비유’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세 번째 친구에게 초점을 맞출 경우 ‘간청을 들어준 친구 비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두 번째 친구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 하지만 세 번째 친구에 초점을 맞추어서 각색하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유대 지방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자 문을 닫아 잠그고 아이들과 식구들과 함께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잠결에 들으니 친구의 목소리였습니다. 친구가 떡 3덩이만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었지만 일어나 등불을 켜고 떡을 찾아 문을 열고 떡을 건네주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졌습니다. 같이 자는 식구들이 깨는 것도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못들은 채 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기 친구가 여행을 하다가 밤중에 자기 집에 들어왔는데 먹일 것이 없으니 떡 3덩이만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친구관계이지만 한밤중에 다 자고 있는데 찾아와 그까짓 떡 3덩이를 빌려달라고 하니 너무 뻔뻔하고 무례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괴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친구관계이지만 이미 문을 잠그고 식구들과 함께 잠을 자고 있는데 그까짓 떡 3덩이를 빌려달라고 그 난리를 치느냐며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끈질기게 계속해서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면 저렇게 절박하게 요구하겠나 싶어서 일어나 떡 3덩이를 내어준 것입니다. 친구관계이기 때문에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강청함 때문에 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낮의 열기를 피해 밤에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Marshall). 일반적으로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 오후 늦게 출발하여 밤늦게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율법적 정신에 의거하여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 자기 집에 찾아오면 반드시 영접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잠을 재워 주어야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있는 자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으면 밤중에 심히 춥고 짐승의 위험이 있고 도적이나 강도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를 영접하는 것이 선행이었습니다. 그런 통념 때문에 여행 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먹을 것을 대접해 주지 않거나 잠을 재워주지 않는 것은 악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여행 중에 찾아온 손님을 거절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더욱이 밤중에 찾아온 손님은 더욱 거절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여행 중 밤중에 친구가 찾아오면 더욱 영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행 중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지만 우선 필요한 것은 시장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마땅히 먹일 떡이 없었습니다. 떡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부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시장기를 해소하게 해줄만한 떡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을에 사는 친구에게 떡 3덩이만 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식사용으로 먹는 것은 히브리어로 '레헴'(לחם)이었고, 헬라어로는 '알토스'(αρτος)였습니다. 그것은 밀가루로 반죽하여 화덕이나 번철이나 냄비에 구웠는데 그 모양은 둥근 모양이었고 두께는 1cm정도였고 직경은 보통 10~15cm정도 되는데 큰 것은 50cm나 됩니다. 그것은 칼을 대지 않고 손으로 떼어먹기 편리하도록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과 같은 '피타'(Pitta)를 먹습니다. 당시에는 그것 자체만 먹거나 포도즙을 찍어먹기도 했으나 지금은 쏘스를 찍어먹기도 하고 가운데를 벌려서 야채샐러드나 생선이나 고기를 넣어먹기도 하고 그것들을 케밥처럼 돌돌 말아 싸먹기도 합니다. 그것을 영어성경에서는 bread(빵)로 번역했는데 우리성경에는 '떡'으로 번역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떡이 가장 비슷하겠지만 의미상으로는 '밥'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유대인들도 그것을 식사로 하는 것이고 서양인들도 빵을 식사로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떡을 식사로 하지는 않지 않기 때문입니다. 밥을 식사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면서 밤중에 자기 집에 찾아온 벗에게 먹일 것을 얻기 위해 마을에 사는 벗의 집에 가서 그에게 먹일 떡 3덩이만 빌려달라고 할 때 그 벗이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안에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7절). 당시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집에 빌려줄 떡이 있을지라도 밤중에 일어나 떡을 빌려준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창 잠을 자던 중에 일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잠을 자던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불편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 됩니다. 당시 시골 농부의 집에서는 모든 가족과 심지어 종들까지 한 방에서 잠을 잤고 한 가족이 한 이불을 덥고 잤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일어난다면 함께 잠을 자던 다른 사람들이 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불을 켜고 떡을 찾고 떡을 싸서 문빗장을 열고 떡을 건네주는 것은 함께 자던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밤중에 찾아온 손님 그것도 친구에게 숙식을 제공해주지 않는 곳은 악인으로 인식되던 때이기 때문에 그에게 먹을 떡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모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자로서 친한 친구가 그런 모욕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떡을 빌려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친한 벗이 간절하게 빌려달라고 할 때 일어나 빌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했습니다 (8절). 밤중에 친구가 찾아와 여행 중 밤중에 자기 집에 찾아온 친구와 그의 가족에게 먹일 떡이 없으니 떡 3덩이만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자기의 불편함과 자기 가족들의 귀찮음 때문에 빌려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더라도 그 친구가 강청하는 데는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지만 친구가 강청할 때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청함’에 해당하는 원형 ‘아나이데이아’(αναιδεια)는 ‘강청함’ ‘건방짐’의 뜻이 있는데, 영어성경 KJV에서는 ‘끈질긴 요구’(importunity)로, NASB에서는 ‘집요함’(persistence)으로, NIV에서는 ‘뻔뻔스러움’(boldness)으로 번역했습니다. 절대적인 필요를 절박하게 끈질기게 집요하게 뻔뻔스럽게 요청을 하는 데에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생각해볼 것은 비유의 초점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벗’으로 번역된 친구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여행을 하다가 밤중에 찾아온 친구, 둘째는 그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 밤중에 떡을 빌리러 간 친구, 셋째는 그의 간절한 요청에 떡을 내어준 친구입니다. 그중에 둘째 친구에게 초점을 맞출 경우 본 비유를 ‘간청한 친구 비유’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친구에게 초점을 맞출 경우 ‘간청을 들어준 친구 비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간청한 친구 비유’로 볼 경우 본 비유의 강조점은 성도가 절박하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교훈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고, ‘간청을 들어준 친구 비유’로 볼 경우 성도의 절박한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교훈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청한 친구’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인 필요를 절박하게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청을 들어준 친구’에 강조점이 있다면 절대적인 필요를 절박하게 요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두 강조점을 같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기도에 대한 교훈 (9-13절)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9-10절). 하나님께 절대적인 필요를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구하라'(αιτεω)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가리키고, '찾으라'(ζητεω)는 것은 끊임없이 계속 추구해야 할 것을 가리키고,' 두드리라'(κρουω)는 것은 단번에 응답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인내로 추구해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점층법적 표현은 앞에 언급된 밤중에 친구 집에 가서 떡 3덩이를 빌려달라고 한 이야기와 관련된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밤중이지만 무례함을 무릅쓰고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구했습니다. 떡을 구하는 자의 행동은 떡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성을 절대성을 나타내 주는 행동입니다. 그처럼 구하는 자에게는 귀찮음과 불편함과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필요를 절박하게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1-13절). 마태복음7:9-11에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떡’(αρτος)은 빵(Pitta)을 가리키며, ‘생선’(ιχθυς)은 물고기를 가리키며, ‘알’(ωον)은 계란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유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식사 때에 기본적으로 먹는 주식입니다. ‘돌’은 떡(Pitta)처럼 생긴 것이 있어서 서로 떡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떡은 사람이 양식으로 먹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시에 이로운 것이지만 돌은 전혀 불필요한 동시에 해로운 것입니다. ‘뱀’은 기다란 생선처럼 생겨서 생선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생선은 사람이 양식으로 먹는 데에 좋은 것이지만 뱀은 이에 독이 있어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전갈’은 몸을 구부리면 알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 알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알은 계란으로서 사람이 양식으로 먹는 데에 필요한 것이지만 전갈은 꼬리에 쏘는 독이 있어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들을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자식이 필요를 구하는 데 해로운 것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총체적으로 악하지만 자기 자식이 식사를 위해 먹을 것을 달라 할 때 속여서 먹을 수 없는 해로운 것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줄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절대적인 필요를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고, 요한일서5:14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29:12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었습니다. 마태복음7:11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본문 누가복음11:13에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마태는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고 누가는 ‘성령’을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모순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태가 ‘좋은 것’이라고 기록한 것은 영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 있습니다 (Marshall, 히9:11, 10:1). 그것이 맞다면 누가가 기록한 ‘성령’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난예고를 하면서 제자들이 두려워 할 때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달라고 하겠다고 약속했고, 예수님이 승천한 다음에 오순절이후 성령님이 임하여 그들에게 함께 했고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여 함께 했습니다 (요14:26, 15:26, 16:7, 행2:1-21, 10:45, 롬8:9).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불리기도 하고 예수님(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3인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고,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성화와 관련하여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신앙적 열정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의 사역과 관련하여 사명을 감당하게 하고, 사명에 필요한 은사들을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친히 간구해주시기도 합니다. 성령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을 끈질기게 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날 것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4:16-18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습니다 (요14:26, 15:26, 16:7). 보내주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保惠師: 지킬보, 은혜혜, 스승사)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잘 와 닿는 표현이 아닙니다. ‘보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인데 문자적으로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인데 영역본(KJV)에서는 ‘위로자’(Comforter)로 번역했습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친히 돕는 분인데 위로해 주시는 부분이 강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악령들의 역사로, 세상의 구조와 환경으로, 사람들의 관계에서, 자신의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족함에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위로해 줄 자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롬8:15, 고전12:3). 고린도전서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고, 요한일서2:27에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절실하게 구할 때 성령님이 선한 양심을 통해 말씀이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며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십니다 (요7:37-39).
4. 축사사역과 관련한 논쟁 (14-28절)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니 귀신이 나가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놀랐다고 했습니다 (14절). 마태복음12:22-23에는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고쳐주니 그가 보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놀랐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가 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삼하7:12-16, 사11:1).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어 온전하게 한 사건을 본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 예언된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일단의 사람들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놀랍게 여겼지만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마태와 마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로서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율법사)들이었습니다 (마12:24, 막3:22).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15-16절). '바알세불'(Βεελζεβουλ)은 간혹 '바알세붑'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집의 주’라는 뜻입니다. 이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바알을 가리켜 사용한 말인데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도 했는데 (막3:30, 요8:48), 이번에는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한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반응을 한 사람들의 말처럼 만일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 곧 ‘다윗의 자손’이라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 같은 이적을 나타내보라는 힐문일 것입니다 (왕상18:1).
18-20절에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이 전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라이든 집이든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공동체가 어찌 온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탄과 귀신은 같은 목적으로 일을 하는 악령들인데 어찌 자기들끼리 싸우면 어찌 사탄의 나라가 서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러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면 사탄이 귀신과 싸워 물리친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어찌 사탄이 자기 세력과 싸워 물리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는 것입니다. ‘아들들’은 추종자들을 의미합니다 (followers-NIV). 바리새인 율법사를 추종하는 사역자들도 귀신을 쫓아낼진대 그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쫓아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증명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으니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세력을 확장하고 그만큼 사탄의 세력이 패하여 물러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것은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권세를 결박하여 물리치므로 악령의 지배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막16:17-18). 하나님 나라는 빼앗는 자의 것입니다.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고 빼앗은 만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영역으로 변합니다 (막6:7).
21-22절에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고 했습니다 (막3:27). 넓게 보면 ‘강한 자’는 ‘강한 자’는 사탄을, ‘자기 집’은 세상을, ‘그 소유’는 사람을 상징하는 말일 수 있을 것입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는 ‘강한 자’는 귀신을, ‘자기 집’은 귀신들린 사람을, ‘그 소유’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있는 모든 가치 있는 소유들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24-26절). ‘더 강한 자’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강한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 그 사람의 주인이 되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들을 지배하지만 귀신보다 강한 예수님이 귀신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치를 원목적대로 바로 사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마12:30).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예수님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사역입니다. 또한 목자가 이리 등의 맹수들에게 먹히는 양을 빼앗아 오는 것처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구하는 사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구하여 모으는 것이 아니라 헤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두고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 서기관(율법사)의 대적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막3:22).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나라 일을 반대하는 자들이며 예수님이 성령으로 행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마12:31). 이 말씀은 9:50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되지 않습니다. 본 절과 9:50은 그 말씀을 하신 배경이 서로 다릅니다. 본 절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 서기관(율법사)의 공격에 대한 변증을 하면서 하신 말씀이고, 9:50은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는 것을 금했다는 보고를 듣고 그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본 절은 대적자들에 대해 한 말씀이고 9:50은 협력자들에 대해 한 말씀인 것입니다.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24-26절). 이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보면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간 다음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다시 들어오되 더 악한 귀신이 더 많이 들어와 지배하게 되므로 더욱 악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세대와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 이스라엘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스라엘인들이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율법과 의식과 의문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하시려는 구속사역을 더욱 방해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보다 더욱 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했다는 말은 당시 귀신이 사막이나 광야에 산다는 통속적인 생각을 인용한 말씀일 것입니다 (7:33).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생명강수가 흘러 흡족하게 얻을 수 있고 지옥에는 물 한 방울도 얻을 수 없어 고통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22:1-2, 눅16:24). 예수님을 구원자로 한 자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여 말씀을 깨달게 하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게 합니다. 요한복음7:37-39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성령님을 모시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 말씀을 얻을 수 없어서 영적으로 곤고함을 당하는 곳입니다.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귀신은 그런 곳에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귀신이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는 말은 귀신이 전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에게 주인이 없음을 확인한 것을 말합니다. 곧 귀신들렸던 사람이 귀신이 나간 다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므로 그를 주관하는 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성령님이 계시지 않고 말씀이 세력을 얻지 못하니 주인 없는 빈 집이나 마찬가지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했다는 말은 동료 귀신들을 더 데리고 들어갔음을 말합니다 (8:2).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는 말은 나갔던 귀신이 7귀신을 데려와 주관하니 귀신들인 사람의 상태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고 성령님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 말씀이 지배세력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하니 예수님께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7-28절). 한 여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가 있음에 감탄하여 예수님을 낳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복이 있는 자는 훌륭한 아들을 낳은 데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8:21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영이 거듭나고 성령님이 내주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터득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지키는 자는 영이 자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과 칭찬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는 자가 가장 복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5. 악한 세대에 대한 책망 (29-32절)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무리가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29-30절). 마태복음12:38-40에는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이적' '기적' '기사' 등이 자연원리를 초월한 기이한 일을 말한다면 '표적'(表蹟, σημειον, sign)은 그것들을 통해 나타내는 의미의 상징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임을 계시하기 위해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등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교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기적들이 가진 표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을 보고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악하고’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한 것과 관련한 지적이며, ‘음란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는 일을 방해한 것과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부부관계에서 타락한 상태와 같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의미로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14에 있는 '인자 같은 이'(one like the Son of man)에 해당하는 '케바르 에나쉬'(כבר אנש)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창28:10-14, 삼하7:12-14, 겔1:26-28). 곧 ’인자‘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선언하기 위해 자주 사용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임을 설명 혹은 선언하는데 있어서 요나 사건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은 요나가 나타낸 어떤 이적에 대한 표적성이라기보다는 요나와 요나의 경험이 표적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였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 만에 나와 앗수르(Assyria) 제국의 수도 니느웨(Nineveh)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므로 그들을 회개하게 했습니다 (욘1-2장). 요나와 요나의 경험은 오실 구원자에 대한 표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로서 구원할 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므로 그들을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들 구원자임을 증거하는 가장 뚜렷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은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으로 시작하여 그의 기적적 사역들에서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는 그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그 중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보면서도 그 내용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지 못했고 세속적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했습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한 것입니다. 자신들 입장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이단들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1,980년대에 극단적인 진보 목회자들과 2,010년대 이후에 극단적인 보수 목회자들의 시각도 그와 같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했습니다 (31절). ‘남방 여왕’은 스바의 여왕을 가리키는데 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에디오피아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 솔로몬왕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2,000km나 되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돌아갔습니다 (왕상10:1-13). 그녀는 이방 나라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곳까지 와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목격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 당시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무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에 스바 여왕이 정죄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다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했습니다 (32절). ‘니느웨’(Nineveh)는 앗수르(Assyria) 제국의 수도로서 극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했을 때 모두 회개했습니다 (욘3:5-10).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듣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요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님 때 당시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때에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사)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낸 일과 교훈에 대해 무반응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마11:16-24).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과 무반응을 넘어 대적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6. 등불 비유를 통한 교훈 (33-36절)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여 함이라고 했습니다 (33절). 마태복음5:15에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했고, 마가복음4:21에는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고 했고, 누가복음8:16에는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본 절과 형식적으로 비슷한 비유이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해당 구절들의 앞뒤 내용을 보면 마태복음5:15절은 제자들이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비유이고, 마가복음4:21과 누가복음8:16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확장성을 강조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본 절 누가복음11:33은 예수님의 표적과 교훈의 계시성을 강조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등불’(λυχνος)은 방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진 등잔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둥그런 모양의 납작한 적갈색의 토기입니다. 한 쪽 끝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고 다른 한 쪽 끝에는 심지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나 있는 대롱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습니다. 등 윗부분에는 두 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하나는 기름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고 하나는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입니다. 그 등잔에 감람유(olive)를 채우고 그곳에 심지를 넣어 불을 켭니다. 그 등잔은 등경 위에 올려놓습니다. ‘등경’(λυχνια)은 등대라고도 하는데 등잔을 올려놓는 받침대입니다. 그 등대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대(臺)인 경우도 있고 벽에서 돌출한 선반인 경우도 있습니다. 등을 등경 위에 두는 것은 온 실내를 비추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등을 켜고 그 등불을 그릇으로 덮지 않습니다. ‘움’(κρυπτος)은 ‘감추어진’ ‘비밀의’ 뜻으로 토굴이나 지하실이나 골방을 의미합니다. ‘말’(μοδιος)은 곡식 같은 것을 되는 기명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되로서 18ℓ인데 이스라엘에서는 8.25ℓ의 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방 안에 등불을 켤 때는 등잔을 등경 위에 올려서 켜 놓습니다. 등불을 켜는 것은 집이나 방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보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등불을 켜서 움이나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둡니다. 그 등불은 예수님이 표적과 교훈을 통해 나타내는 계시의 빛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했습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만일 눈이 나쁘면 몸도 어두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보라고 했습니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대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고 했습니다 (36절). 예수님은 집안의 등불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표적과 교훈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계시하고 있습니다 (엡5:13-14), 그런데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는 그 계시가 생각과 마음과 행동과 생활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은 것처럼 평안하고 안전하고 담대하고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과 교훈을 통해 나타내는 계시를 받지 못하는 자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율법교사) 들처럼 깨닫지 못해 오히려 방해하고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조명하에 성경을 깨달으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해 주신 은혜를 깨달아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깨달을 깨닫고 일하시는 원리와 섭리와 경륜을 깨달아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듯이 계시의 빛으로 생각과 행동과 삶이 모두 바르게 됩니다.
7. 식사 관습에 관한 지적 (37-41절)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음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37-38절). 마태복음15:2과 마가복음7:2-5에는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는 표정을 지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했는데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간단한 식사를 하고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주된 식사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점심은 바로 늦은 아침에 하는 간단한 식사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식사 전에 물그릇에 손을 씻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죄 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의식상의 결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청한 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청한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기는 표정을 보고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39절).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고 먹은 것은 세상의 불결한 것을 접촉한 죄를 씻어 정결하게 하기 위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는 자기들 속에는 죄가 가득하게 둔 채로 마치 자기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결례를 행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릇의 겉만 깨끗이 닦고 안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처럼 그들이 죄를 씻는 결례를 행하지만 마음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하려는 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했습니다 (40-41절). 하나님은 겉도 만드셨지만 속도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도 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속의 더러움은 그대로 둔채 겉만 깨끗하게 하면 속의 더러움이 감추어질 줄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속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여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하려는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을 고쳐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도우려는 생각을 가져야 마음과 행동 모두가 깨끗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내적으로 마음을 정결케 해야 외부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마음은 정결케 하지 않으면서 외적인 행동만 정결한 의식을 행하는 것은 결코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7:21-23에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적인 것을 정결하게 하려 말고 내적인 것을 정결하게 해야합니다.
8. 여섯 가지 화 (42-54절)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화(禍) 있을진저’는 해당하는 기본형 ‘우아이’(ουαι)는 ‘슬프다’로서 저주나 심판을 경고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슬픔을 탄식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3:13-36에는 7가지 화를 지적했는데 본 단락 42-54절에서는 6가지 화를 지적했습니다.
①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42절).
42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3:23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십일조'(十一條)는 소출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를 말합니다 (레27:30, 신14:22-27). ‘박하’(ηδυοσμον)는 독특한 향내를 내는 식물로서 음식물에 양념이나 약품의 재료나 방향제로 사용되는 채소입니다. ‘운향’(πηγανον)은 초록색 잎과 노란색 꽃을 가진 사철 관목으로서 강한 냄새가 나 장식에도 사용되고 음식의 양념이나 약품에 사용하는 채소입니다. ‘채소’(λαχανον)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채소들에 대한 일반적인 총칭입니다. ‘공의’(κρισις)는 정의를 말하는 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αγαπη)은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을 근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의와 사랑은 십일조 규례의 근본정신이고 박하와 운향 등의 채소는 양념거리인 중요하지 않은 채소들로서 장로의 유전을 따른 십일조의 세칙들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3가지의 종류가 있었습니다. 첫째,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레27:30-33, 민18:20-24).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매년 소산의 10분의 1을 드리게 했는데, 그 십일조는 성전봉사 사역을 맡은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레위인은 기업(토지)를 갖지 않고 온전히 제사 사역만 감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가족을 위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신14:23-27). 가족을 위한 십일조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외에또 10의 1을 떼어 감사제를 드리고 가족과 종이 함께 먹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셋째, 빈민을 위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신14:28-29). 빈민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 10분의 1 외에 또 가족과 종을 위해 십일조 10분의 1을 더 드렸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외에 10분의 1을 더 드리는 것 가운데 1~2년째의 것은 가족을 위한 십일조로 드리고 3년째의 것은 빈민을 위한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10분의 1 외에 10분의 1을 뗀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해를 기준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해로부터 7년째는 안식년이므로 안식년을 기준해서라고 해도 됨) 1-2, 4-5년은 가족을 위한 십일조로 드리고 3, 6년은 빈민을 위한 십일조로 드린 것일 것입니다. 빈민을 위한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배부르게 먹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할 때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이고, 성전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고,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유지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했습니다 (레27:30-33, 민18:20-24, 신14:22-29). 그것은 농산물과 가축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랍비들은 그것들을 더욱 구체화하여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세부적인 부분까지 철저히 지키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 랍비들이 만든 규범을 철저히 지키려 했고 그것을 자부심으로 가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그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은 소홀히 하고 외부적인 규정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맹목적인 형식주의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그것을 자기들의 신앙적 의로 내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 규례를 주신 목적인 정신은 갖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행할 뿐 아니라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한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외적으로 행하는 것 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근본 목적인 정신을 가지면서 외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외적으로 행하면서 내적은 정신을 가지고 내적인 정신을 가지면서 외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준수를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42절). ‘이것’은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공의와 사랑을 말하고 ‘저것’은 장로의 유전을 따른 십일조의 세칙인 박하와 운향 등의 양념거리의 채소들을 말합니다. 외부적으로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그 규례의 근본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규례도 지킬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규례보다 규례의 정신이 중요하지만 규례가 정신을 더욱 온전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규례만 외부적으로 지키는 것은 외식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 율법의 규례를 철저히 행하는 것이 그 정신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②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43절).
43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3:6-7에는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회당’들은 예배와 율법 강론을 하는 곳으로서 ‘회당의 높은 자리’ 회당 안에서 가장 앞쪽에 위치하여 회중을 바라보는 자리를 말합니다. 앞쪽에는 회당 관리자의 의자와 율법을 설파하는 자의 의자가 있는데 그 중 율법을 설파하는 자의 의자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기를 원하고 자기를 나타내기를 원하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시장’은 사람들이 물건을 팔거나 사기 위에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높임받기를 원하고 존경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득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③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44절).
44-45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3:27-28에는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을 보면 바위 언덕에 판 굴 모양의 무덤을 돈으로 사서 그 안에 시체를 넣고 돌로 그 입구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덤은 영구적이어서 가족과 후손 대대로 사용하는 가족묘의 기능을 합니다 (창23:9). 그렇지만 조상이 마련해 놓은 묘가 없거나 가난하여 무덤을 살수 없는 사람은 가족 중에 누가 죽으면 난처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규정에 의해 당일 어두워지기 전에 시체를 무덤에 넣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평토장을 합니다. 땅을 30~40cm를 파고 그곳에 시체를 묻습니다. 시체를 그렇게 얕게 묻는 것은 다음에 굴 모양의 무덤을 산 다음에 정식으로 그 무덤에 매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평토장은 시체를 얕게 묻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빗물에 흙을 쓸려가 뼈들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모르고 밟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뼈를 밟은 사람은 율법의 규정에 의해 7일간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민19:16).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각 나라와 각 지역에서 수십만 명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게 되는데 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행해 가는 순례객들이 부정하게 되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산헤드린에서는 그 순례객들을 위해 사람을 보내어 평토장한 무덤에 하얗게 석회 칠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평토장한 무덤을 마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평토장한 무덤’(τα μνημεια τα αδηλα)은 ‘보이지 않는 무덤’ ‘숨겨진 무덤’의 뜻입니다. 바리새인들 특히 율법교사들는 그 마음속에 온갖 교만과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과 행위로 정결한 체하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지만 실은 그 속에 온갖 더러운 자기를 높이려하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하는 더러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예전 등조차도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데 악용하는 악독함으로 가득 차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같은 지적을 하자 한 율법교사는 예수님이 오히려 자기들을 모욕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그렇지 않는 것처럼 따져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인정하고 회개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것은 얼마나 완악한 자들인지 증명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④자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자기는 한 손 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46절).
46절에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3:3-4에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옳은 것으로서 그대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파 율법교사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랍비들이 율법 적용을 위해 만든 세부적인 규칙까지 규례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행하기 힘든 세부적인 규례까지 행하도록 강요하므로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자기들의 종교적 권위를 나타내고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에 이용했습니다.
⑤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47절).
47-48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3:29-30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 하였으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들인 바리새인들은 그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정비하고 장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한 자들이라고 선전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을 기리며 자기들이 그 선지자들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 선전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 선지자들을 죽인 자리에 자기들이 있었다면 자기들은 그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로 알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도 무시하고 부정하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49-51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진적 지혜로 하신 말씀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 같습니다. ‘아벨’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아들 아벨이 바른 제사를 드리다가 들에서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자입니다 (창4:8). ‘사가랴의’는 역대하에 나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스가랴)가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을 책망하다가 성전 뜰에서 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자입니다 (대하24:20-22). 아벨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온 창세기에 나오고 사가랴는 가장 나중에 나오는 역대하에 나옵니다 (역대기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기록된 책으로서 히브리어 원전에는 가장 마지막에 나온 책임). 그래서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아벨에서 가장 늦게 나오는 사가랴의 죽음까지를 표현한 말로서 아벨이나 사가랴 같은 구약의 모든 의인(선지자)들의 순교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사가랴를 A.D. 67년 헤롯당에 의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바라이스의 아들 스가랴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게 볼 경우에는 최초 순교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의 순교까지로 볼 수 있음). 어쨌든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보낸 의인들을 죽인 죄는 그 세대가 감당해야 되듯이 예수님 당시 세대도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인 죄에 대해 그 세대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 당시 세대는 구약시대의 모든 의인보다 의로운 구원자를 대적하여 죽인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죄를 지은 자들이므로 구약시대의 모든 의인을 죽인 죄까지 다 포함하여 담당해야 것 같이 큰 죄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대적하여 죽인 죄를 지은 사람들이 담당한다고 하지 않고 세대가 담당한다고 한 것은 공동의 책임의식을 갖게 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렘5:1, 창18:32, 느1:6).
⑥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52절).
52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교사들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바로 해석하고 바로 가르친다면 율법에서 구원자로 제시하는 자가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부정하게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잘못 깨달은 율법을 잘못 가르치므로 율법을 배우는 사람들도 구원자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 때문에 자신들로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으려는 자들까지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53-54절에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거기’란 예수님이 점심 식사를 위해 초청받은 한 바리새인의 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준엄하게 비판하신 후 그 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몹시 분노하여 격한 감정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힐문하고 예수님이 대답하는 말을 책잡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광분하여 이성을 잃고 예수님을 대적하여 책잡으려 한 것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파의 지도자들인 율법교사들의 교만과 위선과 외식과 죄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시려는 구원을 거절하게 하고 하나님이 구원자로 보낸 예수님을 대적하게 했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바로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합니다 (딤후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