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12:1-59

<題目> 권면과 회개 촉구

 

<序言>

  예수님께서 전장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위선에 대해 질책했습니다. 본장에서는 주로 제자들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격한 갈등 후에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권면과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한 주의 당부(1-3), 담대한 신앙에 대한 권면(4-12), 어리석은 부자 비유(13-21), 의식주에 관한 교훈(22-34), 종의 책무에 관한 교훈(35-48), 예수님이 오심으로 나타난 현상(49-53), 시대의 징조와 회개 촉구(54-59)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한 주의 당부 (1-3)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그 동안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늘 그랬듯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 ‘누룩’(ζυμη)은 가루 반죽이나 액체를 발효시키기 위해 넣는 물질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전에 사용한 반죽을 남겨놓은 약간의 반죽을 말합니다. 누룩은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것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13:33), 나쁜 의미로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16:6,11-12, 5:9, 고전5:6), 여기에서는 나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는 그 누룩을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습니다. ‘외식’(υποκρισις)은 조작된 행위인 외식이나 위선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은 그 파급효과가 누룩처럼 빠르게 모든 사람들에게 부패시키므로 그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니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했습니다 (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는 표현은 여러 의미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전하는 진리는 반드시 전파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둘째, 제자는 반드시 바른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셋째, 죄나 악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세 번째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이 현재에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어서 분별하기 힘들지만 반드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된다는 말은 그것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숨겨진 것도 반드시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내려 하실 때는 진실한 것도 반드시 드러날 것이지만 거짓된 것도 반드시 드러납니다. 진리도 드러나고 비진리도 드러납니다. 선행도 드러나고 악행도 드러납니다. 그것은 종말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4:13, 고후5:10, 20:12), 현세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적용됩니다 (딤전5:24-25. 그러므로 언제나 진실하게 신앙양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4:16, 1:10).

 

 

       2. 담대한 신앙에 대한 권면 (4-12)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밀감을 더하기 위해 제자들에 대해 친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몸은 죽이고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 곧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4-5). 성도의 몸은 얼마 안 있다가 죽게 되지만 영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성도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까지 죽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몸도 죽이고 영도 영원히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 영원한 죽음은 지옥에 보내 극형을 받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참새 5마리가 2앗사리온에 팔리는데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가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6-7). 마태복음10:29-31에는 참새 2마리가 1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앗사리온’(ασσαριον)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과 비교할 때 그것의 16분의 1에 해당한 금액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푼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참새 2마리가 1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는데 누가는 참새 5마리가 2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당시 참새 2마리에 1앗사리온이었으니 참새 4마리면 2앗사리온인데 4마리를 사면 1마리를 더 얹어주어 참새 5마리에 2앗사리온을 받기도 했는 모양입니다. 참새 2마리 혹은 5마리는 사람들 보기에 그 가치에 있어서 아주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참새들이 땅에 떨어져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참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죽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계시는 것처럼 제자들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참새보다 귀한 사람일뿐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이 있는 자들인데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죽이려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자기의 목적을 위해 부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 자신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 사람 앞에서 예수님 자신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8-9). 마태복음10:32-33에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거나 부인할 것이라고 했는데 누가는 하나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하거나 부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자’(αγγελος)는 천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심판장에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천사들도 계시기 때문에 두 표현이 다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위협이나 핍박이나 박해하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인정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심판장에서 그의 행위를 인정하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부인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심판장에서 그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예수님을 시인하거나 부인한다는 말 가운데는 삶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과 예수님을 부정하는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의미가 아닌 현재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질적 손해나 육체적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이 주신 계명과 예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요일2:1, 8:26,34).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그것들을 저버린다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말로 예수님 자신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10). 이 말씀이 마태복음12:31-32과 마가복음3:28-29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바알세불 논쟁과 관련하여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사탄의 힘으로 쫓아낸다는 비난을 했을 때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계시하기 위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신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을 부정하는 자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은 자이며 성령님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나타내려는 사역을 모독한 자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본문 누가복음12:10에서 핍박하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 앞에서 시인하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부인한다는 내용에 관련하여 기록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고 증거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인한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로서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한 자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아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역사를 모독한 것으로서 용서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0:26-27, 요일5:16).

 

  예수님은 또 사람이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여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치시리라고 했습니다 (11-12). ‘회당은 유대인의 법정으로서 종교적인 핍박을 뜻한다면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는 이방인의 법정으로서 정치적인 핍박을 뜻하는바 제자들이 받을 각양 핍박을 일컫는 말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아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하지만 그때 어떤 말로 사역의 정당성을 변증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법정에 섰을 때 관심은 자신들을 어떻게 변호하여 무죄판결을 받아낼까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들이 행한 일을 통해 예수님이 증거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옳을지 염려할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지혜를 주셔서 효과 있게 변증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4:8-12, 6:10, 딤후4:17).

 

 

       3. 어리석은 부자 비유 (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형을 명하여 유산을 자기와 나누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13). 모세의 율법에는 재산을 상속할 때 형제간 분배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27:1-11, 21:15-17). 재산분배가 법규에 따라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랍비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구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실제로 재산의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탐심을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예수님을 율법선생으로 잘못 알고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했습니다 (14). 예수님은 그런 사회적인 세속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자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산분배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을 향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고 했습니다 (15). ‘탐심은 자기 분에 넘치도록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말합니다. ‘모든 탐심은 물질에 고한한 것뿐 아니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말합니다. ‘생명은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영적 생명을 말한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거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재산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영원한 생명을 얻거나 영적 만족을 얻는 것은 재산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탐심을 물리쳐야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이 이른바 어리석은 부자비유를 들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예증을 든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제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곳간을 헐고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16-21).

 

  이야기 속의 부자는 밭이 많았고 밭의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16절에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고 했습니다. 소출이 풍성했다는 말은 추수한 다음에 수확한 곡식이 많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추수하기 전 밭에 곡식이 풍성히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소출이 풍성하매에 해당하는 유포레센’(ευφορησεν)잘 가지고 있었다는 뜻으로 곡식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밭에 밀 같은 농작물이 열매를 풍성하게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추수를 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깊이 생각했습니다. 17절에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라고 했습니다. ‘생각하여’(διελογιζετο)의 시제가 미완료인 것으로 보아 매일 계속하여 고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곡식이 수확되면 현재 있는 곳간으로는 그것을 다 쌓아두기에 부족했기 때문에 고민한 것입니다. 그는 궁리 끝에 결국 지금 있는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지어서 거기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8절에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했습니다. ‘물건’(αγαθος)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할 것이라 했습니다. 19절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라고 했습니다. 자기 영혼에게 곳간을 크게 짓고 곡식을 여러 해 동안 쓸 수 있도록 가득 저장해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영혼’(ψυχη)은 생명의 주체로서 내면의 자아를 의미합니다.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는 육체적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어떻게 가치 있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육신적인 평안과 기쁨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밤은 큰 곳간을 짓고 여러 해 쓸 수 있는 곡식을 가득 저장해놓고 평안히 쉬면서 즐기자는 계획을 세운 날 밤을 말합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영혼을 거두어간다면 그 준비하려던 것들을 전혀 쓰지 못하고 남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 해 동안 평안히 먹고 누릴 계획과 준비를 해놓았을지라도 당장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어리석은 것은 자기 생명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 생명이 영원할 줄 알고, 자기 평안과 즐거움만을 위해 살려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에 관하여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만 쌓아두려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쌓아두려 하지 않는 자는 그와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려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사용하려하지 않는 자가 그와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살려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살려하지 않은 자가 그와 같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영원히 남아있는 것을 위해 삽니다. 썩어져 없어질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히 남아있는 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잠깐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51:6).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2: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베드로전서1:23-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 의식주에 관한 교훈 (22-34)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했습니다 (22-23).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인간의 살아가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이 확보되지 않거나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이 예상되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위해 목숨이 필요하거나 의복을 위해 몸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이 필요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의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목숨을 위해 음식을 주시고 몸을 위해 의복을 주시기 때문이라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 때문에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몸을 보호해 주실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음식과 의복을 제공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백합화는 실을 만들지도 짜지도 않지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신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이 그 꽃 하나만큼 휼륭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그것들보다 귀한 존재인 제자들은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24, 27-28). 마태복음6:26,28-30에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고 했습니다. 마태는 공중의 새라고 했으나 누가는 까마귀라고 했습니다. 새는 사람에 비해 미물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는 까마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새로 여겨졌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지 않는 새였습니다 (11:15, 14:14). ‘백합화’(κρινον)는 유대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네모네로서 붉은색의 꽃잎을 가진 들꽃입니다. 유대 지역은 가물고 열풍이 불면 풀이나 들꽃들이 곧 말라버립니다. 그럴 경우 그곳은 나무가 귀해서 땔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땔감으로 사용합니다. ‘솔로몬은 구약시대 다윗왕의 아들로서 유대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었습니다. 하찮게 여기는 까마귀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흔한 백합화도 하나님이 솔로몬왕의 왕포보다 아름답게 입히는데 하물며 하나님 목적을 가지고 부르신 제자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로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와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6-7절에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자요 하나님이 부르신 자요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사역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까마귀나 백합화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한 존재입니다.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스바냐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가장 작은 일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고 했습니다 (25-26). ‘에 해당하는 헤리키아’(ηλικια)는 기본적으로 신장을 가리키지만 나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9:21). ‘에 해당하는 페퀴스’(πηχυς) 또한 기본적으로 길이(팔꿈치에서 손가락 끝을 말하는 규빗에 해당하는 45.6cm)를 가리키지만 시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39:5). 사람은 한 자에 해당하는 신장도 뜻대로 늘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이도 뜻대로 연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아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은 염려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염려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필요를 따라 이루어지게 해 주십니다.

 

  중국 열자(列子)에 보면 기()나라에 "만약 하늘이 무너지면 죽을 것이니 어디로 피해야 한단 말인가?" 하며 침식을 잊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무익한 염려를 '기나라 사람의 근심'이라는 의미로 '기우(杞憂)'라고 했습니다.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사람들이 하는 근심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염려가 92%라고 합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소심하게 하고 우울해지게 하고 초조해지게 하고 두려워지게까지 합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좁게 하여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하고 바른 의지를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하게 되면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근심은 행복의 적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29-30). 마태복음6:31-32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구하지에 해당하는 기본형 제테오’(ζητεω)구하다’ ‘계획하다’ ‘추구하다는 뜻입니다. ‘근심하지도에 해당하는 기본형 메테오리조’(μετεωριζω)근심하다’ ‘걱정하다’ ‘의심하다의 뜻입니다. 먹을 것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그것 얻는 것을 추구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걱정하거나 그것을 얻지 못할까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 표현입니다 (Rabbinic). 그래서 마태는 그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과 육체의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만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것들 자체만을 추구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제자들에게 그것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31). 마태복음6:33에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는데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든 영적 영역을 말하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원리인 공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함이고 의식주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모든 수단들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목적을 위해 살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육신의 필요들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제자들과 같은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원리가 되게 하는 것을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육신의 것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일하는 소에게 마땅히 먹을 것이 있어야 될 줄 알고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하나님이 반드시 먹을 것을 주십니다. 시편37: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을 육신의 것을 추구하며 염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3:10“~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른 목적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태는 마태복음6:34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개역판에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번역했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로 번역했습니다. 내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위리온’(αυριον)이 주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역개정판 번역대로 내일이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는 내일 일은 내일이 스스로 염려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이 내일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내일에게 마땅히 필요를 채워주라 하셨기 때문에 염려할 일이 있다면 내일이 염려해야 한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 일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에 해당하는 카키아’(κακια)는 원래 ’ ‘고난등의 뜻인데 여기에서는 사람이 감내하기 힘든 역경과 고초를 의미합니다. 농경사회로 본다면 흉년이나 재해나 사고 등으로 수확을 하지 못하므로 겪는 고통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만일 한 날 괴로움을 겪었다면 그것은 그 날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오늘 괴로운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허락한 것으로서 아주 실패하지 않도록 지켜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차적으로 내일에는 그 같은 괴로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이든 내일이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힘들었다고 해서 내일 더 큰 힘들 것이라는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감내하기 힘든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힘든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힘든 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는 일들로서 하나님이 그런 힘든 일 속에서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고통이 이유 있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더욱 유익하게 해 주십니다. 야보고서1:2-3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을 생각하면 고난이 결코 고통이 아니라 내적 기쁨과 소망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오늘에도 섭리하시고 내일에도 섭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을 위해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그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32). ‘무서워에 해당하는 기본형 포베오’(φοβεω)놀라다’ ‘경악하다’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등의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놀라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에 대해 상당히 놀란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가르침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므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33).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는 것은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재물을 얻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궁핍한 사람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2:44-45). ‘배낭에 해당하는 바란티온’(βαλαντιον)전대’ ‘돈주머니를 가리킵니다. 구제하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낡아지지 않는 돈주머니에 넣는 것과 같이 모이게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곧 도둑이 가까이 하는 일도 없고 좀이 먹는 일도 없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 작은 벌레로서 주머니나 옷이나 장롱 등을 갉아 구멍이 나게 하거나 헤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재물로 궁핍한 자를 돕는 선한 행위는 없어지지 않고 하늘나라에 영원히 남는다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디모데전서6:17-19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6:19-20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동록은 구리나 구리합금에 녹이 슬러 생긴 푸른빛 녹을 가리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귀중품은 땅에 감추어 두거나 집 안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옥의 벽은 흙이나 흙벽돌로 쌓았습니다. 그러므로 보물을 땅 속에 파묻어 놓거나 집 안에 감추어두면 녹이 슬기도 하고 좀이 먹기도 하고 도둑이 벽을 뚫어 훔쳐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사용하면 하늘에 쌓는 것으로서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물은 사람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들로서 돈뿐만 아니라 건강과 지식과 재능 등 귀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은 가치에 있어서 한시적이고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하늘은 안전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의미합니다. 땅에 쌓아둔다는 말은 자기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 이 세상에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에 쌓아둔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세상에 사용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소멸되기도 하고 그것이 자기를 구해주지도 못하고 그 공력이 인정되지도 않습니다 (23:4-5, 12:16-21, 딤전6:8-10, 5:1-3, 7:19, 17-18).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 사용한 것은 그 자체가 영원이 남아 있고 그 공력이 인정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됩니다 (5:12, 19:29, 8:18). 그래서 전도서11:1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물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34). ‘마음’(καρδια)은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중심입니다. 보물처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상에 모든 관심이 쏠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그것에 몰입되고 그것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가치와 목표와 목적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삶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얻는 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땅에 둔 자는 땅의 일에 관심이 몰입되고 하늘에 둔 자는 하늘의 일에 관심이 몰입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둔 자는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살고 하늘에 둔 자는 영원한 것을 위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3: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27에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벧전1:23, 벧후1:4).

 

 

       5. 종의 책무에 관한 교훈 (35-48)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허리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35). 겉옷 위에 띠를 띠라는 명령은 이떤 일을 위해 준비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유대 지방 사람들은 뜨거운 직사 광선이나 열기 그리고 사막의 모래 바람 등을 피할 수 있도록 통이 넓으면서도 길게 늘어지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신속한 활동을 위해서는 띠를 띠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명령은 사람을 정중히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입니다. 밤에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둠을 밝힐 등불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을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혹 이경에서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36-38).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밤에 열렸습니다. 주인이 혼인잔치에 갔다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2경이나 혹 3경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나누었습니다. 1경은 6-10, 2경은 10-2, 3경은 2-6시였습니다. 2경이나 3경은 한 밤중이나 늦은 밤이나 새벽을 의미합니다. 밤에 열리는 혼인잔치에 간 주인이 혼인잔치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2경이 될 수도 있고 3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 밤새 기다려야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도 않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서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지 주인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고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다가 문을 열어 맞이해준 것을 보면 자신이 띠를 띠고 종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을 듭니다. 주인이 종을 받들어 시중을 든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을 너무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39). 당시 유대인의 서민들은 흙이나 흙벽돌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도둑이 흙벽을 뚫고 들어와 훔쳐갔습니다. 그런데 도둑은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도둑이 언제 올지 안다면 도둑을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 주인이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간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고 도둑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처럼 인자도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40). ‘인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 되심을 나타낼 때 쓰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삼하7:12-14, 1:26-28, 7:13-14). 예수님도 재림하실 텐데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2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고 했고, 베드로후서3: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4:2, 16:15). 베드로전서1: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고 했습니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 비유를 말씀하심이 자기들에게 하심인지 모든 사람에게 하심인지 물었습니다 (41). 22-53절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제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모든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도 모든 무리도 적용해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누구에게 한 말씀인지 쉽게 구분하기 힘들던 것 같고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제자들이나 무리들이나 다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셔서 대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했습니다 (42-44). ‘청지기’(οικονομος)는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진 자입니다. 그 직책을 가진 자는 자유인도 있고 종도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종으로 여겨집니다 (45, 24:45). 곧 종 가운데 청지기 직책을 가진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4: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마태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누가는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자의 덕목에 대해 마태는 충성과 지혜라고 했으나 누가는 지혜와 진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혜’(φρονιμος)는 슬기로움을 말하는바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충성진실은 모두 피스토스’(πιστος)를 번역한 단어인데 이는 신뢰할만함을 말하는바 맡은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4: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충성피스토스입니다. 모범적인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그 집의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양식’(σιτομετρον)은 곡식이나 고기 등의 배급량을 말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종들과 재산을 관리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임무 중 하나가 종들을 잘 보살피고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주인이 멀리 떠났을 때는 그런 책무가 더욱 막중합니다. 그래서 만일 주인이 멀리 떠나 있다가 돌아왔을 때 그가 그 책무를 잘한 것을 보게 되면 그에게 모든 소유를 맡길 것입니다. 더욱 신뢰하여 더 많은 것을 혹은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청지기 엘리에셀을 신뢰하여 후사로 삼으려 했고 (15:2), 보디발은 청지기 요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39: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5-46). 청지기인 종은 주인이 멀리 떠나 돌아올 때까지 재물을 잘 관리하고 종들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재물을 허비하고 종들을 괴롭히게 된다면, 생각지 않은 때에 주인이 돌아와 그 청지기 종에게 준엄한 형벌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청지기 역할을 잘 수행한 종이 받은 대우와는 전혀 반대입니다. 마태복음24:51에는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 심판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불충성하고 주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주인의 일을 망치고 주인의 집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했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종은 많이 맞고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행한 종은 적게 맞는 자는 말씀은 의식적인 죄와 무의식적인 죄에 대한 결과를 연상하게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청지기 비유 끝에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주인의 뜻을 아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주인이 모든 종 가운데 청지기로 세운 종은 주인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 세운 종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가진 권한을 주고 책임을 맡긴 것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었으니 그에 합당한 책임을 감당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맡은 청지기는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연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돌아올 때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재물을 관리하기는커녕 자기를 위해 쓰고 종들을 보살피기는커녕 못살게 괴롭혔다면 그만큼 많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셔서 이제 재림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된 자들에게 지상의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된 자들은 하나님 나라 일을 맡은 청지기 위치에 있는 자들로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 나라 일을 지혜를 가지고 충성되게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관리하고 사람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을 잘 보살피는 것은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도와 격려와 조언을 해 주되 영적 영식인 하나님 말씀을 시의 적절하게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잠언27:23"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양식이나 심리적인 양식보다 더 중한 영적인 양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은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벧전2:2). 도의 초보만아니라 좀 더 깊은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5:13-14). 과거에 가진 말씀뿐 아니라 시대와 환경에 맞는 새로운 말씀을 제시해야 합니다 (13:52). 객관적인 말씀만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환경에 맞는 적용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살전2:13). 그래서 영적인 성장과 신앙의 진보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1:12). 그 책임을 잘 감당할 때 예수님이 많은 상을 주시고 그렇지 않을 때는 준엄한 형벌을 내리십니다.

 

 

       6. 예수님이 오심으로 나타난 현상 (49-53)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그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49). 여기에서 51-53절의 내용을 볼 때 심판을 의미합니다 (Schlatter, Grasser).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 불이 붙기를 원하는데 그 불이 이미 붙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Plummer, Marshall).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자신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했습니다 (50). 여기에서 세례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10:38, 6:4). 예수님이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서 죽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것으로서 자신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것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마음의 압박이 심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목적으로 그 길을 향해 부단히 가고 있지만 그 일을 이루기까지 그 일을 생각하므로 그 고뇌가 말로 다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51). 마태복음10:34에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화평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예수님이 행한 표적과 예수님이 가르친 말씀은 그것을 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말씀을 깨달아 청종합니다. 반대로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부정하고 말씀을 거부하고 대적을 하는 부류입니다. 그 분리 현상이 바로 예수님이 행한 하나의 심판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같은 현상이 전체적으로도 군중에서도 일어나지만 작은 단위의 가정에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부터는 한 집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고 했습니다 (52-53). 마태복음10:35-36에도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한 가정의 구성원이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이 거듭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하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려는 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자가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분리와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자를 대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말씀대로 살려는 자는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로부터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0:21, 3:12).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가족과 불화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위치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처럼 핍박과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빌립보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4:22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이 말씀을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어떤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말씀을 양보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0:22에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추가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주의 제자들은 신앙과 불신앙. 진리와 비진리 어느 편에 설 건지 결단해야 하며 핍박과 고난이 와도 능히 믿음과 말씀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0:37-38에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4:12에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0:4에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7. 시대의 징조와 회개 촉구 (54-59)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이르시되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리라 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심히 더우리라 하니 과연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또 어찌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54-57). 청중이 제자들에서 무리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는 서쪽인 지중해 쪽에서 바람이 불면 습도를 머금은 바람이기 때문에 비가 오게 되고, 남쪽인 아라비아 광야 쪽에서 바람이 불면 뜨거운 바람이기 때문에 날이 덥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서쪽에서 바람이 불면 비가 오고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날이 더울 것을 예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시대에 대해서는 분간하지 못한다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낸 사실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 아는 것처럼 외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려 하지 않음을 책망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거짓된 바리새인들의 서기관(율법사)들이 가르쳐 준 것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가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관이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않고서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58-59).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어떤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채권자는 채무자를 법원에 고소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채무자는 법정에 서게 되고 옥졸에게 넘겨지고 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아야만 나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채무자는 법정에 서기 전에 빨리 채권자와 화해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빨리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빨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25-26에도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내용이 비슷한 것 같지만 문단의 흐름을 보면 조금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은 앞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마태복음5:23-24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불화했을 때 속히 화목하라는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님이 기회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양심의 가책이 있을 때, 섭리를 느낄 때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흑암에 들어가 그만큼 회복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結言>

  본장은 여러 내용들을 교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 담대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 재물 얻는 데에 몰입하지 말 것에 대해, 생활 문제를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주의 재림을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해, 핍박을 각오해야 할 것에 대해, 시대를 분별하고 회개해야 할 것에 대해 교훈했습니다. 모두 다른 주제로 말씀한 것 같지만 한마디로 분별력을 가지고 제자 된 바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