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13:1-35

<題目>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교훈

 

<序言>

  본장은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중 예루살렘에서 온 몇 명으로부터 재난에 관한 보고를 듣고 그에 따른 교훈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방과 온 유대 지방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을 촉구합니다. 내용구조는 빌라도 사건과 관련한 회개 촉구(1-5),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한 심판 경고(6-9), 안식일에 귀신들인 여인 치유(10-17), 겨자씨 비유(18-19), 누룩 비유(20-2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22-30),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31-35)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빌라도 사건과 관련한 회개 촉구 (1-5)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무리 가운데 있던 곧 예루살렘에서 온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아뢰었습니다 (1). 보고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유대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자주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I.H.Marshall) 로마제국에서는 그 지방 사람들을 경계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M.O.Tolbert).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 자주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잔혹하게 살해 했습니다. 어떤 때는 3,000명을 살해한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20,000명이나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Josephus). 그런데 이번 유월절에도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 그 같은 행동을 보였을 것이고 로마제국 총독 빌라도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압하면서 학살한 것입니다. 당시 그 사건을 접한 유대인들은 그 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온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시각으로 그들을 정죄한 것입니다 (4:7, 8:20, 22:4-5, 9:1-2).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식에 대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아니라’(ουχι, 우키)는 부정에 대한 강세형으로서 정말...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불의의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편견을 단호히 부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4). 예루살렘 동남쪽 성벽에 실로암’(Siloam)이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실로암은 성 밖의 기혼샘에서 성 내로 공급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 시설이었습니다. 제원은 약 길이는 17m, 폭은 5m, 깊이도 5m 정도 됩니다. 이 저수시설은 석조시설인데 서쪽은 부서져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는 물의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 못으로 들어오는 수로와 못을 축조하는 공사를 했습니다. 그 공사를 할 때 못 북쪽 수로위에 못을 지킬 수 있는 망대(tower)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만 공사 중에 그 망대가 무너져 공사를 하던 인부 18명이 치어 죽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18명이 죄 때문에 벌을 받아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인과응보의 시각이 있는데다가 당시 빌라도가 수로 공사를 할 때 성전에 드려진 헌금을 빼앗아 동사 재원으로 사용했는데 그 돈으로 인부들에게도 인금을 주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빌라도가 성전에 드려진 헌금으로 공사를 했기 때문에 그 공사에 참여해서도 안 되고 그 헌금으로 인부들에게 임금을 주었기 때문에 그 인부들은 그 임금을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참여하지 않아야 할 공사에 참여했고 받은 임금을 성전에 되돌려 주지도 않았습니다 (Ewald). 그런 연고로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정죄를 한 것입니다. 4절에 나온 ''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αμαρτια(하말티아)로 나와 있지 않고 οφειλητης(오페이레테스)로 나와 있습니다. 하말티아는 계명에서 벗어난 개념이 강조된 단어이지만 오페이레테스는 '빚진 자'의 의미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 강조된 단어입니다. 그들이 성전에 드릴 돈을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께 '빚진 자'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빌라도가 추진하는 공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망대를 무너지게 한 것으로 보았고 그 공사에 참여하여 헌금을 되돌려 주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그들로 그 망대에 치어 죽게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벌을 받은 것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시각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라‘(ουχι, 우키)고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사건과 예루살렘 18명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건에 대해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2,4).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3,5), 예수님은 당시 세대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이 죽은 것은 죽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요한이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님이 심판을 경고하는 메세지를 많이 전했지만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7-10, 11:17). 본 단원에 이어지는 6-9절에서 포도원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하려 했지만 예수님의 중보로 하나님이 심판을 유예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과 연결해서 보면 유대인들이 갈릴리 사람들 일부가 숙청당한 사건과 예루살렘 사람들 일부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건을 보고 모든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들을 자신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숙청당한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처럼 자신들도 동인한 죄인들로서 동일하게 심판받아 죽어야 할 자들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죄에서 돌이켜야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의 재난과 사고를 당한 사건들을 볼 때 어떤 시각과 태도를 가져야 할지 잘 알게 해 주는 교훈입니다. 재난과 사고를 당한 자들을 보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자신들은 그 같은 죄가 없는 자들임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인과응보의 시각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돌아보아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한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2.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한 심판 경고 (6-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나무를 심고 거기에 무화과나무도 심었습니다. 그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관리하는 포도원 지기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해인가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 나가 무화과 열매를 얻기 위해 열매가 맺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혀있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이번에는 맺혔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가보았는데 열매가 맺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망했겠지만 그 다음 해에 또다시 기대감을 가지고 나가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열매는 맺혀있지 않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참다못해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무화과가 열릴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3년 동안 한 번도 열매를 맺히는 것을 못 봤으니 잘라버리라는 한 것입니다. 괜히 땅만 허비했으니 베어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포도원 지기가 이런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금년 한 해만 그대로 두게 해 주시면 자신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나무 주변 땅을 파서 부드럽게 해주고 나무에 거름도 듬뿍 주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 때에도 무화과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 때 베어 버리도록 하겠고 했습니다. 과수원 주인은 그렇다면 한 해만 더 기다려볼 테니 그렇게 한번 해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6-9).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뿐 아니라 여러 과실나무들도 심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화과나무입니다 (왕하18:31, 4:4). 포도원 주인이 심어놓고 바로 그 해에 열매를 따기 위해 가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는 상식에서 열매가 맺혔을 것이라 생각되는 해부터 열매를 따기 위해 나가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 나가본 해부터 3년을 나가보았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무화과나무가 당연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라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무화과 열매를 얻기 위함인데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땅만 차지하고 있으니 더욱 그냥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땅에 다른 무화과나무를 심거나 다른 과일나무를 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한 해만 유예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주변 흙을 파서 부드럽게 해주고 거름을 주어서 양분을 충분히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때 찍어내시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하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비유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포도나무와 함께 무화과나무로 비유한 경우가 많습니다 (80:8-11, 5:2, 24:3, 9:10). ‘열매는 회개와 믿음을 비유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고 필요한 것을 주었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외식과 위선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과 예전 등을 자기들 욕망을 채우는데 이용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쳤고, 하나님이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쳤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신앙 인격의 성장이 없었습니다 (4:24, 3:10, 5:22-23, 삼상12:23, 20:19-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그냥 두는 것은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벧후3:8-9, 요일2:1, 8:26).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아주 상실하기 전에 인격적 사역적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무화과나무 비유는 일차적으로 공의의 측면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차적으로 사랑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자기 백성들에 대해 가지신 기대감과 인내를 나타낸 내용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지역에서 과일나무의 중요성을 본다면 포도나무에 비해 가치가 없는 나무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태우는 데에는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 화목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율법 해석서 미쉬나(Mishinah)에 보면 포도나무는 감람(올리브)나무와 함께 제물의 화목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생활필수품인 포도즙과 기름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에 비해 하찮은 나무로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포도나무를 심어야 할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뿐 아니라 여러 과실나무들도 심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화과나무입니다 (왕하18:31, 4:4). 본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도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고 거기에 다른 과수도 몇 그루 심으면서 무화과나무도 약간 심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본 비유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은 헬라어 성경에 단수로 되어 있고(Συκην-명목여단) 영어성경들에서도 단수로 번역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a fig tree). 그렇게 보면 무화과나무를 약간 심었거나 한 그루를 심은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 찾았고 열매가 맺히지 않았는데도 계속 열매를 찾았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무화과나무는 올해 심었다면 그 다음 해부터는 무화과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마도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고 그 다음 해에 열매를 찾지 않고 4년째에 찾았을 것입니다. 레위기19:23"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일나무를 심어 놓고 열매가 맺혔을지라도 3년 동안은 거두지 않고 4년째에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열매를 따기 위해 간 해는 적어도 4년째인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도 유대인으로서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인이 한 말을 보면 3년 동안을 열매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4년째에 처음 열매를 따기 위해 갔는데 없었고 그 4년째 되는 해부터 3년 동안을 더 열매를 따러 갔는데도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무화과나무는 6년 동안이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기간에 7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안식년이 끼어 있었다면 안식년에는 열매를 따지 않기 때문에 그 해에는 열매를 따러 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무려 7년 동안이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기25:4-5"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안식년에는 과수원 농사를 하지 않고 열매도 따지 않습니다. 만일 그 기간에 50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희년도 함께 끼어 있다면 무려 8년이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기25:11"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끼어 있었다면 8년 동안 열매가 없었던 것이고 안식년과 희년이 끼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6년 동안은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4년째에 가 봐서 열매가 안 맺혔다면 그 때 나무를 베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6년째까지 혹은 안식년이나 희년이 끼어 있었다면 그 이상이 되도록 계속 기대감을 가지고 가서 열매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치 없는 자들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객이나 과부나 고아에게도 기대감을 가지십니다. 무식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에게도 기대감을 가지십니다. 고린도전서1:26-28"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기대감에 못 미쳤을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 기대감을 가지고 열매를 맺힐 때까지 인내하십니다. 베드로후서3: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8-9절에 보면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을 때 포도원 지기는 포도원 주인에게 1년을 더 유예해 주시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1년을 더 노력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나무 주변 땅을 파고 거름을 더 주어서 열매를 다음 해에는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포도원 주인보다 과수원지기가 더 나무에 대해 잘 압니다. 주인은 과실을 딸 때나 포도원에 나가 보지만 포도원 지기는 매일 같이 포도원 일을 합니다. 과수재배의 전문가가 무화과나무가 6년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계속 배양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6년 동안 열매를 안 맺었는데 땅을 파고 거름을 더 준다고 해서 열매를 맺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면 당시 유대인들은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처음에는 비웃는 정도겠지만 뒤에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비유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폭소를 터뜨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반드시 배양의 노력을 하여 다음 해에는 열매가 맺히게 하겠다는 확신에 찬 대답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하여 기대감을 접으려 할 상황에서도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십니다. 요한일서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대언자에 대항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인데 변호자’ ‘옹호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어드보케이트’ (advocate)로 번역한 것입니다 (KJV, NASB).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어 성렴님으로 연약함을 돕습니다. 로마서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연약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찮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보면 오랫동안 전혀 가능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우리를 아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압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미친놈'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그들이 봐도 전혀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슨 기대감을 가지실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무슨 소망이 있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실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라고 한 포도원지기의 말의 감정적 의지를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비록 어려움은 있을지라도 아주 실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4:13).

 

 

       3. 안식일에 귀신들인 여인 치유 (10-17)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고 안수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0-13). ‘안식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때에 쉬신 것을 기념한 날이었습니다 (2:1-3).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도 안식을 주신다는 것을 바라며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날이었습니다. 율법에는 그 날에 종일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쉬게 했습니다 (20:8).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에 각 마을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율법을 배우며 신앙의 교제를 하며 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장소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회당은 어느 회당인지 자세히 알수 없으나 베뢰아에 있는 회당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Hendricksen, Lenski).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 그 여자가 이미 와서 말씀을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중에 그 여자가 회당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그 여자는 혼자서는 머리를 들거나 일어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오늘날 의학 용어로 말하면 척추교착염과 유사합니다 (Marshall). 그 여자는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그렇게 앓은 여자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앓았다는 것은 당시 약이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여자가 그런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귀신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여자는 귀신의 역사로 병이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의 요청이 없었으나 자의적으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의 준비된 믿음을 보신 것인지 아니면 그 비참함에 대한 연민을 느끼신 것인지 하여간 병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시고 안수하시므로 고쳐주셨습니다. ‘안수는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안수는 수여자의 능력을 피수여자에게 적용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병을 고쳐주시자 여자는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자는 곧 꼬부라진 몸을 곧게 펴고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영광을 돌리는지라에 해당하는 에독사젠’(εδοξαζεν)3인칭 단수 미완료 능동태로서 그녀가 계속 영광을 돌리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말입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예수님이 허리 꼬부라진 여자를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입니다. 그것을 본 회당장이 분 내어 무리에게 일렀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고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4). ‘회당장은 회당의 최고책임자로서 회당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자입니다. 회당장은 마땅히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받던 여자가 치유된 일에 대해 기뻐하며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노동을 금한 율법을 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해 정죄하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정죄했습니다. 직접적으로 정죄하지는 못하고 모인 무리를 향해 안식일에는 병 고치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모든 일을 관장하는 그가 자기의 허락 없이 능력을 행한 것에 대한 분노와 시기와 열등감이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면서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모든 반대하던 자들이 부끄러워 하고 온 무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습니다 (15-17). ‘외식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 해석서인 미쉬나(Mishinah)의 규정에 보면 안식일에도 짐을 싣지 않는 한 짐승을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있고 여행 제한을 어기지 않는 한 가축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미쉬나를 기록한 랍비들도 안식일에도 가축이 마구에 매여 고통을 받게 할 것이 아니라 풀어서 물과 먹이를 먹게 해야 한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질병으로 고통당한 여인을 사탄과 질병에서 풀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으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안식일이라도 그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안식일에 더욱 그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안식을 주는 날이고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사탄과 질병에 매여 고통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아 자유하게 된 것은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5). 예수님이 그런 말씀으로 변증을 하자 반대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무리들이 기뻐했습니다. 회당장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진리 지식이 없음이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소극적인 규례에 갇혀있기 보다는 적극적인 규례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제시해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4. 겨자씨 비유 (18-19)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겨자씨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고 했습니다 (18-19). 마태복음13:31-32에는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4:30-32에는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η βασλεια του θεου)는 지상에 이루어지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므로 그를 믿는 자는 죄와 죽음과 내세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대속해주신 사실을 믿는 자는 죄 용서를 얻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천국에 가는 보장을 얻게 됩니다. 어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나라가 그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며 거듭난 사람들이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그 공동체들이 연합하면 더욱 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하나님 말씀이 지배원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농부)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했습니다. 농부가 밭에 꼭 겨자씨 1알만을 심었다는 말이 아니라 밭에 겨자씨들을 파종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겨자'(σιναπι, mustard)는 채소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겨자씨를 뿌리면 싹이 난 후 파란 잎이 나오는데 그 잎은 야채처럼 식재료용으로 사용합니다. 잎들 가운데로 줄기가 나오는데 그 줄기는 다 자라면 1-2m정도 됩니다. 그 줄기 끝에는 노란색 꽃이 피고 이어서 갈색을 띤 씨가 맺히게 되는데 그 씨는 양념으로도 사용하고 약재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무씨나 유채씨처럼 생겼습니다. 당시 유대지방에서는 그 겨자씨를 가장 작은 씨로 여겼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농가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주 본 담배씨는 훨씬 더 작았습니다. 서양란의 일종인 에비비딕란과 우란은 그 씨가 얼마나 작은지 1개의 포자에 700만개의 씨가 들어있는데 그 씨가 110만개가 모여야 겨우 1g이 된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겨자씨는 상당히 큰 씨에 속하지만 당시 유대지방에서 육안으로 볼 때 가장 작은 씨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작은 씨에 대한 대표적인 씨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작은 것을 비유할 때 겨자씨만큼 작은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Buxtorf). 실제로 그들의 속담 가운데는 겨자씨만큼이나 작다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Robertson).

 

  그런데 그 겨자가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겨자가 자란 후에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 해당하는 락사논’(λαχανον)채소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채소에 속하는 겨자가 기껏해야 1-2m자라는데 그것을 나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과 오늘날 우리와 관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풀(채소)과 나무에 대한 정의가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지면에서 싹이 나와 곧바로 잎이 펼쳐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면에서 줄기가 나와 계속 자라면서 그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고 또 그 가지에서 잎이 생기면 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겨자는 지면에서 줄기가 나와 자라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고 가지들에서 잎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겨자가 나무였던 것입니다. 또한 겨자가 기껏해야 1-2m자라는데 거기에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겨자는 군집식물로서 들에 자연적으로 나는 겨자들도 군집을 이룹니다. 더욱이 밭에 농사를 위해 겨자를 재배했다면 겨자가 더욱 우거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겨자 줄기와 가지들 사이로 작은 새들이 드나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겨자 나무 사이에 새들이 깃들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 비유에서 '농부'(사람)는 하나님을, ''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는 복음을, '공중의 새'는 만민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31:6과 단4:12). 비유의 핵심은 겨자씨에 있습니다.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福音)은 한자의 의미로 보면 복된 소식이라는 뜻이지만 히브리어 뻬소라’(בשורה)와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인류가 원죄로 인하여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 고난 가운데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갈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죄와 죽음과 지옥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그 죄를 대속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그가 부활하시므로 그 대속의 효과가 이루어졌다는 확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거듭나게 되고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특징은 가장 작은 씨이지만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성장과 확장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변화하여 성장하고 그들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생기고 그 공동체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연합된 신앙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복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해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되어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사도행전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복음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으며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와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당시 로마에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요한복음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보다 큰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시대적으로 더욱 확장된 사역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농부는 겨자씨를 뿌릴 때 그 결과를 내다보고 뿌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내다보고 복음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시기로 계획하실 때부터 그 상황을 내다보시고 실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과 논리와 이해와 납득과 수용을 뛰어 넘어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행하실 일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이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성장하여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세계 선교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불가능하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11:1). 우리 개인도 실력이나 환경을 볼 때 전혀 쓰임 받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복음이 내재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있을 것이고 크고 놀라운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17:20, 17:6).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5. 누룩 비유 (20-21)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예수님은 누룩비유를 들었습니다. 누룩비유는 마태복음13:33에도 나옵니다. 본절에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하 누룩과 같다고 했습니다. 한 가정의 여자가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먹을 빵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면서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밀가루 반죽 전체가 발효되어 부풀게 했다는 것입니다. ‘누룩’(ζυμη)은 빵을 구울 때 사용하는 발효 효소(효모)를 말합니다 (leaven, yeast, baking powder). 빵을 반죽할 때 이 누룩을 넣어 구우면 빵이 부풀어 먹을 때 부드럽고 맛이 좋습니다. ‘여자는 복음전도자를, ‘가루는 사람들을, ‘누룩은 복음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누룩이 성경에서는 자주 죄성, 욕망, 외식, 잘못된 교훈 등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6:6-12, 8:15, 12:1, 고전5:6-8, 5:9). 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복음을 비유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누룩비유는 복음의 변화력에 대해 나타내려는 비유입니다. 앞선 겨자씨비유가 복음의 확장성에 대해 나타내려는 비유라면 누룩비유는 복음의 변화력에 대해 나타내려는 비유입니다. 곧 겨자씨 비유가 복음의 외적 확장을 나타내는 비유이고 누룩비유는 복음의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비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니 가루 서 말 전체를 발효시켜 가루 서 말 전체를 부풀게 했다고 했습니다. ‘서 말3말을 말합니다. ''()은 곡식이나 가루를 되는 그릇인데 그 양은 18로서 '3'54입니다. ‘3‘3사톤’(σατον)로서 헬라어 ‘3사톤은 히브리어로 ‘3스아인데 ‘3스아‘1에바입니다 (18:6, 6:19). '1에바'10오멜에 해당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를 거둘 때 1사람당 1오멜씩 거둔 것을 보면 '1에바'는 하루에 10명이 먹을 수 있는 양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16, 36). 서 말10명의 가족이 1일 먹을 양입니다. 당시 10명의 대가족이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는 양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밀가루 서 말이 발효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양이 모두 발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가면 그 사람 인격 전체가 변화됩니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변화됩니다. 이해와 판단과 결정이 달라집니다. 목적과 가치와 방식이 달라집니다. 부정적인데서 긍정적으로, 물질적인데서 영적으로, 자기중심에서 공동체로, 세속적인데서 하나님 나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공동체도 변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내적 변화가 생깁니다.

 

  가루 3말에 누룩을 넣어 가루 3말 전체가 금방 발효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누룩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효소들처럼 조금만 넣어도 금방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난 뒤에 빵 부스러기를 햇빛에 말려 그것을 간 후에 가루로 보관해 두면 누룩이 됩니다. 다시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반죽할 때 그 누룩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두어야 밀가루 전체가 발효되어 부풀었습니다. 율법 적용에 대한 구전이 기록되어 있는 미쉬나(Mishnah)에 보면 누룩을 넣어 반죽이 발효되는 시간에 대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왕복하면 누룩이 발효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는 왕복 3~4일 거리였습니다. 즉 누룩이 발효가 되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한 말입니다. 그것이 누룩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인격의 변화는 단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한 기다림이 요구되는 기간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은 절대 변화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어버립니다. 자신이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것 같을지라도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에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에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도구로 역사하시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인내를 요구하는 기간일지라도 반드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데 대해 절망감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로마서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살면 변화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안 된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의지를 가지게 하여 역사하십니다. ‘소원을에 해당하는 기본형 델로’(θελω)원하다’ ‘선택하다’ ‘결정하다등의 뜻입니다. 변화를 기대하고 추구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변화되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6.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22-30)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이 각 성과 각 마을로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9:51). 어떤 사람이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물었습니다 (22-23).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 가운데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었고, 반면에 유대인들 가운데 소수의 극악한 죄인들만 제외하는 대대분의 유대인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자는 유대인의 소수만 구원을 받을지 아니면 대부분이 구원을 받을지를 물은 것일 것입니다. 어쩌면 유대인만 구원을 받을지 아니면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지를 묻는 의미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했습니다 (24). 예수님은 질문자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자는 구원받는 자의 수가 많을 것인지 적을 것인지에 대해 물었으나 예수님은 돌려서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그 수가 적을 것임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22:14, 8:31-47). ‘좁은 문은 구원의 문이 좁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쓰다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고니조마이’(αγωνιζομαι)싸우다’ ‘투쟁하다입니다. 좁은 문은 그런 자세로 고투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구원자(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내적 전투에 있어서 그만큼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여 열어 주소서하면 집 주인이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고 할 것이나 집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5-27). ‘집 주인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말이고,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자는 좁은 문 곧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자를 비유한 말입니다. 좁은 구원의 문이 닫힌 다음에는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자들이 아무리 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예수님은 외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 밖에서 거절당한 자들은 예수님과 식사 교제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점을 들어 예수님이 문을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22에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사역에 동참한 점을 들어 예수님의 호의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행악’(αδικια)은 불의를 의미하는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함께 하는 행위를 의미할 것입니다. 마태복음7:23에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불법’(ανομια)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의로 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역을 하는 자들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은 선민의 조상과 대표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조상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것이고 자기들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지라도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혈통적인 선민이라는 이유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 기대를 완전히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29-30).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대인들은 참여하지 못하고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8:11-12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는 것은 먼저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유대인 모두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유대인 중에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고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받는 자가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현세적 하나님 나라도 포함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31-35)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31). 일단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헤롯 왕의 음모를 알려주면서 헤롯 왕의 영역을 떠날 것을 권고했습니다. 헤롯 왕이 다스리는 영역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전에도 세례 요한을 죽인 적이 있었습니다 (14:1-12). 헤롯 왕은 자신의 관할 지역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회적 불안 요소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악의를 가지고 헤롯 왕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예수님이 그 지역을 떠나기를 촉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하라고 했습니다 (32-33). 예수님은 헤롯 왕을 여우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서 간교와 교활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을 정직한 위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술수가 능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헤롯의 간교한 술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은 사역을 하다가 제 3일에는 완전해지리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현재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를, ‘3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대속을 이룰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예루살렘에 가기까지는 사역을 계속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대속을 이루고 나면 사역을 완전히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대속을 이루기까지는 계속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는 말은 헤롯 왕이든 바리새인들이든 간에 하나님이 정한 사역을 마치기 전에는 죽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34). 자신이 죽임을 당할 예루살렘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통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본적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며 포괄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선지자들을 살해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삼상30:6, 왕상12:18, 18:4,13, 19:10, 21:10-15, 9:26, 23:13-36).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거역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구원사역도 거부했습니다 (11:15).

 

  예수님은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35). ‘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합니다. 곧 예루살렘 성전이 황폐화되고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체가 황폐화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거절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종국에는 버릴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12:7, 22:5).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예수님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 (Godet, Faner, Marshall). 예수님이 대속 사역을 이루신 후부터는 재림하실 때까지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자신들의 잘못을 통절히 깨닫는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結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대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다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혈통과 상관없이 그의 대속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심한을 하실 때에는 아무리 예수님의 대속을 믿어 구원을 받으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 속히 자신의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