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14:1-35

<題目> 제자도에 관한 교훈

 

<序言>

  본 장부터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유월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중 좇는 무리에게 제자도를 구체적으로 교훈하기 시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기 시작할 때(9:51) 무리에게 헌신을 요구한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내용구조는 수종병자 치유(1-6), 손님과 주인에 대한 교훈(7-14), 큰 잔치 비유(15-24), 제자도의 대가(25-35)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수종병자 치유 (1-6)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을 잡수시러 들어가니 그들이 엿보고 있었습니다 (1). 바리새인 가운데 지도급에 속한 한 인물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고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한 것입니다. 이 식사는 안식일에 회당 의식이 끝난 후에 가지는 식사였습니다. 당시 안식일에는 회당 의식이 끝난 후 가장 큰 식사를 했으며 그 때에는 손님을 대접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의무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 가운데 지도층에 속한 한 사람의 집에 갔을 때 다른 바리새인들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을 발견하기 위해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2). ‘수종병’(水腫病)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 기관을 싸고 있는 막에 물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에 병이 들었을 때 발생합니다 (R.H.Pousma).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오르며 손과 팔과 다리 등이 크게 부어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이 있게 됩니다. 당시 랍비들은 이 병에 대해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여겼으며 죄에 대한 저주로 인해 생긴 병이라 생각했습니다 (5:11-28). 이 병자가 바리새인의 지도층에 속한 한 사람 집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음식을 먹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예수님께 병을 고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바리새인들은 고침받기를 열망하는 수종병 환자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는지 보면서 책잡으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었으나 그들이 잠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고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3-6). ‘율법교사는 모세 율법과 구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공적인 직책을 가진 자입니다. ‘바리새인은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율법에 위배되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율법 지식에 의하면 당연히 옳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에 고쳐주면 안 된다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14). 하지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병을 고치려한다는 의도를 알고 율법을 범한 것을 지켜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어 주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미쉬나(Mishnah)에 엄격한 규정은 구덩이에 꼴만 넣어주도록 되어있으나 온건한 규정은 구덩이에서 짐승을 구해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에는 온건한 규정이 일반적으로 채택되는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건지는 것이 허용되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를 들어 안식일에라도 고통 가운데 있는 수종병 환자를 고쳐 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논리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앞에서의 침묵과는 달리 이번 침묵은 그들이 예수님의 논리를 반박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도 안식일 논쟁이 있었습니다 (6:1-11, 13:10-17). 안식일 논쟁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무지와 무력함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에도 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면 예배 후에 물질의 고통을 당한 사람을 돕거나 질병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나 심리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나 영적으로 고통을 당한 사람을 돕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주일에는 소극적으로 규례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역을 위해 주일에는 우리 자신부터 주님으로부터 말씀과 성령으로 은혜를 받아 안식을 누리고 영적으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2. 손님과 주인에 대한 교훈 (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7). 바리새인 중 지도급에 속한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을 때 예수님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석에 앉고자 하는 경쟁이 보이지 않게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식상에 앉는 순서가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Marshall). 당시 유대인들의 음식상은 U자 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높은 자리는 3면 중 안쪽 가운데였으며 그 다음으로 높은 자리는 그 좌우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랬듯이 이 식사 자리에서도 서로 안쪽에 있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의도는 예수님께 거슬렸을 것입니다. 음식 교제는 모든 사람이 서로 위해주며 즐거워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들이 높은 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을 보고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이에 앉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았을 경우 그를 청한 자가 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청함을 받았을 때 끝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청한 자가 와서 벗이여 올라 앉으라할 것이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했습니다 (8-11). 예수님은 각별한 격식이 요구되는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를 예로 들어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여겨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에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니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25:6-7). 차라리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않으면 뒤에 사람들을 청한 주인이 보고 높은 자리로 앉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했습니다. 높아지려 하면 사람들에게 경멸을 당하고 낮아지려 하면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이 존경을 받게 되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5:5-6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를 청한 자에게 말했습니다.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한다고 했습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복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2-14). ‘점심’(αριστον)은 늦은 아침에 먹는 식사를 말하고 저녁’(δειπνον)은 늦은 오후에 먹는 식사를 말합니다. 식사 때에 친하거나 부요한 사람들을 청하면 그들은 보답할 능력이 있으므로 다시 청해주는 것으로 보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들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청하면 그들은 보답한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능력 있는 사람은 무시하고 능력 없는 사람을 대접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고 하나님이 그 마음과 행동을 아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5:29, 24:15). 우리는 하나님께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 그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눈다는 행복감이 말로 다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3. 큰 잔치 비유 (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 가운데 지도층에 속해 있는 한 사람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수종병 들린 자를 고치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그 때 함께 먹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15).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이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인데 그 잔치에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말을 한 사람은 유대인 중에서도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은 마땅히 하나님이 베푸실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 확신하여 이 말을 한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했습니다. 잔치할 시각에 종을 그 청했던 자들에게 보내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했습니다. 그런데 다 일치하게 사양했습니다. 한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고 하고, 한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고 하고, 한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종이 집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주인은 노하여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종이 그대로 한 후 주인에게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종에게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16-23).

 

  유대인들의 풍습은 잔치를 여는 사람이 사전에 날짜를 정한 다음에 초청할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참석여부를 묻습니다. 그 때 불가피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결례였습니다. 그래서 종을 통해 참석할 자의 수를 파악하고 그 수효에 맞추어 잔치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잔치 준비가 다 되면 다시 종을 보내어 청한 사람을 데리고 오게 합니다. 그 때에 거부하는 것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에서는 한결 같이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사서 나가봐야 하기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소 5겨리를 사서 시험해야 하기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밭을 돌아보는 일이나 소를 시험하는 일이나 아내를 즐겁게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초청을 거부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초대를 거부한 것은 초대하는 사람과의 상호간 인격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깨뜨리는 행위였습니다. 주인은 종으로부터 초청 대상자들이 거부했다는 보고를 듣고 노했습니다. 그리고는 빨리 성읍 안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시내로 어디든 가서 사회적 지위가 없고 육체적 건강이 없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도 잔치에 초대하지 않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데려와도 자리가 비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성 밖의 길이나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산울타리 가는 가난한 여행객이나 거지같은 사람들이 야영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 무가치한 자들을 간곡하게 끈질기게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강권하여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나그카조’(αναγκαζω)필요로 하다’ ‘억지로 하게 하다’ ‘강제하다의 뜻으로서, 필요성을 강력하게 설득하여 거의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의미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은 선지자들을, ‘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는 구원을,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은 유대인 바리새인들을, ‘성 내의 시내 거리와 골목에 있는 가난한 자나 병든 사람들은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성 밖의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베풀 하나님 나라로 유대인들을 초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은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 가운데서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무시하는 자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이방인들까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의 특권적 사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민족적으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그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그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택하여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의 방법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비록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이방나라처럼 세속적인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초청을 받고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1:2-5). 그러자 하나님은 종들을 통해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소외당한 그룹들, 마음에 큰 상처와 분노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당시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기는 하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철저히 소외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곤고함을 자각하고 하나님이 마련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초청에 응했습니다. 하나님은 소외당한 자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 나라를 채우려는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4:18-19, 고전1:27-28). 하나님은 소외당한 자들을 청했으나 자리가 아직 비어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종들을 통해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된 이방인들을 청했습니다 (2:12-13).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 초청에서 제외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데려오기를 원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라도 데려와서 구원을 받게 하려는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 끝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24). 본 절은 앞에서 이야기한 비유에 대한 결론적 적용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본 절에는 한글 성경에 직역되지 않은 헬라어 가르’(γαρ, 왜냐하면...때문에)가 빠져 있습니다. ‘가르의 의미를 살리면 본 절의 말씀은 앞에 이야기에서 집 주인이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한 이유를 나타내는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는 비유를 듣게 된 최초의 청중인 바리새인들에게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는 유대인은 개인적으로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유대인이 가진 선민의식에 대한 확신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경고로 봄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가진 신학과 전통 때문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엄중한 경고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계시와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부여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들을 오히려 자기들의 육욕을 채우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때 그들은 종교적 혜택으로 욕망을 채우느라 예수님의 구원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 자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구원 초청을 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은혜를 받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율법의 규정을 따른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들이라는 통념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서 제외된 자들로 간주되었고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 구조에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자들로서 어떤 소망도 없이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상처와 울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그들을 예수 믿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들고 죄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을 부르십니까? 고린도전서1:27-29에 보면 하나님이 물질적 육체적 세상적으로 온전한 자들을 부르지 않고 연약한 자들을 부르셨는데 그것은 그것들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부요하고 건강하고 권세 있고 지혜 있고 능력 있고 온전한 자들은 다른 대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자신들이 잘나고 자신들이 노력해서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들이 영광을 얻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신 일이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하고 무능하고 불완전한 자들은 자신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불러 구원하고 은혜 베푸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2: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온갖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무지한 자, 무능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4. 제자도의 대가 (25-35)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갈 때 예수님이 돌이켜 말씀하셨습니다 (25). 예수님은 바리새인 가운데 지도층에 속한 한 사람의 집에서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로 알고 따르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할 것을 기대하고 그에 따른 유익을 얻기 위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시점에서 그들의 잘못된 기대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고 그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자기에게 오는 자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자기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고,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도 자기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26-27). 마태복음10:37-38에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올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보다 세속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향한 것이어야지 자신의 육신적 이익을 행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십자가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마땅히 고난이 따를 텐데 그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딤후3:12).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8-30). ‘망대는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세운 건물로서 성벽에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망대는 농장 건물을 뜻한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Marshall). 어쨌든 건물을 지으려 할 때는 상당한 기간과 비용이 소용됩니다. 그에 따른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각오도 필요하고 기간도 넉넉히 두어야 하고 인부도 확보되어야 하고 자재 도달도 확보되어야 하고 재원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축을 시작하면 도중에 중단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각오와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그릇된 욕망을 가지고 따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모든 욕망을 버리고 고난과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 먼저 앉아 1만 명으로써 2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 까 헤아리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1-32). 전쟁을 할 때는 적의 군사 수나 전투 능력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군보다 적군이 수나 능력에 있어서 배나 강한 데도 싸우다가는 모두 전사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아군 보다 적군이 배나 많아서 이길 가능성이 많으면 아예 회친을 청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정확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하는 예증입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예수님 자신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3). 28-32절의 두 예증에 대한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세상적인 성공이나 육신적인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는 길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뜻을 이루는 길이지 세상적으로 성공하거나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냐고 했습니다.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린다고 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고 했습니다 (34-35). 마태복음5:13에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9:50). 소금은 성전 제사에도 사용되고 (30:35, 2:13, 43:24) 소독용이나 방부제로도 사용되었지만 (16:4), 무엇보다도 음식의 맛을 내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맛 잃은 소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소금은 바닷물을 정제한 소금이므로 맛을 잃은 소금도 없고 길 가에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역은 다릅니다. 유대 남쪽에 소금 바다라는 의미로 '염해'(鹽海)라고 하기도 하고 죽은 바다라는 의미로 사해'(死海)라고 불리는 바다가 있습니다.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호수인데 남북의 길이가 80km나 되는 넓은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다라고 합니다. 그 지역은 구약시대에 소알과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성읍이 있던 지역이었는데 지층이 갈라지고 화산이 폭발한 지역입니다. 그 재앙이 끝난 다음에는 그 지역이 내려앉아 해발 -400m나 낮아졌고 그 곳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된 것입니다. 그 남쪽에는 거대한 소금 덩어리로 된 소금 산이 있는데 그 소금 산 밑으로는 지하 7-8km까지 거대한 소금 광산이 있습니다. 사방이 막혀 있어서 물이 계속 증발되는데다가 소금산과 소금광산이 녹아 소금의 농도가 33%나 되었습니다. 보통 바닷물의 소금 농도가 3.7%이니까 그에 비하여 9배나 됩니다. 소금이 더 이상 녹을 수 없는 포화상태입니다. 소금 끼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물에 들어가 누우면 둥둥 뜰 정도입니다. 그래서 생물이 전혀 살 수 없어서 아무 생물도 살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에서는 우리같이 정제된 소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해 남쪽에 있는 산에서 캔 소금 돌(鹽石)을 시장에서 사다가 소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금 돌은 산에서 캔 것이기 때문에 나트륨(Nacl)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그 소금 돌을 사다가 밤새도록 물에 담가 두었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소금만 우려 나와 소금물이 되었는데 그 소금물로 음식을 요리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 소금 돌이 며칠 지나면 소금 성분이 완전히 다 빠져 나와서 짠 맛이 전혀 없는 돌 덩어리만 남게 되었는데 그 돌은 밖에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가 과거에 조개껍질이나 연탄재를 길에 버리면 사람들이 밟고 다니듯이 사람들이 밟고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돌을 지붕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 지붕은 평평했는데 그 지붕의 흙 위에 그것을 뿌렸습니다. 그러면 지붕의 흙이 단단해지고 지붕에 샐 수 있는 구멍들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당시 지붕은 사람들이 기도도 하고 모여 이야기도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곳에서도 그 소금 성분이 빠진 돌들이 여전히 밟히게 됩니다. 그것이 맛 잃은 소금인 것입니다. 그 소금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땅에 뿌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름으로도 쓰지 않습니다.

 

  앞의 내용의 흐름으로 볼 때 맛 잃은 소금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적이 아니라 세상적 성공과 육신적 욕망과 물질적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편안할 것만 기대하고 포기와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각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소금이 될 수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結言>

  35절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이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가 되어야 할지 예증을 통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말씀을 들었으니 그 말씀을 잘 깨달아 그 말씀에 맞게 결단해야 할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자도를 깨닫는데 그치지 않고 제자도를 행하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