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15:1-32

<題目> 죄인에 대한 심정 제시

 

<序言>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회적으로 소외시킨 자들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그와 관련한 3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죄인들에 대해 가진 심정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님이 죄인들과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는 종말론적 잔치를 계시한 비유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죄인들과의 식사교제(1-2), 잃은 양 비유(3-7), 잃은 드라크마 비유(8-10), 잃은 아들 비유(11-32)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죄인들과의 식사교제 (1-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1).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이 싫어하는 부류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율법 해석이나 유전들을 근거로 수많은 의무조항과 금지사항을 만들었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자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이 죄인으로 지칭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이지 못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으며 (간음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속이는 자 등), 명예롭지 못한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2).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의 지도자들로서, 조상들의 율법해석이나 유전을 근거로 의무조항들과 금지사항들을 만들어 그것을 따르도록 하는데 주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수군거려에 해당하는 기본형 디아공귀조’(διαγογγζω)는 불평하다는 의미로서 시제가 미완료인 것으로 보아 계속해서 불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단순히 그들이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영접하여 대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으로 칭하며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 자기들이 만든 율법적 조항을 어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을 추종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잃은 양 비유 (3-7)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할 때 그에 대해 정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동을 보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잃어버린 양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18:12-14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1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1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주인은 양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그 1마리를 찾아다녔습니다. 잃었던 양 1마리를 찾게 되자 즐거워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잃은 양을 찾았으니 함께 즐기자고 했습니다 (4-6).

 

  ‘어떤 사람은 목장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양 100마리를 길렀습니다. 당시 목축은 300마리 정도는 되어야 큰 규모였고 100마리 정도는 소규모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본문의 목장 주인은 소규모 목축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동들을 두지도 않고 자신이 직접 목자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는 양을 경제적인 재산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자식처럼 키운 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지역의 목초지는 팔레스틴 남북을 잇는 중앙고원 지대로서 해발 500m되는 고지대였습니다. 목자들은 양을 그런 높은 산이나 들의 목초지에서 풀을 먹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목자는 양 떼를 우리로 몰아넣게 되는데 그때는 막대기 아래로 들어가게 하면서 수를 양의 수를 세었습니다. 양떼가 소규모인 경우 그 이름까지 지어서 부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10:3). 그때 만일 양이 1마리라도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특성을 잘 압니다. 양은 심한 근시이기 때문에 무리에게서 떨어지기 쉽고 무리에서 조금만 떨어져있어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잠시라도 보살핌이 없으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압니다. 잃은 양을 그대로 두면 길을 헤매다가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고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 양이 얼마나 목마르며 배고프며 지치며 부르짖을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우리(fold)99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1마리를 찾기 위해 나설 것입니다. 우리에 둔 99마리는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99마리는 안전한 곳에 있으니 홀로 죽음의 위험 가운데 처해 있을지도 모르는 그 1마리를 찾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전한 99마리보다 잃은 1마리에게 더 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식보다 병약한 자식을 더 보살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자는 자신이 힘들 것을 전혀 생각지 않고 그 1마리를 찾을 때까지 온 지역을 찾아다닐 것입니다 (10:11). 그러다 만일 그 양을 발견하게 되면 너무 기뻐할 것입니다. 양의 더러워졌음직한 상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돌아올 것입니다. 자기의 수고와 희생을 생각지 않고 양을 찾았다는 자체로 즐거워할 것입니다. 아마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싶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자기의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공동체와 나누기 위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즐기자고 했을 것입니다. 기쁨을 함께 걱정했던 친구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베풀 것입니다. 그 목자가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타내는 행동인 것입니다.

 

  목자는 예수님을 염두에 둔 인물입니다여기에서 어떤 사람으로 소개된 목장 주인 혹은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둔 설정 인물입니다. ‘양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그 중에 잃어버린 1마리 양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돌아오지 못한 죄인을 상징합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눌 때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계속 불평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말입니다. 그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이 부정하게 생각하여 함께 음식도 먹지 않는 범죄자(간음하는 자, 도둑질한 자, 속이는 자 등)나 천한 직업을 가진 자(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들로서 당시 유대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불평하는 것을 보고 본문의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목자가 잃은 양 1마리를 찾고 그 양을 찾았을 때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단절된 자들이라 생각하여 그들을 거부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9:13“~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17, 5:32). 누가복음19:10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목자의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7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는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완곡어법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을 얻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1사람을 얻는 것을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여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비난을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염두에 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라 생각하던 자들입니다. ‘죄인은 예수님이 영접하여 음식을 같이 먹은 자들을 염두에 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죄인이라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보다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면서 회개하는 자들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18:14에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자는 가장 미약한 자에 대해 사용한 말일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선택한 자로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따르는 자들 중 신앙적으로 가장 연약한 자를 암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여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므로 구원을 얻게 된 자가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 대해 가진 심정이 어떠하며 자기 자녀가 멸망 길로 갈 때에 그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 분인지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입니다. 길 잃은 1마리 양은 풀을 뜯다가 무리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고 발을 헛딛어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리지르며 발부둥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몸을 다쳐서 움직일 수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날이 저물어가면서 춥고 배고프고 아팠을 것입니다.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가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자가 찾아와 구해주길 간절히 소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정죄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죄인들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바리새인들로부터 죄인이라는 정죄를 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그룹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신분이나 신체나 직업적인 것 등으로 인하여 정죄받고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 그가 위로해줄 줄 알고 그에게 나아가 말씀을 들으려했을 때도 바리새인들로부터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 때도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건강이나 생업 등의 어려운 상황으로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없는 무능력함에 좌절합니다. 이젠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위로해주시는 분입니다. 이사야49:15-16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3. 잃은 드라크마 비유 (8-10)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이 잃은 양 비유에 이어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0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10드라크마 가운데 1드라크마를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마침내 그 잃어버린 1드라크마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느니 함께 즐기자고 했습니다 (8-9).

 

  어떤 여자가 가지고 있었던 드라크마’(Drachma)는 헬라 화폐단위의 은전입니다. 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단위 데나리온(Denarius)과 같은 가치입니다. 1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20:1-2). 그렇기 때문에 10드라크마는 10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가 10일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합니다. 본문의 여자가 가지고 있었던 10드라크마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남편으로부터 받은 결혼예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결혼풍습 가운데 남자가 여자에게 10개의 은전을 결혼예물로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결혼식 전에 10개의 은전을 줄에 꿰어서 가지고 있다가 결혼식 때 여자에게 예물로 주었습니다. 그 예물은 단순히 돈의 금액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주는 것이라는 점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 꿰어진 10개의 은전을 받으면 남편에 대한 존경의 표시와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잘 보관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머리에 장식으로 하고 다니기도 했고 집에서 잠을 잘 때도 그것을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혹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없애버리면 남편에 대한 거부로 여겨져 파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전을 하나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은전 꿰미가 훼손되어 그 은전 꿰미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에 그 잃어버린 은전을 애타게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집은 대개 창문이 없거나 있더라도 환기를 위해 만든 조그마한 창문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집안이 어두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 바닥이 돌이나 진흙이 깔려 있어서 한기나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짚을 깔아두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하나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빗자루로 온 집안 바닥을 쓸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잃어버린 하나를 찾게 되면 말로 다할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10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로 함께 걱정해주었던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잃어버렸던 하나를 다시 찾게 되었다고 말하므로 함께 음식을 나누며 함께 즐거워 할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염두에 둔 인물입니다. 본문에서 어떤 여자는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둔 설정 인물입니다. 1-2절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눌 때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계속 불평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라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규정한 부정한 곤충과 짐승과 사람에 대한 오해로 거기에서 규정한 곤충과 짐승과 사람을 실제로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확대되어 죄를 지은 사람이나 (간음하는 자, 도둑질한 자, 속이는 자 등) 병든 사람이나 (문둥병자, 유출병자, 앉은뱅이, 절름발이, 곱추 등)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는 인사나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이 그들을 영접하여 함께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강한 불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잃은 양 비유를 들고 이어서 잃은 드라크마비유를 들었습니다. 물론 다음에 잃은 아들비유를 하나 더 들게 됩니다.

 

  그런 점을 보면 예수님이 잃은 드라크마 비유를 든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죄인들을 찾으시는 분이고 그런 자를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쁜지를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거부하는 소외당한 그룹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1드라크마를 잃은 여자가 그것을 찾는 것처럼 간절히 찾으시고 그들이 나아올 때 심히 기뻐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19:10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38-39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잃은 드라크마 이야기를 하고 나서 1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자(使者)에 해당하는 앙켈로스’(αγγελος)천사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천사들 앞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완곡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Billerbeck). 예수님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1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여자의 고통이 얼마나 크며 그것을 찾은 여자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 한 사람을 잃었을 때 얼마나 아파하시며 그 한 사람이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죄인, 병자, 천직자들의 아픔을 아시고 그들이 돌아와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상처가 회복되어 가치있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 여기십니다. 스바냐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과 상태에 있을지라도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15:26“~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했고, 말라기4: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라고 했습니다.

 

 

       4. 잃은 아들 비유 (11-32)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예수님이 잃은 아들 비유 이른바 탕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둘째 아들이 자기에게 준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해버렸다고 했습니다 (11-13). 둘째 아들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과 통제를 받으며 율법대로 사는 생활이 싫었습니다. 자기도 이방 나라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특히 문명과 문화가 발달한 이방 나라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쾌락을 누리며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아들들에게 재산을 상속할 때에는 첫째 아들(장자)에게는 , 둘째 아들(차자)에게는 을 주었습니다 (21:17). 그리고 아버지가 아직 죽기 직전이 아니라도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아버지 재산을 받은 아들(상속자)들은 그 재산을 아버지 허락 없이 임의로 처분하거나 사용할 수 없었고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익금을 남겼다 하더라도 아버지 동의 없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 비유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고 해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자 둘째 아들은 자기가 받은 재산을 며칠이 안 되어 임의로 처분하여 현금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처분한 현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간 것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 마음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계획한 대로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유산을 받자마자 현금으로 만들어서 먼 도시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산 것입니다. 일정기간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쾌락을즐기면서 사니 즐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얼마 못가서 현금은 다 떨어지고 먹을 것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는 먼 이방 도시로 가서 육적인 쾌락을 일삼으면서 돈을 허비해버린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 이방 도시로 가서 돈을 다 허비해버린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14-16). 둘째 아들은 유산을 처분한 돈을 다 소비해 버려 궁핍하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지방에 기근이 들어 더욱 비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연명을 위해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종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집 주인이 들에게 돼지를 치게 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금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돼지치기를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근거하여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았고 돼지를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11:7, 14:8). 랍비 문학에서는 돼지를 사육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Baba Kamma). 그는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것조차도 주지 않아 주리게 되었습니다. ‘쥐엄열매’(κερατιον)는 주부콩나무(carobtree) 열매를 말하는데 주부콩나무에는 10m 정도 자라는데 8-30cm 정도 되는 콩깍지 같은 꼬투리가 맺히고 그 깍지 안에는 5-15개 정도의 콩알 같은 씨가 들어 있고 씨 주변에는 시럽같이 단 진액이 있어 그것을 씹으면 단맛이 납니다. 그 깍지는 봄에는 파랗게 열렸다가 가을이 되면 진한 밤색으로 변합니다. 그것은 가축 사료로도 쓰이며 기근 때에는 사람들이 먹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했는데 (3:4, 1:6), ‘메뚜기를 쥐엄열매로 석청을 종려열매(대추야자)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메뚜기를 쥐엄열매로 보는 이유는 유대인들은 메뚜기를 아르브(ארבה)라고 하는데 쥐엄나무도 아르브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석청을 종려열매(꿀처럼 달아서 시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함)로 보는 이유는 광야에는 꽃이 없어 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는 배가 고파서 남의 돼지 치는 일을 해 주었지만 주인은 양식을 충분히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배를 채우고자 하되에서 그가~하되’(επεθυμαι)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배가 너무 고파서 계속적으로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시키는 주인도 그를 기본적으로 주는 최저음식 외에는 더 이상 호의를 베풀지 않은 것입니다. 굶주린 그에게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기근이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가 호의호식할 때는 많은 사람이 함께 했겠지만 그가 거지신세가 된 다음에는 누구도 함께 하지 않았고 작은 동정조차도 베풀지 않고 오히려 비웃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옛 말에 주식형제는 천인유요 급난붕우는 일인무라’(酒食兄弟千人有急難朋友一人無)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유대인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종살이를 했고 거기에다가 돼지 기르는 일을 했고 아무에게도 동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17:6, 8:13, 4:13-14). 첫째, 종교적인 수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가 돼지 치는 일을 한 것은 당시 유대인으로서 신앙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둘째 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궁핍하여 주릴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너무 굶주려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조차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은데 자기는 주려 죽게 되었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가서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품꾼의 하나로 보아달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17-19). ‘스스로 돌이켜는 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회개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를 나타내는 숙어입니다 (Jeremias). ‘양식이 풍족한은 가산이 넉넉하여 품꾼들에게 제공되는 음식도 풍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는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하늘은 히브리인들이 종종 하나님 대신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는 아버지를 떠난 것을 말한 것인데, 허랑방탕하게 산 것과 재산을 탕진한 것과 부정한 짐승을 기른 것 등을 포함한 것일 것입니다. 아버지께 불충한 것은 아버지를 주시고 아버지의 지도하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도 불충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굶주려 죽게 된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아버지를 떠나 쾌락을 추구한 결과라 생각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께 더 이상 아들의 지위를 원하거나 아들로서 누릴 권리를 원하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으로 받아달라는 청을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날품팔이로만 받아줘도 좋겠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하고 결국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직 거리가 먼데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20). 여기에서 아버지의 심정이 절실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아직 거리가 먼데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이 떠난 것을 마음 아파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매일 같이 아들이 돌아오지 않나 하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오로지 아들이 고통당할 것만 생각하고 살아서 돌아오기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심장을 팔아먹으려고 아버지의 심장을 떼서 급하게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넘어져 들고 가던 아버지의 심장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심장은 땅에 떨어져 흙에 범벅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심장이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괜찮니?” 본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가 그런 심정을 보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측은히 여겨에 해당하는 기본형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γχνιζομαι)동정을 느끼다’ ‘열정을 갖다는 뜻으로서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먼저 달려가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특성상 아무리 급해도 윗사람이 먼저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뛰어 나간 것입니다. 집 앞에서 아들이 스스로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넷째,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안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피핍토’(επιπιπτω)포옹하다는 뜻인데 밀어 닥치는 식으로 포옹하는 것을 말합니다. ‘입을 맞추니에 해당하는 기본형 카타필레오’(καταφιλεω)입을 맞추다는 뜻인데 열렬하게 입을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아들과 어떤 구체적인 대화를 하기 전에 그처럼 격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들인 성도에게 대하는 심정과 같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으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21-24). 둘째 아들은 자신이 죄를 고백하면서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종들을 불러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에 해당하는 스톨레’(στολη)겉옷’ ‘긴옷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발까지 그리워지는 아름답고도 위엄 있는 옷을 말합니다. 그런 옷은 왕이나 부자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가락지’(δακτυλιος)는 반지를 말하는데 단순한 장신구인 반지가 아니라 인장반지로 여겨집니다. 인장반지는 그 원래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그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υποδημα)은 발에 신는 신발을 말하는데 당시 신발은 자유인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송아지’(μοσχος)는 어린 소를 가리키는데 고기가 연하여 당시 가장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송아지앞에 의 뜻을 가진 관사 ’(τον)이 있는 것을 보아 아버지가 특별히 준비해 두었던 송아지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기 위해 살찐 송아지를 미리 정해 놓습니다. 아버지가 지시한 그 송아지는 특별한 손님이 오면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아들이 돌아오면 잔치하기 위해 준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특별히 준비한 것을 아들 잔치를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이 없이 불구로 태어나 손이 조막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위 바위 보를 하면 언제나 주먹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린 아들에게 나랑 가위 바위 보를 할까?” “나한테 이기면 부탁하는 것 다 들어줄게어린 아들은 그럼 아빠 내가 갖고 싶은 건 다 사줄거야?” 아빠는 그럼 네가 갖고 싶은 것은 다 사줄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가위 바위 보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주먹(바위)을 낼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위를 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매번 가위만 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아들은 좋아서 날뛰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린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어린 아들이 원하는 것을 사주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알아차릴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져주었습니다 (유현민의 행복 수첩 속 이야기 중에서).

 

  본 비유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옷과 가락지와 신을 제공한 것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필요를 공급해준 정도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아들을 아들 이상으로 존귀하게 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한 것은 아들이 돌아온 기쁨을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을 그 동안 함께 염려한 공동체 일원들과 함께 나누려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자기를 거역하고 이방 도시로 가서 쾌락을 누리다가 재산을 탕진해버린 것을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아들이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신분과 위치와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이웃들과 함께 기쁨을 나눈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 떠나 돌아오지 않은 때에도 기다립니다 (벧전3:8, 1:3). 이사야49:15-16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했습니다. 둘째, 우리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안아주시고, 죄 고백을 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려는 마음으로 대하십니다. 이사야55:7“~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생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돌아오는 것만으로 감격해 하며 기뻐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사야61:10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했습니다 (61:10).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우리 마음대로 살다가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비참한 가운데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생각지 않고 돌아오기만을 원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확신시켜 주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지위를 회복시켜 아들의 권세를 누리게 해주고 복음에 대한 사명으로 자유롭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풍성한 영적 즐거움을 누리게 하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7:14, 6:15, 6:33,53). 하나님 떠난 우리가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곤고했습니다 (17:6). 이제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담대함과 안정됨과 즐거움을 누리려야 합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첫째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고 했습니다.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25-27).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곧바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미 밭에 일을 하러 나갔던 첫째 아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에서 악기와 노래와 춤으로 즐거워하는 소리를 듣게 되어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종은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그를 다시 아들로 맞아들이게 되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는 중이라고 한 것입니다.

 

  한 종의 말을 들은 첫째 아들은 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기를 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자기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친구들과 함께 즐기게 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 돌아오니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28-30). 둘째 아들은 종에게 동생이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잔치를 연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인 것과 그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에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 첫째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나와서 들어가기를 권했다는 것입니다. ‘권한대에 해당하는 파레칼레이’(παρεκαλει)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계속적으로 위로하고 설득하고 권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버지를 잘 섬겨 명을 어기지 않았음에도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친구들과 즐기라 한 젓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동생에 대한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생이 아버지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다 날려버린 것을 미워하여 동생에 대해 동생이라 하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칭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해버린 동생을 받아들인 것과 아버지가 그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 것에 대해 격분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편애와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분노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심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아버지는 분노한 첫째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31-32). 분노에 가득찬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부드러운 태도로 위로하며 이해를 구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항상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재산 에 대한 권한을 다 가지고 있는 반면 둘째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이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기뻐하여 잔치를 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들을 비유한 것이고, ‘둘째 아들은 바리새인들이 부정한 죄인으로 여기는 자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종교적인 특권을 많이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으로 취급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인들이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심히 기뻐하시고 그들이 돌아올 때 모든 은혜를 풍성히 주시는 분입니다. 이 내용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적 의미도 있을 수 있습니다.


 <結言>

  예수님은 식탁교제에 죄인들을 참여시켰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는 것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3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비유와 잃은 아들비유를 들었습니다. 비유에서 목자와 여자와 아버지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고, 99마리 양과 9개 드라크마와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들을 비유한 것이고, 잃어버린 1마리 양과 잃어버린 1개 드라크마와 잃어버린 둘째 아들은 바리새인들이 죄인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죄인 한 사람에 대해 어떤 심정을 가진 분인지에 대해 말하므로 예수님이 자신도 죄인 한 사람 돌아오게 하는 것을 절대적인 사명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