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16:1-31

<題目> 재물에 대한 교훈

 

<序言>

  본장은 예수님이 부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라는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1-13),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한 책망(14-18),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19-31)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불의한 청지기 비유 (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를 불러 보던 일을 셈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1-2). ‘어떤 부자는 당시 대지주로서 부재 지주입니다. ‘청지기’(οικονομος)는 대지주의 재산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자를 가리킵니다. 주인의 식탁시중, 하인들 감독, 재물 관리, 장부 관리 등을 모두 관리하는 지배인입니다. 청지기는 자유인으로서 고용 계약을 맺은 고용인일 수도 있고 주인의 종일 수도 있습니다. 분문의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부실하게 경영하고 주인의 재물을 탕진했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재산 관리 장부를 내놓게 하고 직무를 그만두게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자기 직분을 빼앗자 무엇을 할지 염려했다고 했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내고는 그 일을 해야겠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관리 직분을 빼앗긴 다음에 사람들이 자신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3-4). 청지기는 자신이 관리 직분을 빼앗기면 실직자가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정신노동을 하던 관리자로서 농사 등 육체노동을 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구걸해서 살아가기는 자존심이 상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급박한 절망적인 처지를 인지하고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빚진 자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관리직을 잃었을 때 그 빚진 채무자들이 은혜를 갚고자 생계를 책임져 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얼마를 빚졌는지 묻고 탕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먼저 온 빚진 자가 기름 100말이라고 하자 증서를 가져오게 하여 50말이라고 쓰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온 사람에게는 밀 100석이라고 하자 증서에 80석이라고 쓰게 했다고 했습니다 (5-7). ‘빚진 자들은 대지주인 주인에게 기름이나 밀을 빌린 소작농들이거나 기름이나 밀을 외상으로 사간 도매상들일 것입니다. 기름 1(βατος, 바트)23로서 기름 100말은 2,300라고 합니다 (Josephus). 당시 감람나무 1그루의 수확량은 25로서 기름 100말은 감람나무 150그루에서 나는 수확량이며 돈으로 환산하면 1,000데나리온 정도 된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1(코르, κορος)27,500으로 42ha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라고 합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1코르는 금 1데나리온이며 은으로는 25데나리온이므로 밀 100석은 은 2,5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증서는 빚 문서로서 채무증서를 말합니다. 청지기는 자신에게 권한이 있을 때 그 권한을 이용하여 빚을 진 자들에게 계약서를 다시 쓰게 하고 빚 50%~ 20%를 탕감해준 것입니다. 청지기가 그렇게 한 것은 자기에게 권한이 있을 때 은혜를 베풀어 자신이 청지기직을 잃었을 때 그들의 은혜를 입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옳지 않은 이 일을 지혜롭게 했으므로 칭찬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바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8). 청지기는 자신이 관리자 직책을 박탈당한 이후에 도움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권한 이 있을 때에 주인에게 빚을 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주인에게 관리자 직책을 빼앗긴 다음에 살 길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불의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가 자기에 대해 불의한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의 앞날에 살길을 위해 지혜롭게 행했다고 칭찬을 한 것입니다. 당시 불의한 사회에서는 그런 행위가 영리한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지혜롭다고 했습니다. 불의한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비해 자기 일을 잘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들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일처리를 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9). ‘불의의 재물은 하늘의 보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세상 재물을 말합니다. 세상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한 것은 금욕주의적인 이원론처럼 세상의 재물은 무조건 불의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재물 자체가 불의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를 위해 모으되 불의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의롭지 못한 곳에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세상 재물을 친구를 사귀는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하나님(혹은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세상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서 재물이 없어질 때 하나님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주할 처소는 영원히 거주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죽을 때 하나님이 영원히 거주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여겨 보상을 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재물을 무엇을 목적으로 관리하며 어떤 곳에 사용해야 할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12:33, 6:2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했습니다.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고 했습니다.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너희 것을 누가 너희에게 주겠느냐고 했습니다 (10-12). ‘지극히 작은 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서 보잘 것 없는 것을 말하고 큰 것은 아주 큰 것으로서 가치가 있는 보배로운 것을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큰 것불의한 재물참된 것그리고 남의 것너희의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재물은 세상의 재물로서 자기를 위해 불의한 방법으로 모으며 옳지 못한 곳에 사용하는 재물을 말하고, ‘참된 것’(αληθινος)은 참된 진리(복음,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남의 것은 있다가도 없어지기도 하는 세상 재물로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고 너희의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마땅히 추구하며 소유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진리를 암시합니다. ‘충성되고에 해당하는 피스토스 에스틴’(πιστος εστιν)믿을 만하다’ ‘신뢰할 만하다’ ‘신실하다의 뜻으로서 재물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경제활동 영역에서 신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재물도 하나님을 위해 추구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관리하며 하나님을 위해 바로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을 만하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 사역을 맡기고 하나님 나라 사역에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 재물에 대해 믿을 만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도 맡기지 않습니다. 세상 재물에 관한 것 하나 바로 관리하지 못하고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사역에 관한 일은 더더욱 바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추구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관리하고 하나님 일에 사용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13). ‘집 하인’(οικετης)은 집안 일을 맡은 종으로서 집 주인에게 충성과 헌신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자입니다. 당시 그런 하인은 때에 따라 두 집 주인에 속하여 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Rengstorf). 그렇게 둘 이상의 주인을 섬기는 하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의 주인을 더 성의껏 섬겨 주인을 섬김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동일하게 섬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주인으로 섬겨서는 안 되고 하나님만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 ‘지극히 작은 것’ ‘남의 것에 충성하여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이 맡겨지게 하기 위해서는 재물 자체를 주인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재물을 자기를 위한 목적으로 추구하고 재물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취하고 재물을 잘못된 데에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mammonism). 야고보서1: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2.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한 책망 (14-18)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앞서 1-8절에서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시고 9-13절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교훈을 하셨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므로 자기들이 그만한 물질적인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특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들이라는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주된 관심은 재물을 얻어 누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면서도 재물에 대한 탐욕이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생각에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명성 없는 시골 출신의 예수님이 죽은 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재물을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하자 비웃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신다고 말씀하면서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5).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 엄격했기 때문에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하는데 앞장서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유대교의 다른 파들인 사두개파나 엣세네파나 젤롯파를 무시할 뿐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심히 멸시했습니다. 자신들을 율법 수호자로 여겨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과 위선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처럼 혐오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며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고 했습니다 (16). ‘율법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을 가리키고 선지자는 모세오경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구약성경을 카리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바 구약의 율법시대를 의미합니다. ‘요한의 때까지요라는 말은 세례요한의 때까지 라는 말로서 세례요한 때까지 구약의 율법시대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세례요한은 복음시대가 도래할 것을 전했지만 누가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이전까지는 구약의 율법시대로 본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은 세례요한의 활동 이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때부터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신약의 복음시대라는 것입니다. 복음시대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는 것입니다. 침입한다는 것은 복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역동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하나님의 나라 일원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복음으로 통치하는 나라로서 구약시대 때처럼 율법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예표한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데도 아직까지 구약시대의 율법의 외부적 준수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태는 마태복음11:12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례요한의 때를 신약 복음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세례요한이 신약 복음시대에 관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메시지를 전한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반해 누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신약 복음시대로 보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전도 활동을 시작한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지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17).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율법의 한 획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율법의 획도 절대로 무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18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일점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자음 요드’(י)를 가리킵니다. 일획은 히브리어 자음 ’(ב)이나 카프’(כ), 달렛’(ד)이나 레쉬’(ר), ’(ה) 헤드’(ח)처럼 비슷한 철자를 구분해주는 획을 말합니다. 히브리어의 특성상 이런 경우 붓으로 점을 하나 찍지 않거나 획을 잘못 움직일 경우 글자가 달라지며 그 뜻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율법의 완전성과 절대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붓 한번 살짝 잘못 움직일 수 있는 조금마한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율법의 조그만 한 부분도 없어지지 않으며 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한 의도는 앞서 한 말씀에 대해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앞서 율법시대가 지나 복음시대가 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교만하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시대가 시작되어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버리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예표하고 있고 복음은 율법을 성취한 것이므로 율법과 복음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한 것이므로 율법과 복음을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복음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므로 율법을 잘 이해하면 복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과 복음을 전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완성과 보완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해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율법의 외부적인 것만 지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바로 이해하여 지켰다면 예수님을 율법에서 지시한 메시야로 믿었을 것인데 그들은 잘못 이해하여 잘못 지키므로 위선을 행했고 그것으로 교만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라고 했습니다 (18). 이혼을 하거나 이혼한 자와 사는 것은 간음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32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내라고 한 말을 오해하여 이혼을 정당화했습니다. 바리새파 가운데 삼마이(Sammai) 학파는 부정이나 율법을 파기한 경우에 이혼을 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 힐렐(Hillel) 학파는 어느 한쪽에서 이혼 의사를 밝힐 경우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힐렐은 여자의 음식 솜씨 여하에 따라 이혼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음행한 연고 없이 나누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 보내라고 한 것은 이혼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너무 완악함 때문에 차선책으로 하락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19:6-8, 24:1-4). 예수님이 이혼문제를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지적하는 동시에 율법의 영구성을 가르치는 의도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분명히 하면서도 (1:17, 3:28, 5:1-2, 2:16, 3:11,24,26, 2:8,12, 3:9) 율법폐기론자들처럼 율법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로마서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23:23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3.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이 비유만 떼어서 보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배경이 되는 장 전체의 문맥을 보아야합니다. 앞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하던 중 죄인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15:1-2).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죄인들에 대해 가지시는 심정이 어떠한지를 알게 해 주기 위해 잃은 양 비유잃은 드라크마 비유잃은 아들 비유를 들었습니다 (15:3-32). 그리고 이어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일 잘 지키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근거로 높임 받으려하지만 속에는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임을 책망하기 위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었습니다 (1-8). 그리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옳지 않게 축적한 재물을 하나님 앞에 옳게 사용해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을 비웃었습니다. 14절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교만하지만 실상은 율법이 말하는 정신은 전혀 지키지 않는 위선을 책망했습니다 (15-18). 그리고 이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든 것입니다 (19-31). 그런 흐름에서 본다면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는 교만하지만 속에는 돈에 대한 탐욕이 가득하여 재물을 축적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율법에서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누리는 데만 허비하며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위선을 지적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18, 14:29, 16:11,14, 24:19-21, 26:12).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9절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왕처럼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자색 옷은 자주 색 옷으로 당시 왕이나 귀족들이 입던 값비싼 겉옷이었습니다. ‘고운 베옷은 마()로 만든 속옷으로 역시 부요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이 옷은 당시 같은 무게의 금보다 2배나 비싼 옷이었습니다. 이로보아 부자는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지위도 아주 높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자는 값 비싼 옷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매일같이 호화롭게 세속적인 향락을 즐겼습니다.

 

  20-21절에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했습니다. ‘나사로’(Lazarus)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히브리식으로는 하나님이 돕는 자라는 뜻을 가진 엘리에셀’(אלעזר)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그는 거지로서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자였습니다. ‘헌데 투성이로에 해당하는 원형 헬코오’(ελκοω)궤양이 생기다’ ‘종기가 나다으로서 그가 오랫동안 피부가 헐거나 피부에 종기가 나 고생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문은 정문을 가리키는데 보통 문이 아니라 높이 솟은 장식된 문이었을 것입니다. ‘버려진 채에 해당하는 기본형 발로’(βαλλω)던지다’ ‘두다’ ‘눕다등의 뜻이 있는바 버려져 누운 상태로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부자 집 대문에 누워있는 것은 그 집에서 나오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자가 잔치상에서 떨어뜨린 부스러기 음식물을 주어먹고 허기를 채우려는 것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은 부자의 식탁에서 배불리 먹고 남은 찌꺼기 음식을 땅바닥에 던진 것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남은 음식 찌꺼기를 땅에 던져 버렸고 그것을 주워 먹지 않았고 그것은 개들이 주워 먹었습니다 (15:27). 거지 나사로는 그것으로라도 배불리려 했습니다. ‘배불리려 하매에서 하매에 해당하는 에피뒤메오’(επιθυμεω)마음을 두다’ ‘바라다’ ‘갈망하다’ ‘탐하다등의 뜻입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그것이라도 먹기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고 반대로 부자가 전혀 음식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에 해당하는 퀴온’(κυων)은 집안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κυναριον)가 아닌 들개처럼 거리를 사납게 쏘다니는 개를 말합니다. ‘핥더라에 해당하는 아펠레이콘’(απελειχον)이 미완료형인 것으로 보아 개들이 계속 상처를 핥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병이 들어 있어 버려지는 음식을 주어먹는 것도 힘든 상태였는데 그런 개들이 성처를 핥아도 쫓아낼 힘이 없어서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22-23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라고 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병든 채 제대로 먹지도 못하한 가운데서 개들에게 헌데를 핥음을 당하며 살았고 부자는 부요한 가운데 호화롭게 연락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아마 거지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나 들판이나 골짜기에 버려졌을 것이고 부자는 거대한 장례를 치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세는 전혀 달랐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 영(영혼)이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그 영이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언약백성의 대표로서 낙원에 있다고 생각했고 의인이 죽으면 천사에 이끌려 그 낙원으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악인은 죽으면 악귀에 이끌려 음부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낙원’(樂園)음부’(陰府)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영혼)이 가는 곳입니다. 낙원과 음부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적인 견해로서 낙원(παραδεισος)이나 음부(αδης)영원한 장소인 천국(βασιλεια ο ουρανος)이나 지옥(γεεννα)과 동일시하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영혼)이 천국과 지옥으로 가 있다가 주의 재림 때 다시 와서 부활한 육체와 결합하여 최후심판을 거쳐서 다시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 영원히 거한다는 이론입니다. 또 하나는 최근의 견해로서 낙원이나 음부를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과는 다른 장소로서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가기 전까지 거하는 임시장소로 보는 이론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낙원과 음부에 가 있다가 주의 재림 때에 다시 와서 부활한 육체와 결합하여 최후심판을 거쳐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이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주장한 한 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내용은 이를 뒷받침 해주기도 합니다 (23:43). 낙원이나 음부가 천국이나 지옥과 동일한 곳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혹 낙원이나 음부가 천국이나 지옥과 다른 장소라 할지라도 낙원이나 음부는 천국이나 지옥의 음영으로서 천국이나 지옥의 모습을 반영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곧 낙원이나 음부는 천국이나 지옥과 장소적으로는 다를지라도 그 성격과 내용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 비유에서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하고 있고 음부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낙원은 평안과 위로의 장소이고 음부는 극한 번민과 고통의 장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낙원은 상급의 장소이고 음부는 형벌의 장소인 것입니다.

 

  23-24절에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을 부를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겨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기인한 것입니다 (8:39). 그러고 보면 이 부자는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이며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바리새인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혈통적 특권을 제시하며 아브라함에게 긍휼을 베풀어 줄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으니 아브라함이 나사로를 보내어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는 후기 유대인들이 낙원(천국)에는 생수가 흐르고 음부(지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는 곳으로 이해한 것에 대한 반영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애절하게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그의 절규는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25절에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처절한 간청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으니 괴로움을 받고 나사로는 세상에 살았을 때 고난을 받았으니 위로를 받는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부자에 대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리고 산 것 자체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자가 세상에서 부자로 산 것 자체 때문에 음부(지옥)에서 번민과 고통을 당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질병과 가난으로 산 것 자체 때문에 낙원(천국)에서 평안과 위로를 받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자는 바리새인을 암시하고 있고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께 나아온 죄인을 암시합니다. 부자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린 것을 때문에 음부에 온 것처럼 언급한 것은 부자가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린 것을 통해 그가 바리새인들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자들이라 자랑하면서도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율법에서 말한 불쌍한 자들을 돕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지시한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같이 자기 욕망을 채우며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위선적으로 산 것입니다. 본 비유가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아서 그 같은 삶을 살았고 음부에 간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신 자리는 바리새인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하는 중에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 생각하는 죄인들이 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막지 않고 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죄인들과 함께 먹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15:1-2).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잃은 양 비유잃은 드라크마 비유잃은 아들 비유 말씀하셨습니다 (15:3-32).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재물에 대한 탐욕과 위선에 대해 책망하기 위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시고 율법의 정신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1-18). 그리고 이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9-31).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본 비유에서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4종류의 분파가 있었는데 곧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젤롯파였습니다. 그중에 바리새파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삶에서 율법을 구체적인 조항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장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에 오실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는데 그들은 정작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누릴 특권을 주었다고 생각해서 재물을 축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 재물을 자기들의 향락을 누리는 데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정죄하는 죄인들에 대해서는 가난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극빈자들을 도우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본문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 비유의 부자는 아마도 자신은 율법에서 구원자로 지시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율법을 준수하는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불의하게 재물을 축적했을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생각하고 누렸을 것입니다. 대문 앞에 병들어 구걸하는 거지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도 않고 돕지도 않은 것입니다. 본 비유에서 부자의 행위는 예수를 구원자로 믿지 않는 자의 대표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는 인생을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재물을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쓰지 않고 자기 향락을 위해서만 허비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구원받은 자도 그렇게 살 수 있지만).


  우리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베드로전서1: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반드시 죽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인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답게 살아야합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히 남아있는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합니다. 요한복음6: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영원히 인정받는 것을 위해 사용해야합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를 받는 것을 위해 사용해야합니다. 전도서11:1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26절에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구렁텅이에 해당하는 카스마’(χασμα)’ ‘공간이라는 뜻이고, ‘놓여 있어에 해당하는 기본형 스테리조’(στηριζω)고정하다는 뜻으로서,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다는 말은 큰 공간이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가 가 있는 음부(지옥)거지 나사로가 가 있는 낙원’(천국) 사이에는 큰 공간이 고정되어 있어서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므로 부자거지 나사로로 하여금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주게 해 달라는 청을 들어 줄 수 없음을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 갈 처소는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부는 것 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라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음부(지옥)에 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낙원(천국)에 가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면서 지은 죄가 아닐지라도 원죄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인간은 그 죄 값으로 누구나 죽게 되고 음부(지옥)에 가게 됩니다. 낙원(천국)에 가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하는데 인간 스스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죽으므로 우리의 죄 값을 치렀습니다.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데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만족시켜야하고 인간의 죄 값을 치러 죽어야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만족시킬 자는 하나님 자신 밖에 없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려 죽으려면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해서 죽으시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만족시키고 우리의 죄 값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자 사람인 신성과 인성을 같이 가진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을 믿음으로만 낙원(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1:17, 3:28, 5:1-2, 3:11,24,26, 2:8,12, 3:9).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으로 혀에 물을 떨어뜨려 서늘하게 해 달라는 간청을 했었지만 아브라함은 서로의 사이에 공간이 고정되어 있어서 서로 왕래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고통을 받는 음부로 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27-28). 부자는 음부의 고통 속에서 절실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구약성경에서 지시한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결과 음부에 왔다는 사실, 음부는 견실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 음부에서는 조금도 긍휼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 한번 음부에 들어오면 다시 낙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세상의 아버지 집에 있는 형제들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형제들은 음부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결국을 알고 안타까워 한 것입니다. 자기는 이미 음부에 와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아직 세상에 있는 형제들이라도 그 음부에 오게 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구하기를 나사로를 세상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어 사실을 자세히 증언하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형제들이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가 어떤 뜻을 전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의 영이 이 세상으로 다시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해서 만난 경우가 있었습니다 (삼상28:8-19). 그것은 실제로 죽은 사무엘의 영이 이 세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악령의 기만에 의한 현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세상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9). 부자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자기 형제들에게 나타나 내세에 대해 말하면 나사로의 말을 듣고 음부에 오지 않도록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미 그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듣고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오경을 기록한 자이고 선지자들은 모세오경을 외의 성경을 기록한 자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세상에는 이미 구약성경이 있고 그것을 전해주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전체가 오실 구원자로 예수님을 지시하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거지 나사로처럼 병든 자, 가난한 자)를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을 듣고 바로 깨달으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것이고 하나님 뜻대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부자도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 바리새인이었겠지만 그는 율법을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못했고 대문 앞에 있는 병든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고 자기의 연락을 위해서만 산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0-31).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면 그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미 전해진 구약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증언할지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했습니다 (11:45-53).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고 구약성경이 지시하는 구원자 예수님이 표적을 보였어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어도 성경이 말하는 목적과 의미와 정신을 이해하지 못해 성경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고 성경을 갖고도 성경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먹이를 찾던 물고기 두 마리가 먹음직해 보이는 지렁이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말했습니다. "저 지렁이가 보이지? 저건 낚시 바늘에 꿰어 있는 거야. 낚시 바늘은 낚시 줄 끝에 달려 있지. 그리고 낚시 줄은 낚싯대에 연결되어 있고 그 낚싯대는 사람이 쥐고 있어. 우리가 저 지렁이를 삼키면, 우리 입이 바늘에 걸려 결국에는 후라이팬에 얹혀지는 신세가 되고 마는 거야." 그러자 다른 물고기가 말했다. "하하하!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바로 그 이야기구나. 나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아. 프라이팬에 얹혀졌다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밝혀 준 이가 어디 있어? 자네가 저 지렁이를 먹지 않겠다면 내가 먹어 치우겠네." 그러더니 그 물고기는 지렁이를 삼키고 프라이팬에 얹혀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러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하면 가 봤느냐고 힐문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거나 과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지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고 맘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면 천국으로 갈 기회도 없고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헬라신화에 보면 지옥에 대해 이렇게 묘사된 내용이 있습니다. 무릎까지 잠기는 물속에 서 있는데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은 금새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고, 바로 코끝에는 먹음직스런 열매가 달린 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는데 과실을 따먹고자 손을 뻗치면 나무 가지는 바람에 날려서 높이 올라가고 맙니다. 물과 과실을 눈앞에 보면서도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가파른 비탈길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데 힘을 다하여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가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립니다. 영원한 노역 무한한 고통을 받아야만 합니다. 음부나 지옥에 대해 성경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곳이며 (9:10),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곳이며 (8:12, 22:13), 꺼지지 않는 불이 있으되 벌레도 죽지 않는 곳이며 (9:43, 66:2),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와 함께 세세토록 밤낮 고통을 받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0:10, 21:8). 놀이 공원에서 무서운 기구를 계속해서 탈 때 우리의 한계를 넘어가려 하는 고통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때 느끼는 심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빌딩에서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은 낙화암에서 떨어진 3,000궁녀처럼 뛰어내리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살지 죽을 지도 모르는 밖으로 뛰어내리는 이유는 불길이 들어올 때 너무 뜨겁기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뛰어내린다고 합니다. 음부는 그보다 더한 뜨거움이 있으면서도 뛰어내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곳,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부자는 극렬히 타는 불꽃 가운데서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려 혀를 시원케 해 주기를 부르짖는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할 기회가 한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 전도했으면..'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영안장로교회에서 총력전도주간을 맞아 집사님이 옆집에 사는 한 자매를 전도하기로 마음먹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로 초청했습니다. 그 자매는 놀랍게도 "꼭 갈게요"하며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 집사님과 함께 교회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갑자기 집 안에 큰 일이 생겨서 지방에 갔다가 그 다음 주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같이 가기로 했던 자매가 육군사관학교 화랑제 불꽃놀이를 보다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지난주에 약속을 지켰더라면 그 자매를 살릴 수 있었는데 집안 일 때문에 불쌍한 영혼을 구원할 기회를 놓쳤어요" "그때 전도했으면 그 자매가 자살하지 않았을 텐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야 하지만 특히 우리의 부모형제에게 전도해야합니다. 우리의 부모형제가 그곳에 갈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은 전도해도 부모형제 친척에게는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지옥이 믿어지지 않거나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에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죽어서 불꽃 가운데 고통당하는 부자의 심정으로 전해야합니다. 그것이 조카 롯을 구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요 골육지친과 형제를 구원하고자 하는 바울의 심정입니다 (9:1-3).

 

<結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율법을 가장 철저히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지시하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율법의 정신대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잘못 배우고 잘못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경을 바로 배우고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깨달은 대로 믿고 깨달은 대로 생각하고 깨달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