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17:1-37
<題目> 제자도와 재림에 관한 교훈
<序言>
앞장에서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통해 재물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본장에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 또 다른 문제들을 곧 용서와 믿음에 대한 교훈으로 교육하시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내용구조는 공동체 생활의 기본 원리(1-10절), 열 나병환자 치유(11-19절), 인자의 재림에 관한 교훈(20-37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공동체 생활의 기본 원리 (1-10절)
①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1-2절). ‘실족하게 하는 것이’에 해당하는 원형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은 ‘덫’ ‘올가미’ ‘함정’ 등의 뜻으로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게 하거나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믿는 무리 가운데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18:6-7을 보면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세워놓고 천국에 대해 말씀하고 그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8:2, 막9:35). 어린 아이를 소제로 말씀하신 것은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자들에 대한 상징으로 한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자맷돌’(μυλοs ονικοs)은 여인들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당시 방앗간에서 당나귀로 끌게 하여 돌아가게 하는 대형 회전 맷돌을 가리킵니다. 연자맷돌에 목을 매달아 깊은 바다에 던지는 것은 다이 로마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렸던 사형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 것은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자에게라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보다 큰 죄를 지은 자로서 차라리 자신이 극한 형벌로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엄한 질책이 있을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②형제가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3-4절).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스스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자기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자기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자기에게 돌아와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3절). ‘스스로 조심하라’는 앞 절에서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말씀과 관련하여 작은 자라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NIV). ‘경고하고’는 강력하게 권고하는 말일 것입니다. 마태복음18:15-22에는 공동체의 어느 형제가 죄를 범하게 될 경우 일차적으로 당사자에게 권고하고 이차적으로 두 세사람이 권고하고 그래도 안 들을 경우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안 들을 경우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서 만일 형제가 범죄할 경우 경고하라는 것은 방법차원에 있어서 그 4단계를 모두 거쳐서 권고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자기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자기에게 돌아와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4절). 마태복음18:22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몇 번이나 용서를 해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7’수는 만수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3번을 용서해 주는 것이 최선의 기준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수인 ‘7’수를 사용하여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본 절에서 특이한 것은 ‘회개하거든’ ‘회개하노라 하거든’ 용서하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7번이라도 죄를 짓고 7번 돌아와 회개한다고 말하면 용서해주라고 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회개를 조건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표현 같습니다. 7번 잘못을 하고 7번 회개한다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진정한 회개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한 회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회개의 진정성을 판단하지 말고 찾아와 회개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용서하라고 한 것일 것입니다. 이는 용서의 조건을 회개에 둔 것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무한한 용서에 대한 추구점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자기 빚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으므로 긍휼을 얻지 못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18:23-35).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고 결론적으로 마태복음18:35에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지옥 갈 정도의 죄입니다. 우리 죄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을 때 그가 하나님 아들이라도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의 죄입니다. 그 죄를 우리는 다 용서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짓는 죄들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셨음을 확인해 주십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고,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도 긍휼을 베풀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2:13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죄대로 징벌한다면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했습니다 (눅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준 것을 근거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것을 힘입어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었다는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에 자기를 죽이기 위해 3,000명의 정예 군사를 투입하여 추격하던 사울왕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2번이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엔게디 황무지의 굴에서였고 한 번은 십 황무지에서였습니다. 다윗과 함께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하면서 당장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니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옷자락만 베고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긍휼을 베푼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구했습니다. 사무엘상26:24에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③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5-6절).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습니다 (5절). ‘사도’(απο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만일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가 찾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면 일곱 번이라도 다 용서해주라는 말씀을 하시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느 정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자기들에게 계속해서 잘못한 자를 무한히 용서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자기들의 믿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6절). ‘겨자씨’(mustard seed)는 무씨나 유채씨 만한 아주 작은 씨입니다. 그렇지만 그 씨가 살아있어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 5m까지도 자랍니다. 겨자씨는 크기가 아주 작지만 그 씨가 살아 있는 씨라면 거대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씨가 살아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의 크기나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 있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은 뽕나무 뿌리도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뽕나무’(sycamine tree)는 무화과뽕나무로서 높이가 10-15m 너비가 40m까지 자라납니다. 그렇다면 뿌리는 그보다 훨씬 넓게 퍼질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뽕나무는 600년 동안 서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Strack-Billerbeck). 그래서 큰 뽕나무는 중기를 사용하지 않던 당시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뽑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바다에 심을 수는 더더욱 할 수 없었습니다. 뽕나무 뿌리에게 뽑혀 바다에 심기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뽕나무 뿌리를 뽑아 바다에 심으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에게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력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력 있는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0:1에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막16:17-18). 여기에서 '권능'을 우리는 보통 능력이나 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능력이나 힘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υναμιs)인데 여기에서는 특권이나 권세를 가리키는 '수시아'(εξουσια)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체에 능력을 주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특권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옳은 일에는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일을 시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19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의 원리입니다. 용서하기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골3:13-14).
④섬김에 보상을 바라지 말하고 했습니다 (7-10절).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그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그 종에게 곧 와서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도리어 그 종더러 자기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띠를 띠고 자기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종이 명한대로 했다고 헤서 그 종에게 감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7-9절). 당시 노예제도를 배경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종은 바깥의 일을 했고 바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집안일을 했습니다. 당시 엄격한 노예 제도 하에서 종의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인이 밖에서 돌아온 종에게 앉아서 먹으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자신이 다 먹을 때까지 수종을 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종은 당연히 집에 돌아와서도 음식을 준비하여 주인에게 차려드리고 옷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허리띠를 띠고 주인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수종을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한 특별한 사례를 하거나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10절).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복음전도와 목양의 사명을 주었습니다 (마28:19-20, 요21:16, 행20:28). 그 사명을 위해 수고와 헌신을 다하고도 자기들은 무익한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은 아무 쓸 데 없고 가치 없는 종이라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감당한 것뿐이라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종의 위치에 있습니다 (고전7:22, 갈1:10).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종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다하고서도 자신을 부족한 종이라 생각해야 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인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보상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여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받게 해 주시고 구원 사역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과 사역에서 많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구약성경에서 지시한 구원자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일만 하고 다녔습니다. 세례 요한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에 회의가 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마11:1-6, 눅7:18-23).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주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어려움이 오거나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실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위로가 없어도 실족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했기 때문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은혜에 감사해서 한다면 신앙생활과 봉사를 한 자체로 만족합니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진 것 자체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서1:20-21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2. 열 나병환자 치유 (11-19절)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① 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11-13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시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고 했습니다 (11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9:51, 13:22).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를 지나셨다는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가장 북쪽에 갈릴리 지방이 있었고 그 아래 사마리아 지방이 있었고 그 아래 유대 지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다가 유다 지방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갈릴리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 중간을 지나셨다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지방으로 직선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가로질러 여기 저기를 들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지방 동쪽에 있었던 베레아 지방을 갔다가 다시 되돌아 유대 지방을 향해 내려가신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지방 동쪽에 베레아 지방이 있었는데 베레아 지방을 갈릴리 지방의 한 부분으로 보아 사마리아와 베레아 사이로 지나신 것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셨다고 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Marshall). 하여간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함께 등장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입니다.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12-13절). ‘나병’(lepra, hansen's)은 만성 전염병 중의 하나로 문둥병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나병은 피부의 감각이 무뎌지고 피부에 탈색된 반점이 생기고, 살이 움푹 파이고, 눈썹과 귀와 코와 입과 뺨 등에 결절이 생기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죽는 질병이었습니다 (레13:1-59). 당시 나병은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마을에서 떠나 소외된 격리 장소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부모형제도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죽을 날만 기다려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10나병환자들도 마을 밖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매일을 절망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가 여러 질병을 고친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와서 자기들도 고쳐 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자기 마을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낫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채 멀리 서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 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강도가 한 밤중에 어느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잠자는 주인을 깨우며 “손 들엇” 하였습니다. 잠결에 깨어난 주인은 벌벌 떨면서 왼손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고함을 칩니다. “오른 손 마저 들엇?” 그래도 집주인은 왼손만 조금 더 높이 들 뿐입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다시 “오른 손 마저 들엇!”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 때 그 집주인은 벌벌 떨면서 “미안하지만 오른손은 신경통 때문에 들 수가 없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신경통, 제기랄. 나도 신경통 때문이 이 짓을 하고 있네!”하는 것입니다. 그 강도 역시 오른손이 신경통으로 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위협하고는 물건을 훔쳐내는 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경통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강도는 당장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빼앗으려는 생각은 잊고 신경통 이야기를 꺼냅니다. 주인도 신경통 이야기에 공포나 두려움을 잊고는 어떻게 신경통을 치료하느냐, 무슨 약을 쓰느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새도록 있다가 새벽녘에는 서로 멋적게 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그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픔으로 고통을 당할 때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긍휼을 구는 것이 필요합니다.
10나병환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질병을 고치신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자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멀리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불치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줄로 믿는 믿음입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하므로 고침받은 한 문둥병자의 신앙이요 (마8:2),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할 수 없나니 말씀만 하옵소서"하므로 하인의 중풍병을 고친 백부장의 신앙이요 (마8:5).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므로 딸의 병을 고친 가나안 여인의 신앙입니다 (마15:21).
안이숙 여사는 급성 유방암이 걸렸습니다. 그는 수술 날짜를 잡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까지 쓰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수술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은 아픈 것이 좀 멎어야 될 것 같았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여 매일 산에 가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루 종일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발 아픈 것만이라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입니다. 밤새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잠에서 깨었는데,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거짓말같이 깨끗이 유방암이 다 나았습니다. 우리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② 열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가다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14절).
예수님은 긍휼히 여겨달라는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했고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14절). 나병이 의심되면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야 하고 나병이 나았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도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레13:1-46, 14:1-9). 이 기사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은 이미 나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한 것은 나았다는 판결을 받기 위해 보이라는 말입니다 (레14:2). 예수님이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나병을 낫게 해 줄 것이니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이 나았다는 확인을 받으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될 줄 믿는 믿음을 요구하고 그 믿음이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간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나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될 줄 믿고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환부가 깨끗이 낫게 된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열망(소원)과 예수님이 고쳐줄 수 있다는 믿음과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한 것이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나병 환자들도 순종하는 믿음이 낫게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문둥병자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할 때 그 말을 순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은 이미 나았으니 가서 나은 자로 판결 받으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낫지 않았는데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낫지 않았는데 나았다고 말하기 위해 가는 것은 수용될 수 없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이 이 명령을 한 것은 그들에게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지 보기 위함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보일 때 그 믿음대로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나을 수 없는 병을 낫게 합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왕 나아만 장군도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나아만 장군의 아내를 수종드는 사람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잡아 온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주모에게 이스라엘에는 문둥병도 고칠 수 있는 선지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아만 장군은 금과 은과 의복을 가지고 이스라엘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엘리사는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나와서 맞이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얹고 고쳐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종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듣고 그럴 것 같으면 더 좋은 자기 나라 다메섹에 있는 강에 가서 씻을 것이라고 하면서 노하여 돌아갔습니다. 가던 도중에 그 종들이 그보다 더한 일을 시켰으면 하지 않았겠느냐고 하면서 종용했습니다. 나아만이 그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자 피부가 어린 아이처럼 깨끗이 나았습니다 (왕하5:1-14). 요단강 물이 낫게 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낫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할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서 그 아이의 눈에 발라 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자 눈이 떠졌습니다 (요9:1-7). 침이나 진흙이나 실로암 연못물이 낫게 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낫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각자가 다릅니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이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고 (마19:16-22), 무리들이 찾아와 물었을 때는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 있는 자도 그리하라고 했고, 세리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고, 군인에게는 강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눅3:10-14). 성령께서 마음에 감동시키는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행해야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있는 양심에 가책되는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병을 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병뿐 아니라 심리적인 병, 영적인 병을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했고 (요9:39-41), 베드로는 신의 성품 곧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공급하지 않는 자는 원시치 못하는 소경이라고 했고 (벧후1:6-9), 바울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는 후메네오와 빌레도에게 썩어져 가는 악한 창질 같다고 했습니다 (딤후2:17-18). 주님은 회개와 열의가 없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고 책망했습니다 (계3:17). 유다왕 아사랴는 우상을 숭배하다가 죽는 날까지 문둥병에 걸렸고 (왕하15:5), 웃시야는 교만하여 율법을 어기다가 문둥병에 걸렸고 (대하26:16-21), 게하시는 물질에 대해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문둥병이 걸렸고 (왕하5:20-27), 미리암은 주의 종을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민12:1-10). 영적인 문둥병은 영적 감각이 없어져 은혜를 받지 못하고 부패한 성품이 드러나 인격이 파괴되고 생활양식이 상막해집니다. 영적인 침체에서 고통하지 말고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순종하므로 나음을 얻어야 합니다.
③ 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15-19절).
10명의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가다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 중의 1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15-16절). 나병환자 10명이 제사장에게 가다가 나음을 얻었는데 그 중 사마리아인 1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한 것입니다. 9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보여서 나았다는 판결을 받고 마을로 들어가 이전과 같이 살 것을 생각하니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들뜬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보이고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떠났습니다. 어쩌면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낫고 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나은 것 자체에 만족하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를 드리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1사람은 감격에 넘쳐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고쳐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감격에 넘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낫게 해 주신 것에 대해 큰 소리로 찬양을 하고 예수님께 낫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 것입니다.
1명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9명은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자기들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타락한 이방인처럼 생각하여 멸시하며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이스라엘시대 때부터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고 절기를 바꾸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웠습니다. B.C.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멸망한 다음에는 이주한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되었고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때에는 성전 내부에 ‘이방인 출입금지’ 경고문을 세웠는데 사마리아인들도 비유대인으로서 이방인 범주에 넣어 성전 내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성전 예배에 참여할 기회까지도 박달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외부적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율법대로 산다는 자들은 자기 욕망이 채워진 것만으로 만족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멸시받은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예수님께 감격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에게 10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9명은 어디 있느냐고 했고 1사람의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17-19절). 예수님은 10사람이 고침을 받았는데 1사람만 영광과 감사를 드린데 한탄하시면서 영광과 감사를 드린 1사람 사마리아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1사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감사드린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은 증거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 말씀의 지시로 불치병인 나병을 고친 것은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인 증거로 여기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나병이 나은 것이 기뻐 빨리 제사장에게 보이고 마을 가족에게로 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인지하고는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감사의 내용은 아마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욥기42:5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한 것 같은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구원하였느니라’(σεσωκεν)는 ‘구원하다’(σωζω)의 완료형으로서 이미 구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죄에서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은데 그치지 않고 영(영혼)까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나병은 나았어도 다시 나병에 걸릴 수도 있고 다시 걸리지 않아도 다른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다른 질병이 걸리지 않는다 해도 마침내 죽게 되고 죽은 후에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에서 자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영(영혼)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나은 것보다 훨씬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만유인력'(萬有引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력'(重力)이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질량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당겨 더욱 많아지는 원리입니다. 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살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잃고 부한 사람들이 더 많아집니다. 외부의 강제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부의 집중현상을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은 '마태효과'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13:12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한 말씀에서 차용한 말입니다. '있는 자'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이고 '없는 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을 동일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깨닫는 자가 있었고 깨닫지 못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 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깨달아 믿고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자는 많은 은혜를 받고 깨닫지 못하는 자는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감사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를 많이 느끼는 사람은 더욱 감사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입니다. 디모데전서6:7-8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입니다. 가족이 있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예배하며 찬송하며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사역을 할 수 있다면 더욱 감사할 일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와 기적을 경험하게 했다면 더욱 감사할 일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경험할 때뿐 아니라 나쁜 일이 생겼을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있는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다가 사자굴에 들어가는 사형을 받게 되었을 때 감사하며 기도했고 그 결과 사자 굴에서 건짐을 받았고 더욱 많은 왕의 총애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니엘6:10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지신 목적과 계획과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할 때 감사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열악한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앙이 하나님이 더 가치 있는, 더 나은 은혜를 주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입니다. 감사하는 신앙이 더 큰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3. 인자의 재림에 관한 교훈 (20-37절)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➀하나님 나라는 무리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20-22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20절).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이 땅에 이루어질 정치적 왕국이었습니다. 다윗왕과 같은 이상적인 왕이 와서 로마 제국 세력을 타도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었고 신국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0下-21절).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 신령한 눈으로야 볼 수 있는 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정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에서 시작되어 개인의 모든 삶으로 확장됩니다. 또한 무리의 유기적 관계와 그 모든 활동 영역으로 확대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너희 안에’(εντος υμων)는 개인의 마음 속을 가리키는지 무리의 유기적 관계 속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한 말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므로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사역이 현장에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로 한 말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22절). ‘인자의 날’은 ‘주의 날’과 같은 표현으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자의 날이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면 제자들이 아직은 그 때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➁주의 임하심은 번개가 번쩍임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3-25절).
사람이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이지만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23-24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종말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임을 자처하며 자기들이 재림 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나올 것을 예상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자신을 재림주로 주장하며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살후2:1-2). 그래서 제자들에게 재림 주가 어디에 있다고 주장할지라도 마음이 현혹되어 그곳으로 가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재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임하심은 번개가 하늘 이쪽에서 저쪽까지 비침같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번개는 일시에 온 세상에 번쩍이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처럼 주의 임하심도 은밀하게 이루어지거나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일시적으로 가시적으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4:23-24에서는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태복음24:26-27에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미혹을 하겠지만 그들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믹13:21-22, 계6:1-2, 13:14-18). 주의 재림은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도록 초자연적으로 전우주적으로 일시에 가견적으로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7에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계1:7, 11:12, 막13:26, 마24:26, 막13:21, 행1:11). 지금도 예수님이 일정한 장소에 재림하실 것이라 주장하는 자들도 있고, 예수님이 이미 재림했는데 영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이 보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고, 예수님의 재림을 성령의 강림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재림은 일시에 세상 모든 사람(심지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핍박하는 자들까지도)들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25절). 종말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주의 재림은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된 후에 있을 일이란 것입니다. ‘이 세대’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9:41)나 ‘악한 세대’(11:29)와 같은 표현으로서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유대인들에게 버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➂말세에는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6-30절).
인자의 때에도 노아의 때에 된 것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다고 했습니다 (26-27절). 노아 홍수는 창세기7:17-24에 나오는 기사입니다. 40일 동안 비가 내리므로 노아를 포함한 8식구 외에는 모두 물로 죽임을 당한 기사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120년 전부터 경고하고 7일 전애는 정확한 경고를 했습니다 (창7:4). 그런데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멸절당하기 전까지 깨닫지 못하고 멸망당한 것입니다. 홍수가 나서 멸망을 당하기 전까지 경고를 듣고도 믿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일상생활에만 취해 있다가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벧후2:5).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영적 무지와 구원에 대한 무관심이 파멸을 맞게 한 것입니다. 말세에도 사람들도 미래에 있을 환난과 구원에 대한 무관심하고 일상생활의 분주함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에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다고 했습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8-30절). 소돔 멸망은 창세기19:23-26에 나오는 기사입니다. 롯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소돔 성 사람들에게 멸망할 것을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고 심지어는 롯의 사위들까지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창19:13-14). 소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육체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두 천사가 롯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천사들은 비의적 현상으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의 집을 에워싸고 그 두 사람을 이끌어 내라고 했습니다. 그들과 상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19:4-5). 창세기19:5에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했습니다. '상관하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어근 '야다'(ידע)는 경험을 통해 안다는 말로서 여기에서는 성교(性交) 곧 동성애(同性愛)인 남색(男色)을 가리키는 완곡어로 사용한 말입니다 (롬1:24,27, 유1:7).
동성애는 육체의 욕정과 쾌락을 일삼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도 하나님이 내신 성적 지향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주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가 2,000년 이전까지는 선천적이라는 주장이 많았으나 그 이후에는 많은 학자들이 후천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1999 라이스, 2005 해머, 2012 드라반트, 2018 웨도우 등). 그들에 의하면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을 표본 연구한 결과 동성애 유발 유전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해머의 경우 1,993년 연구발표에서 Xq28가 남성 동성애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발표했었지만 다시 연구한 2,005년 연구에서는 관계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웨도우 같은 경우 2,018년에 약 5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과학적으로 동성애 유전자는 없으며 동성애는 유전된 것이 아니며 동성애는 선천적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 셈입니다. 곧 동성애는 선천적으로 유전되어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성전 왜곡에 의해 나타난 현상입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고 (창1:17-28), 하나님이 세운 가정 원리를 거역하는 것이고 (창2:24), 성적인 욕망의 극치이고 (롬1:16-27), 가증한 죄입니다 (창19:1-11, 레18:22, 20:13, 고전6:9). 소돔 사람들은 롯의 집에 들어온 두 천사(남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기 위해 끌어내라고 했을 때 롯은 그 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에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딸이 있으니 그들에게 좋은 대로 행하고 두 남자에게는 아무 일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창19:6-8). 이는 소돔성 사람들이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소돔은 그야말로 죄악이 관영한 성읍이었습니다 (창19:15, 벧후2:6-8). 소돔 사람들은 멸망의 경고를 듣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육체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다가 멸망당한 사람들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과 롯 때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일상생활에 몰두했고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성적 타락에 빠졌습니다. 말세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경고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육체적으로 재물을 모으며 쾌락을 누리는 데에만 몰두합니다. 디모데후서3:4에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의 재림 때에 경각간에 심판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망하지 말고 따로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8:4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➃환난 때에는 귀중품 때문에 돌이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31-33절).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돌이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31절). 주의 재림 직전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인데 그 때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의 기구나 도구나 물품 등의 귀중한 것들을 가지러 가지 말고 밭에 있는 자도 그것들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4:16-18에는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막13:15-16).
첫째,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습니다. 유대 산지에는 동굴이 많아 전쟁 때에 피신처가 되었습니다. A.D.68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한 그리스도인들이 베레아 지방의 벧스안 남동쪽 요단 계곡에 위치한 펠라(Pella)로 피신하여 몇 년 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때 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usebius). 오늘날 영적인 면에서도 도망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산’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하여 각별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시11:1, 출3:1-12, 19:1-25). 영적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영적 시온산을 향해 도망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계14:1).
둘째,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재난이 올 때에 집안의 물건을 가지고 갈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옥은 그 지붕이 평평하여 휴식처이기도 하고 기도처이기도 했습니다 (삼상9:25, 행10:9). 지붕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하나는 집 안으로 하나는 집 밖으로 나 있어서 위급 시에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망할 때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챙기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중품이라 해도 그것을 가지러 갔다가는 도망할 기회를 잃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겔7:19, 창19:26, 눅17:32). '지붕'은 유대인들에 있어서 휴식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묵상과 기도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행10:9). 영적으로 환난 때에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벧전4:7, 5:8). 기도생활을 하다가 다른 이유 때문에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생활의 염려와 재리의 근심으로 인하여 기도하지 못하면 영적 생명이 죽게 됩니다. 영적 생명이 사는 것보다 물욕 정욕 사욕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요일2:16).
셋째,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작지는 그들이 거하는 성 밖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밭에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방의 일교차는 매우 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밭에 일을 하러 갈 때는 낮의 뜨거운 기온을 생각하여 겉옷(외투) 입지 않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갑니다. 만일 겉옷을 입고 나간다 하더라도 낮에 일하는 동안에는 옷을 벗어서 한쪽 가에 두었다가 일이 끝난 다음에 그 옷을 입고 귀가합니다. 그런데 만일 겉옷을 안 입고 왔을 경우에 피신할 상황이 된다면 밤에 추위를 버텨야 하므로 겉옷을 가지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위급하기 때문에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옷을 가지러 가게 되면 생명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밭'은 경작지입니다. 밭에서 일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을 하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겉옷'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있으면 좋지만 생명이 사는 데는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22:36). 말씀 전하고 전도하는 생활하다가 없어도 될 것 얻기 위해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없어도 될 것 잃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32절). 소돔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황과 불로 멸망한 곳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화산폭발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위치한 사해 인근은 어느 지역보다 지각활동이 활발한 곳입니다. 그래서 화산의 가능성이 높은 곳입니다. 화산은 지구핵심부의 가스로 조성된 거대한 압력이 지각의 엷은 틈으로 분출되는 현상으로서 다량의 유황과 가스와 화산재로 그 지역을 황폐화시킵니다. 더욱이 유황과 가스는 번개와 자연발화로 폭발하여 고온에 타는 유황불로 땅에 떨어집니다. 소돔 고모라는 지금의 사해 남단 싯딤 평원이라 불리던 곳인데 그 지반을 형성하던 유황과 역청 등이 분출하여 함몰된 곳입니다. 그 함몰된 곳으로 물이 흘러들어와 사해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 과학적 이론은 상당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소돔 고모라 멸망이 초자연적 현상이든지 자연적 현상이든지 그 배후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19:26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성과 고모라성을 유황과 불로 심판할 때 천사를 보내어 소돔성에 거주하던 롯에게 소돔성을 빨리 탈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자 천사가 롯와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붙잡아 소돔성 밖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후 79년에 이탈리아 폼베이(Pompeii)에 있는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분출하여 화산 분출물들이 폼페이를 덮친 일이 있었습니다. 화산의 유독가스는 폼페이 시민을 질식시켰고 6m에 이르는 화산재가 뒤덮었습니다. 후에 폼페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땅을 파내려 가던 중에 화산재 사이에서 공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서 감독자가 그 구멍을 통해 빈 공간에 회반죽을 부어 넣고 회반죽이 마른 다음에 주변 화산재를 떨어내자 남자와 여인과 아이와 가족 동물 원형이 드러났습니다. 화산재가 사람을 덮은 후 시간이 지나면서 화산재의 화학성분 작용으로 단단한 화학성분의 물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다공성의 경석으로 된 화산재 돌 사이로 물들이 스며들면서 사람의 시체의 화학성분이 녹으면서 빈 공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신이 녹은 공간 주위에는 화산재 돌은 그대로 있어서 주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Harry Rimmer). 그래서 지금은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표정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소금 기둥은 염기를 갖고 있는 온갖 화학성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8년 소돔 고모라 지역으로 추정되는 사해 남쪽 끝자락을 발굴하면서 엄청난 소금층과 막대한 양의 유황을 발견했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화산으로 멸망한 것을 받아들일 경우에 폼페이 사건으로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돌아보았으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근 '나바트'(נבט)는 ‘바라보다’ ‘주시하다’ ‘열심히 바라보다’ '골똘히 바라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살짝 돌아본 것이 아니라 소돔성에 있는 재물 때문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소금으로 된 조각상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롯의 처가 소돔성이 멸망할 때 왜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는지를 생각하고 장망성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장망성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8:4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신앙의 달음박질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빌립보서3:13-14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물질 때문에 가야할 바를 가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 때문에 생명 살리는 사역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9:6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33절). 육신의 생명을 보전하려는 자는 영적 생명을 잃을 것이고 육신의 생명을 잃는 자는 영적 생명을 살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욕망에 속한 것들에 가치와 목적을 두는 자들은 영이 살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에 속한 것들을 잃더라도 영적인 욕망에 가치와 목적을 두는 자들은 영이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⑤재림 때에는 구원받을 사람도 있고 버림당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4-37절).
예수님은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4-35절). 마태복음24:40-41에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과 마태복음의 내용을 종합하면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가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며, 두 사람이 함께 밭에서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며,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돌발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지 못할 때에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마24:43-44, 살전5:2, 벧후3:10, 계3:3, 16:15).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성도들이 들림(휴거)을 받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고, 요한계시록11:11-12에는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에는 구원받은 자가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공중으로 들림 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는 땅에 남아있어 재앙을 당합니다 (계16장). 그 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는 변화된 몸으로 들려 올릴 것이고(휴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불신자는 환난 가운데 버려둘 것입니다. 그 때에는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들림을 받을 것이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들림을 받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또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다가 한 사람은 들림을 받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잠을 자는 두 사람은 부부일 것이고, 밭에서 일을 하는 두 사람은 남자들(주인과 종 혹은 일꾼들)일 것이고, 맷돌질을 하는 두 사람은 여자들(여주인과 여종 혹은 여종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혈연적이든 사역적이든 가장 친밀한 사이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들림 받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은 같은 위치에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 자라도 다른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거듭난 사람은 들림을 받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해 예수님을 믿지 않되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어디오니이까’ 물었고 예수님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고 했습니다 (37절). 마태복음24:28에도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두 사람이 함께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고 어떤 사람은 재앙에 버려둔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재림과 심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을 것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이 일정한 곳에서 부분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갑작스럽게 신속하게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4:27-29 참조). 시체(주검)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신속하게 모여듭니다. 그처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예수님이 신속하게 재림하여 심판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5:1-13에서 이른바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10처녀가 있었습니다. 10처녀가 모두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미련한 5처녀는 여유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고 슬기로운 5처녀는 그릇에 여유분의 기름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습니다. 그러다 밤중에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처녀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5처녀는 등불이 꺼져가자 슬기로운 5처녀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슬기로운 5처녀는 자기들도 부족하니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5처녀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슬기로운 5처녀는 신랑과 함께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후에 미련한 5처녀가 돌아와서 신랑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나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5:13). 유대의 결혼 풍습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정혼(定婚)입니다. 정혼은 신랑 아버지와 신부 아버지 사이에 공식적인 결혼 합의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약혼(約婚)입니다. 결혼 당사자들이 신부측 집에 모여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예물을 전달하는 결혼 약속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결혼(結婚)입니다. 일반적으로 약혼한지 1년이 경과한 후 결혼식을 합니다. 그 때는 신랑 집에서 피로연을 준비하고 신랑이 신부 집으로 찾아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두 행렬을 하며 돌아와 잔치에 참여합니다. 그 잔치는 며칠 동안 벌렸습니다. 유대의 결혼식은 신랑 집에서 결혼잔치를 준비하고 신랑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랑은 신부 집에서 종교 예식을 하고 해가 지면 신부를 데리고 가두행렬을 하며 자기 집으로 데려옵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올 때 상당한 거리까지 가서 배웅을 합니다. 이 때 배웅을 나간 사람들은 이미 선정된 순결한 처녀들입니다. 그들은 주로 10명이 선정되었고 그들은 등불을 들고 나가 신랑을 맞이하고 집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본문 이야기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신랑 집으로 올 때 들러리 역할을 한 처녀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들러리를 10명을 선택한 것은 '10'수를 완전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승천 하셨는데 이미 죽은 성도들과 함께 다시 재림하실 것을 연상케 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는 모든 성도들이 주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래서 '열 처녀'는 지상의 모든 성도를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과 기름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타락과 환난으로 신앙이 잠든 때에 갑자기 오실 것이기 때문에 기름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타락과 환난으로 영적인 밤이 올 때에도 등불을 계속 켜서 주님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신앙실력을 길러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結言>
마태복음24:42에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임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때에도 견딜 수 있도록 평안할 때에 신앙실력을 길러놓아야 합니다. 종말론에 관한 음모론 같은 것에 속지 말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다윗이 평소 양을 지킬 때 닦아놓은 물매 던지기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평소에 영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작은 문제가 있을 때 기도와 말씀으로 이기면 신앙 실력이 그만큼 자라고 그런 경험을 반복하므로 큰 환난도 이길 수 있는 신앙 실력이 이루어집니다. 그 동안 신앙실력을 길러 놓은 성도는 큰 어려움이 닥쳐도 잘 이겨 나갈 것이고 지금 같은 상황을 잘 이겨나가는 성도는 종말에도 유혹과 환난을 이겨나갈 실력이 구비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