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18:1-43
<題目> 기도와 영생에 관한 교훈
<序言>
본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 후반부에 펼쳐진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이 드러나며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부각된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 비유(1-8절),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9-14절), 어린아이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15-17절), 부자 관리의 영생 질문에 대한 답변(18-23절),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교훈 (24-27절), 헌신과 상급에 관한 교훈(28-30절), 세 번째 수난 예고(31-34절), 거지 맹인 치유(35-43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 비유 (1-8절)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1절). 이는 하나님이 고통 받고 있는 자기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51:22-23, 살전4:6) 제자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 낙망치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쉬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낙심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GTS) 기본형 ‘엥카케오’(εκκακεω)는 ‘나쁘게 되다’ ‘약하게 되다’ ‘활기를 잃다’ 등의 뜻입니다. 무엇으로 인해 이전보다 못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지쳐서 무기력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을 때 하나님께 절실한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 않을 때는 심한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포기해 버립니다. 기도하기 전보다 더 낙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같은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시되 가장 적절한 때에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2-5절). 이 비유를 각색하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의 한 지역에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악한 재판장이었습니다. 이른바 속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악한 일을 해도 어떤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자기의 마음대로 행하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호소했습니다. 그녀는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 그에 대한 원한이 깊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볼 때 그는 초라한 행색이었고 혼자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준다 할지라도 뇌물을 기대할 수 없었고 무시해버린다 할지라도 문제를 제기할 사람도 없어보였습니다. 오히려 그를 상대해주는 것은 업무량만 늘어나 피곤하게 여겨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그의 상소를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안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다음날 또 찾아와서 자기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매일같이 찾아와 애원했습니다. 재판장은 생각했습니다. '오늘 안 들어주면 내일 또 찾아와 괴롭게 하겠지? 그러니 오늘 들어주어 다시 오지 않게 하자' 그리고는 그녀의 상소를 받아들여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재판장’은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제국에 의해 임명되었거나 당시 유대 지방의 통치자였던 헤롯왕에 의해 임명된 재판장일 것입니다. 당시 재판장들은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질서유지의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들은 특성상 뇌물을 좋아하고 약자들을 억압하곤 했습니다 (Tacitus). 본문에 나오는 재판장도 불의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시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는 자로서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소외계층으로서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출22:22, 시68:5). 본문의 과부는 남편이 없을 뿐 아니라 원수에 대해 큰 원한을 가질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했고 그런데도 도와 줄 사람이 없었고 재판장에게 건네줄 뇌물을 준비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에게 자주 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탄원했습니다. 공의로운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자주 가서’에 해당하는 ‘에르케토’(ηρχετο)의 시제가 미완료형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과부가 반복하여 계속적으로 재판장에게 나아가 호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판장이 아무리 불의한 사람이라도 재판장 아니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재판장을 집요하게 매달려 간청을 한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공의로운 재판을 통해 가해자를 벌하고 그에게 빼앗긴 것들을 찾게 해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재판장은 과부의 간청을 얼마 동안 듣지 않았습니다. ‘그가 듣지’에 해당하는 ‘에델렌’(ηθελεν -GNT)은 미완료형으로서 과부의 간청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공정한 재판보다는 사욕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뇌물을 줄만한 재물도 없고 뒤를 봐줄만한 세력가도 없는 과부의 간청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이지만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경우 늘 와서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은 과부가 자기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찾아와서 탄원할 것이고 그럴 경우 매일같이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8절에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속물 같은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시며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나 성도 전체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애원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어찌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속하게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8절 하반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종말에는 과부처럼 간청하는 믿음을 가진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은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수 있을 줄 알고 매일같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곧 포기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말론적으로 볼 때 환난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나 자신들이 예수님이 생각하는 때에 오지 않으므로 낙심하여 포기해버릴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마25:1-13).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과부는 자기 원한을 풀어줄 자는 오직 재판장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매일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자는 하나님뿐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도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7:11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라고 했고, 시편68:5에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했고, 시편145:18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구속하고 목적을 두시고 영광이 있는 성도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본문 7-8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7:7-11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눅11:8-13). 야고보서1:5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묘한 계획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여 우리에게 언제 무엇이 있어야 유익한 줄 알지 못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시기 위해 때와 방법을 계획하시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기도는 원한과 열정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과부는 자기를 괴롭게 하는 대상과 문제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원한이 재판장에게 매일 부르짖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우리를 괴롭게 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원한을 가져야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령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또 죄가 있습니다. 히브리서12:4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 자신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한 생각과 성품, 곧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교만과 광패 등입니다 (마15:19-20,막7:21~23). 또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는 데 방해되는 모든 환경이 있습니다. 마태복음16:23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것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체일 수도, 사람일 수도, 질병일 수도,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에 대한 원한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데에 필요한 영육간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원인을 알고 그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열망을 가져야합니다. 그 소원이 클수록 기도의 열의도 커집니다. 원한을 적극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소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건강과 명예에 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소원을 두어야합니다. 자기의 인격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 성령의 감동을 좇지 못한 것,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등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합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합니다. 마태복음6:33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1:5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해 사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구해야합니다.
누가복음11:5-7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밤중에 여행중에 있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에게 잠자리뿐 아니라 식사를 제공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식사로 제공해야할 떡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고는 밤중에 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어리만 빌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친구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옷을 입고 떡을 찾아 나가서 준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함께 잠을 자는 식구들이 깨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 세 덩어리를 빌리는 일은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례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계속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떡을 가지고 나와 빌려주었습니다. 밤중에 떡 세 덩어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친구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강청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2장에 보면,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동서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무시와 모욕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브닌나는 아들을 낳았고 한나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으므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에 원한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묵시가 그치므로 스라엘을 블레셋 가운데서 구원할 자가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 엘리 제사장이 볼 때에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토해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사무엘을 낳게 했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구원운동을 하셨습니다. 한나로 하여금 이런 기도를 하게 된 것은 고난으로 인한 원한이 컸기 때문이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셋째, 기도는 지속적으로 해야합니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대상인 것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응답받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9:1-27에 보면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하기를 작정한 날부터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로 생각하고 가브리엘 천사(계시전달을 맡은 천사장)를 통해 응답 내용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바사국군으로 비유된 사탄이 가로 막았습니다. 그래서 미가엘 천사(전쟁을 수행하는 천사장)가 와서 대신 싸워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가엘이 사탄을 물리치고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도착한 날이 21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도중에 그만두면 안 됩니다. 작정한 날을 다 채우기까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16년 만에 기도가 이루어졌고,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38년 만에 이루어진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스겔36:37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고 했습니다. 아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감사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빌립보서4:6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합니다. 마태복음21:22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약1:5).
2.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9-14절)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9절).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과 독선과 아집을 지적하기 위해 말씀하신 비유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 해석과 유전 전승을 가장 옳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자신들이 율법의 규례와 조상의 유전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옳은 삶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독선과 교만 때문에 자기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자들을 멸시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정죄하고 사회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비유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를 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10절).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3번 곧 아침 9시와 정오 12시와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어 (행2:15, 3:1, 10:9) 그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편리한 시간을 택해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할 때는 성전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바리새인’(Φαρισαιος)은 ‘분리하는 자들’ ‘분리주의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들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분리주의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유대교에는 4종파가 있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젤롯파가 있었습니다. 그중 바리새파는 유대교를 대표하는 종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모세 5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그 율법을 생활에서 실행하는데 있어 세부적인 규칙들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들이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율법의 해석과 전통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행하지 않는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런 자들과는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만에 빠져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율법의 중심과 원리와 정신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나타내고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데에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세리’(τελωνης)는 세금 징수원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정한 세액만 바치면 되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에서 정한 세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착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는 로마 앞잡이이며 동족의 고혈을 짜는 자들로서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창기와 동일하게 죄인으로 정죄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11-12절). 바리새인이 따로 세리와 서서 기도했다는 표현은 자신은 세리와 다른 구별된 존재라는 교만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줍니다. 실제로 죄인들과 다르게 구별되게 살려는 정신은 옳은 것이나 그것 때문에 죄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내적으로는 구별되게 살지 못하면서도 죄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기도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는 것이었습니다. ‘토색’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는 부정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간음’은 성적인 범죄를 말합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율법판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목요일과 월요일을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십일조’는 소득가운데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화향과 근채 등 작은 야채까지 그리고 그 야채의 잎과 줄기까지 적용하여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부적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것을 근거로 자신을 의롭게 여긴 태도이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동시에 세리를 죄인으로 정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내적으로는 율법의 정신을 지키지 않으면서 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를 나타내어 자랑하려는 모습입니다. 자기는 내적으로 율법을 모독하면서 외적으로 범죄하는 자들을 멸시하는 것은 가증한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달리 세리는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13절). 바리새인은 성전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했을 것이고 세리는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리는 바리새인과 멀리 떨어져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일반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고 기도하는데 (시123:1, 막6:41, 7:34, 요11:41, 17:1), 세리는 일반적인 기도 자세조차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슴을 치며 기도한 것은 슬픔과 애통과 회개와 참회의 모습입니다 (눅23:48, 렘31:19, 마11:19). 세리는 자신이 범죄한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참회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범죄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한 자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용서를 해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고 했습니다 (14절). 여기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므로 얻게 되는 칭의와 구원과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해 옳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구원론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인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세리는 자기를 죄인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리새인보다 세리를 더 의롭게 여긴 것은 행위에 있어서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고 세리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교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은 겸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야고보서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5:5-6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의롭여기거나 다른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의롭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특히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외적으로 행하는 것을 근거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7:3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고, 디모데전서1:15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시편51:17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3. 어린아이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 (15-17절)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보고 꾸짖었습니다 (15절). 유대인들은 갓난아기들을 랍비에게 데려가 축복을 받게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Chrysostom). 사람들은 그런 관습에 의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이 축복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병행구절 마태복음19:13에는 예수님이 안수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9:13과 마가복음10:3에서는 ‘어린 아이’를 데려왔다고 했으나 누가복음18:15에서는 ‘어린 아기’를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어린 아이’로 번역한 ‘파이디온’(παιδιον)은 7세 미만의 어린 아이를 가리키나 누가가 ‘어린 아기’로 번역한 ‘브레포스’(βρεφος)는 젖 먹는 아기를 가리킵니다. 마태와 마가는 파이디온을 사용했으나 누가는 브레포스를 사용한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누가도 다음절에서는 파이디온이라는 용어로 사용했고 본 절에서는 브레포스를 사용하되 앞에 ‘카이’(και)를 넣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어린 아이들을 비롯하여 젖 먹는 아기들까지도 데려왔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꾸짖거늘’에 해당하는 원형 ‘에피티마오’(επιτιμαω)는 ‘책망하다’ ‘비난하다’ ‘금하다’ 등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부모들이 어린 아기들을 데려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시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예수님께 안수기도를 받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하찮은 일로 예수님이 설교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며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절). 마가복음10:14에는 예수님이 노하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의 접근을 막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불러 노하시면서 그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그런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현재 지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과 그 유기적 공동체의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하나님 말씀으로 통치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τοιουτων)는 이와 같은 자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성격 혹은 특성을 가진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특성은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17절).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으로서 어린 아이 같이 받아들이는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긍정적인 특성을 비유하여 교훈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구절들을 해석할 때 어린 아이들에게 있는 특성들을 빗대어 적용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정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18:3-4은 어린 아이가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낮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한 내용이고, 마태복음19:4, 마가복음10:14-15, 누가복음18:16-17은 어린 아이의 성품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특성이 있음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우선 마태복음18:3-4에는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 아이의 신분과 지위에 관련된 낮은 위치를 강조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바로 앞 내용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왜 성전세를 내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왕들이 누구에게 세금을 걷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자들에게인지 국민들에게인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연히 국민들에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면 왕자들은 세금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마17:24-26).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정치적인 왕 위에 오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마땅히 자기들을 왕자와 같은 높은 위치에 오르게 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왕자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필요 없고 이런 아이 같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는 여자와 함께 사람 수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도 어린 아이와 여자는 가장의 재산 목록으로 여겼습니다. 곧 어린 아이는 평민 축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가장에게 예속되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연약하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은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왕자 같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 평민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아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처럼 높은 자리 곧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 곧 섬기는 위치에 있는 자가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식사자리에서 주인공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안쪽에 앉고 가장 천한 사람이 맨 끝자리에 앉습니다. 끝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끝에 있는 위치 혹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s)는 ‘시중드는 사람’(servant)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는 다른 일원을 시중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라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되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막9:35).
그리고 예수님은 마태복음19:14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어떤 점이 강조되었는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행구절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어린 아이의 성격과 관련된 특성을 강조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10:14-15에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린 아이의 받드는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받들지’로 번역된 기본형 ‘데코마이’(δεχομαι)는 ‘받다’ ‘취하다’ ‘영접하다’ 등의 뜻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 중 받아들이는 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누가복음18:16-17에도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기본형도 ‘데코마이’(δεχομαι)로서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받아들이는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는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인하고 대적하고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현장에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가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의 표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내주와 하나님 말씀의 내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거듭나고 성령님과 말씀이 지배하여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적 공동체에 확대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온 세계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말씀을 받았으니 더욱 성령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에 붙잡히려 해야 합니다. 성령과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여 우리의 인격과 행동과 삶을 통제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유기적 공동체도 성령과 말씀이 다스리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도를 통해 사회에까지 확대되고 선교를 통해 세계에까지 확대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자신이 성령과 말씀의 지배를 받는 만큼, 성령과 말이 지배하는 영역에 수고하는 영향을 미친 만큼 그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4. 부자 관리의 영생 질문에 대한 답변 (18-23절)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① 관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 물었습니다.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18절). ‘관리’는 마태복음19:22에는 부자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관리’에 해당하는 ‘아르콘’(αρχων)은 방백, 왕, 통치자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 관리는 정확히 어떤 관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일 수도 있고, 산헤드린 회원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 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선한 선생님’으로 호칭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한 분은 하나님뿐이며 선한 것은 율법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님에 대해 존경심과 경외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영생’(ζωη αιωνιος)은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서 죽음을 극복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죽어도 부활하여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생(永生)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어서 얻어지는 은혜입니다 (요3:5,16, 마16:16-17, 요11:25). 요한복음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고 (마16:16-17), 요한복음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요한복음11:25-2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이 영생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롬10:10). 그런데 이 관리는 영생에 대해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얻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영생의 조건을 선행으로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것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9절). 이 관리가 예수님에 대해 ‘선한 선생님’이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답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여 높이기 위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한 데 대해 거부하고 선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예수님을 선하다 하는 것을 아시고 선의 의미를 절대적인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지만 성부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20절). 이는 십계명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20:12-16, 신5:16-21). 1-4계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관한 1-4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의무에 관한 5-10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계명(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조건으로 율법준수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행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리는 계명(율법)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율법준수에 자신만만하여 그것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곧 관리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자신은 계명(율법)을 다 지키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생각과 의도를 아시고 그의 허영을 드러내기 위해 계명(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네가 계명(율법)을 다 지키므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 자부하고 그것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럼 네가 정말로 계명(율법)을 다 지킨다는 말이냐?’의 의미로 계명(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③ 관리는 모든 계명을 지키니 무엇이 더 부족하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계명을 다 지켜야 한다고 대답하시자 관리는 그것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21절). 마태복음19:20에는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계명)을 다 지키는 일에 자신 만만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 율법을 준수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는 실제로 어려서부터 율법에 대해 배웠을 것이고 비록 외부적으로 습관적으로나마 지켰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피상적으로 지킨 것 때문에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④ 예수님은 그에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관리의 말을 듣고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22절).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막10:21). 마태복음19:21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율법(계명) 준수에 온전하고자 한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하나의 지켜야 할 계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켰다고 자신 만만해 하는 것이 습관적 혹은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5~10계명의 중심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9:18-19에서는 5~10계명을 말씀하시면서 끝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말씀을 추가했습니다. 그가 계명(율법)을 바로 준수하려 한다면 계명(율법)을 주신 목적과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로 나타나는 행위는 무엇이라 규정하기 힘들지만 이 관리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자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큰 부자이면서도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계명(율법)을 다 지킨다고 자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보다 가치 있는 상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12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관리가 맨 먼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지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계명(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과정에 속한 질문이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결론에 속한 대답인 것입니다. 곧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진짜 대답인 것입니다.
⑤ 관리는 심히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 관리는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23절). 마태복음19:22에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0:22에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자 이 관리는 재물이 많은 큰 부자였으므로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가버린 것입니다. 이 관리는 물질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율법(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보다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른 것보다 사랑했고 영생을 얻는 것보다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에 대한 포기는 그가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다음에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4:19-20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라고 했습니다 (막1:18).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증거이며 구원과 영생을 확신한 증거이며 예수님께 인생을 맡긴 증거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목적에 합당한 결실을 할 수 없습니다. 8:14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있으면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mammonism). 골로새서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약1:15, 요일2:16).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오는 관리에게 있어서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18:22). 3:10-14에는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막10:29-30).
5.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교훈 (24-27절)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한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있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자 관리는 근심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는 재물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를 원했지만 재물 때문에 영생 얻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반응을 보고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24-25절). 예수님은 부자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지에 대해 격언을 이용해 말한 것입니다.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하고 했다고 합니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 귀를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했습니다. ‘낙타’와 ‘바늘 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낙타’와 ‘바늘 귀’로 보는 견해입니다 (Lange). 이 경우 짐승인 낙타가 바느질하는 바늘 귀(구멍)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과장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낙타’ ‘좁은 문’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Barclay). 이 경우 ‘바늘 귀’를 ‘좁은 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시 성의 성곽에는 성문이 있었는데 한 성문에 2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 큰 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 수레 등이 다니는 넓은 문이며 작은 문은 사람이 밤에 드나드는 문으로서 사람이 아무 짐도 지지 않고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그 작은 문은 흔히 '바늘귀 문'으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바늘 귀’는 바로 그 ‘좁은 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타처럼 큰 짐승이 사람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밧줄’과 ‘바늘 귀’로 보는 견해입니다 (Calvin). 이 경우 ‘낙타’를 ‘밧줄’로 보는 경우입니다. ‘밧줄’에 해당하는 ‘카밀로스’(καμιλοs)를 ‘낙타’를 의미하는 ‘카멜로스’(καμηλοs)로 혼동하여 오기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선박용 밧줄처럼 굵은 밧줄을 바늘 귀에 꿰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론 중 어느 것을 채택하든지 본문의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모두 가능성이 힘든 것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처럼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처럼 힘든 것은 재물이 자기의 우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mammonism). 재물을 숭배하는 사람은 재물을 인생의 가치와 목표와 목적과 행복으로 여깁니다. 생각과 사상과 인격과 행동과 삶을 재물에 지배를 받습니다. 재물을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재물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둡니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해야 할 경우엔 예수님을 믿는 일이나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일도 거부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격을 만들어가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내세의 천국에 가기도 힘들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의 복에 참여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부자가 재물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부(富)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부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복 가운데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시편112:1-3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창26:12-13, 욥1:1-3).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 가운데 그 부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왕정시대에 엘리사가 수넴 지역에 사역을 다닐 때 수넴 여인이 자기 집에 방과 책상과 촛대를 설치하고 숙박을 책임져주었습니다 (왕하4:8-10).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삭개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에 모셔서 숙박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눅19:1-10).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무덤에 장사지내드렸습니다 (마27:57-61).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가져와 발라 세마포로 싸드렸습니다 (요19:39-40). 그들은 부와 재물 때문에 은혜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재물 자체가 은혜를 거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와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진 사람이 그것들을 우상처럼 여겨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욕심이 문제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고, 야고보서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부자이든지 가난한자이든지 재물에 대한 욕심이 크면 은혜를 받기 힘들고 욕심이 없으면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12:15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고, 골로새서3:5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재물이 자기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자신이 재물을 지배해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든지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4:11-12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부요하면 부요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신앙생활에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한편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26절).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는 말은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부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욥1:10),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자,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27절). 마태복음19:26에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한 것 같은 것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거절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에베소서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6. 헌신과 상급에 관한 교훈 (28-30절)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과 부자 관리의 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부자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자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자 관리가 자기는 계명을 다 지켰으니 무엇을 더 해야 하겠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 자신 따르라고 했습니다. 부자 관리는 근심하면서 돌아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영생도 얻을 것이고 그 외에 더 많은 상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고 했습니다 (28절). 마태복음19:27에는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고 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막1:18,20, 2:14, 눅5:28). 마태복음4:22에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고, 누가복음5:11에는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 관리와는 달리 예수님의 요구대로 행한 자들로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예수님께 그 같은 질문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29-30절에 나오는 대답 전에 먼저 한 대답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19:28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는 사실이 전제된 표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자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올라 모든 사람을 심판할 때 함께 심판의 자리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를 따른 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심판의 주체가 될 때에 그 권위에 참여할 것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주체는 주님만이 될 수 있고 제자들이 심판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심판 사역에 참여하여 보좌하고 대행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29-30절). 마태복음19:29에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0:29-30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복음을 위해’는 동일한 다른 표현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입니다. ‘부모형제나 아내나 집이나 전토(田土)’를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포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불가불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박해’를 받는다는 것도 일부러 핍박을 받는 것을 자초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므로 인하여 피할 수 없는 핍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일부러 모든 혈연관계를 끊고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일부러 핍박을 자초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이 장해가 될 경우에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 하거나 그것을 받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각오하고 수용하고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고 또 손해 본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상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여러 배 혹은 백 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배’ ‘백 배’는 대가를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것 자체가 풍요롭게 된다는 의미도 있고 그것들 이상의 위로와 가치를 얻는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원리이고, 특수한 경우에는 이 세상에서는 육체적 물질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경험을 하므로 그것들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내적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핍박을 받는 자는 내세와 금세에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고난도 옵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하늘나라에서 받은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받는 위로도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고린도후서1:5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또 이어서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9:30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막10:31).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주를 따른 자들은 주께서 심판의 주체로 나타나실 때에 심판에 참여할 것입니다. 또 주를 위해 희생한 것에 비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위로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도 있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천국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천국에 와 있고 천국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오지 않은 것에 놀랄 것입니다. 또 천국에서 작은 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큰 자가 되어 있고 천국에서 큰 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작은 자가 된 것에 놀랄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관념에서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결론적 선언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변론해온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한 말일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이고 나중 된 자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눅13:24-30).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방인 특히 세리나 창기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는 제자들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앞에서부터 대화해온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주의 나라가 임하면 누가 큰 자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12보좌에 앉아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할 권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자는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마음속에는 당연히 누가 권세와 상급에 있어서 더 앞 설 것인지, 혹은 어떻게 해야 앞선 자가 될 수 있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당연한 의문을 미리 아시고 결론을 내렸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선언 바로 다음에 나온 마태복음20:1-16의 비유를 보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비유는 이른 바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 추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포럼(forum)에 나가 이른 아침, 제 3시, 6시, 9시, 11시에 품꾼을 고용했습니다. 이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이 됩니다. 6시, 9시, 12시, 3시, 5시에 고용을 한 것입니다. 주인은 일을 마치고 종들에게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씩 주는데 가장 늦게 들어온 자부터 주었습니다. 주인이 인정해 주는 기준은 일한 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 곧 충성도였던 것입니다.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주인은 하나님을, 품꾼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구원과 영생이 같으나 성화(聖化)와 사역에 대한 평가는 다르게 주어집니다. 충성도에 따라 영광과 존귀와 상급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관념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먼저 된 자가 마지막 때에 나중 될 수도 있고 세상에서 나중 된 자가 마지막 때에 먼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만족과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믿은 자가 먼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시기에 개의치 말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포도원에 가장 늦게 마감 1시간 남겨놓고 들어온 품꾼처럼 하나님 나라 일을 해야 합니다. 성화뿐 아니라 사역에서도 일을 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1시간 남았지만 하루치의 일을 해주려는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인 것입니다.
7. 세 번째 수난 예고 (31-34절)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9:22-27, 43-45에 이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사마리아 지방을 돌아 유대 지방 베레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유월절에 맞추어 올라가 대속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이 제자들 앞서 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고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막10:32).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월절에 친히 대속 제물이 되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가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면서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31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것을 인자에게 이루기 위함이라는 내용은 마태와 마가는 생략한 부분입니다 (마20:18, 막10:33).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말씀들 중에 메시야(구원자)의 대속을 위한 고난과 죽음이 시편9:19, 22:15, 이사야53:9, 스가랴12:10 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속을 위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은 바로 그 말씀대로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자’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구원자)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는데 예수님 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인자'(人子)의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s του ανθρωπου)는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14의 '인자같은 이'인 ‘케바르 에나쉬’(כבר אנש)를 말하는 관용적 용어입니다. 곧 '인자'는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임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창28:10-14, 삼하7:12-14, 겔1:26-28, 단7:13-14). 예수님은 자신이 그 구원자로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고난 받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52:13-53:1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그는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32-33절). 마태복음20:18-19에는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인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구원자)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는데 예수님 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넘기고 이방인들이 조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15:1)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말합니다. '산헤드린'(סנדרין, συνεδριον, Sanhedrin)은 '함께'와 '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기원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없지만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구성한 70인 장로회에 기원을 두고 있고 (민11:16-24)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재조직했다고 알려져 있고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활동을 했습니다. 공회원은 의장 1명(대제사장)과 의원 70명(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가지고 행사하는 막강한 공기관이었습니다. 모세 때나 에스라 때에는 좋은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 때에는 심히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로마 제국의 유다 총독인 빌라도 정권을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죽이도록 내어주고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할 고난과 죽음은 육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가장 큰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것은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심을 믿는 자는 법정적으로 죄 용서를 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했고, 베드로전서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며 신앙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향해 마주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삶과 사역이 그 길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향해서만 가는 분이었습니다 (눅22:22, 요4:34). 우리도 제자로서 사명이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34절).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과 신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다분히 육체적 정치적인 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유대의 왕이 되고 유대를 다윗 왕 때의 번영한 국가로 재건할 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의 왕이 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은 어떤 자리에 오를 것이며 어떤 상을 얻게 될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인 것을 드러내야할 때가 되기 전까지는 감추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깨닫게 해야 할 때가 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도 말씀하셨던 것은 제자들이 깨달아야 할 때에 기억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요16:4, 막14:72, 눅24:6).
8. 거지 맹인 치유 (35-43절)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였습니다 (35절上).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 지방을 둘러 요단강 동쪽 베레아에서 방향을 돌려 요단강 서쪽 유대 지방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여리고를 지나신 것입니다.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8km 정도에 유치해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예루살렘은 약 24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구여리고와 신여리고로 분리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구여리고가 거의 황폐화되어 있었고 신여리고가 발전해가고 있었습니다. 신여리고는 헤롯왕이 건설했고 헤롯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종려나무가 많은 오아시스 땅이어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그 구여리고에서 신여리고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가는 도중 여리고를 지날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을 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35-38절). 마태복음20:30에는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라고 했고 마가복음10:46에는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고 했습니다. 아마 두 맹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맹인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Bartimaeus)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바디매오의 아버지와 바디매오는 여리고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맹인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배척을 당했습니다. 바디매오도 맹인이었기 때문에 거지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거지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도로변에서 구걸을 하곤 했습니다. 바디매오도 구걸을 하기 위해 여리고 도로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자신도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자 하는 소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많은 순례 행렬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물었고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하자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맹인의 물음에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했으나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구약성경에서 오실 구원자(메시야)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구원자가 다윗의 자손(후손)으로 오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7:12에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이사야11:1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사11:10, 롬1:3, 15:12).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으로서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메시야)인 것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 사역에 대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61:1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이 고칠 수 없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할 수 있을 줄로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것을 소망하다가 그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소리 지를 때 앞서 가던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39절). 사람들은 거지 소경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며 치병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하지 못해?'하는 식으로 매정하게 질타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도 보잘 것 없는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았는데, 여기에서도 사람들이 거지 소경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예수님을 부르짖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가 소리 질러 이르되'에 해당하는 '크라젠'(εκραζεν)이 미완료인 것을 보아 계속 크게 소리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소리를 듣고 머물러 서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가까이 오매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40-41절). 예수님이 대속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 할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10:32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대속 사역을 위해 비장함과 결연한 모습으로 가던 예수님이 맹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서서 그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맹인에게 예수님이 부르니 안심하고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막10:49). 그러자 그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마가복음10:50에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고 했습니다. 맹인은 밤낮의 기온차 때문에 외투를 밤에는 침구로 쓰다가 낮에는 걸치고 있었을 텐데 너무 기뻐서 외투를 걷어치우고 뛰어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러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눈을 고쳐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다시 한 번 물은 것입니다. 맹인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시인 것입니다. 맹인은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절실한 필요를 구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앞을 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42-43절). 마태복음20:34에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선언하고 그의 눈을 만져주시니 그가 눈을 떠 낫게 된 것입니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외치는 것을 보고 그의 믿음을 확인하여 구원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고 (삼하7:12, 사11:10),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사61:1), 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구원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를 불상히 여겨 눈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님 구원 선언과 치유를 받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는 구원 선언과 치유 경험을 통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온전한 치유와 변화를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 것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고침 받았고 삶의 고통 문제를 해결 받았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맹인의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믿었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그리스도)인 것을 믿은 것입니다 (삼하7:12, 사9:6-7, 11:10).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면 구약에 표현된 메시야 사역을 행할 것이고 메시야 사역을 하는 자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눈도 뜨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61:1, 눅4:18). 둘째, 예수님 만나는 것을 주변 환경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만나려고 자기들 앞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곧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꾸짖어 잠잠하게 하였으나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물을 때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눈을 뜨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어 본 이유는 몰라서라기보다는 낫고자 하는 열의를 강하게 하고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나은 다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지체 없이 자신들의 고통의 문제이자 소원인 눈 뜨는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시며 무엇을 구하면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바른 소원을 가지고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고 했고, 요한일서5:14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베드로후서1:3-9에 보면 영적인 가치를 보지 못하는 자는 맹인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 진정한 가치를 보아야 합니다. 영원히 남아있을 가치를 보아야합니다.
<結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일관되게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대속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일념에도 불구하고 가는 과정에서 소외받는 어린 아이들과 거지 맹인을 제자들과 무리들과는 달리 거절하지 않고 친히 길을 멈추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