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19:1-48
<題目> 예루살렘 입성
<序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마치고 이제 공생애 마지막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본장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난 사건과 예수님이 청중에게 베푼 교훈과 고난 주간 초기에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삭개오 구원(1-10절), 열 므나 비유(11-27절), 예루살렘 입성(28-44절), 성전 숙정 작업(45-4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삭개오 구원 (1-10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셨습니다. 여리고를 통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곳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 (1-2절). ‘삭개오’(Ζακχαιος)는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삭개오의 신상은 이렇습니다. 첫째, 세리장(稅吏長)이었습니다 (2절). 세관의 최고 책임자였던 것입니다. 지금의 세무서장 위치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주요 지역에 세관을 두었고 유대인을 세리장과 세리들로 세워 그들을 통해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여리고에도 세관을 설치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리고가 각처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통관세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은 베레아 지방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이었으므로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부여했습니다 (Crred). 뿐만 아니라 그곳은 발삼나무의 산지였기 때문에 특산물에 대한 세금까지도 징수했을 것입니다. 둘째, 부자였습니다 (2절). 로마 제국에서는 그들이 유대인으로부터 세금을 자율적으로 부과하게 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그들이 세금을 얼마를 거두든지 자기들이 요구한 금액만 상납하면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당시 세리장은 로마제국이 부여한 특권을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마음대로 징수해서 막대한 부를 누렸습니다. 이른바 허가 낸 도둑이었습니다. 셋째, 키가 작았습니다 (3절). 그는 키가 작아서 무엇을 보려 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볼 수가 업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열등감을 갖게 한 요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넷째,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뒤에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7절).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장과 세리들에 대해서는 자국민의 혈세를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일을 하는 매국노라고 생각했고, 가난한 서민의 세금을 착취하여 부를 착취한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종교적인 공동체 성격을 가진 유대 사회에서는 세리장을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서 제외된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와 교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보면 눈을 흘겼고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젤롯파(열심당원들)는 그를 죽이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상처와 분노와 고독감에 싸이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3절上). 삭개오는 고위 공무원이며 부자였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죄인들과 교제한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5:29-30, 15:1-2). 또한 여리고성 가까이서 소경을 치유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18:35-43).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보고자 하되’에 해당하는 ‘에제테이 이데인’(εζητει ιδειν)에서 ‘~하되’에 해당하는 ‘에제테이’(εζητει)는 ‘계획하다’ ‘열망하다’ ‘추구하다’는 뜻으로서 미완료형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보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큰 길로 나갔으나 이미 와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인하여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일행이 가는 방향으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서 예수님이 가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3-4절). ‘돌무화과나무’를 개역판에서는 ‘뽕나무’로 번역했으나 개역개정판에서는 ‘돌무화과나무’로 개정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쉬코모라이아’(συκομωραια-GTS) 혹은 ‘쉬코모레아’(συκομορεα-GNT)는 무화과의 뜻을 가진 ‘쉬케’(συκη)와 뽕나무의 뜻을 가진 ‘모론’(μορον)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무화과뽕나무’(sycamore-fig tree : NIV)인데 그것은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데 잎이 뽕나무 잎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를 식물도감에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더 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것은 예수님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나무가 아닌 돌무화과나무를 선택하여 올라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자신이 나무에 올라간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평지의 밀밭에는 돌무화과나무를 함께 키웠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무화과가 열리기는 하지만 그대로 두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크게 자라 먹을 수 있는 무화과가 되게하기 위해 무화과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송곳으로 무화과를 찔러 구멍을 내고 (흠집을 내고) 그 곳을 감람기름으로 발라 마감처리를 해 주었습니다. 그 과정을 전문용어로 블리사(Blissa)라고 합니다. 그래서 밀밭 주인들은 밀 추수가 끝나고 나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무화과 열매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양을 치는 목자들이 우기 때에 먼 산지와 광야에 있는 많은 풀들을 먹이다가 건기가 되어 풀이 마르면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때가 마침 마을에서는 밀 추수가 끝나고 돌무화과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밀밭 주인에게 밀밭에 남은 밀 그루터기를 양들에게 먹이게 해 달라고 합니다. 대신 그 대가로 돌무화과에 구멍 뚫는 일을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들을 밀밭에서 그루터기 먹게 하고 자기들은 밀밭 주인의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돌무화과에 구멍을 뚫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 때는 온통 돌무화과나무에 목자들이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는 때입니다. 삭개오는 그 나무에 올라가므로 예수님을 보려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감춘 것입니다. 삭개오 혼자 다른 나무에 올라가면 모두가 그를 알아보고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때문에 자신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목자들 틈에 섞여 있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이 그를 죄인취급을 하고 있었고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젤롯당원들이 보면 언제 죽일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삭개오가 얼마나 유대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돌무화과나무 아래를 지나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쳐다보시더니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그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5절).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전인격에 대한 명칭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은 그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알고 있고, 그의 아픔을 알고 있고, 그의 심정을 알고 있고, 그의 필요를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공개적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돌무화과나무 위의 목자들 틈에 숨어서 보려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힘든 상태에 있는지 알며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공개적으로 부르고 그의 집에 가서 머물러 숙박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뭇 사람들이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6-7절). 삭개오는 자신의 세리장 직책으로 있으면서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소외된 고립 상태에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직책과 관련하여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죄인들에 대해 선대하심과 병든 자들을 고치심 등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기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여리고를 통과한다는 말을 듣고 길가로 나갔으나 자신은 키가 작아 많은 사람들 사이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렬의 진행 방향 앞으로 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마침 그 앞을 지나가시면서 멈추어 보고는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 집에서 숙박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를 심정을 아시고 자기를 불러 주시고 자기 집에서 숙박을 해야겠다고 하니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하며 예수님의 부름에 즉각 응답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숙박을 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정죄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예수님께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8절).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앉아서 말씀을 듣다가 진지하게 일어서서 예수님께 결단을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랍비들이 자기 소유나 수입의 20%를 가난한 자들에게 도우라고 한 것에 비해 파격적인 결단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 가버렸던 부자 관리(청년)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18:18-23). 둘째,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4배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취한 것에 대해서는 4배로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남의 것을 도둑질했을 경우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출애굽기22:1에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삼하12:6).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니 죄를 발견하여 회개한 기쁨과 새로운 가치를 깨달은 기쁨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이 넘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9-10절). 삭개오는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인 것을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려는 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가리켜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 안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공개적인 선언은 당당히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잃어버린’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폴뤼미’(απολλυμι)는 ‘잃다’ ‘파괴하다’ ‘멸망하다’ 등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서 죄 가운데 있는 자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상처와 고립을 당한 사람을 건지러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4:18-19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열등감과 죄책감과 고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아픈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심정을 아시고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요한복음10:3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요한계시록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원했던 것처럼 예수님 만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또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난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막2:1-12). 그리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재산을 절반이라도 내어놓을 정도로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새로운 가치를 깨닫는 기쁨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2. 열 므나 비유 (11-27절)
예수님이 말씀하신 므나 비유는 여러 가지 의미를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때가 이르렀다는 사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예수님이라는 사실, 예수님이 떠난 다음에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사실, 예수님이 떠난 다음에 제자들이 해야 할 일, 예수님이 돌아온 다음에 반드시 결산을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동시에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합니다. 본문 누가복음19:12-27에 나오는 므나 비유와 마태복음25:14-46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이야기 구조가 비슷하나 다른 비유입니다. 자본 분배, 장사 원리, 결산 기준이 다릅니다. 므나 비유는 자본을 모든 종에게 1므나씩 동일하게 주었고, 장사를 할 때 노력한 만큼 많이 남길 수 었었고, 결산을 할 때 많이 남긴대로 상을 주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자본을 각 재능에 따라 다르게 주었고, 장사할 때 최선의 노력을 하면 배만큼 남길 수 있었고, 결산 때에 받은 자본의 배를 남긴 자들에게는 같은 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므나 비유는 성화와 관련된 비유라 할 수 있고 달란트 비유는 사명과 관련된 비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갔던 예수님의 일행이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예수님이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온 시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고 자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바로 세워주기 위해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는 성격 면에서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 주려는 것입니다. 시기 면에서도 제자들이 생각하는 때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곧바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 승천하여 먼 훗날에 다시 오셔서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그 때에는 예수님이 표준에 합당하게 행한 자가 영광을 얻게 될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10므나 비유의 이야기 내용은 2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자신이 왕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원수들을 처단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고 그에 따른 상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①귀인이 왕 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처단했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12절).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 자기들은 그 사람이 자기들의 왕이 됨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4절). 하지만 귀인은 결국 왕위를 받게 되었고 돌아온 다음에 자신이 왕 됨을 원하지 않던 자들을 끌어다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처단하게 했습니다 (27절).
이 비유는 당시 널리 알려져 있는 아켈라오(Archelaus, B.C.4~A.D6) 사건을 차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이 죽기에 앞서 로마 제국을 3아들 곧 안티파스와 빌립과 아켈라오에게 분할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지방을 분할 받은 아켈라오는 로마 황제의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매우 싫어하여 사절단을 구성하여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아켈라오가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아켈라오는 왕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유대 지방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반대한 8,000여 명을 죽였습니다 (Josephus).
‘귀인’(Ανθρωπος τις ευγενης)은 좋은 가문에 태어나 높은 계급을 가진 귀족을 말하는데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 심판주로 재림을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거부하고 대적했던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심판 할 때에 복음을 거부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 차원인 것입니다.
②귀인이 종들을 불러 결산하여 그에 따른 상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귀인은 떠나기 전에 10명의 종을 불러 은화 10므나를 1므나씩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귀인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인은 은화를 준 종들을 각각 어떻게 장사했는지를 알고자 불렀습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1므나로 10므나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귀인(주인)은 잘했다고 착한 종이라고 칭찬하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으니 10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둘째가 나아와 1므나로 5므나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역시 잘했다고 착한 종이라고 칭찬하며 5고을을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사람 셋째가 나아와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 책망하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곁에 섰는 자들에게 1므나를 빼앗아 10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곁에 섰는 자들이 그에게는 이미 10므나가 있다고 하자 주인은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눅19:12-26).
주인이 떠날 때 10명의 종에게 각각 1므나씩 주고 장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그들을 불러 결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산할 때 3명의 종에 관한 내용만 나옵니다. 그것은 10명의 종들을 3종류로 나누어 표본적으로 3명의 종을 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3명의 종 이외의 종들도 그 3명의 종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주인이 결산할 때 첫 번째 종은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고 했고, 주인은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16-17절). 첫 번째 종은 주인으로부터 장사 자본은 1므나 받았는데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하여 10므나가 되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최선을 다해 창조적이고도 생산적으로 장사를 해서 최고로 많이 남기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충성됨을 칭찬하고 10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장사를 시켰는데 주인이 왕이 되어 돌아와 그 충성됨을 보고 그에게 10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가진 자리를 임명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것을 보니 큰 일을 맡겨도 충성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이 결산할 때 두 번째 종은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고 했고 주인은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18-19절). 이 종도 1므나를 받았지만 상당히 열심히 장사하여 5므나를 만든 것입니다. 주인은 그가 남긴 대로 5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가진 자리에 앉게 한 것입니다.
주인이 결산할 때 세 번째 종은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고 했고, 주인은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고 했습니다 (20-23절). 이 종은 1므나 받은 것으로 장사를 하지 않고 수건에 싸두었다가 1므나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가 장사를 하지 않은 것은 주인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주인을 작은 실수에도 용납하지 않고 벌을 가하는 자로 알았기 때문에 혹시 장사를 하다가 잘못하여 받은 1므나 마저도 잃으면 엄한 처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1므나 만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아예 장사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에 대해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농경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덕 지주들처럼 투자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으려 한 자로 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장사를 해서 혹시 얼마를 더 남긴다 하더라도 주인의 마음에는 차지 않아서 책망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아예 장사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주인은 장사하여 남긴 만큼 상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아예 장사를 하지 않은 것은 주인의 것의 자연증식까지도 막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은행에라도 맡겼으면 이자라도 증식하였을 텐데 아예 수건에 싸두었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막은 것이었습니다. 수건에 싸둔 것이 주인의 것을 잘 보관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에 손해를 끼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종은 주인에 대해서 잘못 한 것도 악한 것이지만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장사를 하지 않은 것과 주인의 재물에 손해를 끼친 것은 악한 행위였습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의 보고를 듣고 곁에 섰던 자들에게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라고 하자 주인이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24-26절). ‘곁에 섰는 자들’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하들일 것입니다.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왕으로서 그의 심복들이 항상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1므나를 빼앗아 10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1므나 가진 자에게는 자신의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1고을도 다스릴 권세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예 장사를 하지 않아 손해를 끼진 자에게 나라의 한 부분을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가진 1므나 마저도 빼앗아 10므나 있는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을 다른 종에게 주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데 그 종에게 그대로 두면 오히려 손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곁에 섰던 자들은 주인의 지시에 10므나 가진 자에게는 이미 10므나가 있는데 왜 그에게 더 주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제일 적게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제일 많이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은 상식에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의문이었습니다. 주인은 그에 대해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격언에 가까운 말을 했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장사를 충성되이 하여 많이 남긴 종에게는 주인이 더 많이 주기를 원하고 아예 불순종하여 장사를 하지 않은 악한 종에게는 이미 주었던 것도 빼앗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있는 자는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더 없어지는 원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기준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귀인’(Ανθρωπος τις ευγενης)은 좋은 가문에 태어나 높은 계급을 가진 귀족을 말하는데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말입니다. ‘종’은 주인의 입에서 일을 하는 자로서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비유한 말이고 이차적으로는 모든 성도들을 비유한 말입니다. ‘므나’(μνα)는 헬라의 화폐 단위로서 1므나는 100드라크마 혹은 1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데 (1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삯 –마20:1-16) 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화(聖化)를 위해 주어진 자본을 비유한 말입니다. ‘장사’는 물건을 사서 되파는 행위로서 넓게는 사업을 말하는데 이는 성화를 위해 주어진 요소들을 활용하여 성화(聖化)를 이루어가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곧 거듭난 영을 암시합니다. ‘결산’은 수입 지출을 파악하여 장사한 결과를 알아보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여 모든 성도들을 심판(판단)할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고을’은 성으로 둘러싸인 지방 성읍(도시)으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할 상(권세와 영예와 영광)을 비유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성화를 이룬 만큼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죽었던 영(靈)이 살아납니다. 그것을 거듭남 혹은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거듭난 영은 점점 성장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영적 성장으로 표현한 곳도 있고 중생한 영이 자라는 것으로 표현한 곳도 있고 이미 얻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표현한 곳도 있습니다. 에베소서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고 (엡4:13), 빌립보서2:12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벧전2:2, 벧후3:18, 유1:20). 한마디로 신앙인격이 자라나는 것, 인격이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에 맞지 않는 죄성을 제재하고 말씀에 맞지 않는 죄를 회개하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말씀대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말씀대로 신앙인격을 만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하나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 말씀이 중생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성화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여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요한복음14:16-17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고 (고전3:16, 요일2:27), 요한복음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요14:26, 벧후1:21, 딤후3:16, 롬8:26).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인격이 하나님 말씀대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깨달아 말씀대로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말씀을 순종하여 그 말씀이 인격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격이 말씀대로 만들어진 대로 천국에 갑니다.
마태복음16:27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고전15:40-41, 고후5:10). 많이 만들어진 자는 예수님이 많은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계2:10).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 중생하기는 했지만 전혀 말씀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자는 책망을 받아 부끄럽게 됩니다. 고린도전서3:15에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고후5:3) 그러므로 열심히 성화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므나 비유의 원리는 현재에도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장사는 절대로 밑지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의 장사는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노력한 만큼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환경적 요인에 의해 오히려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장사 원리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환경에 의해 실패할 수 없고 반드시 노력한 만큼 성공을 가져옵니다. 심는 대로 거두고 일한대로 얻습니다. 영적 성장은 절대로 퇴보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밥을 먹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장이 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멈춘 것뿐이며 거기에서 다시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면 다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등산하는 사람이 산을 올라가다가 중턱에서 넘어지지만 산 아래로 굴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넘어진 것뿐입니다. 그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올라가 가면 중턱에서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나 외부적 환경을 핑계하지 말고 중간에 넘어질지라도 계속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자가 성화의 노력을 하면 영적 권세가 더 많이 주어지고, 성령의 감동과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더욱 많이 주십니다. 성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영적 권세로 빼앗기고 성령의 감동과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거두어 가십니다. 열심히 장사하는 자는 더 많은 자본을 얻고 장사를 전혀 하지 않는 자는 있는 자본까지도 빼앗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므나 비유에 대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를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이 얼마나 자랐는지, 구원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예수님의 성품을 얼마나 닮았는지, 신앙인격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죄를 얼마나 벗어버렸는지, 못된 성품을 얼마나 고쳤는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용서하고 관용하고 섬겼는지...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다면 악한 종이라는 책망을 받은 줄 알고 영적 성장을 위한 은혜를 거두어 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다시 영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자본이 더욱 많아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 종류의 시련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시련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1:6-7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욥도 그 목적을 알았기 때문에 욥기23:10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시련은 우리의 인격이 만들어지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성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기회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증거할 기회입니다.
3. 예루살렘 입성 (28-44절)
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예수님은 므나비유를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서 가셨습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28-29절).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사역을 바치고 유월절에 맞추어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했습니다. 여리고를 지나 감람원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람원’은 감람산(Mount of Olives)을 가리킵니다. 그곳을 감람산이라고 한 것은 그곳에 감람나무(올리브나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은 여리고에서 24km 떨어진 곳이고 예루살렘까지는 3km 남은 곳입니다. 감람산은 해발 800m 정도의 산으로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산입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쪽으로는 기드론 시내가 있어서 감람산에서 보면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기드론 시내가 있고 건너편에 감람산이 있음). 그런데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그 감람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벳바게에 이르렀다고 했고 (마21:1), 마가와 누가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막11:1, 눅19:28). '벳바게'(Bethphage)와 '베다니'(Bethany)는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를 동일한 마을로 보는 사람도 있고 (Barcley), 벳바게와 베다니를 서로 인접해 있는 다른 마을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Lightfoot, Godet). 아마도 베다니는 여리고에서 들어오는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벳바게는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감람산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무시고 다음날 벳바게로 오신 것입니다 (요12:1,12).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오라는 말씀을 한 장소를 마태는 벳바게로 기록했는데 마가와 누가는 벳바게와 베다니를 동시에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마가와 누가는 넓게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며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니 그 나귀를 풀어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어찌하여 나귀를 푸느냐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했습니다 (30-31절). 예수님이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냈다고 했는데 이 두 제자는 어느 제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눅22:8). 예수님은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에 있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니 그 나귀를 풀어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1:2에는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했고, 마가복음11:2과 누가복음19:30에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신 것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귀 새끼는 어미와 같이 있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끌고 오기 위해서는 어미 나귀도 함께 끌고 와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나귀 가운데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마가와 누가는 핵심적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타고 가기 위해 그 나귀를 끌어 오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스가랴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말 대신 나귀를 필요로 하신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겸손하게 입성하실 것에 대한 상징에 알맞고 (사9:6, 슥9:9, 마21:6),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필요로 하신 것은 세속적인 일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하고 거룩하게 입성하실 것에 대한 상징에 알맞습니다 (민19:2, 신21:3, 삼상6:7). 예수님은 그 명을 내리면서 제자들이 그 일을 그대로 실행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을 것이기 때문에 누가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보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여기에서 사용한 것은 예루살렘 입성이 '주' 곧 구원자로서 입성하실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스가랴의 예언을 생각하고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섭리로 보내 주게 될 것을 예견했을 것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의 명대로 건너 편 마을에 가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나귀 새끼가 내여 있었습니다. 두 제자가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 때 그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제자는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고 그것을 예수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32-34절). 제자들이 건너 편 마을로 갔을 때 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집 주인이 거리로 연결된 집 바깥에 매어 놓은 나귀 새끼가 있었던 것입니다 (막11:4). 제자들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지시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예지력으로 알고 지시했다는 암시가 느껴집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풀었습니다. 그 때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1:5에는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라고 했는데, 누가복음19:33에는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했습니다. 아마 임자와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의 표현은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는 의미로 느껴지고 누가의 표현은 왜 가져가려 하는지 묻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질문에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1:6에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나귀의 주인이 제자들의 대답을 듣고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 주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명성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예수님이 쓰시려 한다는 말에 막지 않고 허락한 것입니다.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내놓은 것은 결과를 볼 때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메시야 사역을 이루는 데에 바른 이해를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②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나귀를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리고는 가실 때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35-36절).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은 것은 안장 대용으로 올려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으로 치켜세우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하9:13). 그리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태우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스스로 그 위에 타신 것으로 기록했으나 (마21:7, 막11:7) 누가는 제자들이 태운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위에 태우시니 예수님이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타신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자 제자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펴더라’에 해당하는 ‘훼페스트론뉘온’(υπεστρωννυον)은 ‘아래에 펴다’ ‘아래에 덮다’는 뜻인데 시제가 미완료형으로서 계속해서 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존경과 환영에 대한 표시입니다. 마태복음21:8에는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라고 했고, 마가복음11:8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2:12-13에는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라고 했습니다 (요12:18). 종합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는 앞길에 겉옷을 펴 깔았고, 갈릴리 지방에서부터 따라온 순례자들도 이에 합세하여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앞길에 깔며 들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 앞길에 깔았고, 예수님의 행차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마중 나와 합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심중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제자들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왕의 행차나 개선 장군의 입성에 존경하는 표시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하신다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 내리막길 가까이 오시매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찬양하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37-38절). ‘온 무리’ 가운데는 갈릴리 지방에서부터 따라온 자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 따라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베다니와 벳바게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12:12-13,18).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들을 보았거나 들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신 것을 환영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을 하나님의 역사로 본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는 시편118:26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를 생각나게 합니다. 시편의 내용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오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내용이지만 여기에서는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한 환영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는 2;14에 나오는 천사들의 합창과 흡사합니다. ‘하늘’과 ‘가장 높은 곳’은 동의어로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평화’와 ‘영광’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이 만족을 얻고 하나님의 위엄이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21:9에는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했고, 마가복음11:9에도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했고, 요한복음12:13에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했습니다. '호산나'(Ωσαννα)는 '호쉬아 나'(הושיע נא)의 음역으로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으로 예언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바로 그 왕인 것을 찬양한 것입니다 (삼하7:12-13, 사9:6-7, 암9:11).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왕으로 오시리라 예언된 구원자로 알고 높였지만, 다윗 왕국의 번영을 재현할 정치적 왕으로 생각하고 높인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천사들의 찬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제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소서'라는 의미로 한 표현입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고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했습니다 (39-40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주’로 칭했으나 바리새인들은 ‘선생’으로 칭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무리의 찬양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무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찬양하는 것이 신성모독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동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한마디로 묵살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했습니다. 하박국2:11의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를 연상케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원자로 선포되는 일은 정당한 것이며 오히려 계속되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③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그리고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고 했습니다 (41-42절). 성경에 예수님이 우신 일은 세 차례 기록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두번 째는 예루살렘성 앞에서 우셨고,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 (요11:35, 눅19:41, 히5:7). 예루살렘성 앞에서 우신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예서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오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로인해 심판 받게 될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신 것입니다.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들 눈에는 그것이 숨겨졌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신 일을 의미합니다. 이사야9: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했습니다. ‘평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에이레네’(ειρηνη)와 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평안’ ‘평강’ ‘평화’ ‘안녕’ ‘번영’ 등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성경에 말씀하신대로 미래에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구원자는 평강 혹은 평화의 왕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실 구원자는 택함 받은 백성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과 택함 받은 백성이 죄 사함을 받게 하고 택함 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하나님과 택함 받은 백성들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고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평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번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구원자로서 대속을 통해 그 샬롬(에이레네)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이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예수살렘 거민들과 그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43-44절). ‘날’은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심판의 때에 대적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거민들을 살육하고 건물들을 허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보살핌을 받는’에 해당하는 ‘에피스코페’(επισκοπη)는 ‘방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visitation –KJV, NASB, NIV). 하나님의 방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언은 A.D.70년에 로마제국의 디도(Titus)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키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마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고 건물과 성전을 허물고 보물들을 탈취했습니다. 이 예언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4. 성전 숙정 작업 (45-48절)
성전 숙정(肅正)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습니다 (마21:12-17, 막11:15-17, 눅19:45-48, 요2:13-22). 성전 숙정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두 번 있었는데 요한복음 2장에 나와 있는 사건은 성역 초기의 사건이고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의 사건은 성역 후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성역 후기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한 주간 안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입성하여 바로 성전 숙정 작업을 하신 것 같이 기록을 했는데, 마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머문 후 다시 들어가 성전 숙정 작업을 했다고 묘사했습니다 (막11:11-15), 아마 누가는 그 행적을 생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다고 했습니다 (45절). 마태복음21:12에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라고 했습니다 (막11:15). 이 성전은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개축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뉩니다. 예수님이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신 장소는 뜰로서 '이방인의 뜰'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절기가 가까워지면 바깥 마당인 이방인의 뜰에서 제물용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이 장사를 했고, 성전세용 화폐를 교환해 주는 장사꾼들이 장사를 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짐승을 제물로 드릴 때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했고 돈을 성전제로 속전을 드릴 때 반 세겔을 드리도록 했습니다 (출12:5, 레1:3, 출30:13, 레27:3).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려는 순례객들이 제물용 생축을 어렸을 때부터 기르기도 힘들거니와 먼 길을 끌고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제물용으로 기른 생축을 팔았고, 생활 가운데 로마 화폐나 헬라 화폐를 사용했기에 유대 화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용 생축은 일반 생축보다 훨씬 비쌌고, 환전에도 2~4%의 웃돈을 받았습니다 (Billerbeck). 시장이 원래는 예루살렘 건너편 감람산에 4곳이 있었고 그 시장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대부분 산헤드린에서 관할했으나 가야바 대제사장이 이를 탐하여 성전 뜰 안에 새롭게 개설을 한 것입니다 (Eppstein). 사람들은 당연히 감람산 시장들을 이용하는 것보다 성전 안에서 파는 생축을 이용하는 것과 환전을 하는 것이 더 용이했기 때문에 성전 안에 이루어진 시장을 활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46절). 예레미야7:11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와 이사야56:7의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말씀 인용입니다. '기도하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테필라’(תפלה)는 ‘기도’ ‘찬송’의 뜻이고, '프로슈케'(προσευχη)는 '기도' '예배'를 뜻합니다. ‘집’에 해당하는 ‘오이코스’(οικος)는 ‘집’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성전에 대한 표현으로 한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자기 백성들을 통해 예배를 받기 위해 특별히 거룩하게 선정해 놓은 곳입니다. 그런데 종교 기득권자들인 대제사장들(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은 그 성전을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 정숙 작업을 하시고 이렇게 책망하신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대교의 형식적인 제사를 개혁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성전은 유대교 예배의 형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성전을 거룩한 곳으로 지정하고 그곳에서 제사하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찬송, 기도)를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백성들과 영적인 교제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예배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여전히 성전에서 형식적인 제사만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 없이 형식적인 제사에만 머물렀습니다.
둘째, 권위주의 자들의 탐욕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대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성전 권력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제사가 율법대로 시행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연합하여 성전과 율법의 기득권을 유지한 것입니다. 성전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탐욕을 가지고 이권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성전을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일종의 자기계시를 선포하기 위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죄인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곳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대표적 상징인 성전도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그 성전을 대치하여 진정한 성전역할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2:13-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역초기에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2:19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요한복음2:21에 보면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유대교 성전은 제물와 속전을 통해 하나님께 죄 사함을 얻는다는 표방을 했지만 진정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 대속으로 제물이 되어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로서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자라는 것입니다 (요4:14, 6:51, 8:12, 14:6). 예수님께서 상과 의자를 둘러엎고 나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아이들로부터 '호산나' 찬양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생명을 주는 자로서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절정입니다 (마21:14-16).
오늘날 교회도 개혁해야 합니다. 예배당과 예배에서 의식적이고 형식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우상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배 형식, 성의(목회가운, 성가대가운, 헌금위원가운), 헌금을 성찬상 위에 드리는 봉헌 등은 의식과 형식에 치우친 것일 수 있습니다. 강단 꽃꽂이, 주보에 헌금 명단을 실어 주는 것, 예배시간에 헌금자의 명단을 불러주고 헌금자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 등은 인본주의적 요소가 되기 쉽습니다. 성화, 조각, 강단의 촛대와 성경책과 십자가 등은 과거 이콘(εικων, icon)처럼 우상적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예배와 제도와 직분과 사역 등을 이용하여 탐욕을 채워서는 안 됩니다 (롬1:23).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하고 예수님의 구속이 예배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성령의 임재를 추구하며 진리의 말씀만 나타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영(εν πνευμα, in Spirit)과 진리(εν αληθεια, in truth)로 예배는 성령의 임재를 추구하고 말씀을 중심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전통과 의식과 형식이 지배하는 화석화된 예배를 개혁하고 성령과 말씀이 핵심이 되는 생명력 있는 예배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 속에 그런 요소들이 지배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3: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예배와 기도와 헌금을 하는 이유가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는데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해가야 합니다.
<結言>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이 다 예수님께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47-48절). 예수님은 성전 정숙 작업을 하셨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으로 인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찾지만 예수님께 호응하는 무리들로 인해 음모를 쉽게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언제나 성경대로 개혁운동을 하면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공격을 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어느 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인지를 생각지 못하고 자기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과 이익을 상실한 것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끊임없이 성경대로 개혁을 해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