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누가복음20:1-47

<題目> 성전에서의 논쟁

 

<序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고난 받으시기 전까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숙정 사건과 성전에서의 복음 전파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살해 음모를 가속화 시키고 구체적으로 착수하게 합니다. 내용구조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1-8), 악한 농부 비유(9-18), 세금에 대한 논쟁(19-26), 부활에 대한 논쟁(27-40), 다윗의 자손에 대한 논쟁(41-44), 서기관의 외식에 대한 경고(45-47)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 (1-8)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할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그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1-2).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으로서 성전 관리와 의식을 도맡아 관리하는 자였고, ‘서기관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였고, ‘장로는 유대 백성 가운데서 선정된 대표자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원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סנדרין, συνεδριον)'함께''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기원에 대한 분명한 자료가 없지만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구성한 70인 장로회에 기원을 두고 있고 (11:16-24)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재조직했다고 알려져 있고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활동을 했습니다. 공회원은 의장1명과 의원70(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는데, 율법에 의한 사법권과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 때나 에스라 때에는 좋은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 때에는 심히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이 공회의 권위와 권한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대표자들을 파견하여 제지하려 한 것입니다. 파송된 대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권위로 누구에게 허락받은 권위로 성전에서 제물을 팔며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을 내 쫓으며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한 것은 성전 숙정 사건과 병자들을 고친 일과 말씀을 가르친 일들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전 날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짐승을 파는 자들을 내어 쫓고 돈을 바꾸어 주는 상을 둘러엎고 파는 기구들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표적을 일으킨 것은 성전을 정화하고, 유대교의 심판을 선언하고, 자신이 진정한 구원을 주는 자임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19-21). 하지만 그 행위는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적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항을 이용하여 순례자들이 흠 없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고 깨끗한 돈으로 속전을 드려야 한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이 인정하는 짐승을 사게 했고 (제사용으로 길렀다는 짐승으로) 자신들이 인정하는 환전을 하게 했습니다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이나 헬라 화폐인 드라크마를 성전용인 세겔로). 그로 인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이 율법과 성전을 이용해 자신들의 탐욕만 채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이 만든 제도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위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으면 자신들의 기득권에 막대한 위협이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올가미에 걸릴 만한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행한다고 대답하면 신성모독죄로 체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만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대상(자기를 포함하여)이 준 권위로 행한다고 대답하면 성전 운영과 치안에 관한 책임을 가진 산헤드린 공회가 부여하지 않은 행위를 한 죄로 체포할 수가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도리어 대답 대신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지 물었습니다 (3-4). 세례 요한이 누구에게 받는 권위로 가르치며 사역을 하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낸 참 선지자로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한 것이라면 예수님도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상치 않은 질문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의논했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느냐 할 것이고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백성이 다 자기들을 돌로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5-7).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죄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받게 하고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구원자로 전했습니다 (3:3-8).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그가 전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일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로 칠 것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대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예수님도 무슨 권위로 일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8). 예수님의 지혜를 엿볼 있는 부분입니다. 이 변론은 예수님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변론을 하면서 지혜로 대처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그들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암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우리가 대적자들과 변론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만이 그들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끝이 없는 허탄한 변론에 휩싸이지 않도록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디도서3:9"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 악한 농부 비유 (9-18)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행한 권위에 대해 질문을 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한 출처를 반문하므로 그들의 도전적인 질문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그 후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함을 드러냈습니다. '비유'(παραβολη)는 화자가 본래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낯익은 상황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21:33-41, 마가복음12:1-9, 누가복음20:9-16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본 비유 앞에 두 아들 비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21:28-32).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다고 했습니다 (9). 한 사람은 지주를 말합니다. ‘농부들은 지주의 토지를 세내어 농사를 하는 소작농을 말합니다. 포도원은 포도과수원을 가리키지만 당시에는 모든 종류의 과수를 심는 과수원에 대한 대명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포도원에는 울타리()을 쳐져있고 망대가 세워져 있고 즙짜는 틀이 있었습니다 (22:33, 12;1). '산울타리'는 야생동물 등의 침입자로부터 포도원을 보호하기 위해 포도원 둘레로 돌을 쌓거나 가시나무 등을 세우는 담장이나 울타리를 말합니다. '즙 짜는 틀'은 포도즙을 짜는 시설과 도구를 말합니다. 그 시설은 석회암에 구덩이 둘을 연이어 파거나 흙 땅에 구덩이 둘을 파서 석회를 바른 다음 두 구덩이 위로 연결된 도랑을 파고 그 도랑 끝에 항아리를 놓습니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하면 그 구덩이에 넣고 밟아서 도랑을 통해 흘러 항아리에 채워진 즙을 가죽 부대에 담아 보관을 하는 것입니다. '망대'는 외부의 침입자를 발견하기 위해 세운 원두막입니다. 망대는 주로 너비 4규빗 높이 10규빗 정도로 지어서(1규빗은 45.6cm) 포도원을 지키는 농부들이 거하기도 하고 포도원 도구들을 보관하기도 하고 포도 소출을 보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포도원을 농부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면서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팔레스타인에 토지를 사둔 로마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에 있던 토지는 대부분 그런 부재 지주들의 소유였다고 합니다 (Marshall). 지주들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토지를 현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세를 받았습니다.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은 것입니다. 당시 소작 관례는 소작농이 농사를 해서 얻은 수확의 40%정도의 현물이나 그에 해당하는 지주에게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오랫동안 머물던 지주는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그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져 보냈습니다. 지주는 다시 두 번째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져 보냈습니다. 지주는 세 번째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도 상하게 하고 내 쫓았습니다 (10-12). 때가 되니 지주는 소작농들에게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가까우니 소작료로 소출 가운데 얼마를 받기 위해 소작농들에게 종을 보낸 것입니다 (21:34, 12:2). 당시 포도나무는 심은 지 4년 만에 첫 수확을 하게 되고 수확 시기는 대개 9월쯤이었습니다. 당시 소작농들이 지주에게 소작료로 주는 분량은 수확물의 40%였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국가에 세금으로 40%를 내어야 했습니다. 자기 몫은 2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주가 타국에 있으니 소작료를 내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작농들은 지주가 보낸 종을 때려서 빈손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두 번째 보낸 종도 몹시 때려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번째 보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습니다. 마태복음21:34-36에는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고 했고, 마가복음12:2-5에는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고 했습니다. 지주가 소작농들에게 보낸 종은 복수였고 소작농들은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지주는 소작농들이 돌이키기를 바라며 종들을 다시 보냈으나 소작농들은 자기들 욕심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지주의 긍휼과는 반대로 잔인한 반역행위를 한 것입니다.

 

  지주인 포도원 주인은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소작농들이 혹시 지주의 아들이라 존대하지 않을까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소작농들은 지주의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하여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 아들은 지주의 상속자이니 그 유산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리고는 지주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 (13-15). 당시에는 소유주가 없는 재산으로 판명된 재산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누구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는데 그럴 경우 제일 먼저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에게 소유권이 돌아갔습니다. 그런 소유 관계 법률에 비추어 보면 상속받은 아들을 없애 버리면 포도원 주인이 죽은 후에는 그 포도원이 당연히 자기들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상속자를 아예 죽여 토지를 영구히 자기들의 소유로 삼자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소작농들은 지주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인 것입니다. 마가복음12:8에는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포도원에서 끌어내어 포도원 밖에서 죽인 것으로 묘사하고, 마가는 포도원 안에서 죽여 포도원 밖으로 끌어낸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인 지주가 아들을 죽인 소작농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와서 그 소작농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5-16).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이 질문하고 예수님이 대답한 것으로 보고했지만 (12:9, 20:15-16) 마태는 예수님이 질문하고 청중이 대답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마태복음21:40-41에는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지주가 올 때 소작농들은 어떻게 되겠는지 물었고 청중들은 악한 소작농들을 진멸하고 소작료를 제 때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소작을 줄 것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도한 대로 청중이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지주는 악한 소작농들을 심판하여 사형시키고 포도원을 성실한 소작농들에게 줄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6“~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에서 말아지이다에 해당하는 ’(Μη)아니’ ‘...않도록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청중들의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드러내는 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하나님 나라), 지주인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소작인들인 '농부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지주인 주인의 '종들'은 선지자들을, 지주인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택하여 제사장적 나라를 이루려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주셨습니다.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과 성전과 제사제도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35:15"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씌우는 고랑을 채웠습니다. 스가랴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20:1-2, 대하24:20-21, 11:37).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 특히 산헤드린 공회원들(대제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 유지와 막대한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기도 결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3:12-13).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구원 사역을 그들을 통해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하고 이방 사역자들을 통해서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9:28, 22:28-30, 9:19-33, 11:16-32).

 

  소작인들인 농부들 곧 유대교 지도자들이 선지자들을 경고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19:45-48에 나오는 성전 숙정 작업에서도 보았듯이 당시 유대교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대제사장들(사두개인)과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책망하고 있는 대상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영이 거듭나고 천국을 가는 보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선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가 위로받고 우리가 만족을 얻고 우리의 잘남을 과시하고 모두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수단들을 우상의 모양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로마서1: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14:16-17"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14:26, 15:26).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고 말씀을 사용하여 역사하십니다. 그가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책망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6:7-8"~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므로 바로 세우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양심에 말씀으로 감동시키는 책망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과 책망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고 능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계속 능욕한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했습니다 (1:20). 병행구인 마태복음21: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한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앞에서 악한 농부들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었습니다 (9-16). 주인(지주)이 농부(소작농)들에게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으나 농부들이 종들을 때려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 아들을 상속자라 하면서 죽였습니다. 여기에서 농부들은 당시 유대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 특히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가리킵니다. '산헤드린'(סנדרין, συνεδριον)'함께''좌석'의 합성어입니다. 공회원은 의장 1(대제사장1)과 의원 70(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는데, 율법에 의한 사법권과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르친 율법과 전통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외식과 탐욕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신들의 권위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일 생각으로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서기관들 파견하여 엿보며 질문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자 근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 정권에 고소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들 구원자임이 증명되고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농부 비유를 말씀하시고 듣는 청중들을 향해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고 했습니다 (17).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건축자들이 부적격 판정을 내려 버린 돌이 건축에 가장 중요한 모퉁이 머릿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κεφαλην γωνιαs)'모서리의 머리'로서 '모퉁잇돌'(cornerstone)을 말합니다. 이 돌은 건물을 지을 때 두 개의 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모퉁이에 놓는 돌로서 그 돌을 기준으로 하여 두 벽이 쌓아지기 때문에 '머릿돌'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돌을 기초로 위로 쌓아지기 때문에 '기초돌' 혹은 '주춧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돌은 건물의 각을 잡고 건물의 하중을 받혀야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사용하는 아주 요긴한 돌입니다.

 

  마태복음21:42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12:10-11). 예수님은 시편118:22-23"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는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수많은 폭풍과 같은 시련을 거치고 나서 전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한 시기에 저술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하2:4, Talmud, Targum, Calvin, Matthew Henry). 다윗이 사울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오랫동안 시련을 당했지만 마침내 사울 왕가가 몰락하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아 쫓겨 다녔으나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울에게 빼앗아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일에 대해 눈으로 보기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 정권을 이용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시므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폐하고 다윗으로 상징된 자신을 세우실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고백을 인용하여 자신에 대한 위치를 선언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고치고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하다가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경비대장에게 체포되어 감금되었습니다.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행하느냐고 심문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4:10-11에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인용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8). ‘은 앞 절에서 언급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을 말합니다. 사람이 이 돌 위에 떨어지면 그 사람이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 흩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항아리 같은 것이 돌 위에 떨어지거나 돌이 항아리 같은 것 위에 떨어지는 것 같은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돌이 항아리를 산산 조각이 나게 하고 가루로 만들어 흩어버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므로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2:31-35에 나오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꿈에 관한 계시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2: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고 했고 다니엘2:45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벨론왕 느부갓네살이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가운데 한 신상을 보았는데 머리는 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두 발은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돌이 날아와 그 신상을 깨뜨렸습니다. '머리'의 금은 바벨론(바빌로니아, B.C.606-538), '가슴과 팔'의 은은 바사(페르시아, B.C.537-332), '배와 넓적다리'의 놋은 헬라(그리스, B.C.331-64), '종아리'의 철은 로마(로마, B.C.63-A.D.476)가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두 발'이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는 것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A.D.364) 동로마는 오래 지속되나(A.D.1453멸망) 서로마는 일찍 망하게 될 것을 가리키며(A.D.476멸망)  '열 발가락'이 있는 것은 로마 제국이 후에 여러 제국이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은 오실 구원자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꿈은 로마시대에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셔서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그로 인하여 복음이 온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부활과 예수님의 복음 확장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권세를 깨뜨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악한 대적자들을 모두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7:1-14에 보면 다니엘이 본 계시 환상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바람이 몰려오더니 바다에서 4 짐승이 나옵니다. 사자, , 표범, 열 뿔이 달린 짐승(괴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짐승(괴물)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인자 같은 이가 나와 영원한 나라를 세웁니다. '사자'는 베벨론(바빌로니아), ''은 바사(페르시아), '표범'은 헬라(그리스), '열 뿔 달린 짐승(괴물)'은 로마를 가리킵니다. '인자 같은 이'는 오실 구원자 곧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계시 환상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또다시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13:1-2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나오는데 그 짐승의 형상은 입은 사자 같고 발은 곰 같고 몸은 표범 같고 머리는 일곱 머리에 열 뿔이 달린 짐승(괴물)이었습니다. 이는 다니엘 7장의 내용을 한꺼번에 본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그 짐승이 바벨론과 음녀로 표현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17~22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들을 멸하고 천년왕국(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 2장의 신상 모습과 다니엘 7장의 짐승 모습은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예언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에 대한 예언을 하실 때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24:14-15, 29-31).

 

  에베소서2: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이 모퉁이돌이 되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진리로 세워져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로 세워져야 합니다. 다른 복음 곧 복음이 아닌 다른 교훈이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2:6-8“~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진리를 기초하면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퉁잇돌이 되어 심판의 기준이 되고 또한 거치는 돌이 되어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구속사 중심의 교훈을 보배처럼 여기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싫어하므로 진리를 싫어하는 자라는 증거가 되고 그것은 그들에게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나 개인이나 언제나 예수님의 복음 중심, 구속사 중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 세금에 대한 논쟁 (19-26)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이 베푸신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한 말씀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했으나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고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체 하며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했습니다 (19-20). 당시 예루살렘에서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에 대해 호의를 갖고 추종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 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약점을 잡아 제거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종교적인 문제로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사형판결을 내린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지역에서는 죄수에 대한 사형권한이 로마제국 정부에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에서 보낸 총독에게 넘기기 위해 정치적인 문제를 발견하려고 은밀하게 바리새인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은밀히 보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에 대해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도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에 의해 치우치지 않고 참되게 진리만 가르친다고 수사학적 미사여구로 치켜세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물었습니다 (21-22). '가이사'(Caesar)는 로마 황제에 대한 칭호입니다. '세금'은 로마황제가 부과한 세금을 말합니다. 인두세와 토지세와 소득세가 있었습니다. 인두세(人頭稅)1인당(남자 14~65, 여자 12~65) 1데나리온씩 바치는 세금이고, 토지세(土地稅)는 수확량 중 곡식의 10분의1이나 술이나 과일은 5분의1을 현물이나 현금으로 바치는 세금이고, 소득세(所得稅)는 소득의 1%를 바치는 세금입니다. 그 중에 본문에서 말한 세금은 인두세를 말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동시에(십일조, 속전, 성전세 등) 지배국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특히 젤롯파). 실제로 A.D.6년에 갈릴리 사람 유다(Judas the Galilean)라는 사람이 수령이 되어 과세 반대 폭동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바치라 대답하면 매국노라는 여론이 형성될 것입니다. 반대로 로마 황제에게 바치지 말라 대답하면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고소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대답을 해도 걸려 들 수밖에 없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적인 간계를 다 간파셨습니다. 그래서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고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24). 마태복음22:18-22에는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은 은전으로 된 로마 화폐입니다. 가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했습니다 (20:2). 당시 로마제국에서 부과한 인두세는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이었습니다. 그 데나리온 주화의 한쪽 면에는 당시 월계관을 쓴 로마황제 디베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적인 존재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디베료 가이사 아우구스투스’(TIBERVS CAESAR DIVI AUGUSTI FILIVS AVGVSTV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Deissmann). 그 이면에는 여신으로 묘사된 그의 어머니 그림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주화는 당시 디베료 황제(Tiberius Caesar)가 자기 얼굴과 자기를 높이는 글귀를 넣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화폐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로마황제를 신적 존재로 여기기도 했고 제국의 통치자로 인정하고 제국의 백성과 땅이 그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요구에 따라 그 주화를 내놓은 것은 그들이 그 동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그들이 그 주화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한 것은 그들이 이미 황제의 권세를 인정하고 있으며 자신들과 자신들의 땅이 가이사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납세 의무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책잡지 못했고 예수님의 대답에 놀랍게 여겨 침묵했습니다 (25-26).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에게 바쳐야 할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나 속전이나 성전세 등을 드려야 하지만 가이사 황제가 요구하는 인두세도 로마정부에 납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초월적 지혜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공동체를 통해 제공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되고 공동체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되고 공동체의 일원을 돕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정식으로 위배되지 않는 한 국가에 대한 의무도 감당해야 합니다. 세금은 국방과 치안과 산업과 보건과 교육과 복지 등에 사용됩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여 그 일을 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는 개인 재산을 국유화하지 않고 사유화하도록 보장하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 전체에 대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민정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납세를 해야 합니다 (위정자들이 세금을 바로 사용하는 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임. 현저하게 악용할 때는 저항의 수단으로 세금 납부를 거부 할 수 있음). 납세 의무를 다하는 것은 하나님이 국가와 위정자들을 통해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보답하는 것이 되고, 국가 일원을 균등케 하는 일에 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잘될 때 우리도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과 사역에 매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선교는 국가가 위상이 높아지고 부요해야 효과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13:1-2"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2:13-14에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2:1-2에는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29:7에는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에 대해 가져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국가가 기독교 국가인 경우에는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참여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가 아닌 경우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 기독교 정당을 만들거나 기독교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를 하게 되면 많은 역효과가 나기 쉽습니다. 다른 정당들에서 무차별적으로 비판을 하게 되므로 기독교 이미지가 나빠져 전도에 막대한 손해를 봅니다. 심지어는 비기독교 정당이 정권을 장악했을 경우 정부가 기독교를 공격하고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일제로부터 선교활동에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선교사들이 일제의 행위에 대해 반대하지 않기로 협의를 했습니다 (이는 선교사들이 일제 행위에 침묵하기로 한 것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도 일제 만행이 옳지 않은 줄 알았겠지만 일제 행위에 대적하는 것보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더 우선시 한 것으로 여겨짐). 그런데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을 배제하고 독단적으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제는 3.1운동의 주체가 기독교라는 사실을 알고 한국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3.1운동 후 안수집사 이상 직분은 절반 가까이가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 믿는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가두고 불 질렀고 나오는 어린 아이들을 정조준 사격했습니다. 제암리 사건은 대표적입니다. 그 후에 6.25 전쟁 때에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엄청난 박해와 학살을 당했습니다 (물론 이 때는 공산주의 자체가 기독교를 척결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지만).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한 결과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는 본래부터 정교분리 원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본래 정교분리 원칙을 가지지 않았던 장로교도 정교분리 원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같이 무신론과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구조에서는 기독교 이름이나 교회 이름이나 목사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반인으로서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구원사역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28:19-20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사도행전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4. 부활에 대한 논쟁 (27-40)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27). 당시 유대교의 분파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엣세네파와 젤롯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인'(σαδδουκαιων)는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Σαδδουκ)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삼하8:17), 이들은 대부분 사제 계층과 일반 귀족에 속한 자들로서 정치와 종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주도권을 가진 자들로서 합리적 사고를 가진 이성적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인정했으며 내세와 부활과 영과 천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3:8).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여 모세5경은 인정하면서도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구전과 문서들은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해석한 부활에 대한 논리를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부활에 대해 증명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자신들이 자신 있게 말하는 교리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글에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해 형을 위해 상속자를 세우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했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위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일곱이 다 그를 취했으니 부활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28-33).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기 위해 제시한 이야기는 아마 가상의 예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에서 말한 고엘제도 중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을 두고 한 말입니다 (25:5-10). ‘고엘’(גאל)은 보복자, 구속자, 회복자 등의 뜻입니다. 고엘제도에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과 계대혼인법(繼代婚姻法)과 기업상속법(基業相續法)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은 계대혼인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명기25:5-6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계대혼인법은 모세가 율법으로 말하기 전부터 고대부터 있었던 관습이기도 합니다 (38:1-11). 계대혼인법은 첫째 아들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죽으면 둘째 아들이 형수를 통해 상속할 아들을 낳게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런 법을 주신 것은 가문의 계대를 잇게 하려는 의도도 있고, 가문의 기업을 보존해 주려는 의도도 있고, 과부된 자를 보호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내세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세5경에 나온 계대혼인법의 논리를 근거로 내세와 부활이 있다는 가르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곧 자신들의 주장이 얼마나 옳은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 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논리는 이미 내세와 부활을 믿는 바리새파와의 논쟁에서 사용했던 논리였을 것입니다 (Wessel).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나 시집을 가지만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나 시집을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천사와 동등이고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34-38).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이 대답을 하실 때 먼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는 말을 하면서 본문의 대답을 했다고 했습니다 (22:29, 12:24). 예수님이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의 관점에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의 관점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4-3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고 했습니다. 부활체는 장가가거나 시집가지 않고 천사와 같다는 했습니다. 부활체는 천사처럼 영적인 존재로서 결혼을 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이 세상에서 자손 번식을 위해 있는 것이지만 내세에서는 자손 번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내세는 장가나 시집을 가는 것을 통해 아들을 낳아 계대를 상속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가 아니라 그런 것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아들을 낳아 후손을 이어야하는 세계가 아니라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결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가 아니라 그런 결핍성과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완전히 극복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20:36).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같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세계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 생활을 근거로 하나님이 주실 내세의 생활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관점에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7-38절에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시나무 떨기에 나타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3:6). 이는 하나님이 언약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신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조상 족장들에게 함께 하셨듯이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함께 하여 족장들에게 주었던 언약을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알게 하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현재에 족장들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족장들이 현재에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족장들이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 내세에 살아 있으며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을 시사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족장들이 여전히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족장들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하니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없었다고 했습니다 (39-40).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입니다. 바리새파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헛되게 하는 예수님께 잘 말씀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고엘제도의 계대혼인법을 옹호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동시에 교리적 논쟁의 대상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의 잘못을 지적한 것으로 여겨 좋아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예수님께 질문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22:33에는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논리로 사두개인들을 물리치자 무리가 다 놀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성적 현세적 논리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보아야 하고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두개인들과 같은 이성주의자나 자유주의자는 내세와 부활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우리의 부활도 확신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51-52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4:16-17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고, 요한계시록11:11-12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확신하고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영광은 각기 다릅니다. 고린도전서15:40-41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부활 후 내세에서는 영광과 상급과 칭찬이 다릅니다. 그것은 므나비유와 달란트비유가 잘 설명해 줍니다 (19:11-27, 25:14-30). 그것은 성화와 사역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내적 성장과 사역 감당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12:4, 고전9:27, 15:31, 딤후4:7-8, 20:24).

 

 

       5. 다윗의 자손에 대한 논쟁 (41-44)

 

  마태복음을 보면 지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22:15-40).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22:41-42). 그들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증명하려고 시험한 질문들에 대한 반격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가진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단편적이고 편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내어 그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로 판단에 대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려 하는 것입니다.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41). 마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인지 물었고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2:41-42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ος)는 신약의 헬라어로서 문자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지만 의미상으로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히브리어는 메시야(משיח)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보내주실 구원자를 다윗의 자손(후손) 가운데서 보내주실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삼하7:12-16, 9:2-7, 11:1, 23:5-6, 33:15,17,22, 34:23-24, 37:24, 3:5, 9:11). 대표적으로 사무엘하7: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고 했고, 이사야11:1"이새(다윗의 아버지)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고, 예레미야23:5"~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육신의 혈통적으로 볼 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1:1, 1:3).

 

  예수님은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42-43). ‘발등상’(υποποδιον)은 발판 곧 발을 올려놓는 받침대를 말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대답에 대해 이 내용을 질문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22:43-44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토 퀴리오 무'(ο κυριος τω κυριω μου)B.C.3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학자 70여명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아는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70인 역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 시편110:1에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에 해당하는 '예호와 라아도니'(יהוה לאדני)로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여호와'(יהוה)라는 이름을 직접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을 회피하였기 때문에 대신 ''()라는 뜻인 '아도나이'(אדני)로 대치했는데 70인 역에도 그런 관념이 반영되어 히브리어 '아도나이'와 같은 의미인 헬라어 '퀴리오스'(κυριος)로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70인 역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하나님)께서 주(그리스도)께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원수인 사탄을 발아래 둘 때까지 한시적으로 자기 우편에 앉아 있으라는 말입니다. 고대에는 정복자는 피정복 집권자의 목을 발로 밟아 승리를 상징화했습니다 (10:24).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하신 후 부활 승천하게 하시어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심판할 재림 때까지 자기 우편에 앉아 있게 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런즉 그리스도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44,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라 부른 것을 보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상이 자손에게 극존칭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유대인들의 편협한 그리스도관을 지적하여 바로잡으려는 의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혈통적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과거 다윗 왕국을 재현할 자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이 되어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지만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며 (5:2, 16:16), 정치적인 왕이 아닌 영적인 왕이며, 유대인에 국한하지 않은 온 세상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19:16). 마태복음22: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지식 없음이 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1:1,1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태초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을 의미하며 말씀’(λογος)는 수신 대상인 헬라인들이 가진 사고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2:6-7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고 했습니다. 골로새서1: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 대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릴 위해 간구하십니다. 로마서8:34“~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3:1, 8:1, 10:12, 12:2, 벧전3:22).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어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요한복음14:16-17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14:26, 15:26).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다 그가 본질적으로 누구인지에 더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원자이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릴 위해 간구하는 자이시며 우리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가 하나님으로서 우릴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6. 서기관의 외식에 대한 경고 (45-47)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45-47). ‘서기관’(γραμματευς)은 유대교의 바리새파 가운데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로서 바리새인들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삼가라에 해당하는 기본형은 프로세코’(προσεχω)주의하다’ ‘조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의 위선과 외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의하여 경계하라고 한 것입니다. 12:1“~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이라고 했습니다. ‘누룩’(ζυμη)은 발효제를 말합니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키기 위해 넣는 효모입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한 밀가루반죽에 이 누룩을 넣어 두면 밀가루반죽이 부풀어 그것을 구웠을 때 빵이 부드럽습니다. 이때 누룩은 좋은 역할을 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누룩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누룩이 온 덩이를 발효시킨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금방 퍼져 부패시킨다는 것입니다. '외식'(προφασις)'외부로 보이기'를 말합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인간이 가진 죄성(부패성)의 성격에 맞아 금방 물들어 따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경계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제자된 우리도 인간의 욕망에 맞는 외식을 철저히 경계해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리새인들 특히 서기관들의 외식을 비판하면서도 우리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첫째,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46절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긴 두루마기 형태의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옷 끝에는 술을 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마나 팔에 성구를 넣은 갑을 만들어 매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일반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차림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복 차림으로 일반인들과 구별하여 일반인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나타나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평신도와 구분하는 의상(까운, 스톨, 로만칼라 등)으로 차별화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길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47절에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영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길게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신앙심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외식이었습니다. 진실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외식하는 타락한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6: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6:16에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기도하되 길게 기도했고 금식을 할 때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초췌한 모습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휼륭한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이용하여 자기를 나타내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보이는 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음성을 특별하게 내고 기도한 것과 이루어진 것을 자랑하여 특별한 권위를 얻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높임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46절에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당시 일반인들은 서기관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면 일어서서 랍비(선생)이라 칭하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일반인들로부터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많은 시장터로 다니면서 공개적인 곳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자리 맡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46절에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율법을 듣고 배우는 곳입니다. 당시 회당에는 맨 앞 상단에 명망 있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고 당시 분위기는 그 자리에 서기관을 앉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입구에서 가장 안쪽 중앙에는 잔치의 주인공이 앉고 그 오른쪽에는 잔치의 주인공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앉도록 배려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그 자리에 서기관을 앉게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대접 받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빼앗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47절에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고 했습니다. 당시 과부는 고와와 함께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자로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보호해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야 하고 사회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서기관들은 그들의 가산을 착취하였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보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을 후원자의 기부금에 의존했습니다. 그들에게 과부들은 사취의 좋은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사역 등을 빙자하여 과부들에게 재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것을 뛰어 넘어 갈취를 한 것입니다. 경건의 탈을 쓰고 약탈을 일삼는 타락한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헌납을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47절에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율법의 정신에 대한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율법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가르치는 직분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율법과 직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만 채우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중한 벌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12: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1).

 

<結言>

  오늘날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고 자랑하고 과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높임 받으려 하고 대접 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유익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교회 구조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사용하여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만 채우려 한다면 하나님께 더 무거운 심판을 받아야 할 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