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누가복음23:1-56
<題目>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序言>
본 장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내용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은 단순히 자연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구원자로서 모든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여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죽으신 대속의 죽임이었습니다. 내용구조는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1-12절), 빌라도의 십자가형 언도(13-25절), 예수님의 십자가 짐(26-31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두 강도(32-43절), 예수님의 죽음(44-49절), 예수님의 장사(50-56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 (1-12절)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①무리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습니다 (1-2절).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1절).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 밤새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마27:1, 막15:1). 빌라도(Pilate)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를 다스린 제 5대 총독이었습니다 (A.D.26-36). 그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나 유대인들의 큰 절기에는 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소요를 일으킬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머문 것은 헤롯 궁정(뜰)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안토니오 요새였을 것입니다.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판결을 내렸지만 사형 집행권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로마 총독은 로마 황제의 재가 없이도 관할 지역민에 대한 사형 집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 집행권이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2절).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 민심을 현혹하여 질서를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을 선동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했습니다.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칭 왕이라 떠들어 댔다고 했습니다. 자칭 왕이며 메시야라고 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밤에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정했는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는 국가 반란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발을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의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식민지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빌라도로부터 산헤드린 공회에서 지목한 신성 모독죄로는 사형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치적 반란죄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②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후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3-7절).
빌라도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냐고 불었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했습니다 (3절).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발했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고발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 물음은 유대인들의 왕이 되어 로마제국에서 독립하려는 것이냐는 의도의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고 대답하지 않고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의미의 대답임에 틀림없지만 어떤 암시를 느끼게 하여 대화를 계속 이어 가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의 질문의 의도대로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왕이 맞습니다. 요한복음18:36-37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기를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더욱 강하게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통케 한다고 했습니다 (4-5절).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려는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왔고 진리에 대해 증언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요18:33-37).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예수님의 대답을 충분히는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정치적인 나라를 세우려 하는 것은 아니며 그 나라의 왕이 되려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안 것입니다.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한다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고발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무죄 판결을 내리자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갖가지 비방과 중상과 모략으로 더욱 거세게 고소를 한 것입니다. 판결에 불복하고 갈릴리에서부터 온 유대 지역까지 백성을 선동한 자라고 집요하게 고소를 한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대제사장들의 고소를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인지 물어서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6-7절).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을 고소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갈릴리 지방은 헤롯 왕의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처리하기 껄끄러운 예수님에 관한 문제를 헤롯에게 떠넘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보냈습니다. ‘헤롯’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를 가리킵니다. 빌라도는 로마 제국에서 유대 전 지역을 통치하게 하기 위해 보낸 총독이고 헤롯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는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위치상 빌라도보다 헤롯이 더 아랫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낼 의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무죄한 사실을 안 동시에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집요하게 죽이려 고소했기 때문에 그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게 보낸 것입니다. 마침 헤롯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더욱 쉬웠던 것입니다. 헤롯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자신이 관할하는 구역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③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하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8-11절).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하고 했습니다 (8절). 헤롯은 평소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서가 아니라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이 되살아온 자로 말하거나 엘리야나 그 같은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되살아온 자로 말했기 때문에 그 소문을 듣고 확인하게 위함이었습니다 (9:7-9). 둘째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었는데 사람들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능력을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대 왕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 재주로 공연을 하게 했기 때문에 헤롯이 그런 호기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자기에게 보내어 그 예수님을 보게 되었으니 기뻐한 것입니다.
헤롯이 여러 말로 예수님께 물었으나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서서 힘써 고발했다고 했습니다 (9-10절). 헤롯은 자신의 여러 관심사를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마 대답할 가치를 못 느껴서 침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고소한 자들은 계속해서 강경하게 고발을 했습니다. 아마 헤롯이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으로 질문한 것을 보면서 헤롯도 빌라도처럼 예수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을 염려하여 더욱 격정적으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 (11절). 헤롯은 처음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호의적으로 대했으나 예수님이 자신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자 심한 불쾌감을 가진 것 같습니다. 아마 자신을 무시하거나 모욕한 것으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거기에다가 유대교의 최고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거세게 고발을 하자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얻어야 할 입장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 만족하게 하기 위해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한 것 같습니다. 당시 헤롯의 호위병은 1~2개 보병대로서 약 200~400명 가량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희롱을 다 한 후에 빛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빛난 옷’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왕들이 입는 붉은 옷으로 생각됩니다 (요19:2). 그 옷을 입힌 까닭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고소 내용이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희롱하는 의미로 왕포를 입혔을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낸 것은 재판권을 빌라도에게 넘긴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에 대해 아무 죄목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재판을 하지 못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다시 넘긴 것이었을 것입니다.
④빌라도와 헤롯이 당일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12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12절). 아마도 빌라도와 헤롯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전체를 통치하는 로마 총독으로서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이 절기 때 성전에 모여 자주 정치적인 소란을 피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소요를 일으키자 그들을 학살했습니다 (13:1). 빌라도는 헤롯이 갈릴리 사람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리게 한다는 생각 때문에 헤롯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한편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서 통치 일환의 하나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자기 관할인 갈릴리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에 모였을 때 학살한 사건으로 마음에 충격을 받아 그를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빌라도가 헤롯과 화해하기 위해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헤롯이 아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롯을 배려한다는 의미로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헤롯에게 보냈을 것입니다. 그에 따라 헤롯도 빌라도의 화해 행동에 보답하기 위해 빌라도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다시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서로 예수님을 보낸 것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아는 동시에 종교지도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책임을 피하기 위해 서로 예수님을 보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정치적인 결정인 것입니다. 그런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편으로는 서로 정치적으로 화해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빌라도와 헤롯이 원수지간에서 당일에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에 서로 종교적 주장을 달리하는 경쟁관계에 있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핍박하는데 협력하고 서로 사상이 다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해 야합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마22:15-16, 막12:18).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어느 것이 옳으냐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어느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우리의 목적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하고 신앙양심에 두어야 합니다.
2. 빌라도의 십자가형 언도 (13-25절)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 총독이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를 심문했으나 고발하는 일에 대해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에게 보냈지만 그도 죄를 찾지 못해 도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때려서 놓겠다고 했습니다 (13-16절). 빌라도는 헤롯으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은 후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행정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을 불러 모아 정식 재판을 연 것입니다. 빌라도는 입회한 자들에게 자신이 이미 예수에 대해 공개심문을 통해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상기시키고 헤롯에게도 보내서 그의 무죄함에 대해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행한 일들은 그를 죽일만한 일들이 아니므로 그를 죽이지 않고 때려서 놓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사형을 내리지 않고 채찍질을 한 후 석방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는 줄 알고 석방시키려했으나 예수님을 고발한 자들의 비위도 어느 정도 맞추어주려 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시켜 주려는 노력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첫째, 고발자들에게 그들의 고발은 종교 문제이니 그들에게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요18:31, 19:6-7). 둘째, 이 사건을 헤롯에게 넘기려 했습니다 (7절). 셋째, 예수님을 유월절 특사 대상으로 추천했습니다 (막15:6). 넷째, 예수를 사형을 내리지 않고 태형만 내려 석방하려 했습니다 (16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놓아주려 했지만 고발자들과 타협하기 위해 태형을 내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17절에는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부 사본들에서는 언급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사본들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절기가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 주더라’입니다. 이는 마태복음27:15와 마가복음15:6을 근거로 후대의 필사자들이 덧붙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Metzger, Marshall). 유월절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로서 로마 총독이 식민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회유 방법으로 백성들이 지명하는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주었는데 그것은 거의 관례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예수를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니 바라바는 성중에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했습니다 (18-19절). 빌라도의 말에 무리들은 격앙되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한 것입니다. 바라바(Barabbas)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반란죄와 살인죄로 투옥된 사람입니다 (막15:7). 그는 유대교의 젤롯파(열심당)에 속한 자로서 로마제국의 유대 지역 점령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의 주모자로 추측됩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런 바라바는 민족적 영웅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마태의 보고에 의하면 명절에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석방시켜주는 전례가 있어서 빌라도 총독이 무리에게 누구를 석방시켜 줄지 물었고 무리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마27:15-21). 군중들은 지배국가의 총독의 의향보다는 자국의 종교지도자들의 지시를 따른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외친 것은 대제사장들의 사주로 충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막15:11).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계획이 무산될 위기를 감지하고 무리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놓아주도록 요구하게 한 것입니다. 어떤 말로 선동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수적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비하하고 바라바를 영웅화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시키기 위해 무리에게 다시 말했지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가 세 번째 예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으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했지만 그들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을 이기지 못하여 바라바를 석방시키고 예수님에게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을 언도하여 넘겨주었습니다 (20-25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확인하고 (4,14.22절), 예수님을 석방해주기 위해 군중들에게 3번이나 물은 것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고 도리어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처럼 보이자 손을 씻으며 예수에 대해 자기는 무죄하다고 하면서 그들의 뜻대로 했습니다 (마27:24).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선고를 한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후에 로마인들이 사용했습니다. 로마제국은 노예나 서민 가운데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들에게 사용했습니다. 그 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죽음의 속도는 매우 느렸습니다.
보통 최고형의 언도가 내려지면 처형 직전에 매질을 했는데 그 매질 자체가 독자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채찍질은 잔인했습니다. 채찍은 서부영화에서 볼 수 있는 긴 채찍이 아닙니다. 나무 손잡이에 짧은 가죽이나 노끈을 연결되어 있고 그 가죽이나 노끈 끝에 뼈나 납 같은 쇳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매질을 40대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신25:3), 로마인들은 횟수에 규정을 두지 않았습니다. 채찍 집행 언도를 받은 죄수는 일단 옷을 다 벗기고 무릎을 꿇린 다음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손목을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기둥 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하여 그 기둥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허벅지와 발목은 밧줄이나 쇠사슬로 고정시켰습니다. 그리고 힘센 군인 여럿이서 한쪽 목과 어깨로부터 시작하여 빠짐없이 쳐 내려갔습니다. 어깨에서 시작하여 흉곽,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치고 나면 다른 편의 목부터 다시 쳐 내려갔습니다. 이 형벌은 등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살이 너덜거리고 피가 범벅이 되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C. Truman Davis). 만일 죄수가 등 전체를 맞을 때까지 견딜 수 있게 되면 몸을 뒤집어 앞부분까지 맞게 되며 때리는 방식은 등과 같았습니다. 앞부분을 맞는 동안에는 내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몇 사람도 이 태장형에 의해 내장이 터져 나와 노출될 때까지 매질을 당한 일이 있으며 (Josephus), 한 선지자는 뼈가 나올 때까지 매질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Albinus). 뿐만 아니라 이 태장형을 치른 죄수는 채찍질이 끝나면 혼절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합니다 (C. Schneider). 요한복음19:4-16에 보면 빌라도가 채찍질을 당해 비참한 모습을 한 예수님을 무리 앞에 데리고 와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하면서 동정심에 호소하지만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로부터 예수님은 옳은 자이니 죽이면 안 된다는 조언도 들었습니다 (마27:19). 그는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석방시켜 주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총독의 고유한 권한으로 예수님을 석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19:10에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요구를 하는 군중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내어줄 때 마태복음27:24-25에 보면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면할 길이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을 했거나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Suhuler).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으로 기록되어 전 세대에 그의 죄가 공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세상 정권에 넘기고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습니다.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A.D.70년에 비참한 학살을 당하고 그 후오 2,000여 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끊임없이 방랑했고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수백 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적 때문에 양심을 어기고 주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짐 (26-31절)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언도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군병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정 안으로 끌고 가 채찍질을 하고 홍포와 가시관과 갈대로 희롱했습니다 (마27:27-31, 막15:16-20).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처형 장소로 끌고 갔습니다. 십자가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못 박힐 무거운 횡목(patibulum, 형틀)을 처형 장소까지 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형틀은 무게가 약 20kg정도 된다고 하는데 보통은 죄수의 등에 끈으로 묶여졌습니다. 예수님도 빌라도 관정에서부터 그 형틀을 지고 갔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성문이 있는 곳까지의 약 1.5km 정도 되는 길을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란 뜻의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인 가로대를 지고 그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전날 밤부터 심문을 받았고 채찍질에 맞아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거칠고 무거운 나무통은 찢어진 어깨를 짓눌렀을 것입니다. 탈진할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 고통스런 통나무를 지고 가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다가 자주 쓰러졌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가던 군병들은 사형수를 사형장까지 데려가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형장에 가기도 전에 죽을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갔습니다. 군병들이 그를 붙잡아 예수님이 지던 십자가 가로대를 억지로 그에게 지우고 함께 가게 했습니다.
①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따랐습니다 (26절).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26절). 마태복음27:32에도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시몬(Simon)은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구레네(Cyrene)는 북아프리카 이집트의 서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지중해에서 15km 떨어진 고원지대입니다. 오늘날의 리비아 수도인 트리폴리(Tripoli)입니다. 당시에는 구레나이가(Cyrenaica)라는 수도로서 헬라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 곳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헬라어로서 '흩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이스라엘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자들을 말합니다. 시몬도 구레네에서 살고 있던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시몬은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유다 예루살렘으로 먼 길을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비아돌로로사에 어떤 행렬이 있었고 그 행렬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시몬도 군중들 틈으로 들어가 그 행렬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죄인의 모습으로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 된 채로 십자가를 지고 로마 군병들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가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가다가 다시 쓰러지곤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를 재촉하던 로마 군병들이 그가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자기를 끌어다가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습니다. 시몬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로마 군병들의 강압에 의해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시몬은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먼 길을 가면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왜 사형을 받았는지, 왜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서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 형틀에 그 십자가 주인이 못 박혀 매달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가 붙여진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시몬은 그 죄 패를 보고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된 유대인의 왕 곧 구원자(메세야, 그리스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좌우에 함께 매달린 두 강도의 대화를 보면서 그가 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시몬은 그 사건 이후에 자신이 대신 져 준 십자가의 주인이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이 줄곧 생각해 왔던 그분이 구약에서 오시리라 약속된 구원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그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시점에 믿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믿었는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믿었는지, 부활한 다음에 믿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그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시몬은 가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고 그의 아내와 아들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도왔고 초대교회가 세워지는데 지대한 역할을 다했습니다. 마가복음15:21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시몬의 아들이 루포인 것입니다. 로마서16:13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습니다.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입니다. 바울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와 그 아들을 주 안에 택함을 입은 자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시몬의 아내를 자기 어머니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시몬의 아내가 예수를 믿었을 뿐 아니라 바울의 사역을 열심히 도왔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몬의 가정은 모두 예수를 믿어 신앙생활을 잘했고 초대교회에 성장을 위해 헌신한 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지역에 선교를 다니면서도 그 가정을 기억했고 교인들에게 그들을 알아주라고 한 것을 보면 사도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알지 못하고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자기와 자기 가정이 신앙적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해서입니다. 로마서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1:29에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2:21에도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으면, 복음전도를 하려 하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면, 사명을 감당하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딤후3:12). 수고와 손해와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져도 복을 받는데 의지를 가지고 헌신을 결단한다면 더욱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3:14에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②예수님이 슬피 울며 따르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7-30절).
예수님이 비아돌로로사를 갈 때 그 행렬에 많은 백성들이 따랐고 여자들도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27절). 고난의 행렬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을 것인데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외의 여러 순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보고하지 않은 여인들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슬피 울며 따르는 여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28-29절).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따라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작정된 대로 가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22:22). 자기 자신과 자기 자녀를 위해 울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애통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 여인들이 당할 일과 그들의 자녀들이 당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1:20-23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넘어지라”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30-31절). 심판과 재앙의 날에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산이 자신에게 무너져 죽게 해달라는 호소를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계6:16).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푸른 나무보다는 마른 나무가 불에 더 잘 탑니다. 그런데 푸른 나무가 탈 정도의 불이면 마른 나무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푸른 나무’는 생명력이 있는 나무로서 의인을 비유한 말인바 예수님 자신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마른 나무’는 생명력이 없는 나무로서 악인을 비유한 말인바 유대인들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의로운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한다면 환난 때에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죽인 악한 유대인들이 당할 고통은 얼마나 크겠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A.D.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이루어졌습니다 (Josephus). 그 당시 재난을 피하여 산골짜기로 피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산이 무너지므로 2,000명이나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말의 대환난 때에 세계의 모든 인간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6:15-17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대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그 죄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대가 당할 환난과 고통은 더욱 처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환난으로 인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산들이 무너져 빨리 죽었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당할 고통은 처참할 것이라는 것이고 그 때에는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24:19에서도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제국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되는데 그 때에 군병들이 아이를 잉태한 자는 배를 찔러 죽였습니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아이를 빼앗아 아이의 두 발을 잡고 돌에 머리를 메어쳐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선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는데 (마24:15-16), 아이를 가진 자나 아이를 젖먹이는 자들은 빨리 도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사들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젖먹이 아이를 빼앗아 두 발을 잡고 머리를 돌에 메어쳐 죽이는 광경을 볼 때 부모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런 자녀가 그런 처참한 학살을 당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환난을 당할 것을 예고했고 그 때 아이를 가지면 더 큰 환난을 당한다고 경고했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종말에서 무시무시한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당할 고통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없는 것 때문에 애통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울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 자신이 믿음 없는 것 때문에 울어야합니다 (마5:4). 사람이 아무리 큰 환난을 당해도 본인이 믿음이 있다면 환난의 고통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막9:23, 빌4:13, 삼상17:45).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마8:26, 17:20, 21:21). 그러나 환난을 극복할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욕심을 버린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약:1:15, 5:1). 그런데 욕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은 많습니다.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요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감당할 믿음이 없는 것 때문에 울지는 않습니다.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는 줄 알고 자기를 위해 애통해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5:4).
4.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두 강도 (32-43절)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①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해골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32-33절)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다른 두 행악자도 끌고 갔습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예수님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32-33절). ‘두 행악자’가 어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인지 언급되지 않았으나 마태와 마가는 강도였다고 했습니다 (마27:38, 막15:27). 당시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봐서 살인을 서슴치 않는 흉악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두 행악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은 ‘해골’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곳을 ‘골고다’라고 했습니다 (마27:33, 막15:22). ‘골고다’(Γολγοθα)는 히브리어(아람어)의 헬라어 음역으로서 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y)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 곳은 그렇게 부른 것은 그 곳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Calvin, Bengel, Plummer). 그곳은 로마군의 공식적인 처형장이었고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행악자와 같이 끌려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이 행악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사53:9,12).
②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33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했고,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를 뽑았다고 했습니다 (34절).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마태복음27:35-36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고 했습니다 (막15:24).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갖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Blinzler). 그것은 시편22:18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7마디였습니다. 이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이고 (눅23:34), 둘째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고 (눅23:43), 셋째는 ‘이는 내 어머니니라’이고 (요19:26), 넷째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이고 (마27:46, 막15:34), 다섯째는 ‘목마르다’이고 (요19:28), 여섯째는 ‘다 이루었다’이고 (요19:30), 일곱째는 ‘내 영혼을 받으소서’입니다 (눅23:46). 이 가상칠언을 순서대로 외우려면 "용낙모기갈성혼"(容樂母棄渴成魂)으로 외우면 좋습니다. 그래서 본 절에 나오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말씀은 ‘용’(容)에 해당합니다. 가상칠언가운데 제일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저들’은 일차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던 로마 군병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주범 산헤드린 대표인 대제사장들, 그에 가담했던 회원들인 서기관들과 장로들, 그들에게 협력했던 모든 유대인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모든 사람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고전2:8, 행3:15).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께 용서해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그들이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53:12의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을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마태복음5:44의 교훈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5:4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마태복음5:46-48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8:22에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만 달란트를 용서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용서해 주지 못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18:21-35). 제물을 드리려 하다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내려놓고 가서 사화하라고 했습니다 (마5:23-26).
③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35-38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35절). 누가는 백성들은 서서 구경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5:29-30에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백성들도 예수님을 모욕하는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하면서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5:31-32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율법사)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주도적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계획하고, 예수님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연행하고, 신성 모독죄로 엮어 사형 판결을 내리고, 반란죄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사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었다는 승리감에 취하여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구원자라고 하더니 남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생명도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어디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가 구원자인 것을 믿게 해 보라~”는 식으로 조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말들을 감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하더라고 했습니다 (36-37절). 군병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준 것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할 목적으로 먹을 수 없는 신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눅23:36). 둘째는 예수님의 목을 축여주기 위해 신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19:28). 셋째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신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마27:34). 어느 것이 맞는지는 정확히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군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희롱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희롱을 했는데 (35절, 마27:42-44), 군병들은 다소 정치적인 관점에서 희롱을 한 듯합니다.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에 (38절). 그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여 모욕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38절). 로마인들은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경우 그 죄명이 적힌 명패를 십자가 위 곧 죄수의 머리 위에 고정을 시켰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죄 패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7:37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했고 마가복음15:26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고, 누가복음23:38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고, 요한복음19:19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기자들마다 관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점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이 죄 패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요19:20).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 유월절에 각처에서 디아스포라들도 모여들었으므로 그들까지 모두 읽을 수 있도록 한 조처라 할 수 있습니다 (요19:20). 어쨌든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이 종교적 죄목이 아니라 정치적 죄목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신성 모독죄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권이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당시 로마가 피지배국의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신성 모독죄로 고소할 경우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반란죄(역모죄)로 고소를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그런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대제사장들에게 사주와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강한 요구에 민란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목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해 반란을 꾀하는 수괴 곧 ‘유대인의 왕’으로 고정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요한복음19:21-22에 보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데 가장 주도적이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은 정작 빌라도가 그들이 고소한 대로 죄명을 ‘유대인의 왕’이라 규정하자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자칭’이라는 말을 넣게 한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죽이려 안간힘을 썼고, 얼마나 거짓된 죄목으로 예수님을 죽게 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백성들에게 미치자 자신들의 부패한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 같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④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행악자도 비방했습니다 (39-43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했습니다 (39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좌우편에 하나씩 두 행악자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32절). 그 행악자들은 강도였습니다 (마27:38, 막15:27). 당시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봐서 정치적인 무력 저항 세력으로 활동하면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정당한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41절). 그런데 두 행악자 가운데 한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종교적인 의미에서 모욕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무장 혁명세력인 열심당(Zealot)속한 자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것이 맞다면 그는 평소 예수님의 영적인 신국관과 사역관에 대해 옳지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자 조롱한 것입니다.
다른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한 행악자를 꾸짖어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40절). 예수님을 비방했던 행악자를 다른 쪽에 있던 행악자가 꾸짖었습니다.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 행악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41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한 것을 보면 자신이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은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인 것을 알고 사후에 하나님께 심판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곧 과거의 자기 악행을 생각하면서 사후에 갈 곳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로인해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키에르케코르(Kierkegaard)는 "죄를 짓는 것이 죄가 아니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고 했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다른 한 행악자는 또한 예수님을 비방한 행악자에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41절). 한 행악자는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옳지 않은'(ατοπος)는 '본래 제자리가 아닌'(out of place)입니다. 십자가 처형대는 예수님이 달려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는 자신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비방하는 무리를 향해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신 것을 보고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인 것을 믿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분이 자기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히4:15, 요일3:5).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없이하려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53:5-6). 우리는 고난 중에도 그분이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고 현재에서 우리의 고난을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고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한 행악자는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42절). 이 행악자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기억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기억하소서’에 해당하는 ‘음나오마이’(μναομαι)는 문자적으로 ‘기억하다’ ‘생각하다’ ‘보상하다’ 등의 뜻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가실 때 자신도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행악자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로 가실 줄 알고 자신도 데려가 주기를 원하는 믿음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했고 그가 세울 나라도 정치적 국가로 생각했습니다 (Zealot). 그것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가 임하면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주십시오"라고 한 것과 그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분해했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9:46, 마20:20-21, 막9:33-35, 10:35-41). 제자들은 심지어 유월절 만찬석에서까지도 누가 큰 자인지 다투었습니다 (22:24).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자 그런 나라를 세우는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실망하여 각기 제 갈 길로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행악자는 그의 나라를 사후의 나라로 인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후에 그 나라로 가실 것을 믿었고 자신도 그 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43절). 예수님은 이 행악자에게 즉시로 낙원에 갈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낙원’에 해당하는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ος)는 ‘정원’ ‘동산’ ‘낙원’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 영(영혼)이 가는 곳으로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그 낙원(παραδεισος)은 천국(βασιλεια ο ουρανος)과 동일시합니다. 그럴 경우 성도가 죽으면 영이 천국에 갔다가 주의 재림 때 영이 다시 돌아와 부활한 육체와 결합하여 다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그 낙원을 천국과 다르게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낙원은 임시처소로 보고 천국은 영원한 처소로 봅니다. 낙원은 성도가 죽은 후 영이 임시로 가 있는 곳이고 천국은 영과 육이 함께 가 영원히 곳으로 봅니다. 그럴 경우 성도가 죽으면 영이 낙원에 갔다가 주의 재림 때 영이 다시 돌아와 부활한 육체와 결합하여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불신자는 죽은 후에 음부로 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음부(αδης)도 전통적으로 지옥(γεεννα)과 같은 장소로 봅니다. 그럴 경우 불신자가 죽으면 영이 지옥에 갔다가 주의 재림 때 육체가 부활하여 최후심판을 거쳐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음부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지옥과 다른 장소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음부는 임시처소이고 지옥은 영원한 처소로 봅니다. 그럴 경우 불신자가 죽었을 때 영이 음부에 임시로 갔다가 주의 재림 때 영이 부활한 육체와 결합하여 최후심판을 거쳐 영원한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16:22-31과 고린도후서12:1-4과 요한계시록2:7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간 본문의 낙원을 어떤 장소로 생각하든지 예수님은 당신이 가는 곳에 이 행악자도 데려갈 것이라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행악자는 자신이 범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상황에서 다른 편에 있던 행악자처럼 분노하여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자신의 미래를 의탁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사후의 영혼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뿐 아니라 죄 문제, 생활의 모든 문제까지도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5. 예수님의 죽음 (44-49절)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때가 제 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했습니다 (44절). 마태복음27:45에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5:25에는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라고 했고, 마가복음15:33-34에는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제 3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제 6시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고, 제 9시에 운명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오늘날 시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정오 12시에 어둠이 임하고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온 땅’은 유대 땅을 말합니다. 이는 자연과 관련된 현상인지 아니면 초자연적 현상인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일식현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유월절로서 그 때에는 만월이기 때문에 일식이 일어날 수 없는 때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 우주적인 슬픔과 종말적 심판에 대한 전조적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롬8:22, 벧후3:10-12).
그리고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45절). 마태복음27:51에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성전(ιερον)은 뜰과 성소(ναο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소는 성소(the Holy Place)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2개의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사이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흰색 베실에 그룹 형상의 수 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에 금으로 입힌 4기둥의 갈고리에 늘어뜨려져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휘장은 4지폭의 두께로서, 말 10필로 양쪽에서 동시에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라고 합니다. 지성소에는 법궤와 속죄소와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이 휘장을 드리운 것은 성소 뒤에 있는 지성소를 가리기 위함이며 누구든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1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속죄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누구든지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히9:7, 레16:2).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출19:24). 그래서 지성소 안에도 그룹천사의 형상이 있었고 지성소 천장에도 그룹 천사가 수놓아져 있었지만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에도 그룹천사가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룹천사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직무를 가진 천사입니다 (출26:31).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상징한 사건입니다 (히9:11-1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이 찢기므로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히10:19-20). 에베소서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46절).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7마디입니다. ①'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②'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③'이는 내 어머니라' ④'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⑤'목마르다' ⑥'다 이루었다' ⑦'내 영혼을 받으소서'입니다 (눅23:34, 요19:27, 마27;46, 요19:28, 요19:30, 눅23:46). 이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순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 '용낙모기갈성혼'(容樂母棄渴成魂)으로 외우면 좋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말씀은 맨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성취하고 마지막으로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는 영적 만족과 신뢰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 계획을 위해 예수님 자신에 대해 택하신 모든 방편에 대한 만족이자, 승귀(昇歸)와 택자 구원에 대한 신뢰입니다 (요7:33, 17:1-26).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높이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벧전5:7).
※ 가상칠언 (架上七言)
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멸시와 조롱과 희롱과 능욕을 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예수님의 구속의 효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와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들 에서 잘 확인됩니다 (마18:21-35, 마5;23-26, 47-48). 그것을 생각하여 우리에게 범죄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예수님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 강도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신앙을 나타내자,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 중에서도 죄 고백하는 자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강도같은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원자)인 것을 믿고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 눈같이,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같이 희게 씻어 주십니다 (사1;18).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죄과를 도말하십니다 (시 103:12, 사43:25). 그것은 구약의 속죄일에 속죄제사로 드린 두 염소 중 아사셀 염소가 갖는 구속사적 의미가 확인시켜 줍니다 (레16:7-10).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 했고,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요14:6, 10:7).
③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7)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요한은 그 때로부터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천륜을 성취한 동시에 인륜도 성취한 것입니다. 인륜에 대한 첫째 계명은 부모공경입니다. 부모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행할 것을 하나님께 했다고 핑계하는 고르반 사상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막7:11). 그래서 바울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되 조건없이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엡6;1-3). 환난 때에 부모나 형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자보다 악한 것입니다 (딤전5:8).
④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이는 시편22:1의 인용으로서, 엘리 엘리 는 히브리어 음역(音譯,transliteration)이고 라마 사박다니는 순수 아람어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 값으로 죽으면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관계를 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죄 값으로 버림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원망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계획하신 구속 사역이 완성할 것을 바라보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본다면 시편22:1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했고, 16절에는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고 했고, 27절에는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들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한 말로 알고, 그 말씀들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죽음 이후에 가져올 구원 성취를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듯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미래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⑤ 내가 목마르다 (요19:28)
이 말씀은 시편19:21, 69:3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렸기 때문에 목이 말랐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좀더 깊은 의미에서는 구약의 예언을 생각하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말씀을 성취하려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덜 수 있도록 쓸개 탄 포도주 (마취제)를 거부하고 온전하고 고통과 목마름으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마27:34).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요7:38). 우리도 역경 중에서도 희생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⑥ 다 이루었다 (요19:30)
예수님은 비하(卑下)와 생애와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모든 성경을 성취하였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모든 말씀을 성취하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구속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목적이 완성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요1;1,14, 빌2:6-10). 예수님의 생애는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목표하고 있었습니다 (요4:34, 마26:39). 우리도 예수님이 권면하신 것처럼 썩지 아니할 양식,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와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요6:25, 마6:31-33)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성취하고 마지막으로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는 영적 만족과 신뢰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 계획을 위해 예수님 자신에 대해 택하신 모든 방편에 대한 만족이자, 승귀(昇歸)와 택자 구원에 대한 신뢰입니다 (요7:33, 17:1-26).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높이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벧전5:7).
그런데 요한복음19:30에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뜻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구속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구속사역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첫째, 우리의 죄를 없애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고 아담과 그 후손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범죄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을 대표원리라고 합니다. 아담은 죄인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죄성이 생겨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죄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고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죄(죄책)와 유전죄(오염)라고 합니다. 이사야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이 찢기고 뼈가 부스러진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허물’에 해당하는 ‘페솨’(פשע)는 ‘범죄’를, ‘죄악’에 해당하는 ‘아온’(עון)은 ‘사악함’을 의미합니다. 허물은 죄를 강조한 말로서 정죄를 가리키고, 죄악은 죄성을 강조한 말로서 유전죄를 가리킵니다. 그 정죄와 유전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본질적으로 부패하여 스스로는 원죄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을 사랑하여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자들의 죄를 없애 주어 의롭게 하시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의로운 예수님을 보내어 선택한 자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대로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택함 받은 자들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택함 받은 모든 자들의 죄가 없어지고 의롭게 되게 했습니다. 이것을 대리적 속죄라고 합니다. 요한일서3:5에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롬6:7). 그 은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때에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대속을 믿을 때 개인적으로 죄가 없어지고 의롭게 됩니다. 그것을 대속과 칭의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둘째,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은 아담과 그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아담과 그 후손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가조항은 만약 언약을 어겼을 경우 형벌로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그 후손인 모든 인류도 언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후손인 모든 인류는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표원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5:12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게 되고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게 하여 선택한 자들이 다시 살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하려 작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어 선택한 자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여 다시 살게 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대로 택함 받은 자들의 죄를 담당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때 개인적으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그의 대속을 믿을 때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다시 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엡2:1). 그러므로 그 사람은 다시 살고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속하신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격적인 영접을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11:25-2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보답해야겠습니까? 빌립보서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롬8:17). 베드로전서2:21에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려 해야 합니다 (딤후3:12).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빌3:10, 골1:24, 고후11:24-27, 벧전4:13, 계1:9).
한편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했습니다 (47절).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 장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책임자로서 예수님이 수난당하여 죽으시기까지 전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동을 다 보았을 것이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온 땅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44-46절, 마27:51-54). 그리고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했습니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했습니다 (마27:54, 막15:39). 백부장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후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방 기독교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갑바도기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Wendling). 그런데 누가가 ‘하나님의 아들’을 ‘의인’(δικαιος)으로 대치한 것은 이방인을 염두에 두어 이방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법정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48절).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많은 무리가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해가 빛을 잃은 것이나 무덤이 열린 것이나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신앙적으로 구원자임을 믿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의인이었다는 사실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구경했던 과오를 후회한 것입니다. 마음의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49절). ‘예수를 아는 자들’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요한복음19:25-26에 ‘그 어머니’ ‘사랑하시는 제자’(요한)가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제자 요한을 비롯하여 많은 남자들이 있었고 여자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비롯하여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마27:56) 등입니다.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막15:40)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요19:25-26)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많은 여인들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요11:2)나 죄 많은 여인(눅7:36-50)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마27:56). 여기의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1:19)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6:3)와 구분되는 야고보입니다. 요새는 요셉의 헬라 명칭인데 어떤 사본에는 요새로 나와 있고 어떤 사본에는 요셉으로 나와 있습니다. ‘살로메’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서(마27:56)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자매이며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요19:25). 그들이 멀리 서서 보았다는 것은 관망했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군병들이 십자가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면서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갈릴리'를 천한 지방으로 여겨왔고 '여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로 여겨 어린아이들과 함께 수(數)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그와 그 제자들을 따르며 복음전도 사역을 도왔습니다. 자기들의 소유를 사용하여 섬겼습니다 (눅8:2). 그러다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상경하자 함께 올라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소에까지 따라왔습니다. 실로 제자들도 다 도망하고 베드로까지 부인하는 마당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26:57,69-75). 그들은 예수님이 장사된 뒤에도 예수님의 무덤에도 가장 먼저 찾아가고 예수님의 부활체를 가장 먼저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사가들에 의하면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신성분을 생각지 말고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정탐꾼을 도운 라합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지자를 도운 사르밧 과부를 기억해야 합니다. 여선지자 미리암과 드보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보교회를 세운 루디아나 교회의 기둥 역할을 했던 많은 여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여자라도 사용하십니다 (고전1:27-29). 상황에 얽매이지 말고 주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6. 예수님의 장사 (50-56절)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50-51절). 예수님을 장사지낸 요셉에 대한 보고입니다. 첫째, 아리마대 사람입니다 (눅53:51). ‘아리마대’(Αριμαθαιας)는 구약시대의 ‘라마다임’(רמתים)으로서 (삼상1:1)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정도 떨어져 있는 지금의 렌티스(Rentis)로 추정됩니다. 둘째,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눅53:50).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는 의장 1명(대제사장)과 의원 70명(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24:20, 행4:5, 13:27). 율법 해석에 관한 일뿐 아니라 재판까지 했으며 사형 결정까지 할 수 있는 기관이었습니다. 그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 법정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한 주체입니다. 셋째, 공회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눅53:51).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으면서도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데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눅22:66-71). 넷째,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눅53:50). 매사에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습니다 (막15:43). 덕망이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여섯째, 부자였습니다 (마27:57). 상류층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마27:57). 공회원이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공회원 가운데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진리를 배운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요3:1) 여덟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눅53:51, 막15:43). 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기다리는 경건한 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로서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 심적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면서 배웠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십자가 처형장까지 따라가지 못하거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다음에 다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50절). 마태복음27:57-58에는 “저물었을 때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5:43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토) 전날 곧 금요일 오전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죽었습니다. 그날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당돌히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당돌히’에 해당하는 기본형 ‘톨마오’(τολμαω)는 ‘위험을 무릅쓰다’ ‘용기를 내다’ ‘대담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해 판결을 받아 처형된 시체는 대개 독수리 밥이 되도록 버려졌습니다. 로마인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시체를 요구하면 장사할 수 있도록 내어주었지만 국가적 정치범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을 빌라도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회에 예수님을 따른 자라는 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15:44-45에는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자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자를 그대로 두면 2~3일 정도 가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벌써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은 안식일 전 날(금요일) 오전 9시이고 그 날 오후 3시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체를 내어달라는 청원을 할 때는 그 날 저물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 10여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십자가형을 책임진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님이 이미 죽은 것이 확실한지 확인을 한 다음에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반란죄(역모죄)의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반란죄로 고소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사주와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바람에 민란이 날까 두려워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반란죄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은 시체를 내어 주지 않았으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반란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 시체를 내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형을 내린 죄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시체를 내어 주므로 약간의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체를 허락하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을 넣어 두었습니다 (52-53절). 마태복음27:59-60에는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했고, 마가복음15:46에는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라고 했고, 요한복음19:41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십자가에서 못을 빼고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가 피로 물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물로 깨끗이 닦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에 기름을 발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감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침상에 옮겨 무덤으로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무덤에 안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돌을 굴려 막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에는 제자 요한, 여인들, 자신의 하인들, 군병들 등이 도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마포’(σινδων)는 마(麻)로 짠 고급 베로서 수의(壽衣)로 많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바위 속에 판 무덤’이란 바위를 채석기로 깨뜨려 파서 동굴처럼 만든 무덤을 말합니다.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라는 말은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입구를 돌로 막는 것은 시체를 야생 짐승이나 도굴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돌은 깎아 만든 원반형이었는지 단순히 큰 바윗돌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돌을 용이하게 굴려 막기 위해 입구 앞 바닥에 홈을 팠는지 단순히 입구 앞을 경사지게 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무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있는 동산 안에 있었는데 한 번도 사용한 적인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요19:41). 그리고 이 무덤은 요셉 자신이 쓰려고 만들어 놓은 무덤이었습니다 (마27:60).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시체가 방치되지 않도록 빌라도에게 담대히 내어줄 것을 요구했고 장례를 치러드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거나 매입해 놓았을 새 무덤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사53:9). 우리가 직업적 환경을 핑계한 것에 일침을 가하는 기사입니다.
그 날은 준비일이며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고 했습니다 (54절). ‘예비일’은 바로 안식일 전날 즉 목요일저녁부터 금요일 전날까지를 말합니다. 이 때는 안식일이 거의 되어가는 때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장사가 매우 촉박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합니다. 요셉은 안식일에 장례를 치룰 수 없기 때문에 서둘러 장사를 치룬 것입니다.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룰 때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수 었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백 리트라쯤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9:39-40에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에 속하는 율법사(서기관)으로서 그 위치를 보나 아리마대 요셉과의 친분으로 볼 때 그도 아리마대 요셉처럼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을 것입니다 (요3:1). 그는 전에 밤중에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들었던 사람입니다 (요3:1-21). 그는 바리새인들의 독단적인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요7:50-51). 그러다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하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가져온 것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방부제로 침향은 방취제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향품의 양은 100리트라였습니다. ‘리트라’(λιτρα)는 원어의 음역으로서 무게단위(pound)에 해당합니다. ‘100리트라’를 개역성경에서는‘100근’으로 번역했었습니다. 100근이면 약 35kg에 해당합니다. 그 정도의 양은 당시 풍습에 의하면 왕족의 장례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라고 합니다 (대하16:14). 요한복음12:3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를 순전한 나드 1근(λιτρα)을 가룟 유다가 3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포도원 품군 이야기에서 보면 1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일꾼의 300일(약1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1리트라가 1년 품삯에 해당한다면 100리트라는 100년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큰 헌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부를 사용한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고 했고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고 했습니다 (55-56절). 마태복음27:61에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했고, 마가복음15:47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49절에서 언급된 여인들로 추정되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과 동일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24:5,10).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등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멀리서 지켜보았었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하는 곳에도 와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장사지낼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따라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둔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무덤을 돌보기 위해 무덤의 위치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향품을 살 수 없었으므로 지난 뒤에 예수님께 발라줄 향품을 사서 준비했습니다 (막16: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것은 다음날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여인들이 다른 무덤을 찾아갔을 수도 있었다는 착오설(着誤說)을 반박하는 기사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 주신 대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눅22:22). 그 일에 사탄과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군병들처럼 각기 부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백부장과 요셉과 니고데모와 여인들처럼 긍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도망한 상태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드러나지 않지만 진실로 주의 구원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