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골로새서1:1-29
<題目>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序言>
바울은 본 장에서 당시 이단적 교리가 성행했던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그의 독특한 기독론을 전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관하여 변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3년이나 머물며 복음을 전했으나 골로새 지방에 직접 가서 전도하지는 않았습니다 (4,7,8절, 2:1).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할 때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한 사람들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소개하므로 여러 지역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 중 골로새 지방에서 온 빌레몬(Philemon)이라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에바브라(Epaphras)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열심을 가지고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골로새의 복음화를 위해 힘썼습니다. 빌레몬과 에바브라를 중심으로 하여 생겨난 골로새교회는 믿음 안에서 날로 성숙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급속히 침투해 들어오는 이단 사상으로 인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단 사상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요소, 헬라의 철학적 요소, 기독교의 형식주의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상을 막을 수 있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특히 기독론에 대한 거짓 가르침에 대해 정당하게 변호할 만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에바브라를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을 찾아간 에바브라는 긴 여행에 지쳐 잠시 바울 곁에 머물며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골로새교회의 형편이 급박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골로새교회에 보낼 편지를 우선 두기고(Tychicus)로 하여금 속히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골로새교회가 직면한 신앙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신앙생활의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인사(1-2절),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감사(3-8절), 골로새 교인들을 대한 기도(9-14절),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15-18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19-23절), 바울의 사역 내용과 정신(24-2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인사 (1-2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우선 글을 쓴 기자가 자심임을 밝히고 수신자가 골로새교회 성도들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자라고 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라고 했습니다. '사도'(αποστολοs)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보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복음전도를 위해 직접 보내셨다는 의미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전도 사역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나 복음전도를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행1:22, 고후3:1, 갈1:15-16).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했습니다 (1절).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으로서 루스드라 태생입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 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바울이 1-2년 후에 다시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발전에 감명을 받아 젊은 동역자로 삼고 종교적인 신분을 정규화해 주기 위해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따랐고 바울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행14:8-20, 16:1-3, 빌2:20-22). 바울은 여기에서 디모데가 자기의 동역자일뿐 아니라 골로새교인들이 디모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2절에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성도'(αγιοιs)는 '거룩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이 자그마한 도시에서 살고 있고 이단들의 미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세상에서 택하여 구별한 거룩한 자들임을 인정하고 신실한 형제들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라고 했습니다 (2절). 하나님이 절대적인 사랑을 근거하여 거저 주시는 모든 '은혜'(χαριs)로 기쁨이 넘치는 '평안'(ειρηνη)이 있기를 원한다는 인사를 한 것입니다.
2.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감사 (3-8절)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3절에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직접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골로새교회에 대한 사도직을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4-5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πιστιs)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을 통틀어 한 말일 것입니다. '사랑'(αγαπη)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므로 다른 성도들에게 희생적으로 대하는 실천일 것입니다. '소망'(ελπιs)은 하늘에서 영광을 누릴 기대감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신념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살전1:3). 사실 이 세 가지는 복음 진리의 말씀 전해지는 곳에 당연히 나타나야 할 요소들입니다 (고전13:13).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것은 복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5절에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10:17).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어 자라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 천하 곧 로마까지 복음 진리가 전해졌고 그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열매를 맺어 자라난다고 했습니다 6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면 어느 곳에서나 변화가 일어나고 성장이 있게 됩니다. 개인의 인격과 유기적 공동체가 말씀대로 변화되어 가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에 생명력이 있고 성령께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7-8절에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라'(Epaphras)는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의 약칭으로서 빌립보교회의 일꾼이었던 에바브로디도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빌2:25, 4:18). 에바브라는 골로새 태생으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서도 활약을 한 사역자로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적도 있고 옥중에서도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몬1:23, 골4:12).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할 때 회심하여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골로새 지역으로 파송되어 골로새에서 복음의 말씀을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에게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 상황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특히 골로새 교인들이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αγαπη)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생길 때도 그랬듯이 성령으로 말씀을 깨달으며 사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3. 골로새 교인들을 대한 기도 (9-14절)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골로새교회에서 에바브라가 찾아와 골로새교회의 상황을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단의 교훈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복음을 전해 들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3-8절). 그로 인하여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①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9절에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뜻'에 해당하는 '델레마'(θελημα)는 의지, 목적, 계획, 섭리, 판단, 결정, 경향, 원리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생각과 사고와 사상과 감정과 의지 등 모든 활동의 주체가 되는 부분에 채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잘못된 데 미혹되며 잘못된 열심을 내며 잘못된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은 크게 성경말씀과 기도와 섭리와 신앙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면 자기를 위하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은 나침반 안에 들어가 있는 쇠붙이와 같습니다. 나침반에 쇠붙이가 들어가 있으면 나침반은 방향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하고 그 나침반으로는 바른 항해를 할 수 없고 결국 파선하게 됩니다. 골로새서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중 마지막 열번째인 10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20:17). 맨 마지막에 있지만 원인 차원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계명이 모두 10계명 때문에 어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10절에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앜시오스'(αξιωs)는 '합당하게' '적합하게' '어울리게'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금까지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고 있는 사역에 상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갖은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셨습니다 (빌2:6-8). 그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율법과 죄와 그 형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엡2:1-7).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요14:16-18)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롬8:1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고 (롬8:16)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영원한 가치를 깨달아 살게 하고 (요16:13) 우리를 위로하고 탄식하고 기도를 도와 주십니다 (롬8:26). 그뿐 아니라 하늘에서 우릴 위해 중보하고 변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요일2:1). 예수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인식하는 자는 이제 그의 목적과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모든 일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Charles M. Sheldon, 1857-1946)라는 책이 있습니다.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헨리 맥스웰이라는 목사는 자신에게 일은 있지만 주님은 빠져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묻고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그대로 실천해 보자고 했습니다. 몇 교인들이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교인 가운데 밀턴 라이트란 이름의 기업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장실에 다음 같은 글을 적어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우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목적으로 사업을 하실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벌어들인 돈을 결코 자기 돈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종업원들과의 관계를 지극한 사랑과 협력의 관계로 이끄실 것이다. -예수님이시라면 부정직하거나, 의혹을 살만한 뒷거래를 하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이기적이 아니고 협조적인 사업원칙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종업원, 고객, 연관업체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원칙에 따른 종합적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런 의지로 일하는 교인들은 모두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 신문사 사장은 신문에서 선정적인 기사와 술 담배 광고를 빼고 많은 손해를 입습니다. 회사 중역의 한 사람은 회사 비리를 고발하여 일자리를 잃습니다. 서약자들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수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신념대로 행동했고, 결국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모든 일과 상황에서 '예수님이 지금 나의 상황에 계시다면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주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세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③모든 일에 열매 맺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 옳은 일 혹은 좋은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옳게 살려고 하는데 그치지 않고 생활 가운데 그 행위가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④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10절에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벧후3:18).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의지를 아는 것이 점점 많아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때 절대적 속성은 독립성(獨立性), 불변성(不變性), 무한성(無限性), 단순성(單純性)이 있습니다. 보편적 속성에는 지식(知識), 지혜(知慧), 선(善), 사랑(愛), 거룩(聖), 의(義), 진실(眞實), 주권(主權)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이 관계성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에서 기자들이 가장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단어가 인자하심과 성실하심과 선하심입니다.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언약백성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의지를 말하고, '성실하심'에 해당하는 '에무나'(אמונה)는 언약백성에 대해 가지신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 가는 의지를 말하고, '선하심'에 해당하는 '토브'(טוב)는 언약 백성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대하시는 의지를 말합니다. 시편23편 기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따르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관계성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 알아 가는 만큼 하나님과 교제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⑤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11절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의 영광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권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와 죄성의 주장과 죽음의 공포와 질병의 고통과 물질의 고난 등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인 실력이 갖추어지길 바란 것입니다. 환난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추어질 바란 것입니다 (고후4:8-9, 빌4:12-13). 고린도후서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 했고, 빌립보서4:12-13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⑥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11절에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견딤'(υπομονην)은 신앙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데 있어서 어떤 대적이나 저항이나 유혹이 있어도 그것에 영향받지 않고 여전히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ιαν)은 어떤 고통이나 손해나 모욕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여전히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견딤과 오래 참음은 기쁨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영적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기를 바랬습니다 (고후12:9-10, 롬5:3-5, 약1:2-4, 벧전1:6-7). 고린도후서12:9-10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고, 로마서5:3-5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했고, 야고보서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2절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을 연상시키는 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혜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기도 할 수 있지만 현재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율법과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 등과 관련한 많은 영적인 은혜를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는 감사 밖에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고 했습니다. 12절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본 절은 그에 대한 보충설명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셨다고 했습니다. '흑암의 권세'는 사탄과 죄의 권세를 말합니다 (엡6:12).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과 죄(죽음,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죄값을 치르므로 그를 믿는 우리가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내세의 천국을 말하지만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죄로 죽음과 지옥 형벌에 놓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그의 대속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죄와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고 영이 거듭나고 성령님이 내주합니다. 그 사람은 성령님과 말씀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바로 그 통치를 받는 영역인 그 사람의 영과 인격과 마음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 믿는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성령과 말씀으로 교제하며 비전을 나누며 사역을 하는 유기적 공동체가 공동체적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공동체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말씀이 통치원리가 되고 새로운 가치인 진리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공동체를 교회(εκκλησια)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라고 하는 건물의 개념이 아닙니다. 내세의 하나님 나라이든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이든 공동체적인 하나님 나라이든 모두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을 이루므로 그 하나님 나라를 기업(유업)으로 얻게 해 주셨습니다.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는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은 자입니다. '속량'(απολυτρωσιν)은 값(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대상을 획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로 팔려 갔을 때 그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속박으로부터 풀려 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 사함'(την αφεσιν τωγ αμαρτιων)은 죄를 용서하여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오는 모든 형벌로부터 자유케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그 모든 후손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나 그 언약을 깨트리므로 죄인이 되었고 그 모든 후손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 죽음과 지옥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와 그 결과로 오는 형벌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스스로는 의를 행할 수 없도록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대신 죄값을 지불하고 의를 행해 주어야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일을 해줄 구원자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신인(神人) 양성(兩性)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할 자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려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빠지면 구원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1:1,14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λογοs)은 히브리적 표현인 '하나님'(אלוהים)을 헬라적으로 표현한 용어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모든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시므로 택한 백성인 믿을 자들의 죄값을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지불하므로 하나님이 법정적으로 죄가 없다고 죄 사함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므로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를 전가시켜 의인으로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믿는 자는 죄와 죄의 결과로 오는 형벌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이 속량입니다. 구원의 기본적 의미입니다. 그 큰 은혜를 믿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빛 가운데서 얻게 해 주신 기업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기본적인 이야기를 새삼 하는 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외적으로 환난을 당하고 내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고 그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 (15-18절)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①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분입니다.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고후4:4). '형상'에 해당하는 '에이콘'(εικων)은 '형상' '모습' '모양' '유사' 등의 뜻입니다 (image, likeness).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이 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9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고, 요한복음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스'(λογοs)는 문자적으로 '말씀'으로 번역되는 단어이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채택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은 수신자가 헬라(그리스)인으로서 그들은 히브리인들이 아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기록자인 요한은 헬라인들이 플라톤철학의 스토아학파의 철학적 지식이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임을 천명하기 위해, 그들이 우주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채택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빌립보서2:6-7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고 했습니다.
②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입니다.
15절에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했고, 17절에도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등급상 우월성을 포함한 말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적인 초월성을 말하려는 표현입니다. 미가서5:2에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태초'에 해당하는 '알케'(αρχη)는 '시작' '기원'이라는 뜻인데 이는 시간의 시작 이전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8:5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보다 선재(先在)하신 분입니다.
③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16절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고 했습니다.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두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은 천사들 가운데 높은 위치에 있는 영들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세상의 만물도, 하늘의 영들도 다 예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한 분입니다. 창세기1:26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과 성령님과 의논하시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잠언8:30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했으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1:2에도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④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17절에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섰느니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쉬니스타오'(συνισταω)는 '가까이 서다' '함께 있다' '설립하다' '구성하다' 등의 뜻입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섰다는 것은 만물이 그에 의해 구성되고 배치되고 유지되고 존속되고 통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하나님으로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에 의해 유지 보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선재하신 하나님으로서 우주 만물의 동인이며 통치자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릇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며, 천사숭배나 교주 숭배는 경계해야 합니다.
⑤가장 먼저 살아나신 분입니다.
18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과 인간보다 먼저 존재하신 분이고 만물과 인간 창조에 관여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1:1-3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과 인간보다 시간 면에서도 가장 먼저 된 분이고 가치 면에서도 가장 우월한 분입니다. 곧 으뜸된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므로 죽게 되었고 만물도 더럽혀졌습니다. 하지만 종말에 만물이 회복될 것이고 인간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롬8:20-22). 헌데 예수님은 종말에 부활할 모든 인간보다 가장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고전15:20). 예수님의 부활을 동인으로 표본으로 종말에 모든 인간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사건은 모든 만물과 인간의 으뜸됨을 증명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으뜸은 상대적 차이가 아닌 절대적 차이인 것입니다.
⑥교회의 근본과 머리되신 분입니다.
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교회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는 문자적으로 '불러냄'의 뜻으로서 세상에서 불러낸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는 바 곧 구속받은 성도들의 유기적 연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근본'에 해당하는 '아르케'(αρχη)는 '시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창시자이며 동인이며 원천이며 생명을 제공해 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며 예수님이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교회가 생명을 공급받을 수도 없고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이어야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기초해야 하며 예수님이 함께 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5:4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고 요한복음15:6에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과 상호 내주 교통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5의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한 말씀을 무겁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1:20).
그리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성도들로 구성된 몸에 비유한다면 예수님은 머리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이라는 말이 예수님께서 교회의 창시자임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머리'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권자되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권자가 되어 친히 다스리시고 운영하십니다. 교회정치에서 개혁파인 장로교제도의 근본원리를 보면, 첫째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권위를 행사하신다'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는 권세를 회원 전체에 주시되 직원들에게 특별한 분량을 주셨다'입니다. 넷째는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교회를 다스리시고 운영하시고 성장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수단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지배원리로 삼아야 하며 말씀을 절대 순종해야 하며 말씀 정신을 존중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권세를 특별히 직원들에게 주셨으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를 존중해야 하며 말씀 정신에 입각한 가르침은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이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그 교회 사자(목회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계2-3장, 계1:20). 주님이 교회를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에게 맡기신 것이고 그들을 대표자로 세운 것이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를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는 실제 행동입니다 (삼상15:22, 대하25:16). 우리는 교회를 주님이 친히 세우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을 순종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며 왕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19-23절)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①하나님과 만물을 화목되게 했습니다.
19절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여기에 나오는 '충만'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만큼 힘든 해석도 없을 것입니다 (Scott). '충만'에 해당하는 '플레로마'(πληρωμα)는 문자적으로 '가득찬 것'을 말하는데 의미상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들 곧 하나님의 속성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영원히 거하게 하셨습니다 (15절, 요14:9). 이는 하나님과 만물을 화목시킬 자격이 있는 진정한 중보자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20절). 구약시대의 속죄일(贖罪日)에 제사장이 짐승(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전가시키고 죄를 전가받은 짐승의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지성소 안 속죄소 위에 뿌렸습니다 (레16:29-34, 민29:7-11). 죄값은 죽음이기 때문에(롬6:23)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야 하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짐승이 대신 전가받아 그 죄 값으로 죽게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생명이 피에 있다고 보아(레17:11) 죽음은 피흘림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 피를 지성소 안의 언약궤(율법판이 들어 있는 법궤)를 덮은 뚜껑인 속죄소에 7번 뿌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법대로 죄값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보여 준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택한 백성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원죄로 말미암아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었으나 예수님의 대속의 효과로 의인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고 모든 만물이 죄의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드러내지 못하여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었으나 인간이 종말에 부활하므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만물도 회복이 되어 조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과 소원해진 관계가 회복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②성도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서게 했습니다.
21-22절에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20절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과 만물이 화목되게 된 것을 설명한 것이라면 여기에서는 택한 백성인 골로새교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법적으로도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었고 그 현상으로 실제 삶에서도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악한 행실로 살아갔습니다 (마7:15-19, 렘17:9, 잠16:32).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므로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대속을 믿는 골로새교인들이 의인으로 인정받아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법적으로 의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상관없고 죄의 결과와 상관없는 온전한 의인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법적으로 현재적인 선언이 있고 종말에 주의 재림 때에 실재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은 바로 골로새교인들과 같은 성도들에게 칭의(稱義)를 주어 주의 재림 때에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흠없이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1-6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습니다.
23절에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고 했습니다. 이는 골로새교인들의 이미 받은 복음에 대한 믿음과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교인들이 그 복음에 대한 믿음과 그렇게 될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살아갈 것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의 대속을 통해 칭의를 얻게 해 주고 주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흠없는 온전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을 의심하지 말고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23절에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만민에게 전파된 복음이고 바울도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받은 사도하는 것입니다. 곧 이미 전파된 복음이 그것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6. 바울의 사역 내용과 정신 (24-29절)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①사역에서의 고난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24절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 고난은 복음전도 사역을 하다가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곧 골로새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이방교회를 세우다가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전도 사역 곧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는 문자적으로 '불러냄'의 뜻으로서 세상에서 불러낸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는 바 곧 구속받은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 감옥에 투옥된 것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다가 투옥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그 결과 로마를 비롯하여 전 이방세계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에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24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으며 성도들은 자신의 고난의 행위로 그 남은 것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룬 대속은 완전한 속죄사건이었습니다 (요17:4, 19:30, 히7:27, 10:12). 단 한 번의 대속으로 영원한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로마서6:10-11에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10:10에는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고, 히브리서10:14에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한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비유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했습니다. 골로새서1: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27에도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공동체 혹은 연합체를 교회로 보고,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고,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으로 본 것입니다. 곧 복음 전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난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고난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 갇혀 고난받는 것이 복음 전도와 교회를 세우다가 받게 된 것이므로 혹은 그것이 복음 전도가 로마가 복음화 되고 전 이방 세계에 확장되어 교회들이 세워지는 계기가 될 것을 바라고 더 적극적으로 로마 감옥에 갇히는 것을 원했습니다. 사도행전19:21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고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자기에게 원하시는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23:11에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옥중에서 고난을 받는 것을 교회를 위한 고난으로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생각하고 슬퍼하거나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고 가장 큰 가치로 여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역을 하기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역에 대한 시각과 정신과 자세가 주께서 부르신 사역자라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사역을 자기 유익을 위해 하며 사역을 하다가 고난이 오면 포기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더 근본적으로 사역을 외부적 평안과 고난을 기준으로 평가하거나 외부적 평안과 고난을 사역에 대한 주님의 뜻을 찾는 우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역에서 목적과 가치와 정신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②사역은 복음 전도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25절에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골로새교회와 같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세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것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6-27절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 족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대체적으로 구체적인 내용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공개된 비밀이었습니다. 그 비밀은 골로새교인들과 같은 이방 성도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이방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통해 얻을 하나님 나라에 관한 풍성한 소망을 말합니다. 그 비밀이 이제 골로새교인들과 같은 모든 이방 성도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28절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곧 그들을 신앙적으로 장성한 자로 자라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성숙한 자로 서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고 했고, 베드로전서2:2에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중생과 성화와 영화의 의미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장하여 영광스럽게 되는 영화를 의미합니다.
③사역을 위해 힘을 다해 수고했습니다.
29절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받아 감당해야 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역을 위해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의지와 힘을 공급받으려 했습니다. 사역의 동기와 의지와 능력과 수고의 원천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감동시키는 바에 따라 힘을 다해 수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감동과 지시를 소멸하지 않고 힘을 다해 충성되게 순종한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맡긴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사역의 대상자인 성도들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정신입니다. 사도행전20:24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고, 빌립보서2:17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정신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結言>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교회의 상황에 대해 듣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자신도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주께 받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의 사역 정신은 언제나 자기의 생명과 고난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온전하게 하려 했습니다. 주께 영적인 직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 본받아야 할 모범 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