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첫 번째 표적

<聖經> 요한복음2:1-25

 

<序言>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존재와 성육신에 대해 언급한 내용에 이어 2장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함께 표적을 행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는 표적을 행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로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분이며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할 자임을 표적하는 행위였습니다. 2장은 가나 혼인자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야기와 성전에서 제물 상행위를 금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3-4장은 물론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적인 요소가 있지만 주 내용은 강해와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강해와 설교는 2장에 있는 두 이야기들의 의미를 해설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와 그에 대한 설교의 주된 공통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구원을 성취할 자로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 옛 것은 지나고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혼인잔치에서의 표적(1-12), 성전에서의 표적(13-25)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혼인잔치에서의 표적 (1-12)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이 사흘째 되는 날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가나에 있는 한 혼인잔치 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1-2). '사흘째 되던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던 날로부터 사흘 째 되는 날입니다 (1:43-51). '가나'(κανα)는 갈대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서 나사렛에서 약 13km 정도 떨어진 소읍 '키르벳 카나'라고 합니다 (Robinson, Meyer). 이 곳은 아람어 명칭인 '카나 엘 예릴'이 있는데 '갈대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 곳은 지형상 습지를 포함하고 있는 평원지대에 갈대가 많이 있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런데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고 예수님은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3-4).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전통적으로 보통 1주간에서 2주간에 걸쳐 흥청스럽게 먹고 마시며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가나와 같이 작은 마을에서는 마을 축제처럼 치러졌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에 살고 있던 예수님과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청함을 받은 것을 보면 축하객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 어느 시점에 준비한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당시 잔치에서 가장 필수적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흥을 깨져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가 경직될 뿐 아니라 포도주 부족은 주인이나 잔치를 주관하는 자들을 당황케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야는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1:26-38)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메시야로 증거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야적 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한 것은 어머니를 하대(下待)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나이(γυναι)는 귀네(γυνη)의 존칭 호격으로서 헬라(그리스)에서는 왕후를 부를 때나 자기 아내에 대해서 다정스럽게 부를 때 사용하는 최대의 존칭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호칭은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부를 때나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를 부를 때에도 사용한 용어입니다 (19:26, 20:15).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어머니에 대해 '여자여'라고 한 것은 한없는 사랑의 감정을 넣은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광이 있나이까?'라고 한 것은 원문상 직역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Τι εμοι και σοι γυναι -GTS; Woman, what have I to do with thee? -KJV). 하지만 의미상 전달에 있어서 다소 애매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의역하면 '당신이 내게 대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권위를 묻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what right do you have to tell me! -MLB).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표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자기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머니의 요청에 의한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라'(ωρα)는 일반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나타냅니다. 주로 이 표현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나타낼 때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구속을 완성할 때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지정하신 시기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적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정한 때에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5). '하인'(διακονος)은 노예를 가리키는 종(δουλος)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 일을 돕는 일꾼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그 잔치 일을 수종드는 일꾼들에게 무조건 예수님의 명령대로 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의 요청을 거부당한 마당에 불쾌감을 나타낼 수도 있으나 현명하게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예수님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그를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현장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물을 항아리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6-7). 당시 유대인 집에는 결례용으로 항아리를 출입문 안쪽에 비치해 두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결 의식과 랍비들의 율법 해석에 의해 집에 들어갈 때나 식사를 할 때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자들도 역시 손을 씻고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는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가 6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μετρητας)은 측정하다는 뜻을 가진 액체측정용 통들을 말합니다. 이 통은 약 39입니다. 그 통으로 두세 통 드는 항아리였으므로 한 항아리에 약 70-120의 용량이었고 그런 항아리가 6개였으므로 전체 합치면 420-720정도 되는 양이었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그 6개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 물로 만들어진 포도주를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고 하인들은 그 명령대로 연회장에게 떠다 주었습니다. 연회장은 그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는 낮은 것을 내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느냐고 칭찬했습니다 (8-10). '연회장'(αρχιτρικλινος)은 잔치를 시중드는 총책임자를 말합니다. 당시 잔치에서는 연회장을 두어 잔치를 진행하게 하였는데 그 연회장은 식탁 가에 앉아 손님들에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 임무 중 하나는 잔치에 제공되는 음식을 먼저 맛본 후에 나누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석상에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은 음식을 먼저 연회장에게 가져다주게 됩니다.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를 그에게 갖다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연회장은 하인들이 가져온 포도주를 맛보고 놀라 신랑에게 말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잔치에서 사람들의 미각이 살아 있는 처음 부분에는 질이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취하여 미각이 없어질 즈음에는 질이 나쁜 포도주를 내놓습니다. 당시 상황이 포도주가 동이 날 때였기 때문에 손님들은 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뒤에 가져온 포도주가 최상의 포도주였기 때문에 놀라 신랑을 극구 극찬한 것입니다. 사실 신랑은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당황했을 것이나 연회장의 극찬을 듣고 심히 기뻤을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한 이 표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표적을 통해 영광을 드러낸 것을 보고 제자들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11). 표적(表迹)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ον)은 이적, 기적, 표적 등을 말합니다. 영어성경 KJV에서는 기적(miracles)의 의미를 강조했고 NASB에서는 표적(signs)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서 기적에 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임을 나타내려는 계시를 나타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표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인 것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표적의 목적은 예수님의 본질, 곧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려는 데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구원을 보통 잔치로 많이 그렸는데 특히 혼인잔치의 그림이 흔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배경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잔치로 많이 비유했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교회의 성만찬을 통해 나타냈고 요한계시록19:1-9에는 종말의 구원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그리고 있습니다. 종말의 구원을 잔치로 비유한 것은 그것이 갖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잔치의 풍요, 만족, 기쁨, 평화, 사랑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의 실존은 항상 결핍, 제한, 가난, 무지입니다. 특히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없으므로 모든 고난을 겪습니다. 피조의 제한성에 갇혀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여하는 것, 신적 생명과 풍요에 참여하는 것이 절대적 필요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적 은혜에 참여하므로 만족과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참여하게 될 약속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장해 주는 의미로 믿는 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해 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이 잔치를 벌이고 그 절정으로 최후만찬을 하므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14:25). 본문의 사건은 그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질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예수님이 그 잔치에 참여하게 할 자임을 나타낸 사건입니다. 항아리의 물은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유대교는 원래 성전 제사 중심의 종교였는데 포로기 이후에 첫 성전이 부서지면서 점차 율법 연구와 율법 준수가 강조되어 율법 중심의 종교가 되어 갑니다. A.D.70년 이후 성전이 부서지면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고 제사장이 없어지면서 율법 중심의 랍비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결례(성전에서 하나님 백성이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위한 청결례)의 항아리는 잔치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생명의 흥이 다 깨어져 버려 더 이상 흥을 돋구지 못하므로 잔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들어 진정한 잔치가 이루어지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실현하고 참여하게 할 자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므로 생명과 영생의 기쁨에 참여하게 할 자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최후 만찬의 포도주와 관련하여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를 배설할 자임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예수님이 이미 생명을 줄 수 없어서 흥이 다 깨어져 버린 유대교를 능가한 자로서 유대교를 대치한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제 옛 것을 다 지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현재에 예수님이 베푸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보장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를 믿으면 죄 사함과 중생과 하나님의 아들됨과 성령의 내주와 진리를 깨달은 것 등으로 보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세계에 참여하면 질과 맛과 색과 용도와 가치가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연약함과 결핍됨과 제한성 등으로 고난 받는 인생에서도 기쁨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슬픔과 곤고와 갈증이 없이 평안과 안식과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경험입니다 (9, 2:7, 19:10, 14:5-9). 갈수록 질이 좋아지는 경험입니다 (10, 84:9, 3:17-18, 4:11-12). 우리도 이 생명의 역사를 맛보아야 합니다 (55:1, 4:14). 첫째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2). 예수님은 항상 잔치집으로 인도하십니다 (2:4, 23:1-2). 둘째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 예수님 어머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다 없어질 때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께 문제 해결을 강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5-8). 예수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명령을 내리든 순종하라고 했고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순종으로 문둥병이 나았고 베드로는 순종으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는 순종으로 눈을 떴습니다 (5:1-11, 9:1-7). 순종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2. 성전에서의 표적 (13-25)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이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이른바 성전청결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13).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21:12-17, 11:15-19, 19:45-48)에는 공생애 후기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예루살렘에 여러 번 올라가셨고 성전청결 사건도 공생애 초기와 말기에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며 상을 엎었습니다 (14-15). 여기에서 성전(ιερον)은 성소(ναοs)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뜰과 광장 등을 전체 포함한 말입니다. 성전 제물용 가축들과 성전세용 환전상들이 있었던 곳은 성전 내부 건물인 성소 안이 아니라 성소 밖 광장에 있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수많은 사람이 성전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곳에 제물용 가축들과 환전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물용 가축은 구약시대부터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중 결함이 없는 1년 생으로 드리게 했습니다. 헌데 이방이나 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제물을 끌고 오기 힘들기 때문에 성전에서 제물용으로 길러서 그들에게 제물용으로 팔았습니다. 20세 이상 된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은 성소에 반 세겔씩 속전(贖錢)을 바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로마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환전상들이 성전에 들어와 속전을 바치는 자에게 성전화폐인 세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이 교권과 율법적 의식을 이용해 탐욕을 가지고 막대한 수입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패한 모습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가축을 내쫓고 돈을 쏟고 상을 둘러 엎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16). 하나님의 성전이 부패한 상거래 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17). 시편 69편 특히 9절의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퍼포먼스를 행하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했습니다 (18). 이 유대인들은 당시 희생 제물을 드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일으킨 파격적인 소동은 즉시 산헤드린 당국자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관청은 바로 성전 광장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행한 것에 대한 표적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시대를 기다렸고 그 시대가 되면 그가 하나님의 이적을 나타내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관념의 반영으로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야(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위는 메시야적 행위에 해당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파격적인 행위를 하는 권위의 출처를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닌데 메시야적 행위를 한 것으로 생각하고 표적의 권위를 물으므로 예수님을 이단자중 하나로 치부하여 체포할 빌미를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19). 여기서 말한 성전은 광장을 포함한 전체의 성전(ιερον)이 아니라 성소의 건물만을 말하는 성전(ναος)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한 말씀이었습니다 (21).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3일만이 부활하실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이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20). 하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 의미를 몰라서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힐문했습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왕이 정치적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짓게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B.C.20-19년에 시작하여 A.D.62-64년 경에 완공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로부터 당시 사건의 상황 때까지를 계산하여 46년 동안 지었다고 한 것 같습니다. 성전을 재건할 때 동원된 인원은 약 18,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공사는 국가적인 공사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만에 세울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황당무계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제자들도 당시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를 알지 못했으니 (22) 그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네까짓게 무슨 수로 그런 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희롱조로 대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 내내 예루살렘에 계셨었습니다. 당시 유월절이 되며 유대인뿐 아니라 개종한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심지어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들까지도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근 여관을 잡지 못한 사람은 민박을 하거나 텐트를 치고 거주했습니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모여든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23).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표적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 믿긴 했으나 예수님의 본질을 깨달아 회개와 중생과 성장을 거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인 믿음인 것을 아시고 그들을 전적으로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24). 예수님은 전지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사람의 본질과 모든 성향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의 증언을 받으려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25).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고 파는 것을 금하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습니다. 첫째,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용 제물을 사고 파는 데 대해 예수님이 의문을 느껴 성전을 정결케 하고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었다는 피상적인 지식을 가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사건을 '성전청결사건'으로 불렀고 그러므로 인해 그 피상적인 지식에 고정되었습니다. 둘째, 이방인을 옹호한 사건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300×475m나 되는 큰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당시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그 곳에는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예수님이 유다 종교지도자들을 중심한 매매활동을 금지시키므로 이방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방해했던 유대교에 대한 응징을 대역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착취계급에 대항 대항이나 정의를 실현한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당시 사두개파 제사장들의 무리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많은 가난한 순례자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무력으로 도전하여 혁명적 정의를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정의를 위해 이러한 폭력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 상주인구가 50,000명이었으므로 유월절에는 4배로 불어난 것을 감안하면 약 200,000명의 사람들이 성전을 중심해서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려면 얼마나 많은 군사가 필요하겠습니까? 또 당시 서북편에 높은 망루인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는데 보통 500명에서 600명이 상주하면서 밑을 내려다 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혁명을 주도했겠습니까? 바울이 성전에 들어갔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려 실랑이를 벌일 때 안토니아 요새에서 지키고 있던 백부장이 즉각 군대를 이끌고 와서 바울을 체포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유월절이 되면 지도자가 일어나 반란을 일으킬까 봐서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던 로마 총독이 증원군을 이끌고 와서 감시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력으로 혁명을 꾀하려 했던 사건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이 사건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①타락한 유대교는 진정한 성전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보여 줍니다.

 

  당시 성전 제사의 권한은 대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오커스 4세 때(B.C.168년 쯤)부터 구약 때부터 내려온 정당한 사독 가문의 제사장을 페하고 다른 라이벌 가문에서 대제사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안나 가문 세가 같은 경우에는 로마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본전을 빼느라고 장사까지 하게 됩니다. 마치 돈으로 당선된 자는 그것을 빼느라고 부정을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사두개인들의 제사장들이 중심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어느 정도 불만이 있긴 했지만 자기들의 율법에 의한 해석대로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흠없는 제물을 드리라고 한 말씀들을 인용하여 어릴 때부터 구별하여 기른 제물들을 제사 드리는 순례자들에게 고가로 팔았습니다. 먼 길을 오는 자는 가축을 끌고 올 수 없고 오랫동안 흠없이 기르기도 힘드므로 이들에게 고가를 주고 샀습니다. 또 로마 동전인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를 유대 성전에서 쓰게 한 세겔로 바꾸어 주는데 웃돈을 받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마치 암달러 장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200,000만 정도의 유대인이 유월절 기간(14)에 이 제사를 드렸으니 얼마나 큰 소득을 올렸겠습니까? 중세 때 로마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만들어 파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성전과 율법을 이용하여 교권을 행사하고 의식과 탐욕의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본문의 성전 수치는 일부분이며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타락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쿰란 에셀파는 이것을 암흑에 속한 자들의 고행이라고 생각하고 빛의 자녀인 자기들을 통해 깨끗한 성전을 짓고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을 다시 일으켜서 레위기의 법대로 흠없는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를 했습니다. 이는 장시 성전이 제구실을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는 곳입니다. 제물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죄 용서함을 받고 그와 교제하며 그의 본질적 무한함에 참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유대 성전은 타락하여 그런 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②하나님께서 유대교의 성전을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연극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의 극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유대교 성전을 심판하실 것을 표적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를 공관복음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성전을 심판으로 부술 것이며 돌 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싹쓸이 한다는 것입니다 (13:2). 하나님께서 성전을 완전히 파괴할 것을 극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파괴될 것이다'는 것은 신적 수동형으로서 예수의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의 제사는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증한 짐승 제사는 필요치 않으므로 하나님이 불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이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종말적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려서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의 죄를 없이합니다. 그러므로 인해 더 이상 성전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율법적 제사와 성전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고 파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6년 동안 지은 헤롯 성전을 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 제물들과 성전이 예표하는 종말적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③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한 언약을 이루신다는 표적한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는데 호세아6:2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징적 의미로서 '3'72시간을 말함보다 '' '짧은 시간'의 의미로서, 배역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다시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1차적으로 자기 몸으로서의 부활을 말하나 2차적으로 그의 부활로 인해 그와 연합한 모든 성도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므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로서의 몸입니다 (고전11:16). 이 잔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언약의 피입니다. 그의 북음과 부활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며 그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됩니다. 나는 너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는 언약 성취로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고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로 분리된 성전 대신에 본질의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케 합니다. 죄인이 그에게 나아가 그와 재화하고 교제합니다. 그의 무한함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도 출애굽기 24장에 보고된 시내산 언약에 상응하는(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는) 새 언약의 성취입니다 (31:31~). 이것은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창조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 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성전입니다. 곧 예수님은 유대교와 성전이 모조품과 그림자로서 그 의미를 상실하였으나 그것들이 예표하는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죄인)이 완전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케 하므로 하나님의 참 백성(공동체)이 되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히 성전 청결로만 이해하면 안되고 '성전에서의 표적' '성전에서의 상징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結言>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한 일에 대해 그 자체가 표적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행하던 것이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행했던 것처럼 그런 이적을 보여 주어 제 2의 엑소더스를 달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없이 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내주하는 성전이므로 탐심을 없애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7:9, 8:1-18, 고전6:19-20, 고후6:14-16, 3:5,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