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중생에 대한 교훈

<聖經> 요한복음3:1-36

 

<序言>

  본 장은 2장에서 두 가지 이적 곧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과 성전에서 행한 표적에 대한 주석과 강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잔치의 흥이 깨어지고 성전 제사의 은혜가 없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유대교를 능가하고 대치할 분으로서 진정한 죄 용서와 구원을 줄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가장 대표가 될 만한 니고데모를 통해 드러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대표로서 아랫 세상의 대표였습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1-21),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22-36)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1-21)

 

   (1) 니고데모의 방문 (1-2)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1절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Nicodemus)의 신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주전 2세기 경에 유대의 율법학자들 중심으로 율법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열심이었습니다. 헤롯 시대에 6,000명 이상의 단원을 가지고 회당의 주체가 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은 정통주의라 생각하여 구원의 반열에 들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3:2-7, 15:5, 26:5, 22:3). 그런데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지도자 위치에 있었습니다. 10절에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관한 지식에 뛰어나 율법을 가르치는 자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1절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말합니다 (7:50). 산헤드린(Sanhedrin)은 공회는 의장 1(대제사장)과 의원 70(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공회는 당시 중요 사안에 대한 회의의 의결을 하는 곳으로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 문제를 다루고 율법에 의한 재판을 주관하고 성전에 대한 운영과 치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가지고 행사하는 막강한 공기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권위있는 관직입니다. 니고데모는 정치적으로도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부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9: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지낼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리트라쯤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리트라’(λιτρα)는 원어의 음역으로서 무게단위 파운드(pound)에 해당합니다. 12: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가 1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11리트라(λιτρα)입니다. 이어지는 12:4-5에 보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1리트라를 부을 때 가룟유다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고 왜 허비한 것이냐고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20:1-2에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했습니다. 일꾼이 포도원에 들어가 일한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1리트라는 300데나리온이고 300데나리온은 일꾼이 300일 동안 일해서 벌수 있는 금액인 것입니다. 1리트라는 1년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 장사 때 가져간 향품이 300리트라였으므로 그것은 300년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인 것입니다. 그 정도의 향품은 왕족의 장례식 때나 사용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들을 보면 니고데모는 물질()에 있어서도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최고의 위치에 있어서 당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오늘날 우리가 가장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으로서 가장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갈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밤중에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2절에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앞장에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서 포도주 만든 이적과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돈 바꾸는 상을 엎고 짐승들을 내어 쫓는 표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행동과 그에 대한 선언들을 접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영적인 진리들에 대해 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것은 지위와 신분에 대한 위신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리새인들의 정죄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9:2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 불렀습니다. 랍비(ραββι)는 유대인 사회에서 하나의 선생입니다. 예수님의 행하는 이적을 보고 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세나 엘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중 한 사람으로 안 것입니다.

 

   (2) 중생에 대한 가르침 (3-12)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①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남에 대해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을 중생(重生, Regeneration)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남은 다시 태어남’ ‘두 번째 태어남을 말합니다 (to be born again). 이는 죄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2:1, 벧전1:3). 이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근본적인 변화이며 새로 지음받은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고후5:17, 6:15, 4:24). 한편 '거듭나지'에 해당하는 겐네데 아노덴’(γεννηθη ανωθεν)에서 '거듭'에 해당하는 아노덴’(ανωθεν)'다시' '두 번째'의 뜻이 있지만 '위에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뜻이 있습니다. 거듭남은 부모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윤리나 정치나 지식이나 부요로 불가능하고 오직 하늘로부터 온 예수 그리스도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교의 틀, 이 세상의 것들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늘로서 온 자로서 또 하늘로 갈 자로서 하늘의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인데,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할 자라는 것입니다. 아랫 세상의 것들로는 그것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6, 4:12). '하나님 나라'(ο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the kingdom of God)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의 중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종말적 의미와 현재의 실존적 의미가 있습니다. 미래의 종말적 의미는 천국을 말하지만 현재의 실존적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실존적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이 미치는 전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 원리로 작용하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과 그 공동체와 그 활동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9: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했고, 누가복음17:21에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12:28에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고, 마태복음11:12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에서 '볼 수'에 해당하는 '보다'의 에이돈(ειδον)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브레포(βλεπω)와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하다'(participate) '인식하다'(perceive)의 의미로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고 물었습니다 (4). 거듭나므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입니다. 윗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아랫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모른 것입니다. 아랫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선생이었지만 결국 윗 세상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물리적 관점에서 밖에 해석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다시 태어나려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윗 세상의 진리를 말씀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아랫 세상의 물리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기 때문에 항상 오해가 발생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모든 종교와 문명에 대한 한계성의 제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노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인 구원과 영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②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어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하는 질문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4-5).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복음(말씀)을 들으므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0:17, 5:26, 8:11). 하지만 중생의 요소를 말할 때 말씀과 성령이라 할지라도 여기에서 은 이어서 언급되는 성령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 이어서 언급한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강조하고자 할 때 한 가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들을 중복으로 사용하거나 나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重言法, hendiadys). 내용 전체를 볼 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성령에 대한 상징어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만일 이 을 중생의 요소로 말씀을 말하는 것이라면 말씀은 상징어로 사용하고 성령은 직접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부자연스럽습니다. 또한 내용 전제 흐름을 볼 때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진대 은 성령에 대한 상징어로 성령을 같이 사용한 것은 성령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구약의 성전 제사에서 제사장들이 물로 씻는 것은 신약의 세례의 물로 나타납니다. 물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죄 씻음 받음에 대한 확증의 표로 주어졌습니다. 결국 구약의 물로 씻음이나 피 뿌림 그리고 신약에서의 세례는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것에 대한 표징입니다. 세례 때의 물은 성령 임재에 대한 상징입니다. 마가복음1: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했습니다 (3:11,1:33, 1:5). 세례는 그 성령 강림을 객관화하고 공식화하고 물질화하는 표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의 은 물이 표상하는 실재인 성령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거듭나게 하는 주체는 성령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온전히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사람의 노력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신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을 믿을 때에 가능합니다 (16:31, 1:12, 3:16, 5:24, 3:20,24,28, 10:9-10, 2:16, 2:8).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복음(말씀)이 전해질 때 성령께서 믿어지도록 역사하여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16:16-17, 3:5). 고린도전서12:3“~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로마서8: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고 했습니다 (4:6-7). 그러므로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역사가 아니면 거듭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나야 하겠다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6-7). ''(σαρξ, flesh-NIV)''(πνευμα, spirit-NIV)은 자연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의 출생은 성령님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식별이 불가능하므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의 비유를 만들어 다시 설명했습니다.

 

   ③거듭남에 대한 성령의 역사는 주권적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8). 성령의 헬라어 프뉴마(πνευμα)는 히브리어 루아흐(רוח)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기식' '바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람과 성령의 공통점을 들어 비유를 이끌어 냈습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가시적으로 볼 때 그 출처와 원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분별이 안 됩니다. 단지 그 결과인 사물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합니다. 구원에 대해 사람의 노력과 관계없이 택자에게 역사합니다. 그 역사로 거듭나는 것은 결과로서만 알 수 있습니다. 주를 고백함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거나 말씀을 깨닫거나 죄를 회개하는 것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8:15, 고전12:3, 16;13, 5:17). 또한 속사람의 변화나 생활의 변화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죄를 회개하고 악한 습성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인격적 열매를 맺습니다 (5:22-23). 그러므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선택된 것은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9). 그런 반응을 보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10). 그리고 11-12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 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당시 종교적인 최고 지식인이었지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지만 실재를 설명하면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데 하늘의 일을 깨달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례로 든 바람부는 현상으로 설명을 해도 이해 못하는데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하면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으로 설명을 해도 알지 못한다면 영적 실재를 설명해도 알지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땅에 능히 일어나는 표적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하늘의 일'13절이하의 내용입니다.

 

   (3) 예수님의 실재에 대한 가르침 (13-21)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①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온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13). 이를 도식화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 인자(人子) = 하늘로 올라간 자'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힘으로 새로 남을 통해 얻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공합니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로고스(λογος)로 존재한 자로서 하늘에서 온 자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갈 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피조 세계의 다리가 되는 자입니다. 물질의 세계를 하늘의 세계에 참여하게 하는 자입니다. 피조물을 창조주에게 참여하게 하는 자입니다. 죄인을 거룩한 분에게 참여하게 하는 자입니다. 결핍성과 불완전성을 가진 인간이 무한성과 완전성을 가진 하나님의 속성과 축복에 참여하게 하는 자입니다. 곧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는 자입니다. 그런 분으로서 자신을 인자라고 한 것입니다. 인자’(人子)는 구약에서 오시리라 약속한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인 '그 사람의 아들'(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the Son of Man)입니다 (28:10-14, 삼하7:12-14, 1:26-28, 7:13-14). 인자에 대한 해석은 1:51절에서 자세히 강해했습니다. 그 인자의 역할은 다음 절에 설명됩니다.

 

   ②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영생을 줄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14-15). 이는 인자로서의 역할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일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이 예표하는 것처럼 (21:8), 자신도 들어 올림을 당하므로 생명을 줄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놋 뱀을 쳐들었을 때 그것을 보는 자마다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자가 살게 되었습니다. 놋 뱀에 살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 뜻대로 쾌락을 좇아 이방 여인들과 관계함으로 행복을 누리려 했으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서 살 수 있는 방편으로 제시한 구리 뱀을 봄으로서 이제 하나님만 좇고 하나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확증이 되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예표하는, 인간이 범죄로 오는 죽음에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은 사람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며 인간이 그에 순종함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14). ‘인자’(人子)도 들려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들려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휩소'(υψοω)는 아람어 '제캅'으로서 '들어 올리다' '교수대에 처형되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지표에서 들어 올려질 것을 말합니다 (8:28, 12:23). 이차적으로는 십자가 구속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을 가리킵니다 (2:33, 5:31, 2:9). 그의 높임받음, 영광받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됨이 드러나 높임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구속은 대속의 제사로서 죄인이 죄 사함을 받는 새 언약의 제사입니다 (12:32).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 우편에 올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됨, 하나님의 상속자 됨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42~53장을 행하므로 다니엘7:9-14을 성취하는 '그 사람의 아들'(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광야의 놋 뱀처럼 종말에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방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15). 영생(永生)은 문자적으로 보면 영원히 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적 개념으로 영원히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본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현재의 실존적인 의미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결핍됨과 불완전한 물질세계에 속하여 자기들 뜻대로 사므로 고통과 불안과 갈등과 죽음과 공포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무한하심과 완전하심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적인 표현인 생명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구속을 이루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그러한 영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놋 뱀을 쳐들었을 때 그 구원의 방도를 보는 자는 죽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는 그 대속과 새 언약의 덕을 보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상속자)들이 되는 부요함과 무한함과 영원함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언어로는 영광과 권세와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요한의 표현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원함과 무한함을 얻으면 신적인 삶을 얻게 됩니다. 인간에게 오는 모든 고난의 삶은 죽음의 증상들로 오는 불안과 갈등과 슬픔과 질고 등인데,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모든 결핍성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신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지혜를 얻으니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 해 하지 않게 되고, 무한한 사랑을 얻으니 부부와 이웃과 갈등할 것이 없어지게 되고, 무한한 능력을 얻으니 무엇을 할 줄 몰라서 낙심하지 않게 되고,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되니 환경에 제약을 받아 고통스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용어로 '영생'인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 받은 독생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고 했습니다 (16).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세상'(κοσμος)은 첫째, 우주 곧 자연계를 가리킬 때가 있고, 둘째, 인간 역사 곧 인간의 문명과 문화를 가리킬 때가 있고, 셋째, 죄의 영역 곧 악령에게 이용된 모든 죄적 영역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인간들을 가리켜 한 말일 것입니다. 물론 우주도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분입니다. 예수님은 보냄 받은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영생을 위해 보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10:40, 9:48, 4:34, 5:23,24,30,37,38, 6:39,44, 7:16,18,28,33, 8:16,18,26,29 ). 이 보냄의 양식이 나올 때마다 강조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갈라디아서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예수님을 아들 곧 독생자로 보낸 것입니다 (16). 본절에 나온 '독생자'(獨生子, τον υιον αυτου τον μονογενε)는 문자적으로 '그의 유일한 아들'(his only begtton Son -KJV, NASB)을 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므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으로 계셨던 존재 면에 있어서도 그렇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계시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독생자는 파생된 의미들을 보면 3가지를 더 들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관념에서 보면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은 자이고, 아버지의 유산을 받는 자이고, 아버지의 일을 잇는 자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과 성품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14:9, 1:15).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재창조, 구원 사역을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던 일을 이어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실행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예수님 자신도 일을 한다고 한 것이고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으로 양식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5:17, 4:34).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능력과 부요함과 풍성하신 은혜를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재산 상속자로서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신적 부요와 풍요를 가진 자로서 그것들을 계시하고 주는 자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주는 권세를 가졌다고 했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준다고 했습니다 (17:2, 14:27, 11:27, 28:18, 25:31-34). 자신을 빛, , 떡의 상징성으로 표적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대속과 언약의 제물로 내어 준 분임을 터득하는 자 곧 믿는 자가 그 신적 부요함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의 노력처럼 율법이나 부귀나 명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은 히틀러가 오면 구원을 얻을 줄 알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소련은 공산주의 사상과 제도가, 미국은 자유무역과 자본주의 문화가, 일본은 과학 기술이 구원을 줄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돈, 지식, 명예, 취미, 종교 등이 그것을 줄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능히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마련해 준 구원의 방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그를 믿어 거듭남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게 되고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으므로 인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17-18). 세상에 빛이 왔는데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와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자기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9-21).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마련한 유일한 구원의 방도를 선포할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고 위를 보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고 아래를 봅니다. 인간의 가능성에서 구원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항상 구원이 선포될 때마다 위를 보는 자와 아래를 보는 자로 갈림이 벌어집니다. 구원을 받을 자와 심판을 받을 자로 갈라집니다. 심판을 받을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준 방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염라대왕이나 독재자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선포는 공갈 협박이 아닙니다. '코오란이냐 칼이냐'가 아닙니다. 사랑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한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고 구원의 방편을 선포했으나 반응에 따라 필연적으로 심판이 발생한 것입니다. 빛으로 온 계시와 구원을 거부하고 암흑을 택하니까 필연적으로 심판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의 계시는 필연적으로 빛으로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여 영생을 얻게 합니다. 하지만 빛을 정죄하고 암흑을 선택한 자에게는 그 계시의 빛은 심판을 확정하는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대항하고 심지어 그의 아들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거부하고 등을 돌리는 자에게는 그 죄를 정죄하는 확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암흑을 정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의 예정론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빛에 속한 자로서 빛에 합당한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2.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 (22-36)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각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洗禮)의 원어 밥티조(βαπτιζω)'잠그다' '씻기다' '뿌리다' '정결케 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11:38, 13:16). 세례는 정화((淨化)의 의식입니다. 구약시대에 정결케 하는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피나 물을 뿌려서 정결케 했습니다 (29:16, 14:5-7, 36:25). 그것은 신약의 세례의 의미로 발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준 물세례는 죄를 회개자에게 죄 씻음에 대한 확증으로 주었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불세례(성령세례)를 예표하였습니다. 성령세례는 성령으로 죄를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령이 내주하므로 죄 사함과 칭의와 중생과 양자됨을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자에게 베풉니다 (28:19-20). 오늘날 베푸는 세례는 죄 사함을 받은 표호로 주는 의미가 있고 동시에 교회의 일원이 된 표로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례의 양식에 대해 침수세례(浸水洗禮)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수세례(滴水洗禮)가 보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어 밥티조(βαπτιζω)가 잠근다는 의미만 아니라 씻거나 바르거나 뿌린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 구약에서 정결케 하는 의식이 씻거나 바르거나 뿌리는 의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물세례의 중요성이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난 자에게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상징에 있다는 점 등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장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장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 간수와 그 식구들에게 세례를 준 장면 등을 보면 침수라고 보기 힘듭니다 (3:16, 8:38, 16:33).

 

   ①하늘로부터 오신 자라고 했습니다 (25-27).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 간에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 누가 더 위대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보고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던 세례를 예수님이 주니 다 그에게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그에 대해 하늘로부터 오셔서 하늘에서 주신 은사로 베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나보다 능력이 많은 자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라'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자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3:11-12, 1:29).

 

   ②그는 흥하고 자기는 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8-30).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신랑의 들러리인 친구로서 기쁨이 충만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1:29에는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그는 흥하고 자기는 쇠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만 잘된다면 자기는 손해를 봐도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명이 그를 증거하는 것이고 그를 잘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정신이었습니다. 빌립보서1:20-21"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20:22-24에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③위의 것을 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31-34).

 

  예수님은 성령으로 하나님 말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위의 것을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자신은 땅에 속한 자로서 땅의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④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만물을 심판할 자라고 했습니다 (35-36).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세를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함을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그 자체가 심판이 되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結言>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율법적으로, 지식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였습니다.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중생의 도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늘로 온 자로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세례 요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임을 증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