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目> 그리스도에 대한 핍박 대두
<聖經> 요한복음5:1-47
<序言>
2장에서 혼인잔치 표적과 성전에서의 표적이 있었습니다. 3-4장에서 그 표적들을 길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한 고관의 아들의 병을 고쳐 주었고(4:46-54), 5장에 들어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오해가 발생하고 예수님이 거기에 대한 긴 강해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행한 표적들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강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면 유대인들이 오해를 하고 예수님이 표적에 대한 강해를 하는 형식은 요한복음2장에서 12장까지 계속되는 전형적인 구조입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표적 (1-9절),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시비(10-18절), 예수님의 자기 소개(19-30절),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31-4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표적 (1-9절)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이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1절).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인데 어느 명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민간의 여러 지역에서 새해에 천사가 어떤 지역의 물을 움직이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간 자는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된다는 전설이 돌았습니다 (Harris). 아마도 유대인들은 그 전설을 근거로 천사가 베데스다 연못에 물을 움직일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새해에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절기 중 유월절(逾越節)은 종교력으로 정월(1월) 14일이고 15-21일까지 일주일간 무교절로 지킵니다(無餃節).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본문의 ‘유대인의 명절’은 유월절(무교절)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같은 절기가 돌아오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자기계시를 위한 사역을 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로 여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주목적은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사역을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자주 회당을 찾으시곤 했는데 그것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습관적으로 회당에 모여 율법을 공부하는 것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12:9, 막1:21, 눅4:16). 사도 바울도 안식일이 되면 회당을 찾았는데 그 이유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행13:14, 14:1, 17:10, 18:19).
예수님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예루살렘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2절). '양문'(羊門)은 예루살렘 서북쪽 모퉁이에 있었던 성문인데 근처에 양을 매매하는 가축시장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 제물용 가축이 그 문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그 중에 양이 보편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이 문은 오늘날 성스데반의 문으로 불립니다. ‘베데스다’(Βηθεσδα)는 히브리어로 ‘벧 헤스다’(בת חסדא)로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입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은 크기가 폭 50~67m 길이 96m입니다. 그 연못은 간헐천(間歇泉)으로서 바닥에서 물이 솟아나므로 연못물이 움직이는 연못이었습니다. 그 연못에는 행각 5개가 있었습니다. 그 ‘행각’(行閣)은 햇볕이나 비를 가리기 위해 임시처소로 만든 간이건물인데 연못의 네 모퉁이에 하나씩 있었고 연못 중앙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행각에는 맹인이나 다리 저는 사람이나 혈기 마른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3절). 그들이 그 행각에 누워 있는 것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 당시 유대인들은 연못의 물이 솟아 수면이 움직이는 것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때 연못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Reynolds). 당시 팔레스타인 동쪽 지역 전체에 걸친 여러 지역에서 새해에 천사가 어떤 지역의 물을 움직이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간 자는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된다는 전설이 돌았습니다 (Harris). 유대인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특성을 근거로 그 일이 절기(명절) 때에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연못이 간헐천으로서 그 물이 피부병 같은 질환에는 유익이 있었을 것이지만 실제로 어떤 병이든지 낫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시 중환자들은 그 소문에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행각에 눌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38년 된 한 병자도 있었습니다 (5절). 38년 된 병자도 한 행각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습니다 (8-9절). ‘자리’(κραββατος)는 짚이나 풀로 만든 돗자리로서 병자가 행각에서 누워있기 좋은 도구였을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38년 동안이나 고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다른 사람들보다 연못에 먼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 (7절) 불치병으로 거동이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도 고칠 소망이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베데스다 연못에 소망을 두고 베데스다 행각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평생 동안 그 병을 고쳐 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모든 재산을 다 사용해서라도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낫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베데스다 연못에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천사가 1년에 1번 새해 명절에 기간에 베데스다 연못의 물을 움직일 것인데 그 때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에 마지막 희망을 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데스다 연못 행각에 있으면서도 물에 제일 먼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가 낫기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7절에 보면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고 했습니다. 병을 낫기를 원하지만 병이 나으려면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못 낫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물에 뛰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넣어주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발로’(βαλλω)는 ‘던지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이 빨리 물에 던져 넣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속히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연못의 이름은 ‘베데스다’ 곧 ‘자비의 집’이었지만 여전히 생존경쟁과 이기주의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름에 맞는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이 38년 된 병자 같은 중환자가 들어가도록 배려했어야 하는데 자기만 낫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물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곳은 양보도 배려도 긍휼도 사랑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 아픈 사람은 제재하고 중병에 걸린 사람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도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평생 중병으로 고통의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절망과 좌절과 포기를 하도록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38년 된 병자는 온갖 곳에서 온갖 방법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보여다가 안 되어서 마지막으로 찾은 종교적 장소에서도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종교적 공동체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상처만 받아 분노로 가득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사회의 배경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 면에서 베데스다 연못은 당시 유대교의 부정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교가 표방하는 바는 유대교에서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생명과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에는 그 어떤 죄 사함으로 인한 기쁨과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행복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교 지도자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보여주듯이 강도만난 자를 구해주기는커녕 도망해버렸던 것처럼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한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제사제도를 이용해 짐승을 팔고 돈을 바꾸어주므로 막대한 돈을 갈취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이용해 자기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한편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의 행각에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를 보자 벌써 병이 오래된 것을 아시고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했습니다. 나을 소망을 전혀 상실해버린 38년 된 병자에게 나을 수 있다는 열망을 갖게 하고자 하는 물음입니다. 단순히 낫기를 원하는 열망을 갖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에게 소망을 갖게 하려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마9:28, 20:33). 하지만 38년 된 병자는 설마 예수님이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야 나을 수 있다는 생각에만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자리를 들고 걸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미 그의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선언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곧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9절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즉시 나아서 자리까지 들고 걸어간 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얼마나 즉각적이고 완전했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치유사역을 한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낼 표적의 대상을 선정하고 그 대상이 믿음의 행위를 보일 때 치유를 해 줍니다. 아니면 거꾸로 어떤 대상이 믿음의 행위를 보일 때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낼 표적의 대상으로 여기고 치유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를 치유한 사건에는 그런 공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보고 그가 믿음의 행위를 보이지도 않았는데 치유해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예수님이 표적을 행할 때 종종 대상의 믿음이 수반되지 않고도 표적을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L.Morris). 하지만 38년 된 병자가 믿음의 행위를 보였으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나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주저했을 것인데 그가 주저하지 않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명령하기 직전에 믿음의 행위를 보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38년 된 병자가 믿음의 행위를 보이지 않았든 보였든 결과적으로 요한은 그의 믿음의 행위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다면 요한은 치유의 표적이 38년 된 병자의 믿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모든 표적을 예수님이 자기계시(self-revelation)를 위해 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한 목적은, 당시 유대교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준다는 표방을 하고 있지만 유대교는 구원을 주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평생 동안 삶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작은 병이 아니라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쉽게 이동할 수도 없는 중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둘째, 심리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에게 실제로 가족과 친구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셋째, 영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사회에서도 전혀 위로를 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상처와 분노와 좌절 가운데 있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비의 집’을 찾았지만 거기에서도 상처를 받고 오히려 좌절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진정한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진 제한성과 결핍성과 연약성으로 인해 가난과 사고와 질병 등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버는 데 몰두하기도 하고 지식을 얻는데 몰두하기도 하고 명예를 얻는데 몰두하기도 하고 자아성취에 몰두하기도 하고 사상에 몰두하기도 하고 관계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행각에 누워있는 각종 병자들은 그런 우리의 실존적 상활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궁극적인 문제인 죄와 내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므로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종교 공동체에서 상처만 받고 분노와 절망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직 구원과 영생의 확신을 주어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얻게 해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인생의 본질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것들을 주는 구원자임을 계시하기 위해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때때로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부분적인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찾아오시고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4:16-18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기 바랍니다.
2.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시비 (10-18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는 거의 죽음에 이른 인간을 말합니다. 그가 베데스다 연못에 앉아 있었습니다. 연못에 들어가면 생명을 1년에 1번씩 준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유대교 성전에 1년에 1번씩 들어가는 대속죄일에 죄 용서를 받아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베데스다 물은 1년에 1번 끓어오르는데 그 때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그것은 분명 구원을 약속하는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그 옆에 있어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위에서부터 온 예수님이 그에게 생명을 준 것입니다. 성전중심의 유대교는 구원을 약속한 것은 종말에 하나님이 줄 구원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로서 구원을 주지 못했고 예수님이 그것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유대교가 약속을 했으나 실제로는 줄 수 없었던 것을 위로부터 온 예수님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실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왜 안식일에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을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17절). 유대 랍비들 중에서도 안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고 했는데 정말 하나님이 쉬는지, 쉰다면 하나님의 섭리도 중단되는 것인지, 그러면 왜 안식일에 사람이 죽기도 하고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는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은 안식일에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랍비들의 일부 이해를 거치면서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이해로 답을 합니다. 새로운 이해라기보다는 본래의 이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안식일에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큰 오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기 때문에 자기도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했다는 점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 했습니다 (18절). 예수님은 당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비유로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직업 혹은 가업을 전수시켰습니다. 아버지는 그 가업의 비밀과 비결을 노출시키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만 보여 줍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함으로서 배웁니다. 그 아들은 또 가문의 비밀을 지키다가 자기 아들에게 똑같이 전수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그림을 비유 삼아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지금'은 당시 안식일까지의 뜻도 있고 종말이 완성되기 전까지의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위임받은 자이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하는 자로서 하나님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는 일을 집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을 주는 일을 안식일에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쳤습니다. 거기에는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완전한 창조를 하고 심히 좋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완전한 창조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안식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의 원래 의미는 완성된 완전한 창조에 대한 즐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는 더 이상 풍요로움에 참여하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살게 됩니다. 피땀을 흘려 일해도 먹고 살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무한함과 부요함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한성 속에서 각종 고난을 당합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불안합니다. 영원에 참여하지 못하니 시간의 변화 속에서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게 됩니다. 모든 결핍 속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 후손들은 서로 자기 자원들을 많이 찾으려고 생존전쟁을 벌여 모든 갈등과 고난을 더 가중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의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안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의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의 구원의 완성 때, 사탄의 통치를 꺾을 때, 사탄이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반란하지 못하고 사람을 충동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때, 하나님은 다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의 구원이 완성될 때 안식하는 것입니다. 재창조가 완성될 때 첫 창조에서 안식했듯이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것에 대한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안식일을 실현하러 오신 것입니다. 부패와 죄악, 죽음과 고난이 완전히 제거된 안식을 실현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것을 표적하기 위해 안식일에 병을 고쳐 생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 살리는 일을 위임받아 죄악과 죽음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생을 실현시키는 자임을 표적한 것입니다. 구원의 재창조를 담당한 자로서 종말의 생명과 구원을 가져오는 자임을 표적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은 재창조의 완전함을 실현한다는 것을 표적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는 첫 창조의 안식을 기념하고 종말에 있을 재창조의 구원 안식을 소망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첫 창조의 안식을 기념하고 종말의 구원과 안식을 바라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통치 하에서 타락의 질서 속에서 땀 흘려 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6일 동안은 그 질서 속에서 일을 하고 살지만, 하루는 그 일을 멈추고 자기 힘으로 행복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생명과 행복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과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6일 동안은 타락한 질서 속에서 할 수 없이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주심에 의해 살 수 밖에 없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북돋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자기 소개 (19-30절)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표적하기 위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이 표적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정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표상하는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그와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안식을 주기 위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므로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 살리는 일을 하여 진정한 안식을 주는 자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여 하나님을 참람되게 했다고 해서 죽이려 했습니다 (17-18절).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한 분입니다 (18절下, 23절下, 미5:2, 빌2:6, 요8:58, 1:1,14). 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그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기본적으로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은 자이고,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은 자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입니다 (14:9, 골1:15).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17,19절). 넷째, 하나님의 자원을 가진 자입니다 (20,26절).
①생명 살리는 일을 하러 온 자입니다.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했습니다. 24절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생명을 줍니다. 죽은 영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자원에 참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풍성하시고 완전하신 은혜에 참여하게 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28-29절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육체를 부활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겔37:1-6, 살전4:16-17). 그 때에는 영생복락을 누릴 자도 있고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습니다 (단12:2). 예수님은 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9절).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죽은 직후에 살렸고 (눅6:11-17),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상여 메고 나올 때 살렸고(마9:18-26),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은 지 사흘 되었을 때 무덤에서 살렸습니다 (눅7:22, 마11:5).
②심판하는 일을 하러 온 자입니다.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일을 예수님께 맡긴 것입니다. 27절에는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왔습니다. 엄격히 말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가 온 것은 심판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부인하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정죄가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주러 왔으나 그와 그의 하는 일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 행위가 스스로 자신들이 생명을 얻지 못할 자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죄악과 암흑의 자식들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갈라짐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들을 영접하고 그에게 나아오는 자, 그리고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고 그로부터 분리되는 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생명을 시행하고 38년된 병자를 고침으로서 생명을 준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계시로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정죄하여 배척합니다. 그 갈라짐이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의 '심판'(κρισις)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의미가 '가름'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정죄'입니다. 스스로 생명의 주이신 아들을 떠남으로 암흑으로 가는 것입니다. 13장에 보면 가룟유다는 스스로 예수님을 떠나 흑암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그를 심판한 것이 아니고 가룟유다 스스로가 심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러 왔으나 심판이 어쩔 수 없이 동반된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는 종말에 부활시켜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께 나오는 자는 이미 영생의 약속을 받은 자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시킬 것인데 그 때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28-29절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현재에 예수님의 계시에 대한 갈라짐이 일어나고 종말에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오실 때 그 갈라짐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에 대한 증거들 (31-47절)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면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로만 자기가 하나님이 보낸 자, 하나님의 아들, 구주, 진리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①세례요한이 증거했습니다.
33절에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전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었을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1:19-27). 첫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요1:29). 예수님이 구속주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둘째,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라고 증거했습니다 (마3:11, 요1:32, 막16:17-18). 세례요한 자신은 물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의 신 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셋째, 손에 키를 가지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할 자라고 했습니다 (마3:12). 예수님이 심판주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②예수님이 행한 역사가 증거합니다.
36절에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가 그리스도인 것, 하나님이 보낸 자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막1:24), 귀신을 쫓아내고 (막1:27), 병자를 고치고 (요5:5-8),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고 (요6:1-15). 바다의 파도를 잔잔케 하신 사건 (마8:23-27) 등이 그가 누구인지 또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 증거를 해주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이 친히 증거합니다.
37절에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1:32, 마3:16-17). 변화산에서도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마17:1-5).
④성경말씀이 증거합니다.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눅24:25-27, 사7:14, 9:1-7). 유대인들은 의식과 제도와 문자에 얽매여 구원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의식과 제도와 예언의 말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⑤모세가 증거했습니다.
46절에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제 2의 모세가 나와 제 2의 출애굽을 시켜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신18:15-18, 민21:8-9). 모세의 표적들은 오실 그리스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표호들이었습니다 (요3:14-15).
증거의 목적은 첫째,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34절에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말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증거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행16:32). 둘째,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3:16, 20:31, 27). 셋째, 빛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35절에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고 했습니다 (요8:32-33).
증거의 결과는 43절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부르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습니다 (마11:28-29, 사1:18). 첫째, 말씀에 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8-39절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나 (행17:11), 유대인들은 의식주의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말씀을 순수하게 보지 못하므로 예수님을 알지 못 했습니다 (고후3:14-16).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42절에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22:37-40).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엡6:24, 요21:15-17).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4절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벧전1:24, 롬8:17). 그들은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율법이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45-47절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結言>
당시 유대교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유대교를 대치할 자로서 진정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표적하기 위해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안식을 준다는 것을 표적하기 위해 안식일에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그 표적성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문자와 의식에 얽매여 그것들이 예표하는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무지함이 오히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핍박한 원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