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골로새서2:1-23

<題目>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序言>

  전 장에서 바울은 이단 사상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의 탁월성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골로새 교회 내에 있는 이단 사상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박하며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내용구조는 바울의 목회적 관심(1-7절),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 (8-15절), 율법주의자들로부터의 자유(16-2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바울의 목회적 관심 (1-7절)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① 교회를 위해 힘쓴다고 했습니다.

 

  1절에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골로새 교인들을,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은 히에라볼리 교인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부지역)에 에베소(Ephesus)가 있었습니다. 해안 도시 에베소에서 서쪽 내륙으로 약 160km 떨어진 리쿠스 계곡(Lycus Valley) 남안에 작은 도시 골로새(Colossae)가 있었습니다. 골로새 서북쪽 16km지점에는 라오디게아(Laodicea)가 있었고, 라오디게아에서 북쪽으로 10km지점에는 히에라볼리(Hierapolis, Pamukkale)가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 그 도시들은 작은 도시들이었습니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는 바울이 복음전도 사역을 직접 한 곳이 아닙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쳤는데 (행19:1-10), 그 기간에 골로새 출신인 빌레몬(Philemon)과 에바브라(Epaphras)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 공동체가 생기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위해 얼마나 힘쓰는지 알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만이 아니라 바울에게 복음을 받은 자들이 세운 공동체를 위해서도 힘을 쓰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한 자라 해도 그들을 위해 영적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곤난을 겪고 있을 교회 공동체를 위해 중보기도를 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2절에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목회적 노고가 골로새와 주변에 있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밝힌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첫째, 그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거짓 교훈들과 투정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로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그들에게 위안이 되길 바란 것입니다. 그 위안은 슬픈 일을 당한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르지 못한 가르침에 흔들리는 마음을 강하게 잡아 주는 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아므로 힘을 얻어 거짓 교훈에 잘 대적할 수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둘째,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어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여 대적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내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사역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성해지기는 은혜를 누리기를 원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목적과 계획과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신비가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전적으로 지식을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능력으로 볼 때 지혜는 그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 '지혜'는 그것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실현되는지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② 거짓 교훈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4절에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말한 것은 골로새와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아무도 교묘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간교한 논리와 웅변에 현혹되지 않기를 원한 것입니다. 5절에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육신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거짓 교훈으로 공격받는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하고 질서있게 행함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소수가 거짓 교훈의 미혹에 흔들리는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고 질서 있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행했다는 것은 서로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않고 지도자 에바브라의 지도 하에 사도 바울에게 목회와 신학적 도움을 받으려 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습니다.

 

   ③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6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빌레몬과 에바브라로부터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뿌리를 깊게 박아야 흔들리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듯이 그들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확고히 하여 흔들리지 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 세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건물이 지상의 견고한 터 위에서 세워짐 같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가르쳐 준 복음 진리대로 굳게 서서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에바브라 같은 사역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고 그들에게 바른 복음 진리를 배운 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곧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가르쳐 준 진리를 받아 들여 건강하게 성장하게 된 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한다는 것은 그 바른 진리에 굳게 서서 거짓 교훈을 물리치므로 더욱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에 굳게 서고 그에 대한 바른 진리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그릇된 교훈 곧 신비주의와 자유주의와 기복주의와 인본주의의 미혹을 물리치고 공동체에 감사함이 더욱 넘치게 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 (8-15절)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①철학에 사로잡히지 말하고 주의시켰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잘못된 철학의 속임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를 시켰습니다.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철학'(哲學)은 학문분야에서 세계와 인생에 대한 원리와 목적을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지만 어원적으로 보면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이론이나 혹은 그것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φιλοσοφια= φιλο+σοφια= the love of wisdom). 그래서 현대에도 모든 학문분야의 최고 학위를 Ph.D(a Doctor of philosophy)로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시에 헬라 세계의 사상의 주류는 주로 플라톤(Platon) 철학이었습니다 (행17:18). 그런데 지금 바울이 말한 철학은 이교도들의 철학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유대교 이단들의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대교의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나 엣세네파나 젤롯파 등의 사상과 교훈에 대해서도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Josephus). 유대교의 엣세네파 중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二元論)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靈主義,Gnosticism)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 지식을 터득하므로 구원에 이른다는 자들입니다. 또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론에서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가현설(假現說,docetism)은 예수님은 진짜 육체를 가진 자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환영(幻影)으로 육체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죄의 몸에 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말씀에 위배된 사상이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당시 골로새 교인들에게 있어서 분별하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옳지 못한 주장임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증명할만한 진리 지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도자 에바브라를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보낸 것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철학을 헛된 속임수라고 했습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δια τηs φιλοσοφιαs και κενηs απατηs -영어성경과 한글성경에서는 τηs가 직역되지 않았음)의 문장 구조를 보면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 말로서 철학이 곧 헛된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헛된 속임수는 아무 것도 아닌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론에 대해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유전을 따른 것으로서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한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을 따른 것이란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을 따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가르친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세상학문에 불과하며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학문'은 진리와 관계없는 이론이라는 의미입니다. '초등학문'에 해당하는 '스토이케이온'(στοιχειον)은 '기초' '원리' '요소'로서 기초적인 수준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을 대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이단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대상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 가르침을 초등학문에 속한다고 한 것은 지적(知的)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수준에서 진리 차원에서 관심거리가 못 되는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 이론과 논리에 있어 지적으로 수준이 높은 것처럼 보여서 그 내용이 높은 수준의 것이 아니라 진리 차원에서 볼 때 논쟁의 수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일어난 신흥 이단들의 교리를 보면 당시 이단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②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이 거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당시 이단들의 잘못된 주장을 바로 하기 위해 그리스도론에 대한 진리를 거론했습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는 직역하지 않았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왜냐하면...때문에'인 '호티'(οτι)라는 접속사를 맨 앞에 두고 9절 이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9절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는'은 앞 절 8절을 이어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성'(θεοτηs)은 '신성' '신격'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인격과 성품을 의미합니다. '충만'(πληρομα)은 '충만' '완성'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인격과 성품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fulness)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격과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成肉身) 혹은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 합니다. 사도요한도 그런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요한복음1:1,14에 "태초에 말씀(λογοs)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σαρζ)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로고스'(λογοs)입니다. 이 로고스는  당시 헬라세계의 정신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플라톤 철학의 스토아(stoa)학파에서 주장한 우주의 지배원리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들과 달리 헬라인들에게 보낸 메세지로서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에 관한 구원역사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요한이 그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는 유대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헬라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로고스)가 육신(σαρζ)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육체 가운데 거하시므로 하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요한의 선언도 영지주의 이단의 가현설의 주장을 완전히 부정하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4:1-3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도 초대교회 당시 교인들에게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육체로 오신 분임을 천명하면서 이어서 10절에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는데 '통치자와 권세'는 천사들에 대한 별칭입니다. 당시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이 천사숭배와도 관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까지 주관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그들의 주관자이며 그들과 위치상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며 천사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 표현입니다 (1:16).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인격과 성품의 모든 신성이 예수 그리스에게 거했는데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므로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해서 충만하게(complete)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므로 이미 법적으로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 생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고 그를 본받아 그를 닮아 가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 가므로 점점 완전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례는 유월절과 할례가 있었습니다. '할례'(割禮)는 베는 의식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 난지 8일만에 아이 생식기의 표피를 돌 칼로 자르는 의식이었습니다. 그 의식은 언약 백성의 표였으며 육욕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례는 성찬식과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세례'(洗禮)는 씻는 의식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물로 씻는 의식이었습니다. 세례는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상징의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세례식의 방법(樣式)에 대해 적수세례(滴水洗禮)가 옳은지 침수세례(侵水洗禮)가 옳은지 논쟁이 많은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원어 '밥티죠'(βαπτιζω)는 '담그다' '씻다' '정결케 하다' 등 다양한 의미가 있고, 구약시대에 정결케 하는 의식이 씻는 것과 뿌리는 것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나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와 베드로가 하루에 30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와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와 바울이 간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등에서 방식의 구분이 어렵고 (출29:16, 겔36:25, 행16:31-33, 8:38-39, 9:17-18), 현대에 방식보다는 그 의식을 베푸는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죄 씻음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고, 구원받은 자답게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고,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고백을 확인하므로 죄 씻음을 받았다는 상징 의식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바로 그 할례와 세례가 상징하는 바를 완전히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골로새교인들은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 죄 용서를 받고 영이 거듭나고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은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할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몸'으로 표현된 육체의 정욕, 옛 성품, 죄성에서 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12-13절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고 부활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이 그 대속과 그 효과를 믿으므로 세례가 상징하는 바, 죄로 죽었던 가운데서 죄 용서함을 받고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1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했습니다.


  14절에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고 했습니다. '법조문으로 쓴 증서'는 손으로 쓴 고소장을 말하는 바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정죄합니다. 죄값으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의 공의에 고발합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영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의 주변에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죽음이며 죄이며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조항들을 지워 없애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죄값을 대신 짊어지고 그 죄값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그 죄값을 다 치렀습니다. 그래서 죄로 죽어야 한다는 율법의 효력을 무효화시켜 파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악한 천사들인 악령들을 말합니다 (10절, 1:16). 에베소서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는 실존은 죽음과 죄와 율법인데 악령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지배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므로 악령의 권세를 무력화시켜 수치를 당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이루므로 그들로부터 승리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친히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이기시고 우리에게도 이김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율법주의자들로부터의 자유 (16-23절)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①음식과 절기로 비판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골로새교회를 교훈으로 공격하는 자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과 유대주의적 금욕주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율법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절기는 농경역법에 따른 맥추절(칠칠절,오순절)과 초막절(수장절)과 초실절이 있었고 (레23:15-21, 33-44, 9-14), 사건역법에 따른 유월절(무교절, 레23:4-8, 민28:16-25), 산술역법에 따른 희년과 안식년과 신년절(나팔절)속죄일과 월삭과 안식일이 있었습니다 (레25:8-55, 25:1-7, 23:23-25, 23:26-32, 민28:11-15, 출20:8-11, 31:13-17, 레23:1-3, 민28:9-10). 본문의 '초하루'는 월삭을 말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짐승 가운데 쪽발 갈라지지 않은 것과 새김질하지 않는 것, 물고기 가운데 지느러미없는 것과 비늘없는 것, 새 가운데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것과 고독한 곳에 거하는 것과 불결한 것을 먹는 것과 우상숭배에 관련된 새, 곤충 가운데 날지 못하는 것과 뛰지 못하는 것, 파충류 가운데 배로 밀어 다니는 것과 네 발로 걷는 것들과 여러 발을 가진 것들은 부정하니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레11:1-47). 또한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과 모든 동물의 피는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레7:22-27). 또한 나실인으로 서원한 사람은 서원 기간 동안에 독주나 포도주나 그 원료들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민6:3-4). 골로새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절기를 지키는 규례와 음식에 관한 규례에 엄격한 적용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규정한 것 이상으로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듯 합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조건이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지켜야 할 계명처럼 주장한 듯 합니다. 구원의 조건이나 종교적 의무로 주장한 듯 합니다. 그들은 골로새교인들이 그것을 지키는 않는 것을 두고 비판했을 것이고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더 옳은 자들이라고 으시댔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비판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그림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7절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와 그에 따른 규례, 음식에 대한 규례 등은 모두 오실 구원자에 대한 의식이었습니다. 오실 구원자와 그의 사역과 그로 인한 효과 등에 대해 예언한 상징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그림자이고 몸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형이었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의식과 규례들이 지시하는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것들이 지시하는 바를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약의 모든 의식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14-15절).


  오늘날 구약의 율법적 의식과 규례, 거기에 자신들이 추가한 규정들을 구원의 조건이나 계명의 성격으로 제사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수님께 대속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었기 때문에 율법의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율법적 규례와 의식들이 주는 정신은 오늘날 시대에 맞게 적용할 때 신앙적 유익을 얻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자는 율법의 의무에서 자유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답게 살기 위해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신령상 경건에 도움이 되는 규례는 오늘날에도 적용하여 지키는 것이 유익하고,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 지키는 것이 유익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신앙의 유익을 위해 나름대로 마음에 규례를 만들어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곡식 알맹이를 사는 껍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시멘트 건축물에 거푸집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주일 지키는 문제나 십일조 드리는 문제나 술 먹지 않는 문제 등이 그 예입니다 (출20:8-10, 31:13, 느10:31, 13:15-21, 사58:13-14, 신명기14:22-29, 말라기3:10, 민6:3-4, 렘35:5-8).

 

  ②천사숭배로 정죄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천사숭배는 오래 전부터 소아시아 지역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Theodoret, Irenaeus). 초대교회를 힘들게 한 율법주의는 천사숭배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자가 천사였고 율법을 전달해 준 자가 천사였기 때문에 천사를 존중하다가 숭배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자들도 천사숭배를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특징에 대해 말했습니다.


  첫째, 겸손으로 가장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겸손한 것처럼 했습니다. 부정한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께 직접 경배를 드리는 것은 교만한 것이므로 그의 심부름꾼인 천사들을 경배해야 한다고 하면서 겸손한 체 했습니다 (Lightfoot, Bruce). 하지만 실상은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천사를 숭배하는 자신들을 영적 체험을 한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고 천사숭배를 하지 않는 자들을 그렇지 못한 자들로 생각하여 정죄했습니다.


  둘째, 육신의 생각을 따라 과장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8절에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Bruce, Ewald). 육신의 생각을 따라 과장한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생각'(του νοs τηs σαρκοs)은 영적인 생각의 반대되는 표현으로서(unspiritual mind -NIV)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니라 육신의 죄성에 따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나 환상 등의 모든 영적 체험과 그 이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고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도 있습니다. 에스겔13:2-3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고 했습니다.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 거짓교사들은 자기들의 신비적 욕망에 따른 망상으로 인한 생각을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받은 것처럼 과장한 것입니다.


  셋째, 머리를 붙들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19절에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에베소서5: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골로새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그리스도를 말하긴 했겠으나 그를 굳게 붙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 세우시고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고 계속해서 생명력을 공급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체들이 서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생명과 생명력으로 사로 유기적 교제와 연합을 통해 성장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성도들은 그를 통해 죄사와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가 보내신 성령의 조명 하에 그가 주신 하나님 말씀을 통해 생명력을 공급받아 교제하고 연합하여 성장하는 것입니다. 곧 성도는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를 생명주신 자로 생명력을 주시는 자로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골로새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과 그를 통한 성장을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천사(天使)는 영적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수종 들며 성도의 구원을 돕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1:14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고 천사는 사환의 신분입니다. 하물며 그를 하나님의 본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보다 높임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22:8-9에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어떤 천사라도 그리스도보다 존중받아서도 안되고 신앙의 핵심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또한 성자(聖者)들도 추앙받아서는 안됩니다 (에3:2, 행10:24-26).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선교를 할 때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제우스신과 헤르메스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하면서 제우스 신당 제사장이 무리와 함께 소와 화환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그 때 사도행전14:15에 보면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구교에서 천사와 성자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과 부활, 그리고 그로 인해 주어진 죄사와 구원과 영생이 신앙의 근거와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분만을 주요 왕이요 머리로 섬겨야 합니다.   

 

  ③금욕주의 교훈을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고 했습니다. '초등학문'에 해당하는 '스토이케이온'(στοιχειον)은 '기초' '원리' '요소'를 말합니다. 초보적인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지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가치 차원에서 초보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진리 차원에서 아주 초보적인 가르침을 말합니다. 바울이 이 용어를 적용한 대상은 철학, 유전, 율법, 이단, 악령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8,14-16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은 율법의 정죄와 속박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므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다 성취했습니다. 믿을 자에 대한 율법의 정죄와 요구 대신 치르고 성취한 것입니다. 대표원리에 의해 믿을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죽으므로 율법의 정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고 요구를 이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19-20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믿을 자는 율법의 정죄와 요구의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순간 적용되고 세례를 통해 확인됩니다 (12절, 롬6: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에서 '너희가...죽었거든'(Ει...απεθανετε)은 '만일...너희가 죽었다면'의 조건절 형식을 가졌지만 의미는 '너희가...죽었기 때문에'의 의미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을 강조할 때 강조적 표현으로 사용한 형식입니다 (3:1, 빌2:1).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고 했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율법의 정죄와 요구에서 구원받아 해방된 자들인데 어찌하여 믿기 전처럼 다시 율법의 규례에 속받을 받으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율법에 얽매여 사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골로새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받은 사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21-22절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고 했습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금한 음식 문제를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16절). 율법주의자들은 구약 율법에서 금한 것 뿐 아니라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도 규정을 만들어 금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는 그런 가르침은 한 때 있다가도 곧 없어질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사29:13, 마15:9).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만든 규정이고 교훈인데 왜 그것들에 얽매여 사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조항들과 그것에 대해 만든 세부조항들을 지켜서 금욕을 해야 신령한 자가 된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23절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앞에서 언급한 율법주의 거짓교사들의 천사숭배와 율법적 규정과 금욕적 명령 등을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모양뿐이고 실상은 교만한 자들이고, 지혜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모양뿐이고 실상은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만든 주장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육체'(σωμα)는 인간의 본성인 죄성을 의미합니다. 죄의 성품을 제재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성품을 제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승리하는 권세가 주어졌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結言> 

  골로새교회는 율법주의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신령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천사를 숭배해야 하고 율법의 규정을 따라야 하고 금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율법주의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바른 영성은 현실을 떠나 금욕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5:13-16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의 위치 자체가 세상에 있고 성도가 살아가는 목적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 역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금욕주의는 과거 영지주의자들처럼 경건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바른 진리에서 떠나게 됩니다 (유다복음, 나까마디문서, 다빈치코드). 기독교 영성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의 정죄와 요구를 이루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을 굳게 붙잡는 데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유가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6:1-2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고 했습니다. 둘째, 성경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가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출32:4, 왕상12:28, 왕하10:29).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레10:1-2). 셋째, 성령이 양심을 통해 역사하심에 예민하게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