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目>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
<聖經> 요한복음7:1-53
<序言>
예수님은 유월절에서 초막절까지 약 6개월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많은 표적을 나타내고 그 의미를 강해했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깨닫지 못하고 따 떠났습니다. 이제 사역의 활동무대를 초막절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7장은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심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내용구조는 예루살렘 상경에 대한 권유(1-9절), 무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10-13절),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교훈(14-24절),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25-36절), 예수님의 생수에 대한 설교(37-39절),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반응(40-53)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루살렘 상경에 대한 권유 (1-9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①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유대에서 사역하기를 꺼렸습니다 (1절).
갈릴리는 요단강 서쪽 팔레스틴 3고을 중 제일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주전 47년 헤롯왕의 영토로 예수님 땐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차지했습니다 (눅23:5-7). 당시엔 인구도 많았고 디베랴 가버나움 나사렛 등 여러 마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대부분을 여기에서 지냈고 선교활동 무대도 여기였습니다.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도 모두 이 곳 출신입니다 (마4:17-22). 유대는 보통 요단강 서편 팔레스타인의 3대 행정구역(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중 남단의 한 구역입니다 (슥4:44, 행10:37). 헤롯왕이 한 아들 아켈라오에게 떼어 준 부분이었는데, 아켈라오를 대왕을 죽이려는 모의를 했다고 해서 좌천시키고 그 곳을 수리아 도에 합병시켰습니다. 이 유대는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는 지방입니다.
예수님이 유대 지역을 다니기 싫어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5:8-18에서 안식일에 병 고침으로 율법 어김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죽이려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모르는 소경이었기 때문이고, 율법의 진정한 근본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이적과 가르침에 대한 무리들의 일부 호응에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오게 하지 아니한 불택자이지만). 진리를 잘못 깨달은 자나 알지 못한 자들은 담대히 핍박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생각합니다. 사울의 핍박과 중세 카톨릭과 국교회의 핍박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시기합니다. 시기는 마귀에 속한 것이고 죄성에 속한 것입니다 (창4:4-10, 마27:18). 사울이 다윗에 대해 시기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핍박자들을 피하려 한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잡힐 때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8절).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않고 하나님의 작정대로 행하십니다. 자신을 임금 삼으려 할 때도 피하고 (6:15), 잡아 죽이려 할 때도 피합니다. 그러나 때가 될 때는 자의로 붙잡힙니다. 이는 살든지 죽든지 육신 생명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중심입니다. 하나님 일 중심입니다. 피해야 할 땐 피하고 잡혀야 할 땐 잡힙니다. 아직은 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피한 것입니다.
②초막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2절, 레23:34-43, 민29:12-14).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여 성전에 들어가 성전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침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었습니다 (7:2,10,14). 초막절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유대 3대 절기 중의 하나로서 유대 월력으로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키는 절기이며 (후에는 8일- 신16:13, 레23:34-36) 이는 가을 추수를 끝내고 1년 농사에 감사하는 의미로 지켰으므로 수장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출23:16, 34:22).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초막생활 하던 것을 기념하며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것 감사하기 위해 들에 나가 나뭇가지로 장막을 치고 지냈기 때문에 장막절이라고도 했습니다 (느8:14-17). 이 절기에는 전도서 낭독 (민29:12-28), 마지막 날에는 신명기33:3-4을 낭독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초막절 마지막 날 곧 8일째에는 7일 동안 지킨 절기를 종합적으로 지키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 행사는 두 가지였습니다. 물을 붓는 의식과 불을 밝히는 의식이었습니다. 물 붓는 의식은 여인들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문으로 들어와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물을 내어주어 살게 해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 의식을 보면서 예수님이 자신이 생명의 물을 주는 자라고 선언합니다 (7:37-38). 그리고 불 밝히는 의식은 제사장이 여인의 뜰에 있는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점화하여 불을 밝히는 의식이었습니다 (Mishnah-Sukkah5:2-4).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어 살게 해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8:12).
③형제들이 예수님을 유대로 가기를 청했습니다 (3-5절).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더 넓은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로 나가서 일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위대함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그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친 형제라도 그의 육신적인 면만 보고 메시야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는 혈육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되는 것입니다 (마8:12, 엡2:8, 요3:6). 믿지 않는 자들은 명예 영광주의로 나갑니다 (6:15, 마4:8).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불신앙의 무리들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일의 목적을 자기를 드러내는데 두지 말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와 감동과 뜻을 순종하는데 두어야 합니다 (5:19-30). 사울과 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삼상10:20-24, 13:13-14).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 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제재를 받지 않고 언제나 자기들의 일을 합니다. 그들의 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곧 그들은 원하면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들의 대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 됩니다. 예수님은 때가 안 되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9절). 이때는 예루살렘 상경의 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악함을 정죄한 고로 그들이 죽이려 하는 상황인데 아직 구속을 이룰 때가 안 되었는데 붙잡혀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 시키는 때에 일하시는 분입니다 (2:1-4, 5:19-30). 자기 때를 준비하고 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무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 (10-13절)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2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①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상경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후 예수님도 올라갔으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말했습니다. 비밀리에 상경한 것은 원수들이 해하려 한 까닭입니다. 아직 자기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목적을 두기 때문입니다.
②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은 그를 해하기 위해 그 말을 책잡기 위해서이거나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고로 예수님은 그들을 피했습니다.
③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논평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현군자로 아는 윤리적인 신앙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불신의 태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20절에 보면 귀신이 들렸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바울도 미쳤다는 말과 학문이 미치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행26:24). 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마태복음16:13-14에 보면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4:19에는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성령에 의한 바른 깨달음입니다. 마태복음16:16-18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의 교권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판단을 드러 내놓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평론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고 예수님과 함께 정죄 받을까 두려워해서입니다. 요한복음9:22에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의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4:19-20,31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고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전했다고 했습니다.
3.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교훈 (14-24절)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①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성전에서 가르쳤습니다 (14-15절).
초막절은 일주일간인데(레23:26), 중간에 올라가심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율법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가르치는 일에 힘썼습니다 (마5:2, 22:6). 또한 가르칠 것을 분부했습니다 (마28:19-20). 성령께서도 가르치고 (눅12:12), 사도들도 가르쳤습니다 (행18:11). 교회 감독들도 가르쳐야 하고 (딤후4:2, 5:17), 집사들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딤전3:2).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했습니다. '글'(γραμματα)는 문자적으로 '문자'(갈6:11) '성경'(딤후3:15)로서 학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교훈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초등학문이 아닌 (골2:8-9) 초자연적인 지식에 통달함을 모른 것입니다.
②예수님의 교훈은 스스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 했습니다 (16-18절).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이 누구에게서 배우거나 자신이 습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말씀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랍비들의 교훈보다 내용과 근원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성버나드는 "그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분이며 또한 나면서부터 아는 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영원부터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것을 말씀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배워서 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려면 그 말씀을 행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것이 지식 습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므로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학문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크로솨데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교훈을 알 수 있는 자가 지능의 인물 혹은 통찰력의 소유자를 말하지 않고 그것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무디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좋은 학교이다"고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 가르치는 불의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르치는 자로서 불의가 없는 참된 자입니다 (빌1:20-21, 고전10:30-31).
③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19-24절).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알지 못함과 그의 행한 일을 이해하지 못함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는 5장에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사건을 소재로 변증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할례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줍니다 (출4:25, 12:44-4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할례가 주는 예표를 모르고 행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할례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을 때 언약의 표징으로 시행하게 했습니다 (창17:9-14, 2:4, 행7:8). 그러므로 이 율법은 하나님이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의미는 지키지 못하고 지킨다고 했습니다 (마23:23). 예수님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주는 의미로 병을 고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온전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못 지킴으로서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죄하여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요11:44). 할례이든 안식일에 관한 것이든 외형적으로 판단하여 미워하는 마음으로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 속에서 참 뜻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4.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 (25-36절)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①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내 놓고 말할 때 죽이려 했습니다 (13-24절). 예수님이 출처를 말할 때 죽이려 했습니다 (29-30). 이단으로서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19). 믿는 자가 많이 생길 때 죽이려 했습니다 (31-32절). 교권주의자들의 시기가 발동한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자기 목적에 이용한 것입니다. 주의 일이 자기들보다 잘되므로 시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될 때 시기심이 들어오는 자는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잡고자 했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0절). 조금 있다가 하나님께로 간다고 했습니다 (33절). 때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이 보호합니다 (왕하6:4-9, 롬8:31).
②유대인들은 출처에 대해 모른다고 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7절). 이 말은 계시문학에 나타난 사상을 말한 것입니다. 계시문학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구름에서 나타나고 해에서 나타난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제4 에스라7:28, 13:32, 미5:2).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출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믿지 못 했습니다 (마13:55).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안다는 의미는 그의 본질을 안다는 것이 아니고 육신 면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그리스도 출처를 모른다는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28-29절). 그러나 하나님은 참이십니다. 그를 안다고 말하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에게서 났고 그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성 본질과 메시야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출처를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의 승귀를 말할 때도 알지 못했습니다 (33-36절). 육신적으로 이해하여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지역으로 가소 활동할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의문만 커졌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할 때 믿지 않는 자는 따라갈 수 없고 비참했습니다 (계6:12-17). 어두운 가운데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요3:36, 4:1-3, 왕하2:15-18). 예수님을 알고 그 말씀의 의미를 아는 것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마16:16, 고전12:31, 요6:37, 44).
5. 예수님의 생수에 대한 설교 (37-39절)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성전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명절은 초막적(장막절, 수장절)입니다. 초막절은 원래 7일간인데 8일째 되는 날에는 '큰 날'로 지켰습니다. 그 날은 7일간의 행사를 종합적으로 기념하는 날입니다 (레23:35-36,39). 이 날에는 민중들이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행렬로 성전 문에 들어와 물을 붓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반석에서 생수를 마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행했습니다 (출17:6, 민20:10, 고전10:4). 이 반석(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물(생수)는 성령에 대한 상징성을 나타내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물 붓는 행사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37절). 목마름은 갈등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은 심령상 만족이 없습니다. 영적 갈증 가운데 삽니다. 수가성(사마리아성) 여인은 야곱의 우물물이 상징하는 육체의 생명과 가족과 정욕 등은 심령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고 더욱 갈증만 더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그리스도)로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만족을 준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2:17에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요3:16, 4:14, 7:37, 마11:29).
예수님은 이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했습니다 (38절).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인간의 깊은 요구를 만족시키고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43:20, 44:3, 55:1, 58:11, 겔47:1-12, 욜3:1,18, 슥13:1,4, 4:8).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령을 보내주어 만족하게 할 것을 가리킵니다 (욜2:28-30). 당시에는 예수님이 죽음, 부활, 승천하기 이전이므로 오순절 성령이 내리지 않을 때입니다. 성령이 그 이전에도 역사했지만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 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성 된 다음에 역사할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된 다음에 그 완성된 진리를 가지고 역사할 성령을 말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자에게 역사할 성령입니다. 그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심령의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생활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행2:1-5). 이 성령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회개하므로, 기도하므로 얻게 됩니다 (행2:3-5, 눅11:13).
성령은 예수를 믿을 때 내주(內住)합니다. 고린도전서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자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시제도 과거로서 완료된 경험으로 말합니다. 로마서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고전린도전서3:16에도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이미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거듭날 때, 회심할 때 성령께서 내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그 성령은 믿는 자 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14:16-17에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마28:20). 그리고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합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1:29에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미 예수를 믿은 자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으므로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전5:19). 성령이 우리의 전인을 주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말씀 순종하고 기도하므로 가능합니다.
6.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반응 (40-53)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 오지 아니하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①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한 그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임을 믿었습니다 (40-43절, 신18:15,18).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보낸 하속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그처럼 말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고 증거했습니다 (46절).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자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임을 발견하고 그냥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관리하고 수종드는 자들로서 제사장에게 절대 복종해야 할 자들인데 예수를 믿고 그냥 돌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을 책망할 때 변명을 했습니다 (51절). 율법대로 두 증인의 말을 다 듣고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신17:6, 19:15, 행23:3). 성급한 행위와 오판을 경고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 회원으로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던 자입니다 (3:1-5).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들의 오만을 경고한 자입니다 (본문). 예수님이 운명하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과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하는 일에 헌신한 자입니다. (19:39).
②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41-42절). 그 이유는 오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서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하7:12). 그래서 갈릴리에서는 그리스도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막5:2).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나 그들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니고데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상고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속들에게도 오히려 예수님에게 미혹되었다고 책망했습니다.
<結言>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 지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도 그것이 예수님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바로 깨달은 자에게 미혹되었다고 하고 성경을 상고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9:39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의 성취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교만이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벽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