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맹인을 고치신 그리스도

<聖經> 요한복음9:1-41

 

<序言>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실로암 못에서 고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소경을 고쳤습니다. 두 맹인(9:27), 맹인 바디메오(10:46), 많은 맹인(7:21), 길에서 구걸하던 한 맹인(18:35). 나면서 맹인된 자(9:1-12)를 고쳤습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35:5-7). 예수님이 본 장에서 맹인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음을 표적하는 사건입니다. 내용구조는 소경을 고치신 표적(1-7), 바리새인들의 핍박과 맹인의 고백(8-34), 예수님의 맹인에 대한 위로(35-38), 예수님의 영적 맹인에 대한 교훈(39-41)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의 맹인을 고치신 표적 (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맹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1).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2). 자기 때문인지 부모 때문인지 물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신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왜 하나님이 그를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나게 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과응보(因果応報)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인론적인 고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사상입니다. 질병과 같은 모든 고통의 상태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은 욥기서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사상적 배경으로 볼 때 맹인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로 맹인이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상적 배경으로 볼 때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 맹인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으므로 그가 죄를 지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에 그 부모의 죄 값으로 맹인이 된 것인가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부모의 죄값이 자녀에게 내려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20:5“~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34:7, 14:18, 79:8). 그런데 부모의 죄값이 자녀에게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에스겔18: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18:2-4, 31:29-30).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맹인이 누구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된 것인지,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은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인과응보의 원인론적인 고통관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죄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부당하게 받는 고난도 있고 (이유 없이 애매히 받는 고난), 죄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고, 선을 행하므로 오는 고난도 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2:19-20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자연원리를 어겼을 때 오는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에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고, 악령들의 역사로 오는 경우도 있고, 자기가 범죄 해서 징벌로 오는 경우도 있고, 선을 행하므로 핍박으로 오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의 선한 목적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받은 것은 자기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연단시켜 가나안 축복을 누릴만한 자격을 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8:16, 29:11). 욥의 고난은 악령의 역사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연단시켜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3:10, 42:5-6). 바울의 고난도 하나님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하게 하여 더욱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12:7). 그러므로 원인론적 고통관의 틀에 얽매여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윽박지르거나 귀신 들려서 그렇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이거나 부모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때가 아직 낮이매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밤이 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4). 낮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을 말하고 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부지런히 혹은 반드시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5).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유일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8:12절의 빛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의 빛을 말한다면 본문의 빛은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영향력으로서의 빛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임을 선언하신 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6). 어쨌든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7).

 

  침을 진흙에 이겨 바른 것은 고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민간요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로암’(Σιλωαμ)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 연못(저수조)이었습니다. 실로암은 베데스다와 함께 예루살렘에 2개의 못 중 하나입니다 (5:2). 실로암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길이가 약 19m, 너비가 약 6m 정도 되는 연못입니다. 이 못은 8세기 말에 히스기야왕이 앗수르(앗시리아) 산헤립의 포위 공격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읍에 충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성읍 밖 기혼(처녀 샘이라는 뜻)에서부터 약 530m 떨어진 이 실로암까지 S자형 터널을 파서 성읍에 물을 공급하도록 한 것입니다 (대하32:30). 그런데 창세기49:10'실로'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메시야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8:6에는 '실로아'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메시야가 배척당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맹인에게 실로암에서 씻고 오라고 한 것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가 죄 씻음을 받아 영적 눈을 뜨게 될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사건을 통해 나타내려는 표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이 질문으로 제시한 두 가지를 다 부정했습니다. 특히 맹인 본인이든 그의 부모이든 죄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맹인이 날 때부터 맹인이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τα εργα του θεου)은 직역하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 일이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좁게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계시하려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표적을 일으킨 목적은 자신이 구원자임을 계시하여 맹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이후에 바리새인들이 맹인을 붙잡아다가 심문을 하게 됩니다. 그 때 맹인은 자기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예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그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32-33절에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맹인은 그로 인해 마을에서 출교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출교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맹인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만나서 35절에 보면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했습니다. ‘인자’(人子,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the Son of Man)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계시했던 그 사람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니엘7:13에서 오실 구원자를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로 계시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인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인자는 구약성경에서 오실 구원자로 예언된 그 인자라는 말입니다. 곧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인자를 영어성경(KJV)에서는 의미상으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번역했습니다. 종합하면 인자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에게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 하자, 맹인은 그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자신이 믿겠다고 했고, 예수님은 37절에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맹인은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표적을 일으킨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나타내려는 것이었고 맹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을 믿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맹인은 육신의 눈을 뜬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 믿으므로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맹인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계시하기 위한 표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계시하기 위해 표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일부러 맹인이 되게 했다는 말에는 납득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계시하기 위해 표적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맹인을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나타내려는 방편으로 택하여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맹인은 눈이 나빠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것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앞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물과 사람과 길을 볼 수 없었으니 힘들었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디에 부딪히거나 다른 사람이나 짐승에게 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그 때마다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거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므로 울분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한 채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맹인을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되게 하여 그 같은 고난을 겪게 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계시하기 위해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예수님을 계시하는 데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믿게 하여 구원받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레나 마리아(Lena Maria)는 스웨덴 사람인데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도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계 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후에는 복음가수가 되에 세계에 다니면서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당신 같은 불구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밝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밝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라고 답합니다. 닉 부이치치(Nick Vujicic)는 세르비아 사람인데 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여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모든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래서 공부에도 도전하여 그리피스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처에 다니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된 메시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never give up)입니다.

 

   우리는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약점들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받고 열등감에 빠지고 수치심을 느끼고 우울현상에 들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약점들을 의미없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 대한 선한 목적을 이루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에 필요한 약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적극적으로 한다면 하나님이 적당하신 때에 그 약점들을 이용하여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인정하게 하는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의 약점은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조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둘째, 빛으로 오셨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5).

 

  예수님은 1:4에서 빛으로 소개되었고 8:12에 보면 자신을 빛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대축제 때 불 밝히는 의식에서 자신을 빛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므로 빛으로 오셨음을 시위했습니다. 육신적인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영적 맹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자임을 표적한 것입니다 (40-41). 도식으로 보면 '(지식, 터득, 체득, 체험)연합(구원, 평안, 안식)'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 때문에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게 되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인간이 처음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했으나 범죄하므로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음과 질병과 고뇌 등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속성을 잃어버려 불안과 공포와 갈등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의 해결방법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면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게 하여 안식을 얻게 하는 분입니다 (14:27, 16:33, 35:5-6).

 

  셋째, 심판하러 오셨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39-40).

 

  사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은 '표적설교반응심판'의 형태를 띱니다. 예수님이 자기 계시를 위해 나타내는 표적에는 필연적으로 갈라짐이 이루어집니다. 표적성을 받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의 표적을 판단내지는 정죄를 하므로 자신들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할 자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표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힐문하므로 스스로 죄와 세상과 사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스스로 암흑에 속해 있는 자임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화랑에서 그림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자기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후르시쵸프는 피카소 그림을 보고 말꼬리를 흔들어 놓은 것과 같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39-41절에 보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심판했다고 하기 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심판 받을 자임을 드러내고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불택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실천적 의미에서 나면서 맹인된 자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지셨다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고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경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을 즉시 순종한 믿음이 낫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할 때 그대로 행한 것입니다 (6-7).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명령을 순종하여 요단강에서 씻고 나은 것을 연상시킵니다 (왕하5:10-14). 사무엘상15:22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말씀 가운데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3:10-14, 19:16-22). 그리고 자기에게 감동시키는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1:29에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기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2. 바리새인들의 핍박과 맹인의 고백 (8-34)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 맹인이 눈을 뜨기 전에는 맹인으로 구걸을 하던 걸인 행세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에 걸인이었던 맹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눈을 뜬 맹인은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그대로 했더니 눈이 떠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디 있는지 물었으나 눈을 뜬 맹인은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눈을 뜬 맹인은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묻자 눈을 뜬 맹인은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그대로 했더니 눈이 떠졌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바리새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때는 안식이었습니다. 어찌 안식일을 범하는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5장에서도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므로 유대인들 가운데 쟁론이 일어났고 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은 하나님의 안식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안식했습니다. 그 안식은 인간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피조물로 계시하고 그것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려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세상 창조가 그 목적대로 되었으므로 만족하여 안식한 것입니다. 인간도 그 안식에 참여했습니다.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노동의 고통과 인간의 고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간계로 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또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새 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8:19-23). 재창조입니다. 종말에 영과 몸과 피조물을 완전히 구속하여 에덴동산의 안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 완전한 새 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21:1).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완전함에 참여시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므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죄를 담당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생명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서 그 생명 살리는 일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니 자기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5:17).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안식을 주는 자임을 표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고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안식일에 고친 것은 그것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문자적 규례에만 얽매여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그 안식을 가져다주는 자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했습니다. 또한 어떻게든지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의도가 적중하려면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든지, 아니면 맹인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맹인에게 눈을 뜨게 한 자가 정말로 예수인지 물었습니다. 맹인은 예수가 눈을 뜨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에 대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부모에게 눈을 뜬 자가 정말로 아들 맹인인지 물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지 확인한 것입니다. 그 부모는 그가 자기 아들이고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어서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출교될 것을 두려워하여 아들이 대답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22). 당시 예수를 구원자로 시인하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출교를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교'(黜敎, αποσυναγωγος)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자들이 유대인의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탈무드(Talmud)에 보면 네 가지 종류의 출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네지파(neziphah)인데 이는 비공식적인 징계로서 책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니두이(nidduy)인데 이는 공식적인 징계로서 30일간 종교적인 공동생활을 금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헤렘(herem)인데 이는 무기한 동안의 출교로서 이 징계를 받는 사람은 모든 사교적 교제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마치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외면을 당했고 그가 죽을 경우 가족들이 애곡하거나 장례식을 할 수 없고 다만 시체만 매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삼마타(shammattah)인데 이는 영구적인 출교로서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축출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바리새인들은 눈 뜬 맹인을 통해 예수가 죄인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맹인을 두 번째 다시 불렀습니다. 그들은 맹인에게 예수가 죄인인 줄 안다고 했습니다. 맹인은 예수가 죄인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을 본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예수가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소경은 자신이 이미 전에 밝혔는데 똑같은 질문을 하자 '당신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느냐 왜 그리 자세히 묻느냐'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욕을 하면서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으나 예수는 어디서 온 자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맹인은 그 말을 듣고 예수가 자기의 눈을 뜨게 한 것이 분명한 데 어디서 온 자인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창세 이후로 날 때부터 맹인된 자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거니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32-33).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맹인에 대해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난 자가 자신들을 가르치러 드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맹인이 날 때부터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맹인을 내어 쫓았습니다.

 

  맹인의 부모는 이렇게 출교 당할 것이 두려워 예수님이 아들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으나 맹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자로서 하늘로서 온 자가 아니면 그런 일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당당히 말하다가 출교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출교는 정확히 어떤 종류의 출교를 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황으로 볼 때 유대인의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 당하는 종류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축출은 공동체에서 쫓겨나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는 축출이었습니다. 회당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 공동체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반경 2m내에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으면 가족들이라 해도 애곡할 수 없었고 장례를 치룰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본문의 출교가 그런 축출이었다면 그는 종교적 혜택, 사회적 혜택, 가족적 혜택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어떤 즐거움이나 소망이 없이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소경의 부모들은 예수님이 아들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맹인은 그러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을 예상했을 것이면서도 예수님이 자기 눈을 뜨게 했다고 했고, 그가 선지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일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정죄와 핍박이 결코 맹인의 믿음을 꺾지 못한 것입니다 (8:35).

 

  맹인이 출교당한 것은 예수님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맹인은 부모들과는 달리 자신이 출교당해 온갖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자신을 고친 분으로 증거했습니다. 본문 32-33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선지자나 사도가 아닌 평범한 아니 보통 사람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것을 증언하다가 출교를 당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의 위인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름없는 여인들이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구차히 풀려 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11:35-38"여자들은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 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1999420일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13명이 죽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자살한 사건입니다. 범인들의 범행 대상은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범인들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어서 '아니오'라고 하면 살려 주고 ''라고 하면 죽였습니다. 그런데 학생 중에 캐시버넬(Cassie Bernall)은 그들의 질문에 "예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대답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진실한 신앙은 죽음 앞에서도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 때문에 너무 쉽게 신앙을 양보합니다. 질병, 가난, 손해, 모욕이 오면 신앙을 양보합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라면, 어떤 불이익이 예상되더라도 신앙을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예수님에 대한 증거,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 주셨으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출교를 당한 맹인이 축출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위로해 주셨듯이(35-37) 우리가 말씀을 지키느라 눈물 흘리는 심한 아픔을 느낄 때에도 주님이 그 고통을 능가하는 위로와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맹인에 대한 위로 (35-38)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소경이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가 눈을 뜨게 했고 선지자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는 것을 증거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된 대로 그를 마을에서 내어 쫓았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했습니다. 맹인은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고 예수님은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소경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출교 당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35절에 보면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했습니다. '인자'(人子)'사람의 아들'입니다. 헬라어 원문 GNT(Nestle-Aland)에는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그 사람의 아들을)로 되어 있고, GTS(Stephen)에는 'τον υιον του θεου'(그 하나님의 아들을)로 되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GNT를 따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 번역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은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라는 관사를 붙인 것은 '사람의 아들'이 이미 과거에 사용되었던 말이고 독자들이 이미 알고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무엘하7:12-14에 나오는 나단 선지자의 신탁에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아들이 나와 성전을 짓고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 예언은 언약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구원자는 에스겔1:26-28에 나오는 에스겔이 본 전차(메르카바) 환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나타나는데 그는 '사람의 모양'을 가진 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다니엘7:13-14에 나오는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환상에서는 '인자같은 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는 미래에 오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 이해했고 '인자' 라는 말은 오실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바로 그 구원자로서 '인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가리켜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the Son of Man)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자'(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KJV에서는 'the Son of God'(그 하나님의 아들)로 번역했습니다 (NASB, NIV- 'the Son of Man'). 예수님은 출교당한 맹인에게 찾아와 구약에서 예언한 그 구원자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신 것은 맹인을 시험하려 물은 것이 아니고 맹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맹인은 그가 누구인지 물었고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바로 그라고 대답했습니다 (36-37). 그러자 소경은 즉시 38절에 보면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했습니다. 맹인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21) 사회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8-9).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고 (34), 마침내 출교까지 당했습니다 (34). 그런데 주님이 찾아와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밝히므로 그가 믿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눈을 뜨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 돌아와 영의 눈을 뜨게 하여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특히 율법에 대해 능통한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못해 구원받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고쳐 주고 나서 소경이 있는 곳을 떠나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오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셨지만 계속 함께 있어서 함께 있어 주지 않았습니다. 소경이 사람들에게 힐문을 당하고 바리새인들에게 심문과 정죄를 받을 때 그는 예수님이 옆에 계셔서 당신이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예수님이 친히 그들과 변론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소경은 핍박을 받으면서 홀로 변증하면서 힘들었을 것이고 그 때 예수님이 오시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위해 떠나셨고 여전히 자신의 사역만 하고 계셨습니다. 맹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5절에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라는 결과적인 내용을 보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고난과 소원에 침묵하신 것은 그가 홀로 예수님을 증명하면서 더욱 예수님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믿음을 고백하므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열악한 환경과 구조와 상황에서 많은 역경과 시련과 고통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가 원하는 사역을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련이 있습니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좋겠는데 더 큰 시련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는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는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가 우리에게 다름 사람들이 받지 못하는 영적인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고 그 때에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을 수 믿음이 생기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무관심이 아닙니다. 그의 침묵은 무관심 아니라 오히려 관심입니다. 외면이 아니라 기다림입니다. 요한복음14: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습니다 (14:16-17).

 

 

       4. 예수님의 영적 맹인에 대한 교훈 (39-41).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3: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과 모순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 메세지를 받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메세지를 받고도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구원이지만 필연적 결과로 심판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도 예수님이 맹인을 보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까 그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우리도 맹인인가'하면서 자신들은 맹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본다고 말하는 곧 맹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했습니다 (40-41).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여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인 것을 계시하기 위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과 영생을 주는 자인 것을 보고 믿는 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 동안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표적성을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인식하고 여전히 볼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 보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통해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려 하지만 그 표적성을 보는 자들이 있는 반면 필연적으로 그 표적성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는 자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맹인이 갖는 상징성은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적인 맹인이 있습니다. 실제 사물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이런 맹인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지적인 맹인입니다. 자신이 아는 지식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자인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 전승에 관한 지식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했습니다. 구약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왔다고 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실제로는 베들레헴에서 났으나 그들은 나사렛에서 난 줄 알고 있었음). 또 전승에 그리스도는 출처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부모와 형제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부인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적 전승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갇혀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종교적인 맹인입니다.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지킨 율법적 의 때문에 교만해졌습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모세의 율법대로 사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종교적 교만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結言>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과 의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려면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3:7-9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