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目>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聖經> 요한복음10:1-42
<序言>
본 장은 9장의 소경 치유 표적에서 비롯되어진 논쟁의 연속적인 설명입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병자를 치료하신 후 영적 소경에 대한 교훈을 하셨으나 이것을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힐문하자 (9:40), 앞 장의 내용을 개진하여 강화를 베풉니다. 이른바 드림언어인 목자와 양에 관련한 비유를 베풀어 설교를 합니다. 내용 구조는 양의 문 비유(1-9절), 양과 목자 비유(10-21절), 예수님의 정체(正體)에 관한 논쟁(22-42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양의 문 비유 (1-9절)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는 헬라어 ‘아멘 아멘’(Αμην αμην~)을 번역한 말입니다. ‘아멘’(αμην)이라는 단어는 ‘진실하다’ ‘확실하다’ ‘변함없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아멘’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끝에 응답형으로 사용하거나 기도를 마친 끝에 응답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간혹 선지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때 자신이 선포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말의 맨 앞에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멘’을 하면서 말을 하면 이제 전하려는 말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이 중요한 진리를 선언할 때 그것이 진리 됨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아멘’을 말하고 진리를 선언했습니다. 거기에다가 그것이 진리 됨을 더욱 확실히 강조하기 위해 두 번 ‘아멘’을 하고 진리를 선언했습니다.
1절下에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야외에서 양을 치다가 양들을 가두기 위해 친 울을 말합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건기 때에는 양을 멀리까지 데려가 오랜 기간 동안 이동하는 풀밭을 따라 방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경우 집으로 데려올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럴 때를 사용하는 우리는 가설 우리였습니다. 지붕까지 덮인 건물 형태가 아니라 흙벽돌이나 돌들로 주위를 돌아가며 울을 친 형태였습니다. 때로 가시덤불로 울을 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양의 우리는 문이 하나였습니다. 양들을 야외에서 풀을 뜯기다가 밤이 되면 우리에 가두었는데 그 문을 통해 우리에 들어오게 했습니다. 도둑들은 우리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 그 정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절도’(κλεπτης)는 몰래 훔치는 자를 말하고. ‘강도’(ληστης)는 강제로 빼앗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오는 자는 절도이며 강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한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종말적 의미로는 천국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현재적 의미로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 자체와 그들의 예배와 사역과 생활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영향력을 미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말입니다. 7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우리’로 표현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절도’와 ‘강도’는 자칭 구원자라는 자들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C.K.Barrett).
우리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는 절도이며 강도입니다. 양을 훔치거나 약탈하기 위해 온 자입니다. 예수님 때에 가짜 구원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자라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가짜로서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짜 구원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해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인 것과 죄를 대속해주신 대속자인 것을 믿을 때에만 죄 용서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16에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양 우리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절도와 강도는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지만 양의 목자는 양의 정문으로 우리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말입니다.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밤이 되어 목자가 양을 우리에 들이려 할 때 문지기는 문을 엽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따라 지어준 이름을 불러 양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목자의 부름을 따라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 목자는 문 앞에 서서 문으로 들어오는 양들을 하나씩 살피면서 들여보냅니다. 양들이 나무나 가시에 찔렸거나 바위에 부딪혀 상처가 있으면 기름을 발라 치료해 줍니다. 목이 마른 것처럼 보이면 물을 주어 마시게 해줍니다. 그렇게 양들을 다 들여보내면 문 앞에서 우리를 지키다가 누워 잠을 잤습니다. 사실 가설된 우리의 문에는 문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출입구를 가로 누워 잠을 자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 이리나 늑대나 절도나 강도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이든 사람이든 목자를 밟지 않고는 양을 훔치기 위해 우리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목자가 그런 정신으로 우리를 지키기 때문에 우리의 양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목자들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침이 되어 양들에게 풀을 먹이러 가야할 때가 되면 목자가 또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서 나오게 하고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나옵니다. 4-5절에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풀밭으로 인도하기 위해 소리를 내면서 앞서 가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서양에서는 양들이나 소들을 몰 때 후미에서 말을 타고 모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형이 굴곡이 없는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팔레스틴의 지형은 골짜기나 비탈이나 바위나 절벽이나 웅덩이 등이 많습니다. 목초지도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들을 목초지로 데려갈 때 소리를 내며 앞서가야 합니다. 양들은 목자를 잘 따라가야 지형적 위험에 빠지거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반복되는 습관에 의해 목자는 양들의 개인적 특성을 잘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압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뚜렷이 구분하기 때문에 다른 낯선 사람의 음성을 따라가지 않고 낯선 사람이 부르면 놀라서 도리어 도망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문지기’는 예수님을 소개한 세례 요한을 비유한 말로 여겨지고 (Lampe),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말이고, ‘양’은 하나님이 예수님에 맡긴 택한 백성을 비유한 말입니다 (6:39).
당시 청중들은 그 비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6절).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목자인데 양의 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목자들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목자와 문은 동일시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당시 목자들은 양들을 우리의 문으로 들인 다음에 문 앞에서 우리를 지키다가 그곳에서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자기 생명과 수고를 다해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생명을 바쳐서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8절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온 자’는 시대적으로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을 예수님보다 앞세우는 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곧 당시 자칭 구원자라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에도 자신이 구원자라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예수님 때에도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원자라고 하는 거짓 메시야(그리스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들이 아니라 속이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은 그들을 분별하여 따르는 않는 것입니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문’은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들어가면’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숙어처럼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들어가다'는 말만 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롬11:25). 예수님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양의 문을 통해 우리에 들어가면 안전한 것처럼 예수님의 대속을 믿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양이 목자를 통해 우리 생활을 하면 목자의 인도를 따라 안전한 가운데 풀을 얻게 됩니다. 그처럼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자는 평안 가운데 풍성한 영적 양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언어로 바꾸면 여호와로부터 안전과 양식을 보장받게 됩니다 (신28:2-6, 시23편).
2. 양과 목자 비유 (10-21절)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고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자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1-10절에서 강론을 통해 자신이 어떤 구원자인지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11-2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했습니다. 목자는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친숙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언약백성 간의 관계를 여러 그림언어로 묘사했습니다. 왕과 백성, 지휘관과 군대, 아버지와 자녀, 신랑과 신부, 농부와 포도원, 그리고 목자와 양입니다 (창48:15, 시78:52, 80:1, 사40:11, 렘31:10, 겔34:11). 예수님도 자신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한 것입니다. 11,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데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인 '나는...이다'(Εγω...ειμι)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이고 자신이 구원할 자들은 양이라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삯꾼과 대비됩니다. 12절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고, 13절에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라고 했습니다. 당시 목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주인이나 주인의 가족들이 양떼를 치는 주인 목자가 있었고, 임금을 받으면서 양떼를 치는 고용된 목자가 있었습니다. 삯꾼은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고용된 목자를 말합니다. 삯군이 양치는 일을 하는 것을 돈을 벌기 위함이기 때문에 삯군의 관심은 오로지 임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을 치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게 되고 최소한의 수고만 하게 되고 위험이 닥치면 양을 지키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우선하게 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삯꾼들과 같았습니다. 바리새파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사두개파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은 율법규정과 성전제도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막대한 이득을 취득했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중요시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구원과 평안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착한 목자, 좋은 목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특징에 대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제시했습니다.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초장과 시내로 인도하며 밤에 우리로 들이며 맹수의 습격을 대비합니다. 그러다 이리 같은 맹수의 습격이 있을 경우 자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양들을 지킵니다 (삼상17:34-37, 삼하17:26-29, 마18:14). 그것은 서로 아는 관계 때문인 것입니다.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 아는 것같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구원할 자들도 서로 아는 관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로서 서로를 떠나서는 일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구원할 자들도 영적으로 연합된 관계로서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할 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었습니다. 자신이 구원할 자들이 죄로 죽은 상태에 있을 때 (롬5:12), 그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그 죄 값으로 대신 죽은 것입니다 (빌2:6-8).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불쌍히 여겨 치유해주고 그가 출교 당했을 때 찾아가 위로해 주고 구원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되어 고통과 소외와 분노 가운데 살아야 했던 거지 맹인을 치유해 주었고 공동체에서 축출되어 고독과 절망 가운데 연명해야 했던 거지 맹인을 찾아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되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대속이 믿어지게 하고 구원을 얻어 영생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요14:16-18).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우리를 구원했을 뿐 아니라 모든 삶의 고통 가운데 찾아오셔서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은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어 인도해야 할 터이니 그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6절). ‘우리’는 유대인 가운데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자들을 가리키고 (R.E.Brown, C.K.Barrett). ‘다른 양들’은 앞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이방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Lenski, Morris).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서도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있는 줄 알고 그들도 구원받아 자신을 따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13:20, 벧전5:4).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17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이리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부활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빼앗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버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께 받았다고 했습니다 (18절). 예수님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힘에 못 이겨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해야 할 자들을 위해 자의적으로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계명’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권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어찌하여 귀신들려 미친 자의 말을 듣느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19-21절). 예수님으로 인한 논쟁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7:43, 9:16). 이 논쟁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귀신들렸다고 한 주장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7:20, 8:48,52 막3:21,22,30).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일침을 가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데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이 어찌 귀신들린 자냐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정체(正體)에 관한 논쟁 (22-42절)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스라엘의 절기는 산술역법에 따른 절기와 농경역법에 따른 절기와 사건에 따른 절기가 있는데 수전절은 사건에 따른 기념 절기입니다. 수전절(修殿節)의 헬라어 에그카이니아(εγκαινια)는 '성전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서 수전절은 성전을 새롭게 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the feast of dedication). B.C. 165년에 수리아의 왕이었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에 있던 보물들을 약탈하고 성전 제단에서 돼지를 잡아 쥬피터(Jupiter)에게 제사를 했습니다. 이방 헬라에게 제사를 한 것입니다. 그 때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가 궐기하여 에페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새롭게 수리하고 재건하여 성별된 제단에서 다시 제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전절은 그 더럽혀진 성전을 새롭게 수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연례축일로 지키던 기념 절기입니다. 수전절의 시기는 '겨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식 월력으로는 기슬르월(아홉 번째 달), 태양력으로는 12월, 종교력으로는 9월, 민간력으로는 3월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수전절은 8일간 지켜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집집마다 작은 병에 깨끗한 기름을 담아 불을 밝혀서 전시가지를 등불로 장식했습니다. 그래서 ‘등불절’ ‘광명제’ ‘빛의 축제’(the feast of lights)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자유와 해방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수전절의 목적과 영적 의미는 첫째, 승리와 회복의 기쁨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유다 마카비가 셀류크스 군을 물리치고 성전을 회복한 기쁨입니다 (시116:8, 115:8). 압제 세력에서 구원되어 국권과 주권이 회복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기쁨과 같았을 것입니다 (스3:8-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물리치고 구원과 해방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므로 그 의미를 이루었습니다 (요2:19-22). 마귀와 죄의 압제를 받고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큰 소망과 빛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이시려고 성전을 정결케 하고 곧 이어 병을 고치셨습니다 (마21:12-17). 예수님이 수전절에 성전에 가신 것도 자신이 구원의 주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수리와 정화의 기쁨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재건하고 정화한 기쁨입니다. 우상을 철폐한 기쁨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고 물에 뿌려 마시게 했습니다 (출32:20). 유다의 히스기야왕은 성전을 수리하고 성소의 더러운 것들을 기드론 시냇가에 버렸습니다 (대하29:3-5). 예수님도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요2:13-17, 마21:12-17).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우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결케 하고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겔8:5-17, 고전6:17-19, 계14:4, 삼상15:23, 골3:5). 셋째, 봉헌의 기쁨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예물, 낙성예물을 드리는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민7:10, 대하7:9). 로마서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시편116:12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고 했습니다 (30절). "내가 아버지 이름으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5절).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했습니다 (36절).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며 관계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과 속성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를 가진 자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생명을 줄 수 있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동일시 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돌로 치려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θεοι, gods)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34-36절). 이 말씀은 시편82:6 인용인데 율법에 기록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토라)을 모세오경에 국한해서 사용하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은 성문서나 예언서를 포함해서 사용했고 심지어 시가서를 포함하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요12:34, 15:25, 고전14:21).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씀은 시편82:6 인용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אלוהים, gods)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재판장들의 불공평한 재판입니다. 하나님은 재판관들을 세워 그들을 통해 공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공의를 실현할 수 있는 대리자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바른 재판을 하기 원한 것입니다. 바른 재판으로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악인의 손에서 구원받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공평한 재판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것입니다 (시82:1-4). 그래서 그런 재판관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신들로, 아들들이라 했지만 사람들처럼 죽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82:6-7). 곧 하나님이 재판관들을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할 대리자로 삼았으나 그들이 재판을 굽게 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대리자로 여기지 않고 심판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재판장 같은 사람들을 통해 다스렸습니다. 특히 신언전달자인 모세, 호세아, 예레미야,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들에게 많이 적용되었습니다 (출4:16, 7:1, 호1:1, 렘1:2, 눅3:2).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자 위치에 있었던 것이고 '신들' 혹은 '아들들'로 불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인용한 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들' '아들들'로 불렸는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의미로 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적 사역을 수행할 때 '신들'로 불려졌는데 하물며 그들보다 크신 분으로서 말씀과 표적으로 신적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낸 예수님 자신은 당연히 '신' '아들'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잡으려 했고 예수님은 그곳을 피하셨습니다. 붙잡힐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신들'(gods) 위치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고, 요한계시록1:6에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5:13-14에서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2:15에서는 '향기'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하나님이 누구인지 나타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나타내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 기독교인의 가치와 소망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세상에서 행해야 한다는 사역적 관점에서 보면 '신들'(god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역적 위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結言>
예수님이 자기 계시를 위해 표적을 행하고 설교를 하실 때 반응은 두 부류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이는 부인하고 대적하고 죽이려 하고 붙잡으려 하지만 (19-21, 39절) 어떤 이들은 믿었습니다 (40-42절). 어떤 이는 믿지 않고 어떤 이는 믿은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자들과 얻지 못할 자는 자신들의 반응으로 나타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적 예정론입니다. 예정론(豫定論)은 확신과 위로를 주기 위함이지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정론을 역사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태초부터 다룹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계시의 반응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로마서 8장도 이 믿음을 가진 자에 대해 궁극적으로 구원해 주실 확신을 주기 위해 펼친 예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