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나사로를 살리신 그리스도

<聖經> 요한복음11:1-57

 

<序言>

  예수님이 행한 이적은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는 분인지를 계시하는 표적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 왕의 신하인 고관의 아들 살리신 이적,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물고기 2마리와 보리 떡 5개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신 사건,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자를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한 사건 등은 모두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표적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본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그런 모든 표적들을 종합적으로 완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나사로의 죽음(1-16), 마르다를 만나심(17-27), 마리아를 만나심(28-37), 나사로를 살리심(38-44), 산헤드린의 음모(45-57)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나사로의 죽음 (1-16)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베다니에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였습니다 (1-2). '베다니'(Beththany)는 예루살렘 남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감람산 동편 기슭에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주 들렀던 곳이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과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24:50). '나사로'(Lazarus)는 히브리인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엘르아살이라는 이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원래 문둥이 시몬이었으나 (26:6, 14:3) 예수를 만난 다음 고침을 받아 나사로(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Martha)는 주로 활동적인 봉사를 많이 한 자였고 마리아(Mary)는 조용히 말씀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20-27, 10:39-42).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자이고 (12:3),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게 되고 (23:27),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게 됩니다 (24:10).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배경에 부모가 전혀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부모가 없었던 것 같고,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인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께 부은 것을 보면 부요한 가정이었던 것 같고 (12:3-5), 나사로가 죽었을 당시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이 위문 온 것을 보면 유대인 중에 잘 알려진 가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19). 어쨌든 그들은 당시 예수님을 믿으면 출교를 당하는 상황에서도(9:22, 11:8) 예수님이 그곳에 올 때마다 자기들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그들을 사랑(αγαπαω)했습니다 (5).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φιλεω)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했습니다 (3).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4).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은 다시 살아날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계시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을 주는 자임을 계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베다니로 가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머무셨습니다 (6). 17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찾아 갔을 때에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4)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소식을 듣고 이틀(2)을 있던 곳에 머물렀으므로 소식을 전하는 자가 예수님께 오는데 하루(1)가 걸리고 예수님이 베다니까지 가는데 하루(1)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사로는 예수님이 소식을 들었을 때 죽기 직전이었거나 이미 죽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일찍 가는 것과 늦게 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계시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을 주는 자임을 계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자연발생도 있고, 타인의 영향도 있고, 자기 죄(욕심) 때문일 수도 있고, 악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질병을 항상 보응의 결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9장에 나오는 나면서 맹인된 자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목적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의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42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고, 27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고, 26절에는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을 주는 자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참 생명을 주는 자라는 것을 계시하여 믿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했습니다 (7).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베다니는 유대 지경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8). 며칠 전에 예수님이 요단 동편에서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는데 제자들에게는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했던 사건이 (8:59, 10:31) 너무나 생생히 기억되었기 때문에 방금 전의 사건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유에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했습니다 (9-10). 예수님은 제자들의 항변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실제적으로 베다니로 가는 데 있어서 낮에 가는 것이 밤에 가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로 보면 예수님은 빛이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다 행하기 전에는 예수님이 죽지 않게 되고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일하는 동안에는 안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했습니다 (11).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심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사로가 죽지 않고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12-13).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아시고 나사로가 죽었다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14). 그리고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15). 나사로가 병들어 있을 때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제자들에 유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고치는 것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생명을 주는 자인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가자는 말에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16). 이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두려워 하여 베다니로 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베다니로 가자고 한 것입니다. 도마는 확실한 증거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이면서도 (20:24-25) 의협심이 강한 성품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생명을 주는 자임을 나타내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보낸 목적을 이루는 방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게 되자 그 때를 그 일할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9-10). 제자들은 예수님이 베다니로 올라가면 유대인의 핍박으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항변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악한 무리가 방해해도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동안에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에게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그 곁에 있지 않은 것이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참 생명을 주는 자임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 목적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베다니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유한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르다와 마리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21, 32). 물론 유대인들은 더욱 알지 못해 적대적이었습니다 (31, 33, 36-37).

 

 

       2. 마르다를 만나심 (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4)이나 되었습니다 (17). 유대인의 미쉬나(Mishnah)에는 3일 이내에 시신을 확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3일 내에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사망 여부를 확정하고 장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일 동안 시신에 머물러 있으면서 회생할 기회를 찾다가 3일이 지나면 시신이 썩어서 회생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죽은지 4일이 지났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볼 때 누가 보아도 시신이 썩을 정도로 오래되어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죽음을 확정 지은 후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시신을 누가 살렸다면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적 능력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위문을 왔습니다 (18-19). '5리 쯤'(ωs απο σταδιων δεκαπεντε)에 해당하는 헬라어 문구는 직역하면 '15스다디온 정도'입니다. 1스다디온(Stadion)181m로서 15스다디온은 약 2.7km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이제라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줄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20-22). 예수님께서 나사로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병자를 고치기는 했어도 죽은 자를 살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으나 설마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말을 듣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23). 마르다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24). 그 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25-26).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성도가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6:39-40) 마리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부활을 가능케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일차적으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을 암시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가 다시 살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5:24-25절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27).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그로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3. 마리아를 만나심 (28-37)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은 아직 나사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마르다를 만난 곳에 계셨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른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에 곡하러 가는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28-31). 유대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 애곡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돈을 받고 고용된 애곡꾼일 것인데 마리아가 무덤에 애곡하러 간 줄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따라가야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2). 마르다와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그와 함께 온 자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33). 예수님은 그들이 우는 것을 보고 통분히 여기고 한편으론 민망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조용히 위로하고 교훈하려는 의도에 맞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는지 물었고 그들이 알려 주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34-35). 그것은 예수님의 목적과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울고만 있는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슬퍼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어떤 이는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했습니다 (36).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린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했습니다 (37).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사실이 있는데 그 사실은 온 유대인들에게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선지자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이 없는데 예수님이 그런 기적을 일으켰으니 그들이 놀랄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자 나사로에 대한 애도의 눈물을 흘린 줄 알고 그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왜 그를 살리지 못하느냐는 투로 비꼬는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 마리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흐렸습니다 (33-38). 예수님이 눈물을 흘린 때는 이곳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기도 했고 (19:4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우시기도 했습니다 (5:7). 나사로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서였습니다. 부활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4. 나사로를 살리심 (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꼬는 말 때문에 비통히 여기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를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고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38-39). 예수님이 돌을 옮기지 않아도 나사로를 살릴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사로가 살아나 걸어 나오는 것을 자세히 목격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어 나흘(4)이나 되어 죽음이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썩은 냄새가 날 정도로 오래되었으니 예수님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40). 예수님은 언젠가 마르다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려는 일을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 대해서도 그런 표적을 행하실 것을 마르다에게 믿으라는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자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41-42).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들어 주셨듯이 현재에도 들어줄 것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일체성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 자신에 대한 계시를 위해 이번에도 들어주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말씀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면서 나사로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얼굴을 수건에 싼 채로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했습니다 (43-44).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른 것은 나사로가 듣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와 군중이 듣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듣도록 크게 한 것은 작은 소리로 할 경우 나사로가 나올 때 왜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기 때문이었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한 것은 나사로가 확실한 증거를 확인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도 먹을 것을 주라고 했는데 그것도 그가 살아난 증거를 주위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8:55).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첫째, 예수님이 부활을 가능케 하는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했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전갈을 받고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그것도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에 찾아가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명하여 살렸습니다. 이는 그를 통해 자신이 부활을 가능케 하는 자라는 것을 계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소재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일할 기회를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입니다 (5:24,29). 우리는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게 되었으나 (6:23, 3:23), 우리 스스로는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대속의 죽음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하셨습니다 (16:5-7).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어 부활을 가능케 했습니다 (20:19, 24:39-43, 20:6). 둘째,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인 목숨(ψυχη)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분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도 살아있는 물고기가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사망과 질병과 고난과 절망과 부패한 사회 구조를 거슬러 올라가며 황무지에서 꽃이 피듯이 희망적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므로 자신이 부활과 생명을 주는 자임을 계시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 무덤 앞에 갔을 때 사람들은 슬피 울며 심지어 예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으로 통분이 여겨 민망해 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자임을 믿지 못하는데 대해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반응하지 말고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를 믿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됩니다 (11:1).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을 주는 자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순종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믿지 못했으나 돌을 옮기라는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믿고 그의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5. 산헤드린의 음모 (45-57)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이 종합 완성의 표적인 예수님의 계시에 어떤 이는 빛에 참여하고 어떤 이는 더욱 암흑에 참여하는 파라닥스가 본문에서 크라이막스로 나타납니다. 유대인중 어떤 이는 믿고 어떤 이는 바리새인에게 고했습니다 (45-46).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모으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예수님을 잡도록 공포했습니다 (57). 그들은 전에도 예수님을 귀신들린 이단이라고 정죄했고 돌로 치려했고 그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항상 갈라짐의 현상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킵니다. 요한복음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빛에 대한 반응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은 현실적 고민에 빠졌습니다. 정치적 논리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증파군이 예루살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성전 순례객이 평소에 5만 명 정도 되었는데 유월절을 전후해서는 4배로 증가합니다. 그때 유대인의 구주 왕이 났다고 하면 유대인들이 흥분하게 되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군이 유대를 핍박하고 성전을 없앨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적 판단으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고 유대인 전체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한 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의 선언이었습니다. 요한은 주를 달되 대제사장 자연인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결정한 것을 강조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모든 백성의 죄를 사하는 구속사역을 담당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대속물로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가운데 구약의 법대로 대제사장에게 바쳐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참 생명을 주는 자임을 계시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을 얻고 죽어도 부활하게 되고 영생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려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은혜받을 자는 그 일을 받아들이고 은혜받지 못할 자는 오히려 비난을합니다. 결국 자신이 자신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