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聖經> 요한복음12:1-50

 

<序言>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 표적으로 시작하여 약 2년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것을 계시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임을 밝힌 것입니다. 이제 그 일을 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이 때 마리아의 향유 부은 사건과 입성 때 무리들의 환호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 받는 사건임을 강화를 통해 드러내고 불신한 유대인에 대해 심판을 경고합니다. 사실 시간적으로 보면 13-17장의 고별강화를 제외하면 이 본문의 사건 이후 곧바로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본문의 사건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5일 전의 일입니다. 내용구조는 마리아를 통해 영광 받으심(1-11), 따르는 무리를 통해 영광 받으심(12-19), 영광 얻을 때에 대한 설교(20-36), 유대인들의 반응(37-43),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44-50)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마리아를 통해 영광받으심 (1-11)

 

  본문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사건입니다. 예수의 기름부음 사건은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26:6-13, 14:3-9, 7:36-50). 그런데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사건은 본문의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여지지만 누가복음의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첫째, 본문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도유(塗油)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임박해서 발생한 것으로 언급되었으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초기에 발생한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본문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건은 장소가 베다니로 언급되어 있고 누가복음은 갈릴리 부근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본문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건은 향유를 부은 장본인이 마리아와 한 여자로 언급되어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죄 많은 한 여자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본문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건은 가룟 유다가 분개하여 이의가 제기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은 다만 예수님이 집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을 책망하는 기사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본문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건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기름 부은 여인에 대해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값 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라는 가사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찬송가 211). 향유를 부은 여인은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 부은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한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죄 많은 여인이라는 소문이 없었습니다. 혹시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가정할지라도 정확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를 가사에 넣는 것보다는 정확한 이름이 나올 뿐 아니라 사복음서에서 3곳이나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를 가사에 넣는 것이 더 좋을 뻔 했습니다.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6) 전에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집에 찾아가셨습니다. '베다니'(Beththany)는 예루살렘 남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감람산 동편 기슭에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전 주간 금요일입니다. 유월절은 유월절 양을 잡는 니산월 14일 오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유월절 엿새 전은 니산월 8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14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 저녁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을 드시고 15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월절 엿새 전인 니산월 8일 금요일 오전에 여리고를 출발하여 오후에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로 집에서 그 가족들과 함께 조용히 보내시고 토요일 해가 저물자 비로소 잔치가 배설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 집을 방문했습니다. 나사로(Lazarus)의 여동생은 마르다(Martha)와 마리아(Mary)가 있었습니다 (11:1-2). 그런데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2). 아마도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드는데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일에 대해 듣고 예수님과 나사로 보기 위해 모여든 것입니다 (9). 유대인들이 권위와 의식과 율법에만 치우치는 것에 식상해 하는 중에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고 많은 무리가 그를 따랐기 때문에 기득권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해왔습니다 (7:32,45, 11:47-53).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의 종교적 수장들인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로서 나사로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사람들이 나사로 일로 인해 예수님을 더욱 믿으려 하자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10-11).

 

  한편 잔치 상황을 보면 예수님이 잔치의 주인공이었는데 나사로는 그와 함께 있었고 마르다는 음식 대접을 위해 일하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 향유로 인하여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게 퍼졌습니다 (2-3).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은 것으로 나옵니다 (26:7, 14:3)질그릇을 깨트려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머리에 부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헌데 요한은 발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알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요한이 강조하려는 것은 수치를 무릅쓰고 겸손하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나드'(ναρδος) 향유는 동인도의 나르도스타키스 자타만시(Nardostachys Jatamansi)라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채취하여 추출한 향기로운 점액성 액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유대 지방에서는 재배되지 않고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 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당시 유대 지방에서는 수입을 해야 했으므로 값이 매우 비쌌다고 합니다. 이 향유는 시신에 발라 악취를 방지하는데 사용하거나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손님의 머리에 발라 최고의 예를 갖추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귀한 향품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나드 향유는 1근이었습니다. ‘에 해당하는 리트라’(λιτρα)는 파운드에 해당하는 무게 단위입니다. 나드 향유 1근은 현재 중량으로 하면 340g정도 밖에 되지 않는 무게였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가 불평한 내용을 보면 300데나리온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1데나리온(δηναριον)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20:1-2). 일꾼이 300일을 일한 금액이라면 안식일을 제외하고 계산할 때 1년 치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때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물론 최소한의 음식이기는 하지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금액이 200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하면 향유 1근이 300데나리온이라면 얼마나 고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6:37, 6:7).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를 잔치의 절정에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가룟 유다는 어찌 그 비싼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5). 가룟 유다가 그렇게 말한 것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은 자로서 돈궤에 넣은 것을 훔치기도 한 자였습니다 (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역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자로서 얼마씩 자기를 위해 착복한 것 같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허비하자 자기가 착복할 것을 생각하여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한 것이고 더 나아가 그 행위를 막지 않은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막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할 날을 위해 그것을 간직하라고 했습니다 (7). '간직하게 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완료형(τετηρηκεν -GTS)이나 과거형(τητηρηση -GNT)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직했었다’ ‘간직했다등의 뜻입니다. 그것을 감안할 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계속 간직해 왔다는 뜻입니다 (against the day of my burying hath she kept this. -KJV). 마리아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대속적 죽음을 죽으실 것을 알고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향유를 준비해 두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이 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대속적 죽음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그 대속의 효과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간직했던 향유를 꺼내어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간직해왔으니 예수님께 붓도록 그냥 두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도유 행동의 의도를 알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효과가 어떤 것인지 알고 그것을 나타내려 한 행동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나타내려 한 것으로 알고 그 행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8).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본을 보여 오셨고 그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을 도울 기회는 항상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함께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울 기회는 많이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 헌신할 기회는 항상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본문 시제로 볼 때 다음 주에 십자가에 죽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강조된 것들 중에 교훈받아야 할 것은 첫째, 우리도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칭찬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준비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부은 향유의 향기가 집안 전체에 퍼지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구속의 영향력이 각 지에 퍼질 것을 암시하려 했습니다. 아마도 말씀 듣기를 좋아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의 구속에 대해 배웠을 것이고 그 구속 사건이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 의미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일 것입니다. 혹 마리아가 그렇게 구체적인 의미에 대한 상징성을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적어도 그 행동이 그것들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책망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할 기회는 많이 있지만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헌신할 기회는 항상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치 면에서도 가난한 자 구제보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우선시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구제와 같은 선한 일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신 분인지 나타내는 것을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를 통해 그 분을 나타내고 그 분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가장 비싼 것을 드렸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해서라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옥합을 깨트린 사실을 언급한 것이 상징하듯이 우리의 육체를 드려서라도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헌신은 기회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 중에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항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제도적인 환경도 허락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씀의 깨달음과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을 때 기회를 잃지 말고 그 일을 해야 합니다.

 

 

       2. 따르는 무리를 통해 영광받으심 (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예수님이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절기를 기준으로 사역 완성의 때가 되어 직접 사역현장으로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유월절 양으로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행동을 통해 표적하심에 대한 절정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낸 모든 표적이 마리아 향유 부은 사건을 통해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때 무리들의 환호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공관복음(21:1-9, 11:1-10, 19:28-38)은 입성을 세밀하게 보고하나 요한은 무리들의 행동과 유대인들의 불신 태도를 강조합니다.

 

  ①예수님은 고난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했습니다. 타 복음서에서는 나귀를 구한 내용도 보고되었습니다. 스가랴9:9의 예언 성취입니다. 나귀를 타신 것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나귀는 사사들이나 왕들의 평화의 일을 수행할 때 사용했습니다 (5:10). 반면에 말은 전쟁터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호전적인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14:9). 그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과 평화의 사도임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21:5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으로 나왔는데 멍에는 십자가의 멍에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을 말합니다. 27절에 보면 이때를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1:29"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②대속의 고난은 승리의 사건입니다

 

  13절에 보면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타 복음서에서는 겉옷을 나귀 위와 길 위에 편 것이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종려가지만 보고되었습니다. 종려나무는 팔레스틴에서 많이 재배하는 나무입니다 (34:3).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에는 이 종려나무가 무성합니다 (15:27). 열매는 대추처럼 생긴 열매가 맺혀 사람들이 따먹습니다. 원목은 건축용으로 사용하고, 가죽은 새끼를 꼬기도 하고, 잎은 바구니를 만들기도 합니다. 초막절에는 이 가지를 꺾어 초막을 짓습니다 (23:40, 8:15). 종려나무는 성장과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인데 (92:12, 2:35), 축제 때 사용하는 것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개선의 의미입니다 (7:9). 마카비서에는 마카비 가문의 장군들이 이방 군대를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이 종려나무를 흔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입성 때 종려가지로 송축한 것은 승리의 표상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23절에 보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했습니다. 32절에는 땅에서 들릴 때라고 했습니다. 33절에는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27절의 '이 때'도 같은 때를 말합니다. '들리면'(υψοω)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킬 때만 사용합니다 (3:14, 8:28, 12:32,34). 땅에서 들리는 것은 1차적으로 지표면에서 들어 올려짐을 말하고 2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열광받음을 말합니다. 사도행전5:31에는 '높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인자로서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3:14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십자가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순간으로서 영광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כבר אנש)는 구약에서 구원자(메시야)로 예언된 자를 말합니다 (28:10-14, 삼하7:12-14, 1:26-28, 7:13-14). 24절에 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이는 헬라 이방인이 그에게 나아옴으로 증명됩니다. 이방인의 대표가 나아온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됨,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자로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본질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1:4-10에 보면 빛으로 오셨습니다 (36, 46). 하나님을 계시하는 순간입니다 (26).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입니다.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을 구원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수난의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고난, 말씀을 성취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를 드러낸 것입니다.

 

  ③십자가 죽음은 구주임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13절 하반절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였습니다. '호산나'(ωσαννα)는 시편118:25 인용으로서 '이제 구원하소서' '지금 구원하소서'의 뜻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시편118:26 인용으로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대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는 나다나엘의 고백이기도 하고 (1:49). 마가복음11:10에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로 직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모든 고침을 받은 병인들의 부름이었습니다. 이는 스가랴9:9-10의 내용입니다. 이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고 이방을 정복했듯이 예수님은 왕적인 권세로 영적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고 이방을 정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왕입니다 (49:9, 9:6-7, 11:1, 5:5, 1:1). 19절에 보면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고 했습니다. 당시 절기에 모인 군중은 20만 명에 육박했을 것입니다. 당시 모인 군중들과 나사로 표적을 보고 따라온 자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외치니 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모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 군인이 더 증파되어 오히려 해방은커녕 더 큰 속박을 가져오겠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들은 모르고 한 말이나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방인 대표인 헬라인이 그 다음 절에 찾아오게 하므로 스가랴9:10 말씀이 성취됩니다. 곧 이는 오실 구원자(메시야) 됨을 증명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이 무리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외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은 구약을 배경으로 한 메시야 칭호로서 '장차 오실 이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 것은 구속사적 의미가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개념과 정치적 개념입니다. 그들은 후에 예수님이 붙잡히게 되자 십자가에 못 박도록 외칩니다. 제자들도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6). 47-48절은 믿지 않는 불신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합니다.

 


       3. 영광 얻을 때에 대한 설교 (20-36)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유월절을 맞아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20). 이 기사는 공관복음에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 기사를 예수님의 공생애 절정에 이를 무렵에 소개함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려 합니다. 즉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하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이 헬라인들은 원래 헬라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왕상8:41-43, 대하6:32-33, 56:3-8). 본문에 나온 헬라인들은 아마도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에서 온 자들일 것입니다. 그 당시 데가볼리 지역의 이방 성읍(가다라, 거라사, 디온, 힙보 등) 들에서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이적과 권능에 대한 소문이 퍼진 곳입니다.

 

  헬라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그 중에 몇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21).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을 찾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빌립이 헬라식 이름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제자들은 이미 성전 안 쪽 깊숙이 있어서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있었고 빌립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로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빌립 밖에 만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둘이 같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22). 빌립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몰랐습니다. 성전에서 이방인을 만나므로 부정해지는 율법적 규례를 생각했을 수도 있고 성전에서 이방인을 만나므로 성전지도자들이 어떻게 볼지 걱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독단적으로 결정하기 힘들어서 안드레에게 의논하였을 것입니다.

 

  '빌립'(φιλιππος)이라는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것을 보면 그의 부친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부친은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빌립은 그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 이상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 (6:5-7). 빌립의 분석적인 면모가 여실히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빌립의 특성을 잘 보여 줍니다. 첫째, 빌립은 열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빌립은 분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열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신앙에 대해서는 열정을 부족한 자였습니다. 쉽게 믿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도무지 영적 감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14:8-9). 지적인 능력을 탁월하지만 항상 진리를 형이하학적으로만 분석하다 보니 영적인 관점을 보지 못하고 그에 대한 열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점은 복음 전도자가 되려 하는 데는 치명적 약점입니다. 둘째, 빌립은 확신하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빌립은 지나치게 현실적 감각에 명석한 동시에 영적인 감각이 없었고 영적인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깨달아 옳다고 확신하면 금방 행동으로 옮기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 "나를 좇으라" 하니 예수님을 곧 따랐습니다. 그리고는 나다나엘(바돌로매)에게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전했습니다. 이 말의 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따를 때 무턱대고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근거로 철저한 분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확신을 얻은 다음에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나다나엘도 빌립과 같은 류입니다. 빌립은 확신에 차서 달리 설명하지 않고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1:43-46). 셋째, 빌립은 장점을 잘 적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최후의 입성을 하신 날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어떤 헬라 사람 몇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빌립에게 청하였습니다. 그 때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하고 함께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12:20-23). 다른 때 같았으면 자기의 명석한 두뇌를 자신하고 혼자 일 처리를 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고 안드레의 도움을 받아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를 잘 압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에서 자기는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그들을 먹일 수 있겠다고 말할 때 안드레는 아예 머리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어린 아이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온 것을 발견하여 예수님께 데려오므로 예수님이 기적을 행했던 것을 압니다 (6:1-13). 잘난 체하지 않고 안드레를 무식하다 하지 않고 안드레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와 협력하여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장차 무수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계기를 만들어 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집사로 선택받아 전도에 힘쓴 빌립 집사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Polycrates, Papias, Clement: 6:5, 8:5, 26). 그 말이 옳든 그르든 분명한 것은 빌립은 요한복음12:20-23 사건만으로 보아도 복음 전도 사역에 크게 기여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이 유월절에 성전에 계실 때 헬라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사실을 두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했습니다 (23).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했고 (27).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28).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했습니다 (32).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찾아온 사실을 두고 때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십자가에 죽는 때를 말합니다 (33). 십자가에 죽는 것은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므로 택한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구속 사역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구주로 영광을 받는 사건입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은 물리적으로 보면 지표면에서 들림받는 순간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3:14). 땅에서 '들리다'에 해당하는 휩소오(υψοω)'높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5:31). 또한 그것은 예수님을 보내어 구속사역을 이루신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하나님은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28).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옳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했는데(31) 이는 십자가 구속이 사탄에 대해 승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이며 수치가 아니라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광을 받고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육신적으로 잘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밭의 흙속에 묻힌 다음 그 한 밀알이 다시 움을 틔워 많은 밀알이 맺히게 된다는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야 다시 부활하게 되고 그의 대속의 효과가 적용된 많은 성도들이 죄 용서를 받아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 모든 성도들을 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빌립보서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25절에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할 것을 선언하는 말씀인 동시에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도 한 알의 밀이 되어 구속 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위해 산다면 생명을 잃게 되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여 구속 사역에 이용한다면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ψυχη)은 육체적 생명인 목숨을 말하고, '영생'(ζωη αιωνιος)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삶과 사역의 목적과 가치였습니다. 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인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를 포기하고 사람의 모양으로 낮아져 온갖 고난을 받으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립보서1: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희생적으로 포기와 수고와 헌신을 해야 합니다.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있는 곳에 예수님을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고난 받는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자리로 나아갈 것인데 제자들도 고난과 죽음의 길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후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전도 사역을 할 때 고난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적극적으로 그 길을 간 것처럼 제자들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귀히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므로 높임받았습니다. 성도들도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십니다. 천국에서 상을 주어 높여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귀히 여기십니다.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이 들림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무리들은 그 말씀을 듣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그리스도가)가 다윗의 자손 가운데 올 것이고 그는 죽지 않고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이 영원히 통치하리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하7:12-13,16). 그들은 그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메시야가 육체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53:12).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빛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빛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알게 되고 예수님이 가실 곳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잠시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 어둠에 붙잡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기를 바란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믿음에는 예수님이 함께 할 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화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격이 자라나는 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순종해야 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기회 주실 때 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이 있거나 환경에 대한 섭리가 있을 때 감당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8:1에 보면 일곱째 인을 뗄 때에 반시 고요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큰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가 준비할 기회입니다. 일반적 종말 관점에서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기회가 주어질 때 믿음 준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6:2"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믿음 생활은 기회 있을 때에 해야 합니다.

 

 

       4. 유대인들의 반응 (37-43)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표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엄청난 이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1: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성경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38-40). 이사야53:1에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했고, 이사야6: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을 말씀한 것이지만 이는 또한 오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41). 유대인들이 보고도 믿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택자는 깨닫고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불택자는 깨달아 구원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택한 백성은 한 영혼도 잃지 않고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낙심치 않고 계속해서 구속 사역을 행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복음전도 사역이 외적으로만 평가되거나 외적인 열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에 대해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손익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더더욱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중에도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관리들 가운데도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의 지도급 인사 중에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3:1, 24:50). 그 외에도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출교 당할 것이 두려워 드러내 놓고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출교(excommunication)는 네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가볍게 징책하는 것, 둘째는 30일 동안 공동체의 종교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셋째, 무기한으로 출교하는 것, 넷째, 영구 출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출교를 당한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 외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고위층에 있는 관리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할 뿐 아니라 물질적 심리적 종교적 생존권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혹한 법적 처분을 두려워하여 드러내 놓고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결과였습니다 (43). 예수님은 마태복음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9:23). 바울은 사도행전14:22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쳤습니다. 맹인의 부모들은 출교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이 아들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출교당할 것을 알고도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출교를 당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처럼 예수 이름을 증거하다가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할 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21:13).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 앞에 위로와 인정을 받게 됩니다 (20:4).

 

 

       5.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 (44-50)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것이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자신을 보는 자는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4-45). 요한일서2:23"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빌립보서2: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관계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의 개념은 히브리 개념으로 볼 때 얼굴을 닮은 자이고, 재산을 물려받는 자이고, 직업을 이어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고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사역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절대 순종합니다. 빌립보서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하여 말씀하시게 하심에 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49-50).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왔습니다. 그를 믿는 자를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빛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이 범죄로 죄와 죽음과 내세에 대해 해결할 수 없어서 불안과 좌절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므로 그런 것들을 해결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앎으로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47-48절에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구원을 얻게 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이 표적과 말씀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계시하는데 그 계시를 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심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심판받을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계시가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갈라놓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심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많은 표적과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믿지 않으므로 스스로 멸망받을 자임을 드러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은혜받을 자와 은혜받지 못할 자를 드러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역대하25:16"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마샤왕이 우상을 섬기자 선지자가 책망했으나 그가 경고를 듣지 않자 하나님이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줄 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