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최후만찬

<聖經> 요한복음13:1-38


<序言>

  12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유월절 전날 밤에 마지막 저녁식사를 합니다. 그 식사는 목요일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과 만찬석상에서의 제자들의 다툼을 상세히 보고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일과 그 표호에 대한 강해를 다루었습니다. 공관복음이 객관적인 전기체로 기술했다면 요한복음은 수난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을 상세히 보고하기보다는 요한의 주관적인 신학적 의미에 중심을 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기 전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22:24). 그 논쟁에 이어 발을 씻겼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겸손과 섬김에 대한 교훈을 하려고 제자들의 발을 씻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예시로 볼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1-11), 섬김의 본을 보이심(12-20), 가룟유다의 배반 예고(21-30), 새로운 계명 주심(31-35), 베드로의 부인 예고(36-38)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유월절과 관련하여 만찬을 행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유월절에 드려지는 어린양은 하나님 백성을 구속하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12:21-24). 이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듯이 (1:29) 예수님은 사랑하는 대상자들을 위해 희생양이 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예수'(Ιησους)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 가운데서 구원할 자'라는 사실처럼 (1:21),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없애는 것이었고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죽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생애 동안 내내 그 때를 염두에 두시고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역 중에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2:4, 7:6, 30, 8:20). 이제 그의 사역이 후반기에 이르자 때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12:23, 17:1). 예수님은 그 때가 이른 것을 인식하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최후만찬은 유월절 만찬의 전승입니다 (12:1-14). 유월절에는 제사장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유대 가정들이 가져오는 양들을 죽입니다. 그 양들은 대속의 죽음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죄사함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구원과 해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것들이 예표하고 있는 대속의 죽음으로서 죄 사함과 구원을 주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호로서 성만찬을 행한 것입니다 (26:26-29, 14:22-25, 22:14-23). 상징(sign)을 행동(act)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의 연극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일시는 유월절, 재료는 밥, 참석자는 제자들, 행위는 예수님이 빵을 부숴 트리고 빨간 포도주를 부으므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월절 양이 죽으므로 이스라엘을 죄사하고 제 2의 영적 출애굽으로서 생명과 구원과 영생을 주는 것에 대한 표호인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십자가에 달려 부셔지고 피 흘리므로 그것들을 준다는 것입니다 (26:26-28).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헬라어 원문에는 2절과 3절이 바뀌어 나와 있습니다. 1절에 이어 3절이 나오고 2절은 그 뒤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신 때는 유월절 전 날 저녁입니다. 즉 유월절은 금요일이고 최후의 저녁 만찬은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에는 유월절 양을 잡는 금요일 저녁에 만찬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26:17-20, 14:12-17, 22:11). 그 차이점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설득력있는 견해는 공관복음 기자들이 유월절 전날에 있었던 만찬에 유월절 만찬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월절 만찬인 것처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내일 당장 처형될 것을 아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신 만찬에 유월절 식사의 의미를 연결하셨고 그것이 공관복음의 날짜 기록에 번영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귀가 이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롯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했습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에서는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제안했다'고 표현했습니다 (the devil had already suggested to Judas Iscariot). 가룟유다는 제자 공동체의 돈궤를 관리하는 자로서 자주 그 돈을 착복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2:6). 더욱이 그는 젤롯파(열심당)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에서 혁명적인 정치적 메시야의 모습을 발견하고 따랐던 자입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이해타산에 의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영적 상태에 있는 자였기 때문에 마귀가 그의 마음에 속삭여 제안할 때 그가 수락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룰 때가 되므로 하나님이 마귀의 역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의 배반을 막을 수 있었겠으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막지 않았을 것입니다 (3절 참조).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저녁 만찬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아 주었습니다 (4-5). 팔레스틴에서는 건조하여 먼지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거나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발이 쉽게 더러워졌습니다. 따라서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발을 씻었습니다. 만찬석에서는 주인이 종들로 하여금 손님들의 발을 씻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의 발을 씻을 차례가 되자 베드로는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6). 물론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나 감히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는데 베드로는 과감하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해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7). 예수님은 죽음 후에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고 알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39, 14:26, 16:13). 그 때에는 예수님의 세족(洗足)행위가 단순한 겸손의 모범이 아니라 구속 사역에 대한 예시였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도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8). 물론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의 구속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2 참조). 그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8). '상관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 메타’(μερος μετα)는 아랫사람이 직책이 높은 사람의 전리품이나 재물이나 영광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일컬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22:24, 삼하20:1, 왕상12:16). 이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영적 연합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진지한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자기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성급한 면이 나타난 것입니다 (18:10, 6:16-21).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10).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심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1). 당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집을 나서기 전에 목욕을 하고 오기 때문에 잔치집에서는 발만 씻으면 되었습니다. 그런 일상생활을 예로 들어 영적인 교훈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자들로서 (16:16)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매일 삶 속에서 지은 죄들만 회개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고 생명에 참여한 자는 매일 지은 죄만 회개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重生)한 자에게는 성화(聖化)를 위한 회개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처음부터 불택자로서 죄 사함과 거듭남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이미 배반할 것을 알았습니다 (18, 41:9). 이는 예수님의 세족 사건이 겸손과 섬김에 관한 모범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들의 죄를 없이하고 깨끗하게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이기도 합니다.

 

 

       2. 섬김의 본을 보이심 (12-2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이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봉사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당시에는 종이 주인의 발을 씻고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발을 씻어주게 하는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14). ‘옳으니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오페일로’(οφειλω)빚을 지다’ ‘의무가 있다의 뜻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씻겨주신 것에 대한 빚을 졌으니 다른 사람을 씻어주므로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씻김을 받았으니 그들도 다른 사람을 씻어주어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6-17). 주인이 종보다 크고 파송한 자가 파송을 받은 자보다 크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크고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크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 위치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스스로 낮아져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그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자들로서 낮아져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전도를 위해 보냄을 받아 사역을 할 때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보낸 예수님보다 높임받는 자리에 있으려 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절대로 예수님보다 높아지려 해서는 안 되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하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행복을 누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20:28, 9:35).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러 온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주어야 합니다. 첫째, 겸손함으로 씻겨주어야 합니다. 빌립보서2:5-8"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랑으로 씻겨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3: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씻겨 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더러움을 씻어 줄 수 있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희생으로 씻겨주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살전1:3). 자기의 물질과 몸과 시간과 능력 등 모든 환경을 투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나의 택한 자들'이란 12제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12제자를 사도로 삼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란 택한 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시몬(1:42)과 나다나엘(1:47)과 그 외에도 만났던 각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처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4-25). 가룟유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처럼 진실한 제자가 되기 위해 나섰겠지만 시일이 경과하면서 그의 변절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는 시편41:9의 인용입니다 (55:12-14). 이 시편들은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한 다윗의 비탄시입니다. 당시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삼하15:12, 16:15-23, 17:4,14,23). 다윗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정치 모사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비탄시를 인용한 것은 아히도벨의 배신을 가룟유다의 배신과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식탁에 앉아 떡을 떼는 자란 가장 절친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표현한 것은 가장 절친한 사람 중 하나인 가룟유다로부터 배신당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결국 아히도벨이 목매어 자살했던 것처럼 목매어 죽게 됩니다 (27:5).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배반을 미리 예고한 것은 가룟유다가 실제로 배신할 때에 예수님의 예고가 성취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됨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Weiss). 곧 예수님이 우연히 가룟유다에게 배신당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계획된 대로 된 것으로서 예수님이 계획된 구속 사역을 이루시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그런 상황이 발생해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0).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그들을 보낸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주지시켜주기 위해 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들이고 예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16: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마가복음6:10-11"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누가복음10:10-11에도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고 했습니다.

 

 

       3. 가룟유다의 배반 예고 (21-30)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①예수님은 심령이 민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찬석상에서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습니다 (21). '괴로워'(εταραχθη)는 심령이 떨리고 아픈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πνευματι)은 영(πνευμα)으로서 혼(ψυχη)과는 달리 육체의 생명을 주관하는 원리보다 좀 더 깊은 원리입니다. 혼을 도적덕 영역을 맡은 기관이라고 할 때 영은 종교적 영역을 맡은 기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적으로 가장 깊은 곳에서 비통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인 가룟유다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데 대한 번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이미 배반할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6:70).

 

  ②제자들은 누가 배반하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할 때 제자들은 누구에 대해서 하신 말씀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22). 제자들은 예수님의 선언에 혹시 자기를 가리켜 한 말씀이 아닌가 하고 두려운 긴장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22:23"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누워 있었습니다 (23).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을 말합니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직접 기명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는 자'로 기록했습니다 (19:26, 20:2, 21:7). 아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손의 의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예수님께 얼마나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나타내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요한은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당시 식사 풍습에서 자리 배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장 친밀한 사람이 자리하고 나머지는 그들 다음으로 자리하였는데 전체의 형태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자 형태였습니다. 개인의 모습은 비스듬하게 왼쪽으로 누워 왼팔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팔로 음식을 먹었으며 다리는 다음 사람의 뒤쪽으로 향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요한의 머리는 자연스레 예수님의 가슴 위치에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요한이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머릿짓(고갯짓)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게 했습니다 (24).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의지해 있는 상태로 '주여 누구니이까?' 물었습니다 (25).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고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유다에게 주었습니다 (26). 예수님이 직접 말씀으로 가룟유다를 지목하지 않고 행동 싸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당시 풍습은 식사의 주인공이 떡을 나누어 배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제일 먼저 가룟유다에게 나누어 주고 그 다음에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제일 먼저 떡을 떼어 주면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 (27). 가룟유다가 이미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알려 주기로 약속을 했을 것인데 그 일을 속히 진행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28). 단지 가룟유다가 돈궤를 맡고 있는 자였기 때문에 유월절에 필요한 물건을 사라는 말씀이거나 유월절에 구제할 것을 사라는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구속을 위한 수난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역에 충실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느 청교도 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불택자도 택자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택자도 불택자처럼 타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유다복음

 

  위경(僞經) 가운데 유다복음’(The Gospel of Judas)이 있습니다. 유다복음은 1-2세기에 있았던 이단 영지주의의 분파 가인파가 작성한 것인데,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이레니우스에 의해 처음 언급되고 4세기에 에피파니우스가 공격한 이후 사라지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학회가 미국 워싱턴DC에서 이른바 '유다복음'을 공개했습니다 (2006,3.9).

  ‘유다복음26쪽 분량의 사본(寫本)으로 그 내용은 우리가 신뢰하는 성경(정경)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판 것은 예수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은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메세지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서 예수님으로부터 다른 제자들보다 신임을 받았고,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구속 사역을 이루는 데 있어서 비밀리에 가룟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하여 팔라고 지시했고, 가룟유다는 그 일을 잘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살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자신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서 적에 의해 해방되기보다는 신임하는 친구에 의해 해방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가룟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가룟유다는 배반자가 아니라 유일하게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비밀을 계시받은 자로서 예수의 구속사역을 위해 헌신한 예수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유다복음1~2세기에 있었던 기독교 이단종파 영지주의 분파였던 가인파가 작성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그 사본이 발굴될 당시 함께 나온 다른 자료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것이기 때문이고 그 내용의 주장이 그 분파인 가인파의 주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는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영을 선하게 여기나 육은 악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신과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도 신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고,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에게 전달하는 비밀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영지주의파에는 마르시온파와 몬타누스파와 시몬마구스파와 가인파 등이 있었는데 가인파는 그 분파 중 하나입니다. 가인파(Cainites)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맏아들 가인을 숭배하는 자들로서, 가인이나 가룟유다 등 보편적으로 악인으로 인식된 인물들을 예언의 실현도구라는 관점에서 보는 자들입니다. 유다복음은 그들이 가룟유다에 대해 가진 견해를 복음이라는 용어를 덧붙여 만든 문서입니다.

  유다복음은 자의적 해석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성경(정경)에는 그가 처음부터 불택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6:24, 13:18,21). 가룟유다가 자기 욕심에 끌려 사탄(마귀)의 사주로 예수님을 팔았고 결국 자살했다는 내용뿐입니다 (26:4-5, 13:2,27, 27:5). 가룟유다가 예수의 신임 받는 제자였다는 기록과 그가 예수님의 계시에 의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기록은 정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유다복음이 위경인줄 알고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③가룟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 중 한 사람이 배반할 것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만찬석에서는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배반에 대해 경고할 때가 회개할 기회였고, 만찬석에서 지목할 때에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여 만찬석에서 바로 나갔습니다 (30) 그리고는 곧바로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을 때 사탄에게 완전히 지배되었습니다. 누가복음22:3에는 사탄이 이미 유월절 만찬 전에 들어갔다고 언급했습니다 (2-3). 본문에서는 가룟유다가 떡을 받은 후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27). 사탄이 가룟유다가 옳지 않은 마음을 가질 때 이미 역사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회개할 기회에 회개하지 않자 그를 온전히 지배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잘못된 계획을 가질 때에 이미 성령께서 말씀으로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메세지입니다. 그러다가 끝까지 고집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마음에 가진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그 때에도 회개하지 않을 땐 사탄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게 됩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고 사역에 동참하고 중요한 직책을 감당했다고 하더라도 배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이 생길 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마태복음5:25-26"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 다빈치 코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붙잡히시기 전에 12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성 만찬을 행하셨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만찬'은 그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라는 책과 영화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44개국으로 번역되어 1,600만 권이 팔렸습니다 (20065월 기준). 지구상의 모든 책 중 역사상 13번째로 많이 읽혀진 책입니다. 내용은 프랑스 파리 루블(Louvre) 박물관에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되는데 4명의 인물들이 그 사인과 관련된 비밀을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 아내와 딸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사도들이 숨기고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가 숨겼고 로마 카톨릭에서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종교단체 '프리오리 오프 시온'(Priory of Sion- 루블 박물관에서 죽은 사람은 이 단체의 교주)은 알고 있었고 그 비밀이 '레오나르도 다빈치'(Da Vinci)에게도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릴 때 그 비밀을 숨겨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고 그가 예수님의 아내이고 그가 예수님의 딸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책의 서두에 소설임을 밝히고 있지만 그 사실을 소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런 가설의 근거로 삼은 문서가 있는데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와 이집트 나끄 함마디 문서(Nag Hammadi Documents)입니다. 사해 두루마리는 이스라엘 사해 주변 쿰란에서 발견된 엣세네파(Essenes)의 문서로서 그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대부분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때였고, 그들은 종말적 메시야에 대한 대망을 가졌을 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없었습니다. 나끄 함마디 문서는 이집트 나일강 윗쪽 콥틱 교인들 유적에서 발견된 것인데 그것은 이단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의 글을 애굽어로 번역한 문서입니다.

 

 

       4. 새로운 계명 주심 (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가룟유다가 만찬석에서 산헤드린공회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만찬석에서 나가자 그가 산헤드린 공회로 찾아가 자신을 팔 것, 자신을 넘겨 줄 것, 자신을 붙잡히도록 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수난이 시작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광을 을 받았고 하나님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순간으로서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가 모든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택한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므로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구속 계획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 더욱 높이실 것입니다. 빌립보서2:9-11"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전에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21). 만찬석에서도 제자들이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십자가 죽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34). 레위기19: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한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구약의 계명에 이미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 범위 면에서 보면 옛 계명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민족적 선민에 대한 것이고 새 계명은 이방인에게까지 해당하는 것입니다. 질적인 면에서 보면 옛 계명은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이라면 새 계명은 신적이고 구속사적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택함 받은 백성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준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할 뿐 아니라 구원받을 대상을 위해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안다고 했습니다 (35). 예수님은 죽음을 내어주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15:13). 만일 제자들이 생명을 내어 주는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은 제자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된 것을 증명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4:7-13"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진리에 속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3:18-19"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끼리 뜨겁게 사랑해야 하며 구원해야할 대상자들에 대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목숨을 내어 주는 사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5. 베드로의 부인 예고 (36-38)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만찬석상에서 가룟유다가 나간 후 이미 유대인들에게 했던 말씀을 했습니다. 33절에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 가눈 곳에 베드로가 까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36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베드로는 지금은 어찌 따라갈 수 없느냐고 하면서 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37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항상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두고 한 말씀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37).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진심이었을 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3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진정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마음은 원이지만 아직 연약하여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 아래서 붙잡힐 때 잡으러 온 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예수님을 지키려 합니다 (18:10). 예수님이 붙잡힐 때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나 (14:50), 베드로는 가야바 궁전 뜰에까지 따라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려 하자 두려워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닭이 세 번 울자 예수님이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22:56-57, 62).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는 결심을 한 사람이지만 현장에서는 두려워서 자기 의도와는 달리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21) 사도행전에 보면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약속한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을 경험하고 목숨을 내놓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 정권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에비치(H.Sienkiewicz. 1846-1916)'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벌게이트역 '도미네 쿠오 바디스'(Domine quo vadis)라는 말을 착안하여 유대인들의 전승을 근거로 '쿼바디스'(1895)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후에 그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그곳에 보면 로마 원형극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짐승에게 찢겨 죽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그런 모습을 보고만 계십니까?'하고 절규합니다. 좌절한 그는 로마를 떠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주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버린 양들을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다시 로마로 올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게 됩니다.

 

<結言>

  베드로는 죽을지라도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고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은혜를 받고는 예수님의 복음 전도를 하다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심해도 그 결심대로 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는 자는 때가 되면 성령님께서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