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제자 위로

<聖經> 요한복음14:1-31

 

<序言>

  14~16장까지는 마지막 강화 가운데 첫 번째 부분으로서 '다락방 강화' '고별 설교'라 불리웁니다. 제자들은 강화도중 도마(5), 빌립(8), 유다(22)의 질문에서 나타나듯이 구속사적인 복음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의 복음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의 정치적 군림을 기대하고 그 때가 되면 권좌에 앉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18:4, 9:34, 10:35-45, 22:24). 그래서 수 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2:19, 3:14, 10:5, 12:23). 제자들의 발을 씻기므로 희생을 보여 주신 사건 (13:5)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가룟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신 것은 (13:26-38)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은 예수님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근심하며 불안해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거자로서 복음사역을 담당해야 할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자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권면으로 용기를 주며 영적 상태를 각성시키려 했습니다. 내용구조는 예수님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겠다는 약속(1-7),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하게 하겠다는 약속(7-14),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약속(15-24), 평안을 주겠다는 약속(25-31)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겠다는 약속 (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3절에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떠나가심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은 제자들이 거할 처소를 준비하러 가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제자들이 거할 처소를 마련하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갈 천국에 거할 곳을 짓기 위해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은 후에 이미 있는 천국에 가시므로 제자들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천국에 가시므로 그 대속을 믿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그와 대속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에베소서3: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② 예수님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있는 곳에 있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천국으로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믿는 자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살전4:16, 요일2:28, 22:20). 4-5절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은 천국을 말하며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 길을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그 길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③ 예수님이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할 때 자주 사용하는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는 표현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한 가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같은 용어들입니다. ''은 천국 곧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천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죽으므로 우리 모든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10, 고후5:18). 자신의 육체가 휘장이 되어 그 몸을 찢으사 열어 놓은 길입니다 (10:20, 2:8, 16:17, 2:28). '진리'는 실제를 말합니다 (αληθεια). 그림자에 대한 실존, 허상에 대한 본질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한다고 하나 그것은 다 허상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의 실체입니다.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와 율법이 지시하는 실체입니다. 그것은 요한 신학의 핵심인 로고스(λογος) 개념과 일치합니다 (1:1,14). 곧 예수님 자신이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8:32, 3:21, 8:1-2). '생명'은 구원과 영생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서 분리되므로 죽음이 옵니다. 모든 갈등과 고통이 없고 소망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얻게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10:10,28, 5:24, 3:15, 11:15, 3:4, 딤후1:1,10, 요일5:11-12). 그러므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안다면 낙망하지 않을 것이기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하게 하겠다는 약속 (7-14)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① 예수님을 안 자는 하나님을 안 자이고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했고, 9절에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11절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안다본다믿는다'는 도식입니다. 아는 것, 보는 것, 믿는 것을 같은 의미로 한 말입니다. '안다'의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ωσκω)는 오이다(οιδα)와는 달리 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하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 체험을 통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헬라철학과 영지주의(Gnosticism)에서는 신비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말하나 예수님이 말씀한 의미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인하여 연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본다'의 헬라어 호라오(οραω)는 브레포(βληπω)와 달리 사물을 가시적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깨달음)을 말합니다. '믿는다'의 헬라어 피스튜오(πιστευω)는 문자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안다고 하지만, 본다고 하지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8). 마치 유대인들이 과거 광야에서 일어났던 표적과 기사가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물리적 현세적 의미로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영적 무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질문에 대해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9). 예수님을 본 자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2:6).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1:15).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없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1:18).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인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관계론적으로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연합관계에 있으며 상호 내주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 영원히 머물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하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 항상 일치합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므로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그 의미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을 안다면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일을 아는 것입니다 (10:25, 37-38). 곧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할 것이고 그보다 큰일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2절에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과 같은 말씀의 권위도 없고 예수님과 같은 기적을 행할 만한 능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능력이 있어서 더 큰 일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구속사적 계획의 전망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복음전도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24: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이 전도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어 성령님의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와 로마까지 전파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2장에서 예루살렘에 성령님의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8장에서 사마리아에서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고 10장에서 가이사랴에서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고 19장에서 에베소에서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고 28장에서 바울이 소망한대로 로마에 도착한 내용이 나옵니다 (19:21).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제자들이 쓰임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께 붙들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제자들이 개인적인 능력 면에서 예수님보다 큰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됨에 있어 범위 면에서 예수님 때보다 크게 쓰임 받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곧 예수님이 사역할 때 보다 더 큰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보다 그리고 제자들보다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나 제자들보다 본질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계획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건으로 출발하여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도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24:47-49, 1:8). 그것은 시대적으로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이루실 계획입니다. 물론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하는 계획입니다. 구약시대에 요엘 선지자는 믿는 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2:28-30에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후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는데 베드로는 그 상황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2:16-19"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한은 종말에 믿는 자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권능이 임하여 온 세계에 복음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한계시록11:3-6"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고 했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와 같은 표적을 나타낼 것이고 선교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13-14절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15:7, 16:24). 그 일을 위해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위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예수님과 교통하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 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하기 위해 성령님의 은혜와 역사를 구하면 그와 관련된 것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9-13"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보내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떠나는 이유와 관련한 목적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3.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 (15-2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었습니다. 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서신서에서도 사랑의 새 계명을 강조했습니다 (요일2:7-1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 주어 친히 사랑의 모범을 보여 준대로 제자들도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큰 일들을 이루어 나갈 것이지만 사랑이 빠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고전13:1). 바로 사랑이 계명의 강령이며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① 예수님이 다른 보혜사를 주어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고 했습니다. '보혜사'는 한문으로 (지킬보,도울보) (은혜혜) (스승사)입니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παρα(곁에)κλητος(부름받은)의 합성어로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helper(돕는자) comforter(위로자) counselor(상담자)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입니다. 요한일서2:1"~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대언자'도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입니다. 요한일서2:1의 파라클레토스는 예수님에 대한 적용입니다. 예수님도 보혜사(παρακλητος)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을 가키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면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영원히 함께 있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해 증거합니다. 15: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고 했습니다. (5:32, 고전12:3, 16:16-17, 3:5). 성령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게 합니다. 그래서 영이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확신이 있게 합니다. 3:5~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12:3“~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로마서8: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고 했습니다 (4:6-7).

 

  둘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영'(το πνευμα της αληθειας)은 진리(αληθειας)를 문법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격으로 볼 경우 '진리이신 영'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진리이듯이 성령도 동일하게 진리라는 것입니다. 소유격으로 볼 경우 '진리의 속성을 가진 영'이라는 말이 됩니다. 성령님은 참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목적격으로 볼 경우 '진리를 전달하는 영' 혹은 '진리를 밝히는 영'이라는 말이 됩니다. 진리를 깨닫고 믿도록 역사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 번째 의미가 옳을 것입니다. 16:13에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는 사본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헬라어 합본 네슬-알랜드본과 스테판본을 보면 네슬-안랜드본(GNT)'εν πασαν τη αληθεια'로 되어 있고 스테판본(GTS)'εις πασαν την αληθεια'로 되어 있습니다. 네슬-알랜드본을 따를 경우 전치사가 ''(εν; in)인 것을 감안하면 '진리의 전 영역 안에서 인도하심'(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교훈하심'(Farrar, Fenton)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판본을 따를 경우 전치사가 '에이스'(εις; into)인 것을 감안하면 '성령님의 활동 하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Potterie)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령님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 안으로 인도함'(Morris)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터툴리안(Tertullianus)이나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헬라 고전문학에서 에이스’(εις)는 항상 역동적입니다. 26절에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진리를 제자들이 처음에는 잘 깨닫지 못했으나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객관적 계시인 말씀을 깨닫게도 하지만 개인적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고전2:10). 마태복음10:19-20"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가 생각나게 합니다. 16:8-10"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책망하시리라'의 헬라어 엘렝크세이(ελεγξει)는 엘렝코(ελεγχω)의 미래형으로서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의 의미입니다. 이는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는 것(J. Knox),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asalem Bible),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 KJV),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Convict),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는 것(공동번역) 등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세상의 죄를 폭로하고 예수님(그리스도)의 죄 없음을 증거합니다.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합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냅니다. 곧 성령님은 세상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로마서1:4,11에는 '깨끗하게 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성화를 돕습니다. 갈라디아5:16-23"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를 위해 탄식하며 돕습니다. 로마서8:26-27"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섯째, 악령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요한일서5: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곱째, 열의를 갖게 합니다. 시편51:10-12"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어 영원토록 함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함께 하였으나 십자가에 죽어 승천한 후 성령님을 보내어 그 성령님으로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16: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야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난 다음에 성령님이 오셔서 함께 할 것이니 예수님이 떠난다고 해서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떠나지 않고 그들 속에 거하기 위함이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7-18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떠나지만 성령으로 오셔서 영원히 내주하여 인도할 것이니 슬퍼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9-20절에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버릴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 재림과 제자들(성도들)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는 이중의미로서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한 말씀을 보면 성령님으로 오셔서 생명을 부여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28:20, 2:1, 1:20, 고전6:19).

 

   ②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를 예수님도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나타내리라'의 헬라어 엠파니조(εμφανιζω)'보여 주다' '알게 하다'의 의미로 성령님을 통한 현존의 체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성령의 함께 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5절에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지키는 자라야'는 늘 마음속에 간직한채 매 순간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말한 계명은 일차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합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사랑에 대한 모범을 보이신 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대 강령입니다 (10:27). 아무리 큰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고전13:1). 이차적인 의미로 율법(계명)의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외부적인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을 행하는 자는 외부적인 규례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23:23, 삼상15:22-23).

 

  22-24절에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를 나타낸다고 말하니까 유다는 어찌 제자들에게는 나타내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려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세상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말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4. 평안을 주겠다는 약속 (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평안'(ειρηνη)16:33, 20:19,21,26에도 나옵니다. '평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ειρηνη)인데 이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과 같은 의미입니다.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일상적인 인사였습니다 (삼하8:10, 왕하5:21). 평안은 평화, 번영, 안녕의 뜻으로서 평안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과 만사형통의 은혜를 주길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하나님 임재로 인한 평안이 충만하길 축복하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4:17, 왕하4:26). 이 평안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함으로 인한 행복입니다. 이차적인 의미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므로 만족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신의 성품을 잃고 죄로 인해 오는 모든 고통과 결핍 속에서 불만족과 불평등 가운데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얻고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잠시이고 유한적입니다 (2:24-26). 그것은 마치 야곱의 우물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최고의 만족과 부요를 주므로 평안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한 표적의 모든 목적입니다그것이 헬라어로 에이레네’(ειρηνη)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인 것입니다. 곧 생수, , 구원, 영생을 준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귀결 지을 때 성령을 보내주어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세상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3:17-26, 16:24-26, 12:6-7). 이 평안을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가족을 이별하고 직업을 포기한 제자들에게 확실한 증거없이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 제자들은 두려움과 근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보다 큰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結言>

  예수님은 고별강화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는 것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와서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크게 들어 사용하고 진정한 평안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사역을 하느라 때로 힘들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