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目>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聖經> 요한복음15:1-27
<序言>
14~16장은 고별강화입니다. 14장과 16장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5장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자기 선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1-11절), 제자들 간의 관계(12-17절),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18-27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1-11절)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구약성경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picture language). 그것은 왕과 백성, 지휘관과 군대,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목자와 양, 농부와 포도원 등입니다 (창48:15, 시78:52, 80:1, 사40:11, 렘31:10, 겔34:11). 예수님은 그런 그림 표현을 적용하여 자신과 제자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①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3:14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 ‘에헤이에~’(אהיח) 구조였습니다 (I am~). 예수님은 이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했습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 용법입니다 (I am~). '나는 생명의 떡이다'(6:55),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14),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1) 등의 선언입니다. 팔레스틴에서 포도나무는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함께 주된 과수로서 포도나무는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노아는 농사를 시작할 때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풍성한 수확을 나타내기 위해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고 했습니다 (창9:20). 가나안 땅에 들어간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비옥함을 증명하기 위해 포도송이를 어깨에 메고 왔습니다 (민13:27).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가정의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시128:3).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어 생활에 필요한 음료를 제공하며 포도 열매를 많이 수확했을 때 그 풍요로움에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농경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 농부였습니다. 그 때 주식은 밥과 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벼농사가 잘되어 쌀을 많이 저장해두면 행복해 했고, 배추농사나 고추농사나 콩농사를 잘해서 김장과 고추장과 된장을 담가놓으면 행복해 했습니다. 온 식구가 겨우 내내 밥과 국을 걱정없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 살았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주식은 빵과 포도주였습니다. 그래서 밀농사가 잘되어 밀가루를 많이 저장해두면 행복했고, 포도농사가 잘되어 포도를 많이 저장해 두면 행복했습니다. 온 식구가 1년 내내 빵과 포도주를 걱정없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하고 했고 특별히 참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디노스’(αληθινος)는 ‘진실한’ ‘진짜의’ ‘신뢰할 수 있는’의 뜻으로서 ‘거짓된’ ‘가짜의’ ‘모조된’ 등의 뜻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한 것은 가짜 포도나무와 반대의 의미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짜 포도나무가 아니라 진짜 포도나무, 모조된 포도나무가 아니라 실재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가짜는 당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사두개파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서기관(율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에 들어와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성전제도와 율법제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영생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것들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제도들을 이용해 자기들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유지하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자기들의 탐욕을 채웠습니다. 그 포도나무들은 가짜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진정으로 구원과 영생과 행복을 얻게 해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요3:16. 5:24, 행4:12, 16:31). 참 포도나무인 것입니다.
②제자들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했습니다.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가지’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제자들은 그 가지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포도나무의 원줄기에 붙어있어서 원줄기에서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통해 자라며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영적으로 연합된 관계에서 있어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③제자들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절에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했고,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이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 재배하는 것은 그 가지가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원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지는 원줄기에 붙어 자양분을 받아서 풍성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농부의 재배 노력에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농부는 그 가지들을 잘라버릴 것입니다. 2절에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그대로 두면 열매 맺는 가지의 햇빛을 가로막고 열매를 맺는 가지로 가야할 자양분을 빼앗습니다. 그래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열매 맺는 가지가 열매를 충실하게 맺는 데에 방해가 되므로 잘라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가져다 불을 때는 땔감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농부가 그 가지들을 잘라 버리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땔감으로 사용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욱 열매를 잘 맺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2절에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에 해당하는 ‘카다이로’(καθαιρω)는 ‘깨끗하게 하다’ ‘간결하게 하다’는 뜻으로 주변에 죽은 가지나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전지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욱 충실하게 맺을 수 있도록 열매 맺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영적 상태와 신앙적 행위를 상징적으로 말한 비유입니다 (마5:16, 갈5:22-23, 엡5:9, 히12:1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14-16장은 이른바 고별강화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대속사역을 위해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이 명령한 복음전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을 염두에 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환난과 고난이 오더라도 주의 뜻을 순종하므로 복음을 전파해야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이 참 제자인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제자 가운데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사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로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참 제자로서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려 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임재하여 능력을 부여해주고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므로 사명을 더욱 잘 감당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④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말씀으로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는 의미입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하라’의 기본형 ‘메노’(μενω)는 ‘거하다’ ‘머물다’ ‘남아있다’ 등의 뜻입니다. 곧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막1:11, 눅3:22, 요10:36). 히브리서1:3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계명’에 해당하는 ‘엔토레’(εντολη)는 ‘계명’ ‘명령’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주신 요긴한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여 말씀을 가르쳐 사명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20-24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빌2:6-11). 예수님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죽기까지 감당한 것처럼 제자들도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주신 복음전파 사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1:4,8).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기 위해 극한 고난이 올지라도 그 하나님의 뜻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마12:18, 요3:34). 제자들도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신 명령을 지키며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는 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13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했고, 요한일서5:14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기쁨이 충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예수님이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얻는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들도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 것과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미 거듭나 영적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명령한 사명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는 기쁨, 우리가 사명을 위해 구하는 것들을 주심에 대한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이 모든 환난과 고난의 현장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고후4:8-9, 6:8-10).
2. 제자들 간의 관계 (12-17절)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16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고,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3:14).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앞에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언급했듯이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는 것으로서 예수님과 연합관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그 관계가 곧 친구관계입니다. 주인이 종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고 친구 관계에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는 것처럼 예수님은 친구관계에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관계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진정한 친구 관계는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 관계는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목적, 한 가지 가치인 예수님이 맡긴 구원 사역을 위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하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목숨처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로서 다윗 편에서 보면 요나단은 원수의 아들이고 요나단 편에서 보면 다윗은 아버지의 원수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에게 아버지가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 피하게 해주었습니다. 후에 다윗은 사울왕과 왕자들이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쟁에서 죽고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비보셋이 살아 있는 것을 알고는 그를 왕궁으로 불러 왕자들과 같이 대해 주었고 그에게 사울 왕가의 종과 재산을 주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그처럼 사랑한 것은 서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것을 보고, 다윗은 요나단이 미디안 연합군을 적전상륙하여 물리친 것을 보고 서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사역은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고 협력해서 되는 것입니다. 일원들이 동일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①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예수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15절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라고 한 것은 종의 개념이 아닌 동등한 개념으로 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관계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관계입니다. 종에게는 주인의 비밀을 숨기지만 친구에게는 말합니다. 참 친구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고 얻고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신령한 모든 비밀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칭했습니다 (대하20:7, 사41:8, 약2:23, 히11:8, 17, 창12:1-3, 13:14-18).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했습니다 (출33:11, 히11:24-26, 출3:3-7).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하고 했습니다 (요11:11, 27, 25-26).
②친구가 되려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제자들에게 참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친구관계를 유지하려면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가 참 친구이며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며 주님이 가까워 집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롬8:17).
③친구가 되려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12-14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17절에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증거이며 예수님의 친구된 증거입니다 (13:34, 요일4:7-21, 마12:50).
3.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 (18-27절)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8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이 전제된 것입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κοσμος, world)은 물질과 우주, 인간 문명과 문화, 사단이 역사하는 영역 등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제자, 성도들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고난을 받게 될 것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마24:21-22, 10:16-18,23, 요16:33, 마10:36, 요15:9, 행14:22, 딤후3:12). 갈라디아4:29에는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려면 핍박이 옵니다. 그 핍박이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모친과 제자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상이 여길 것이 아니라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상이 큽니다 (요일3:13, 막13:13, 마5:11-12, 엡1:4-6).
세상이 미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절에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22-24절에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셋째,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그들과 함께 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넷째, 성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25절에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거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結言>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적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열매를 맺혀 나갈 때 하나님은 더욱 열매를 맺게 하려고 온갖 은혜를 베푸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