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目> 그리스도의 약속과 위로
<聖經> 요한복음16:1-33
<序言>
14-16장은 고별강화입니다. 본장은 그에 대한 마지막 장에 해당합니다. 내용구조는 핍박에 대한 예고(1-4절), 성령에 대한 약속(5-15절), 고난 후의 기쁨(16-24절), 마지막 위로(25-33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핍박에 대한 예고 (1-4절)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①출교와 죽이는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출교'(黜敎, αποσυναγωγος)는 예수님을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유대인의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탈무드(Talmud)에 보면 4가지 종류의 출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네지파(neziphah)인데 이는 비공식적인 징계로서 책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니두이(nidduy)인데 이는 공식적인 징계로서 30일간 종교적인 공동생활을 금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헤렘(herem)인데 이는 무기한 동안의 출교로서 이 징계를 받는 사람은 모든 사교적 교제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마치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외면을 당했고 그가 죽을 경우 가족들이 애곡하거나 장례식을 할 수 없고 다만 시체만 매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삼마타(shammattah)인데 이는 영구적인 출교로서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축출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백성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2:42, 마10:17-18). 어느 시대에나 참 신자는 타락한 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합니다. 갈라디아4:29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했습니다 (마10:21-22). 이삭, 야곱, 요셉, 예수님, 제자들, 종교개혁자들, 일제 때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는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②박해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핍박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박해를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섬기는 일의 결국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핍박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열심으로 핍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담대하게 핍박을 합니다 (행7:57-60, 9:1-2, 26:9-12). 유대인들의 박해, 사울의 백해, 로마 카톨릭의 박해, 영국 국교회의 박해가 그 예입니다. 무지에서 나온 열심인 것입니다.
③예수님이 미리 박해를 예고한 것은 그 때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고, 4절에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박해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박해를 당할 때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알고 준비하는 자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고난당할 것을 각오하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25:1-13, 계13:11-18). 바울은 사도행전20:23-24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고, 21:13에서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고 했습니다.
2. 성령에 대한 약속 (5-15절)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①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약속했습니다.
5-6절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해서 근심하고 두려워 했을 것입니다. 7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떠나는 것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야 보혜사 성령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한문으로 保(지킬보, 도울보) 惠(은혜혜) 師(스승사)입니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는 곁에(παρα)와 부름받은(κλητος)의 합성어로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돕는자(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or)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②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첫째, 세상에 대해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8절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죄에 대해 책망합니다.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고 했습니다. 죄(αμαρτια)는 일반적으로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 곧 계명에서 빗나간 행위에 대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유대인의 죄(15:22,24)를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세상의 죄를 말한 것입니다 (8:24). '책망'(ελεγξει)은 죄를 깨닫게 하고 잘못을 깨닫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합니다. 또한 의에 대해 책망합니다. 10절에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행7:2, 롬10:3). 그들의 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드러내고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판에 대해 책망합니다.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임금은 심판받았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세상 임금은 사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12:31, 14:30). 사탄의 세력에 대한 심판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마8:28, 막1:24, 3:11, 눅4:41, 행19:15). 그리고 십자가 죽음으로 심판을 했고 (히2:14) 부활로 심판을 확증했습니다.
둘째,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13절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영'(το πνευμα τηs αληθειας)은 진리(αληθειας)를 문법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격으로 볼 경우 '진리이신 영'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진리이듯이 성령님도 동일하게 진리라는 것입니다. 소유격으로 볼 경우 '진리의 속성을 가진 영'이라는 말이 됩니다. 삼위일체가 그러하듯이 성령님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목적격으로 볼 경우 '진리를 전달하는 영' 혹은 '진리를 밝히는 영'이라는 말이 됩니다. 진리를 깨닫고 믿도록 역사하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 번째 의미가 옳을 것입니다.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는 사본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네슬-알렌드본과 스테판본을 보면 네슬-알렌드본(GNT)은 'εν πασαν τη αληθεια'로 되어 있고 스테판본(GTS)은 'εις πασαν την αληθεια'로 되어 있습니다. 네슬-알렌드본을 따를 경우 전치사가 '엔'(εν; in)인 것을 감안하면 '진리의 전 영역 안에서 인도하심'(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교훈하심'(Farrar, Fenton)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판본을 따를 경우 '에이스'(εις; into)를 감안하면 '성령님의 활동 하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Potterie)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령님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 안으로 인도함'(Morris)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터툴리안(Tertullianus)이나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헬라 고전문학에서 ‘에이스’(ειs)는 항상 역동적입니다.
셋째, 장래 일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13절에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14:26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다가오는 일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알려 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것을 알게 해 주어 세대를 분별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계1:19, 4:1).
넷째,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14절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외모와 죽음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수난과 나약함으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그의 본질 곧 창조주요 구속주요 재림주요 심판주인 것을 드러내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령님은 열의를 갖게 하고 (시51:10-12, 행4:19, 7:55-, 20:23-), 성화를 돕고 (갈5:16-23, 롬8:26-27), 악령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요일5:18).
이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에게 임하셔서 내주합니다 (요3:5, 고전3:16, 12:3). 이 성령님은 밖에서도 역사하지만 (επι) 속에서 충만히 역사하기도 합니다 (εν). 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자신의 교만과 고집과 욕심과 죄를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3. 고난 후의 기쁨 (16-24절)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①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고 했습니다.
16절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수난과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보리라'는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성령강림과 재림까지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은 16-19절까지 7번 반복됩니다. 매우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히10:37, 계6:11, 약4:14, 요12:35).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긴박성과 임박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때가 왔다'고 표현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2:23, 13:1, 16:32, 17:1).
②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간다는 말을 들었으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17-18절에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극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유대교적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영원히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23절上에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16-19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하므로 예수님이 그에 대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시면 성령께서 밝히 깨닫게 하므로 질문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14:26, 16:13).
③제자들이 근심하겠지만 그들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당해 죽게 되므로 사탄에게 이용된 무리는 기뻐하게 될 것이지만 제자들은 슬퍼하고 애통하고 근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고 성령님으로 강림하여 그들 안에 거하므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 큰 기쁨이 있게 되고 (눅24:52), 예수님이 승천 이후에 성령강림으로 그 기쁨이 지속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행2:46). 그것은 마치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임박하면 근심하게 되나 아이를 낳으며 고통을 잊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21절). 근심과 고통을 잊어버릴만한 기쁨인 것입니다. 22절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 이후에 성령강림으로 그 기쁨이 지속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행2:46). 예수님이 성령님의 내주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므로 기쁨이 지속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과 그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기뻐했으나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지만 성령이 함께 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행8:8, 16:34, 눅10:20, 행2:46, 롬5:3-4), 소망도 생기게 됩니다 (빌3:10-11, 행14:22, 고후12:10, 히10:32-34, 딤후4:7-8, 롬8:18).
④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3절下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24절에도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이 예수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는 중보자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제 그 효력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예수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은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눅24:47, 행1:8).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마28:19-20). 제자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성령님의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성령님의 은혜와 은사를 구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눅11:13). 제자들은 구하는 것을 얻으므로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요한일서5:14에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4:3에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4. 마지막 위로 (25-33절)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①때가 되면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다 드러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25절에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칠 때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다른 사물이나 상황을 예로 들어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면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 성령님이 올 때는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에 관한 모든 비밀을 확실히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면 깨닫지 못하거나 애매하게 깨달은 것을 밝히 깨닫게 됩니다 (행9:1-25).
②제자들이 각기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각기 흩어지고 예수님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받을 때에 다 도망하고 맙니다 (눅8:28).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던 자들도 다 달아나게 됩니다 (마26:56). 말세에도 대환난 때에 믿는 자들이 대부분 무화과 열매가 대풍에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질 것입니다 (계6:12-14).
③환난을 당할 것이나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14:27). 예수님이 수난 당할 때 제자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게 되겠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32절). 제자들도 환난을 당하겠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고 성령님으로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하겠으나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로 사탄과 죄와 세상을 이겼습니다 (롬5:12,14, 딤후1:10). 예수님의 승리는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긴 것 같이 제자들도 세상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요일5:4, 롬8:37). 환난 중에도 담대하여 평안을 얻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안'(ειρηνη)은 14:27, 20:19, 21, 26에도 나옵니다.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일상적인 인사였습니다 (삼하8:10, 왕하5:21). 이것은 평화, 번영, 안녕 등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임재로 인한 평안이 충만하길 축복하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4:17, 왕하4:26).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과 만사형통의 은혜를 주길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함으로 인한 행복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의미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므로 만족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신의 성품을 잃고 죄로 인해 오는 모든 고통과 결핍 속에서 불만족과 불평등 가운데 두려워하며 삽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얻고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잠시이고 유한적입니다 (전2:24-26). 그것은 마치 야곱의 우물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최고의 만족과 부요를 주므로 평안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한 표적의 모든 목적입니다. 그것이 헬라어로 ‘에이레네’(ειρηνη)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귀결지을 때 성령님을 보내주어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세상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단3:17-26, 행16:24-26, 12:6-7). 이 평안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받을 것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도 그에 이어 환난과 핍박을 받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과 자신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을 약속했고 성령님을 통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안을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당장 앞에 놓인 어려움을 보지 말고 어려움 속에서도 그 어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했으므로 성령께서 그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을 소망하고 담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