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골로새서3:1-25
<題目> 새 사람의 생활원리
<序言>
로마서와 에베소서와 마찬가지로 본서도 교리 편과 실천 편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1-2장은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었고 3-4장에서는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교리적인 부분에 대해 상세히 노하고 이제 후반부에 들어와 본 장에서는 그 교리에 입각하여 생활 전반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장의 내용구조는 새 사람의 목표(1-11절), 새 사람의 생활(12-17절), 새 사람의 가정(18-25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새 사람의 목표 (1-11절)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①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이미 전 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11,12,20). 예수님은 택함 받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값으로 죽었습니다. 또한 그 죄 값을 완전히 치러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표원리대로 우리도 그 안에서 죄로 죽었고 그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를 믿음으로 그의 대속의 효과를 전가받아 영이 거듭났고 육체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보장받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위의 것과 아래의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의 것'과 '하늘의 것'은 영원히 남아있는 가치를 말하고 '아래의 것'과 '땅의 것'은 잠깐있다가 없어질 가치를 의미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은 삶의 목적과 목표가 내세에 영원히 남아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라는 말은 사고와 의지와 관심과 성향이 영원히 남아있는 가치를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목적과 목표 그리고 사고와 의지와 관심과 경향이 영원히 남아있는 가치를 향해야 합니다. 내세에까지 남아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님 형상을 이루는 것, 영이 자라나는 것, 신앙인격이 만들어져 가는 것,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1절에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3절에 "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데 그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얻은 영적 생명도 세상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속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세상에 감추어져 있지만 그가 다시 재림하시므로 세상에 나타내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온 세상이 그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서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의 주권자요 구원자요 심판자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 성도들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다시 살게 된 영적 생명의 본연의 가치가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고 그 영적 생명의 변화와 성장의 가치가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광'(δοξα)은 영예, 위엄, 거룩, 좋은 평가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세상이 우리의 영적 생명과 그 성장과 그것을 위해 한 모든 노력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었는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래의 것을 찾지 않고 위의 것을 찾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래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제 영원한 가치에 소망과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눅12:16-21, 고전3:12-15, 마13:44,45-46).
②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이 되었습니다 (3절, 2:20).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죄 용사와 칭의와 양자와 중생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화입니다. 이 성화(聖化,Sanctification)는 중생한 영의 성장을 말하는데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하기도 하고 신앙 인격이 자라난다고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간다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간다고도 표현합니다 (빌2:12, 벧후3:18, 롬8:29, 갈4:19, 엡4:13). 그것은 죄성을 점점 벗어 버리고 말씀대로 점점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옛 생활을 죽이고 새 사람과 새 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마땅히 옛 사람을 죽이고 옛 생활을 끊어 가야 합니다.
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τα μελη υμων τα επι τηs γηs)는 문자적으로는 땅에 있는 사람의 각 부분을 말하지만 의미상으로 보면 이어서 나오는 단어들이 나타내 주듯이 인간 마음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한 행위나 그 죄성의 부분들을 의미합니다 (막7:21-22, 롬1:29-31, 고전5:11, 6:9-10, 갈5:19-21, 살전4:3). '음란'(πορνεια)는 부정한 성적 행위를 말합니다. '부정'(ακαθαρσια)은 모든 불순한 행위들을 말합니다. '사욕'(παθοs)은 성적 욕망을 말합니다. 악한 '정욕'(επιθυμα)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는 사악한 욕망을 말합니다. '탐심'(πλεονεξια)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과 욕심을 말합니다. 탐심은 죄성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탐심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잠언30:15-16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고 했습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는 생물입니다. 거머리는 두 개의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흡입관으로 다른 생물의 피를 한없이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평시에는 실날처럼 가느다란 몸으로 물을 헤엄쳐 다니지만 다른 생물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을 때는 몸이 손가락처럼 굵어져 구를 정도가 됩니다. 거머리는 계속 '다오' '다오' 합니다. '다오'에 해당하는 '아하브'(יהב)는 '주다'(give)는 말입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계속 더 먹으려 합니다. '스올'(שאול)은 무덤이나 음부나 지옥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음역입니다. 거머리, 음부, 태, 땅, 불과 같이 족한 줄 알지 못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러시아에 1,000루블(Rub)만 내면 하루에 걸은 만큼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1,000루블은 러시아 화폐로서 지폐로 나와 있습니다. 한 농부가 그 소식을 듣고 그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소문대로였습니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밤을 지새우고 해가 뜨자 마자 출발했습니다. 내일이면 자기 땅이 될 것을 생각하며 성급히 걸으면서 말뚝을 박았습니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엄청난 말뚝이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 앞에 놓인 땅을 보자 욕심이 더 생겨 힘껏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으로부터 너무 멀리 갔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는 숨 쉴 틈없이 달렸습니다. 그러나 도착하자 마자 쓰러졌습니다. 그토록 탐하던 땅을 소유하는 순간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람들이 그의 묘 자리로 쓰기 위해 괭이로 6자의 땅을 팠습니다. 그 정도면 그를 묻기에 충분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자신을 죽게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한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탐심 자체가 우상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탐심이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할 때 그것은 이미 신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탐심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원인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주변국들에게 섬기던 우상을 섬긴 원인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고대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들은 모두 자신들의 욕망에 대한 반영으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주신은 바알(Baal)과 아세라(Asherah)였는데 농경신으로서 풍요와 다산의 우상이었습니다. 바알을 강한 남성 상체에 소의 머리를 한 형상이고, 아세라는 아름다운 여성상인데 가슴이 여러 개 달려 있는 형상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백성들은 대부분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로서 목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농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가나안 정착하여 살 때는 농사를 해야 했는데 종사를 잘 지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도 농사를 잘 지어서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숭배하던 우상을 함께 숭배한 것입니다. 조상 신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는 광야에서 목축을 잘하게 해 준 신이고 이제 가나안에서는 비를 주관하여 농사를 잘하게 해 주는 바알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탐심은 다른 것을 신으로 섬기게 하는 요인인 것입니다. 셋째, 탐심이 우상숭배처럼 큰 죄를 짓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도 탐심과 관련이 되어 있고 탐심에 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중 열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로서 탐심에 관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열번째 계명은 첫번째 계명에서 아홉번째 계명을 짓게 되는 근본원인을 제시하는 계명일 수도 있습니다. 탐심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모든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6절에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중 1-3계명이 우상숭배와 관련된 계명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 행위는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를 일으킵니다. 출애굽기20:5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아래 있을 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제전의식을 행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고 그들을 진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32:10).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시대에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 가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심 때문에 범죄하고 욕심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하와, 발람, 아간, 사울, 다윗, 게하시, 가룟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도 욕심 때문에 범죄하고 망한 사람들입니다 (창3:6,민22:16-17, 수7:1,21, 삼상15:3,9, 삼하11:2-4, 왕하5:22-23, 요12;4-6, 행5:1-3). 야고보서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4:19, 눅23:28). 디모데전서6:9-10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목적과 합법적인 방법으로 좀더 나은 지위를 얻고 좀더 나은 생활을 하려는 욕구는 가지되, 얻는 것 자체를 목적하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그것을 얻으려는 욕망은 철저히 제어해야 합니다.
③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7-8절에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살 때에는'에서 '그'는 5절에서 말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 등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지체'로 표현된 죄성(죄의 성품)을 말합니다. 9절에는 '옛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데 그것도 죄성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 살 때에는'은 골로새교인들이 믿기 전에 죄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 때를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는 골로새교인들이 믿기 전에 죄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 때에는 죄성으로 인한 습관적인 행동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교인들이 이제는 그것들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에 해당하는 것은 8절에 나온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이며 9절에 나온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입니다. '분함'(θυμοs) 혐오감이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노여움'(οργη)은 상대에 대한 혐오감이 격하게 행동으로 나온 상태를 말합니다 (민27:14, 신32:51, 약1:20). '악의'(κακια)은 해를 가고자 하는 모든 악한 의지와 행동을 말합니다. '비방'(βλασφημια)은 하나님께 대해 사용할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의미하고, 사람에 대해 사용할 때는 중상모략을 말합니다 (마7:1-5, 약4:11-12). '부끄러운 말'(σισχρολογια)은 음담패설이나 상스러운 말을 의미합니다. '거짓말'(ψευδομαι)은 속이는 말을 가리키며 넓게는 모든 위선을 의미합니다 (왕하5:1-27, 행5:1-11).
9-10절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은 아담에게 속한 자연인이고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거듭난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거듭나기 전 본성인 죄성을 따라 살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말하고, '새 사람'은 거듭난 후 거듭난 영의 속성인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입니다. '창조하신 이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골1:15, 롬8:29, 고전15:49, 고후4:4, 빌2:6). 그리스도인은 창조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지식'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1:9). '새롭게 하심을 입은'에 해당하는 '아나카이누메논'(ανακαινουμενον)은 현재 시상으로서 계속 새롭게 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어 거듭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과 그가 하신 구속 사역을 알게 하시고, 계속해서 하나님 뜻을 알아 그 뜻대로 살게 해 가십니다 (1:9).
11절에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 데에는 차별이 없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롬1:14, 갈3:28). '헬라인이나 유대인'은 민족적 장벽을, '할례파나 무할례파'는 종교적 장벽을,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비헬라인이나 흑해 주변에 살았던 난폭한 부족인 스구디아인(Scythian)을 말하는 바 문화적 장벽을 말하고, '종이나 자유인'은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바 사회적 장벽을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는 예수 그리스께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과 종교와 문화와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이 통일되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2. 새 사람의 생활 (12-17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①새로운 성품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거룩하게 하심을 받은 자들이고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며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자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가진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전에 있었던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성품인 죄성을 죽이고 새로운 성품인 하나님의 속성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던 죄성을 제어하고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 원리가 되어 말씀대로 인격이 만들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긍휼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겨 동정을 베푸는 성품을 말합니다. 둘째, 자비입니다. '자비'는 인자하게 친절을 베푸는 성품을 말합니다. 셋째, 겸손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추어 섬기는 성품을 말합니다. 넷째, 온유입니다. '온유'는 온순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성품을 말합니다. 다섯째,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인내로 참고 기다리는 성품을 말합니다. 여섯째, 용서입니다. 13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는 성품을 말합니다. 골로새 교인들끼리 서로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대해 서로 잘 참고 받아들여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18:22, 23-35). 일곱째, 사랑입니다. 14절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사랑'(αγαπη)는 조건없이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성품을 말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뿐 아니라 사랑도 가져야 한다는 의미라 하기 보다는 그 모든 덕목 위에 사랑을 추가하므로 사랑이 그 모든 덕목의 원인과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모든 성품과 행위를 온전하게 합니다 (고전13:1-3, 은사로서의 사랑이 아닌 기독교 정신으로서의 사랑). 여덟째, 평강입니다. 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고 했습니다.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ειρηνη)는 평안, 평강, 평화, 화평, 화목 등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용서와 사랑에 대해 이어지는 의미로 볼 때 평안이나 평강의 의미 보다는 평화나 화평이나 화목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는 목적을 말하는 것보다는 구조적 형태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몸은 교회입니다. 교회(εκκλησια)는 성도의 유기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개별적으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공동체로 구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유기적 공동체에서 함께 신앙고백을 하고 예배를 하고 교제를 하고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서도 안되고 서로 교통이 막혀도 안됩니다 (고전12:12-27). 그래서 언제나 우리 마음을 평강이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한 몸으로서 분쟁과 불화가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화평과 화목이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아홉째, 감사입니다. 15절에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앞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해 주시고 그 일원이 되게 해 주시고 서로 용서와 사랑과 화평이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라는 의미 같습니다. 다른 지체가 있으므로 인해 한 몸을 이루게 되어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따를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②새로운 행위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일 수도 있는데,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골로새 교인들 개인의 마음과 공동체의 유기적 활동에 풍성히 거하여 지배원리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하여 권면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혜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덕을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ψαλμοs)와 '찬송'(υμνοs)과 '신령한 노래'(πνευματικοξs ωδη)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은 공통점입니다. '감사함으로'에서 '감사'(χαριs)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속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섭리하신 은혜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신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깨닫거나 경험한 것을 고백하고 높이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출15:1, 계15:2-3).
③새로운 정신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17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말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근거와 이유와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를 힘입어 하라고 했습니다. 그를 힘입어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힘입어'(δια)는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이 중보 위치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3. 새 사람의 가정 (18-25절)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①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복종하라'의 기본형 '휘포탓소'(υποτασσω)는 '~에 의해, ~아래에'에 속한 '휘포'(υπο)와 '정렬하다. 배열하다'에 속한 '탓소'(τασσω)의 합성어로서 종속하다, 굴복하다, 순종하다, 복종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는 표현이 나왔듯이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종속된 자 인줄 알고 남편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언약적 관점입니다 (고전11:3, 엡5:23).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언약적 대표로 세웠고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언약적 대표로 세웠고 예수님을 모든 믿는 자의 언약적 대표로 세웠고 여러분의 남편을 여러분 가정에 대한 언약적 대표로 세웠습니다.
둘째, 창조의 관점입니다 (창2:20-23). 하나님이 남자인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만들고 그를 돕게 하기 위해 여자인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가정과 만유를 잘 경영할 수 있는 특질로 만들었습니다. 육체적으로 강한 특질로 만들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특질로 만들었습니다. 영적으로 지적이고 의지적인 특질로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그 남성을 돕기 좋은 특질들로 만들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특질로 만들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세밀하고 주밀하게 만들었습니다. 영적으로 감정이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남성은 전체를 경영하기 좋은 특질로 만들어져 있고 여성은 남성이 하지 못하는 주밀한 부분을 돕기 좋은 특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논리는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건덕의 관점입니다 (고전14:34, 벧전3:1). 당시 이방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시대이고 그것이 통념으로 굳어진 때입니다. 오히려 여성이 남성을 불순종하면 그 여성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여성이 앞장서는 것을 보면 기독교를 야만적으로 평가하여 기독교 복음을 거부하게 되고, 가정에서 믿는 아내가 안 믿는 남편을 불순종하면 그도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복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덕을 세워 복음을 증진시키고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기쁜 마음으로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합니다 (엡5:33). 이해해야 합니다. 남성은 태어날 때 여성에 비해 4-6주 가량 덜 성숙된 상태로 태어나고, 성이 다른 어머니 품에서 자라면서 5-6세 때 성 정체성이 확인될 때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되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 자신들보다 훨씬 성숙한 여학생들과 경쟁을 하면서 힘든 상태에서 부모로부터 여학생들보다 다 강할 것을 요구받으면서 힘들어하고, 청소년기가 되면 가정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성년이 되어서는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다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나이가 들면서 꼭 직장을 잃지 않았어도 사업에 실패하지 않았어도 미래에 대한 불안한 암시를 느끼면 두려워 합니다. 더욱이 남편과 자녀에게 예전처럼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회의를 느끼며 인생을 포기하려 합니다. 나무 위에 떼를 지어 지저귀어야 할 참새가 홀로 광야에 버려져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대상인 대한민국의 남자들 가운데 중반에 속한 자들입니다.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에 비해 2-3배 많고 그 중 80%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합니다. 얼마나 우리 남편들이 겉으로는 강한 것 같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힘든 가운데 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기 위해 인정해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자존감을 높여 주기 위해 존경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②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사랑은 '아가페'(αγαπη)로서 '에로스'와 구분됩니다.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표현을 소극적으로 표현한다면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지'의 기본형 '피크라이노'(πικραινω)는 '쓰라리게 하다' '비참하게 만들다'입니다.
첫째, 언약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남편이 언약적 대표로서 남편이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적 계대를 이어 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편 혼자서 언약적 계대를 이을 수 없습니다. 아내의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3:7에서 "남편들아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 받을 자로 알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창조 원리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남자인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비뼈로 아내인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돕는 배필로 만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없으면 외로워서 안정을 얻을 수 없고 에덴동산을 관리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 때는 모든 면에서 기능적으로 남자에게 없는 특질을 부여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이 보지 못하고 하지 못한 세밀한 부분을 잘 볼 수 있게 했고 남성이 느끼지 못한 감정적인 부분을 강화시켰습니다. 남성이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도록 크고 넓은 시야를 가졌지만 모든 일이 큰 부분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외로 작은 부분을 놓쳐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도움을 받아야 행복하고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신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7에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여 불화하면 신앙생활과 사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의 사역, 개인의 영성을 위해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5:25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는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사랑은 모두 아가페(αγαπη)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서5:33에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서로 존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심리적으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말할 정도로 다릅니다. 여성은 남성을 보필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부분적이고 세부적이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3:7에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지라도 아내에게는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고 통제나 압제나 학대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성을 괴롭히는 남성은 한결같이 사랑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편의 인성이 왜곡되어 있을 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잘못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 여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이거나 생각지 않아서입니다. 여성이 모든 사고와 심리에 있어서 남성과 다른데 그것을 생각지 않고 남성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여성에게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본문 골로새서3:19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적극적인 표현이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절대부권(patria potestas)에 대한 법률이 있어서 가장이 가족을 마음대로 할 권한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이 아내와 자녀를 팔 수도 있고 종으로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학대는 보편적이었고 관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로마시대를 살면서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도 구약의 언약적 관점을 오해하여 여자를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종교 윤리적 규율을 기록한 미드라쉬(midrash)에 보면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번씩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기도문의 내용은 "하나님 제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잠재적으로 그런 영향이 있어서 사람의 수를 셀 때에 여자는 수에 치지 않았습니다 (마14:21, 15:38). 초대교회 당시에 아내들은 말없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국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유교사상이 지배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유교에서 말하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여성을 비하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서 남성들이 여성을 종으로 여기거나 소유로 여깁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성경을 그 핵심인 언약적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혹은 그것을 오해하여 해석했습니다. 또한 언약적 관점으로 기록된 핵심 내용의 배경으로 나온 유대의 남성 우월 사고를 여과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2-3장과 고린도전서14장과 베드로전서3장과 에베서소5장과 골로새서3장 등의 성경을 근거로 여성을 원죄의 원인자로 규정하고 여성을 남성의 종속된 자로 말하고 여성은 어떤 경우에라도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심지어는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신앙적인 여성 지도자가 많이 나오고 여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대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여성이 성경 열독률이 높고 여성이 심리적 변화와 영적 변화에 더 빨리 반응하고 여성이 교회에서 수가 배나 많고 여성이 남성에게 나타나지 않은 은사들을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비하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성경은 창조 과정과 언약적 위치를 말한 것이고, 당시 폐단을 드러낸 교회의 상황과 당시 사회적 모순을 염두에 둔 윤리적 권고이고, 불신 남편을 구원하기 위한 신앙적 권고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언약적 위치로 보면 남편이 머리이지만 그것이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차이를 오해하여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여성과 남성이 인격적 권리에 있어서는 동등한 것입니다. 여성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여성의 기능적 특성을 비하하거나 여성을 남성 관점에서 대하면 여성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여성을 실생활에서 괴롭게 해서는 안되고 쓰라리게 해서는 안되고 비참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남성은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 남성과 함께 생명의 유업을 이어갈 자로, 남성을 보필하여 남성의 부족한 점들을 채워줄 자로, 함께 주의 사명을 이루어가야 할 동역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성은 남성을 하나님이 세운 가장임을 인정하고, 그가 가정을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존경하고, 그가 쓰러지면 온 가족이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순종으로 자존감을 높여 주어야 하고, 그가 강건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③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순종하라'에 해당하는 '휘파쿠에테'(υπακουετε)는 '따르라'는 명령형으로서 거의 강제적인 표현입니다. 영어성경들에서는 '복종하라'의 의미인 '오베이'(obey)로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녀들은 죄에 관한 악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 순종(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스테판본(GTS)에서는 '토 퀴리오'(τω κυριω)로 되어 있어 '주께'로서 주께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니들판(GNT)에서는 '엔 퀴리오'(εν κυριω)로 되어 있어 '주 안에서'로서 주 안에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한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둘 다 적용이 가능한 의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주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서 주를 기쁘게 하는 자이며 (요14:21,요일5:3), 동시에 주 안에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부모를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처럼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 모든 일에 행동으로 순종하려면 마음으로 공경함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해 좋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원망과 분노와 증오의 마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6:1-2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순종과 공경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순종하다'의 '휘파쿠오'(υπακουω)는 '주의 깊게 듣다' '따르다'는 뜻으로 주로 행동으로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공경하다'에 해당하는 '티마오'(τιμαω)는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는 뜻으로서 마음의 태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곧 부모를 존귀하게 여기고 가치있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내면의 부모에 대한 상(像,image)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서울 서강대학교 교육학 강의에서 아버지에 대한 단상을 써오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제출한 단상에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긍정적으로 묘사한 글이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남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더 심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에 대해 좋게 평가한 남학생은 30명중 3~4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아버지가 너무 싫다' '아버지가 무섭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때가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 발표된 '2015년 노인학대 현황보고서'를 보니 학대자 유형에서 친족이 69.6%(아들36.1%, 배우자15:4%, 딸10.7%)였습니다. 결국 자녀가 46.8%로 절반에 가깝습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자녀가 보모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부모를 학대하게 만듭니다.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상은 부모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선 자신의 인성이 건강하지 못해 자신이 심리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게 만듭니다. 심지어 목회자나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버랩되어 신앙생활을 왜곡되게 하기도 합니다.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혹행위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아버지는 술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에서도 초등학생인 어린 민순씨의 머리를 곡갱이로 내리찍었습니다. 민순씨가 그 아버지 밑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자기 어린 딸에게 가혹행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3살 된 아이가 죽음 직전까지 가 새파랗게 질릴 때까지 학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눈빛으로 아버지와 같은 포즈로 어린 딸을 폭행하였습니다. 딸을 죽이려 하면서도 딸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 있었지만 아버지를 용서했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정말 중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가 작은 엄마를 얻어 살림을 따로 차렸습니다. 자연히 형편은 쪼들리게 되고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는 4대가 모여 사는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됩니다. 하루도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도록 힘든 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공부를 못해서 이런 남편을 얻었고 이런 고생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싫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고 생각하여 항상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며느리를 얻고 나서 며느리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를 구박하는 게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깐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모든 식구들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권사가 되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아버지를 용서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또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권위주의 자체였습니다. 가족들이 자기의 말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숨소리 하나도 못 내게 합니다. 극단적인 남녀차별주의였습니다. 딸 둘은 다 소용없는 것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밥이나 축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야단치는 것 아니면 쓸 데 없는 것들이라는 소리 빼고는 다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정 다른 상대를 남편으로 골랐습니다. 남편은 무조건 아버지와 달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른 남편은 아버지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난 후 이제는 지긋지긋한 아버지와 완전히 이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남편을 아버지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세우거나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가 여자여서 무시한다는 생각으로 치받는 거였습니다. 한 번 그 감정이 올라오면 남편이고 뭐고 보이지 않고 악이 받히는 것이었습니다. "절대 질 수 없어 여자의 소리를 찾아야 해 나는 절대 남자에게 질 수 없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파리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사람이지만 남편에 대해만은 단호하고 잔인해집니다. 어떤 의견이 틀렸을 때나 부부 싸움을 할 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마치 끝장을 낼 것처럼 화를 내고 싸웁니다. 사실 별일도 아닌데 의견 충돌이 있으면 며칠이 지나도 절대로 먼저 화해를 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섭다고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 마음과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아버지에게 한 번도 못해 본 말, 한 번도 못 풀어 본 억울함을 남편에게 풀어 보려고 하고 남편에게서 이겨 보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그의 눈에는 아버지로 보였던 것입니다. 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매일 술만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7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정을 꾸려 나가느라고 늘 바빴고 늘 긴장 상태로 살았고 사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경험을 하지 못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결혼생활과 직장생활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을 거절의 표시로 해석을 했습니다. 15년간 금융계통에서 일을 해 오다가 새로운 직으로 옮겼는데 상황이 안 좋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암시에 극도로 예민해졌습니다. 그는 말없이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극심한 우울증로 발전했습니다. 우리가 부모 특히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거부감이나 열등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말을 했을 경우, 욕을 했을 경우, 폭행을 했을 경우, 자신의 신념을 과도하게 강요한 경우, 공부를 시켜 주지 않았을 경우, 재산을 주지 않았을 경우 등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았을 경우, 이혼을 했을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가난했다는 이유나 일찍 죽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자라서 아버지와 떨어져 사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신 데도 내면에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상이 남아 있어 분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분노를 자신도 모르게 배우자와 자녀에게 나타냅니다. 그렇게도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도 하게 됩니다. 남자인 경우 아내와 자녀에게 나타냅니다. 여자인 경우 남편과 모든 남자에게 나타냅니다. 결국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거부당한 경험 때문에 분노가 더욱 커져서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나오거나 우울증세로 자신을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내면의 아버지와 화해하고 통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평생 원망과 분노의 대상으로 붙들고 있지 말고 이제는 놓아 드려야 합니다.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우리의 판단이 흐려지게 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어떤 상황에 있었던지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부모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김삼환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소나무 껍질을 먹어서 변을 보면 안 나와서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오직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입니다. 라디오만 틀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 싸움이라면 피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둘째, 정치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무장 공비의 활동과 군부 독재를 지내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갈등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에도 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셋째, 문화적으로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관습 속에서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혼할 수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 나기도 했고 갖은 구타를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아부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지에 표준을 맞춥니다. 넷째, 신앙적으로 편협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초기에는 신학자와 선교사들이 교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목회자들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적 배려와 포용과 협력과 연합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변화를 주려 하면 두려워 합니다. 부모의 신앙관과 우리의 신앙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관은 바뀌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통적으로 겪는 사회적인 배경 외에도 개인적으로 겪는 힘든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살다 보면 자기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부모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힘든 일을 경험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려움 상황을 경험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무엘하13~18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극도로 증오하여 대적하다가 죽는 내용이 나옵니다. 압살롬은 이복형 암논이 친 여동생 다말을 강간을 했는데도 2년을 기다려도 아버지 다윗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데 분개하여 암논을 비롯한 이복형들을 죽이고 그술 지방으로 도망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불러주지 않았고, 2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도 왕궁으로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치밀하게 계획을 짠 다음에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왕궁을 점령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도망하는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마하나임 성읍까지 추격하였다가 다윗의 군대에 패하여 요압의 창에 찔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큰 아들 암논의 강간 사건 때 치리하지 못한 것은 자기가 밧세바를 범한 죄책 때문이었으나 압살롬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압살롬이 살인을 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자책으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부득불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을 때에는 요압 장군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고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전갈을 받았을 때 성루로 올라가 떨면서 고통스러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 수 없었고 아들 압살롬의 비행에 자책으로 고통스러워 했고 압살롬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을 잘 압니다. 그는 고려신학교 초대 총무 역할을 한 분입니다. 그는 전라남도 여수 애양원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 곳은 문둥환자촌입니다. 그에게는 사모님과 두 아들(손동인,손동신)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출옥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지 3년만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주도에서 좌익성향의 폭동이 있었는데 그 폭동을 진압하러 보낸 부대가 여수에서 배를 타지 않고 여수와 순천을 점거하였습니다. 그 부대에 좌익 성향의 장교들이 있어서 제주도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며 38선을 철폐하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부대와 그 부대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부터 여수 순천 지역의 군경공무원 가족과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그 때 손양원 목사 순천매산고등학교를 다니던 두 아들이 붙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같은 교회에 다니던 안재선이라는 학생에 의해서말입니다. 그 사건 후 2년만에 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섬으로 배를 타고 피난을 갔습니다. 손목사님은 나병환자들을 두고 어디를 가겠느냐며 애양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민군이 여수지역을 점령했을 때 붙잡혀 여수 미평이라는 곳에서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당시 사모님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진통 중에 손목사님의 순교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태어난 아들이 손동길이었습니다. 손동길은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작년에 그과 통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2016.5). 그의 근황을 물으니 15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그만 두고 지금은 애양원에서 기념관 안내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3번의 큰 사건(손목사님의 일제 때 투옥된 것과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죽은 사건과 6.25전쟁 때 남편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큰 충격 가운데 자신을 임신했고 출산했고 길렀기 때문에 자신도 좋은 인성을 가지지 못해서 목회를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사하게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말투와 톤을 감안할 때 부모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손동길 목사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건강한 성품을 갖지 못했고 하고자 하는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소명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문둥환자를 돌보기 위해 두 아들을 잃어 가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옳게 살았습니다. 그도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 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두 아들과 남편을 잃고 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딸 셋과 손동길 목사를 데리고 교회를 애양원 앞 동네인 학서라는 동네에 개척하여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 때 그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같이 목회를 했던 분이 박래석 목사님인데 그 분이 제게 그 손목사님 사모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미국교회에서 선교물품으로 보낸 온 청바지를 딸이 먼저 하나 챙겨서 입었다가 사모님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모님도 투철한 소명감으로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왜 자녀에게 잘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손목사님과 사모님을 생각해보면 자녀에게 잘 해 줄려고 했겠지만 그들이 가야할 소명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처지였습니다. 우리 부모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에 대해 오늘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관념에서 판단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이요 폭력인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정상적으로 가질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무엇을 잘못해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의 잘못이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이든 개인적 상황이든 우리에게 그렇게 밖에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우리에게 최선을 것을 준 것이고 오히려 그것 밖에 못해 준 것을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에 대해 상처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이혼했던 것, 가난하게 살았던 것, 어떤 행동에 대해 매질했던 것,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풍족하게 해주지 않았던 것,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했던 것, 결혼을 반대했던 것,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던 것 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는 자식인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힘든 일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잘되게 하려는 최선을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대로 해줄 수 없는 것에 스스로 괴로워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비참한 인생이 될지라도 우리는 잘되게 하려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를 가치있게 생각하고 존귀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 아래 태어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동시에 그런 부모를 이해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④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노엽게'의 기본형 '에레디조'(ερεθιζω)는 '자극하다' '흥분하게 하다' '쓰라리게 하다' 등의 뜻이고, '낙심할까'의 기본형 '아뒤메오'(αθυμεω)는 '정신없게 하다' '당황하게 하다' '무기력하게 하다' 등의 뜻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로마시대에는 사회적을 아이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라고 하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이라는 뜻으로서 절대 부권(父權)을 의미합니다. 당시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가족을 노예로 팔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 일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가 출생하면 아버지 양발 밑에 놓게 되어 있고 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그 아이를 안아 올리면 그 아이는 가정에서 길러지게 되지만 만일 그 아버지가 돌아서서 가 버리면 그 아이는 버려졌습니다. 그런 문화적 배경에서 부모는 자녀를 얼마나 학대하고 억압했겠습니까? 구약시대에는 그보다 더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동남부에 뻗어 있는 와디에르 라바비(Wadier-Rababi)라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그 곳을 '힌놈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그 곳은 황소 형상의 몰록(Moloch) 우상을 숭배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우상숭배가 극심할 때는 인신제사까지 했습니다 (왕하16:3, 21:6). 숭배자들은 그 우상이 아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준다고 믿고 그 우상의 마음을 풀어 드리기 위해 아이들의 대표로 한 어린 아이를 선정하여 드렸습니다. 그 청동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는데 숭배자들은 그 팔 아래 불을 피워 달군 다음 뜨거워진 팔에 아이를 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 이글거리는 팔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 바쳐진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처참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게 뻰 힌놈'(הנם בן גיא)라고 불렀습니다. '애곡의 아들들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후에 그것을 줄여서 '게 힌놈'(הנם גיא)라고 했습니다. '애곡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수15:8, 18:16, 왕하23:10, 대하28:3, 33:6, 렘7:31-32, 19:2,6, 렘32:35). 인신제사가 폐지 후에도 유대인들은 그 곳을 심히 혐오하여 그 곳에 죽은 동물이나 범죄자들의 시체를 버렸고 그 시체들로 인한 오염을 막기 위해 불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죽어서 죄인들이 가는 심판의 장소인 지옥을 말할 때 '애곡의 골짜기'인 '게 힌놈'(הנם גיא)을 소리 나는 대로 '게엔나'(γεεννα)라고 했습니다. 인신제사에 바쳐진 아이들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지옥이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오늘날은 그와 같은 법률과 문화는 없지만 자기의 욕망이 우상이 되어 그 우상을 위해 자녀를 고통스럽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자녀에 대해서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었으니 자녀를 믿지 않는 자연인들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첫째,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들이 낳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소유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한을 풀고 자기들이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희생했던 것을 보상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무리하게 요구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쇠뇌시키고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에는 다 다니게 하고 숨이 막히도록 공부만 시킵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지 나 잘되라고 그러냐'고 하면서 자녀의 실력은 전혀 고려 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억압합니다. 그로나 자녀들은 다 압니다. 자녀들이라고 해서 왜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직업, 학교, 성적을 갖고 싶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잘 압니다. 최선을 다하면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잘 압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면 잘할 수 있고 무엇을 할 때 기쁘고 무엇을 하면 행복할지 잘 압니다. 부모는 그 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1250°C 최고의 나를 만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은이는 '김범진', 출판사는 '중앙북스'입니다. 지은이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들어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실제적으로 다루며 기록했습니다. '슬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북이 있었습니다. 이 거북은 알에서 깨어날 때부터 제일 느렸고 그래서 이름도 '슬로우 원'(slow one)을 줄여 '슬론'(slone)입니다. 항상 뒤쳐져서 다녔고 그래서 놀림받기 일수였고 늘 가족과 남들의 비난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력에 노력을 했고 우연히 토끼와 경주를 해서 이기게 됩니다. 그 덕에 그는 유명한 신발회사에 스카웃 되어 부귀에 영화를 누리고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거북에게 토끼가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이 거북은 다시 있을 경기를 위해 거북의 세계에서 두꺼울수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등딱지를 얇게 갈아 냈습니다. 그렇게 하다못해 아예 떼어 내고 인공으로 만든 아주 가벼우면서 단단한 등딱지를 붙였습니다. 그는 거북마을의 모든 거북들과 다른 동물들의 환호와 부러움 속에서 다시 토끼와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거북만 훈련을 했을 리 없었습니다. 토끼 또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보완해서 훈련을 했습니다. 결국 거북은 3번까지 경주를 하게 되지만 모두 지게 됩니다. 이제 거북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고 좌절해 있으면서 자신의 길을 만류하던 할아버지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렸을 때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느리긴 했지만 책을 보며 조용히 있을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고, 한가지를 시작하면 느리긴 하 지만 흡족할 만큼 좋을 결과를 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자신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다시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시선, 남들이 좋아하던 것, 또 급하게 맘먹고 빠르게 행동하려 했던 것들을 고치는 데는 엄청 힘들었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자신과 동떨어진 삶이었고, 그래서 자신에게 얼마나 힘들었었는지를 알고, 끝내 자신을 되찾고 평안을 누렸고 정말 자신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를 세상에 보낼 때는 우리 자녀를 통해 이루려는 목적을 두셨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능적인 적성을 두셨습니다. 우리 자녀가 그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면 자신도 행복하고 사회에도 이바지하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가 해야 할 일을 그들에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짐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유한 기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때 가능한 자세입니다.
둘째,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해서 그것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상처받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일생의 상처가 되는 말들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키가 작다' '못 생겼다' '공부 못한다' '커서 뭐가 될래' '나무 쓸데 없어' '괜히 낳았어' 등의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 말은 자녀에게 충격과 상처가 됩니다. 열등감과 수치심이 내재되어 평생 불행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최이정씨의 아버지는 권위주의 자체였습니다. 가족들이 자기의 말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숨소리 하나도 못 내게 합니다. 극단적인 남녀차별주의였습니다. '딸 둘은 다 소용없는 것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밥이나 축내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정씨는 아버지가 야단치는 것 아니면 쓸 데 없는 것들이라는 소리 빼고는 다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정씨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정 다른 상대를 남편으로 골랐습니다. 남편은 무조건 아버지와 달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른 남편은 아버지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난 후 이제는 지긋지긋한 아버지와 완전히 이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남편을 아버지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세우거나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가 여자여서 무시한다는 생각으로 치받는 거였습니다. 한 번 그 감정이 올라오면 남편이고 뭐고 보이지 않고 악이 받히는 것이었습니다. "절대 질 수 없어 여자의 소리를 찾아야 해 나는 절대 남자에게 질 수 없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는 파리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사람이지만 남편에 대해만은 단호하고 잔인해집니다. 어떤 의견이 틀렸을 때나 부부 싸움을 할 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마치 끝장을 낼 것처럼 화를 내고 싸웁니다. 사실 별일도 아닌데 의견 충돌이 있으면 며칠이 지나도 절대로 먼저 화해를 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섭다고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 마음과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아버지에게 한 번도 못해 본 말, 한 번도 못 풀어 본 억울함을 남편에게 풀어 보려고 하고 남편에게서 이겨 보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그의 눈에는 아버지로 보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6:4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서 '주의'가 핵심입니다. 주의 방법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말씀 정신의 방법, 기독교적 방법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대할 때 자녀가 키가 작거나 못생기거나 공부를 못한다는 등의 말을 하는데 그런 시각은 동물적 육체적 정욕적 우상적 세속적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부족하게 만들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열등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창세기1:27-31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사43:1). 스바냐3:17에는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이 땅에 보낼 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완전하여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조성하여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으로 이룰 수 있는 완전한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이제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가 하나님께서 부여한 기능적 요소들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고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근거로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높은 가치를 부여해 주는 말해 해야 하며 장래에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녀는 자존감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가 될 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관점으로 돕는 것이 기독교 코칭(coaching)인 것입니다. 우리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대상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섬기는 우상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고 세속적 시각으로 상처주지 말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대해야 합니다.
현대는 탈근대사상의 시대입니다. 오늘날 모든 삶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패러다임(Paradigm)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post와 modernism의 합성어입니다. post는 반대의 개념인 '탈'(脫)의 의미이고 modernism은 근대사상을 의미합니다. 근대사상(近代思想)이란 문예부흥(Renaissance) 이후에 일어난 사상으로서 인간의 권리와 개성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존중하고 추구하고 지향하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마르크스(Karl H. Marx)에 의한 공산주의, 다윈(Erasmus. Darwin)의 진화론, 니이체(Friedrich. Nietzsche)의 허무주의, 프로이드(Sigumd. Freud)의 정신분석학 등을 절정으로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과 합리적 방법으로 그 꿈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을 거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 몰락과 동구 공산권의 해체와 동서독의 통일 등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환경의 파괴, 물과 공기의 오염, 핵사고와 전쟁의 위협 등으로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근대사상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현대사상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첫째, 상대주의(相對主義)입니다. 윤리, 종교, 예술, 철학, 건축, 문학, 삶의 방식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진리와 가치와 규범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전엔 죄악시 되던 동성애나 성전환에 대해 삶의 방식이나 성향이나 기호로 생각한다. 둘째, 다원주의(多元主義)입니다. 각 분야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나 목적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며 문화적 삶도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을 갖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인정하는 관용과 여유를 덕목으로 여깁니다. 종교다원주의도 그런 맥락에서 생긴 사상입니다. 셋째, 혼합주의(混合主義)입니다. 독특한 장르의식들이 해체되고 이질적인 장르들이 혼합되고 있습니다. '유니섹스'(unisex), '팝페라'(popera), '퓨전'(fusion), '크리티픽션'(critifiction), '팩션'(factoin) 등의 신조어들은 혼합주의로 인하여 나타난 표현들입니다. 넷째, 감성주의(感性主義)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이성보다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행동합니다.
이 시대에 자녀에게 중요한 것은 감성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리더가 되려면 건강한 감성(感性)을 가져야 합니다. 감성은 영어로 EQ(Emotional Quotient)라고 합니다. 현대는 가치 중심이 이성 중심에서 감정 중심으로, 지성 중심에서 감성 중심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감성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첫째, 감정이 풍부해야 합니다. 지성만이 아닌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느끼고 즐기고 새로운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머지 85%는 좋은 인간관계였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갈수록 안정된 인성과 풍부한 감성을 가진 자가 성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인격과 주장과 가치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상대의 관점에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헨리 나우엔이 말하는 ‘섬기는 지도력’(Servant Leadership)입니다. 셋째, 통합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 다른 가치를 존중할 뿐 아니라 전체가 잘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각을 개인적 가치에서 상대적 가치로, 상대적 가치에서 공동체적 가치로 넓혀 가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그런 지도력을 가졌습니다.
이 시대에 자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감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보통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카리스마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영성(靈性)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동행하심과 인도하심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하나님 말씀이 그 인격에 자리하여 말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관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인생관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마크 쥬크스의 논문에 보고된 청교도 신학자 죠나단 에드워드의 7대 후손을 보면 729명 중 복음전도자가 300명, 교수가 65명, 부통령과 국회의원이 16명, 대학학장이 13명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세상적 목적으로 살아가는 한 가정의 7대손은 1,200명 중 300명이 일찍 죽었고 대부분 감옥 생활자나 알코올 중독자나 창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죠나단 에드워드 가속은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던 청교도들의 후손입니다. 청교도인들은 알파벳 A를 가르치면서 아담을, B를 가르치면서 바벨탑을, C를 가르치면서 가인을, D를 가르치면서 다윗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현재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 이른바 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s) 그룹도 그들의 후예입니다. 한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년 전에 불교 조계종의 기관지인 '불교신문'에서 최고위층 인사들의 종교 현황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독교 42명, 천주교 20명, 불교 9명 순이었습니다. 1998년 인구센서스에 나타난 종교 인구 현황이 불교 23.2%, 기독교 19.7%, 천주교 9% 순이었던데 비하면 신앙 교육을 받은 자가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세계관이 된 사람은 훌륭한 리더가 됩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그런 지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언약적인 신앙을 가진 야곱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자기 가족과 민족을 흉년 가운데서 살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이집트 궁정에서 신앙이 좋은 유모(어머니)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민족을 구원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엘리 제사장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여호야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의 선한 왕이 되어 40년 동안 치리했습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일찍 죽고 이방 땅에서 살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투철한 외삼촌 모르드개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페르시야 왕후가 되었고 페르시야에서 일시에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인을 구한 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믿음 좋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자랐기 때문에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교회 교육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딤후3:4-17). 잠언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행할 길'은 '아이의 기질과 성격과 적성과 능력과 잠재력 등을 고려하라는 의미이고,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맞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가 그것을 떠나지 않으므로 훌륭한 리더가 된다는 것입니다.
⑤종들은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22-25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고 그 제도는 불합리한 제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세상이 불합리한 것 같은 제도와 풍습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그 범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구조 속에서도 주인과 종을 부자와 부부처럼 가정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인이 주인과 종의 위치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권면한 것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관리자와 직원 입장에서 각각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은지 알게 합니다. 종들은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22절). 순종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 주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가림은 주인의 눈을 속여 실제로는 주인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주인이 보기에 열심히 순종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실은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를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눈가림만 하지말고 성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사업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를 통해 종 위치에 있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살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일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으로부터 은택을 입게 한 것을 생각하며 주 앞에서 일하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13:1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3절). 비록 종의 위치에서 일을 하나 사람을 위해 사람 앞에서 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니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했습니다 (24절). 종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주인을 순종하여 성실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그 봉사에 대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께 하는 믿음으로 상전에게 충성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내세에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상을 약속하는 분은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그 상을 바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위치에서 성실히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를 주인인 상전으로 보아야 할지 종으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25절의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에서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이 에베소서6:5-9를 보면 종과 상전에 관한 권면에서 상전에 관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문도 상전에 관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에베소서6:9에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불의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심판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위치에서 성실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에 대한 내용이라는 주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13:1-2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권세자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으로 간주하여 심판한다는 말씀입니다.
사회생활 가운데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직장생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직장이나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곧 우리의 삶 가운데 직장생활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도 직장생활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직업은 노동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바른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노동관부터 정립해야 합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노동을 천시하여 일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일수록 귀한 사람으로 대접했다는데 동양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상이 있어서 우리 나라에서도 옛부터 노동을 천시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을 오직 생존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여 의식주가 해결되면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유물론적 사상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노동을 죄의 결과로 온 저주라고 생각하여 노동을 악하게 여기는 저주설도 있습니다 (창3:17~19참조). 그러나 성경은 결코 노동을 천한 것으로 가르치지 않고 신성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오히려 일하지 않는 것을 악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창1:28, 2:15, 요5:17, 출20:9, 살후3:10). 그러므로 노동을 단순히 생활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수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과 바울은 세속적으로 본다면 천한 직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13:55, 행18: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직업에도 귀천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어떤 직장이든지 직장 생활에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전10:31, 골3:17).
첫째, 관리자를 순종해야 합니다 (22절). 직장에서 직장 상사를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직장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위해 주신 터전이고 직장 상사도 하나님이 우리의 직장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세운 자들입니다. 로마서13:1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장 상사를 세우로 직장이 잘되게 해서 우리가 먹고 살 것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주의 선한 사역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직장 상사를 하나님이 세운 줄 알고 그 권세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좀 불합리한 것이 있고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리 문제만 아니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직장 상사가 어떤 일을 시킬 때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나 불합리한 일이라 할지라도 의견을 말하더라도 그것을 거절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일을 시키는 상사도 그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사도 실패를 두려워 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순종해야 하며 혹 실패하더라도 그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합니다. 그러면 상사는 인정하여 더 귀한 일에도 함께 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에는 그런 사람을 선택하고 보호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둘째,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22절). 직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성실하게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혹 그 일을 열심히 하면 또 다른 일을 더 많이 맡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적당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을 더 맡으려 하지 않는 자는 퇴출 1순위입니다. 직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평생 일을 맡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맡은 일이 비록 성에 차지 않는 일이라 해도 그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더 많은 일, 더 중요한 일을 맡깁니다.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위해 인도하는 섭리에 해당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개인 일을 하는 사람도 현재 하는 일이 시원치 않은 일이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길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위해 인도하는 섭리에 해당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그 모범을 보인 사람입니다.
셋째, 주 앞에서 하듯 해야 합니다 (23절). 직장 상사에게 주께 하듯 해야 하며 맡은 일도 주께서 시키는 일을 하듯이 해야 하고 주 앞에서 하듯이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고 주께서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하며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매사에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What Would Jesus Do?'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챨스 M. 쉘돈(Charles Monroe Sheldon) 목사가 1896년에 쓴 기독교 소설입니다. 직역하면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이지만, 우리 나라 예찬사에서 번역한 한국어 버전에는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로 번역했습니다. 거기에서 맥스웰 목사는 한 비렁뱅이가 한 말에 도전을 받고 끊임없이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설교를 하게 되고 교인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시카고 전체에 변화가 있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서 예수님을 모방해야 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카리스마가 나타나고 믿지 않는 상사도 존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다니엘, 모르드개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24절에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6:8절에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든 개인 사업을 하든 직장엘 다니든 주께 하듯이 주의 영광을 위해 하면 주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주를 생각하므로 참고 견디고 손해 본 것을 위로해 주십니다. 주를 생각하므로 희생하고 헌신한 것을 이 세상에서도 위로해 주시고 내세에서도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結言>
본 장은 기독교 가족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를 말했습니다. 남편과 아내에 대해 순종하고 사랑할 것, 부모와 자녀에 대해 순종하고 노엽게 말 것, 상전에 대해 순종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0:31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