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수난

<聖經> 요한복음18:1-40

 

<序言>

  요한복음은 수난사(受難史)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입니다 (17:1).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의 최 절정으로 볼 수 있고 모든 내용을 그 수난사적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1장은 서론, 2-12장은 수난사에 대한 암시, 13-17장은 수난에 대한 해석, 18-21장은 수난과 부활로 볼 수 있습니다. 본장의 내용구조는 예수님의 체포와 가룟 유다의 배반(1-11), 안나스의 심문과 베드로의 부인(12-27),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28-40)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예수의 체포와 가룟유다의 배반 (1-1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18장은 예수님의 체포를 둘러싼 상황이 상세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언어인 그림언어(picture language)를 통해 수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행하신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기록한 예수님의 고뇌가 그려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그렸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17:3).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동기는 간접적인 동기와 직접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간접적인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 사건(2:1-12)에서 유대교의 종교적 가치가 헛됨을 폭로하고 자신이 참 기쁨을 주는 자임을 나타냈습니다. 성전 소란 사건(2:13-22)에서 유대교에 구원이 없음을 폭로하고 자신이 성전 됨을 선언했습니다.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4:5-22)에서 유대교에 영생이 없음을 폭로하고 자신이 생수 됨을 선언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 치유(5:1-8)에서 유대교에 진정한 치유가 없음을 폭로하고 자신이 치유자임을 나타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6:1-3)에서 세상은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자신이 생명을 주는 자임을 선포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치유(9:1-41)에서 자신이 빛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능케 하고 구원을 주는 자임을 나타냈습니다. 죽은 나사로 부활 사건(11:1-44)에서 자신이 부활과 생명을 주는 자임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 표적들을 이해하는 자도 있었으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적대감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직접적인 동기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동기는 예수님의 결심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자발적인 동기의 수난입니다. 17장의 중보기도에서 나타나듯이 십자가 죽음이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성령 사역의 보장이 되므로 십자가 죽음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수난사에 있어서 요한복음의 특징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이 아버지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사건임을 부각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치적인 흥정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유월절 양으로서 참 생명을 주기 위해 감당한 주체적인 자기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난사에 대한 예수님의 자발성과 당당한 모습이 부각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 부각되었습니다. 본장에서도 체포부터(4,7,8) 심문 과정까지(34,36) 그리고 예수님의 행동과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왕권에 대한 자세한 설명(36-39) 등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17장에서 중보기도를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습니다 (1).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교외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사해로 접어드는 시내입니다. 이 시내는 우기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입니다. '기드론'(Κεδρον)이란 명칭은 '침울한' '어두움'의 뜻으로서 눈물의 골짜기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이는 성전에서 흘러 내려온 희생제물의 피가 기드론 시냇가로 유입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눈물을 흘리며 건넜던 시내이기도 합니다 (삼하15:23). 예수님도 평소에 이 곳을 지났고 그럴 때마다 흐르는 피를 보면서 유월절 양으로서의 자신을 생각했을 것이고 제자들의 배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곳에서 언급하는 '동산'(κηπος)을 마태와 마가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했습니다 (26:36, 14:32, 22:39). '겟세마네'(Γεθσημανη)'기름 골짜기' '기름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방에 올리브(감람) 나무가 많고 올리브 기름을 짜는 일이 성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22:44). 기름틀에서 기름을 짜내는 듯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 함께 간 제자들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제자들이라는 복수로 언급할 뿐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가끔 제자들과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이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자신의 체포를 둘러싸고 제사장들과 흥정하러 갔음을 알고 있었고 가룟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스스로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동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계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무리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공관복음에는 그가 무리들과 군호를 짜 예수님께 입을 맞추므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했다고 했습니다 (26:48, 14:44).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고도 사탄(마귀)의 사주를 받아 (26:20-26, 13:27) 예수님을 종 한 사람 값인 은 30을 받고 공회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26:14-15, 48). 그는 본질적으로 사탄의 자식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재정을 관리했으나 그것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12:28-29). 그는 구원사적인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세상적인 나라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도유 사건에서 그의 언행이 보여 주듯이 (12:1-8) 가난한 자의 구원과 민족적인 해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은 유대인들과 다른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21, 24:21). 물론 그 도덕적 선행 뒤에는 물질적인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2:6). 그런데 예수님이 비정치적인 언행을 하자 실망을 느끼고 적극적인 불신앙적 행위에 빠진 것입니다 (27:3-5).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불택자도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외부적으로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종교적 열심을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므로 궁극적으로는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물질과 신념을 사랑하다가 주님을 배반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딤전6:9-10, 17, 14:6, 삼상2:7).

 

  가룟 유다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3). 공관복음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했는데 (26;47, 14:43),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등과 횃불과 무기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라고만 밝혔지만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종들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군대'(σπειρα)'사람의 한 무리'라는 뜻으로 로마의 보병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한데, 당시 로마 보병 중대는 2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υπηρετης)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 이해됩니다 (Barrett, Lenski).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군사가 한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이 포함된 것을 보면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 종교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의 의도를 알고 누구를 찾는 것이냐고 했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무리들은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4-6). '내가 그니라'(Εγω ειμι)는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인지 곧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낼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무리들은 아마도 출애굽기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Εγω ειμι ο ων)70인역(LXX)을 연상했을 것이고 어떤 신적 위엄을 느끼고 물러서게 되고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신적 권위에 대한 암시는 예수님이 무력 앞에 어쩔 수 없이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승리적인 모습으로 붙잡혔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차 누구를 찾는 것인지 물었고 그들은 다시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그라고 했으니 자신을 찾는 것이면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17:12)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7-8).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도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6:56, 14:50),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제자들을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제안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10). 당시 유월절 순례자들은 먼 여행에서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칼을 휴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22:36-38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직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는 예수님의 활동이 사람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을 때이기 때문에 사역을 할 때 식사와 잠자리를 쉽게 제공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발이나 칼이 꼭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후에는 상황이 달라져 박해를 받는 때가 될 것이므로 그 때에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발이 필요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칼이 필요한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칼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전과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이 올 것이니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면서 사역을 희생적으로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칼 2자루가 있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러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2사람은 칼을 가지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붙잡히게 되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칼로 대항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바 있고 베드로 자신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배반하지 않을 것을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을 보일 절호의 기회로 알고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말고의 귀를 내리친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목을 치려했을 것인데 말고가 피하는 바람에 말고의 귀가 잘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하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11). ''은 성경에서 주로 고난에 대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51:17, 25:15-18).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잔으로 표현했습니다 (26:39).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같은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하여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예수님의 의도에 배치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26:52-54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칼 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나타나는 현상적 대응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설사 칼로 대항하여 그 무리들로부터 벗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히 하나님으로부터 12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 달라고 해서 무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기온(λεγιων)은 군대의 군단(軍團)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의 일개 군단은 보병이 6,100명이었고 말이 726필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12영 더 되는 하늘의 천군천사를 부른다면 20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측되는 무리를 제압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상황을 벗어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하여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예수님의 의도에는 배치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책망과 권면을 받았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했더라면 예수님이 대속의 길을 가야 할 것을 알고 분별력을 가져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도 달게 받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26:39). 바울처럼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면 된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1:20). 애매히 고난을 당하거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다가 오는 고난을 받으려 해야 합니다 (벧전2:20).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1:29, 3:10). 예수님과 영광받기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8:17).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10:38, 16:24).

 

 

       2. 안나스의 심문과 베드로의 부인 (12-27)

 

  요한은 마치 연극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두 장면을 번갈아 보여 주고 있습니다 (picture language). 예수님이 붙잡혀 안나스에게 심문 받는 장면을 보이는 동시에 뒤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을 샌드위치 형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해서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3절에서는 포함시키지 않은 천부장이 나왔습니다. '천부장'은 문자 그대로 1,000명의 군사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천부장(χιλιαρχος)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꼭 1,000명에 대한 지휘관으로 보지 않고 단지 로마 군병의 지휘관으로만 보기도 합니다. '안나스'A.D.6-15년 사이에 대제사장 직책을 맡은 자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두개 가문에서 나와 종신직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직은 로마가 로마에 적극적인 추종자이면서 막대한 뇌물을 주는 자들을 인정했으므로 자주 교체되었습니다. 안나스 역시 로마의 총독 그라투스(Gratus)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당시에는 안나스의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 20여 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점점 많아지자 로마의 공격을 초래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예수를 죽이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에서 폐위되었으나 전직 대제사장이었고 사위가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안나스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당시 공식적인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무리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온 곳은 안나스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19절에서 말한 대제사장은 안나스를 말합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안나스의 심문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가야바의 심문에 대해서만 언급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안나스가 예수님을 가야바에게 보내기 전 예비 심문을 한 것을 다룬 것이고 공관복음은 가야바가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심문한 것을 다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임명받은 정치적인 대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받은 대제사장 예수님을 심문한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입니다. 그림자가 실제를 심문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항상 가짜는 진짜를 핍박하고 죽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물었습니다 (19). 공관복음에 나오는 가야바의 질문은 예수님의 인격, 곧 예수님이 메시야인가에 초점이 있었으나 (26:57-68, 14:53-65, 22:54-55, 63-71). 안나스의 질문은 예수님의 의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그의 교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제자들의 숫자나 성향 그리고 그들을 불러 모은 이유 등에 관한 질문일 것입니다. 후자는 예수님이 가르치는 중심 교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가르침의 의도는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구약의 교훈에 위배된 것을 찾아내 정죄하려는 의도와 제자들의 세력을 규합해 무력적 혁명을 꾀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확인하여 정죄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안나스가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공모한 그가 전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책잡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나스의 질문에 대해 제자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의 교훈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자신은 은밀하게 가르친 적이 없고 세상에 드러내 놓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성전이나 회당 같이 개방된 곳에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 자신에게 묻지 말고 들은 자들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 (20-21). 예수님은 안나스의 질문 의도를 간파하고 자신의 교훈이 공개적이었음을 밝히므로 그의 물음 자체가 어리석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재판 원칙은 피고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고, 피고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삼을 수 없고, 다만 증인들의 증언이나 구체적인 물증 등 객관적인 타당성에 의해서만 유죄를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을 알고 있는 예수님은 안나스의 의도를 간파하고 잔꾀를 부리지 말고 적법한 방법으로 심문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안나스 곁에 있던 아랫사람은 안나스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불손하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뺨을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했습니다 (22). 예수님은 그에 대해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치느냐고 했습니다 (23). 예수님은 법적으로 옳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피고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죄인으로 선고되기 전에는 어떤 형벌이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들을 안나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나스도 침묵했습니다. 안나스는 자신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고 더 이상의 심문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당시 실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24). 공관복음에는 그 이후에 예수님이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26:57-68, 14:53-65, 22:66-71) 요한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고백 등 나타나는 신앙은 크게 부각된 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과 심판 장소와 십자가 아래까지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릎에 누울 정도로 친밀한 자였습니다 (13:23). 베드로는 무서워 문 밖에 있었으나 요한은 문 안으로 같이 따라 들어갔습니다. 요한은 실수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려는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아래까지 갔고 예수님은 그의 모친을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요한처럼 믿는 자가 교회에 들어와 줄곧 바른 길을 걷는 자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수님이 안나스가 있는 곳으로 붙잡혀 갔을 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등으로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5). 요한이 대제사장과 어떤 친분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그가 뜰로 들어갈 때에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전혀 제지를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친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의 친분 때문에 안나스 집의 뜰로 예수님과 함께 들어갔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15-16).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적정이 되어 따라 왔겠지만 문 안으로 들어갈 시도는 하지 못하고 문 밖에 있었습니다. 안에는 자신이 칼로 귀를 자른 대제사장의 종 말고도 있었겠기 때문에 자신의 신변이 노출되면 자신이 위험에 빠질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고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17). '문지키는 여종'에 대해 마태와 누가는 '한 여종'이라고 했고 (26:69-70, 22:56-57), 마가는 '대제사장의 여종'이라고 했습니다 (14:66-67). 분명한 것은 베드로에게 첫 번째 질문한 사람이 여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연약한 여종 앞에서 조차 담대하지 못한 초라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있는 곳에 서서 함께 불을 쬐었습니다 (18). 유월절은 양력으로 3-4월경이므로 밤에는 다소 쌀쌀한 날씨입니다. 팔레스틴은 일교차가 심해 낮에는 더워도 밤이나 새벽에는 매우 춥습니다. 당시에 안나스 집의 뜰에서 종들과 하속들이 불을 쬐고 있던 자리는 베드로가 몸을 숨기면서 추위를 피하는 적당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을 때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25).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 번째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하나가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 종은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로 귀를 벤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26).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 한 것입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27). 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리라는 주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3:38).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다고 했는데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26:75, 14:72, 22:62).

 

  여기에서 베드로에게 질문한 사람들에 대해 사복음서가 각기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자가 여종인데 서로 다른 사람이고 세 번째 질문자는 거기 섰던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26:69-75). 마가는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동일인으로서 여종이며 세 번째는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14:66-72). 누가는 첫 번째 질문자가 여종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익명의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22:54-62). 그에 비해 요한은 첫 번째는 여종, 두 번째는 사람들세 번째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칼에 찔린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친척관계에 있는 한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상황이 사람들을 쉽게 식별하기 힘든 때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어 뜰 안으로 들어갔던 요한의 보고가 정확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측을 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한 자들의 질문의 강도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강도가 횟수에 따라 점점 강해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태의 경우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22:59-60, 26:72).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던 맹세를 무색하게 하는 모습입니다 (26:33,35).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인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 자체를 부인했었습니다 (13:38).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단언했었습니다 (26:33).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지는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로 원수들에게 대항했었습니다 (10). 그리고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갔을 때 그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의 심문을 지켜보던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17, 25-26). 한 번은 문지기 중 한 여종에게, 한 번은 사람들에게, 한 번은 대제사장의 종 하나(말고의 일가로서 현장에서 보았던 자)의 질문을 받고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자였습니다 (16:16), 하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럼으로서 예수님을 도우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항상 방해자가 되었습니다 (16:21-23, 18:11, 26:53-54). 그래서 결국 자기에게 위험이 올 때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18:15-18, 25-27, 26:31-35). 심지어 예수님이 죽은 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1:4-8). 베드로는 택함 받은 사람이었으나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부인하게 되지만 닭이 울 때마다 회개했고 마침내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 같은 신앙고백을 했을지라도 위험과 고난이 닥치면 주님을 배반합니다. 주님이 위험에 빠질 때 주님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어도 자신이 위험에 빠질 때는 주님을 배반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죽어도 다시 산다는 신앙과 내세에 상 얻을 소망을 가져야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11:25-26, 19:29, 딤후4:7-8, 20:24, 16:33).

 

 

       3.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 (28-40)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 관정에서 새벽에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정(집정관실)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은 이방인들이 집무하는 곳이기 때문에 유대 당국자들은 그곳을 부정한 곳으로 여겨 유월절의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 빌라도 관정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서 무슨 일로 예수를 고소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행악자가 아니면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데려다가 법대로 재판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을 사형시킬 권한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은 것은 4가지였습니다.

 

   ①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3절에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메시야 대망 사상에 편승하여 종종 로마에 대한 반란과 폭동이 있어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안디오쿠스 군대가 주둔했고 유월절에는 증파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정도의 의미로 생각한 듯합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이 나온 것 같으나 공관복음의 보고를 보면 (23:2) 이 질문이 나오게 된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유대인을 미혹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지어 한 질문입니다. 빌라도는 세 번째 질문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들이 해결할 문제이고 두 번째는 유대인들이 세금 내기를 싫어했으로 싫어한 자들이 동족 예수를 고소하는 일을 믿을 수 없는 문제이므로 마지막 세 번째만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스스로 한 말인지 다른 사람의 고소 내용으로 하는 말인지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소 내용으로 한 말일진대 그 의도를 알고 있지 않느냐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②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5절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동족들이 고소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혁명을 계획한다는 정보도 없었고 끌려 온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그의 나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것임을 말한 것으로서 그의 나라에 대한 정체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세상처럼 싸워서 권력으로 쟁취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나라, 하나님의 속성과 법이 다스리는 영역인 것입니다. 만일 그런 나라라면 종들이 싸워 이런 곳에 잡혀 오지도 않았다는 단서를 제시한 것입니다.

   

   ③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37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나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자체에 자신이 왕이라는 암시가 있으므로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인도하고 은택을 줄 자입니다 (1:1, 1:3-4, 고전15:25, 19:16).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세상에 왔는데 진리에 속한 자는 그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 진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1:1-3, 14:6).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를 믿지만 빌라도는 그에 속한 자가 아니므로 알지도 못한 것입니다.

 

   ④진리가 무엇이냐.

 

  38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진리에 대해 물은 것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는 진리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진리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結言>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 과정에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적의도 없었을 뿐아니라 어떤 잘못도 없음을 알고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사면해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님을 놓아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다른 죄수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로서 유대인들의 죄가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28, 3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