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題目> 그리스도의 부활

<聖經> 요한복음20:1-31

 

<序言>

  본장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영향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제자들에게 미친 파급 효과를 점차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에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예수님의 부활 (1-18), 예수님의 현현(19-23), 도마의 의심과 고백(24-29), 본서의 기록 목적(30-31)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예수님의 부활 (1-18)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전15:3-4).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시고 당신께서 살아 생전에 예고한 대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7:14, 53:5-6, 10-12, 16:10, 16:21, 17:22-23, 9:9-10, 2:19-22, 3:18, 벧전2:24). 성경대로 죽었다가 성경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사건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에 대한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9:4-5). 특히 유대교 분파인 사두개인들은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23:8). 헬라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으면서도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플라톤(Platon) 철학에서는 이데아(Ιδεα) 세계와 물질 세계의 이원화적 이론으로 육체는 악하고 멸절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러한 유대교적 사상과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므로 복음의 중심이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가사설(假死說), 도거설(盜去說), 허위설(虛僞說), 환상설(幻象說), 착오설(着誤說)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영국의 사학자 토마스 아놀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보다 완전하게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인류 역사 가운데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①역사적 유적이 증명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정원무덤이 있습니다. 이 정원무덤은 영국군의 한 장군이 고고학적 증명을 통해 발견했는데 현재 예수님의 무덤으로 인정받고 있는 곳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히브리어로 '골고다' 라틴어로 '갈보리' 라고 했는데 그 뜻은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골고다(해골)라고 한 것은 언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Bultman).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곳 언덕의 바위가 해골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옆 벽에는 초기 기도교인들의 표식인 앵크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인데 문에는 He is not here for he is risen ('그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뜻임)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무덤 안은 비어있습니다.

 

   ②당시의 상황이 증명합니다.

 

  안식 후 첫날(주일) 새벽에 마리아를 중심한 여인들이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마태복음28:5-6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요안나, 살로메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무덤 입구를 막아 두었던 돌이 굴려져 있었고 무덤 안에 들어가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24:1-3).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시체가 없음으로 인하여 누가 훔쳐 간 줄 알고 근심하며 울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사람 모습)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하고,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죄인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28:5-6, 24:4-8, 20:2-3).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무서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빨리 달음질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희에게 직접 나타나 평안하뇨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 시체를 다른 데로 옮겨 두었거든 그 곳을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이신 줄 알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28:8-10, 20:11-18, 고전15:5-8). 베드로가 여인들에게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무덤 속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이 입었던 수의(壽衣) 세마포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같이 놓이지 않고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놓여 있더라'(개켜 있더라)는 헬라어로 엔테튀리그메논(εντητυλιγμενον)으로서, 사용하기 전 상태처럼 둥그렇게 말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세마포를 가지런히 개어 놓고 두건도 따로 개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3-7,20,27). 한편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여인들이 무덤을 떠난 이후 성중으로 들어가 대제사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천사가 내려온 일, 지진이 일어난 일, 예수님이 부활한 일 등을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파수꾼들로 무덤을 지키도록 했는데 (제자들이 훔쳐 가지 못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무서워 도망해 온 파수꾼들의 보고를 듣고 장로들과 의논하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파수꾼들에게 돈을 주며 '제자들이 밤에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말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두루 퍼져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28:11-15). 마태복음은 A.D. 7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은폐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 천사들의 증언, 예수님의 증언 세마포의 위치와 상태, 파수꾼들의 보고와 대제사장의 은폐 노력 등이 증명합니다.

 

   ③목격자들의 변화가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부활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16:9), 예루살렘에서 여인들에게(28:9),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에게(24:3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16:12), 예루살렘에서 10사도에게(24:39- 도마 없을 때), 예루살렘에서 11사도에게(20:26- 도마 있을 때), 갈릴리 해변에서 7사도에게(21:1), 갈릴리 산에서 11사도에게(28:16),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에게(고전15:7), 예루살렘에서 주의 동생 야고보에게(고전15:7), 감람산에서 승천할 때 사도들에게(16:19),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에게(9:3-6)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기에게도 보여 주셨고 예수님을 본 자가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고전15:2-8). 고린도전서는 A.D.5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를 목격한 제자들의 생활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그들은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고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24:52-53). 주의 동생 야고보는 처음엔 주를 믿지 않았지만 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7:5, 1:14). 베드로와 요한는 예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결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4:19-20). 결국 그들은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내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강제로 본 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몽둥이로 맞고 십자가에 묶여 방치된 채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칼에 칼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가마솥형을 받았으나 살아난 후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히에라볼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인도에서 몽둥이로 맞은 다음 산채로 가죽을 벗긴 다음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곤봉에 맞아 죽었습니다. 다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시리아에서 포박당해 죽었습니다 (죽임당한 방법은 정확히 모름).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사타구니에서부터 머리까지 두 동강 내는 형벌을 당해 죽었습니다. 맛디아(가룟 유다 대신 뽑힌 제자)는 이디오피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사도가 된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일을 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목격했다는 증거입니다.

 

   ④교회의 확장이 증명합니다.

 

  부활체를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할 때에 많은 무리가 은혜를 입어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정해 준 규례를 생명 내놓고 지켰고 성전에 모여 기도하며 순전함으로 예전을 행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왔기 때문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동한 교회가 오늘날엔 전 세계에 퍼져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2:41-47, 4:33-37). 로마시대 황제들의 박해, 종교개혁기 때 구라파에서 교황권의 박해와 영국 국교회 여왕의 박해,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의 박해, 소련 스탈린의 박해, 중국의 모택동의 박해, 일본의 천황의 박해, 6.25전쟁 때 김일성의 박해 등 수없는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교회를 잔해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는 없어지지 않고 가장 많은 곳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종교가 되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호텔마다 성경책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때 영국의 무신론 자였던 리틀 스톤과 길버트 웨스트는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바울의 변화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반증하기 위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동안 연구한 후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더 이상 이같은 반대자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잃어버린 죄인임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프랑크 모리슨이라는 변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할 목적으로 누가 돌을 움직였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내려 가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다가 그만 성령의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변호사의 기질을 살려 오히려 부활의 사실성을 철저히 변호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어지는 순간 인생과 세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입니다. 고린도전서15:20-22"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우리의 부활도 믿습니다. 로마서6:5,8"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8:11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11:35-38"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의 현현 (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힐 때 뿔뿔이 흩어져 각기 피신해 있었습니다 (26:56).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 예수님을 추종한 불손한 선동자들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공회의 군사들이 언제 들이닥쳐 체포하려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밀스러운 은신처에서 문을 꼭 닫고 불안한 상황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 같은 경우엔 안나스 집의 뜰에서 붙잡힐 위급한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26:31-35). 그런데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갔습니다. 부활체는 생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신령한 몸이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고도 통과하여 들어가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그런 예상을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령으로 알고 더욱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의 못 자국과 허리의 창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더욱 확신을 주기 위해 생선을 달라고 하여 먹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24:38-43"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고 했습니다. 그 때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기뻐했습니다. 슬픔과 공포와 죄책과 좌절 가운데 있는, 그야말로 평강이 전혀 없는 그들에게 평강이 임한 것입니다.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했습니다 (21).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3:34, 5:36,38, 6:57, 7:29, 8:42, 11:42, 17:3,8 ). 예수님이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의적으로 붙잡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다 속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게 하여 택한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의도에 속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복음전도에 대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전도자에 대한 권세를 주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제자들 자체에 죄를 사할 권세가 주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를 사할 권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13:20, 2:6,10). 제자들에게 죄를 사할 권세를 주신다는 것은 그들이 복음 전도를 할 때 나타나는 결과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 필연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있고 받아들이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 들인 자는 죄가 사해져 구원을 얻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죄가 그대로 있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3:36, 6:16). 이것이 천국열쇠인 것입니다 (16:19). 그것이 제자들에게 부여된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22).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베테(λαβετε)는 영접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어떤 능력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 실존으로서의 성령을 영접하여 모시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전도자 사명을 감당하려면 성령을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성령님이 함께 해야 평안과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해야 열정이 생기고 효과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세와 명령은 오늘날 예수를 믿어 제자된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전도에 대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28:19-20). 예수님이 주신 영적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28:18, 10:1, 16:17-18, 20:23, 5:14, 2:27).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이 내주(內住)하고 있습니다 (14:16-17, 고전3:16). 그분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그분의 감동에 충만해야 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요일2:27). 그래야 말씀을 알고 뜻을 분별하고 능력을 받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도마의 의심과 고백 (24-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제자들이 은신처에서 문을 꼭 닫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문을 열지 않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가운데 서서 평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생선을 먹는 것을 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24:37-43). 그런데 그때는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가 없을 때였습니다. '도마'(Thoma)'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이고 '디두모'(Διδυμος)는 헬라어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후에 도마가 들어왔을 때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자기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자기 손으로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살아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16:11). 그러기에 예수님이 들어왔을 때 유령으로 안 것입니다 (24:37). 그런데 도마는 마리아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보았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믿지 못한 것입니다.

 

  도마는 성품적으로 점액질에 속한 사람 같습니다. 서양에서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기질을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로 나누었습니다. 다혈질은 생동감이 있고 적극성을 띠어서 좋으나 실제적이지 못하고 조직적이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담즙질은 계획성이 있고 의지력이 있어서 좋으나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어서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우울질은 감수성이 있고 분석적인 면이 있어서 좋으나 지나치게 비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점액질은 실제적이고 성실한 면이 있어서 좋으나 매사에 불평하는 면이 있습니다. 만일 4종류의 기질을 전형적으로 가진 사람이 사과나무 아래 있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다면 각기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 다혈질은 그냥 좋아하며 먹기 바쁠 겁니다. 담즙질은 누가 더 먹으려고 수를 쓰는지 보고 있다가 더 먹는 놈 두고 보자 하고 벼르고 있을 겁니다. 우울질은 사과가 왜 아래로 떨어지는지 분석하고 있을 겁니다. 점액질은 자기도 함께 주어 먹으면서도 이 사과 나무 주인이 보면 큰일 날텐데... 하면서 궁시렁거릴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는 전형적인 점액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 같습니다.


  첫째, 불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 지방 예루살렘에서 사람들과 변론하시면서 자신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하자 참람된 말을 한다고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을 피하여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유대 지방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 후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제자들에게 나사로 집이 있는 유대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얼마 전에도 돌로 치려했던 곳인데 그곳으로 또 가시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11:16). 이 말은 문구대로 '주님이 죽으러 가는데 함께 가서 죽자'는 의미로 본다면 도마는 의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마가 한 말의 뉘앙스는 '그래 가자 스승이 가자면 가야지.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자고 할 때 따라 가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또 불평하면서도 따라갑니다. 점액질은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상당한 객관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실제적입니다. 그 일에 성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판단과 평가는 다른 사람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옳은 일에도 항상 문제 제기를 하고 불평합니다. 어떤 일에 자신이 앞장서서 추진해 가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불평합니다. 예리하고 객관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그 일이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 일인지 폭로하는 일에 열을 올립니다. 어떤 결정을 해도 비판합니다. 우스운 것은 그러면서도 뒤에 가보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사를 하려 할 때도 그 행사로 인한 장점보다 그 행사로 인한 단점을 분석하여 불평합니다. 그래도 그 행사할 때 보면 와서 봉사를 합니다. 무슨 이런 교회가 있느냐며 교회 옮겨야지 안 되겠다고 불평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 좀 다른 교회로 안 가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10년이 지나도 안 가고 20년이 지나도 안 갑니다. 항상 자기 자리 지키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받는 영향에 있습니다. 점액질은 비판과 불평을 잘하지만 자기는 성실하게 참여합니다. 불평하면서 마음으로 정리하여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불평하는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받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자기는 교회의 부정적인 말을 해 놓고도 교회를 안 떠나고 끝까지 협력하는데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이미 상처받아 교회를 떠납니다. 결국 점액질은 말을 줄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다 쫓아 보내고 자기 혼자 남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믿음 없어서 간 줄 압니다. 점액질은 말부터 하지 말고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시편38:13"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육안(肉眼)으로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락방 강화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가르쳤고 죽은 후에 승천하여 하나님 나라에 갈 것과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데려갈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암시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그 길을 실제적인 도로로 생각하고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14:5). 예수님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도마는 엉뚱하게 육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적 시각이 부족한 영적인 사오정입니다. 점액질은 실제적인 성향이 강해서 감성적인 이해가 약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에 '옥수수 밭 옆에 당신을 묻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중에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만일 감성이 예민한 사람 같으면 시인은 아내를 참으로 사랑했구나! 그의 죽음을 참으로 슬퍼하고 있구나! 살았을 때 가난하여 옷 한벌 제대로 못해 줄 정도로 고생만 시키다가 보낸 것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 도마가 이 시를 접했다면 아! 시를 지은 사람 아내가 죽었구나! 칠석날 죽었구나! 이제 재혼해야 되겠구나! 라고 했을 것이다. 도마 같은 사람은 영적인 감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성경퀴즈 대회에 나가면 1등 하면서도 성경이 말한 진정한 의미는 보지 못합니다. 성령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잘 설명하면서도 성령님의 역사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선교 대회에 갔다 와서 감동받은 부분을 간증하는데 그 사람은 재미있었던 이야기만 합니다. 교회에 들어와도 그 교회가 가진 영적인 카리스마를 보려고 하지 않고 교인 수가 얼마인지 예산이 얼마인지 교회가 얼마나 구제를 많이 하는지 목회자가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목회자가 얼마나 인자한지만 봅니다. 요즘 그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우리 교회 교인 수가 얼마여요!'라고 전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교회 목사님 정말 잘 생겼어요!' 라고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는 점액질만 모여들 것입니다. 도마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육적으로만 보지 말고 영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가시적으로 일어나는 일 외에 불가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진수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있습니다. 교회의 매력은 신적인 카리스마에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하는 신앙이 있도록 해야합니다 (8:8).

 

  셋째, 자신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후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문을 꼭 닫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체를 본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도마는 그 일에 대해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20:25)고 했습니다. 도마는 영적인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면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확인해야만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든 자기가 있을 때 되어진 일만 인정합니다. 도마 같은 유형은 다른 사람은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경험은 무시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자기 없는 자리에서 결정된 것은 사항은 무효 판정을 내립니다. 그런 유아독존형, 독불장군형은 똑똑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자기'라는 카테고리의 한계에 갇혀 능력이 있을지라도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일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 생각과 같은 방법으로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 나와 전혀 다른 생각, 나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도 선을 이루어 나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고 회의에 빠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풍성하고 다양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55:8-9"`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습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는 뒤에 예수님의 부활체를 확인하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28). 그리고 후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이 보내주시리라고 한 성령님을 받기 위해 다른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오순절날 성령님의 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1:13). 구전에 의하면 그 이후 최초로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인도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인도에서 고난당하다가 마침내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현재 인도 마드라스 교외 마얄라타르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도마는 적어도 예수님의 부활체를 목격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후 두려움이 없는 전도자로, 위대한 교회 개척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좋지 못한 기질의 사람,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성령님께 붙들리면 변화되고 가치있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위의 사건이 있은 지 8일 후에 도마가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손을 만져 보고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있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26-27).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도마의 행위에 대한 회의라기보다는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는 애정 어린 명령인 것입니다. 도마는 그에 감동되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28).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의 상흔을 만져 보고 한 고백인지 안 만져 보고 고백한 것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아마도 예수님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모습과 말씀 앞에서 만져 보지 않고도 그가 예수님인 것을 인정했을지 모릅니다. 단순히 생전의 예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 곧 그가 하나님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런 믿음을 가졌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29).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교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목격하지 않고 환상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온 생애를 복음전하는 데 바쳤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목격하지 않았지만 성경의 증언과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야합니다 (벧전1:8).

 

 

       4. 본서의 기록 목적 (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30). 이는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모든 표적을 기록하지 않고 기록 의도와 일치하는 내용만 선별하여 기록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또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밝혔습니다 (31). 첫째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結言>

  본서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에 대해 간접적인 증거로 당시 정황들을 제시했고 직접적인 증거로 예수님의 나타나심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부활에 대해 믿지 않았지만 그런 상황을 접하고 나서 믿었습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증언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어야 하며 그로 인하여 기뻐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