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目>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聖經> 요한복음21:1-25
<序言>
본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디베랴) 바다로 돌아가 밤새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킨 내용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가야바 대제사장 뜰에서 심문받을 때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사명을 확인시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제자들의 낙향(1-4절), 예수님의 현현(5-14절),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15-23절), 맺음말(24-25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제자들의 낙향 (1-4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1절). '디베랴 호수'는 긴네렛 바다(민34:11), 긴네롯 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갈릴리 바다(6:1)로 불리는 바다입니다. 그 바다를 디베랴 바다라고 한 것은 갈릴리 지방의 수도가 디베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바돌로매), 세베대의 아들들, 다른 제자 둘이었습니다. 모두 7명이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본서의 저자인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다른 제자 둘'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서 고향인 갈릴리 바다로 돌아온 이유는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막14:28, 마28:10). 하지만 그런 약속이 언급되지 않은 점과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갈릴리로 왔다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대로 갈릴리에 가서 기다리자'는 식으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이 해변에 서셨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4절). '날이 새어 갈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아스(πρωιας)는 이른 아침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남아있는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Barrett). 물론 예수님의 빈 무덤과 부활체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예수님이 설마 그곳에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눅24:16 참조).
제자들이 갈릴리에 온 것은 아마도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20:19).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추종자를 붙잡으려는 정황에 위협을 느끼고 핍박을 피해서 갈릴리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선동하여 다른 6제자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3절) 베드로는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자신의 신분이 들통날까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한 경험이 있고 십자가 처형 장소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실망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20:2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되자 실망하여 갈릴리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허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신21:23, 갈3:13). 신학적인 면을 보면 신명기에서는 거짓그리스도나 거짓선지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돌로 쳐 죽이거나 특별히 나무에 달아 죽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믿고 따라다녔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공회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고 그가 참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였는지 의심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배에 올라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3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3년 전만해도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바다와 물고기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했고 그러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벽녘까지 계속 물고기를 잡으려했습니다. 이는 물고기를 잡으려는 뚜렷한 목적보다는 긴장감을 해소하거나 과거의 일을 잊어버리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현현 (5-14절)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이 해변에서 그들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잡히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물을 던지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곧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시라고 하자 베드로가 겉옷을 입고 물속에 뛰어 내렸습니다 (5-7절). 아마도 웃옷을 벗은 채로 일을 하다가 예수님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겉옷을 입고 물로 뛰어 내렸을 것입니다. 겉옷을 입은 채로 물로 뛰어든 것은 배와 그물과 고기 등의 상황을 정리하여 배를 이동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예수님께 빨리 가려고 수영으로 간 것입니다. 베드로 외에 물에 뛰어든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배와 해변까지의 거리는 약 50칸쯤 되었습니다 (8절). '50칸'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 디아코시온’(πηχων διακοσιων)은 직역하면 ‘200규빗’으로 1규빗은 45.6cm이므로 90m정도 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해변에 달했을 때 예수님이 숯불을 피우고 그 위해 물고기와 떡을 굽고 있었습니다 (9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막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10절). 그것은 아마도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은 것에 대한 자신감을 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렸는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으나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153마리에 대해 숫자들 조합으로 어떤 상징성들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많으나 예언서가 아닌 복음서에서 숫자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153마리는 단지 많은 물고기가 잡힌 데 대한 사실 보고일 것입니다 (Temple, Lenski).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말하는 이가 주님인 것을 아는 고로 누구냐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12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못 자국을 이미 확인했었고 조반을 준비한 상황 앞에서 더 이상 부활한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선과 떡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3절). 이 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3번째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14절).
3.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15-23절)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새벽녘에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셨습니다. 해변에서 제자들을 행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 붙잡혔습니다. 그 때 요한이 예수님인 줄 알고 ‘주님이시다’하자 베드로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 내려 해변으로 나갔고 다른 제자들도 배에 물고기를 가득 싣고 해변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숯불에 떡과 생선을 구워 조반을 먹자고 하면서 떡과 생선을 주었습니다 (4-14절). 그 때 베드로는 가야바 뜰에서 숯불을 쬐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이고 ‘시몬’은 베드로의 옛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동일하게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내 양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 번째 묻자 근심하면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15-17절). 그 때 베드로는 자신이 가야바 뜰에서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분석해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통을 알고 있었고 베드로에게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게 하여 회복시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타르시스’(katharsis)는 헬라어에서 온 말로 ‘정화’(淨化)라는 단어입니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해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상담에서 ‘카타르시스 용법’이 있습니다. 내면에 쌓여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떤 언어나 행동으로 표출하게 하므로 안정을 찾게 하는 요법을 말합니다.
15-17절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고,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줄인다면 예수님의 질문은 “나를 사랑하느냐?”이고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이 아시나이다.”입니다. 예수님은 3번을 그렇게 동일하게 물었고 베드로는 3번을 그렇게 동일하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를 보면 3번의 질문과 3번의 대답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감정이 어떻게 교류되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 감정의 교류를 느끼면 예수님이 대화를 통해 베드로의 마음을 만지셨고 베드로는 자신을 억누르는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을 정리한 도표입니다.
| 예수님 질문 | 베드로 대답 | |
| '사랑하느냐' | '사랑하는 줄' | '아시나이다' |
첫 번째 | 아가파오 (αγαπαω) | 필레오 (φιλεω) | 오이다 (οιδα) |
두 번째 | 아가파오 (αγαπαω) | 필레오 (φιλεω) | 오이다 (οιδα) |
세 번째 | 필레오 (φιλεω) | 필레오 (φιλεω) | 기노스코 (γινωσκω) |
‘아가파오’(αγαπαω)의 명사는 아가페(αγαπη)이고 ‘필레오’(φιλεω)의 명사는 필리아(φιλια)입니다. 예수님은 아가페(αγαπη) 사랑으로 물었으나 베드로는 필리아(φιλια)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와 필리아는 둘 다 ‘사랑’이라는 단어이지만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아가페’(αγαπη)는 하나님의 사랑과 절대적 사랑과 무조건적 사랑을 의미하고, ‘필리아’(φιλια)는 인간적(우정적)인 사랑과 상대적 사랑과 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사랑으로 물었으나 상대적 사랑으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충성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막14:29)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여전히 제자로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질문에서도 아가페(αγαπη) 사랑으로 물었고 베드로는 동일하게 필리아(φιλια)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계속 아가페적으로는 사랑하지 못하지만 필리아적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니 예수님이 세 번째에는 질문을 바꾸어 그러면 필리아(φιλια) 사랑으로는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근심하면서 필리아(φιλια)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는 필리아로 묻자 정말 자신이 필리아적으로라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지 근심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마다 사랑한다고 대답하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했기 때문에 필리아적으로라도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두려움 가운데 있을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야 하는데 이미 그들을 외면한 채 고향에 내려와 고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대답에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했는데, 그때 ‘오이다’(οιδα)로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기노스코’(γινωσκω)로 대답을 했습니다. 오이다와 기노스코가 둘 다 ‘알다’는 단어이지만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오이다’(οιδα)는 지적 이해를 의미하고, ‘기노스코’(γινωσκω)는 경험적 확신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에 근심하면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은 부인했던 과거 실패의 경험이나 양을 떠나 낙향해 있는 현재의 상태를 객관적인 사실로 보면 주님을 필리아적으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정말로 주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도 이미 다 주를 버릴지라도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저도 모르게 너무 무서워서 주님을 무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제자들을 인도해야 했는데 주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아 이곳으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로 인하여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제가 주님을 얼마나 하는지 아시잖아요”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예수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했습니다 (18절). 지금까지는 자기 마음대로 했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팔을 붙잡아 벌리고 허리를 묶어 끌고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의지대로 하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남에게 이끌려 순교의 자리까지 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이전에는 자기 의지로 하려다가 실패했지만 미래에는 성령님께 붙들려 성공의 길을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9절). 자기 결단이 아닌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과 예언을 통해 예수님이 자신의 실패와 고통을 이해하신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북받치는 카타르시스로 인해 회복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이 분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의 예언대로 성령님의 권능을 받고 예수님을 죽인 공회원들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4:19-20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강제로 아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고 자기도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의 소설가 셍키에비치(Sienkiewicz)의 '쿼바디스'(Quo Vadis Domine?)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의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 때(A.D.64-68)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주인공 뷔나큐스와 여주인공 기리아의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 뷔나큐스는 집안 대대로 로마의 호민관을 지낸 귀족출신의 청년이고, 기리아는 리디아족의 인질로 로마에 잡혀 온 히브리 처녀로서 베드로가 많은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 3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콜로세움에서 수형을 당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기리아는 베드로에게 한시바삐 로마를 떠날 것을 권면합니다. 베드로는 콜로세움에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고 로마를 떠나게 되는데 로마에서 내려오다가 마주 올라오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대가 나의 어린양들을 배신했으니 나는 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로마로 가야겠구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동행하던 나자리우스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베드로에게는 맑은 목소리로 들렸습니다. 무척 비통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로마로 올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감독 클레멘트(Clement)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과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의 저서와 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us)의 저서에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이는 요한복음13:36과 본문 18-21절의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마16:24, 롬12:1).
베드로는 원래 누구보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실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4:18-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했고 (마16:16-19),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했을 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했습니다 (요6:67-69). 예수님께서 성만찬석에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실 때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결단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마26:31-35). 베드로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의 부하들과 성전 경비대들과 로마 군사들로 구성된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말고’를 칼로 쳤습니다. ‘말고’는 피하려다가 귀가 잘렸습니다 (마26:51).
하지만 베드로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마태복음26:69-75, 마가복음14:66-72, 누가복음22:56-62, 요한복음18:15-18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보고 내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합쳐서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가야바의 장인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연행되어 심문을 받고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보기 위해 뒤따라갔습니다. 새벽이라 예수님을 체포하여 연행해온 무리들이 관정 뜰에서 불을 피워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 틈에 끼어 불을 쬐면서 관정 실내에서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추궁했습니다. 여종들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자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부인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자 맹세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의 체포현장에 있있던 대제사장의 부하 ‘말고’의 친척이 다가와 장담하면서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하자 맹세와 저주를 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히브리어 '알렙'(א) '헤드'(ח) '아인'(ע) 같은 후두음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고, '쉰'(ש)을 '타우'(ת)로, '벧'(ב)을 '페'(פ)로 발음했다고 합니다 (Pulpit). 크게 3번 추궁과 3번 대답한 것으로 나오지만 누가복음22:59의 ‘한 시간쯤 있다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 상황들일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14:70에 보면 추궁할 때 ‘말하되’(ελεγον)와 대답할 때 ‘부인하더라’(αρνεομαι)는 시제가 미완료 시제로서 거듭 추궁하고 거듭 부인하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크게 3차례에 걸쳐 그리고 반복적으로 부인하는 말을 한 것은 베드로가 얼마나 철저히 완전하게 부인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관정 실내에서 재판을 받던 예수님이 돌이켜 보았고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관정 밖으로 나가 심히 울었습니다. 마태복음26:75, 누가복음22:62에 나오는 ‘심히 통곡하니라’(εκλαυσεν πικρως)는 문자적으로 ‘난폭하게 울부짖었다’입니다. 베드로가 손으로 벽을 치며 머리를 벽에 부딪히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이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14:72에 ‘울었더라’(εκλαιεν)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그런 계속적으로 통곡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책으로 괴로워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철저히 완전하게 부인했습니다. 자신도 붙잡혀 심문을 당할까봐 공포에 질려 맹세와 저주를 하면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부인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자책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도, 군병들에게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지고 피를 흘릴 때도, 십자가 횡목을 메고 비아돌로로사(라. Via Dolorosa: 슬픔의 길)를 갈 때도, 골고다(히. Γολγοθα: 해골의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생각 때문에 유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물고기 잡으러 가야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밤새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새벽까지 물고기를 잡았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2-3절). 베드로는 어부였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때에 나가서 어디에 그물을 던져야 하는 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부는 혹시 잘못 판단하여 그물을 던졌더라도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돌아옵니다. 그런 때에는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다 거두었다를 반복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상황을 잊어버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했는지 후회하며 그 상황을 생각할 때 수치스럽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일어나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자책감으로 인한 고통을 잊으려고 아무 목적 없이 밤새도록 그물 던지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자책감’(自責感)은 사전적으로 보면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 본다면 '잘못을 했을 때 느끼는 상한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책감이란 한마디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기를 질책하거나 비난하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대화를 통해 자책감으로 고통당하는 마음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잘해 보려 노력했음에도 실패를 경험했을 때 자책합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결단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인 실패의 경험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고통스러워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를 위해 살려는 마음이 있는 줄 압니다. 그렇지만 의지와는 달리 연약하여 실패하는 것을 압니다 (히4:15, 요일2:1). 그 실패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압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명을 마침내 감당하게 되리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는 그 주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14:16-18). 우리는 그분을 포기해도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설득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맡기신 사명을 위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마18:5-6, 히5:12-14, 벧전5:1-3). 베드로는 주님을 필리아적으로라도 사랑한다면 사명을 다해야 했습니다 (행1:4,8).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 성령을 기다리는 것,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명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고 주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서 두려움 가운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힘을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그 일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전도이며 (행1:8, 마28:19), 말씀순종이며 (요14:15,21, 요일5:3, 마19:16:-22, 눅3:10-14), 교회봉사입니다 (에4:14-16).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베드로는 만찬석에서 예수님을 죽을지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붙잡혀 심문받을 때 예수님을 3번이나 '나는 그를 알지 못 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심한 자책감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정말로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기도 붙잡힐 상황을 당하자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심한 원망과 후회와 분노를 느끼면서 고향 갈릴리 바다로 가서 그 일을 잊기 위해 밤새 잡히지도 않는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 찾아와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3번이나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길 원했고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어린 양을 먹이고 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성도들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18-19절에 보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뒤를 돌아보니 요한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20-21절에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 자신을 가리켜 사용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는 예수님의 명령을 끝까지 따르다가 순교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요한도 따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는 어떻게 되겠는지 궁금하여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요한도 마땅히 자기처럼 주의 명령을 순종하여 순교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할 때도 데려갔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갈 때도 데려갔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을 때도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만찬을 준비하는데도 그에게 준비시켰고 식사를 할 때도 예수님 옆에서 먹게 하므로 예수님 무릎에 누워 먹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는데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는 요한에게 눈짓을 하니 요한이 "주여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13:21-25). 베드로가 생각할 때 요한이 예수님께 가장 신뢰를 받는 제자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순교할 것을 말씀했다면 요한도 당연히 순교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한이 어떻게 되겠는지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요한은 어떻게 되겠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22절에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그를 살아있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자신이 그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이 그 길을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야한다는 것입니다. 후에 실제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Clement, Tertullian, Eusebus, Sienkiewicz). 요한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 네로(Nero)황제 때 붙잡혀 끓는 기름가마에서 순교할 뻔 했으나 살아나고 후에 도미티안(Domitian)황제 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석방되어 에베소에서 사역를 하다가 트라얀(Trayan)황제 때 노환으로 죽게 됩니다. 예수님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침상에 누운 채로 편안하게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이 어떤 사안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의 사명감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 다른 사람에 대해 집착합니다. 사역을 하면서도 자신이 은혜를 받아 바로 하다가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집착하여 불평과 비난을 하기도합니다. 사역을 잘하던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때가 많지만 잘 못하던 사람에 대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인 한 요인이기도합니다. 사역에서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다가는 우리가 가야할 길에 많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염려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자신이 자신의 신앙과 사명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린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대상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지거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집착하면 그 심리적 끈 때문에 평안하게 살아갈 수 없고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씀을 되새기며 살아야합니다.
본문 상황에서 요한의 특이한 반응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말에 대한 침묵입니다. 이스라엘의 어촌 갈릴리 마을에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다른 제자들보다 가장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한 제자만 데리고 갔던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에도 데리고 갔습니다 (마17:1-8, 막 14:32-42). 예수님은 최후만찬 준비도 그에게 명령했고 만찬석에서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했고 품에 기대어 있게 할 정도였습니다 (눅22:8, 요13:2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도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요19:26-27).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관용적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요13:23, 19:26-27, 21:20). 그는 예수님이 죽은 후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다가 트뤼키예(터키) 지방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기간에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신뢰를 받고 귀하게 쓰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깊이 알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요한이 그런 경지에 있었다는 증거로서의 한 행동양식이 바로 침묵입니다.
요한은 베드로의 실패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전날 밤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고 그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새벽녘에 가룟 유다를 앞세운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이끌고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고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 사위이자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이끌려 가야바의 궁궐 뜰로 끌려갈 때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요한이 가야바와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친분이 있어서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18:15-16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베드로가 뜰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가서 문을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들어오자 문을 지키는 한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 하고 가야바의 아랫사람들과 종들이 쬐고 있는 불을 함께 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고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라는 사람의 친척인 한 사람이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고 베드로는 또 다시 자기는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요18:15-27). 병행구인 마태복음의 보고를 보면 베드로가 질문하는 자들을 저주하면서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예수)을 알지 못하노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마26:69-75). 요한은 가야바 뜰에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정색을 하면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하는 과정을 자세히 본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침묵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야바 심문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 넘겨져 사형언도를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삼 일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은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 밤새 고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고기는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새벽녘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해변에 찾아와 고기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대로 하자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 때 요한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고 소리치니 베드로는 물로 뛰어 내려 나왔고 다른 제자들도 배를 끌고 해변으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숯불에 떡과 물고기를 굽고 계셨고 아침으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아침을 먹으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질문했습니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고 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앞으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에 대한 암시로 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요한을 보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요21:5-23).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베드로의 대답하는 것을 보면서 할 말이 많았을 것이고 베드로가 자기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하는 말을 들으면서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모든 과정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침묵한 것입니다.
요한의 침묵은 예수님 의도에 대한 청종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자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 보면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본질부터 기록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든 표적과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에 대해 현상적인 상황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초점을 그 목적과 의도에 맞추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신령한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을 볼 때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알았고, 예수님의 모든 표적과 설교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에 의해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고 훈련시키고 성장시켜서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는 데에 사용하실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전에서 실패한 베드로에 대해 예수님이 오히려 위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베드로가 부끄러운 모습을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주를 사랑한다고 대답했을 때 침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침묵이야말로 예수님이 베드로에 대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청종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요한과 함께 능력있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능력으로 약한 자를 고치고 능력으로 복음 설교를 하고 능력으로 대적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4:19-20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Clement, Tertullian, Eusebus, Sienkiewicz).
우리는 마태복음5:37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한 것처럼 침묵해서는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침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요한과 같은 침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과 섭리와 인도를 생각하고 그에 청종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 주권적으로 목적을 가지시고 주권적인 섭리로 인도해 가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상적인 상황에 집착하여 함부로 우리의 생각을 말하고 함부로 행동합니다. 이제 교회에서 우리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의도대로 인도해 가실 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정에서 우리 자신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일원에 대해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4. 맺음말 (24-25절)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지금까지 요한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린 사도 요한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 했던 제자가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 증거하는 내용이 얼마나 신뢰할만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 요한의 동역자들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요한의 기록을 기록 당시 다른 사람들도 함께 인정하는 내용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다 기록하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만일 낱낱이 다 기록했다면 그 책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만큼 많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結言>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다음의 구속역사는 제자들이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 나가야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인 제자들을 위로하고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 그 길을 가도록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명하신 구원사역을 위해 부름받았지만 매일같이 실패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이 우릴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이룰 것임을 바라보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