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로마서2:1-29

<題目> 유대인에 대한 심판

 

<序言>

  앞장에서 바울은 본서의 핵심인 복음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관한 대주재를 내걸고 논증을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필요성을 제시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했습니다. 본장에서는 선민인 유대인의 죄를 폭로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하였으므로 여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내용구조는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심(1-11), 하나님의 동등한 심판(12-16),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오해(17-29)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심 (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①유대인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1-3)

 

  1-3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앞장 후반부에서 이방인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본장에서는 유대인도 범죄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 선민으로서 율법을 받았으나 이방인과 다름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대로 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율법으로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리대로, 곧 옳게 여기시는 대로 유대인에게도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그 심판에 대해 핑계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자연만물과 인간역사를 통해 자기를 나타내었고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지적, 영적, 도적적 능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온갖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이제 선민인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할게 알 수 있는 율법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하므로 하나님이 심판할 수밖에 없고 유대인들은 그에 대해 더욱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살게 하다가 430년이 지난 다음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며 동시에 가나안 거민들이 우상숭배를 비롯한 각종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5:13-16).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이 7족속을 쫓아내어 줄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진멸하되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7:1-2,16). 이는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침략할 때 원주민들을 학살한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거민을 진멸하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한 언약적 복을 주는 동시에 가나안 거민들을 심판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7:9-10에 보면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이 똑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었던 가나안 원주민보다 더 악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때 북쪽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남쪽을 유다라고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음란하듯이 우상숭배를 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었으나 돌이키지 않자 앗수르(Assyria) 군대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남유다도 우상숭배를 하고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자 바벨론(Babylonia) 군대를 통해 멸망시켰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유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사로잡아 갈 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진멸할 때 이상으로 잔인했습니다. 남유다가 3번에 걸쳐 바벨론의 공격을 받았는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에는 왕궁과 집들을 불사르고 왕이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이고 왕은 두 눈을 빼고 쇠사슬로 묶어 사로잡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언약적 축복이 약속되고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죄하므로 심판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원리는 지금도 적용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이혼문제나 부모문제 등을 보면 오히려 율법을 악용하여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이 본질적으로 취소되지는 않겠지만 구원받은 우리라도 범죄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은 자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리가 그런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가 범죄할 때에 궁극적으로 구원에서 제외시키거나 지옥에 가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생애에서 합당한 징계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지 않는 분입니다. 11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말씀과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우리가 짓고 있지 않는지 되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마태복음7:1-5"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했습니다.

 

   ②유대인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멸시했다고 했습니다 (4-5).

 

  4-5절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온갖 우상숭배와 불순종과 교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겨 심판을 유예했습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오히려 멸시했습니다. 자신들이 악행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징벌이 즉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별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자기들은 선민이기 때문에 징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자신들의 안전보장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더욱 담대히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내하심이 풍성히 나타날수록 그들의 마음은 완고해져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더욱 많이 쌓는 것이 되었습니다.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날로서 그 날은 하나님이 의로움을 계시하기 위해 심판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개인적 심판과 민족적 심판, 부분적 심판과 최후의 심판 모두를 염두에 둔 표현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인내하다가 심판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사(士師)시대는 지파의 지도자들이 정치, 군사, 종교의 모든 부분에 걸쳐 담당하던 시대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주변 민족들로 하여금 침략하게 하여 징계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는 구원자인 사사를 일으켜 건져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안하게 되면 또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실로에 성막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했지만 성막에서도 범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했습니다 (삼상4:1-11).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나가서 전투를 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패하고 4,000명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패전의 원인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아서였다고 판단하고 실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법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진에 들어온 것을 보고 환호를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왔다고 생각하여 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싸웠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패하고 죽은 사람이 30,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가지고 나갔던 언약궤도 빼앗겼고, 언약궤를 메고 갔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 앉아 있다가 충격을 받아 쓰러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며느리도 애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 이름을 '이가봇'(אי כבוד)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성전에서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패전하게 하고 성전이 훼파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시대에 이르러 또 온갖 가증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때는 실로 사건으로부터 500년이 지났을 때 왕정시대 말기였습니다. 유다가 온갖 죄를 짓되 우상을 숭배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경고했습니다 (7:9-15).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언약민이고 자기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니 하나님이 징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새벽부터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말하여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에 실로에서 행한 것 같이 성전에서 심판을 행하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내어 쫓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대하36:11-21). 시드기야왕과 고관들과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선지자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더욱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벨론 군대가 그들을 침략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성전에 들어가 청년뿐 아니라 여자와 노인과 병약자까지 긍휼히 여기지 않고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자는 사로잡아갔습니다. 성전의 보물들과 귀인들의 보물들을 다 약탈해 갔습니다. 성전과 궁을 불사르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완전히 멸망시킨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후 70년 만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자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또 다시 범죄했습니다 (1:6-10). 외부적으로 종교적 행위는 유지했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제사를 의식적으로만 드리고 오히려 자기들 욕심을 채우는데 이용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과 제사를 멸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님이 심판했습니다. 바사(Persia) 다음에 일어난 제국이 헬라(Greece)인데 헬라의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 제국을 분할 통치하게 된 4명의 장군 가운데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안디오커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 두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돼지 피로 드리게 하고 자기 이름에 '에피파네스'를 붙여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라고 했습니다. '에피파네스'(Epiphanes)'신의 현현(顯現)' 곧 나타난 신왕(神王)이라는 뜻으로서 자기를 신으로 부른 것입니다. 후에 유대인들은 그를 혐오하여 '에피마네스'라고 합니다. '에피마네스'(Epimanes)'미친'이라는 뜻으로, 미친 놈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실은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를 욕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욕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고집도 유대인들 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주어져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믿지 않고 그 일이 일어난 다음에는 믿을지라도 시간이 얼마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여전히 완고하게 나갑니다. 육체의 질병을 보면 우리가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는 습관이 있거나 운동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기 전까지는 그 습관을 고치지 않습니다. 응급실에 가서 수술을 해야만 비로소 내가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퇴원해서 얼마 지나면 또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서도 다시 죽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성경말씀을 통해 죄를 지으면 고난이 온다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설마 하면서 호된 징계가 오기 전까지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이 오면 회개합니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면 또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징계를 유보하지만 우리는 돌이킬 기회로 삼지 않고 오히려 완고해져서 담대히 범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전도서8:11"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한 징계를 하실 때는 참다 참다 어쩔 수 없어서 징계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에서 비로소 징계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합니까? 얼마나 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것으로 부족합니까?

 

  교회적으로도 하나님이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주님이 소아시아 두아디라교회에 하신 말씀을 보면 요한계시록2: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요한계시록2:22-23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했습니다.

 

  세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후서3:3-4"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종말의 심판을 유예한 것을 심판이 없는 것에 대한 증거로 삼고 더욱 죄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심판을 유예한 것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후서3:7-9"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계속 돌이키지 않으면 도둑이 생각지 않은 때에 오는 것처럼 심판이 순식간에 올 것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후서3: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돌이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거룩함과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베드로후서3:11-13"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고 했습니다 (4:17-20).

 

   ③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 (6-11).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했습니다. 각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여 징벌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성품을 따라 죄를 행한 대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민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들처럼 심판하여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 때 오히려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 범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언약민이라도 하나님이 죄행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유대인이 언약민이라고 해서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죄행에 대해서만 심판하고 언약민인 유대인의 죄행에 대해서는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외부적인 조건에 따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누구든지 범죄하면 그 죄행에 때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자는 영생으로 하고 악행자는 진노와 분노로 한다고 했습니다. 7-8"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선행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고 악행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9-10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영생이라고 했는데 그 현상은 평강입니다. 평강(ειρηνη)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함입니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뉴마'가 아니라 '프쉬케'입니다. '프쉬케'(ψυχη)''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생명을 가진 사람 자체를 가리킬 때도 사용하는 단어인데 본문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의어로서 사람의 영이라고 한 것은 사람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악행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신다고 했는데 그 현상은 환난과 곤고입니다. 환난은 외적인 보응이고 곤고는 내적인 보응입니다. 이런 전개를 보면 선행자와 악행자에 대한 보응이 내세에 천국에서의 영생복락과 지옥에서의 극형이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현세에서의 평안의 축복과 환난의 심판이 주어지는 측면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첫째, 악을 행한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한다고 했습니다. 8절에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는 악을 행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당을 짓는 것으로 대표됩니다. '진리'(αληθεα)는 문자적으로 '' '사실'을 말합니다. 옳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것이 악행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행위는 당을 짓는 것입니다. '당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에리데이아'(εριθεα)'에리도스''에리스'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에리도스'(εριθος)는 이기적인 욕망을 가진 자를 말하고 '에리스'(ερις)는 논쟁하는 자를 말합니다. 두 의미를 모두 수용한다면 당을 짓는 자들이란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논쟁하는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진리에 대한 이해나 추구점이 전혀 없어서 육체적 욕망을 따라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편에 서서 분쟁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욕망을 따라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편에서 분쟁하는 자들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옳은 일에 복종시키지 않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을 택합니다. 그래서 옳은 일을 거슬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대적하고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동조자를 확보하고 싸움도 불사합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돌이킬 것 같은 데 더욱 완고해져서 고집을 부립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과 다툴 때는 절대 혼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힘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동조자를 만듭니다. 동조자를 얻기 위해 자기의 잘못은 축소시키고 상대방의 잘못은 확대시킵니다. 그래서 끝없는 전투를 합니다. 결국 무엇이 옳으냐는 진리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냐는 불의의 관점에서 움직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고 논쟁과 다툼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거스리는 마음의 현상입니다. 에베소서2:2-3"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진노의 자녀들의 특징은 악령의 지배를 받아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따라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것에서 나온 행위들은 모두 악행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5:19-21"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자들의 특성입니다. 그 특성들은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죄적 성품이 기준인 것입니다. 원인 제공을 상대방이 해서 그렇게 행한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죄적 욕망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좋은 일을 하더라도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수재의연금을 내도 자기를 치장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재해를 당했을 때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를 해주거나 신문에 이름을 내주면 많은 사람이 앞 다투어 기부합니다. 물론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무기명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그것조차도 자기 존재와 자기 의를 만족시키려는 심리일 수 있습니다. 결국 악령의 지시와 죄성의 욕구가 기준이 되어 사는 사람들의 악행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리는 불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선을 행한 자는 영생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7절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영생입니다. '영생'(ζωην αιωνιον)은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입니다 (eternal life). 이는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과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은 도덕적 기준에서의 선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준에서의 선이며, 사람들의 기준에서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나타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 생애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것은 세속적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구하는 영광과 존귀와는 다릅니다. 세속적인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영광과 존귀를 추구합니다. 좋은 육체, 많은 재물, 높은 지위를 얻으려 합니다. 마태복음6:19-20"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6: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과 썩지 않는 양식은 단순이 어디에 썼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에 속해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방법에 따른 기준이 아니라 목적에 따른 기준입니다. 기도와 봉사와 헌금을 했다고 해서 하늘에 쌓는 것이거나 썩지 않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욕망을 위해 한 것이라면 땅에 쌓는 것이고 썩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다가 낙심하는 것은 그에 따른 보상이 속히 주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 보상을 세속적인 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가 썩을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하나님과 정상화된 관계에서 나온 것이 하늘에 쌓는 것이고 썩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인정받아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것으로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선행은 '참고'라는 말이 수식하듯이 인내합니다. '참고'에 해당하는 '휘포모네'(υπομονη)'인내' '참음' '견딤' '지속'을 뜻합니다 (patient). 썩지 않을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 세상의 어려움이 많이 옵니다. 그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많은 갈등과 충돌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손해와 모욕과 조롱과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살아가는 보답이 확인 되지 않을 때 의심과 절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썩지 않을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끝까지 견딥니다. 그것은 그렇게 사는 것 자체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그것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4:34).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농부가 처음 예수를 믿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접하고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몰랐습니다. 동네에 가뭄이 있었습니다. 동네 논이 비탈진 지역에 계단식으로 있었습니다. 자기 논은 위에 있고 예수 안 믿는 이웃의 논은 아래 있었습니다. 자기 논에 물이 새어가지 않도록 물고를 막고 물을 대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까 자기 논에 물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아랫 논 주인이 밤에 물고를 터서 물이 밤새도록 자기 논으로 흘러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음 날에는 아랫 논부터 물을 채워 주고 그 다음에 다기 논에 물을 대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제 물고를 트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화내지 않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억울하게 한 사람에게 선을 베푼 것입니다. 그 농부는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인식을 좋게 하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고 말씀을 이룬다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의 자체가 즐거움이었던 것입니다.

 

  9-10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라고 했습니다. 악행자에 대한 진노를 말할 때나 선행자에 대한 평안을 말할 때 후렴구처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는 관용구를 사용했습니다. '헬라인'은 당시 이방인에 대한 표현입니다. 무엇이든 이방인보다 유대인에게 먼저 시행합니다. 그것은 유대인을 먼저 선택했고 유대인에게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계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을 받아들일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보다 경성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4: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동등한 심판 (12-16)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바울은 구원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임을 제시했고, 인간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인간이 죄인인 증거를 행위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방인든 유대인이든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동일하게 심판을 받되 그 차이점이 있다면 심판의 도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양심에 의해 심판받고 유대인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①이방인은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12, 14-15).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율법을 알지 못하고 범죄한 자는 비록 그들이 율법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멸망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W. Hendriksen). 율법을 알지 못한 것이 멸망을 면할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멸망은 최후의 멸망인 지옥형벌을 말합니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2:23). 그들은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14-15절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양심'(συνειδησις)은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있는 '도덕적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도덕적 성향을 가진 양심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했습니다. 비록 아담의 범죄 후에는 양심이 온전한 역할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죄가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율법이 없어도 어떤 행위에 대해 도덕적으로 옳은 것에 대해서는 변명하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고발을 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본성으로 존재한 내면의 양심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마음과 생각에 평안 혹은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 양심의 판단은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율법의 정신과 같은 원리를 가집니다. 그래서 양심이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②유대인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12, 13).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12절 하반절에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을 아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고 했습니다. 율법을 듣고 아는 자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 자랑거리를 삼았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으로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겼고 구원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의로운 법칙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효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8:5, 4:1)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3:9-10, 19-20). 바울이 이 논리를 전개한 것은 율법이 주어져도 인간은 그것을 온전히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③심판 때에는 누구든지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16).

 

  16절에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미 전한 복음 특히 종말과 관련된 내용에서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때에는 감추어진 은밀한 모든 죄까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고전4:5). 그때에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핑계하지 못합니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몰랐어도 본래에 가지고 있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양심에 의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현재는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 못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고집으로 항거하지만 마지막 때 심판대에 설 때는 부활한 몸으로서 양심이 창조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어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심판대에서는 지금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대해 반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아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도 양심이 회복되어 양심으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특별히 율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죄인임을 인정하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심판대에서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든 율법을 아는 유대인이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핑계하거나 반항하거나 하는 변론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인간이 모두 죄인임을 말하였습니다. 3:10-12"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부자이든 가난자이든 유식자이든 무식자이든 모두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행위에 있어서 윤리적 차원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조차도 옛날 시골 화장실에 있는 구더기가 서로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구원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복음을 제시하려 할 때는 언제나 심판과 회개를 외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3:3"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고 (1:15), 사도행전2: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죄인으로서, 스스로는 어떤 방법과 노력으로도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존재로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어 심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인 것에만 집중하여 그런 감격이 없고 그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편하고 몸이 건강하고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명예를 얻는 데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도 그런 것들로만 가득합니다. 자연인들이 자기 의지로만 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사는 것처럼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기 욕심만 채우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도와 헌신이라는 명목 아래 자기만족과 자기포장과 자기과시와 자기욕심만 채우려 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핑계할 수 없는 존재들이고 우리의 의로는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으로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장 크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거룩과 헌신으로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3.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오해 (17-29)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1:18~3:20은 모든 인류가 핑계 댈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심판 아래 놓이지 않았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적 상태에 놓이지 않았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①유대인은 율법을 가진 것으로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17-24).

 

  유대인들은 율법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17). 율법의 지식과 진리에 대한 모범을 가진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20).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분간한다고 자부했습니다. 맹인과 어둠에 있는 자를 인도하는 빛이라고 자부했습니다 (19). 유대인들은 율법을 인생을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생각하고 그 율법을 가진 자기들도 이방인들의 등불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특권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자부했습니다 (20).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로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이방인들의 교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특권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등불과 선생 위치에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율법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말하고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은 도둑질을 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은 간음하고 우상을 가증이 여기고 또한 우상은 가증하다고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은 신전 물건을 도둑질했습니다 (21-22). 22절의 신전이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을 말하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말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라는 문구를 보면 신전 물건 도둑질 앞에 우상을 가증히 여긴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으로 이해됩니다 (19:37). 우상을 가증이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우상을 섬기는 데에 사용된 제물들을 탐내어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아는 것으로 자랑하지만 행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자랑하는 그들이 도리어 율법을 범하므로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23절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2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고 했습니다. 이사야52:5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고 했습니다. ‘모독을 받는도다에 해당하는 원형 브라스페메오’(βλασφημεω)는 모욕하다, 조롱하다, 악담하다 등의 뜻이고, ‘더럽히도다에 해당하는 원형 나아츠’(נאץ)는 모독하다, 경멸하다, 혐오하다 등의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 대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자랑했고 그 증거를 율법을 가진 것으로 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 옳지 못한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롱하고 경멸하고 혐오했다는 것입니다.

 

   ②유대인은 할례를 행한 것으로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25-29).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언약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근거를 할례로 들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전승에 의하면 할례받은 자는 게엔나(γεεννα, 지옥) 문 옆에 앉아 있을지라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져준다고 했다고 합니다. '할례'(割禮)는 남자 아이에게 태어난지 8일째에 돌칼로 성기의 끝 양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이는 정욕을 제거 한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언약백성의 표징으로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규정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은 것으로 자랑하지만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25). 오히려 할례를 받지 않은 자라도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유대인(언약백성)과 같다는 것입니다 (26). 율법은 그것을 앎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행하므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가 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할례도 그것을 행하므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서 사므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가 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나 할례나 그 핵심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알았으면 그대로 사는 것이 율법을 아는 자로서의 효력이 있는 것이고 할례를 행했으면 그 할례를 행한 의미대로 사는 것이 할례를 받은 자로서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아는 것으로만 자랑하고 율법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할례를 받았어도 그 의미대로 사는 것이 아니므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고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행하고도 그 정신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 대해 정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인 할례자가 할례자가 아니고,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고 이면적 할례자가 할례자라는 것입니다 (28-29).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형식적으로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롭게 된 자가 참 할례자라는 것입니다. 29절에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4:4, 9:26, 44:7).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속적 목적과 가치를 가지고 살던 자가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에 목적과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과 육체와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살던 자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마음의 할례는 율법의 조문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영으로 가능합니다. 29절의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에서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에 해당하는 구문은 'εν πνευματι ου γραμματι'입니다 (in the spirit, [and] not in the letter -KJV, by the Spirit, not by the letter -NASB, by the Spirit, not by the written code. -NIV). '율법의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에 해당하는 'ου γραμματι'에서 'ου'()'아니' '아닌'의 부정사이고 'γραμμα'(그람마)'기록' '문서'를 말하는 단어로서 마음의 할례는 율법의 조항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에 있고'에 해당하는 'εν πνευματι'에서 'εν'()'안에' '으로' 라는 전치사이고 'πνευμα'(프뉴마)'' '성령'을 말하는 단어로서 마음의 할례는 성령 안에서 혹은 성령으로 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에서 '칭찬이'에 해당하는 'επαινος'(에파이노스)'찬양' '찬미' '칭송'의 뜻입니다. 마음에 할례는 성령에 의해 된 것이므로 마땅히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이 돌려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으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거듭나야합니다. 그 영의 거듭남과 가치관의 변화는 율법의 조항이나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오해는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규범을 행할 뿐 아니라 그 규범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함을 알게 하기 위해 준 것입니다. 할례도 외적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육체의 정욕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복을 바라보라고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규범적으로는 지켰을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1:6-9, 5:21-32). 그 규범의 내용과 목적을 알았더라면 자신들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과 할례를 받고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結言>

  바울이 이런 내용을 전개한 것은 이방인뿐 아니라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범죄하여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져도 그것을 온전히 지키거나 그 목적에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여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영예에 욕이 돌아가게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인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이 원리를 적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는 어떤 의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이미 얻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감격하게 되고, 매일 삶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게됩니다. 십자가 구속의 능력이 적용되기를 원하고 성령이 함께 해주기를 구합니다. (5:2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