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로마서4:1-25
<題目> 칭의에 대한 예증
<序言>
바울은 앞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원리를 설명했었습니다. 본장에서는 그 이신칭의의 원리를 실례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윗의 고백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아브라함의 의(1-8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9-17절), 아브라함의 믿음(18-25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아브라함의 의 (1-8절)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①칭의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 3절).
1절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했고,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칭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행해서 하나님이 의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서 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5:5-6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를 때부터 자손에 대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종이었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אמן)은 '신뢰하다' 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겼습니다. '의'에 해당하는 '체다카'(צדקה)는 '옳음'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옳게 여기시고 아브라함의 존재까지 옳게 여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큼 성장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존재를 의롭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행위를 보이기 이전에 선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후에도 인본주의 방법으로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이스마엘을 후사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행위로 보여준 것을 근거로 의롭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질 때에 의롭다고 한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칭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3, 6-8절).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ελογισθη)는 '생각하다' '평가하다' 인정하다' 등의 뜻을 가진 '로기조마이'(λογιζομαι)의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6-8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의 인용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범죄하여 불경건한 자에 대해 하나님이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 죄가 가리워진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와 칭의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보면 7절에서 '사함을 받고'(αφεθησαν)와 '가리어짐을 받는'(επεκαλυφθησαν)이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에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이나 8절에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등의 표현은 하나님께 주권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죄용서나 칭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칭의와 구원의 조건처럼 보이는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믿음'(πιστος)이란 3가지가 있습니다. 은사로서의 믿음, 성화를 위한 믿음, 칭의를 위한 믿음이 있습니다. 칭의를 위한 믿음은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지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칭의와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이신득구'(以信得救)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노력도 없이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3:27-28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의 행위'라는 말과 '믿음의 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원리를 말합니다. 인간의 노력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구원을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나 선택이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결정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은혜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행위의 원리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느낄지라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가 아닙니다.
③인간은 칭의 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2, 4-5절).
2절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칭의를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칭의는 아브라함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4-5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일을 한 자가 그 품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수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일하지 않은 자가 품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순전히 은혜인 것입니다. 마땅히 자신이 행위를 보이므로 칭의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행위를 나타내지 않은 자에게 칭의를 주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로 여기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용서, 칭의, 중생,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생을 온전히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서울 아현예배당에서 목회를 했던 김현봉 목사님은 세례문답을 할 때 한 가지 질문만 했다고 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여기에서 예수 믿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구원얻어 천국에 가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불합격이었고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주셔서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해 주셨으니 감사해서 믿습니다'라고 하면 합격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받은 것의 원리를 알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기복적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하게 됩니다.
2.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9-17절)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①할례는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9-12절).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나타내기 전에 언약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인정한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창15:5-6). 바울은 여기에서 또다시 할례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할례(割禮)는 남자 아이가 난지 8일 만에 성기의 표피 끝을 돌칼로 자르는 의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을 믿을 때에 그 언약의 표징으로 행했던 의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유대인 교사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15:1-2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만이 구원받은 자들로서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 출신인 제자들까지도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갈라디아서2:11-13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약의 초대교회 때까지 구원을 믿음으로 얻는 것인지 할례를 받아야 얻는 것인지 논쟁이 있었고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한 구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칭의와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할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9-10절에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5:5-6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제시했을 때 믿었고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언약이 이루어진 표징으로 할례를 받게 하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17:26-27에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이미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게 할 때에 하나님은 그 할례를 언약의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17:10-11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했습니다. '언약의 표징'은 언약을 맺는 것에 대한 증거로 보이는 표시(sign)로서 언약의 증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약을 하고 나서 싸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1-12절에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인(印)을 치는 것은 어떤 계약의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행위로서 여기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외적 보증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다음에 할례를 행했으므로 할례는 의롭게 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호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무할례시에 의롭다는 인을 친 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모든 무할례자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모든 무할례자들 곧 이방인들의 조상이 됨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할례자인 유대인들 가운데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른 자들의 조상도 되는 것을 증거 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할례자인 유대인이라도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것처럼 믿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칭의를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요한복음8:39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이라고 유대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걸었던 신앙노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언약을 주실 때에 하나님을 믿었고 그 주신 언약의 내용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은 일차적으로 자손을 준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들이 많이 나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곧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자인 유대인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으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은 할례자인 유대인으로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조상도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브라함은 할례자인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들의 조상이 되고 무할례자인 유대인이라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들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할례자인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무할례자인 유대인이라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이방인든지 유대인이든지, 할례자인든지 무할례자이든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칭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지 종교의식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례는 할례와 유월절입니다. 그에 대치되는 신약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할례로 칭의를 얻지 않는 것처럼 세례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칭의를 얻었고 할례는 그 칭의에 대한 증표였습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洗禮, βαπτιζω)는 '물로 씻어 정결케 한다'는 의미인데 신약교회에서 물로 머리에 끼얹어 안수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합법적인 목사가 회중 앞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이미 예수를 믿는 자에게 그 증표로 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에게 표호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고 세례를 받았어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행하는 영세이든 침례교에서 행하는 침례이든 장로교에서 행하는 세례이든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교회의 어떤 의식과 행위로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3:48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성령께서 믿음을 가지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엡5:26참조). 고린도전서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얻은 칭의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얻은 것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가진 것이고 성령께서 믿어지도록 역사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얻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②율법도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3-15절).
13절에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언약'(επαγγελια)은 '신적인 약속'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말합니다. 약속(promise)을 뜻하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휘포스케시스’(υποσχεσις)이고, 하나는 ‘에팡겔리아’(επαγγελια)입니다. 휘포스케시스는 조건이 있는 약속이고, 에팡겔리아는 조건이 없는 약속입니다. 에팡겔리아는 일방적인 호의에서 조건없이 하는 약속입니다. 본문의 약속은 에팡겔리아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그 약속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일방적인 약속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은 그런 방법으로 한 언약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창15:12-21). 아브라함이 75세 때 자손에 대한 언약을 받은 이후 85세가 될 때까지도 아들이 생기지 않자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하늘의 별을 보라 하면서 자손을 그와 같이 셀 수 없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약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것이 횃불언약입니다. 당시 언약은 두 당사자가 짐승을 쪼개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그처럼 죽여도 좋다는 의미로 행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그 사이로 지나가게 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횃불로 나타나 그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이었습니다 (13절).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기업으로 물려받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을 많게 해주어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해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17:4-8에 "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은 일차적으로 자손을 준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많이 나오고 그들로 인하여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를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온 세상으로 복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한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참여하여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이었습니다. 후에 생긴 율법이 먼저 생긴 언약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3:17에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포함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언약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율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언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언약에 참여했으니 아브라함의 후손도 그 언약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율법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이라는 말은 ‘만일 율법의 행위로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라면’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언약도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역설한 것입니다.
15절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γαρ)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앞에서 율법에 속한 사람이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율법으로 언약의 상속자가 되려는 자는 그 율법이 있으므로 인해 그 율법에 의해 범법자가 되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기 때문에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범죄자라는 선언이 내려지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의해서입니다. 법률이 없으면 죄인으로 정죄할 수 없습니다. 율법도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못한 자가 그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자가 되어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와 그 율법에 의해 형벌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의 직분'이라고 했고 (고후3: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에 대해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갈3:13).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을 받기 전에 칭의을 받은 자입니다. 노아도 율법이 주어지기 전 사람이지만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창6:9).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받은 것은 율법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의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율법을 행하지 않은 것이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가진 것을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아나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율법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는 것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율법에 속한 자이든 율법에 속하지 않은 자이든 모두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의 언약적 축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③칭의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6-17절).
16절에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상속자가 되는 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라도 그 상속자가 되는 것이 믿음으로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그 근거가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χαρις)는 ‘은혜’ ‘호의’ ‘선물’ 등의 뜻입니다. 이 ‘카리스’는 히브리어 ‘헨’(חן)에서 온 말인데, 이 단어는 강한 자가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약한 자를 대가없이 돕는 것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곧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행위를 의롭게 여긴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의롭게 여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얻은 것은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할례를 받기 전, 율법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믿으므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후손들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게 된다는 것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속한 유대인이든 율법에 속하지 않은 이방이든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여 믿음을 가진 모든 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를 가진 모든 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17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는 말씀은 창세기17:5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을 때에 칭의를 주시고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칭의를 얻게 되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들이 모두 그의 후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당시에 가졌던 믿음에 대한 대상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부르시는’에 해당하는 원형 ‘칼레오’(καλεω)는 기본적으로 ‘부르다’는 뜻이지만 ‘하게 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언약을 받았으나 99세가 될 때까지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므로 언약을 이루어 주실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자를 그가 어떤 민족이든 그 언약의 축복에 참여시키는 분입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 (18-25절)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①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18-22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칭의를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15:5-6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제시했을 때 믿었고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인정했습니다. 그 때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전이었습니다. 창세기17:26-27에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또한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갈라디아3:17에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나 율법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곧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4:3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אמן)은 '신뢰하다' 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3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라고 한 것 같이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성실히 이루실 분인 것을 믿은 것입니다. 창세기15:5-6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을 믿은 것입니다. 21-22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는 언약을 믿은 것입니다. 18-20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처음 언약을 받은 75세 때부터 99세가 되기까지 여러 차례 자손에 대한 언약이 받았는데 아브라함은 그 언약의 내용을 믿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 자신과 아내 사라가 생물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전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나 하나님이 자손을 줄 것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의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을 당시 의심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자손에 대한 언약을 받은 후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생기지 않자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창세기15:2에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낳은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내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지 못해 웃었습니다. 창세기17:17-18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라도 웃었습니다. 창세기18:12에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묘사들이 로마서에 나오는 내용과 상충되는 듯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신다고 할 때 아브라함이 믿지 못한 행동을 보인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을 믿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성취의 방법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언약을 성취시켜 주실 분으로 신뢰했고 그 언약의 내용을 굳게 믿었습니다. 다만 그 언약이 어떤 방법으로 성취될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인간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실제로 오랫동안 아내 사라에게는 아들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방법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언약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자기 상식으로는 그런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은 언약을 받았을 때 그 언약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 줄 몰라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고 그 언약 중심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산 것입니다.
②오늘날에도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23-24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 자손에 대한 언약은 아들 이삭을 낳아 그로 인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서 제사장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고 그를 믿는 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져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었다는 것은 오실 구원자까지 믿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정한 방법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원리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원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 언약에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택한 백성을 죄와 그 결과로 오는 죽음과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언약 안에 있는 자를 구원하려는 방법이 제시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의를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25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우리에게 칭의를 얻게 하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칭의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을 믿는 자는 칭의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이 반영된 율법으로부터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죽음은 육체적 죽음뿐 아니라 영적 죽음(하나님과 교제 단절)과 영원한 죽음(지옥형벌)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죄 값을 치루고 형벌에서 면함을 받으려면 죽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생명이 피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레위기17:11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 죽어야했습니다. 히브리서9:22에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원리에 의해 하나님은 속죄제사를 제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살게 하려고 속죄제사를 주셨습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짐승을 성막 문으로 끌고 와 그 짐승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며 안수하므로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진 짐승을 피를 흘려 죽이고 그 피를 속죄소 위에 7번 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의 값인 죽음을 보여드리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이 밖으로 살아서 나오면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속죄제사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죄제사는 그들이 율법을 어긴 죄를 용서받게 하기는 했지만 원죄(정죄, 유전죄)까지 사함받게 하지는 못했고, 본죄(자범죄, 요구죄)도 영원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방법이 예표하는 완전한 방법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했습니다. 히브리서9:11-12에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믿을 모든 택한 백성을 위해 죽으시므로 믿을 자들의 죄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53:5, 벧전2:24). 그리고 부활하게 하시므로 그 대속으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칭의를 얻습니다. 죄 사함과 칭의와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행전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14:6). 그 칭의를 얻는 방법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結言>
죄 사함과 칭의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8에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엡2:5).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엡1:4-5, 행13:48, 살전5:9, 엡2:5, 요3:5, 고전12:3).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고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