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골로새서4:1-18
<題目> 마지막 교훈과 인사
<序言>
바울은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종합적으로 일반적인 권면을 몇 가지 첨부하고 있으며 비교적 긴 문안 인사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상전들에 대한 권고(1절), 기도에 대한 권면(2-4절), 외인들에 대한 처세 권면(5-6절), 서신 전달자 소개(7-9절), 동역자 문안 전달(10-14절), 문안 인사 (15-17절), 축도(18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상전들에 대한 권고 (1절)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3:22-25에서 종들이 상전들에 대해 순종해야 할 것에 대해 권면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상전들이 종들을 의와 공평을 베풀라고 권면했습니다. '의'와 '공평'은 유사한 단어이지만 '의'의 기본형 '디카이오스'(δικαιοs)는 어떤 성격이나 행위에 대해 '올바른'을 의미하고 '공평'의 기본형 '이소테스'(ισοτηs)는 어떤 조건과 비율에 대해 '유사함' '동등함'을 의미합니다. 주인(상전)은 종을 대하는 데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올바르게 대해야 하고 정당하게 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불의하게 행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가 되면 안됩니다. 관리자 위치에 있는 자는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직원 위치에 있는 자를 핍박하거나 위협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아야 하며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임금을 체불해서는 안되고 일한 만큼에 대한 동일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야고보서5:4에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했습니다. 상전들은 자신들 위에 하나님이 상전으로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종 위치에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이 은혜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자인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관리자 위치에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그 목적과 사명을 생각하면서 직원들에게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창45:5-7, 에4:14). 그것을 생각지 않고 교만하게 종들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이 그에 응당한 심판을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6:9에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본서 골로새서3:25에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종들에 대한 말씀에 위치해 있지만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는 구문이 에베소서6:9에 보면 상전들에 대한 말씀 위치에 있어서 상전들에 대한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음). 하나님 앞에 결산해야 할 때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18:23, 25:19). 야고보서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마7: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나 외국인 노동자나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기도에 대한 권면 (2-4절)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2절에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기도(祈禱)는 성도가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발견하여 회개하고 일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악령에 대해 대적하고 필요를 구하고 헌신을 결단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성도가 신앙적으로 힘을 얻어 건강한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도를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계속하고'의 기본형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는 '진지하다' '성실하다' '끈질기다' '지속하다' 의 뜻입니다. 꾸준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기도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의 기본형 '그레고류오'(γρηγορευω)는 '정신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의 뜻입니다. 주술적, 기복적, 자기과시 등의 기도가 아니라 진지하게 주의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 감사함으로 할 것을 권면합니다. 빌립보서4:6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은 기도하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는 '감사함'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믿음으로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마7:7-11).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을 들어주실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든 결국 가장 선한 결과를 이루어 주실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서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였고, 로마서8:30에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들까지 내어 주신 이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지각으로는 이해가 안되어도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가장 좋은 것을 일궈 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더욱 확실함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에 염려되었던 상황과 하나님이 어떻게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셨는지 생각해보면 현재의 염려되는 상황도 하나님이 선하게 해결해 주시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미래에도 염려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하겠지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16:22-25).
3-4절에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꾸준히 기도할 것을 주문하면서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되'는 바울 자신과 동역자들 곧 디모데와 에바브라를 가리킵니다 (1:1, 4:12). 기도 제목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 주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할 문'(θυραν του λογου)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열리게 해 달라는 것을 말하고 (고전16:9, 고후2:12). 복음 전도의 장애물이 제거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 계획을 말하는 바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전해야 할 설교로 그 비밀을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비밀이라고 한 것은 감추어져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1:26-27, 고전2:7).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신 복음 전도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것이 복음 전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섭리일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섭리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바울 자신이 복음을 로마에서 전해야 전 세계로 복음이 빠르게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감동을 받아 비전으로 가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을 가졌고 그 길이 열리자 하나님께서 그 비전을 이루는 기회로 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행전19:21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작정하여'(εθετο~ εν τω πνευματι)는 직역하면 '성령 안에서 결정하였다'(purpose~ in the spirit -KJV) '보아야 하리라'(δει~ ιδειω)는 직역하면 '반드시 보아야 한다'(must~see -KJV)입니다. 그가 가진 사명의 목적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힌 것도 그 목적을 이루는 방편으로 섭리하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3차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이 성전에 갔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로마 주둔군 천부장이 군사들을 이끌고 가 바울을 체포하여 안토니아 요새로 끌고 갔습니다. 천부장이 백부장을 시켜 채찍으로 치며 심문하려다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가이샤라에 있던 벨릭스 총독에게 보냈고 벨릭스 총독은 그를 2년 동안 구금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로마 본국으로 소환되고 베스도가 총독으로 새로 부임하자 바울은 그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호소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로마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로 호송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여(AD61년경)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행21-28장). 결과적으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재판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왜 무슨 일로 고소를 당했는지 변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석방되어 2년 동안 고관들과 그들 부인들과 접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A.D.67년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로 재투옥되어 순교당하기까지 로마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가 복음화되므로 당시 로마 제국 하에 있는 모든 나라에 복음이 급속도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로 인하여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당시 많은 대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바른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사건이 복음전도가 중단되는 계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골로새 교인들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므로 인해 복음전도 사역이 중단되어 복음전도 사역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이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게하기 위한 섭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과 상황을 두고 사람들과 바울은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운 환경에 처합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해석하지만 우리는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릴 부르신 사명에 대한 목적을 생각하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섭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환경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릴 부르신 사명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섭리하신 것을 생각하며 기대감을 가지고 사명 감당을 위해 매진해야 합니다.
3. 외인들에 대한 처세 권면 (5-6절)
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5절). '외인'은 비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고전5:12-13, 살전4:12, 딤전3:7). '지혜'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실천적 분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서 비호감이 들지 않도록 신중히 대해야 하고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동과 생활방식에서 매력과 감명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καιρον εξαγοραζομενοι)는 직역하면 '기회를 구속(속량)하라'입니다. 그냥 의미없이 지나 버릴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잃지 말고 얻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에 대한 좋은 인식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떤 비용의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기회들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3:15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6절). 언어습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을 할 때는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은혜 가운데 하라고 했습니다. '은혜 가운데'(εν χαριτι)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라는 의미 보다는 '은혜롭게'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또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αλατι ηρτυμεγοs)는 소금으로 양념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을 랍비 문헌에서는 지혜를 의미하고(O Brien), 헬라인들에게는 재치나 기지를 의미합니다 (Bruce, Vaughan). 지혜를 가지고 재치있게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잠언25:11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대화에서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리더쉽 분야에서 다루는 코칭(coaching) 기술들 중 대화에 관한 부분들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개방적이어야 하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건설적이어야 하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하고 통합적이어야 합니다. 추측보다는 사실을 말하고 사실보다는 신실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주도하려 하지 않아야 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주장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하기 보다 듣기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귀로 듣기 보다는 입으로 듣고 마음으로 들으려 해야 합니다. 경청기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기술입니다.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말을 은혜롭게 그리고 적절하게 하려 하면 반드시 대답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에 대한 좋은 인식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은혜로운 내용으로 적절한 방법으로 대화하려 하면 마땅히 해야 할 말들을 알게 됩니다.
4. 서신 전달자 소개 (7-9절)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가져갈 동역자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기고와 오네시모입니다. 그 중에 '두기고'(Tychicus)는 소아시아 출신으로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개인적으로는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했고, 사역적으로는 '신실한 일꾼'으로 소개했고, 소명적으로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7절). 바울이 그를 골로새 교회에 보낸 것은 그를 통해 편지를 전해 주고 바울 자신과 동역자들의 상황과 사정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바울 자신의 감옥생활로 골로새 교인들이 상심해 있을 텐데 바울 자신이 가르친 정신을 상기시키고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따라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바울 자신이 소망 가운데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어 위로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행19:21, 행21-28장, 골4:3-4, 빌1:20). 바울은 두기고가 그런 점들을 잘 알아 전해 줄 수 있는 자라 판단한 것입니다. 바울이 1:7에서 에바르라를 소개할 때도 신실한 일꾼이라고 했는데, 본절 7에서 두기고를 소개할 때도 신실한 일꾼이라고 했고, 9절에서 오네시모를 소개할 때도 신실한 자로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사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성품을 신실성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일꾼'(πιστοs διακνοs)은 믿을 만한 일꾼이라는 의미입니다. 일꾼에 있어서 신실하다는 것은 진실과 성실과 책임에 있어서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에 대한 이해, 상황에 대한 시각, 행동에 대한 분별 등에 있어서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소명과 사명에 대해 믿을 만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Onesimus)는 골로새 교회의 초석이 된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빌레몬은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출신이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 두란노서원을 개설하여 2년 동안 강론했는데 그 때 에바브라와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행19:9-10, 몬1:10). 그리고는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 전도에 힘썼는데 그 때 빌레몬은 자기 집을 개방하여 예배를 했습니다 (몬1:2). 그것이 골로새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바로 그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주인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로마로 도망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도시 로마는 범죄인들의 은신처 역할도 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회심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은 그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인 빌레몬의 노예였다가 도망했기 때문에 그에게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두기고 편에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시 주인은 노예에 대해 마음대로 처분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빌레몬이 범죄한 노예에 대해 어떻게 처분할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이른바 화해의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에게 들려 보냅니다. 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덕을 세우려는 의도도 엿보이지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화해 시키려는 의도도 볼 수 있습니다. 일꾼은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 안에서 회심했고 이제는 주의 복음 사역에 충성하는 새 사람이 되었으니 빌레몬을 비롯한 골로새 교인들이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잘못했어도 현재에 바로 살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과거 얘기도 행복하게 하는 얘기는 해도 좋지만 상처받은 내용은 얘기할수록 손해를 많이 봅니다. 과거에 얽매이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부정적인 심리요인에 끌려 다니게 되고 악령에게도 이용당하게 됩니다.
5. 동역자 문안 전달 (10-14절)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이 로마에서 골로새서를 써서 골로새교회에 보낼 당시 바울은 함께 있었던 동역자 6명이 골로새교회에 문안 인사를 하는 것을 전달합니다. 그중 3명(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은 유대인 태생이고, 3명(에바브라, 누가, 데마)는 이방인 태생입니다.
①아리스다고입니다 (10절).
'아리스다고'(Aristarchus)는 데살로니가의 마게도냐 출신으로서 유대교에서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바울이 3차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같이 가서 사역을 하다가 바울이 데메드리오 소동으로 인해 체포되었을 때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행19:29). 그리고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에 드로아에서 다시 바울과 동행하여 예루살렘 회의에 참여했고 (행20:4,6),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될 때 함께 승선했습니다 (행27:2). 바울은 그에 대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라고 했습니다 (10절). 바울이 아리스다고를 자신과 함께 갇힌 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 사건으로 인해 함께 감옥에 갇힌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 가이샤라에서 로마로 호송될 때 함께 동승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수종든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당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에 함께 동참하는 자라는 것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②마가입니다 (10절).
'마가'(Marcus)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인데 유대식 이름은 히브리어로 '요한'이고 로마식 이름이 헬라어로 '마가'입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으로도 불립니다 (행12:5). 바울이 그에 대해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한 것을 보면 (10절) 지중해의 구브로섬 출신의 레위족에 속한 것 같습니다 (행15:37,39). 그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자입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모여 예배하며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행1:13, 12:12-13). 그는 예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청년으로서(막14:51) 예수님을 알았으나 나이가 연소한 관계로 직계 제자의 수에는 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갈 때 같이 가서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수종자로 동행했습니다. 구브로섬 위, 소아시아 남단에 있는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행13:13). 바울의 사역 방식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수도 있고 여행 중 고난을 견디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도중에 세상적인 유혹이 들어와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 요한이 떠난 일로 인해 바울은 마음이 상당히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는 바울이 마가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데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사역에 중심을 둔 것 같고 바나바는 사람에 중심을 둔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한 번 배반한 사람 다시 배반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사역자들이 낙담하게 되고 사역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자기의 생질(甥姪, 누이의 아들)로서 한 번 실수했더라도 기회를 줘서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어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행15:37-41). 바나바가 간 구브로는 1차 전도여행지로서 바나바의 고향이기고 하고, 바울이 간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예루살렘 공회의 수신지로서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바울이 로마에서 감옥 생활을 할 때 그가 함께 있었고 바울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10절). 골로새교인들이 마가에 대한 명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가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고 마가를 잘 영접해 달라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 마가가 뒤에 뉘우치고 로마에서 바울을 잘 도운 것 같습니다. 빌레몬1:24에는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가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디모데후서4:11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실수를 했지만 다시 회복한 것이 훌륭하고 바울은 그런 그를 다시 받아들인 것이 훌륭합니다.
③유스도입니다 (11절).
유스도에 대해서는 '유스도(Justus)라 하는 예수(Jesus)'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유대식 이름의 히브리어이고 '유스도'는 로마식 이름의 헬라어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름입니다. 유대인의 이름 히브리어가 '여호수아'나 '예수아'가 헬라어 음역으로 '예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1-2세기에는 많이 사용되다가 2세기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는데 아마도 유대인 회당과 그리스도인 교회 사이에 생긴 감정 때문에 그 이름을 기피한 것 같습니다 (O Brien, Foerster). 유스도에 대해서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동역자였다는 사실 외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바울이 인정하여 골로새교인들에게 소개할 정도로 신실한 사역자였다는 것입니다.
11절에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할례파'라는 말은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은 바울이 복음 전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때 함께 일하는 진실한 사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고 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할 때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을 방해하거나 대적했으나 그들만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것은 큰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사역을 할 때에 가장 힘을 잃게 하는 것은 동역자의 이탈입니다. 사역이 잘 되려면 변함없이 동역하는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론과 훌 같은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 아비아달과 후새와 아비가일 같은 사람,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④에바브라입니다 (12-13절).
'에바브라'(Epaphras)는 이방인으로서 소아시아에 있는 골로새(Colossae) 태생입니다. 바울이 3차전도여행 중 소아시아 해변 쪽에 있는 에베소(Ephesus)에서 3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그 때 에베소에서 내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리쿠스 계곡(Lycus Valley) 남안에 작은 도시 골로새에서 살던 에바브라가 빌레몬(Philemon)과 함께 바울에게 와서 복음을 듣고 성경을 배웠습니다. 에바브라는 빌레몬과 함께 골로새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4km 떨어진 라오디게아(Laodicea)와 서북쪽으로 12km 떨어져 있는 히에라볼리(Hierapolis, Pamukkale)에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생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지역에 이단들이 들어왔습니다.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이단 사상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영향으로 할례나 음식 등에서 유대주의적 특성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였습니다. 그들은 헬라(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금욕주의 경향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원론 사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부인하고 육신의 죄가 영혼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론을 가졌습니다.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라와 빌레몬은 바른 신앙을 가지고 그들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된 이론에 변증하는데 있어서는 신학적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라가 대표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가서 그 사정을 보고하고 바울에게 더 배워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에바브라의 보고를 듣고 골로새 교회의 급박한 상황을 느끼고 우선 편지로 기본적인 내용을 써서 보내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두기고를 통해 골로새교회에 전달하게 합니다. 그것이 곧 골로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서를 쓰면서 에바브라의 문안을 전달하면서 그가 골로새교회를 위해 얼마나 기도를 하는지 밝힙니다. 12절에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고 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인들을 위해 항상 힘써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완전하게 서기를 기도 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확신있게 서기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확신있게'에 해당하는 'πεπληρωμενοι εν παντι θεληματι του θεου'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모든 뜻으로 가득 채워지기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확신있게'에 해당하는 기본형 '프레로오'(πληροω)는 '가득 차게 하다' '꽉 채우다'의 뜻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으로 채워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모든 생각이 자기들의 뜻이나 다른 사람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판단을 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하게 서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에바브라에 대해 13절에 보면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라가 리쿠스 계곡에 있는 세 교회에 대해 얼마나 수고하는 자인지를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빌레몬과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전도를 받은 후 고향 골로새로 돌아와 골로새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고 인근에 있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했습니다. 또한 골로새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라오디게아와 히에바볼리도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잘못된 이단 교훈이 들어와 혼란케 되었기 때문에 골로새 교인들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히에라볼리 교인들도 미혹되지 않도록 거짓 교훈과 더불어 많은 싸움을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요한계시록3:14-22에 언급되지만 히에라볼리 교회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없습니다. 골로새서가 기록될 때는 A.D.61년인데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는 A.D.95-96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약 35년 후인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보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3:15-16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는 골로새(Colossae)가 있습니다. 골로새에는 카드뮤즈(Cadmus)라는 해발 2,571m나 되는 설산이 있어서 그 만년설에서 흘러 내리는 물은 아주 차가운 물이었습니다.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Hierapolos)가 있습니다. 히에라볼리는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 파묵칼레(Pamukkale)라는 곳인데 그 곳은 자연 온천수가 있어서 항상 뜨거운 물이 흐릅니다.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라오디게아 도시의 물이 히에라볼리와 골로새에서 공급되었는데 히에라볼리에서 오는 온천수와 골로새에서 온 설수가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에 오는 동안 미지근해져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미지근한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수리아 안티오커스 2세가 건설한 기획도시였는데 그 때 라오디게아에서 쓸 물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가 아닌 라오디게아로부터 약 8km 떨어진 수원에서 수로를 통해 공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물은 주변 골로새 지방 사람들이나 히에라볼리 지방 사람들이 먹는 물에 비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환경을 비유 삼아 라오디게아교회가 그들이 살아가는 물의 환경처럼 신앙적으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합니다. 그래서 미지근한 상태는 부패하기 쉬운 점을 착안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얼음처럼 찬 물이나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서는 병균이 활동을 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음식이 부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에서는 병균들이 무한적으로 번식하여 음식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신앙이 미지근한 상태에 있어서 먹을 수 없어 입에서 뱉어 버릴 수 밖에 없는 부패한 음식과 같은 상태에 있어서 버림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적으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차가운 것에 대해 세속적으로 타락한 상태를 말하고 뜨거운 것은 신앙적으로 열심을 낸 상태라고 합니다. 곧 찬 것은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악덕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하고 뜨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런 대조적인 극적인 상태를 역설적으로 표현 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타락한 상태도 아니고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상태도 아니고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15절)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이 타락하든지 열심히 있든지 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주님이 무기력한 상태보다 타락한 상태를 더 원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처럼 타락한 상태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력한 상태를 더 원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력한 상태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히 있는 상태를 더 원하겠지만요. 더욱이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고 책망을 하셨는데 뒤에 권면을 하면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회개를 하든지 열심을 내든지 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곧 차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을 말하고 뜨겁다는 것은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하는 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것은 회개를 하지도 않고 열심을 내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한 말씀일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죄를 붙들고 회개함이 있기를 원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는 열심히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입에서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미지근한 물이나 음식물이 쉽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이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습2:1, 3:5, 마11:20-24).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 고모라성과 의인 1명이 없어서 멸망한 예루살렘성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듣고도 그것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창18:32, 렘5:1). 마치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은 세대와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11:16-17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의에 대해 열의를 가진 사람을 원하십니다 (겔22:30).
우리는 라오디아 교회가 처음에 에바브라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지만 이단 교훈이 들어온 후 수십년 후에는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골로새교회와 라오디아교회와 히에라볼리교회는 이단 교훈이 들어온 이후 바울이 골로새서를 통해 보낸 말씀대로 하지 못하므로 결국 시대의 흐름 속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경성하지 않으면 우리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⑤누가입니다 (14절).
'누가'(Luke)는 이방인으로서 수리아(시리아) 안디옥 출신으로 여겨집니다 (Eusebius, Hist, Ⅲ4, 행6:5, 11:19-27, 13:13, 14:26-28, 15:1,2,30-40). 그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동행하여 빌립보까지 갔고, 3차 전도여행에서는 빌립보에서 동행하여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행16:11-17, 20:6-16, 21:1-26). 그 후에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배를 탈 때 동승했습니다 (행27장).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로마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석방되어 재차 투옥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떠났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때에도 바울에게 남아 바울을 도왔습니다. 디모데후서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받는 의사'라고 했고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14절, 몬1:24). 그리고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의학적 용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눅14:2, 8:43-44, 행3:7, 9:33, 13:11). 그것은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에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다소(Tarsus)에서 의술을 습득한 것 같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도여행 할 때 의술로 동역한 것 같고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주치의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을 보면 누가는 신의가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부름받은 사명을 잘 감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기능적 특질을 잘 개발하여 사역에 활용했고 성경도 그런 배경을 이용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딤후3:16, 벧후1:20, 3:16). 성경은 성령께서 기록자들을 감동시켜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영감(聖經靈感)이라 합니다. 성경영감의 범위(範圍)에 대한 이론은 사상영감설(思想靈感說)과 부분영감설(部分靈感說)과 완전영감설(完全靈感說)이 있는데 완전영감설이 옳습니다. 그리고 성경영감의 방법(方法)에 대한 이론은 기계적영감설(機械的靈感說)과 동력적영감설(動力的靈感說)과 유기적영감설(有機的靈感說)이 있는데 유기적영감설이 옳습니다. '유기적영감설'은 성령께서 기록자들로 하여금 오류없이 기록하도록 영감하시되 그들의 성품, 기질, 은사, 재능, 지식, 교육, 교양, 용어, 어법, 문체 등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셔서 기록했다는 이론입니다. 성령께서 기록자들의 문서 활동에 미치는 모든 죄의 영향력은 억제시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역사하고 그들의 개성을 그대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기록했다는 의미입니다 (신4:2, 사22:14, 갈1:11-12, 벧후1:20-21, 눅1:1-4, 딤전1:12-14). 그렇게 볼 때 성령께서 누가를 통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누가의 개인적 특질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이 주신 개인적 특질대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기독교 리더쉽(leadership) 분야에 활발히 연구되고 활성화되고 있는 이론 가운데 기독교 코칭(coaching)이 있습니다. 기독교 코칭이란 코치이(coachee)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존재임을 전제하고 코치이의 잠재력을 일깨워 신앙적 인격과 사역적 기능이 성장하도록 돕는 리더쉽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코칭에서 전제되는 것은 코칭 대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의해 필요한 기능적 특질을 부여된 존재라는 인식아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여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따른 특질을 부여하였습니다 (습3:17). 그러므로 특질을 발견하여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 다른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 하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잘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공동체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그것을 해야 합니다 (행4:36, 9:27). 신앙공동체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성실히 책임있게 충성하는 것이 신실한 사역자인 것입니다.
⑥데마입니다 (14절).
'데마'(Demas)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로마에서 일차로 투옥되었을 때 함께 있어서 골로새교회에 문안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석방되었다가 재차 투옥되었을 때는 누가와는 달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 버렸습니다. 디모데후서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재차 투옥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떠났는데 그 때 데마도 떠난 것입니다. 데마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부요와 즐거움을 좇아 데살로니가로 떠난 사람입니다. 세상에 빠져 아예 사역을 그만두고 떠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역을 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많이 배워도 신앙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요일2:15).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지 않아야 끝까지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어떤 이유 때문에 바울을 떠났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갔다는 말에 이어지고 '갔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바울이 사역을 위해 파송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2차 투옥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바울과 사역을 같이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떠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바울과 달리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고 사역을 자기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사역을 통해 자기가 잘되려는 사람은 언제든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배반하여 떠나게 됩니다. 자기 중심인 사람은 모든 것이 잘되어도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되지 않고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배반합니다. 어느 때에나 진리의 스승을 배반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 교회 중심 사역 중심이어야 합니다.
6. 문안 인사 (15-17절)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했습니다 (15절). 바울은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했습니다. '눔바'(Nympas)는 자기 집을 골로새교회의 한 가정교회로 내어 주어 소예배와 기도와 사역을 위해 모이게 했습니다. 로마의 브리스길라 집, 고린도의 가이오 집, 빌립보의 루디아 집, 골로새의 빌레몬 집 등은 초대교회의 가정교회가 시작된 집들입니다. 자기 집을 예배와 기도와 교제와 사역을 위해 개방한 것으로서 교회를 위해 생활 전체를 헌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도 문안했습니다. 라오디게아(Laodicea)는 골로새(Colossae)에서 서쪽으로 14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골로새교회에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골로새교회에서도 읽으라고 했습니다 (16절). '읽으라'는 말은 공적인 낭독을 의미합니다. 골로새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가 같은 상황과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편지를 교환하여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킵보에게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17절). '아킵보'(Archippus)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아들로 추정됩니다 (몬1:2). 아마도 설교사역을 하던 에바브라가 로마에 와 있는 동안 그가 그 사역을 대신 맡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그가 사역을 주의하여 잘 감당하길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맡은 사역을 주의하여 잘 감당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4:1-2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야 할 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알아야 합니다. '일꾼'의 휘페레타스(υπηρεταs)는 고대 전함에서 노를 젖는 가장 하급 노예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로, 소유로, 종속된 자로 여겨야 합니다. 자기의 의지, 주장, 결정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로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리챠드 빅스터는 일생동안 병과 쇠약에 시달렸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이 하시고자 할 때는 언제든지,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헌신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충성되어야 합니다. '충성'(πιστοs)은 신실과 같은 뜻으로서 중심과 행위에서 믿을 만함을 말합니다. 중심이 믿을 만하다는 것은 주인의 뜻과 같은 정신을 말하고 행위에 있어서 믿을 만하다는 것은 주인의 말에 절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이니라' (ινα πιστοs τιs ευρεθη: that a man be found faithful-KJV)에서 ευρεθη(휴레데)는 '발견되어진'으로서 수동태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로 보이는 자가 되도록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7. 축도 (18절)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서신을 쓸 때 대필하게 했으나 서신을 끝맺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친필로 인사를 했습니다 (고전16:21, 갈6:11, 살후3:17, 몬1:9). 친필 인사를 통해 서신의 권위를 입증한 것입니다. 그런 관습은 1세기 당시에 흔히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Deissmann).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것을 기억하여 기도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딤전6:21, 딤후4:22). 골로새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온전히 세워지길 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의 삶을 견인하는 영적 원동력이고 교회 공동체를 온전케 이루는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結言>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 서신을 보내면서 동역자들의 문안을 전달하며 마지막 문안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상황에 대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골로새교회가 잘 세워지기를 축복했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사역자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인은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