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로마서7:1-25

<題目> 성화와 율법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를 얻었습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여전히 옛사람의 성품이 살아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칭의는 신분에 관한 법정적 선언으로서 칭의를 받은 자가 죄 사함과 부활에 대한 보증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죄성이 살아 주관하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율법의 본질과 기능(1-13), 그리스도인의 내적 투쟁(14-25)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율법의 본질과 기능 (1-13)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①율법은 칭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6).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죽음이 모든 계약을 말소시킨다는 법적 주의에 입각한 내용입니다 (W. Barclay). 바울은 칭의를 받은 자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내용을 결혼관계로 예를 들었습니다.

 

  2-3절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을 알고 이미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에게 아내에 대해 구속할 수 있는 법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음녀로 정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다음에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음녀로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법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주어진 법에 제약을 받지만, 남편이 죽은 다음에는 그 법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남편에게 주어진 은 율법으로, ‘남편은 죄로, ‘아내는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4절에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율법의 정죄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칭의를 얻고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5-6절에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율법이 지배할 때이기 때문에 죄가 그리스도인을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율법 때문에 죄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효과로 죄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곧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에로는 율법이 그리스도인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죄인으로 정죄하지 못하고, 더 이상 칭의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율법은 성화에 유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7-13).

 

  앞에서 율법은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고, 예수님을 믿어 칭의를 받은 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죄인으로 정죄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칭의 받은 자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율법이 악한 것이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7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이 칭의를 받은 자들에게도 성화를 위해 유익한 것으로서 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선한 기능은 많이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하고, 성령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성도의 생활규범을 알게 하고, 사후심판의 상벌 기준을 알게 합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가 강조되어있습니다.

 

  첫째, 죄를 깨닫게 한다고 했습니다. 7절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3:20).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탐심이 죄인 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계명이 주어지므로 죄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깨닫지 못했을 땐 죄를 인지하지 못하여 죄가 없는 줄 알았는데 계명을 깨달으므로 죄가 인지되어 죄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계명을 많이 알수록 죄가 더 많아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죄성을 깨닫게 한다고 했습니다. 8절에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고 했습니다. ‘탐심’(επιθυμα)은 욕망을 말합니다. 율법의 계명이 주어진 이후로 계명을 지키려하면 할수록 속에서 죄의 욕망이 일어나 반항하고 대항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자기 속에 죄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율법의 계명을 깨달아 지키려하면 할수록 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죄성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계명을 반복하여 지키려 하면서 속에 죄성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그 죄성이 자신의 힘으로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성이 강한 세력으로 자신을 주장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조금도 없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은 손가락 자르면 발가락으로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은 지체를 잘라 보면 지체를 잘라내도 이길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죄를 탐닉하는 존재이고 선을 행할 의지가 전혀 없는 존재이고 선을 선택할 마음조차도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상하고 옳은 것까지도 좋은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악한 것으로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성범죄하지 말라고 성교육을 시키면 오히려 성범죄를 잘하는 데 사용합니다. 세계역사에서 기독교국가들의 십자군전쟁이나 식민지전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과 교회와 선교를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도 그 속에서 얼마나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려하는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6:5).

 

  그래서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고백했습니다. 그와 같은 인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감격하게 하고 현실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과 효과가 적용되기를 추구합니다 (25). 그리고 성령이 내주하여 돕고 계심에 감사하고 성령의 도움을 더욱 구하게 됩니다 (8:2). 그런 의미에서 5: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8절 하반절에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죄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죄도 없다는 것입니다 (5:13). 그러므로 9절에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분히 문학적 표현이 가미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거나 주어졌을지라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율법의 계명이 없는 상태이므로 자신이 살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계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의 계명이 주어져 깨달았을 때는 죄와 죄성을 인식하게 되는 때이므로 죄와 죄성이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의 계명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줄 알고 위축되어 평안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했습니다. 죄가 율법의 정죄를 기회삼아 철저히 속여 힘을 잃게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면 은혜생활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율법의 정죄로 죄와 죄성이 더욱 많이 드러나 아주 절망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계명은 그것을 지켜 생명의 삶을 얻게 하는 것인데 도리어 죽음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판명되었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비록 죄로 하여금 사람을 속이는 역할을 하지만 율법은 본디 죄를 알게 하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과연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원래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입니다 (19:7-11).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율법 때문에 사망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율법을 도구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만 죄를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하여 죽을 존재임을 알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내적 투쟁 (14-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반영이며 선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칭의와 성화에 유익을 줍니다.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절대적 필요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종말적 상벌의 기준을 알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가입하므로 죄가 더욱 많음을 알게 되고 죄성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내적 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14-25절에서 라는 1인칭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 자신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내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적 현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간접적으로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바울의 생애에서 중생하기 전의 경험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중생한 이후의 경험을 말하는 것인지 견해가 분분합니다. 중생(重生, regeneration)거듭남을 말하는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칭의를 얻는 동시에 죄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2:1). 중생하기 전이라는 견해는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 칭의를 얻기 전, 중생하기 전에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던 때에 절망 가운데 있었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D.M.Davis, A.Nygren, Bangel). 14절에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고 했고, 17절에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고, 18절에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했고,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렸고, 자기 속에 죄가 있고,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망의 몸에 빠져있다면서 절망에 빠져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와 기쁨의 마음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중생한 이후라는 견해는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 칭의를 얻은 후, 중생을 한 후, 성화의 과정에서 내적 갈등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A.Augustine, M.Luther, J.Calvin). 15절에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고,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했고,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한다고 했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했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를 미워하지 않고,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전통적인 학자들은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후자의 견해는 몇 가지 이유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첫째, 6~8장은 전체적으로 칭의를 얻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관련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본서는 이미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표현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선 대신 원치 않는 악만 행하는 자신에 대한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25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내적 갈등 중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으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깨닫고 찬양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①바울은 자기 안에 두 세력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17-21).

 

  17-21절에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는데 바울은 3가지 개념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체인 나, 둘째는 중생한(거듭난) 영의 속성, 셋째는 죄의 욕망(죄성)을 염두에 두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체인 나 속에 중생한 영의 속성과 죄의 욕망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생한 영의 속성은 새사람이고 죄의 욕망은 옛사람이며, 중생한 영의 속성은 속사람이고 죄의 욕망은 겉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속성은 우리 안에 법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νομος)은 일반적으로 율법이나 법규나 규정을 말하지만 상징적으로는 원리를 말합니다. 곧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법은 지배원리(goveming principle)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중생한 영의 성향과 죄의 욕망이 세력으로 존재합니다. 율법의 말씀대로 하려는 의지와 욕망대로 하려는 의지가 함께 있고, 의를 행하려는 의지와 죄를 행하려는 의지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의 속성은 하나님을 찾아가려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합니다. 하지만 죄성은 사탄을 따르려하고 죄적 욕망을 좇으려하고 악한 것만 행하려합니다. 이것은 환경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본성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중생했을지라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전까지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내적 갈등이 있으며 죄성에 지배를 받을 때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②바울은 죄성의 세력과 싸움에도 패배를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22-24).

 

  22-23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두 지배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중생한 영의 속성과 죄의 욕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두 세력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고 전투를 합니다. 중생한 영의 속성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말씀을 따르려하고 죄의 욕망은 죄를 행하려합니다. 두 세력은 서로 자기의 의지대로 전체를 지배하려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죄를 행하려는 죄의 욕망이 이겨서 전체로 하여금 죄를 행하게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알게 되면 의를 행하려는 의지와 죄를 행하려는 의지가 싸우고 결국 죄를 행하려는 의지가 이겨서 자신이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더욱 비참하게 생각한 것은 그 일정한 순환(cycle)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 체계화된 순환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것입니다. 범죄한 눈을 빼고 손을 자르고 다리를 자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절감한 것입니다. 육체가 죽어 관에 들어갈 때까지는 안 되는 것임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한 것입니다. ‘곤고한’(παλαιπωρος)은 연속적인 시련 가운데 곤고해진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wretched KJV, NIV). ‘사망의 몸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 곧 죄의 세력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몸을 말합니다. 죄성과 처절한 싸움으로 피곤하고 반복적인 패배로 절망 가운데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경험 속에서 시편51:5"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③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25).

 

  25절 상반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죄의 욕망에 져서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법적으로 칭의를 입혀주시므로 죄와 죄성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는 죄의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켜주시므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실 것을 바라고 감사한 것입니다. 25절 하반절에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해당하는 누스’(νους)는 마음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이지만 여기에서는 지능, 지각, 사고 등의 의미입니다 (mind KJV, NIV). ‘육신에 해당하는 싸륵스’(σαρξ)는 일반적으로 육체로 번역하는 단어지만 여기에서는 죄성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표현입니다. 바울이 현재에 비록 지각으로는 하나님 지배원리를 따르려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죄성으로는 죄의 지배원리를 따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미 법적으로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또 예수님의 재림 때 실제적으로 완전히 해방시켜주실 것을 바라고 찬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주신 것을 찬양한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를 얻어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죄성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그 죄성과 더불어 피 흘리는 싸움을 하는 영적 전투를 통해 점전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련이 너무 연속적이고도 커서 절망가운데 탄식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비참할수록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법으로도 이길 수 없는 죄와 죄성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기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고 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結言>

  바울이 율법과 관련하여 내적 투쟁의 모습과 결과를 묘사한 것이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인지 학자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로 보는 이도 있고, 구원받은 신자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로 본다면 계명의 말씀을 많이 깨닫는 사람일수록 내적 전투가 치열하고 내적 전투가 치열할수록 자신의 무능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인정할수록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대속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해주신 부활에 대해 고대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적인 신앙이란 우리가 잘해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못해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므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임을 확인하므로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