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로마서10:1-21
<題目> 유대인의 불순종
<序言>
본장은 9장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기록입니다. 전반부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이를 거부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려고 애를 쓴 것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후반부는 하나님을 거역한 책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으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방에 복음이 미치게 되었음을 기록했습니다. 내용구조는 이스라엘의 의에 대한 오해(1-4절),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5-8절), 구원과 믿음에 대한 논증(9-13절), 구원의 주체와 방편(14-15절), 이스라엘의 죄책의 불가피성(16-21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이스라엘의 의에 대한 오해 (1-4절)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절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원하고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족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구한 것입니다. 2절에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종교적인 열심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규정을 열심히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지식이 철저히 결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제사와 율법준수에 있어서 열심이 있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라서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義, δικαιοσυνη, righteousness)는 '옳음'을 의미합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옳음'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 성품이 '의'이고 그 '의'가 행위에도 반영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도 하나님의 성품의 ‘의’가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었고 그 결과로 죽음과 지옥 형벌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므로 스스로는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확인하므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을 확인하므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은혜의 방법을 바라보게 하여 은혜의 방법으로 주시려는 오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곧 죄인임을 깨달아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 하나님이 보내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의’이고, 그 방법의 제시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고, 그 방법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고, 그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와 목적을 오해했습니다. 그 율법을 지켜서 그 행위로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열심히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기준에서의 의가 아닌 자기들 기준에 의한 의를 세우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제시한 ‘의’인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오해 곧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 곧 구원에 이르는 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침’에 해당하는 ‘테로스’(τελος)는 ‘종결’ ‘완성’ ‘결과’ ‘목적’ 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 율법에 나타낸 하나님의 ‘의’를 통해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율법의 목적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여 그 율법을 완성하고 종결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적으로 아는 것과 행위로 행하는 것을 ‘의’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율법 지키는 것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들의 ‘의’였고, 자기들의 ‘의’를 나타내려는 것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18:10-14에 보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 바리새인들의 전형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온전히 이루어 마침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무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방법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죄인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 볼 때 모두 본질적으로 악한 죄인입니다. 오십보백보입니다. '로메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미지역에 해방신학이 일어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엘살도바르의 카톨릭 주교가 상류사회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사역을 하다가 군부독재 정권이 민중들을 압제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서 민중들 편에 서서 투쟁을 하다가 투옥되게 되었는데 그때 잡혀온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인간이란 말이야. 이래서는 안 돼. 우리는 인간이야 인간" 신앙이 없더라도 인간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천인공노할 악한 죄를 지은 자에 대해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짐승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적으로는 월등히 나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죄성에 대해서는 낫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짐승보다 못합니다. 짐승의 세계에서도 주도권을 놓고 싸울 때 보면 누가 더 힘이 센 자인지만 확인되면 치명적인 공격은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 짓을 합니다. '정글북'이라는 동화에 모글리가 페허가 된 궁전에 들어갔다가 보석 지팡이 같은 것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그 지팡이처럼 생긴 물건은 보석이 박힌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세 사람의 사냥꾼들이 줍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밥을 짓기 위해 개울로 쌀을 씻으러 갔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이 그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그 쌀로 밥을 지어 먹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한 사람이 그 쌀에 독을 탄 것이었습니다. 결국 세 사람이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즘 매스컴에 보면 어린 자녀들이 학대를 당해 죽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는데 그 사건들을 보면 남이 아니라 계부, 계모, 친부모입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좀 다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도 시내산 아래 있을 때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것을 본 자들이 원망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장정만 60만 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범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어떤 남편이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은 보면 '사람들은 그런 나쁜 놈이 어디 있어' 합니다. 그런데 모든 남자가 다 그럽니다. 젊은 여자하고 도망가서 살아도 얼마 후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성적 호감을 가진 대상을 보면 눈이 돌아갑니다. 그것을 고치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자들이 예쁜 옷이나 보석을 보면 쌀살 돈을 가져다가 사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바로 살자는 것은 그 본성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있지만 눈만이라도 돌아가지 말게 하자는 것입니다. 옷이 탐나더라도 생활비 가지고 가서 사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철저히 죄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의를 이룰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가 행해야할 것을 다 행하여 마침이 되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므로 구원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 얻은 존재라도 아직 죄의 본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노력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생각대로 하도록 내버려 주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길과 내가 원하는 길 둘을 놓고 결정하라고 하면 나는 100이면 100 모두 다 내 본성이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니 나한테 어느 길로 갈지 묻지 마시고 옳은 길만 제시하여 그 길로 가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나는 그 길로 안갈 것이 뻔합니다. 그때 오셔서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그 길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제시하는 길로 가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다른 길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딴 곳에 있더라도 눈 안 돌리고 가야할 길로 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잠깐이라도 혼자 내버려 두면 금방 딴 길로 도망가고 말 것이니 한 순간도 나에게도 눈을 떼지 마시고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 주십시오."
2. 율법의 의와 은혜의 의 (5-8절)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행위에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5절에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고 했습니다. 이는 레위기18:5의 인용입니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느9:29, 겔20:11-13, 21, 마19:17, 눅10:28, 롬7:10, 갈3:12). 바울이 말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를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는 말은 율법을 행하므로 의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지키는 것인데, 율법을 완전히 행할 때에 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성과 연약성과 한계성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3:9-18).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행하게 하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게 하여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8:3-4).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것이 의로서, 은혜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습니다. 6-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5절에서 인용한 레위기18:5에 대한 대조 구절로서 신명기 30:11-14의 인용입니다. '무저갱'(αβυσσον)은 땅의 깊은 곳을 말합니다 (시71:20). 자신이 의를 얻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려는 것이나 무저갱에 내려가려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의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모셔오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려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기 위해 땅 속으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을 믿지 못한 데서 오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라 성육신하셔서 대속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으로 이루신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 되는 것이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고, 은혜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여 그 결과를 얻으려는 원리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과를 얻으려는 원리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원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는 원리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의를 얻기 위해 하늘이나 무저갱에 까지 가려는 것은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인데 구원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오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부활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대속을 이루어 부활 승천하게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을 이루고 부활 승천하게 하신 것입니다. 5:6-8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4:9-10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2:32에도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죄인으로서 의롭게 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을 이루게 하시므로 의롭게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얻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은혜의 방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얻는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인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8절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70인역 신명기30:14 인용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저갱(음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고 입으로 말하는 것으로서 아주 가까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하고 행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한 의도는 그리스도인이 얻는 의는 사람의 멀리까지 가서 찾으려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바울이 추가한 삽입구입니다.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른다는 말씀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전한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도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것은 이 은혜의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행위의 방법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30:11-16에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주신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입국을 목전에 둘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생명의 복을 얻게 하기 위해 그들이 지켜야 할 명령을 주셨는데 그 명령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깨닫기 위해 멀리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은 이미 그들 마음속에 있고 입으로 외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태껏 주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어 이미 들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광야를 통과시키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 주시려는 목적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복 주시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자기들이 노력해서 복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려는 목적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순종하면 복된 삶을 살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믿지 못해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기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면 실패합니다.
3. 구원과 믿음에 대한 논증 (9-13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본 단락은 어떤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논증하는 부분입니다.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의가 신약시대에 은혜의 방법으로 주어졌다고 했는데 그 은혜의 방법을 믿는 자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논증한 것입니다.
①예수님을 주로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9절).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구이며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 주로 믿고 그가 부활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κυριος)는 일반적으로 노예가 주인에게 사용하거나 백성이 통치자에게 사용하거나 제가가 스승에게 사용하는 호칭으로서 자신을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는 그 호칭을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여호와’(יהוה)를 언제나 ‘주’(κυριος)로 번역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요1:1,14, 빌2:6). 곧 예수님 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주인이며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자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효과를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택한 백성의 죄를 담당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셨는데 그 대속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부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대속하셔서 택함 받은 백성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구원자인 것을 믿으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②마음에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9-11, 13절).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믿음의 주체가 누구이며 믿음을 무엇으로 확인하느냐에 대한 내용입니다. '네'는 당사자가 믿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대속해 주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 단락은 그것에 관련한 오해가 많이 발생하는 내용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기만 하면 안 되고 영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믿는 것은 지적이고 영접하는 것은 인격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했는데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믿다'의 헬라어 '피스튜오'(πιστευω)는 ‘믿다’ '신뢰하다'는 뜻(believe)이고,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λαβανω)는 ‘취하다’ ‘잡다’는 뜻(receive)입니다. 여기에서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두 복음에 대한 수용성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안 되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도 그렇지 않습니다.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마음에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10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의와 구원을 동일시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나타났는데 그것을 믿는 자는 칭의(稱義)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인격의 가장 중심에서 믿는다는 것을 말하고 시인한다는 것은 공개적 고백을 말합니다. 곧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마음에 진실히 믿는 것이 밖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진실성은 공동체에서의 공개적인 고백을 통해 확인됩니다. 공동체에서의 공개적인 고백을 통해 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에 믿는 사람은 법정이나 신앙공동체에서 믿음을 고백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 고백을 통해 그가 가진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마음에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동일하게 진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부르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피카레오마이'(επικαλεομαι)는 '간청하다' '호소하다' '예배하다'는 등의 뜻입니다. 이 역시 진실한 믿음의 증거로 나타난 행위를 말합니다 (창4:26). 마음에 진실로 믿은 자는 공개적인 고백을 할 수 있고 기도와 예배 등의 신앙행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진정으로 믿는 것에 대한 표식으로 보았습니다 (행9:14,21) 사도행전9:14에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고 했고, 같은 장 21절에도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하는 것과 부르는 것은 마치 믿음을 가진 자가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마28:18-20, 행2:37-38).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들 때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예식입니다. 그것은 결혼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식은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하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이 믿음을 가진 증거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고 예배를 하고 봉사를 하는 모든 행위가 공개적인 고백 행위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음과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면 설교자나 봉사자나 다 꼴 보기 싫기 때문에 혼자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 병신들이 모인 곳입니다. 병신들이 모여 그 중에 한 병신이 설교하고 그 중에 한 병신이 기도하고 그 중에 몇 병신이 찬양하고 그 중에 몇 병신이 애찬하고 그 중에 몇 병신이 차량운행을 하는 것입니다. 병신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만 지랄만 안 하기를 바랄 뿐인 것입니다. 병신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서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봉사하므로 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려는 자이고 그리스도를 무저갱에서 끌어 올리려는 자와 같습니다 (6-7절). 유대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믿기만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기 때문에 주를 부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앞 절 15~20절을 보면 거짓선지자들과 관련하여 한 말씀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 이름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자들로서, 외부적으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빙자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낸 자들이 아니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6:40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외부적으로 그와 그의 사역을 빙자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할 뿐 실제로는 그를 믿거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이 설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사역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불법을 행하는 자로 간주하고 심판대에서 그들을 부정할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과 ‘부르는 것’은 같은 것을 말하는 표현으로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믿는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③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12-13절).
12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했고,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알게 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과 부르는 것은 한 가지 사실 곧 마음에 믿는 것을 말하려는 다른 표현들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부요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깨끗한 자이든 더러운 자이든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선한 자도 악한 자도 모두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기질적으로 참 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아서 착한 나라라고 합니다. 또 예의가 바른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침략을 안 한 것은 힘이 없어서이고, 예의 바른 것은 유학의 영향으로 외식하기를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굶겨 죽이지를 않나. 자식이 부모를 때려죽이지를 않나. 학생들이 다 죽어가는데 자기만 탈출하는 선장이 없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 학대하는 것 보십시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 외국인들 무시하는 것 보십시오. 그런데도 하나님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과 상태와 환경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만이 조건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그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에베소서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교회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아야합니다.
4. 구원의 주체와 방편 (14-15절)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본 단락은 13절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부르는'에 해당하는 기본형' 에피카레오마이'(επικαλεομαι)는 '간청하다' '호소하다' '예배하다'는 등의 뜻입니다. 부른다는 것은 신앙행위로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증거입니다. 그 부름은 마음에 믿을 때에 가능하고, 그 믿음은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가능하고, 그 들음은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그 전파함은 보낸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부름(calling)←믿음(believing)←들음(hearing)←전파함(preaching)←보내심(sending)'입니다. 이 도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①구원은 보낸 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4-15절).
14-15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증거인 부름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들음이 있어야 하고, 들음은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전함은 보낸 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전도자를 보냈어야 전도자가 전하므로 그 복음 메세지를 들어서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구원의 조건이 기본적으로는 믿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보내심에 있는 것입니다. 곧 기본적으로는 복음을 수용하는 본인에게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우리의 믿음으로 얻어졌다는 확신에만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스스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도자를 보내어 구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6-29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과신하여 스스로 깨달으려는 자는 전도자의 복음 메세지를 듣지 않고 자신이 깨달을 수 없다는 자들이 복음 메세지를 듣는 것입니다.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남보다 나아서 구원 얻은 자 없습니다. 모두 일반상식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목회자들도 본 인격을 보면 대부분 한심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에서 교회 주변에 있는 주유소를 정하여 기름을 넣게 하고 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결제하게 했는데, 그 목회자는 장거리를 갈 때는 가다가 기름이 떨어져서 다른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면 그 기름 값을 자기가 지불해야 되기 때문에 아예 출발하기 전에 교회에서 지정한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넣고 또 따로 기름통에 가득 넣어서 트렁크에 싣고 간다고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에서 교회차량으로 등록된 차량에 대해서만 기름 값이 결제되고 개인 차량에는 결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일로 먼 곳에 가야 할 때는 언제나 자기 차량을 사용하지 않고 교회차량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 점은 교인들에게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모두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든 교인이든 '어떻게 저럴 수 있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실은 원래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 때문에 기독교회가 가짜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인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구원하고 사역을 시킨 것에 놀라고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 얻을 조건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이용당한 전도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와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②구원은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5절).
구원에는 부름이 있어야 하고 부름이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으려면 들음이 있어야 하고 들음이 있으려면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유다 예루살렘이 황폐화되어 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전한 메시지는 유다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곧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당시 절망 가운데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그처럼 기쁜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메시지를 전하는 자의 발은 아름다운 발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절망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이 회복된다는 메시지처럼 기쁜 소식은 없는데, 절망 가운데 있는 택한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 메시지는 얼마나 기쁜 소식이냐는 것이며 그 메세지를 전하는 자는 얼마나 멋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자는 하나님의 구원목적에 이용당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자로서 가장 가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여 구원한 것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 줄 알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생업을 포기하고 선교사나 목사나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사역에 참여하여 전도를 할 뿐 아니라 개인생활 가운데 전도를 해야 합니다.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뿐 아니라 관계전도를 해야 합니다. 개인생활에서 관계를 맺고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창세기12:1-3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적 제사장적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직분적으로 특별사역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고 아내와 첩을 얻기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반적인 삶 가운데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사니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가 누구를 섬기며 사는지 알게 되고, 그를 보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정을 지키는 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복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를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라고 외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평범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에녹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5:21-23에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우리와 똑같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아이 낳고 아이 기르고 며느리 고르는 법을 통해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기르고 돈을 벌고 옷을 입고 말을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섬기는 자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에서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베드로전서3:15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고 한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것이 빛과 향기와 편지인 것입니다 (마5:14, 고후2:15, 3:2). 서울 남포교회에 출석하는 어느 부부교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교회 나오기 전에는 다 불교신자였습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쫄딱 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가 "너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너 사업체를 보상해 줄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는 은행에 가보기도 하고 친구를 찾아 가보기도 하고 처가에 찾아 가보기도 했지만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들였던 치성으로 교회에 열심히 나가 새벽기도까지 다녔습니다. 목사님이 집사로 임명했습니다. 거절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의 열심을 보고 구역장을 시켰습니다. 구역예배를 인도하고 가르쳐야 하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열심히 과일과 커피를 준비하고 최대한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최고로 잘되는 구역이 되었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먹고 살기 바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친구의 말보다 더 귀한 것을 찾게 되었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파산하는 집마다 다니면서 그런 말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이웃에게 나타내는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③구원은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4절).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고 했습니다. 구원은 부름이 있어야 하고, 부름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고, 그 믿음은 들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πιστις)은 세 가지가 있는데,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과 성화의 도구로서의 믿음과 은사의 종류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ρηματος χριστου)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나 '그리스도에 의한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내용상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말씀'에 대한 용어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라는 것입니다. 로고스(λογος)는 성문화된 말씀을 말하고, 레마(ρημα)는 적용된 말씀을 말합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경 그대로 전하는 말씀을 말한다면, 레마는 듣는 자가 당시 상황에서 이해되도록 성경말씀을 풀어서 전하는 말씀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할 때 말씀을 레마로 말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문구적 혹은 교조적으로 들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적용시키는 해석으로 들어야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8:30-36에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하는 자는 성경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간증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서가 기록된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문자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복음전파 방법은 구두 메세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17:2-4에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고 했습니다.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풀어서 전할 때에 효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해석하여 적용시켜 줄 때 믿음이 생겨 구원을 얻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간증과 시사와 유머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교회 예배시간에 전도 대상자를 데리고 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만 아니라 성화의 도구로서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24:32-34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잘 해석하여 적용시켜 주면 마음에 믿음의 열정이 생깁니다. 거기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성화를 이루려면 부단히 예배에 참여하여 성경강해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5. 이스라엘의 죄책의 불가피성 (16-21절)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서 극렬히 반대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그 자매가 자기 어머니에게 한탄하며 "엄마 왜 내가 그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할 때 말리지 않았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야 이것아 내가 얼마나 말렸는지 아냐 오죽했으면 내가 니 신발을 다 숨기고 니 머리를 다 잘랐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가 "그런 정도가지고 돼? 목을 확 비틀어서라도 말렸어야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고집 부려놓고서는 부모 탓을 하는 것입니다. 공부에 대해서도 부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꼭 그와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부분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확실히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복음의 말씀이 땅 끝까지 충분히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고 그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①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16-18절).
16절에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대다수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는 이사야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의 인용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과거 이사야 선지자 시대 백성들의 불신앙과 다를바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에도 오실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들은 바를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외친 것입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곧 복음을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절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는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는 시편19: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의 인용입니다. 이는 현악기 소리가 온 땅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자연만물을 통해 온 땅에 퍼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자연을 통해 온 땅에 계시되었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되었고, 선지자들을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복음이 온 땅에 퍼진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에 대한 말씀 곧 복음을 듣을 기회가 제공되지 않아서 불신앙으로 나아갔다는 핑계를 차단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온 땅에 퍼져서 누구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들을 수 없어서 구원자를 믿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 백성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19-20절).
19절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는 이스라엘이 백성이 복음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과 그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그들은 듣지 못하거나 알지 못해서 불신앙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Hendriksen).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는 신명기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의 인용입니다. ‘백성이 아닌 자’ ‘어리석은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이방 민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 아닌 다른 백성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질투하여 분노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으로 나가니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65:1에서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의 인용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은 이방나라 백성들에게 직접 찾아가 자신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충분히 계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찾지도 않은 이방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겠다는 것입니다.
③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것은 그들을 지속적으로 불렀으나 그들이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1절).
21절에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65: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의 인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지속적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이 돌아오도록 불렀다는 것입니다 (눅15:20).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종일'로 번역된 '호렌 텐 헤메란'(ολην την ημεραν)은 직역하면 '모든 날'입니다. '헤메란'(ημεραν)의 기본형 '헤메라'(ημερα)는 '날' '세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곧 '종일'이란 표현을 헬라어 의미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기 시작한 때로부터 이방 백성을 부른 때까지 지속적으로 불렀다는 의미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2:32에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고 했고, 예레미야8:7에는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사야1:3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관련하여 마태복음23:37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복음의 말씀을 전했으나 그들은 그 말씀을 거역하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마치 어미 닭이 소리 내어 병아리를 불러 모으려는 것처럼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은혜의 방법으로 구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지만 그들은 그 방법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는 수 없이 이방백성에게 복음의 말씀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시기하고 분노해서라도 돌아올까 해서입니다.
<結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은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예 마음에 받아들일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완악한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열심히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어 지옥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일반계시(자연, 역사, 양심 등)를 통해서 그리고 복음전도자들의 전도를 통해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기회가 제공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기질이 완악하고 교만하여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성화의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면 하나님을 핑계 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핑계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 우리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계시(말씀, 성령, 신앙양심 등)를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여 일부러 거역하였기 때문에 실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부단히 긍휼과 은혜를 베풀었지만 자기가 완악하여 거절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