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聖經> 로마서11:1-36

<題目>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계획


<序言>

  앞장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이스라엘의 완악한 불순종에 대해 논했습니다.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 약속과 그것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 집중합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내용구조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1-10),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려는 경륜(11-15), 이방인의 자만 경계(16-24),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신비(25-32),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경탄(33-36)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이스라엘의 남은 자 (1-10)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①유대인 가운데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1-5).

 

  9-10장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렸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고 설의법적으로 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선 자신을 예로 들었습니다. 곧 자기도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이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는 바울이 확실한 이스라엘인이라는 것을 삼중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자신도 이스라엘인인데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혈통도 이스라엘인이고 행위로도 이스라엘인처럼 복음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자인데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1:13-14, 딤전1:13-15). 그 사실은 이스라엘도 역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2절에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자들을 말합니다 (8:29). 이스라엘 백성 전 세대 가운데도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앞에서는 자기 개인적인 경험을 증거로 들었는데 이제 열왕기상19:1-18에 나오는 엘리야 때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2-4절에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왕국 아합왕은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 우상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 우상숭배를 위한 선지자들을 육성하고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하나님 섬기는 제단을 헐고 하나님 섬기는 선지자와 백성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처단당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기울어졌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결단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참신인지 여호와 하나님이 참신인지 아합왕과 온 백성에게 증명하기 위해 갈멜산 대결을 했습니다. 아합왕과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혼자서 대결을 했습니다. 각기 자기 신에게 제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고 자기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한 신을 참신으로 확증하는 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 신은 응답이 없었고 여호와 하나님이 응답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아합왕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상숭배로 인하여 3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아합왕이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 성으로 갈 때 엘리야는 의기양양하여 그 앞에서 뛰어갔습니다. 아합왕이 성으로 들어가고 엘리야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합왕의 얘기를 들은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했습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하나님께 원망과 탄식으로 고발했습니다. 3절에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갈멜산 대결로 아합과 이세벨이 돌이켜 바알과 아세라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온 이스라엘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결국 아합과 이세벨이 돌이키기는커녕 혼자 남은 자기까지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멸망시켜달라는 의미의 탄원을 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4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배교상황에 있었지만 배교하지 않은 7,000명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배교하여 구원받지 못할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경륜 가운데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에 굴복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은 남은 자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남은 자의 사상은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노아 때에도 남은 자가 있었고 (6:6-8, 17:26-27, 벧전3:20), 롯 때에도 남은 자가 있었고 (19:29, 17:28-29), 엘리야 때에도 남은 자가 있었고 (왕상19:18, 11:2-4), 바벨론포로기에도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6:13, 11:11, 23:3, 31:7, 1:8-9). 요엘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2:32). 그래서 바울은 신약시대에 남은 자가 있다고 보았고 (11:5), 요한도 신약시대와 종말에 남은 자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6:6, 12:17).

 

   ②남은 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선택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5-6).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남은 자에 해당하난 레임마’(λειμμα)는 문자적으로 남은 것’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remnant), 모두 타락한 가운데서도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남은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는 택하심을 따라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남은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남은 자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고 했습니다. 엘리야 때에 남은 자 7,000명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로서 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한 자들인 것입니다. 현상적으로는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행위의 결과인 것 같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은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6절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카리스’(χαρις)는 공짜로 주어진 선물을 말합니다. ‘남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 된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은혜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복음이 주어졌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 보면 그 응답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의지와 선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된 것입니다.

 

   ③남은 자에서 배제된 다수의 불신앙인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7-10).

 

  7-10절은 앞에서 말한 '남은 자'가 아닌 이스라엘의 다수에 대한 언급입니다. 7절에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칭의와 구원을 추구했지만 구원받기로 선택을 받은 자 외에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둔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둔하여 졌느니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포로'(πωροω)'굳어지다' '둔해지다' '무감각해지다'는 뜻입니다. 의와 불의,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는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깨닫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8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명기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의 인용입니다. 이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설교하면서 한 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눈과 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혼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카타뉘쏘'(κατανυσω)는 히브리어 '타르데마'(תרדמה)와 같은 뜻으로서 '깊이 잠들다' '혼수상태에 빠지다'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사역을 통해 나타내는 모든 계시활동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들이 불순종으로 일관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완악하게 하고 강퍅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관점을 가졌습니다. 9-10절에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편69:22-23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의 인용입니다. 이는 다윗이 어떤 대적자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 사건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해달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었던 수단들이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수단이 되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눈은 흐려져 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등이 항상 굽게 해달라는 것은 바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항상 두려운 형벌 가운데 있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등이 굽게 해달라는 것은 노예들이 주인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탄원기도 내용처럼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 분별력을 없게 해서 파멸하게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13:14-16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해야합니다. 선택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것 감사해야합니다

 

 

       2.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려는 경륜 (11-15)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구원의 은혜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냐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11절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에서 아주 떨어지기까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불신앙으로 나갔지만 그들이 구원에서 아주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에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 했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악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시기심과 질투심과 경쟁심이 일어나게 하므로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려고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13:4-6, 18:6, 28:25-28).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 아들이 말을 듣게 하려고 남의 아들에게 잘해주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12절에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했다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는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더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13절에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옮겨진 것은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그들 가운데 일부가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세상의 화목이 세상 민족들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말하는 바,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는 것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을 최종적으로 부활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곧 유대인들이 완악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르게 했는데 유대인들 가운데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자기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여 영적 생명을 얻게 할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인 가운데 택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는 것은 유대인인 가운데 택자들을 구원하려는 경륜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이 빨리 성취되는 것이 유대인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경륜을 생각할 때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전도사역에 헌신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전도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방인의 자만 경계 (16-24).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로마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우월성 때문에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의 논리대로 한다면 자기들이 복음을 수용하므로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자만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①유대인의 남은 자손은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6).

 

  16절에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대표성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 방법인 거제의 규례에서 온 것입니다. 제사원리에서 처음 드리는 것은 다음에 드리는 것들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드린 곡식이 거룩하면 그것으로 만든 떡덩이(진설병)도 거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감람나무에 있어서 근원은 뿌리이기 때문에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뿌리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가리키고, ‘떡덩이가지는 이스라엘의 후손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Murray).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인 족장들이 거룩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록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버림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남은 자손 곧 유대인 가운데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이 조상들의 거룩함에 참여할게 될 것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②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7-18).

 

  17-18절에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참감람나무는 과원에서 주인의 돌봄을 잘 받고 있는 감람나무를 말하고. '돌감람나무'는 야생에서 자라 주인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여지고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했다면 그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의 생육이 유지되는 것은 참감람나무의 원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좋은 진액을 수급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곧 가지가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는 유대인에 대한 비유이고, ‘돌감람나무의 비유는 이방인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구원에 대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복음을 일관되게 거부하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하여 이방인들이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 언약의 내용인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은 유대인의 족장들에게 준 언약을 근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것에 대해 자만하거나 유대인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③이방인도 유대인처럼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9-22).

 

  19-21절에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꺾어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였습니다. 그런데 그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돌감람나무 가지인 자신들을 접붙이기 위해 참감람나무 가지를 꺾었으니 자신들이 주인에게 더 귀한 존재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참감람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해서 꺾어버린 것처럼 접붙임을 한 돌감람나무 가지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꺾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참감람나무의 원 가지도 꺾어 버렸는데 돌감람나무 가지는 봐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 유대인들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자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22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언약을 받은 자들이라도 준엄하게 버렸습니다. 이방인은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자하심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도 계속해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때 그 인자하심이 계속 베풀어지지만 만일 유대인들처럼 불신앙으로 나간다면 그들에게도 준엄하심을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이미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이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사실을 생각하고 자만하지 말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언약의 후손이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버림을 당했던 사실을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겸비해야 할 것을 주지시키려는 것입니다.

 

   ④유대인도 다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3-24).

 

  23-24절에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고 했습니다. 주인이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꺾고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 돌감람나무에서 가지를 꺾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야했습니다. 그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본 성향이 전혀 다른 가지를 접붙여 잘 접지가 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본 성향이 같은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꺾었다가 다시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 것은 더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언약 안에 있던 유대인이 불신앙으로 나갈 때 그들을 버리고 본성이 전혀 다른 이방인을 언약에 들어오게 하는 일을 하셨다면, 본성이 같은 유대인을 다시 접붙이는 것은 얼마나 쉽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도 계속 불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회개하여 돌아오면 다시 언약의 내용인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언약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또한 이방인에게 자만하지 말라고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의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려고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실패하여 제사장역할을 제대로 못했지만 이방인들 가운데 선택한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이방인의 구원으로 인하여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들이 회개하여 돌아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자신들의 잘남으로 인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거 해주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도 자기들이 실패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여 언약을 주었기 때문에 시기심을 불러일으켜서라도 구원을 받게 한 것이고, 이방인도 유대인들의 실패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에 대해 자랑하거나 자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구원을 얻지만 자신들의 잘못으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이방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도 잘못했을 때 유대인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경성해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5: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잠언18:12"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0: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신비 (25-32)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①유대인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에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25-27).

 

  25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스스로 자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신비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μυστηριον)비밀’ ‘신비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이는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Harrison). 여기에서 말하는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 전체를 가리키고, '이스라엘의 더러'는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 곧 선택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Calvin, Murray, Meyer, Hendriksen).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믿을 때까지 유대인의 선택받은 자들은 대부분 여전히 완악하여 믿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믿게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곧 선택받은 전체를 말합니다 (Robertson, Lenski, Murray).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가 모두 믿게 되면 유대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가 다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된 대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26-27절에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59:20-2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의 인용입니다 (27:9, 31:31). '시온'(Zion)은 예루살렘에 대한 별칭입니다. '야곱'(Jacop)은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에 대한 별칭입니다. 하나님이 언약하기를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선택받은 유대인들의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고 죄를 없애게 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믿게 되면 유대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회개하고 믿게 되는 것은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자가 시온에 임하며'는 히브리어 원문(MT)'우바 레치욘 고엘'(ובא לציון גואל)로서 '또 구원자가 시온을 향하여 올 것이다'입니다. 이를 70인역(LXX)에서도 '헥세이 헤넥센 시온 호 뤼오메노스'(ηξει ενεχεν Σιων ο ρυομενος)로 번역하여 '그 구원자가 시온을 위하여 올 것이다'는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헥세이 에크 시온 호 뤼오메노스'(ηξει εκ Σιων ο ρυομενος)로 번역하여 '그 구원자가 시온으로부터 올 것이다'로 번역한 것입니다. ''(ל)'~향하여'(to)이고 '헤넥센'(ενεχεν)'~을 위하여'(for)이고, '에크'(εκ)'~으로부터'(from)입니다. 곧 맛소라 원문에서는 '구원자가 시온을 향하여 온다'고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구원자가 시온을 위하여 온다'고 번역했고, 이를 바울은 '구원자가 시온에서 온다'고 바꾸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바꾼 것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할 때 신약에 구원자가 시온(예루살렘)에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지만, 바울는 이미 구원자가 지역적인 시온(예루살렘)에 왔으므로 그 언약이 1차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장차 종말적으로 구원자가 지역적인 시온(예루살렘)이 아닌 천상의 시온(예루살렘)에서 재림하시므로 그 언약이 완전히 성취된다고 보고 그렇게 개역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바울이 제시한 계시를 합쳐서 설명하면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수가 다 차기까지는 유대인들이 완악한 가운데 있게 되고,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수가 다 차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유대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주의 재림 때에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려면 이방인에게 복음이 다 전해져야하며 주의 재림이 임박해야합니다. 마태복음24: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13:10).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인터콥(Intercp)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예루살렘 회복운동'(Back to the Jerusalem)의 문제점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해 보면 그들을 회복시키기보다는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복음이 전도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종족별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의 종족은 16,074종족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미전도 종족은 6,918종족이라고 합니다. 그 통계가 맞다면 미전도 종족이 세계 종족의 무려 45%로서 절반가까이나 됩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비밀한 구원계획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이 완악하여 복음을 배척하자 그들을 시기나게 하여 돌아오게 하려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충만히 복음을 받아들일 때가지 그들을 완악한 가운데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충만히 복음을 받아들이면 유대인 가운데 선택받은 자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28-32).

 

  28절에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라는 말은 복음으로 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원수된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완악하게 되므로 복음전파가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전혀 무관한 자들처럼 여겨지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는 말은 그들이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족장들 때부터 그들과 그 후손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영원히 사랑을 쏟겠다고 언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완악하여 복음을 거부한 연고로 버림당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여전이 사랑하여 그들에게 대한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은사에 해당하는 카리스마’(χαρισμα)'선물' '은혜' 라는 뜻으로서 (gifts), 사역을 위해 주어지는 능력들에도 사용되기도 했지만 (고전12:8-11) 여기에서는 구원을 베푸신 은혜를 말합니다. ‘부르심에 해당하는 크레시스’(κλησις)'초대' '소명'(召命)이라는 뜻으로서 (calling), 구원을 위한 소명을 말합니다. 은사와 부르심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베푸신 은혜와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시고 부르신데 대해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후회하심이 없느니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아메타멜레토스’(αμεταμελητος)후회할 것 없는’ ‘변경할 수 없는’ ‘취소할 수 없는으로서, 변경되거나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 없는 완전함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유대인(이스라엘)을 아무 조건이나 대가없이 선택하여 부르신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언약을 한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순종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에 대하 가지신 계획과 목적은 반드시 달성하신다는 것입니다 (F. Lanbach).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어떤 변수에 의해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14:24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4:35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는 분입니다. 결코 후회가 없는 분이며, 변개하지 않는 분이며 변함이 없는 분입니다. 민수기23:19“~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했고, 사무엘상15:29“~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고 했고, 야고보서1;17“~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는 것처럼 표현된 곳들이 있긴 합니다. 창세기6: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 세상에 사람들의 죄악이 극도로 넘치자 사람을 창조한 것을 한탄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15:11에도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는데 사울왕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잘못하여 그 잘못을 인정하거나 후회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표현을 신학에서는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한 상태에서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잘못하여 그 실수 때문에 후회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서 실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거나 돌이키는 경우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이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계획하실 때 그의 지혜와 능력을 기초로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원리를 완전하게 아는 지식과 지혜가 있고 그것을 기초로 계획된 것을 완전하게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 합니다. 사람은 지혜와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계획하지도 못하고 그 계획한 것을 완전하게 이루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을 계획했어도 그 계획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그럴 때마다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잘못된 계획을 하지도 않으시고 그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후회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서 실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 결코 후회하거나 돌이키는 경우가 없는 분입니다. 우리 사람이 볼 때 하나님의 일이 잘 안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지혜의 한계를 가진 우리 입장에도 볼 때 그런 것이고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본절은 하나님이 유대인(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유대인 족장 아브라함 때부터 그와 그 후손을 선택했습니다. 유대인 민족적으로 선택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개별적으로 선택한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른 민족에게는 주지 않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제사와 성전에 관한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방법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구원방법인 보내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실 구원자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거부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신 후에도 그를 배척했고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도 거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대인을 구원하려는 계획인 잘못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구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구원하려고 그들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한 것이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 때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유대인을 아브라함 때부터 구원하기 위해 선택했는데 하나님이 그 부르심과 관련하여 후회하지 않는 분이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 현상적으로 아무리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의지가 포기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많은 실수와 잘못과 범죄를 합니다. 그럴 때는 본문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에 대해 후회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그렇게 보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것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릴 구원하려고 선택하여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능력 가운데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선택하여 부르신 목적대로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가게 하십니다. 구원뿐 아니라 사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것은 단순히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을 통해 영광받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심각하게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고난으로 인하여 좌절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통해 사명을 이루고 영광을 받으려는 의지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위해 여전히 섭리하고 경륜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③하나님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두신 것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30-32).

 

  30-31절에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방인이 전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가운데 있었지만 유대인(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순종한 결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복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하나님을 불순종한 가운데 있지만 이방인에게 베푼 긍휼의 결과로 유대인도 긍휼을 얻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불순종한 가운데 있었으나 유대인의 불순종의 결과로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이 불순종한 것 때문에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꾸로 유대인이 불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이방인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비록 이방인이 불순종한 자들이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긍휼로 구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유대인이 불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제사장적 사명을 다하여 이방인에 대한 구원역사가 더욱 활발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에게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유대인이 불순종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가운데 있었지만 이방인에 대한 구원 목적이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대인이 불순종했다고 해서 유대인에 대한 구원 목적이 헛된 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처음부터 몰라서 불순종하는 이방인을 구원했다면 처음부터 알고도 불순종한 유대인을 구원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이방인을 구원했다면 이미 알고 있으나 불순종한 가운데 있는 유대인을 구원하는 것은 더 쉬울 것입니다. 곧 유대인이 불순종하므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해서 유대인의 구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불순종한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했습니다. ‘가두어 두심은에 해당하는 기본형 쉬그클레이오’(συγκλειω)닫다’ ‘포함하다’ ‘포용하다등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은 그들을 불순종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불순종 가운데 있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순종 가운데 있는 것을 허락한 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얼마나 자격이 없는지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22-24"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여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할 자들인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불순종과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그 안에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실수나 잘못이나 고통들도 하나님은 오히려 긍휼을 베풀 기회로 사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왜 막아 주시지 않았느냐고 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하여 배반했을 때 그리고 고난으로 절망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의 자신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로,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식하는 계기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아야합니다

 

 

       5.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경탄 (33-36)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34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6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놀라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대해 진술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하고 제사장적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하나님을 배척했고 이방인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야 하는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므로 인해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이 선택한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도 배척했으니 구원받지 못해야 하고 이방인도 우상 가운데 있던 자들이니 구원받지 못해야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구원에 대해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경륜에 감탄하여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그의 판단과 결정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헤아리기가 힘듭니다. 34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의 인용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돕거나 지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5절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욥기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의 인용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모든 것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무엇을 드려서 얻으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요 조성자요 운행자요 주관자이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할 뿐입니다.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나타내려는 핵심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본질적인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천자문이나 보물지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부분적인 부분만 보지 말고 핵심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창세기22:1-14에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3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산에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드리기 위해 죽이려했습니다. 그것으로서 시험이 통과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성경이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확인시켜 주므로 하나님이 과연 그를 왜 선택했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구나하는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라고 한 말씀까지 순종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그가 그렇게까지 했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여호수아24:1-15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세겜에서 백성들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언약을 갱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그동안 하나님이 자기 열조와 자기들에게 어떻게 은혜 베풀었는지를 쭉 이야기하면서 애굽에서 섬기던 신이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신을 버리고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다 빼앗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애굽이나 가나안에서 열조가 섬기던 신을 섬길 것인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믿음이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야할 것은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런 결단을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시편23:1-6에 보면 다윗이 고백한 찬양시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내용으로서 우리가 잘 외우고 다니는 성경입니다. 사실 다윗은 반평생을 사울왕에게 쫓겨다니고 자식들이 서로 간음과 살인과 반란을 일으키고 가장 믿었던 친구처럼 여기던 모사들이 반란에 앞장서고 가장 믿었던 부하가 반항을 했습니다. 일생동안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기 목자이니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그런 고난의 연속인 삶에서도 그로인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가를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알고 놀라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아야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근심하고 슬퍼하고 한탄하고 후회하고 진노하신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표현을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런 표현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그런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감정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이 말을 잘 안들을 때 '저것 왜 낳았나 몰라!' '나가서 죽어버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실제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얼마나 감정이 상했는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인격적 감정의 도입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려는 의도인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 알게 해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려는 데 있어서 대상자가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여 자의로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단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조건 믿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깨달아 믿어야 진정성 있는 믿음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고 해서 인격적으로 믿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신명기4:32-35"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지적으로 경험적으로 충분히 생각하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라는 것입니다.

 

<結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고 그와 그의 일하심에 놀라야합니다. 감탄하고 경탄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고 구원하신데 대해 어떻게 긍휼을 베푸시고 어떻게 경륜하셨는지 생각하고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고린도전서6: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고, 고린도전서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