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로마서12:1-21
<題目> 구원 얻은 자의 생활
<序言>
바울이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주어진 구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대속하고 그 대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해주고 구원이 절대로 취소되는 않는다는 내용을 험증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칭의를 얻은 자가 그 의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실현할지 곧 구원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권면합니다. 지금까지 다룬 구원에 관한 신학적 문제에서 이제는 생활의 실천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내용구조는 기독교 윤리의 대강령(1-2절), 교회사역에 대한 교훈(3-8절),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9-13절), 개인생활에 대한 교훈(14-21절)으로 되어있습니다.
<本論>
1. 기독교 윤리의 대강령 (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11장에서는 주로 신학적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고 그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다루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2-16장은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다룬 것입니다. 그중에 본문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대강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겠는지 지표를 총론적으로 알게 해줍니다.
①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한다고 했습니다 (1절).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구는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입니다. 여기에서 '몸'(σωμα, bady)은 문자적으로 육체를 말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영과 대비된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와 인격과 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서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활양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몸을 드리라는 말은 전 생애를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전 생애를 드린다고 하는 말은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이 그 의미를 더해 줍니다. '산 제물'(θυσιαν ζωσαν, living sacrifice)은 ‘살아 있는 희생제물’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산 짐승을 제물로 드린 것처럼 살아있는 전 생애를 드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애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에서 '거룩한'이란 수식어가 의미를 더해줍니다. '거룩'(αγιος, holy)은 구별됨을 말합니다. 거룩한 생애란 세상 사람들의 가치인 우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서 떠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곧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한다는 말은 우리의 생애를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증거는 다음 구가 증명해 줍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우리가 드려야할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에 해당하는 ‘라기켄 라트레이안’(λαγικην λατρειαν)은 직역하면 ‘합당한 예배’입니다. 이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신령한 예배’(spiritual worship –NASB, RSV, NIV)라는 의미라기보다는 '합당한 섬김'(reasonable service –KJV)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신령한 예배라는 의미가 부분적으로 포함될 수는 있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합당한 섬김입니다. 곧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는 말은 자신의 생애를 거룩한 생활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구원받은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를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②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절).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분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분별하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 '도키마조'(δοκιμαζω)는 '시험하다' '구별하다' '인정하다' '입증하다' '증명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시험하거나 판단하거나 구별한다는 의미보다는 인정하고 입증하고 증명한다는 의미입니다 (prove –KJV, NASB, RSV).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 원하는 뜻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속적인 가치를 떠나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옳다는 것을 마음에 인정하고 생활로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관 곧 우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정욕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그런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본받아 살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생활을 통해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우리 인생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길이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승리하게 되는 길인 것으로 알고 계속해서 선한 싸움을 해가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계속해가야 합니다.
'빅터 프랭클린'(Viktor Emil Frankl, 1905-1997)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심리학자이면서 정신과의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살아 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수용소에 경험한 것을 책으로 썼는데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이시형 옮김. 청아)라는 책입니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거의 굶은 상태에서 노동을 하다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침에 작업장에 나갈 때마다 자신은 아직 노동을 할 수 있다는 모습으로 서 있어야했습니다. 그날 죽음에서 모면되었다고 해서 내일을 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런 상황이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수천 명이 가스실에서 죽었고 마침내 연합군이 승리하자 그들이 수용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으로 버텼습니까?"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들은 "눈물과 한숨으로 버텼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우는 것입니까? 꼭 살아나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느라 힘들어서 우는 것입니다. 눈물과 한숨과 탄식은 버티려는 자, 이기려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어떤 노력으로도 죄와 죽음과 내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선택했고 구속했고 중생하게 했고 칭의를 입혀주셨고 양자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결코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주장하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요구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악령, 죄성, 세상의 구조와 원리와 환경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과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 싸움을 하노라면 매일 눈물과 탄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추구해야할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몸부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는 것을 기억하고 여전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2. 교회사역에 대한 교훈 (3-8절)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명을 따라 주신 기능과 능력의 한계에 맞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4-5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는데 그 모든 지체들이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교회에도 각 지체들인 성도들이 있는데 모두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의 성장을 위해 성령을 통해 각 성도들에게 소명에 합당한 직책과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6-8절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각 다른 은사를 받았는데 그것은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등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예언'(προφητεια)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전하는 것이고, '섬김'(διακονια)은 공동체의 살림의 관리하는 것이고, '가르침'(διδασκαλια)은 말씀을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이고, '위로'(παρακαλησις)는 권면하여 격려하는 것이고, '구제'(μεταδιδωμι)는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이고, '다스림'(πριστημι)은 지도하는 것이고, '긍휼'(ελεεω)은 어려움 당한 자를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 각각 맡은 직책과 은사에 따라 성실함과 부지런함과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곧 맡은 직책과 은사에 만족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직책과 은사를 부러워하거나 비교하거나 시기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자기 직책과 은사에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고린도전서12:1-31처럼 자기 직책과 은사를 잘 감당하여 교회 전체를 위하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는 자기 직책과 은사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1-31은 강조점이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은사를 교회 공동체를 위해 연합하라는 것이지만, 본문의 강조점은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은사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곧 여기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자기의 직책과 은사를 잘 감당해야 교회 전체가 잘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직책과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직책과 은사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책과 은사를 다른 사람과 부러워하거나 비교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자기의 직책과 은사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은사의 귀중함을 알고, 그 직책과 은사를 즐거움으로 감당하고, 그 직책과 은사에 충실한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은사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직책과 은사를 부러워하거나 비교하여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은사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 서울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 말하기를 자기 교회 수요일저녁예배는 남성성가대가 선다고 합니다. 수요일저녁예배에 서는 남성성가대가 30~4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정확히 52%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옆 사람을 보고 따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4부로 안하고 2부로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일 때는 괜찮다고 합니다. 어떨 땐 1부로 하고 어떨 땐 12부로 한다고 합니다. 그럴 땐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듣는다고 합니다. 너무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서 저 찬송이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면 감격스러워서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못해도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기가 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자기가 맡은 것에 만족하고 자기가 맡은 것에 충성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열등감(劣等感, Complex)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지게 되면 자기를 지나치게 방어하려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적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 self-respect, self-importance)을 가져야 합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25:10에 보면 성막에서 사용되는 언약궤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조각목'(皀角木)으로 번역한 ‘아체이 싯딤’(עצי שטים)은 싯딤나무인데 (shittim wood -KJV, acacia wood -NASB, NIV, RSV), 이 나무는 광야에 서식하는 아카시아과에 속한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마른 다음에 비틀어지기 때문에 기구를 만든 다음에 금으로 싸야만 했습니다. 싯딤나무는 당시에 레바논 백향목 같은 나무에 비해 너무 가치 없게 생각하는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기구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진흙덩이들이 있었습니다. 진흙덩이들은 최고의 토기 작품이 되어서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의 장식장에 올라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진흙덩이들로 토기를 만드는 토기장이는 최고의 장인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다 왕궁이나 부잣집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어느 날 한 진흙덩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진흙덩이는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토기장이가 빚는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주둥이에 유난히도 넓은 손잡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진흙들은 웃었습니다. 그 진흙덩이는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자신을 그런 흉칙한 모습으로 빚은 토기장이의 손길이 밉고 또 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불가마에서 나왔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왜 그런 모습으로 빚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토기장이는 완성된 그릇을 품에 앉고 어디론가 뛰어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습니다. 토기가 된 진흙덩이는 아무리 가난한 농부에게 팔려고 했어도 그런 모양으로 만든 토기장이가 미웠습니다. 차라리 바닥에 떨어져 깨져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너무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농부는 농사일을 하다가 두 손이 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하게 생긴 그릇을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이 사실을 알고 이 농부를 위해 손이 아닌 팔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토기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농부에게 토기장이가 말했습니다. “더 고마운 것은 나요.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요.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요.” 그때 토기가 된 진흙덩이는 자신이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가장 귀한 존재로 알고 자기의 재능을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보다 못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해야 하고 그것에 성실해야 합니다. 비단 교회생활뿐 아니라 개인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존재와 역량과 능력 이상의 생각을 하여 허영과 교만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존재와 역량과 능력을 귀히 여기고,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하고, 그것으로 성취감을 맛보고, 그것으로 가치를 느끼고, 그것으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시편131:1에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고 했습니다.
3.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 (9-13절)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3-8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각양 받은 은사를 따라 봉사해야 할 것에 대해 권면했고 이제 9-13절에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해야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①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9-10절).
9절에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αγαπη)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어떤 꾸밈이나 가장이나 위선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서로 사랑을 나타내야합니다. 그것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것입니다. 악에 대해 혐오하고 선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살전5:22). 10절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로서 서로 형제자매가 되었으니 서로 혈육에 속한 가족처럼 사랑해야합니다. 그 실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를 먼저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을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녀로 맺어준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상대가 자신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대속으로 구원했고, 하나님의 목적과 사명과 비전이 있는 것을 근거하여 높이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②열심으로 주를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11절).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섬기라’에 해당하는 기본형 ‘둘류오’(δουλευω)는 ‘예속되다’ ‘속박되다’ ‘섬기다’의 뜻이 있습니다. 종처럼 주인에게 예속되어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성화를 이루는 것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므나비유와 달란트비유에서 보면 그 일을 하지 않은 자에 대해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눅19:11-27, 마25:14-30). 성도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주님께 열심히 충성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열심이 식어집니다. 소아시아7교회 중 에베소교회는 처음사랑을 잃었고 라오디게아교회도 미지근했습니다 (계2:4, 3:15). 그러므로 다시 열심을 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열정은 성령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열심을 품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토 프뉴마티 제우테스’(τω πνευματι ζεουτες)인데 우리 성경에서는 '성령'에 해당하는 '토 프뉴마티'(τω πνευματι)를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해 성령께서 불타는 열정을 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③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해야한다고 했습니다 (12절).
12절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누려야할 것 가운데 하나는 기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6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종말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갈 소망과 천국에서 상을 받을 소망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4:7-8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했고, 로마서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화를 이루는 소망이 있습니다.
④환란 가운데서도 인내해야합니다 (12절).
12절에 "~환난 중에 참으며~"라고 했습니다. ‘환난’에 해당하는 ‘들리피스’(θλιψις)는 ‘핍박’ ‘환난’ ‘고통’ 등의 뜻입니다. 무서운 억압으로 인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의미합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큰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령의 공격이 있기 때문이고, 죄성이 대항하기 때문이고, 사회구조와 생활원리가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때문에 적극적인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환난 중에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는 인내입니다. 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참을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1:4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섭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45:5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언제나 마침내 승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14:12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고통을 겪어야 강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라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⑤항상 기도에 힘써야한다고 했습니다 (12절).
12절에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5:17에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성령에 충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서로 사랑할 수 없고, 환난 가운데 인내할 수 없고,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없고, 환난 가운데 인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쉬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합니다 (눅11:1-13). 특히 말세가 될수록 기도에 전심전력을 다해야합니다. 베드로전서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⑥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13절).
13절에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쓸 것을 공급하라’는 것은 궁핍한 자에게 재정적인 필요를 제공하라는 말입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앙생활 때문에 궁핍해진 성도들이 많았고 사역 때문에 나그네 된 사역자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그들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사도행전4:33-35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고 했습니다 (행4:36-37). 요한일서3:17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41-42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4. 개인생활에 대한 교훈 (14-21절)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①박해하는 자를 축복해야한다고 했습니다 (14절).
14절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를 더욱 의지하므로 더 강해집니다. 고린도후서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복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5:10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상을 받게 됩니다. 마가복음10:30에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증거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여 영적으로 강해지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께 상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데 이용된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도를 핍박한 죄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10:27에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계20:12-13). 그런 면에서 보면 그들은 불쌍한 자들이므로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축복하라는 것은 복을 빌어주라는 말로서 그들이 잘되기를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를 받기를 기도해주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죄를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그도 하나님 앞에 돌아와 복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마5:45). 예수님은 마태복음5:44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3:9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②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야한다고 했습니다 (15절).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당해 웃고 기뻐하는 자들의 행복에 공감하고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고, 슬픈 가운데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일은 쉬운 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는 배가 아픈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자신만 즐거워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도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마음에 시기심이 올라와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즐거워하는 자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을 얻은 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고 동정하고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즐거운 가운데 있을 때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의 고통 때문에 잃어버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얻은 기쁨인데 얼마나 바라던 행복인데 다른 사람의 상황 때문에 양보하겠습니까. 자신이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동병상린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과 함께 할 것 같지만 그럴 때도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있을 수도 없을 만큼 고통을 당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만히 누워있을 수도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기도원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기도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획도 없이 먼 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밤에 어느 교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부싸움을 크게 했는데 빨리 와서 해결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저는 느꼈습니다. 내가 정말 고통스러울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고통관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원인론적인 고통관입니다. 이는 인과응보의 원리입니다. 잘못을 했기 때문에 고통이 온 것이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이 왔다는 시각입니다. 그러니 죄를 회개해야 고난에서 벗어난다는 시각입니다. 자신에 대한 시각으로는 옳은 시각이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시각으로는 옳지 못한 시각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 시각으로 대하는 것은 어떤 위로도 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목적론적인 고통관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연단을 시켜 그 사람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는 시각입니다. 그 시각으로 위로하는 것은 원인론적인 시각보다는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힘든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도 진정한 위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셋째는 상관론적인 고통관입니다. 이 시각은 고통당한 사람에 대한 원인과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그 사람을 동정하고 함께 하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에 의한 행동이 가장 위로가 됩니다.
미국에 여류문학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별별 치료를 다 해봐도 회복되지 않았고 점점 외부세계와 단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아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죽은 친구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서로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 여류작가는 아들 친구의 어머니를 안고 울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 일 후로 그 여류작가는 병이 치료되어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을 향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욕을 퍼붓습니다. 간호사와 의사들에게까지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할아버지의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지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의 친구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할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보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카운셀러를 들여보내도 소용없었습니다. 목사님을 보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동네 꼬마가 하나 있었는데 그 꼬마가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쫓아왔습니다. 식구들이 반 호기심으로 "그럼 네가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만나봐라"하며 그 아이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20-30분 동안 만나고 나오더니 그 이후로 할아버지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얘기도 하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그 어린 소년을 붙들고 묻었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얘기를 했니?"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할아버지하고 그 20-30분 동안 함께 있었잖니. 너는 그 동안 도대체 뭘 했니?" 그랬더니 그 어린 소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꼬마는 단지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고 울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우는 꼬마를 꼭 껴안는 순간 진정한 사랑을 느꼈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11:1-44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 동편 기슭에 작은 마을 베다니가 있었고 그 마을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 자주 들러 사역에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틀 후에 나사로 집을 찾아갔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위문 온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무덤 앞에서 마리아는 주님이 계셨었더라면 자기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하면서 울었고 함께 위문 왔던 사람들도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복음11:33-35에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하려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통당한 자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통당한 자들과 마음으로 함께할 수는 있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몸은 병들었습니다. 몸에 병이 들어 집에 거하지도 못하고 쓰레기더미에 앉아 있었습니다. 피부에 헌데가 생겨 고름이 나고 먼지로 딱지가 생기고 그 사이로 벌레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엘리후가 찾아와 쓰레기더미에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물론 지식이 완전하지 못해 원인론적 관점에서 도우려다가 오히려 마음이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욥의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 희생한 자들입니다. 욥은 함께 해주는 그들 때문에 변론하면서 힘을 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1-11장에서는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이 전혀 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그것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내용입니다. 12장부터는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얻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교훈한 내용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것입니다.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는 것이고 공동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힘들 때일수록 원인론적 관점에서 정죄하지 말고 상관론적 관점에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해야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이고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놀라운 힘이 생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26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③마음을 낮은 데 두어야한다고 했습니다 (16절).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지혜있는 자처럼 망각하여 미치지 못한 기이한 일에 뜻을 품고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131:1에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잠3:7).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겸비하고 비천한 자들과 마음을 같이하라는 것입니다. 교만하여 정죄하는 위치에 있지 말고 겸비하여 위로하는 위치에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죄인처럼 낮아졌고 비천한 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마11:19). 이 교훈도 역시 자신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 중심의 생활을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④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한다고 했습니다 (17절).
17절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엘(Goel)제도 가운데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 있는데 (출21:24-25), 그것은 공적인 형벌 기준을 말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보복 기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5:38-39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보복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리스도인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해야합니다. 선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해야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5에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언제나 악행자에게 보다 큰 악행으로 보복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의 악함을 증명하므로 자신이 의롭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하려하지만 악을 심판한다는 명목 하에 오히려 더 큰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 좌익에 속한 사람들이 불합리한 사회구조의 질서를 변혁시킨 공이 있지만 친일 우익을 심판한다는 명목 하에 전쟁을 일으켜 더 많은 악을 저질렀습니다. 독재정권 때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공을 앞세워 통합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회 불의를 청산한다는 명목 하에 사회를 분열시켰습니다. ICCC에 속한 근본주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를 교리적으로 확고하게 한 공이 있지만 WCC의 혼합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 하에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 억울하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가치와 위치와 목적을 잃지 않아야합니다. 도로표지판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누워 있거나 잠을 자다가 사람이나 자동차가 지나가면 그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자동차가 언제 지나갈지 모르는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가 덥거나 날씨가 춥거나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첩첩산중에 있는 송전탑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미국에 베니힌 목사의 컨퍼런스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베니힌에 대해서는 능력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존경하지만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국 내에서 베니힌의 집회마다 쫓아다니면서 피켓을 들고 반대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통역을 하는 목사님을 통해서 왜 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해명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들과 싸우는데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여전히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⑤모든 사람과 화목해야한다고 했습니다 (18절).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한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수 없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화목하기를 애쓴다고 해서 화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의 호응이 있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화목하려면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화목하려는 욕구가 있어야하는데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해 화목하려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2:3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와 화목했습니다. 로마서5:10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눅2:14, 골1:20). 그리고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마5:9, 골3:15).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화평과 화목을 추구해야합니다 (갈5:22, 마5:9).
⑥원수를 갚지 말아야한다고 했습니다 (19절).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 갚는 일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진노하심에 맡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테 토폰 테 오르게’(δοτε τοπον τη οργη)인데, 우리 한글성경에는 장소나 기회나 권한 등을 의미하는 토폰(τοπον)이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이 원수를 갚을 기회를 드려야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범죄자를 우리가 직접 벌하는 것이 아니라 검경에 맡겨 그들이 법대로 심판하게 해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32:35에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능욕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여 원수를 갚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마10:26). 예수님도 자신의 원수들에 대해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갔습니다. 베드로전서2:23에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에 당연히 원수가 생기는데 자신이 가야할 길이 목적이지 그 원수를 보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가야 할 길에 이용되는 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⑦원수에게 긍휼을 베풀어야한다고 했습니다 (20절).
20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원수가 굶주리면 오히려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원수가 곤경에 처하면 오히려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수의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집에 있는 불씨가 꺼지면 생활에 여러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씨가 꺼지면 불씨를 담아올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이웃집에 가서 불씨가 있는 숯불을 빌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불씨를 빌리러 오는 자에게 불씨를 빌려주는 것은 친절한 행위로 간주되었고 불씨를 빌려온 사람은 불씨를 빌려 준 사람에게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불씨를 빌려주는 것은 그 원수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계기가 되게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수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는 것은 그로 하여금 후회와 회개와 은혜를 입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結言>
로마서는 구원에 대해서 다루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기본구원(칭의, 중생)과 건설구원(성화)과 완성된 구원(영화)이 있습니다. 건설구원은 개인의 죄성과 더불어 내적 싸움을 하여 제재하고 동시에 말씀을 선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12장은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개인 신앙생활에서 실천적인 부분을 다룬 장입니다. 이를 힘써 실천하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결코 상실되지 않는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