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로마서13:1-14
<題目> 사회생활에 대한 교훈
<序言>
12장부터는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실천적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2장에서는 주로 교회생활에 대한 부분을 다루었다면 본장은 사회생활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불가불 사회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교회생활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내용구조는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1-7절), 사랑을 행할 것에 대한 의무(8-10절),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생활(11-14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 (1-7절)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①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1절).
1절에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다스리는 원리를 내셨고 다스리는 자들을 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구속역사뿐 아니라 일반역사에도 관여하십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 대해 교만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왕위에서 쫓겨났고 회개하자 복귀되었습니다 (단4:30-33). 다니엘5:20-21에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고 했습니다. 다니엘7:1-14에 보면 다니엘이 본 환상이 나오는데 그 환상은 하나님이 당시 세속역사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환상이었습니다. 사자와 곰과 표범과 괴물이 차례로 나온 다음 인자 같은 이가 나와 심판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바벨론(Babylonia)과 메데바사(Persia)와 헬라(Greece)와 로마(Rome)가 차례로 나온 다음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내신 것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요19:10-11). 하나님은 권세자와 그들이 세운 법과 제도를 통해 불신사회를 다스리고 구속사역에 도움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고 하나님 백성들을 연단시키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계시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볼 때 상당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권세자는 하나님이 내셨다는 데 이의가 없으나 악한 권세자도 하나님이 내셨다는 데에는 논란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좁게 본다면 하나님은 선한 권세자를 냈고 악한 권세자는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권세자를 냈지만 자신들이 미혹되어 악한 권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넓게 본다면 악한 권세자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이 선한 권세자를 냈지만 스스로 미혹되어 악한 권세자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 악한 권세자도 구원운동에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권세와 제도도 선한 일을 위해 활용하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바로왕으로부터 호의를 얻어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민족을 환난에서 건지고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창47:1-12). 바울도 로마의 가이사황제가 만든 법에 의해 구명되었고 로마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행28:16-28). 비록 악한 권세자라도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잠언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②모든 권세에 두려움으로 복종해야한다고 했습니다 (1-4, 6-7절).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2절에는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했습니다. 1절에 대한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계속 반대하여 거스리는 자는 심판을 자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은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어떤 심판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인지 현세적인 심판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3-4절의 내용과 연계해 보면 후자가 맞을 것 같습니다. 권세를 거스리면 세상의 권세자들이 가진 권세에 의해 법적 제재와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권세에 복종해야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이 악한 정권이나 체제나 제도를 정당화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신 목적과 허락하신 한계를 넘어 악행을 행하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배치되는 요구를 할 때는 복종할 의무를 가지지 않습니다 (행4:19-20, 5:29). 권세자의 요구가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될 때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합니다. 사도행전4:19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고 (행전5:29), 마태복음10:28에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요구가 있을 때 거절했습니다 (단1:8, 3:18). 그렇지만 악한 권세자라해도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요구할 때는 복종해야합니다. 그것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악한 권세자와 법과 제도도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섭리하는 통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과거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와 클라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때문에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 이달리야에서 온 유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고린도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행18:1-2).
3-4절에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이 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권세자가 된 자들은 악행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선행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선행을 하고 또한 선을 행하는 자에게 칭찬과 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에 따른 벌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라 보응을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그들을 세웠고 그들에게 권세(칼)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칼'(μαχαιρα)은 로마에서 사형을 시킬 때 사용하는 단검을 가리킵니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나 바사왕 고레스 등 세상 왕들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렘25:9, 27:6, 사44:28). 그래서 세상 권세자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난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복종을 해서 그 은혜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과 다니엘과 느헤미야와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바울 등이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전서2:13-14에도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가운데 젤롯파(열심당원)는 로마제국에 무력항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제국에 대해 기독청년들이 무력항쟁을 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남미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우리나라 기독교의 진보적인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무력항쟁을 했습니다.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권세자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하고 통치하고 핍박하는 경우 혹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경우에는 그들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무력저항이 독재정권과 부패정권이 무너지는 데에 일조를 했다는 것에 대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있을 때 저항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만일 저항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피의 보복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정권의 요구에 거부하고 저항하더라도 비폭력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잘못 한 것이 있으면 저항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J. Calvin).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주된 목표는 악한 정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속사역에 대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정권을 굴복시키고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갈멜산 대결을 했고 우상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권으로부터 피의 보복이 오려 하자 실족하여 죽기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왕상19:11-18). 세례요한이 헤롯왕을 정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구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실족하여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할 일은 정권을 심판하고 의로운 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리스도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11:2-6). 우리는 구원운동을 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옳습니다. 예레미야29:7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6-7절에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권세자를 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권세자를 세워 그들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 권세자들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듭니다. 국가 공동체가 잘 운영되어 국민 전체가 잘 살아가게 하기 위해 조세 제도를 만듭니다. 그래서 개인이 직접 국방, 토목, 방범, 교육, 복지 등을 하지 못하지만 세금을 거둬들여 그 돈으로 그런 것들을 하므로 각 개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내는 것은 국민의 의무입니다. 물론 그 세금이 항상 옳게 사용되는 것만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권세자를 세워 법과 제도를 통해 세상을 다스려나간다는 큰 원칙에 의해 권세자들을 존중해야하고 납세의 의무를 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22:21에서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권세자들이 세금을 잘못 사용할 경우 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독재정권 때 국영방송인 KBS이 독재정권을 선전하는 데만 사용한다고 해서 시청료를 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적십자 회비를 정치자금으로 이용한다고 해서 적십자 회비를 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요즘 교회 세금에 대한 논란도 많습니다. 저는 교회는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목회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을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③복종은 양심을 따른 복종이어야한다고 했습니다 (5절).
5절에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권세자를 존중하고 그들이 세운 법과 제도를 복종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복종이 하나님의 진노의 방편인 권세자들이나 법이나 제도가 가하는 제재 혹은 보복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양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행23:1, 24:). 원래 양심은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벧전3:2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양심을 따라 살려하면 하나님 앞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옳은 것은 행할 수 있습니다. 그 양심을 따라 복종하라는 것은 권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복종하지 말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방편, 하나님의 통치와 사역에 순종하는 양심으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대로 한다면 믿음으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은 국가 권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직장 권세와 교회 권세와 가정 권세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디도서2:9에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고 했습니다 (딤전6:1-2). 베드로전서2:18에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 굴에서 사울을 죽이지 않은 사건과 길보아 전쟁에서 사울을 죽인 아말렉 소년에 대한 처벌 사건을 참고할 필요가 있고 (삼상24:2-6, 삼하5:12), 사무엘 선지자와 나단 선지자가 사울왕과 다윗왕이 잘못했을 때 지적한 방법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상15:17-24, 삼하12:7-15).
2. 사랑을 행할 것에 대한 의무 (8-10절)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절대적인 의무입니다. 8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문장을 보면 ‘메듀이 메덴 오페이레테, 에이 메 토 아가판 알레루스’(Μηδευι μηδεν οφειλετε, ει μη το αγαπαν αλληλους)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에 해당하는 구문 ‘에이 메 토 아가판 알레루스’(ει μη το αγαπαν αλληλους)에는 '빚'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라는 구문이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구문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상으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구문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구문이 뒤에 있어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이 더 강조된 구문입니다. 이 문장이 나타내려는 의도는 물질적인 빚을 진 사람은 반드시 빚을 갚아야하는 것처럼 사랑의 빚을 진 사람도 반드시 사랑의 빚을 갚아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고, 10절에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그 규범을 정해주신 것으로서 613가지가 있습니다. 그 율법은 절반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고, 절반은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할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율법의 613가지를 간추린 요긴한 것인 10가지 계명입니다. 그 계명의 절반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나머지 절반은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사람에 대한 계명은 9절에 나온 것처럼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는 등입니다. 그 계명들은 실천적 조항들인데 그것들을 주신 목적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0:27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22:37-40, 막12:30-31).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요한복음13: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누가복음10:25-37에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하니 예수님이 ‘율법에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옳다고 하면서 ‘그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율법교사가 이웃이 누구인지 묻자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버려둔 채로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한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는데 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싸매고 자기가 타고 오던 짐승(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 자기 갈 길을 가면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일 돈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와서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고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한 의도는 궁극적으로 당시 유대교는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없고 자신만이 구원자로서 구원과 영생을 주는 자임을 계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교훈하는데 있습니다.
첫째, 이웃이 누구인지 알게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29절에 보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 비유는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난 자는 유대인으로 추측되고 강도만난 자를 치료해준 자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에 속한 자들로서 정치적 이유에 의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하지 않고 그리심산에서 예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은 B.C.722년에 앗수르(Assyria)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된 이후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이주해온 이방인들과 혼혈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남유다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율법대로 예루살렘 중앙성전에서 예배하고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한 자들로 여겨 이방인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하여 교제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같이 먹지 않았고 심지어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의 대강령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이웃’을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에만 국한하여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한 율법교사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신은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는 이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짜 사랑해야할 이웃은 그들이 증오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지적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36절에 보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이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이야기 흐름의 자체에만 몰두한다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에게 이웃은 누구이겠느냐’고 물었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묻지 않고 ‘강도만난 자에게 이웃은 누구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한 목적이 ‘유대인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사랑해야할 이웃은 유대인이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또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37절에 보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애둘러 대답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혐오하는 사마리아인을 사랑해야할 이웃으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을 보면 사마리아인 비유는 유대인이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이웃은 그들이 적대시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교훈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계명)의 대강령인 ‘이웃사랑’에서 ‘이웃’은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임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은 우리가 용서할 수 없고 긍휼을 베풀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자인 것입니다 (마5:43-44).
둘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게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고 나서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고 (36절),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37절). 강도만난 자에게 선을 베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37절에 보면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선을 베푼 사마리아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신 것이 일차적으로 ‘이웃’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지만 이차적으로 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해야한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보면 강도만난 자는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해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인도 다른 곳으로 피해갔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제사를 주관하는 지도자입니다. 레위인들도 성전과 예물을 관리를 맡은 자입니다 (민18:1-32). 그들은 하나님께 봉사하고 백성들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도 자신들이 그와 같은 강도를 만나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멀리 피하여 돌아갔습니다. 혹 그와 같이 강도를 만나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이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 싫어서 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 자신이 식물로 가졌을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싸매주었습니다. 주막으로 데려다 밤새 돌봐주고 아침 일찍 자기 일을 보기 위해 떠나면서도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돌봐달라고 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과 수고 다해 치료해준 것이며 끝까지 돌봐준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처럼 돌본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가 자기를 이웃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이웃의 대상은 자기를 원수처럼 대하는 자들도 포함할 뿐 아니라 그들이 위험과 곤란에 처해있을 때 자기 몸처럼 끝까지 도와주어야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마리아인같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이웃으로 느낄 만큼 자기 몸처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야합니다 (요일3:17, 4:7-8).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절대적인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른교리를 가진 것으로만 만족하고 늘 교조적인 논쟁만하고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일서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현장에서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가운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부터 실천해야합니다. 그가 비록 우리에게 상처를 준 자라도 그에게 실천해야합니다. 우리 자신 입장에서가 아닌 그의 입장에서 도와야합니다. 요한일서4:9-11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된 우리를 우리 입장을 헤아리고 친히 희생적으로 사랑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우린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마땅히 실천을 통해 빚을 갚아야합니다.
3.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생활 (11-14절)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것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중생(重生)을 가리킬 때도 있고, 성화(聖化)를 가리킬 때도 있고, 영화(榮華)를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영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화의 는 주의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중생한 다음에 성화의 과정을 거쳐 주의 강림할 때에 영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의 때인 주의 재림이 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했습니다. 밤이 이미 많이 지났고 낮이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밤은 이 세상의 때를 말하고, 낮은 주의 재림 이후에 들어갈 천국의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결단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밤이 지나고 낮이 가까웠으니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밤이 지나고 낮이 이르면 잠옷을 벗고 활동할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 주의 재림으로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때가 이르렀으니 밤에 입던 옷을 벗고 낮에 입을 옷으로 갈아입어야합니다.
12절 하반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옷을 입자는 말인데, 빛의 옷을 '갑옷'으로 표현했습니다. 갑옷은 전쟁에 전투를 하러 가는 용사가 입는 옷입니다. 쿰란문서에 의하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어둠의 사자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한 부류는 빛의 왕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말세에는 이들 두 세력이 큰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어둠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의 전쟁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런 현실적인 전쟁보다는 개인의 내적 전쟁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바울은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의 일을 하는 것을 전투로 본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위한 일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형상을 이루어나가는 일을 전투로 본 것입니다. 그 인식과 생활의 전환은 전투와 같이 힘든 일이며, 그 일에 성공을 가져오려면 전투에 임하는 것 같은 비장한 결단이 필요하며, 그 일을 위해서는 무장을 해야 하는 것처럼 철저한 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6:13-17에는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전신갑주(全身甲冑)의 무장은 당시 로마 군인이 전투에 임할 때 무장한 복장을 염두에 두고 말한 그림입니다. 구원의 투구, 의의 호심경(흉배), 진리의 허리 띠,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악한 영들과 그들이 앞세우는 사람과 환경입니다. 베드로전서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엡6:11-12). 또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입니다. 베드로전서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롬7:15-25).
그 영적 전투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대적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잘 압니다. 이순신은 열악한 우리 수군(水軍)을 가지고도 거대한 일본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명량해전에서는 불과 12척으로 133척의 왜 선단을 물리쳤습니다. 이순신은 죽을 때까지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질 싸움은 하지 않고 이길 싸움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분석하여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판단되면 왕의 명령이 떨어져도 싸우지 않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판단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가서 싸웁니다. 원균 장군과 다른 점입니다.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판단과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군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군사관학교 임원빈 교수는 '전쟁은 우연이 아니라 과학이다'라고 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한 마귀의 공격루트 분석과 우리 자신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도 잘 간파해야합니다. 마귀가 얼마나 우리를 철저히 분석하는지 우리가 가장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부분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강점은 믿음이었는데 아브라함을 넘어뜨린 부분은 팔레스틴에 기근이 임했을 때 식량문제 때문에 애굽에 내려가게 하는 것이었고 바로왕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것이 강점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아우성칠 때 분노하게 하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율법을 성실히 준행하는 것이 강점이었는데 유부녀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성적 유혹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가 강점이었는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하고 저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개인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공략하는지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13-14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둠의 일을 버리고 낮의 일을 행해야합니다. 어둠의 일은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등입니다. 그것들은 정욕을 위한 것으로서 육신의 일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죄악된 삶의 경향들입니다. '정욕'에 해당하는 에피뒤미아(επιθυμια)는 '위에'(επι)와 '욕망'(θυμια)이 합쳐진 단어로서 과도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거나 추구하거나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위한 행위들은 당장만 생각하는 행동들입니다. 개인적이든 일반적이든 당장 종말과 내세가 가까운 것을 인지한 사람은 내세를 준비하게 됩니다.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옷을 입습니다. 빛의 옷을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나가는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엡4:13). 의와 진리와 거룩의 성품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엡4:24, 골3:10).
<結言>
우리는 말세에 우리의 영적 전쟁을 위해 무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를 잘 간파하고 대적해야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마귀의 계획을 헛된 데로 돌리기 위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철저히 분석해야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뜻입니다.